‘고도…’ 40년, ‘산울림’ 40년, ‘임영웅’ 40년
‘고도…’ 40년, ‘산울림’ 40년, ‘임영웅’ 40년
  • 최재천 변호사
  • 승인 2009.11.03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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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시사큐비즘]
-고독한 예술가에게 바치는 오마주(hommage)

나무 한 그루뿐인 어느 시골길에서, ‘고도(Godot)’라는 인물과의 약속을 위해 만난 블라디미르(Vladimir)와 에스트라공(Estragon)의 한없이 지루한 기다림, 기다림.
그 과정에서 잠시 스쳐가는 포조(Pozzo)와 럭키(Lucky)라는 기괴한 인물들, 결코 실현되지 않는 약속, 그래도 반복되는 기다림, 기다림, 기다림...

도대체 무엇을, 누구를 기다리는 걸까. 요약하기 힘든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En Attendant Godot)>의 내용이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희망과 절망을 반복해가며 ‘고도’를 기다리듯, 40년 동안이나 관객들은 ‘고도’를 기다린다.

그래도 연극을 사랑해 온 한국의 관객들은 행복하다. 매년 가을‧겨울 시즌이면 한국의 관객들은 극단 산울림의 소극장에서 임영웅 선생 연출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만난다. ‘고도’를 기다리는 관객들에게 임영웅 선생은 끊임없이 ‘고도’를 선물했다. 척박한 한국의 풍토에서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 40년 동안이나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임영웅 선생은 1969년 12월, 지금은 헐린 한국일보 사옥 꼭대기층 소극장 개관기념으로 ‘고도를 기다리며’를 올렸다. 초연을 일주일 앞 두고 연습에 용맹정진하던 날, 때마침 작가인 사뮤엘 베케트(S. Beckett)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는 낭보가 들려왔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예매에서 좌석이 매진됐다. 베케트의 노벨상 수상은 임영웅 선생에게 행운이었을까. 아니면 구속이었을까. 그렇다. 차라리 구속이었을런지 모른다.

나는 그때 일곱 살이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나 40대 후반이 됐다. 여러 차례 기회를 놓치다 5년 전 처음 ‘고도’를 보게 됐다. 그리곤 연례행사가 됐다.

한국의 연극은 ‘고도’와 함께 한 해가 오고, ‘고도’와 함께 한 해가 간다. 마치 계절의 순환만큼이나 어김없는 순환이다. 고도는 한국 예술계의 대표적인 연중행사가 됐다. 어느 예술 행사가 40년을 한 해도 빠짐없이, 적자투성이에서 단 한 해도 헤어나지 못하면서 어떻게 계속될 수 있을까. 차라리 기적이다.

그래서 ‘고도’ 40년이야말로 임영웅 선생의 억지다. 불문학자로 작품의 번역자이자, 반려자이자 산울림 대표인 오증자 선생의 고집이다. 오증자 선생이 곧 임영웅 선생이고, 임영웅 선생이 곧 산울림이고, 산울림이 곧 ‘고도’다. 그래서 ‘고도’는 한국연극사가 됐고, 한국예술사가 됐고, 한국현대사가 됐다.

2009년 연극평론가 유민영은 “극단 산울림의 「고도…」가 연극사에 던진 의미”를 네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한국연극을 인문주의에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한 것’이라고 했다.
둘째, ‘임영웅의 작업이 한국 연극 수준을 크게 향상시킴과 동시에 세계 연극과 보조를 맞추어가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라 했다.
셋째, ‘우리 연출이 토착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경우’라고 했다. 그동안 우리 연극인들이 서구의 연출기법을 전수 받아 그것을 모방하는데 급급했었는데, 이제는 그것을 우리식으로 완전히 소화하여 작품을 완성해내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1930년대 초 최초의 전문 연출가 홍해성 이후 반세기만에 도달한 연출 미학의 큰 진전’인 것으로 평가했다.
넷째, ‘명배우를 만들어내는 용광로가 된 점’을 마지막으로 들었다.

결론적으로 “작품 ‘고도’가 비록 극단 산울림이 40여년동안 무대에 올린 여러 가지 레퍼토리들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20여 회의 리메이크 작업은 연출 연기 미학을 근대 연극술로부터 현대 연극술로 수직상승 시켰다는 점에서 한국 연극 진전에 획기적인 기여를 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라고 했다.

이런 의미를 갖는 ‘고도’ 40년, ‘산울림’ 40년이다. ‘고도’를 통해 극단 산울림이 창단됐고, 1985년 ‘고도’로 전용극장 소극장 산울림이 문을 열었다. 물론 임영웅 선생의 연출은 학생 시절인 1955년에 시작됐지만, 임영웅 선생에게도 의미 있는 40년이다. 그 40년, 강산이 변해도 네 번 변했을 40년 동안 고도는 무려 20번이나 옷을 바꿔 입었다. 하지만 대사는 단 한 줄도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고도’가 이 시대의 고전이 될 수 있었던 것일까.

지난 9월 의정부 예술의전당 국제회의장에서는 '고도‘ 한국 초연 40주년 기념 세미나가 열렸다. 지난 8월에는 일본 SCOT 여름 시즌 초청 공연이 있었다. 산울림은 스스로를 기념하여 극단 창단 40주년 기념공연 시리즈를 이어갔다. 이것이 전부였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임영웅 선생에 대한 오마주요, 예의였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산울림에 대한 예의였다. 기념이었다.

부끄럽지만 이 얼마나 초라하고 서글픈 일인가. 산울림의 ‘고도’는, 임영웅 선생의 ‘고도’는 이미 반도의 땅에 머무르지 않는다. 세계적인 평론가 마틴 에슬린은 “연출과 연기에서 산울림의 공연은 베케트의 극을 한층 전진시킨 무대였다”고 했다. 부조리극의 본 고장인 아일랜드의 베케트 축제에서까지 초청받아 인정받기도 했다. 이런 ‘고도’를, 이런 임영웅 선생을, 이런 산울림의 40주년을 우리는 지금 어떻게 기념하고 있는가.

제대로 된 문화행사 하나 없다. 제대로 된 기념행사 하나 없다. 제대로 된 학술제 하나 없다. 연극인 출신 문화부장관을 모시고 있지만 산울림은 ‘강’이 아니라서 ‘산’이라서인지 관심밖이다. 신자유주의와 금융위기에 절절히 찌들었기 때문일까. 기업들의 메세나(mecenat)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임영웅 선생이 외로울 리 없고, 산울림 또한 결코 외로울 리 없을 테지만 말이다.

 

▲ 임영웅 연출의 '고도를 기다리며' <사진출처 = 극단 산울림 홈페이지>
임영웅 선생도 ‘고도’를 기다릴까. 임영웅 선생도 관객들처럼, 우리들처럼 ‘고도’를 기다릴지 모른다. 임영웅 선생이 기다리는 ‘고도’는 도대체 무엇일까. 누구일까. 언제쯤일까.

가장 가까이서 이해했을 임영웅‧오증자 선생의 아들 임수현 교수의 글을 잠시 빌어오자.
“<고도>의 기다림은, ‘고도’라는 대상 자체가 그렇듯이, 근거 없는 낙관도, 손쉬운 비관도 허용하지 않는다. 웃음과 눈물, 긍정과 부정, 진지함과 우스꽝스러움, 성스러움과 속됨이 엇갈리는 그 지루한 기다림의 어디쯤에선가, 언제쯤에선가, 그들은, 우리는 ‘고도’를 만날 수 있거나, 혹은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고고와 디디는 그렇게 50년을 기다려 왔다. 그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고도’라는 빈 자리를 채우려 애쓴다. 다시 50년이 지나도, 그들은 그 벌판에 그대로 서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때, 우리는 이미 그들이다.”

임영웅 선생도 그러할까. 앞으로 또 다른 40년이 지나도 우리는 벌판에 서서 ‘고도’를 기다릴 수 있을까. 여전히 우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을 만날 수 있을까. 푸조와 럭키를 사랑할 수 있을까. 그때도 우리는 매년 가을‧겨울 시즌의 고도를 기다릴 수 있을까. 지금처럼 임영웅 선생의 ‘고도’를, 산울림의 ‘고도’를 만날 수 있을까.

‘고도’를 사랑하는, 임영웅 선생과 오증자 선생을 한없이 존경하는 한 관객이 드리는 오마주다. 11월 1일 오늘은 40주년을 맞이한 극단 산울림의 ‘고도를 기다리며’ 40주년 공연이 막을 내리는 날이다. 다함께 박수를 보내드리자.

 

   
법무법인 한강 대표변호사, 김대중평화센터 고문으로, 연세대 의과대학 외래교수, 이화여대 로스쿨, 영남대 로스쿨, 전남대 로스쿨, 광운대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며, 이번 학기는 이화여대 법대에서 2,3,4학년을 대상으로 '현대사회와 법'이라는 교양과목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홈페이지는 www.e-sotong.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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