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무문관: 우과창령牛過窓欞
신무문관: 우과창령牛過窓欞
  • 박영재 명예교수
  • 승인 2024.08.22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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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선도회 박영재 교수와 마음공부 71.

성찰배경: 바로 앞의 두 글에서 임제종 양기파의 백운수단(白雲守端, 1025-1072) 선사와 임제종 황룡파의 동림상총(東林常總, 1025 –1091) 선사와 회당조심(晦堂祖心, 1025 –1100) 선사 및 보봉극문(寶峰克文, 1025 –1102) 선사들과 그들의 거사 제자들에 관해 다루었습니다.

한편 백운수단 선사의 법을 이은 오조법연(五祖法演, 1024-1104) 선사께서 제창한 4개의 공안이 <무문관(無門關)>에서 매우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는데, 이번 글에서는 간화선의 원류(源流)라고 사료되는 그의 위상과 <종문무고(宗門武庫)>에 들어있는 도가(盜家)를 비유로 들어 선가의 전법(傳法)을 절묘하게 드러낸 그의 불립문자(不立文字) 선관(禪觀)을 다룬 다음, 그가 제창한 통찰(洞察)과 나눔[布施]이 둘이 아닌 ‘통보불이(洞布不二)’의 정신을 담고 있는 <무문관> 제38칙 ‘우과창령牛過窓欞’을 우선 살피고자 합니다. 

◇ 간화선의 원류: 오조법연 선사 

앞의 칼럼글 ‘신무문관: 조주무자(趙州無字)’에서 언급했듯이 오조법연 선사의 어록인 <오조록>에 보면, 널리 알려진 <조주록(趙州錄)>에 들어있는 ‘조주무자’ 화두에 관한, 상당법어(上堂法語) 가운데 다음과 같은 핵심 대목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평소 어떻게 무자화(無字話)를 참구하고 있는가? 노승은 언제나 다만 ‘無’字만을 참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본다. (즉, 뒤에 붙어 있는 업식성에 관한 부분은 군더더기이기 때문에 ‘問 狗子還有佛性也無. 師云 無.’까지만 참구하면 된다.) 만일 여러분들이 만약 이 ‘無’字 하나를 투과(透過)하여 체득(體得)한다면 천하에 그 누구도 여러분을 어쩌지 못할 것이다. 자! 여러분! 이 ‘無’字를 어떻게 투과할 것인가? 이 ‘無’字를 철저히 투과한 사람이 있는가? 있으면 즉시 나와서 간파한 바를 제시해 보라!”

사실 <조주록>의 ‘조주무자’ 화두 가운데 맨 앞부분만을 취한 오조 선사의 이 새로운 제창이 바로 손자 제자인 대혜종고(大慧宗杲) 선사가 주로 재가(在家)의 사대부(士大夫)들과 서신 교류한 내용을 담은 <서장(書狀)>에서 ‘조주무자’ 공안을 20회 이상 인용하며 이들을 위해 새롭게 주창(主唱)한 공안선 참구 방법의 원류인 것입니다. 

이어 훗날 오조 선사와 대혜 선사의 선관을 그대로 계승한 무문혜개 선사께서 이를 <무문관> 제1칙 ‘조주구자(趙州狗子)’ 공안으로 표준화시킨 다음, 여기에 평창과 송을 붙이면서 이 ‘無’字가 투과해야할 종문의 유일한 관문인 ‘선종무문관(禪宗無門關)’임을 제창하며 더 이상 왈가왈부할 여지를 남기지 않고 철저히 마무리했다고 사료됩니다. 

군더더기: 참고로 위에서 언급한 대목만 보면 오조 선사가 ‘조주무자’ 화두만 고집한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조 선사의 어록인 <오조록>을 보면 이전의 고칙 공안들뿐만 아니라 <무문관> 제35칙 ‘천녀이혼(倩女離魂)’, 제36칙 ‘노봉달도’, 제38칙 ‘우과창령(牛過窓櫺)’ 및 제45칙 타시옥수(他是阿誰) 화두 등을 새롭게 제창하며 ‘조주무자(趙州無字)’ 못지않게 수행자들의 이원적(二元的) 분별심(分別心)을 철저히 뽑아버리도록 다그치고 있는데, 이들 공안들은 오늘날까지도 수행자들이 투과하기 어려운 공안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필자의 견해로는 선종 최후의 공안집인 <무문관>의 48칙 공안들 가운데 이 조주구자 공안이 본참공안이고, 나머지 47칙은 본참공안을 제대로 투과했는지를 세밀히 검증하는 응용공안이라 사료됩니다. 

참고로 종달宗達 선사께서 다수의 공안을 스승인 화산대의(華山大義) 선사 문하에서 점검을 받으셨지만, 1984년에 펴낸 자서전(自敍傳)인 <인생의 계단>에서 조주구자 공안이 본인의 본참공안이었음을 드러내는 경계를 다음과 같이 나투셨습니다. ‘간신히 조주무자를 얻어 평생을 쓰고도 다 못쓰고 가노라![纔得趙州無字 一生受用不盡.]’

◇ 도가(盜家)의 비전과 선가(禪家)의 전법

선어록(禪語錄)에는 도둑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종문무고>에 오조법연 선사께서 ‘선禪(체험)이란 무엇인가?’를 도둑질을 비유로 들어 설하고 있는 멋진 대목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버지 도둑이 늙어가자 그 아들이 어떻게든 도둑질하는 비법을 전수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아버지께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아버지는 그 요청을 듣고 잘 생각했다고 격려하며, 어느 날 야심한 밤을 틈타 아들을 데리고 부잣집[巨室]의 담벼락에 출입이 가능할 정도의 구멍[窬]을 내고 그 집에 잠입합니다. 

아버지는 집안 창고에 있는 큰 나무 궤짝[櫃]을 열고 즉시 아들에게 그 안으로 들어가 값어치가 있는 옷이나 비단천을 꺼내오라고 지시합니다. 그러자 아들이 궤짝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아들이 궤짝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아버지는 궤짝문을 닫고 즉시 자물쇠를 채웠습니다. 이어 큰 소리로 ‘도둑이다! 도둑이야!’라고 외치며 잠자던 집안 사람들을 깨웠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만 남기고 자신은 유유히 담벼락 구멍을 통해 집으로 도망갔습니다. 그러자 부잣집 사람들이 곧 쫓아 나와 등불을 밝혀 집안을 살펴보다가 도적이 들었다가 도망가 버렸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한편 아들 도둑은 궤짝 속에 갇혀서 ‘아버지가 나를 왜 이렇게 가두어놓고 가셨을까?’ 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 전전긍긍하다가 문득 좋은 계책計策 하나를 떠올리고는, 궤짝 속에서 쥐가 갉아 먹는 소리를 냈습니다[作鼠咬聲]. 그러자 부잣집 집사가 하인을 보내 등불을 켜고 궤짝을 열어젖히게 했습니다. 그런데 뚜껑이 열리는 순간, 아들 도둑은 궤짝에서 튀어나와 등불을 불어서 끄고, 하인을 밀치고는 창고 밖으로 달려 나갔습니다. 

그러자 부잣집 사람들이 곧 뒤쫓아왔습니다. 도망가는 길에 아들 도둑이 문득 우물 하나를 발견하고서 즉시 큰 돌을 집어 우물 속으로 떨어뜨렸습니다. 그러자 하인들이 우물 속을 기웃거리며 도둑을 찾고 있을 때, 아들 도둑은 곧장 집으로 도망쳐 와서 아버지에게 왜 그렇게 하셨는지 그 까닭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 도둑은 아무 말도 하지 말라면서, ‘너는 어떻게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아들이 도주 과정을 낱낱이 들려드렸습니다. 그러자 아버지 도둑은 ‘너는 이제 (결코 말이나 글로 가르칠 수 없는) 도둑질의 진수(眞髓)를 제대로 터득했느니라.’라고 인정하였습니다.” 

군더더기: 이 일화는 도가(盜家)의 비전(祕傳)과 선가(禪家)의 전법(傳法)이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통찰(洞察)한 멋진 비유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선의 세계가 도둑의 세계와 극명하게 다른 점은 나눔[布施] 실천에 있습니다. 그 본보기로 어리석은 도둑조차도 바르게 교화(敎化)시키는 ‘동사섭(同事攝)’이란 수행법이 비록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만, 이 지면을 통해 거듭 살피고자 소개를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영적 스승이 도둑질의 달인을 교화하기 위해 1단계로 함께 도둑질을 시작합니다. 신뢰가 쌓일 무렵 부정(不正)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은 집들만 골라 털자는 착한(?) 제안을 하고 실천에 옮깁니다. 

2단계로 도둑질은 나쁜 짓이니 밤에 두 발 뻗고 편안히 잘 수 있도록 그동안 충분히 모은 재물로 논밭을 사서 땀 흘리며 떳떳하게 살자는 제안을 하고 실천에 옮깁니다. 

마지막 3단계로 죽을 때 가져가지도 못하는 많은 재물을 창고에 쌓아만 두지 말고, 그동안 지은 죄도 탕감할 겸, 어려운 이웃들을 도우며 여생을 보람 있게 보내자는 제안을 하고 나눔 실천을 자연스레 유도합니다.” 

◇ 신무문관: 우과창령牛過窓欞

본칙(本則): 오조법연 선사께서 ‘비유컨대 물소가 창살 사이로 나올 때 머리와 네발은 모두 나왔는데, 무엇때문에 꼬리[尾巴]는 빠져 나오지 못했는가?[譬如水牯牛過窓欞 頭角四蹄都過了 因甚麽尾巴過不得.]’라고 다그치셨다.

평창(評唱): 무문혜개(無門慧開, 1183-1260) 선사께서 “만약 이에 대하여 (상식과는) 반대로 ‘지혜의 안목[一隻眼]’으로 꿰뚫어 보고 바르게 한마디 이를 수 있다면, 위로는 네 가지 은혜[四恩]에 보답할 것이고 아래로는 뭇중생[三有], 즉 어려운 이웃을 도울 수 있으리라. 혹 그렇지 못하다면, 꼬리를 다시 세밀히 살펴야만 비로소 이를 꿰뚫어 볼 수 있을 것이니라.”라고 제창하셨다.

게송으로 가로되[頌曰], 창살을 지나가면 구덩이에 빠지고/ 우리로 되돌아가면 무너져버리네./ 이 하찮은 물소의 꼬리!/ 참으로 괴이하구나.[過去墮坑塹 回來却被壞. 者些尾巴子 直是甚奇怪.] 

* 군더더기: 공간에 존재하는 대상인 소와 이 소가 살창을 지나간다는 시간적인 경과가 담겨 있으나 문제는 커졌습니다. 상식적으로 지나간다면 다 지나갈 것이지, 하필이면 왜 꼬리만 남겨 놓고 지나갔겠습니까? 도저히 온전한 소일 수는 없습니다. 이 화두도 역시 어째서 하찮은 꼬리는 지나가지 못할까? 라는, 결코 이원적(二元的) 분별(分別)로는 꿰뚫을 수 없는 물음을 제자들에게 던져, 제자들을 일깨우기 위한 오조 스님의 활수완(活手腕)이 담겨 있다고 사료됩니다. 

한편 무문 선사께서는 평창을 통해 “만약 이에 대하여 ‘지혜의 안목’으로 꿰뚫어 보고 바르게 한마디 이를 수 있다면, 위로는 사은, 즉 오늘의 우리가 있기까지 많은 도움을 주신 부모, 이웃, 공동체 및 스승에 대한 네 가지 고마움에 보답할 것이고 아래로는 고통받는 뭇중생을 도우리라.”라고 제창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 역시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동양에서는 사은에 보답하면 인간이라 부르고 모르면 짐승이라고 경멸해 오고 있는데, 이 공안을 제대로 투과하기 전까지는 사은에 제대로 보답할 수 없으니 참인간[無位眞人]이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중생을 바르게 제도할 수도 없으니 석가세존의 진정한 ‘불제자(佛弟子)’가 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이 역시 무문 선사께서 정신 차려 온몸을 던져 치열하게 수행하라고 후학들을 다그치고 있는 것입니다. 

끝으로 지금 온 나라가 의료분란(醫療紛亂) 문제 등을 포함해 두루 어수선합니다. 부디 관련 책임 당사자들 가운데 보다 넓은 안목을 지닌 분들이 ‘동사섭’의 지혜를 멋지게 발휘해, 고통받는 이들의 마음을 편안케 해드릴 수 있기를 간절히 염원드려 봅니다.

관련 선행 자료: 신무문관: 조주구자(趙州狗子)/ 박영재 교수 (<불교닷컴>, 2018.01.25.)

동사섭 관련 자료: <월간금강> 불제자佛弟子로 거듭나기 (<월간금강>, 2017.10.19.) 
 

박영재 교수는 서강대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3년 3월부터 1989년 8월까지 강원대 물리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1989년 9월부터 2021년 2월까지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현재 서강대 물리학과 명예교수이다.

1975년 10월 선도회 종달 이희익 선사 문하로 입문한 박 교수는 1987년 9월 선사의 간화선 입실점검 과정을 모두 마쳤다. 1991년 8월과 1997년 1월 화계사에서 숭산행원 선사로부터 두 차례 독대 점검을 받았다. 1990년 6월 종달 선사 입적 후 지금까지 선도회 지도법사를 맡고 있다. 편저에 <온몸으로 투과하기: 무문관>(본북, 2011), <온몸으로 돕는 지구촌 길벗들>(마음살림, 202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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