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68. 나무 아래서
[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68. 나무 아래서
  • 전재민 시인
  • 승인 2024.06.25 11: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뜨거운 날씨 아파트를 나와

나무를 기둥 삼고 하늘을 지붕 삼아

돗자리 하나 깔고 누우니

세상이 다 내 집 일쎄.
 







#작가의 변
갑자기, 날씨가 뜨거워졌다. 세계적으로는 영상 50도 가까이 올라간 곳도 있어서 우리가 사는 밴쿠버 지역은 사실 정상적인 날씨라고 봐도 무방하다. 더운 날씨에도 그늘에 들어 가면 시원하다. 집안에서 모기가 들어올까 무서워서 문도 못 열고 더위를 견디는 것보다는 공원에 나무 그늘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는 것이 나을 것 같아 돗자리를 들고 공원에 자리를 잡고 누워보니 세상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아들처럼 사람들을 의식해서 문도 닫고 블라인드까지 치고 집안에만 있다면 절대 누릴 수 없는 행복이다. 나는 아들에게 함께 가자고 제안했지만, 가족 중에 아무도 함께하는 사람이 없어서 나 홀로 그늘에 누워 행복을 만끽했다. 공원이니까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멀리 차도에 차 소리도 들려 아주 고요한 곳은 아니지만, 나무를 누워서 올려다보고 있으니 굉장히 우람한 근육질의 체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엔 나뭇가지로 눈을 버티고 겨울을 나고 사람이 보든 안 보든 키가 자라고 체격을 키워 왔던 것 같다.

우린 어제 흘러간 강물과 오늘의 강물을 똑같이 강물이라고 부른다. 분명 강물은 어느 순간 칼로 뚝딱 벨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 구별하기 힘들지만, 어제의 강물과 오늘의 강물은 분명 다르다. 어제는 비가 와서 흙탕물이던 강물이 오늘은 속이 훤히 보이는 강물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우리는 그저 강물이라고 부른다. 나무도 마찬가지다. 어제의 나무와 오늘의 나무는 분명 다르다. 키가 크고 뿌리가 자라서 어제의 나무라 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저 나무라 부른다. 때로는 나무의 종류를 알아서 나무의 종류를 부르기도 한다. 꽃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수많은 꽃의 이름을 부른다고 하지만 사실은 어떤 종류를 부를 뿐이다. 장미를 장미라 부르고 찔레꽃을 찔레꽃이라 부르지 각자 다른 꽃에 이름을 붙여 주진 않는다.

우리는 사물들에 이름을 붙이려고 노력한다. 버럭 바위, 거북 바위, 같은 생김새에 의해 그 이름이 불려 고유 명사가 되기도 한다. 강물이나 시냇물의 이름도 사람들이 편의로 부르게 된다. 두 물줄기가 합쳐진다고 해서 두물머리, 길다고 해서 장강, 누렇다고 해서 황강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강물은 사람들이 어떤 이름으로 부르던지 그 이름에 대답을 하지 않고 관심도 없다. 우리가 어릴 때 두려워하던 성황당이나 고집은 이제 현대사회에 오면서 찾아보기 힘든 장소가 되었다. 신작로는 도로 확장으로 넓혀지고 시골집들이나 밭과 논도 도로가 되기도 한다. 때론 산허리를 끊어서 도로를 내기도 하고 산을 관통하는 터널을 뚫어 연결하기도 한다. 섬도 다리를 놓아 더이상은 섬으로 불려도 섬이 아닌 곳이 많다. 세상은 점점 변하고 지하철에도 이름이 붙고 아파트에도 동마다 이름이 붙기도 한다. 세상은 날마다 변하고 우리는 변하는 세상을 따라가기 바쁘다.

오로지 발품을 팔아 이동하던 산길들이 이젠 인터넷이나 SNS, 유튜브 등을 통해 지구 반대편에서도 알게 되는 일이 벌어 지고 있다. 현실 세계에서(오프라인) 전화할 친구나 만나야 할 친구가 적어도 온라인에서는 친구도 많고 연예인들의 개인사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들이 올리는 영상과 스토리를 통해 그들과 가까워졌다고 느낀다. 팬덤은 사실 무조건적인 사랑과 같다. 유명 연예인을 직접 만나기는 힘들어도 온라인으로 소통이 가능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고 때로는, 그 사이가 특별하고 가깝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유명 연예인은 물론 게이머나 셀럽들을 영상으로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여기서 사랑한다는 말은 좋아하는 것이 지나쳐 집착하는 때도 많다는 이야기다. 가까운 곳에 아니면 이웃에 실물로 존재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화장, 성형, 영상 기술로 만들어 진 가공의 인물을 좋아하기도 한다. AI가 만들어 낸 가공의 인물을 좋아하는 이도 있고 인형인 돌을 사랑하는 상대로 하는 경우도 있다.

한때 나는 성직자나 수도자가 되면 세상의 인연과 단절해서 사니 수도하기 더 좋은 환경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수도원 수녀들의 다큐나 승려가 되기 위해 준비하는 예비자들의 다큐를 보고 내가 생각했던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수도원이나 사찰에서도 사람이 사는 세상이고 그곳 나름의 규칙과 질서가 있기에 무작정 수련만 할 수 있는 환경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사회보다 더욱 육체적으로 가혹하게 몰아가는 경향이 있다. 예비 승려가 되어 수없이 많은 밥을 짓고 설거지하고 농사 등 울력을 하고 틈틈이 기도하고 공부하고 새벽에 일어나 저녁 늦게까지 공동체의 규율에 따라 움직이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수녀원이나 수도원에서도 노동을 통해서 스스로가 살아가는 생활용품들을 조달하고 기도하고 명상하는 시간을 가지며 잠자는 시간을 줄인다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도 어쩌면 중세 시대를 살고 있는 수도자들도 많다. 핸드폰이나 문명의 이기인 컴퓨터들을 가지고 있어 중세 시대의 삶과 다를 수도 있겠지만, 의복이나 생활은 아직도 중세 시대를 살고 있는 것 같은 수도원이 많다. 그들은 누구를 위해 그렇게 자기희생을 하면서 인류를 위해 기도를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물론 무조건 믿어야 이해가 가능한 기독교의 성경이나 교리는 차치하기라도 연애하고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는 평범한 행복을 끊어 버리고 극한의 조건에 나의 육체를 내맡기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자신을 믿지 않으면 할 수 없는 행동이다. 누구의 아들, 누구의 딸로 살아가다가 공동체 소속으로 삶의 터전을 바꾸고 자신의 믿음에 따라 살아가는 삶은 바위보다 무겁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있어야 가능하다.세상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건 없다. 모든 게 마음의 의지와 인연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돌아간다. 내가 수도자가 되겠다는 마음을 내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렇게 이끌어 준 인연이 없었다면 그런 삶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누구누구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로 세속을 떠난 승려로 구도자로 산다는 것은 사람이기에 살아야 하는 세속적인 것을 짊어지고 끊임없이 의심하고 구도 하는 마음으로 수련해야 하는 것이다. 시인이 꽃이라고 불러 주어 꽃이 된 꽃은 없다. 꽃이라고 불러 주기 전에도 꽃을 피웠고 씨앗을 퍼트려 DNA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꽃이기 때문이다. 장미라고 백합이라고 불러 준다고 한들 그 꽃의 개체를 부르는 이름이 될 수 있다. 그저 김 씨, 이 씨라 부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윤회는 없다는 향봉 스님의 영상을 보았다. 처음엔 황당했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깨달음을 얻는다면 공이 된다면 정말 아무것도 없는 진공의 상태가 되는 것이니 윤회를 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과 깨닫지 못한 사람만 윤회하는 것도 말이 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됐다. 깨달음을 이루기 위한 것은 궁극적으로 해탈의 경지 행복을 위한 것인데 진공 상태가 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부처님이 계신 서방정토에서 신들과 세상을 이롭게 할 일을 해야 하는 것이 맞지 않나 싶다. 그리고 윤회가 없다면 행위에 의한 과보를 받는다는 불교 이론의 기본이 무너진다. 향봉 스님은 그것이 불교의 기본 이론이 아니고 베다나 자이나에서 온 이론이라고 하지만 영혼도 없고 윤회도 없다면 동물과 다를 것이 없는 인간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인간은 인간과 가장 비슷한 원숭이들을 사냥해서 먹는 오랜 전통이 있었다. 사람은 약육강식 동물의 세계에서 한낱 동물일 뿐이다.

나무 아래 누워 있을 때 나비가 계속 도망가고 쫓아가고 짝짓기하는 것을 보았다. 짝짓기는 후손을 남기기 위한 본능이다. 그로 인해 자신의 삶이 줄어들고 위험에 처한다 해도 본능적으로 그렇게 한다. 하지만 현재 사람들은 물가 폭등과 주택 가격 폭등 등으로 살기 힘들다고 결혼을 포기하고 후손을 만드는 것도 포기하는 경향이 강하다. 우리가 낳을 때 부모들이 저 먹을 것은 지가 갖고 태어난다고 먹을 것도 없고 병원갈 돈이 없어도 아이를 낳았던 때가 있었다. 세상엔 많은 동물이 있지만 사람들이 지구를 장악하면서 대부분 사라지고 있다. 사람을 해치는 맹수는 지구에서 사라지고 있다. 멧돼지가 산속의 무법자로 활개친다. 사람들이 교육이나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걱정해서 아이를 낳지 않는다면 지구가 어떻게 될까도 생각하게 된다. 사람들이 먹기 위해서 소와 닭, 돼지를 기르듯이 AI나 로봇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 오면 종교는 더 이상 설 자리를 잃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잠시 행복한 것도 사실 고통의 시작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고통을 일단 즐기려 한다. 행복을 위해 사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행위에 대한 처벌이나 두려움이 종교의 자정 작용이기는 하지만 종교도 사실 많이 타락해서 종교인이 줄고 있다. 미래엔 종교 대신 무엇이 나타날지 궁금하다.

--------------------

 

뜨거운 날씨 아파트를 나와

나무를 기둥 삼고 하늘을 지붕 삼아

돗자리 하나 깔고 누우니

세상이 다 내 집 일쎄.
 





 

뜨거운 날씨 아파트를 나와

나무를 기둥 삼고 하늘을 지붕 삼아

돗자리 하나 깔고 누우니

세상이 다 내 집 일쎄.
 







#작가의 변
갑자기, 날씨가 뜨거워졌다. 세계적으로는 영상 50도 가까이 올라간 곳도 있어서 우리가 사는 밴쿠버 지역은 사실 정상적인 날씨라고 봐도 무방하다. 더운 날씨에도 그늘에 들어 가면 시원하다. 집안에서 모기가 들어올까 무서워서 문도 못 열고 더위를 견디는 것보다는 공원에 나무 그늘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는 것이 나을 것 같아 돗자리를 들고 공원에 자리를 잡고 누워보니 세상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아들처럼 사람들을 의식해서 문도 닫고 블라인드까지 치고 집안에만 있다면 절대 누릴 수 없는 행복이다. 나는 아들에게 함께 가자고 제안했지만, 가족 중에 아무도 함께하는 사람이 없어서 나 홀로 그늘에 누워 행복을 만끽했다. 공원이니까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멀리 차도에 차 소리도 들려 아주 고요한 곳은 아니지만, 나무를 누워서 올려다보고 있으니 굉장히 우람한 근육질의 체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엔 나뭇가지로 눈을 버티고 겨울을 나고 사람이 보든 안 보든 키가 자라고 체격을 키워 왔던 것 같다.

우린 어제 흘러간 강물과 오늘의 강물을 똑같이 강물이라고 부른다. 분명 강물은 어느 순간 칼로 뚝딱 벨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 구별하기 힘들지만, 어제의 강물과 오늘의 강물은 분명 다르다. 어제는 비가 와서 흙탕물이던 강물이 오늘은 속이 훤히 보이는 강물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우리는 그저 강물이라고 부른다. 나무도 마찬가지다. 어제의 나무와 오늘의 나무는 분명 다르다. 키가 크고 뿌리가 자라서 어제의 나무라 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저 나무라 부른다. 때로는 나무의 종류를 알아서 나무의 종류를 부르기도 한다. 꽃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수많은 꽃의 이름을 부른다고 하지만 사실은 어떤 종류를 부를 뿐이다. 장미를 장미라 부르고 찔레꽃을 찔레꽃이라 부르지 각자 다른 꽃에 이름을 붙여 주진 않는다.

우리는 사물들에 이름을 붙이려고 노력한다. 버럭 바위, 거북 바위, 같은 생김새에 의해 그 이름이 불려 고유 명사가 되기도 한다. 강물이나 시냇물의 이름도 사람들이 편의로 부르게 된다. 두 물줄기가 합쳐진다고 해서 두물머리, 길다고 해서 장강, 누렇다고 해서 황강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강물은 사람들이 어떤 이름으로 부르던지 그 이름에 대답을 하지 않고 관심도 없다. 우리가 어릴 때 두려워하던 성황당이나 고집은 이제 현대사회에 오면서 찾아보기 힘든 장소가 되었다. 신작로는 도로 확장으로 넓혀지고 시골집들이나 밭과 논도 도로가 되기도 한다. 때론 산허리를 끊어서 도로를 내기도 하고 산을 관통하는 터널을 뚫어 연결하기도 한다. 섬도 다리를 놓아 더이상은 섬으로 불려도 섬이 아닌 곳이 많다. 세상은 점점 변하고 지하철에도 이름이 붙고 아파트에도 동마다 이름이 붙기도 한다. 세상은 날마다 변하고 우리는 변하는 세상을 따라가기 바쁘다.

오로지 발품을 팔아 이동하던 산길들이 이젠 인터넷이나 SNS, 유튜브 등을 통해 지구 반대편에서도 알게 되는 일이 벌어 지고 있다. 현실 세계에서(오프라인) 전화할 친구나 만나야 할 친구가 적어도 온라인에서는 친구도 많고 연예인들의 개인사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들이 올리는 영상과 스토리를 통해 그들과 가까워졌다고 느낀다. 팬덤은 사실 무조건적인 사랑과 같다. 유명 연예인을 직접 만나기는 힘들어도 온라인으로 소통이 가능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고 때로는, 그 사이가 특별하고 가깝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유명 연예인은 물론 게이머나 셀럽들을 영상으로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여기서 사랑한다는 말은 좋아하는 것이 지나쳐 집착하는 때도 많다는 이야기다. 가까운 곳에 아니면 이웃에 실물로 존재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화장, 성형, 영상 기술로 만들어 진 가공의 인물을 좋아하기도 한다. AI가 만들어 낸 가공의 인물을 좋아하는 이도 있고 인형인 돌을 사랑하는 상대로 하는 경우도 있다.

한때 나는 성직자나 수도자가 되면 세상의 인연과 단절해서 사니 수도하기 더 좋은 환경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수도원 수녀들의 다큐나 승려가 되기 위해 준비하는 예비자들의 다큐를 보고 내가 생각했던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수도원이나 사찰에서도 사람이 사는 세상이고 그곳 나름의 규칙과 질서가 있기에 무작정 수련만 할 수 있는 환경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사회보다 더욱 육체적으로 가혹하게 몰아가는 경향이 있다. 예비 승려가 되어 수없이 많은 밥을 짓고 설거지하고 농사 등 울력을 하고 틈틈이 기도하고 공부하고 새벽에 일어나 저녁 늦게까지 공동체의 규율에 따라 움직이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수녀원이나 수도원에서도 노동을 통해서 스스로가 살아가는 생활용품들을 조달하고 기도하고 명상하는 시간을 가지며 잠자는 시간을 줄인다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도 어쩌면 중세 시대를 살고 있는 수도자들도 많다. 핸드폰이나 문명의 이기인 컴퓨터들을 가지고 있어 중세 시대의 삶과 다를 수도 있겠지만, 의복이나 생활은 아직도 중세 시대를 살고 있는 것 같은 수도원이 많다. 그들은 누구를 위해 그렇게 자기희생을 하면서 인류를 위해 기도를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물론 무조건 믿어야 이해가 가능한 기독교의 성경이나 교리는 차치하기라도 연애하고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는 평범한 행복을 끊어 버리고 극한의 조건에 나의 육체를 내맡기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자신을 믿지 않으면 할 수 없는 행동이다. 누구의 아들, 누구의 딸로 살아가다가 공동체 소속으로 삶의 터전을 바꾸고 자신의 믿음에 따라 살아가는 삶은 바위보다 무겁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있어야 가능하다.세상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건 없다. 모든 게 마음의 의지와 인연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돌아간다. 내가 수도자가 되겠다는 마음을 내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렇게 이끌어 준 인연이 없었다면 그런 삶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누구누구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로 세속을 떠난 승려로 구도자로 산다는 것은 사람이기에 살아야 하는 세속적인 것을 짊어지고 끊임없이 의심하고 구도 하는 마음으로 수련해야 하는 것이다. 시인이 꽃이라고 불러 주어 꽃이 된 꽃은 없다. 꽃이라고 불러 주기 전에도 꽃을 피웠고 씨앗을 퍼트려 DNA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꽃이기 때문이다. 장미라고 백합이라고 불러 준다고 한들 그 꽃의 개체를 부르는 이름이 될 수 있다. 그저 김 씨, 이 씨라 부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윤회는 없다는 향봉 스님의 영상을 보았다. 처음엔 황당했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깨달음을 얻는다면 공이 된다면 정말 아무것도 없는 진공의 상태가 되는 것이니 윤회를 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과 깨닫지 못한 사람만 윤회하는 것도 말이 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됐다. 깨달음을 이루기 위한 것은 궁극적으로 해탈의 경지 행복을 위한 것인데 진공 상태가 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부처님이 계신 서방정토에서 신들과 세상을 이롭게 할 일을 해야 하는 것이 맞지 않나 싶다. 그리고 윤회가 없다면 행위에 의한 과보를 받는다는 불교 이론의 기본이 무너진다. 향봉 스님은 그것이 불교의 기본 이론이 아니고 베다나 자이나에서 온 이론이라고 하지만 영혼도 없고 윤회도 없다면 동물과 다를 것이 없는 인간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인간은 인간과 가장 비슷한 원숭이들을 사냥해서 먹는 오랜 전통이 있었다. 사람은 약육강식 동물의 세계에서 한낱 동물일 뿐이다.

나무 아래 누워 있을 때 나비가 계속 도망가고 쫓아가고 짝짓기하는 것을 보았다. 짝짓기는 후손을 남기기 위한 본능이다. 그로 인해 자신의 삶이 줄어들고 위험에 처한다 해도 본능적으로 그렇게 한다. 하지만 현재 사람들은 물가 폭등과 주택 가격 폭등 등으로 살기 힘들다고 결혼을 포기하고 후손을 만드는 것도 포기하는 경향이 강하다. 우리가 낳을 때 부모들이 저 먹을 것은 지가 갖고 태어난다고 먹을 것도 없고 병원갈 돈이 없어도 아이를 낳았던 때가 있었다. 세상엔 많은 동물이 있지만 사람들이 지구를 장악하면서 대부분 사라지고 있다. 사람을 해치는 맹수는 지구에서 사라지고 있다. 멧돼지가 산속의 무법자로 활개친다. 사람들이 교육이나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걱정해서 아이를 낳지 않는다면 지구가 어떻게 될까도 생각하게 된다. 사람들이 먹기 위해서 소와 닭, 돼지를 기르듯이 AI나 로봇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 오면 종교는 더 이상 설 자리를 잃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잠시 행복한 것도 사실 고통의 시작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고통을 일단 즐기려 한다. 행복을 위해 사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행위에 대한 처벌이나 두려움이 종교의 자정 작용이기는 하지만 종교도 사실 많이 타락해서 종교인이 줄고 있다. 미래엔 종교 대신 무엇이 나타날지 궁금하다.

--------------------

#작가의 변
갑자기, 날씨가 뜨거워졌다. 세계적으로는 영상 50도 가까이 올라간 곳도 있어서 우리가 사는 밴쿠버 지역은 사실 정상적인 날씨라고 봐도 무방하다. 더운 날씨에도 그늘에 들어 가면 시원하다. 집안에서 모기가 들어올까 무서워서 문도 못 열고 더위를 견디는 것보다는 공원에 나무 그늘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는 것이 나을 것 같아 돗자리를 들고 공원에 자리를 잡고 누워보니 세상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아들처럼 사람들을 의식해서 문도 닫고 블라인드까지 치고 집안에만 있다면 절대 누릴 수 없는 행복이다. 나는 아들에게 함께 가자고 제안했지만, 가족 중에 아무도 함께하는 사람이 없어서 나 홀로 그늘에 누워 행복을 만끽했다. 공원이니까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멀리 차도에 차 소리도 들려 아주 고요한 곳은 아니지만, 나무를 누워서 올려다보고 있으니 굉장히 우람한 근육질의 체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엔 나뭇가지로 눈을 버티고 겨울을 나고 사람이 보든 안 보든 키가 자라고 체격을 키워 왔던 것 같다.

우린 어제 흘러간 강물과 오늘의 강물을 똑같이 강물이라고 부른다. 분명 강물은 어느 순간 칼로 뚝딱 벨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 구별하기 힘들지만, 어제의 강물과 오늘의 강물은 분명 다르다. 어제는 비가 와서 흙탕물이던 강물이 오늘은 속이 훤히 보이는 강물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우리는 그저 강물이라고 부른다. 나무도 마찬가지다. 어제의 나무와 오늘의 나무는 분명 다르다. 키가 크고 뿌리가 자라서 어제의 나무라 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저 나무라 부른다. 때로는 나무의 종류를 알아서 나무의 종류를 부르기도 한다. 꽃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수많은 꽃의 이름을 부른다고 하지만 사실은 어떤 종류를 부를 뿐이다. 장미를 장미라 부르고 찔레꽃을 찔레꽃이라 부르지 각자 다른 꽃에 이름을 붙여 주진 않는다.

우리는 사물들에 이름을 붙이려고 노력한다. 버럭 바위, 거북 바위, 같은 생김새에 의해 그 이름이 불려 고유 명사가 되기도 한다. 강물이나 시냇물의 이름도 사람들이 편의로 부르게 된다. 두 물줄기가 합쳐진다고 해서 두물머리, 길다고 해서 장강, 누렇다고 해서 황강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강물은 사람들이 어떤 이름으로 부르던지 그 이름에 대답을 하지 않고 관심도 없다. 우리가 어릴 때 두려워하던 성황당이나 고집은 이제 현대사회에 오면서 찾아보기 힘든 장소가 되었다. 신작로는 도로 확장으로 넓혀지고 시골집들이나 밭과 논도 도로가 되기도 한다. 때론 산허리를 끊어서 도로를 내기도 하고 산을 관통하는 터널을 뚫어 연결하기도 한다. 섬도 다리를 놓아 더이상은 섬으로 불려도 섬이 아닌 곳이 많다. 세상은 점점 변하고 지하철에도 이름이 붙고 아파트에도 동마다 이름이 붙기도 한다. 세상은 날마다 변하고 우리는 변하는 세상을 따라가기 바쁘다.

오로지 발품을 팔아 이동하던 산길들이 이젠 인터넷이나 SNS, 유튜브 등을 통해 지구 반대편에서도 알게 되는 일이 벌어 지고 있다. 현실 세계에서(오프라인) 전화할 친구나 만나야 할 친구가 적어도 온라인에서는 친구도 많고 연예인들의 개인사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들이 올리는 영상과 스토리를 통해 그들과 가까워졌다고 느낀다. 팬덤은 사실 무조건적인 사랑과 같다. 유명 연예인을 직접 만나기는 힘들어도 온라인으로 소통이 가능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고 때로는, 그 사이가 특별하고 가깝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유명 연예인은 물론 게이머나 셀럽들을 영상으로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여기서 사랑한다는 말은 좋아하는 것이 지나쳐 집착하는 때도 많다는 이야기다. 가까운 곳에 아니면 이웃에 실물로 존재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화장, 성형, 영상 기술로 만들어 진 가공의 인물을 좋아하기도 한다. AI가 만들어 낸 가공의 인물을 좋아하는 이도 있고 인형인 돌을 사랑하는 상대로 하는 경우도 있다.

한때 나는 성직자나 수도자가 되면 세상의 인연과 단절해서 사니 수도하기 더 좋은 환경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수도원 수녀들의 다큐나 승려가 되기 위해 준비하는 예비자들의 다큐를 보고 내가 생각했던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수도원이나 사찰에서도 사람이 사는 세상이고 그곳 나름의 규칙과 질서가 있기에 무작정 수련만 할 수 있는 환경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사회보다 더욱 육체적으로 가혹하게 몰아가는 경향이 있다. 예비 승려가 되어 수없이 많은 밥을 짓고 설거지하고 농사 등 울력을 하고 틈틈이 기도하고 공부하고 새벽에 일어나 저녁 늦게까지 공동체의 규율에 따라 움직이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수녀원이나 수도원에서도 노동을 통해서 스스로가 살아가는 생활용품들을 조달하고 기도하고 명상하는 시간을 가지며 잠자는 시간을 줄인다는 것이다.





 

뜨거운 날씨 아파트를 나와

나무를 기둥 삼고 하늘을 지붕 삼아

돗자리 하나 깔고 누우니

세상이 다 내 집 일쎄.
 







#작가의 변
갑자기, 날씨가 뜨거워졌다. 세계적으로는 영상 50도 가까이 올라간 곳도 있어서 우리가 사는 밴쿠버 지역은 사실 정상적인 날씨라고 봐도 무방하다. 더운 날씨에도 그늘에 들어 가면 시원하다. 집안에서 모기가 들어올까 무서워서 문도 못 열고 더위를 견디는 것보다는 공원에 나무 그늘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는 것이 나을 것 같아 돗자리를 들고 공원에 자리를 잡고 누워보니 세상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아들처럼 사람들을 의식해서 문도 닫고 블라인드까지 치고 집안에만 있다면 절대 누릴 수 없는 행복이다. 나는 아들에게 함께 가자고 제안했지만, 가족 중에 아무도 함께하는 사람이 없어서 나 홀로 그늘에 누워 행복을 만끽했다. 공원이니까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멀리 차도에 차 소리도 들려 아주 고요한 곳은 아니지만, 나무를 누워서 올려다보고 있으니 굉장히 우람한 근육질의 체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엔 나뭇가지로 눈을 버티고 겨울을 나고 사람이 보든 안 보든 키가 자라고 체격을 키워 왔던 것 같다.

우린 어제 흘러간 강물과 오늘의 강물을 똑같이 강물이라고 부른다. 분명 강물은 어느 순간 칼로 뚝딱 벨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 구별하기 힘들지만, 어제의 강물과 오늘의 강물은 분명 다르다. 어제는 비가 와서 흙탕물이던 강물이 오늘은 속이 훤히 보이는 강물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우리는 그저 강물이라고 부른다. 나무도 마찬가지다. 어제의 나무와 오늘의 나무는 분명 다르다. 키가 크고 뿌리가 자라서 어제의 나무라 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저 나무라 부른다. 때로는 나무의 종류를 알아서 나무의 종류를 부르기도 한다. 꽃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수많은 꽃의 이름을 부른다고 하지만 사실은 어떤 종류를 부를 뿐이다. 장미를 장미라 부르고 찔레꽃을 찔레꽃이라 부르지 각자 다른 꽃에 이름을 붙여 주진 않는다.

우리는 사물들에 이름을 붙이려고 노력한다. 버럭 바위, 거북 바위, 같은 생김새에 의해 그 이름이 불려 고유 명사가 되기도 한다. 강물이나 시냇물의 이름도 사람들이 편의로 부르게 된다. 두 물줄기가 합쳐진다고 해서 두물머리, 길다고 해서 장강, 누렇다고 해서 황강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강물은 사람들이 어떤 이름으로 부르던지 그 이름에 대답을 하지 않고 관심도 없다. 우리가 어릴 때 두려워하던 성황당이나 고집은 이제 현대사회에 오면서 찾아보기 힘든 장소가 되었다. 신작로는 도로 확장으로 넓혀지고 시골집들이나 밭과 논도 도로가 되기도 한다. 때론 산허리를 끊어서 도로를 내기도 하고 산을 관통하는 터널을 뚫어 연결하기도 한다. 섬도 다리를 놓아 더이상은 섬으로 불려도 섬이 아닌 곳이 많다. 세상은 점점 변하고 지하철에도 이름이 붙고 아파트에도 동마다 이름이 붙기도 한다. 세상은 날마다 변하고 우리는 변하는 세상을 따라가기 바쁘다.

오로지 발품을 팔아 이동하던 산길들이 이젠 인터넷이나 SNS, 유튜브 등을 통해 지구 반대편에서도 알게 되는 일이 벌어 지고 있다. 현실 세계에서(오프라인) 전화할 친구나 만나야 할 친구가 적어도 온라인에서는 친구도 많고 연예인들의 개인사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들이 올리는 영상과 스토리를 통해 그들과 가까워졌다고 느낀다. 팬덤은 사실 무조건적인 사랑과 같다. 유명 연예인을 직접 만나기는 힘들어도 온라인으로 소통이 가능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고 때로는, 그 사이가 특별하고 가깝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유명 연예인은 물론 게이머나 셀럽들을 영상으로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여기서 사랑한다는 말은 좋아하는 것이 지나쳐 집착하는 때도 많다는 이야기다. 가까운 곳에 아니면 이웃에 실물로 존재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화장, 성형, 영상 기술로 만들어 진 가공의 인물을 좋아하기도 한다. AI가 만들어 낸 가공의 인물을 좋아하는 이도 있고 인형인 돌을 사랑하는 상대로 하는 경우도 있다.

한때 나는 성직자나 수도자가 되면 세상의 인연과 단절해서 사니 수도하기 더 좋은 환경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수도원 수녀들의 다큐나 승려가 되기 위해 준비하는 예비자들의 다큐를 보고 내가 생각했던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수도원이나 사찰에서도 사람이 사는 세상이고 그곳 나름의 규칙과 질서가 있기에 무작정 수련만 할 수 있는 환경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사회보다 더욱 육체적으로 가혹하게 몰아가는 경향이 있다. 예비 승려가 되어 수없이 많은 밥을 짓고 설거지하고 농사 등 울력을 하고 틈틈이 기도하고 공부하고 새벽에 일어나 저녁 늦게까지 공동체의 규율에 따라 움직이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수녀원이나 수도원에서도 노동을 통해서 스스로가 살아가는 생활용품들을 조달하고 기도하고 명상하는 시간을 가지며 잠자는 시간을 줄인다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도 어쩌면 중세 시대를 살고 있는 수도자들도 많다. 핸드폰이나 문명의 이기인 컴퓨터들을 가지고 있어 중세 시대의 삶과 다를 수도 있겠지만, 의복이나 생활은 아직도 중세 시대를 살고 있는 것 같은 수도원이 많다. 그들은 누구를 위해 그렇게 자기희생을 하면서 인류를 위해 기도를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물론 무조건 믿어야 이해가 가능한 기독교의 성경이나 교리는 차치하기라도 연애하고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는 평범한 행복을 끊어 버리고 극한의 조건에 나의 육체를 내맡기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자신을 믿지 않으면 할 수 없는 행동이다. 누구의 아들, 누구의 딸로 살아가다가 공동체 소속으로 삶의 터전을 바꾸고 자신의 믿음에 따라 살아가는 삶은 바위보다 무겁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있어야 가능하다.세상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건 없다. 모든 게 마음의 의지와 인연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돌아간다. 내가 수도자가 되겠다는 마음을 내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렇게 이끌어 준 인연이 없었다면 그런 삶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누구누구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로 세속을 떠난 승려로 구도자로 산다는 것은 사람이기에 살아야 하는 세속적인 것을 짊어지고 끊임없이 의심하고 구도 하는 마음으로 수련해야 하는 것이다. 시인이 꽃이라고 불러 주어 꽃이 된 꽃은 없다. 꽃이라고 불러 주기 전에도 꽃을 피웠고 씨앗을 퍼트려 DNA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꽃이기 때문이다. 장미라고 백합이라고 불러 준다고 한들 그 꽃의 개체를 부르는 이름이 될 수 있다. 그저 김 씨, 이 씨라 부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윤회는 없다는 향봉 스님의 영상을 보았다. 처음엔 황당했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깨달음을 얻는다면 공이 된다면 정말 아무것도 없는 진공의 상태가 되는 것이니 윤회를 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과 깨닫지 못한 사람만 윤회하는 것도 말이 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됐다. 깨달음을 이루기 위한 것은 궁극적으로 해탈의 경지 행복을 위한 것인데 진공 상태가 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부처님이 계신 서방정토에서 신들과 세상을 이롭게 할 일을 해야 하는 것이 맞지 않나 싶다. 그리고 윤회가 없다면 행위에 의한 과보를 받는다는 불교 이론의 기본이 무너진다. 향봉 스님은 그것이 불교의 기본 이론이 아니고 베다나 자이나에서 온 이론이라고 하지만 영혼도 없고 윤회도 없다면 동물과 다를 것이 없는 인간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인간은 인간과 가장 비슷한 원숭이들을 사냥해서 먹는 오랜 전통이 있었다. 사람은 약육강식 동물의 세계에서 한낱 동물일 뿐이다.

나무 아래 누워 있을 때 나비가 계속 도망가고 쫓아가고 짝짓기하는 것을 보았다. 짝짓기는 후손을 남기기 위한 본능이다. 그로 인해 자신의 삶이 줄어들고 위험에 처한다 해도 본능적으로 그렇게 한다. 하지만 현재 사람들은 물가 폭등과 주택 가격 폭등 등으로 살기 힘들다고 결혼을 포기하고 후손을 만드는 것도 포기하는 경향이 강하다. 우리가 낳을 때 부모들이 저 먹을 것은 지가 갖고 태어난다고 먹을 것도 없고 병원갈 돈이 없어도 아이를 낳았던 때가 있었다. 세상엔 많은 동물이 있지만 사람들이 지구를 장악하면서 대부분 사라지고 있다. 사람을 해치는 맹수는 지구에서 사라지고 있다. 멧돼지가 산속의 무법자로 활개친다. 사람들이 교육이나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걱정해서 아이를 낳지 않는다면 지구가 어떻게 될까도 생각하게 된다. 사람들이 먹기 위해서 소와 닭, 돼지를 기르듯이 AI나 로봇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 오면 종교는 더 이상 설 자리를 잃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잠시 행복한 것도 사실 고통의 시작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고통을 일단 즐기려 한다. 행복을 위해 사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행위에 대한 처벌이나 두려움이 종교의 자정 작용이기는 하지만 종교도 사실 많이 타락해서 종교인이 줄고 있다. 미래엔 종교 대신 무엇이 나타날지 궁금하다.

--------------------

현대사회에서도 어쩌면 중세 시대를 살고 있는 수도자들도 많다. 핸드폰이나 문명의 이기인 컴퓨터들을 가지고 있어 중세 시대의 삶과 다를 수도 있겠지만, 의복이나 생활은 아직도 중세 시대를 살고 있는 것 같은 수도원이 많다. 그들은 누구를 위해 그렇게 자기희생을 하면서 인류를 위해 기도를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물론 무조건 믿어야 이해가 가능한 기독교의 성경이나 교리는 차치하기라도 연애하고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는 평범한 행복을 끊어 버리고 극한의 조건에 나의 육체를 내맡기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자신을 믿지 않으면 할 수 없는 행동이다. 누구의 아들, 누구의 딸로 살아가다가 공동체 소속으로 삶의 터전을 바꾸고 자신의 믿음에 따라 살아가는 삶은 바위보다 무겁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있어야 가능하다.세상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건 없다. 모든 게 마음의 의지와 인연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돌아간다. 내가 수도자가 되겠다는 마음을 내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렇게 이끌어 준 인연이 없었다면 그런 삶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누구누구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로 세속을 떠난 승려로 구도자로 산다는 것은 사람이기에 살아야 하는 세속적인 것을 짊어지고 끊임없이 의심하고 구도 하는 마음으로 수련해야 하는 것이다. 시인이 꽃이라고 불러 주어 꽃이 된 꽃은 없다. 꽃이라고 불러 주기 전에도 꽃을 피웠고 씨앗을 퍼트려 DNA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꽃이기 때문이다. 장미라고 백합이라고 불러 준다고 한들 그 꽃의 개체를 부르는 이름이 될 수 있다. 그저 김 씨, 이 씨라 부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윤회는 없다는 향봉 스님의 영상을 보았다. 처음엔 황당했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깨달음을 얻는다면 공이 된다면 정말 아무것도 없는 진공의 상태가 되는 것이니 윤회를 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과 깨닫지 못한 사람만 윤회하는 것도 말이 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됐다. 깨달음을 이루기 위한 것은 궁극적으로 해탈의 경지 행복을 위한 것인데 진공 상태가 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부처님이 계신 서방정토에서 신들과 세상을 이롭게 할 일을 해야 하는 것이 맞지 않나 싶다. 그리고 윤회가 없다면 행위에 의한 과보를 받는다는 불교 이론의 기본이 무너진다. 향봉 스님은 그것이 불교의 기본 이론이 아니고 베다나 자이나에서 온 이론이라고 하지만 영혼도 없고 윤회도 없다면 동물과 다를 것이 없는 인간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인간은 인간과 가장 비슷한 원숭이들을 사냥해서 먹는 오랜 전통이 있었다. 사람은 약육강식 동물의 세계에서 한낱 동물일 뿐이다.

나무 아래 누워 있을 때 나비가 계속 도망가고 쫓아가고 짝짓기하는 것을 보았다. 짝짓기는 후손을 남기기 위한 본능이다. 그로 인해 자신의 삶이 줄어들고 위험에 처한다 해도 본능적으로 그렇게 한다. 하지만 현재 사람들은 물가 폭등과 주택 가격 폭등 등으로 살기 힘들다고 결혼을 포기하고 후손을 만드는 것도 포기하는 경향이 강하다. 우리가 낳을 때 부모들이 저 먹을 것은 지가 갖고 태어난다고 먹을 것도 없고 병원갈 돈이 없어도 아이를 낳았던 때가 있었다. 세상엔 많은 동물이 있지만 사람들이 지구를 장악하면서 대부분 사라지고 있다. 사람을 해치는 맹수는 지구에서 사라지고 있다. 멧돼지가 산속의 무법자로 활개친다. 사람들이 교육이나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걱정해서 아이를 낳지 않는다면 지구가 어떻게 될까도 생각하게 된다. 사람들이 먹기 위해서 소와 닭, 돼지를 기르듯이 AI나 로봇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 오면 종교는 더 이상 설 자리를 잃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잠시 행복한 것도 사실 고통의 시작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고통을 일단 즐기려 한다. 행복을 위해 사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행위에 대한 처벌이나 두려움이 종교의 자정 작용이기는 하지만 종교도 사실 많이 타락해서 종교인이 줄고 있다. 미래엔 종교 대신 무엇이 나타날지 궁금하다.

--------------------





 

뜨거운 날씨 아파트를 나와

나무를 기둥 삼고 하늘을 지붕 삼아

돗자리 하나 깔고 누우니

세상이 다 내 집 일쎄.
 







#작가의 변
갑자기, 날씨가 뜨거워졌다. 세계적으로는 영상 50도 가까이 올라간 곳도 있어서 우리가 사는 밴쿠버 지역은 사실 정상적인 날씨라고 봐도 무방하다. 더운 날씨에도 그늘에 들어 가면 시원하다. 집안에서 모기가 들어올까 무서워서 문도 못 열고 더위를 견디는 것보다는 공원에 나무 그늘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는 것이 나을 것 같아 돗자리를 들고 공원에 자리를 잡고 누워보니 세상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아들처럼 사람들을 의식해서 문도 닫고 블라인드까지 치고 집안에만 있다면 절대 누릴 수 없는 행복이다. 나는 아들에게 함께 가자고 제안했지만, 가족 중에 아무도 함께하는 사람이 없어서 나 홀로 그늘에 누워 행복을 만끽했다. 공원이니까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멀리 차도에 차 소리도 들려 아주 고요한 곳은 아니지만, 나무를 누워서 올려다보고 있으니 굉장히 우람한 근육질의 체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엔 나뭇가지로 눈을 버티고 겨울을 나고 사람이 보든 안 보든 키가 자라고 체격을 키워 왔던 것 같다.

우린 어제 흘러간 강물과 오늘의 강물을 똑같이 강물이라고 부른다. 분명 강물은 어느 순간 칼로 뚝딱 벨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 구별하기 힘들지만, 어제의 강물과 오늘의 강물은 분명 다르다. 어제는 비가 와서 흙탕물이던 강물이 오늘은 속이 훤히 보이는 강물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우리는 그저 강물이라고 부른다. 나무도 마찬가지다. 어제의 나무와 오늘의 나무는 분명 다르다. 키가 크고 뿌리가 자라서 어제의 나무라 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저 나무라 부른다. 때로는 나무의 종류를 알아서 나무의 종류를 부르기도 한다. 꽃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수많은 꽃의 이름을 부른다고 하지만 사실은 어떤 종류를 부를 뿐이다. 장미를 장미라 부르고 찔레꽃을 찔레꽃이라 부르지 각자 다른 꽃에 이름을 붙여 주진 않는다.

우리는 사물들에 이름을 붙이려고 노력한다. 버럭 바위, 거북 바위, 같은 생김새에 의해 그 이름이 불려 고유 명사가 되기도 한다. 강물이나 시냇물의 이름도 사람들이 편의로 부르게 된다. 두 물줄기가 합쳐진다고 해서 두물머리, 길다고 해서 장강, 누렇다고 해서 황강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강물은 사람들이 어떤 이름으로 부르던지 그 이름에 대답을 하지 않고 관심도 없다. 우리가 어릴 때 두려워하던 성황당이나 고집은 이제 현대사회에 오면서 찾아보기 힘든 장소가 되었다. 신작로는 도로 확장으로 넓혀지고 시골집들이나 밭과 논도 도로가 되기도 한다. 때론 산허리를 끊어서 도로를 내기도 하고 산을 관통하는 터널을 뚫어 연결하기도 한다. 섬도 다리를 놓아 더이상은 섬으로 불려도 섬이 아닌 곳이 많다. 세상은 점점 변하고 지하철에도 이름이 붙고 아파트에도 동마다 이름이 붙기도 한다. 세상은 날마다 변하고 우리는 변하는 세상을 따라가기 바쁘다.

오로지 발품을 팔아 이동하던 산길들이 이젠 인터넷이나 SNS, 유튜브 등을 통해 지구 반대편에서도 알게 되는 일이 벌어 지고 있다. 현실 세계에서(오프라인) 전화할 친구나 만나야 할 친구가 적어도 온라인에서는 친구도 많고 연예인들의 개인사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들이 올리는 영상과 스토리를 통해 그들과 가까워졌다고 느낀다. 팬덤은 사실 무조건적인 사랑과 같다. 유명 연예인을 직접 만나기는 힘들어도 온라인으로 소통이 가능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고 때로는, 그 사이가 특별하고 가깝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유명 연예인은 물론 게이머나 셀럽들을 영상으로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여기서 사랑한다는 말은 좋아하는 것이 지나쳐 집착하는 때도 많다는 이야기다. 가까운 곳에 아니면 이웃에 실물로 존재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화장, 성형, 영상 기술로 만들어 진 가공의 인물을 좋아하기도 한다. AI가 만들어 낸 가공의 인물을 좋아하는 이도 있고 인형인 돌을 사랑하는 상대로 하는 경우도 있다.

한때 나는 성직자나 수도자가 되면 세상의 인연과 단절해서 사니 수도하기 더 좋은 환경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수도원 수녀들의 다큐나 승려가 되기 위해 준비하는 예비자들의 다큐를 보고 내가 생각했던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수도원이나 사찰에서도 사람이 사는 세상이고 그곳 나름의 규칙과 질서가 있기에 무작정 수련만 할 수 있는 환경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사회보다 더욱 육체적으로 가혹하게 몰아가는 경향이 있다. 예비 승려가 되어 수없이 많은 밥을 짓고 설거지하고 농사 등 울력을 하고 틈틈이 기도하고 공부하고 새벽에 일어나 저녁 늦게까지 공동체의 규율에 따라 움직이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수녀원이나 수도원에서도 노동을 통해서 스스로가 살아가는 생활용품들을 조달하고 기도하고 명상하는 시간을 가지며 잠자는 시간을 줄인다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도 어쩌면 중세 시대를 살고 있는 수도자들도 많다. 핸드폰이나 문명의 이기인 컴퓨터들을 가지고 있어 중세 시대의 삶과 다를 수도 있겠지만, 의복이나 생활은 아직도 중세 시대를 살고 있는 것 같은 수도원이 많다. 그들은 누구를 위해 그렇게 자기희생을 하면서 인류를 위해 기도를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물론 무조건 믿어야 이해가 가능한 기독교의 성경이나 교리는 차치하기라도 연애하고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는 평범한 행복을 끊어 버리고 극한의 조건에 나의 육체를 내맡기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자신을 믿지 않으면 할 수 없는 행동이다. 누구의 아들, 누구의 딸로 살아가다가 공동체 소속으로 삶의 터전을 바꾸고 자신의 믿음에 따라 살아가는 삶은 바위보다 무겁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있어야 가능하다.세상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건 없다. 모든 게 마음의 의지와 인연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돌아간다. 내가 수도자가 되겠다는 마음을 내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렇게 이끌어 준 인연이 없었다면 그런 삶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누구누구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로 세속을 떠난 승려로 구도자로 산다는 것은 사람이기에 살아야 하는 세속적인 것을 짊어지고 끊임없이 의심하고 구도 하는 마음으로 수련해야 하는 것이다. 시인이 꽃이라고 불러 주어 꽃이 된 꽃은 없다. 꽃이라고 불러 주기 전에도 꽃을 피웠고 씨앗을 퍼트려 DNA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꽃이기 때문이다. 장미라고 백합이라고 불러 준다고 한들 그 꽃의 개체를 부르는 이름이 될 수 있다. 그저 김 씨, 이 씨라 부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윤회는 없다는 향봉 스님의 영상을 보았다. 처음엔 황당했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깨달음을 얻는다면 공이 된다면 정말 아무것도 없는 진공의 상태가 되는 것이니 윤회를 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과 깨닫지 못한 사람만 윤회하는 것도 말이 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됐다. 깨달음을 이루기 위한 것은 궁극적으로 해탈의 경지 행복을 위한 것인데 진공 상태가 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부처님이 계신 서방정토에서 신들과 세상을 이롭게 할 일을 해야 하는 것이 맞지 않나 싶다. 그리고 윤회가 없다면 행위에 의한 과보를 받는다는 불교 이론의 기본이 무너진다. 향봉 스님은 그것이 불교의 기본 이론이 아니고 베다나 자이나에서 온 이론이라고 하지만 영혼도 없고 윤회도 없다면 동물과 다를 것이 없는 인간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인간은 인간과 가장 비슷한 원숭이들을 사냥해서 먹는 오랜 전통이 있었다. 사람은 약육강식 동물의 세계에서 한낱 동물일 뿐이다.

나무 아래 누워 있을 때 나비가 계속 도망가고 쫓아가고 짝짓기하는 것을 보았다. 짝짓기는 후손을 남기기 위한 본능이다. 그로 인해 자신의 삶이 줄어들고 위험에 처한다 해도 본능적으로 그렇게 한다. 하지만 현재 사람들은 물가 폭등과 주택 가격 폭등 등으로 살기 힘들다고 결혼을 포기하고 후손을 만드는 것도 포기하는 경향이 강하다. 우리가 낳을 때 부모들이 저 먹을 것은 지가 갖고 태어난다고 먹을 것도 없고 병원갈 돈이 없어도 아이를 낳았던 때가 있었다. 세상엔 많은 동물이 있지만 사람들이 지구를 장악하면서 대부분 사라지고 있다. 사람을 해치는 맹수는 지구에서 사라지고 있다. 멧돼지가 산속의 무법자로 활개친다. 사람들이 교육이나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걱정해서 아이를 낳지 않는다면 지구가 어떻게 될까도 생각하게 된다. 사람들이 먹기 위해서 소와 닭, 돼지를 기르듯이 AI나 로봇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 오면 종교는 더 이상 설 자리를 잃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잠시 행복한 것도 사실 고통의 시작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고통을 일단 즐기려 한다. 행복을 위해 사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행위에 대한 처벌이나 두려움이 종교의 자정 작용이기는 하지만 종교도 사실 많이 타락해서 종교인이 줄고 있다. 미래엔 종교 대신 무엇이 나타날지 궁금하다.

--------------------

#전재민(Terry)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이 기사에 대한 반론 및 기사 제보 mytrea70@gmail.com]

"이 기사를 응원합니다." 불교닷컴 자발적 유료화 신청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11길 16 대형빌딩 4층
  • 대표전화 : (02) 734-7336
  • 팩스 : (02) 6280-2551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석만
  • 대표 : 이석만
  • 사업자번호 : 101-11-47022
  • 법인명 : 불교닷컴
  • 제호 : 불교닷컴
  • 등록번호 : 서울, 아05082
  • 등록일 : 2018-04-05
  • 발행일 : 2006-01-21
  • 발행인 : 이석만
  • 편집인 : 이석만
  • 불교닷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불교닷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asan2580@gmail.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