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붕없는 하늘
마주보는 하늘
오랜 친구처럼
멍석위에 누워
바라보던 밤하늘처럼.
#작가의 변
죽으면 묘지를 쓰는 일이 쉽지 않다. 가격은 자꾸만 올라가고 그렇다고 화장해서 흔적을 아주 없애면 서운하지 않을까 싶다.
공원 벤치에 무심코 앉았다가 이름을 보니 한국인이다. 나무에도 명패가 있는 걸 보니 수목장 형식을 빌린 것 같다.
공원 옆에 있는 가든 베드에 깻잎 상추 고추를 보니 한국 사람 것 같다. 문이 자물쇠로 잠겨서 밖에서만 보고 사진을 찍었다.
무엇을 바랐느냐고 물어보면 달콤한 말과 다정한 손길 어루만짐을 바랐는지 모른다구요.
빠지직빠지직 뚝뚝 위층에서 삼십 분 넘게 들리는 층 간 소음에 주체할 수 없는 화를 내다가 현실로 돌아와 내일 아파트 사무실에 불평하기로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불편하다.
꾸역꾸역 나는 연기와 고기 타는 냄새가 병원에서 나는 나프탈렌 냄새와 섞여진 일요일 아침 일찍, “사거리 모퉁이 편의점 뒤에 모여선 노숙자들은 무엇을 할까”, 아들에게 물었다.
아들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
병원 침대에 누워 하루 세 번 먹는 식사 시간도 버거운 노인이 입속으로 음식을 넘기지 못하고 흘리듯이.
숲속은 죽음과 새 생명이 함께 여도 역겹지 않았는데, 도시엔 새로 짓는 건설 현장의 소음과 먼지, 음식점에서 풍기는 음식 향기와 자동차 매연이 뒤섞여 두통을 일게 한다.
서리가 내리면 죽을 줄 알면서도 검은 베리와 붉은 베리, 푸른 베리가 한 가지에서 살아간다. 먹고 사는 게 바빠 정치엔 관심이 멀어진다는 아내처럼, 손에 잡을 수 있는 현실도 꿈이 되고 꿈을 꿀 수 없는 현대판 노예처럼.
죽고 싶다는 아들
스스로 죽을 용기도 없어
조력사가 가능한 국가를 알아봤다는데
불교도 기독교도
아니 ‘신은 없다 주의자’인 아들이다.
‘자살’을 거꾸로 읽으면 ‘살자’가 되고
‘인연’을 거꾸로 읽으면 ‘연인’이 된다
역경이 쌓이면 고난을 헤쳐 나갈 경력이 된다.
‘내 힘들다’를 거꾸로 읽으면 다들 ‘힘내’가 된다.
자살 공화국 대한민국, 캐나다 젊은이들도 마약에 찌들어 좀 비처럼 허리를 숙인 채, 길거리에 누워 세상일과 담을 쌓고 혼자만의 천국을 즐기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선 아이들이 성공하거나 실패해도 부모의 탓으로 말한다. 저런 걸 낳고 미역국을 먹었느니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지진아로 사회에서 버려진 삶을 사는 것도 부모 탓을 한다.
세상 어느 부모가 자식이 잘못되길 원할까?
말 안듣고 속상할 때 나가라고 하고 바로 후회하는 것이 부모다.
해바라기를 보면서 해바라기는 꽃일까 열매일까를 생각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벌은 화분을 모아 꿀을 만들고 작은 새들은 씨앗을 파먹는다.
사과도 배도 오가닉으로 심어 놓은 것은 벌레 먹고 새 들이 쪼아 먹고 크기도 작고 모양도 못생겨 상품성이 없다. 그렇다고 한들 그 사과와 배가 과일이 아닌 것이 아니고 산새들과 야생 동물의 먹이가 된다. 화단을 이쁘게 가꾸고 풀을 뽑고 퇴비를 주고 농약을 치고 관리하는 화단은 조화롭고 이쁘다. 자연에 손 타지 않은 꽃이 이쁘지 않은 것이 아니고 귀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세상 모든 존재는 그 존재 자체로 귀하다. 들풀은 들풀로, 들꽃은 들꽃으로 빛난다.
지구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지구 때문에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가끔 착각한다. <성경>에 하느님이 천지창조하고 모든 만물을 만들고 인간을 만들어 숨결을 불어 넣었다고 인간이 가장 위대한 존재로 착각한다.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다. 스스로 두꺼운 가죽이나 털이 있어 추위를 이겨내지 못해 동물 가죽을 이용하고 불을 피워 난방한다.
인간은 스스로 꿀을 만들어 내지도 않고, 깊은 바다에서 숨을 쉬지도 않으며, 날개를 펴고 날지도 못한다. 힘이 코끼리보다 세지도 않고, 낙타처럼 사막을 걸을 능력도 없다. 인간은 생명을 이용하고 잔인하게 다른 동물을 먹고 산다. 당장 먹을 것뿐만 아니라 두고두고 먹을 고기를 냉동 냉장 말려서 보관한다. 달을 정복하고 우주를 정복한다고 말하지만, 인간은 늘 아파서 속절없이 죽어 간다.
어제 아내가 오늘은 휴일이니 일찍 일어나지 말고 늦게 일어나라고 부탁했다.
화장실만 갔다 오려고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는데 작은 쥐가 후다닥 나오더니 구석으로 숨는다. 내가 잠이 덜 깨서 헛것을 봤나 하고 있으니, 또 후다닥 나왔다가 발 언저리를 왔다 갔다 하다가 구석으로 숨는다. 그래서 화장실에 있던 세제 통을 들고 쥐를 잡기 위해 구석을 치우고 쥐가 나오면 그것을 맞추겠다고 세제 통을 휘둘렀더니 잡지는 못하고 소란만 피운 꼴이 되었다.
소란 통에 아내가 왔다. 문을 열면 거실로 나갈까 봐 문 열지 말라고 했는데도 아내가 들어 왔다. 아내는 유리창 닦는 막대로 쥐를 잡고 나는 세제 통을 휘두르고 새벽에 진풍경이 벌어졌다. 쉽게 잡히지 않았다. 얼마나 날쌔고 빠른지, 숨은 곳의 물건을 치우거나 흔들면 툭 튀어나와 깜짝 놀라게 했다. 그러다 아내가 나보고 소리만 요란한 세제 통말고 유리창 청소기를 가지고 잡아 보라고 해서 몇 번의 시도 끝에 잡았다. 아내와 합동으로 비닐봉지에 담아서 밖에 쓰레기통에 버리면서 지팡이로 때려죽여서 버렸다. 아내는 죽이지 말라고 했지만, 왠지 쓰레기통 속에서 살아 나올 것만 같았다. 작은 눈이 자꾸 눈에 밟힌다.
이사 와서 벌써 2번째 쥐 소동이다. 지난번엔 거실에서 쥐 소동이 있었고 끈끈이에 잡혀서 버렸다. 거실에서 아들이 자고 있어서 아들의 스트레스가 상당했다. 구멍, 쥐의 출입구는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오늘도 화장실을 아무리 뒤져도 틈새가 없다. 아내는 천장에 통풍 장치에 커버가 없어서 그곳으로 떨어진 것 같다고 했다. 그럴 수도 있다. 아침부터 살고 죽는 문제로 온 힘을 다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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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은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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