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화선 제일주의에 빠져 있다는 지적에 대해
간화선 제일주의에 빠져 있다는 지적에 대해
  • 지리산 야단법석
  • 승인 2009.08.18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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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지리산 야단법석 - 혜국 스님 강의

간화선 제일주의에 빠져 있다는 지적에 대하여 한 말씀 드리고자 한다.

혜국 스님

많이 힘들었던 시절 금강경을 배울 때 일이다. 6조 혜능스님은 應無所住 以生其心이니라 하는 대목에서 바로 깨달았다는데 나는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머무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 수 있을까.
그리고 머무르는 바 없이 내는 마음이 과연 어떤 세계일까.
도저히 알 수가 없어서 진도가 나아가지를 못하였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金剛經 四句偈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는 구절에 이르러선 더욱더 이해할 수가 없어서 애를 먹었다.

여기서 말하는 相이란 어디까지를 相이라고 하는 건지. 六根 六塵 六識 18계에서 눈에 보이는 모든 세계와 귀로 듣는 모든 소리 그리고 생각 일어나는 모든 의식이 모두 相이라면 그 相이 생기기 이전세계 즉 생각 일어나기 이전세계가 어떤 세계일까 전혀 이해가 안 되었던 것이다. 미세한 생각까지도 相이라면 非相은 한 생각 일어나기 이전세계일 텐데 한 생각 일어나기 이전 세계가 과연 있기는 있는 건가 결국 모른 채로 넘어갔던 기억이 새롭다.

그 후 선방에 가서 화두를 받고 참선을 시작한 다음에도 힘들고 안 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선원에서는 한 생각 일어나기 이전자리를 話頭라고 한다. 그런데 화두가 般若空性을 바로 일러준 일구라는 걸 모르고 잘못 생각하여 소소영영한 주인공이 따로 있는 걸로 잘못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구하는 마음이 앞서게 되고 깨달아야 할 실체가 있는 걸로 착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푹 쉬지를 못하고 빨리 깨닫겠다는 속효심 때문에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모른다.

참선할 때 의정이 독로하여 덜어내고 덜어내서 철저한 無에 도달하게 되면 곧 우주전체가 된다 [體露金風]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그런데 이 생각마저 자취를 없애고자 조사스님들은 활구로 마무리 하셨으니 그 은혜 작지 않다 하겠다.

그렇게 방황하는 시간이 흐른 다음 성철스님께 간화선을 익힐 때다. 言語道斷 心行處滅의 세계는 곧바로 참구로 들어가야지 화두란 생각으로 헤아려선 깨달을 수 없는 세계임을 배웠다. 즉 한 생각 일어나기 이전 세계가 바로 看話禪의 話頭임을 알게 되었다. 말길이 끊어지고 마음길이 끊어진 화두야 말로 金剛經 四句偈에서 말하는 若見 諸相 非相임을 믿게 되었다. 화두상에 의단이 독로하면 어떤 생각도 머무를 수 없다는 믿음에 환희심이 일어났다.

화두참구란 有無 양변을 여읜 般若空性의 세계인 것이다. 이렇게 답답한 상태에서 祖師스님들의 活句는 사람을 살리는 길이요 숨통이 트이는 길이라는 믿음이 생긴 것이다. 如何是祖師西來意닛고 庭前栢樹子니라. 생각의 길이 끊기고 말길이 끊어진 화두. 다만 모를 뿐이다. 이런 간화선이 대혜스님대에 와서 새로 생겨난 수행법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간혹 있는데 그렇지 않다.

대혜스님(1089-1163)대에 와서 간화선이 정형화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면 부처님의 가르침인 一切有情無情 皆有佛性으로 시작하여 초조달마에서 6조 이래로 내려오는 祖師禪 그리고 看話禪에 이르기까지 내용은 꼭 같다. 그 당시 사람들이 근기 따라 가르치는 언어가 다를 뿐 그 뜻은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사상적인 변천사일 뿐 그 근본법은 오직 般若空性으로서 말길이 끊어진 도리, 생각의 길이 끊어진, 오직 마음이 부처임을 보여준 길임을 알 수 있다.

간화선은 중도연기법을 깨달아 반야공성을 온전히 전해 내려오는 수행법이기에 요즈음처럼 논리적으로 또는 알음알이로 헤아리는 세상에서 볼 때 최상승법이요 역대조사가 이미 고증하신 너무나 소중한 수행법이다. 우리 조계종사에 큰 보배라는 생각이다. 만일 부처님 가르침인 반야공성을 깨닫는 간화선이 아니고 따로 간화선 제일이라는 생각을 한다면 이것은 큰 병중에 하나다.

이런 일은 간화선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고 간화선을 잘못 받아들이는 수행자들의 문제다. 이 병폐는 뒤에 다시 거론하기로 하고 간화선의 역사성을 좀 더 짚고 넘어 가고자 한다.
부처님께서 한평생 가르치신 법이 연기법이요 中道라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하는 일이다. 中道緣起란 有無 양변을 여읜 길이다. 그 이치를 초조 달마는 확연무성이라 하셨고 2조를 거쳐 3조 승찬대사는 信心銘에서 至道無難 唯嫌揀擇 但莫憎愛 洞然明白 이라고 하셨다. 뒤에 조주스님(778-897)은 3조 승찬대사의 信心銘에서 5則이나 되는 古則을 공안으로 들어 보이고 있다. 언어 표현방식이 다를 뿐 말과 생각이 끊어진 도리를 이미 3조 승찬대사 당시에도 쓰고 있었다는 얘기다.

4조 안심법문을 지나 5조 홍인대사에 이르러서는 생각 일어나기 이전세계를 구체적인 선문답 형식으로 사용하기 시작한다. “여기 한 채의 집이 있다. 그 속에 온갖 오물이 가득하다. 이 어떠한 물건인가.” 거듭 말씀하시기를, “모든 오물을 깨끗이 씻어내어 한 물건도 없을 때 이 무슨 물건인가” 간화선의 화두와 다를 게 없는 문답이다. 내가 본래부처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無明이다. 내가 본래부처라는 한마디에 부처와 나사이의 간격이 몰록 없어지면 무명이란 본래 실체가 없었다는 사실을 바로 깨닫게 된다. 그러나 내가 부처라니 정말 그런가 하고 한 점 의혹이 남아 있다면 그 자리는 본래성불도리가 아니고 내가 부처라는 생각만 하나 더 보태는 격이다. 그래서 6조 혜능스님이 돈오사상을 강조하며 선풍이 자리 잡게 되는데, 그 내용이 六祖檀經에 자세히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꾸준히 이어져 내려오면서 6조 문하에 강호(강서와 호남)제현이라는 말이 유행될 정도로 강서의 馬祖 호남의 石頭로 이어지게 된다. 그중에 마조스님(709-788)의 中道와 平常心을 살펴보려고 한다. 마조스님은 中道를 自性淸淨이라고 가르치셨으며 그 가운데서 平常心是道를 많이 강조하셨다.
“무엇이 평상심이냐? 조작이 없고 시비가 끊어졌으며 취하고 버림이 없으며 斷常이 없고 凡聖이 없는 것이다.” 라고 평상심을 분명히 정리해 놓았다.

그래서 看話禪에서는 話頭一念이 되어 화두를 타파해야 평상심을 쓸 줄 안다고 한다.
言下에 大悟하여 本來成佛 도리를 깨달으면 祖師禪이요 언하에 깨닫지 못하면 화두를 참구해야하니 看話禪이다. 그래서 북종선에서는 自性淸淨中에 淸淨에 중점을 두기 때문에 닦는 것을 강조하여 漸修頓悟라고 했고 반면 남종선에서는 自性淸淨中에 淸淨을 本覺으로 보고 本覺에 중점을 두기 까닭에 頓悟頓修라고 하였다. 法 그 자체에는 頓이니 漸이니 본래 없다는 얘기다.

이렇게 면면이 이어져 내려와서 백장을 거쳐 황벽의 전심법요, 임제의 無位眞人 그리고 無字화두로 유명한 조주를 거쳐 벽암록의 저자인 원오스님은 제자인 대혜에게 임제 정종기를 내리셨다. 그 일부를 옮겨보면
“삼현 ․ 삼요와 사료간(四料簡) 사빈주(四賓主)와 금강왕의 보검과 땅에 웅크린 사자〔踞地師子〕와 한 할이 한 할의 작용을 하지 못함〔一喝不作一喝用〕과 고기찾는 장대 . 그림자풀〔探竿影草과〕 한 할에 손과 주인이 나뉨〔一喝分貧主〕과 비춤과 작용이 동시에 행하여짐〔照用一時行〕등의 허다하게 얽힌 실오라기들을 많은 학자들이 알음알이를 따라 주해를 내리는데, ‘나의 왕궁 창고 속에는 이러한 칼이 없다’ 함을 결코 몰랐다 하리라. 막상 염롱해 드러내 보이면 보는 자들은 그저 눈만 껌벅거릴 뿐이다. 모름지기 저 으뜸가는 근기라면 계합 ․ 증득하고 시험 ․ 인정함에 있어서 정면으로 또는 측면으로 제접하여 본분수단을 쓰거늘 어찌 방편과 지위 점차를 빌리겠는가.”하셨으며

이 일에 대해 성철스님은 한국 불교의 법맥에서 말씀하시기를
“이는 원오가 대혜에게 수시한 유명한 임제 정종기의 한구절로서 종문 만세의 궤범이다. 삼현 삼요와 照用一時등의 全機大用도 눈 속에 모래를 뿌림이요 平地落節이거늘 이것을 교가에서 주석을 붙이듯 알음알이 따라 해석하면 가소로울 뿐만 아니라 본분종사들이 금기하는 것이다”라고 절절이 밝혀 놓으셨다.
이어서 원오스님(1063-1135)은 文長老에게 보내는 글에 다음과 같이 거듭 경책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원오心要에 나오는 글을 그대로 옮겨 본다.
『부처와 조사는 모두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했는데 모두 투철하게 깨달아서 마치 두 거울이 서로 비추듯 말이나 현상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격식과 헤아림을 멀리 초월하여 화살과 칼끝이 서로 마주 버티듯 애당초 다른 인연이 없어야 도의 오묘함을 전수받을 수 있었습니다.
알음알이가 끊겨 사유를 벗어나고 情識을 뛰어넘어 호호탕탕하고 자유자재한 곳에 도달하였습니다.(중략)
지난날 스승 5조 법연스님을 뵙고 내 공부를 몽땅 털어 놓았는데 그것은 모두 보고 들은 기연의 어구들로서 모두 불법과 심성의 현묘함에 대해서였습니다.
그러나 노스님은 “有句와 無句는 등넝쿨이 나무에 의지한 것과 같다”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온갖 재주를 다 부려 보았고 다음은 논리를 세워 열심히 설명하였으며 끝에 가서는 해보지 않은 게 없었습니다.
그때마다 노스님은 꺼내는 족족 간략히 물리치셨으니 이윽고 나도 몰래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러나 끝내 들어갈 수 없어 재삼 이끌어주기를 간구하였더니 “네가 견해로 헤아리는 것이 다하여 일시에 모두 없어져 버리면 자연 깨달으리라” (중략)
그 뒤 2년쯤 지나 ‘소옥아 하고 자주 부른 것은 원래 딴 일이 아니라......’ 한 구절에서 통 밑바닥이 빠진듯하여 스승이 전에 보여 주셨던 것이
참다운 약석이었음을 비로소 보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셨으니 옛 스님의 자비가 이와 같았다.

아울러 중봉스님은 스승을 생각하며 대중들에게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선사 고봉화상은 항상 학인에게 이르기를
“오직 본참공안을 가슴속 깊이 간직하고 행주좌와 어느 때든 이러히 참구하라. 궁구하여 힘이 미치지 못하고 생각이 머무를 수 없는 곳에 이르러 문득 타파하여 벗어나면 바야흐로 성불한지 이미 오래임을 알 것이다. 이 한 도리는 이것이 기왕의 모든 불조가 생을 요달하고 죽음에서 벗어나는데 이미 시험하신 묘방이다. 오직 귀한 것은 믿고 의심하지 않는 것뿐이니 오래오래 퇴전하지만 않으면 상응을 얻지 못할 자 없느니라. 화두를 들고 공부지어감에 첫째 입각처가 온당하여야 깨침도 친절하니라. 설사 금생에 깨치지 못하더라도 다만 신심만 퇴전하지 않으면 누구나 다 깨침을 얻을 것이다.” 라고 하셨다.

그뿐 아니라 근세의 서산대사 역시 선교결에서 간화선의 수승함을 절절이 밝혀 놓으셨다. 또한 근래의 성철스님은 백일법문에서 “自性이 空했기에 三界가 唯心이다. 삼계유심이란 自性淸淨心을 말함인데 一切萬法이 모두 空하여 雙遮雙照하며 眞空妙有라 이를 일러 마음이라 하고, 中道라고 한다.
앞에서 선도 취하지 않고 깨끗하고 더러움도 취하지 않으며 양변을 초월한 것이 마음이라 했다. 그래서 삼라만상이 一法之所印으로 自性淸淨을 빼고서는 하나도 성립될게 없다.”고 힘주어 말씀하셨다.
하나하나 열거하기가 어려운 일이지만 지금까지 부처님대로부터 근래까지 간화선의 흐름을 대충 짚어 봤다. 결국 법은 中道緣起(言語道斷 心行處滅의 도리)를 달리 표현 할뿐 그 근본 뜻은 달라진 게 없다는 결론이다. 결국 알음알이에 속지 않고 수행자로 하여금 正路를 걷게 하기위한 노파심으로 간화선을 주창하신 것이다.

끝으로 대혜스님의 말씀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有에 집착하지 않으면 無에 집착하고 양쪽 다 집착하지 않으면 有와 無 중간에서 헤아려 분별한다. 비록 이 병폐를 알았다 하더라도 또 다시 有도 아니고 無도 아닌 곳에 집착하고 만다. 四句百非를 훌쩍 떠나 일도양단하고 다시는 전후 좌후를 생각지 말고 千聖의 정수리를 끊어 버려라.”
얼마나 알음알이에 많이 속았으면 대혜스님은 書狀에서 四句百非를 훌쩍 벗어나라고 저리도 간절히 말씀하셨을까. 이와 같이 생각 끊어진 자리는 결코 생각으로서는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자비심으로 古則을 들어 보이고 祖師關을 설치해 놓은 것이다.

이러한 간화선이 만약 우리나라에는 없고 다른 나라에만 전해 내려오고 있다면 그야말로 목숨 걸고 배워 와야 할 일이다. 간화선이 세계에서 우리나라에 올곧게 전해 내려온다는 게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다만 이러한 간화선이 갈수록 개인주의가 되어 자비심이 결여되고 대비원력이 모자라다보니 좌선 중에 졸음과 망상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아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일부이긴 하지만 中道緣起 즉 般若空性이 아닌 무언가 소소영영한 한 물건이 각자 따로 있는 걸로 착각하는 아트만 사상은 빨리 고쳐져야 할 시급한 일이다. 이러한 병폐에 대하여 같이 걱정하고 논의해보고자 이 자리에 동참했다.

아울러 요즈음 간화선을 수행하는 수좌들이 대비원력이 부족하고 언행이 거칠며 少欲知足이 안 된다는 지적에 대하여 같이 논의 해보고자 한다. 대비원력이란 공심에서 일어난다. 현대사회는 그 어느 단체를 막론하고 개인주의가 만연되어 있다. 선원 역시 공심이 적어지다보니 자비와 발심이 모자란 게 사실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대략이나마 그 원인을 살펴보자
비구 대처 분규로 인한 정화가 외적으로나마 마무리 된 게 1962년도였다.
그 후유증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 당시에는 우리나라에 선방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일제 식민지시대 이래로 정화 때까지 선방이 없어서 수좌들이 객으로 얹혀살았다고 한다. 그 어른스님들 생각에는 선방만 만들어지고 하루3끼 배만 곯지 않으면 도인들이 마구 쏟아져 나올 것으로 알았다고 한다. 선방수좌들 숫자가 워낙 적고 선원마저 없다보니 선풍을 진작시키려고 하루 8시간만 앉아 정진하면 밥 먹을 자격이 있다고 적극 권장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만큼 수행풍토가 열악하고 간화선 수행자가 귀했기에 어떻게 해서라도 선방을 지으려고 애를 쓰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 어른들이 인생을 바쳐 지어놓은 선방이나 의식주 해결이 지금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주어지는 일상사가 되었다. 그래서 선방에서 정진에 매진할 수 있게 해준 고마움이나 선원에 대한 진심어린 원력이 우러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선방생활이 활발발하게 신심과 생기가 도는 게 아니라 타성에 젖게 되면서 쉽게 졸음과 망상에 속게 되는 게 아닌가 싶다. 인재 불사에 힘을 모으지 못한 탓이다.

그리고 요즈음 젊은이들은 노인들 즉 웃어른들을 진정성을 가지고 모시려고 하지 않는다. 인생을 살아온 경험과 체험을 귀하게 생각지 않고 오히려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보니 노스님들과 탁마가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간화선은 이론이나 지식으로 되는 게 아니고 살아 숨 쉬는 행을 보고 직접 체험해야 되는데 보고 배울 노스님들이 적어지다보니 習儀가 안 되게 마련이다. 그 결과 지금은 존경받는 수행자상이 아니고 깨닫기만 하면 된다는 지극히 결과론적인 삶으로 변해가고 있다.

과정이 생략된 즉 과정을 중요시하지 않는 삶이 되었다. 과정을 중요시하지 않는다는 얘기는 내일을 위해서 오늘을 놓치고 있다는 얘기다. 어제는 지나간 오늘이요, 내일은 돌아오는 오늘이다. 결국 오늘은 영원일 수밖에 없다. 내일을 위한다고 오늘 하루 헛되이 보내는 삶은 영원을 놓치는 결과일 수밖에 없다. 나날이 절절한 삶이 되어 삶과 수행이 하나가 되어야 할 텐데 삶과 수행이 일치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단 한 시간을 앉아 정진 하더라도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간절한 마음이나 중생의 아픔을 같이 하려는 대비원력이 모자란 게 사실이다. 늘 고민하는 일이지만 그 원인은 나 자신부터 발심이 모자란 데 있다.

첫째 진발심만이 해결 방법이다.
옛날 어른 스님들 생각에는 수행자들의 발심은 기본이라고 생각하셨다. 그리고 어른스님들 사는 모습을 보고 배우면 저절로 바로 서는 게 정견이라고 믿으셨다. 그러나 지금은 발심을 교육해야 하는 상황이고 정견에 대한 기본을 가르쳐야 되는 상황이다. 그것이 현실이다. 간화선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이는 종단 교육 사업일 수밖에 없다. 간화선은 대한불교조계종의 종지요 종통이다. 종지라면 종단적으로 키워나가고 가르쳐야 하는 중차대한 일인데도 종단에서 아직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그야말로 선방 자체 내에서 이만큼이나마 간화선의 맥을 단절시키지 않고 지켜올 수 있었던 것은 윗대 어른스님들의 공덕이요 원력이다.

이제 발심은 선원 강원 율원 할 것 없이 전 종도들의 문제다. 發心이란 發菩提心의 준 말이다. 기필코 성불하겠다는 간절한 마음이요, 결정코 모든 중생의 아픔을 같이 하겠다는 大願이다. 옛 어른들은 飢寒에 發道心이라 하여 뼈를 깎는 아픔을 이겨낼 때 발심이 된다고 하셨다. 그러나 요즈음 젊은이들은 너무나 많은 문명의 이기에 물이 들어 쉽고 편한 삶에 푹 익어져 들어온다. 그러다보니 생각으로는 발심하려 하나 行은 따르지 못하고 있다. 克己心이 그 만큼 모자라다는 얘기다. 오늘 이 자리에서 이 부분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었으면 한다.

敎外別傳 不立文字라 하여 格外道理를 절대시하고 백장청규 정신이 생활화 되고 있지 않다는 지적에 대하여 ---
부처님의 가르침이 敎다. 그 가르침의 근본 뜻에 들어가자면 직접 체험을 해야만 한다. 그러려면 敎를 객체화해서 지식화 되어선 안 된다는 사상이 不立文字의 근본 뜻이다. 다시 말해서 不立文字란 敎를 무조건 버리라는 뜻이 아니다. 敎의 뜻을 살려 직접 체험하고 요달하여 삶과 수행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다만 지금은 많이 왜곡되어 있는 게 현실이다.

글이나 말은 우리들 생각의 표현이다. 그 생각이란 게 정견이 바로 서 있지 않다면 믿을 수가 없다. 영상으로 비쳐진 사물을 보고 대상화시킨 생각이라면 中道緣起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대상에 속지 말고 바로 보자는 얘기가 不立文字다. 그리고 격외도리라고 해서 다른 얘기가 아니지 않는가. 부처님의 근본 뜻인 중도 연기가 삶이 된 언어이다. 격외 도리를 절대시한다면 이 또한 잘못된 일이다. 그러나 수행자들에게 알음알이가 끊어진 직관의 언어, 격외도리는 결코 가볍게 볼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정견이 바로 서지 못한 데서 오는 부작용이라고 본다. 正見이란 中道 緣起에서 보는 세계관이요 인생관이다. 정견이 바로 서려면 부처님의 가르침인 緣起 無我 空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시거나 오시지 않거나에 관계없이 연기, 무아 ,공은 우리들 삶의 본 모습이요, 이 이치를 바로 보는 게 정견이다.

여기에 대한 뚜렷한 인식이 바로 서야만 연기 중도가 인격화되고 내면화되어 부처님 은혜를 갚을 수 있는 안목이 생기는 것이다. 이러한 고민을 같이 논의하고자 이곳에서 野壇法席이 열리는 걸로 알고 있다.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나야 한다.

어른스님들이 그토록 어렵게 지키고 가꾸어 온 간화선 수행 가풍이 잘 지켜져 나가야 한다고 본다. 새로운 법을 만들어서 고치겠다고 생각해선 얻는 것 보다 잃는 게 더 많다는 생각이다.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 시행착오를 해 왔지 않는가. 결론은 인재를 키워놓지 않은 상태에서는 새로운 방법은 이루어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 오래되고 전통이 깃든 법당이 있다고 하자. 법당이 낡아서 위험할 경우 완전히 새로 짓는 방법이 있고, 기둥을 받치고 벽을 손질하여 유지하면서 고쳐나가는 방법이 있다. 전자의 방법을 택할 경우 대단히 효과적이지만 재목과 모든 여건이 준비되었을 경우만 가능하다. 당장 쓸 재목이 없다면 후자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나는 수좌의 입장에서 볼 때 후자의 방법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왜냐하면 조선시대 모진 억불정책 아래서 그 어려운 법난을 겪어오면서도 지금까지 쌓아온 간화선의 가풍과 전통은 한국불교가 세계에 내어 놓을 수 있는 큰 재산이기 때문이다. 일이백년 세월이 아니고 천수백년 이어져 내려오는 전통은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전 종도들이 애정을 가지고 잘 지켜나가야 할 일이다. 다만 간화선 그 자체가 아니고 현금에 일어나는 수행풍토에 대한 지적은 겸허히 경책을 받아들여야 할 것으로 안다.
생각해보면 조선시대 말기 이래 일제식민지시대를 거쳐 정화 때까지 우리종단에서 인재불사에 전 종도가 힘을 모아보지 못한 걸로 알고 있다. 지금이라도 인재교육방법을 논의하는 야단법석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물론 선원에서도 많이 고민하고 있다.

그래서 전국선원 수좌회에서 교육원과 같이 <간화선>을 발간하고, 3년째 선원청규를 편찬하고 있다. 거의 완성단계에 와 있다. 물론 미력인 줄 안다. 그러나 근래 많은 종단분규와 어려운 법난 속에서 이만큼이나마 지켜지고 유지되어온 간화선 수행은 많이 아쉽지만 그나마 희망이라고 본다.

백장청규 정신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걱정이다. 너 나 할 것 없이 쉽고 편한 쪽으로 길들여지는 것 같다. 만나서 같이 논의하기로 하고 이만 줄인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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