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봉 스님
출가자인 스님들이 해마다 신도들로부터 생일상을 받고 있다. 세속인들도 고령화를 핑계삼아 환갑 잔치를 생략하고 있는데 승려들은 환갑을 기억, 신도들이 잔치상을 차려주고 있다. 칠순 잔치, 팔순 잔치는 더욱 성대하게 차려진다. 그러나 생일상을 받아야 할 사람은 출가 수행승 쪽이 아니라 세속에 계신 그 스님들의 부모님일 터이다.
출가 수행승이 죽으면, 그것도 지명도가 높은 스님일수록 3일장을 훌쩍 뛰어넘어 5일장 장례를 치르는 게 보편화된 관례이다. 거기다가 빈소의 한 켠에서는 현금이 든 봉투를 받는 접수대가 버젓이 자리하고 있다. 수행승의 장례다운 조촐한 모습은 보기 힘들고 대부분이 꽃상여요 2층, 3층짜리 호화상여도 가끔씩은 볼 수 있다. 서울의 어느 고승의 상여가 높고 높아 육교 밑을 통과할 때마다 톱으로 한 층씩 잘라 낸 일화는 전설이 아닌 실화이다.
승려들은 누구나 인과법문을 즐겨한다.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라며 지어진 업(業)의 피할 수 없는 과오를 즐겨 법문의 소재로 삼고 있다. 그런데 승려가 죽을 경우, 그것도 높을 고(高) 중승(僧)이 죽을 경우 49재를 치르는 광경이 지극히 낭비적이요 세속적이다. 일생을 신도들의 시주물에 의한 은혜가 막중할 터인데도 죽어서까지 이 절 저 절로 옮겨다니며 호화판 잔치마당을 벌이고 있다. 살았을 때 수행을 게을리 했다면 죽어서의 어떤 과보도 감내해야 하지 않겠는가?
승려가 해마다 생일상을 받는 지극히 세속적인 부끄러운 전통이 아닌 악습은 사라져야 마땅하다. 승려가 죽을 경우 최소한 간소하게 상여 따윈 만들지 말고 가사 장삼이나 입혀 시간낭비 말고 화장함이 불교적이요 수행승다운 마지막 마무리이다. 49재 100재 따위로 죽어서까지 시은(施恩)을 더해 업덩이의 무게를 키울 일은 아닌 것이다.
이쯤해서 한국불교 조계종단의 종합수도 도량인 총림사찰의 인적 구조에 대해 쓴소리를 해야겠다.
우선, 어느 대학이 있다고 치자. 그 대학 출신이 아니면 교수도, 이사도, 학장이나 원장, 총장도 할 수 없다면 그 대학의 장래는 어찌 되겠는가? 다행히 지구촌 그 어디에도 그런 대학은 없는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 한국불교의 으뜸종단인 조계종의 총림사찰에서는 버젓이 폐쇄적인 형태가 실존하고 있다. 총림사찰의 출신 승려가 아니면 주지나 방장이 될 수 없다. 강원장이나 선원장, 율원장도 될 수 없다. 총림사찰 한 곳에서만 이런 우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총림사찰 다섯 곳이 똑같이 부끄러운 전통의 못된 병을 앓고 있다.
총림은 종합수도 도량으로서 인재를 양성하는 종단 최고의 선불장(選佛場)인 열린 수행처이다. 그런 곳에서 불교의 육화(六和 : 身和, 口和, 意和, 戒和, 見和, 利和)정신이 제대로 뿌리내릴 수 있겠는가? 지극히 배타적, 폐쇄적인 모습으로 변질되어감을 심히 우려하는 마음 무겁기만 하다. 거기다가 총림의 정신적 지도자이며 사찰의 어른인 방장의 선출 방식에 있어서도 그 사찰의 문중이 아니면 모시기는커녕 후보명단에도 끼지 못한다.
선지식(善知識)과 수행자는 다르다. 선지식은 마음이 열린 참사람으로서 누구에게나 좋은 스승이 될 수 있고 누구에게나 착한 벗이 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수행자는 칠순이 지나고 팔순을 넘겨도 수행자일 뿐이다. 진리와 한몸을 이루지 못하여 경구(經句)에도 막히고 어록(語錄)에도 캄캄하다. 몸가짐이 반듯하여 대중의 모범은 될 수 있으나 선불장(選佛場)의 스승은 될 수 없는 것이다. 훌륭한 스승이 있어야 훌륭한 제자도 배출되는 법이다. 스승되는 사람이 앞도 캄캄하고 뒤도 캄캄하다면 제자인들 오죽 캄캄하겠는가. 세속적인 비유라서 망설여지긴 하나 아마추어 바둑 1급 열 명이 대들어도 프로 1단을 이길 수 없는 이치니까.
다음으로 언급할 부분은 선원의 정진방법에 대해서다. 대부분의 대중선원이 짜여진 정진시간표에 의해 죽비소리로 앉고 서기를 반복하고 있다. 임재선사도 그의 어록에서 보여주듯이 행(行), 주(隹), 좌(坐), 와(卧), 어(語), 묵(黙), 동(動), 정(靜) 중 좌선(坐禪)을 으뜸으로 삼고 있긴 하나 한국의 선원(禪院)에서는 좌선의 뿌리가 너무 깊게 박혀있어서 하는 소리다.
조신(調身), 조식(調息), 조심(調心)은 예로부터 참선인이 갖추어 나가야할 덕목이었다. 몸의 균형과 바른 자세, 그리고 어느 정도 호흡고르기가 순일해지면 짜여진 시간표와 죽비소리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동(動)과 정(靜)이 둘이 아니요 좌(坐)와 행(行)이 하나이어야 한다. 좌불(坐佛)만을 신앙의 대상으로 섬기다 보면 어느 사이 예불자의 의식도 앉은뱅이화 된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 법당에 모셔진 부처의 상(像)도 일어서야지만 앉아있는 선원에서 움직이는 선원으로 전환해가야 한다. 관념의 벽, 도식화된 틀을 과감하게 깨야 한다. 새로운 시도와 출발이 있어야 한다.
당(唐), 송(宋)으로 이어져 내려오던 선불교(禪佛敎)의 황금시대는 임제선사(臨濟禪師:866년 입적)의 12대 손(孫)인 대혜종고(大慧宗杲:1163년 입적)에 이르러서는 혼돈의 격변기를 거치게 된다. 대혜선사에 의해 새로운 선수행(禪修行)이 제창되는데 그것이 바로 간화선(看話禪)의 화두정진법이다. 1,700 공안(公案)으로 일컬어지는 화두정진법은 중국은 물론 한국불교에 있어 선문(禪門)의 정로(正路)로 그 둘레를 넓혀왔다. 경허와 만공, 서옹과 성철선사에 이르기까지 간화선 수행이 좌선(坐禪)의 기본 덕목으로 자리매김을 더욱 튼튼히 다져왔던 것이다. 한국불교에 있어 간화선 연구와 간화선에 의한 수행법이 마치 불가침의 성역처럼 여겨옴도 그런 연유에서다.
그러나 육조단경의 본문에서 화두나 공안이라는 말은 찾아볼 수 없다. 이 땅에 구산선문(九山禪門)을 열었던 구산조사(九山祖師)시절에도 화두정진(話頭精進)의 중요성을 제창한 조사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시대적으로 연대적으로 당연한 일이지만 대혜종고 이전에 선지식(善知識)의 출현이 활발발했음에 주목해야 한다. 간화선의 화두정진에는 허물이 있을 수 없다. 다만 그 정진수행의 방법에는 개선해야 할 문제점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좌선일변도의 정진방법과 죽비소리에 맞춰 길들여지고 있는 시간지키기의 수행방법 등이 문제일 수 있기 때문이다. 좌선에만 집착함을 경계해 육조 혜능(713년 입적)은 다음과 같은 게송까지 남기고 있다.
살아서는 앉아서 눕지 못하고(生來坐不卧)
죽어서는 누워서 앉지 못하네(死去卧不坐)
송장이나 다를 바 없는 뼈덩이에서(一具臭骨頭)
어찌하여 깨달음을 얻으려 하랴(何爲立功課)
남악선사(744년 입적) 또한 좌선에만 집착하는 제자 마조(820년 입적)에게 벽돌과 기왓장의 거울 만드는 일까지 보여주며 좌선에 길들여짐을 질타하고 있음도 잊지 말 일이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끊김이 없는 간절심이다. 나무와 나무끼리 끊임없이 비벼대면 불꽃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 다만 그 동작을 잠시 쉬거나 멈추게 되면 달아오른 나무는 이내 식어버린다. 수행자의 정진(精進) 또한 이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90일은 용맹정진, 가행정진하고 해제기간동안 정진자세가 조금이라도 흩어지고 흔들린다면 그는 이미 식어버린 나무나 다를 바 없다. 다시 흩어진 마음을 다잡아 결제기간동안 대중처소에 가서 무섭게 정진한다고 치자. 그러나 그 무섭던 정진력은 해제기간동안 마른 모래를 쥐고 있는 주먹처럼 헐떡임과 흔들림 쪽으로 솔솔 사라져버릴 터이다.
왜 십년, 이십년을 한결같이 선방에서 정진에 정진을 거듭했는데 깨달음은 더디게 오는지 아마 울고 싶은 구참들도 많을 것이다. 세월가는 게 두렵기도 하고 갈수록 내면으로는 자신감과 깨달음에 대한 확신도 잃고 있으리라. 그에 대한 대답은 오직 하나뿐이다. 간절심에 끊김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선방에 십년, 이십년 다닌 게 오히려 깨달음을 이루는 데에는 장애가 될 수 있다. 숱한 안거의 횟수가 관록이 아닌 관록이 되어 자만심을 키우고 관행적 타성에 젖어듬도 부끄러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든 언제든 초발심(初發心)으로 돌아가야 한다. 90일의 안거기간이 중요한 게 아니다. 닷새든 일주일이든 간절하게 더욱 간절하게 화두(話頭)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 입술이 터지고 온몸이 마비되는 한이 있더라도 죽음마저 마다않을 간절심으로 시간도 잊고 공간도 초월하여 오로지 하나로만 모아가자. 나무와 나무끼리 부비고 또 비벼대면 불꽃은 일어나게 되어있다. 어느 한 순간, 마음이 환히 열릴 것이다. 세상이 환히 보일 것이다. 무엇 하나 의혹으로 남는 게 없는, 진정한 의미의 해탈자가 되어 자유와 행복을 누릴 것이다. 깨닫는 순간에는 간절심도 화두마저도 군더더기가 될 터이다.
세상은 가짜들의 천국이라고 한다. 명품에는 짝퉁이 따라다니듯이 가짜가 진짜같고 진짜가 가짜같다. 그러다 보니 스님들도 가짜이면서 진짜 행세를 하고 있다. 경전 속의 내용을 마음으로 녹이지도 못하면서 입으로는 구업(口業)짓는 소리만 늘어놓는다. 영가(靈駕)를 위한 천도제일 경우 수백만원을 받고 극락왕생이 이루어졌다고 확신이 없는 허풍의 너스레를 떨고 있다. 거기다 불교TV의 영상매체를 통해 처음도 헤매고 중간도 헤매고 끝마무리까지 헤매는 가짜들의 가짜 법문을 지켜볼 때가 가장 슬픈 시간이다. 불교신문 등에서 활자로 만나는 한 산중(山中)의 어른이라는 분들이 짜깁기식 법문 아닌 법문을 늘어놓는 데는 그 애잔함이 더욱 깊어진다.
한국불교 조계종에는 선원(禪院)이 일백여곳, 안거대중도 이천 오백여명에 이르고 있다. 선원장 스님만 해도 일백명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도 왜 도반끼리 서로 탁마하는 선문답(禪門答)의 법거량은 쉽게 볼 수 없는가? 왜 한국 선불교의 아름다운 전통인 선문답과 법거량(法擧揚)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있는가? 방장과 조실의 법어(法語)를 글솜씨 좋은 다른 스님이 대신 써주고 있는 현실이고 보면 가히 가짜들의 천국인 세속을 탓할 수도 없을 터이다. 돼지 눈에는 돼지, 부처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이성계와 나눈 무학의 말로 얼버무리지 말 일이다.
이제 마무리를 해야겠다. 지극히 평범한, 보편타당한 걸 꺼내야겠다.
사람은 왜 사는가? 행복을 위해서 살아간다.
스님들은 왜 출가(出家)했는가?
헐떡임과 흔들림 등의 장애를 벗어버리고 더 큰 자유와 행복을 위해서다.
수행승들은 왜 젊음을 안으로만 다스리며 고행(苦行)의 끈을 놓지 않는가? 진리와 하나를 이루어 큰 자유와 큰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다.
그럼 깨달음을 이룬 이후는 삶의 본질이 어떻게 달라지는 것인가?
날마다 좋은 날이요 이르는 곳마다 정토(淨土)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