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도보행진이 2주째에 접어들면서 완연한 농촌지역으로 접어든다. 그런데 코스가 만만찮다. 혼자서 짐을 갖고 다니며 숙소에 옮겨놓고 매일 연속적인 보행을 하는 것이어서 원래 쉽지 않은 계획이다. 지금까지는 코스를 따라 철도가 있었고 주요역에는 숙소가 있어서 비교적 순조로웠다. 하지만 지금부터 마케도니아로 가는 일주일 남짓한 코스는 고차방정식을 풀어야 한다.
대개 어느 동네든지 철도가 없다면 버스가 잘 다니는 편이므로 버스정류장을 기준으로 계획을 짜면 된다. 하지만 밀도가 낮은 그리스는 버스정류장 정보가 잘 안보인다.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 매일의 도보코스와 숙소 그리고 이동교통편 등을 어렵사리 궁리를 해가면서 매일 20~25km을 쉬지않고 걷는다.
시골길을 걸으면서 생각삼매에 빠진다. 주로 앞으로 해가야 할 일들이 떠오른다. 그러면 두 가지 시나리오로 생각한다. 낙관적 시나리오와 비관적 시나리오다. 후자는 깊게 생각할 것 없다. 상황에 맞추어 대응해가면서 대안을 모색하면 된다.
문제는 전자다. 낙관적인 시나리오대로 전개되었을 때가 문제다. 그런 상황은 대체로 많은 이들의 기대와 힘이 실린 상황이다.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 실망을 줄 수는 없다. 이후 전개될 그림까지 미리 생각해둘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생각이 꼬리를 무는 것이다.
생각은 발로 한다. 발바닥의 자극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차이가 있다.
테살로니키의 박물관을 살펴보다가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다시 상기해본다. 고대 그리스 초창기에 대한 생각이 다시 난다. 당시 막강했던 페르시아제국에 맞섰던 아테네가 융성하기 시작했던 결정적 계기는 마라톤 전투였다.
도시국가 아테네. 파란색이 아테네군이고 주황색이 페르시아군이다. 아테네군은 이 첫 전투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곧바로 페르시아 해군이 40km 남짓 떨어진 아테네시내로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갓 승리한 병사들 모두가 놀라서 중무장(30kg가 넘는)상태로 가족들을 지키려 그 먼 거리를 달렸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간발의 차이로 먼저 도착해서 불상사를 방지했다는 것. 약42km의 마라톤이라는 이름도 이때 나온 것이라고 한다. 이 승전을 계기로 아테네는 아고라의 직접민주주의 전통을 세우는 등 본격적인 융성의 길로 업그레이드 했다는 것이다. 강렬한 주인의식이 형성되는 체험이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탈핵도 마찬가지다. 탈원전을 선언을 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미 핵은 에너지산업의 일부로 작동하고 있다. 중앙공급형 패권적 지위를 누리면서 말이다. 에너지전환은 본질적으로 권력투쟁이다. 싸워서 쟁취하지 않으면 안된다. 쟁취하려는 시민적 열망이 있어야 한다.
오랫동안 박혀있던 대못을 뽑을 때는 시간이 걸린다. 녹슨지 오래되어 그 주변의 잡것들과 엉켜있기 때문이다. 체르노빌사고때부터 형성되어왔던 탈원전에의 시민들의 열망이 있었던 독일도, 2011년 선언후 12년이나 걸렸다. 그 열망으로 지긋하게 그리고 강고하게 뽑아야 한다.
(글쓴이 이원영은, 국토미래연구소장이자 원전위험공익정보센터 대표로서, 주로 도보행진을 통하여 탈원전운동 및 핵폐수투기저지운동을 펼치고 있다.)
* 이 글은 <한겨레온>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