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67. 천사
[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67. 천사
  • 전재민 시인
  • 승인 2024.06.18 15: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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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라 부르지 마라
천사라 불리는 형상만 있을 뿐이다.
천사를 부르지 마라
의지하는 마음만 생길 뿐이니
천사조차 시간이 지나면 솜사탕처럼 사라지고.







#작가의 변
며칠 전 친구가 카톡으로 이런 글을 보내왔다.

[풀리지 않던 의문]​

고승들의 수명을 조사하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한국 불교의 큰 스님이신

효봉 스님은 79세,

이청담 스님은 70세,

성철 스님은 82세,

법정 스님은 79세에 돌아가셨다.

이분들은 불교계의 고승들로 다 훌륭하신 분들이다.

그런데 90세를 넘기신 분이 없었다.​

그러나 훌륭하셨던 개신교 목사님들 중에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님은 99세,

영등포교회 방지일 목사님은 104세,

충현교회 김창인 목사님은 96세,

경동교회 강원용 목사님은 90세에 돌아가셨다. 모두 90세를 넘기셨다.

고승들의 평균수명은 77.5세이고,

훌륭하셨던 목사님들의 평균수명은 97세다.

고승들과의 평균수명이 자그마치 20년이나 차이가 난다. 원인은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사람이 건강해지려면 가장 많이 먹는 것을

가장 좋은 것으로 먹어야 한다.

그렇다면 사람이 가장 많이 먹는 것은 무엇일까?

공기다.

공기는 잠잘 때도 먹어야 한다.

“나, 공기 먹는 것이 지겨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죽어야 한다.

두 번째로 많이 먹는 것은 물이다.

그래서 좋은 공기와좋은 물을 먹으면

세포가 건강해진다.

그런데 스님들은 깊은 산속에서

깨끗한 공기와 깨끗한 물을 마실 뿐만 아니라

오염되지 않은 온갖 좋은 채소와 산나물과 약초를 먹으며 산다.

더군다나 108번뇌에서 벗어나기 위해

참선을 하며 무념을 유지한다.

곧 고요한 평안을 유지하며

108번뇌에서 벗어나 해탈한다.

그러나 목사님들은 공기도 좋지 않은 도시에 살면서

매일 새벽 설교와 주일설교와 수요설교를 준비하느라 힘든 시간을 보내며

또 교인들로부터는 온갖 근심거리를 들으며 산다.

그런데도 목사님들의 평균수명은 고승들보다 20년이나 더 길었다.

4~5년도 아니고 20년이면 엄청난 차이다.

이것은 내가 풀 수 없는 의문 중의 의문이었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1993년 성철 스님이 내놓으셨다.

스님은 이런 유언을 남기고 떠나셨다.

(93/11.9조선, 동아, 일간 신문들)

“내 인생을 잘못 선택했다.

나는 지옥에 간다.

내 죄는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데

내 어찌 감당하랴.

내가 80년 동안 포교한 것이 헛것이로다.

우리는 구원이 없다.

죗값을 해결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

성철 스님이 “죄의 값”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셨다.

내가 금강경을 십여 차례 읽으면서 깜짝 놀란 일이 있었다.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 예수님의

가르침과 똑같은 말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강경에 없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내 죄는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데 내 어찌 감당하랴. 우리는 구원이 없다.

죗값을 해결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

성철 스님께서 죄의 문제를 정확히 짚은 것이다.

자신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까?

핵폭탄을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지 않았을까?

지은 죄를 잊어버린다고 잊힐 수 있을까?

죄를 짓고도 “내가 지은 죄는 기억나지 않아” 이러면

자신이 “위선자”가 된다는 사실에 더욱 갈등하게 된다.

이런 갈등이 고승들의 수명을 단축시켰으리라 생각해 본다.

그러나 목사님들은 늘 회개하며 죄를 씻고 산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깨끗하게 살려고 노력한다. 이것이 고승들과 다른 점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속의 은혜를 믿고 날마다 지은 죄를 회개하며 살면

정신만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온몸의 세포까지 건강해진다고 믿는다.

우리 모두,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생각하며,

날마다 회개하면서, 천국에 이르기를 축복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출처] [풀리지 않던 의문] (이상 펌글)







나는 이 글을 읽고 이 글을 쓴 이가 불교에 조금 관심이 있는 이라는 생각과 그가 불교에 관심을 가지면서, 그 불교 관심을 불교를 이해하고 공부하는 곳에 사용하지 않고 불교를 비방하는 곳에 사용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수의 나이가 뭐가 중요한지 나는 이해 할 수 없다. 건강하게 살다가 아프지 않고 최대한 빠르게 죽는 것이 사실은 가장 행복한 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에는 아파도 병원에 거리가 멀어서 돈이 없어서 등의 이유로 가지 못하고 죽는 사람들이 많았다. 물론 지금도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하고 그냥 병을 키우다가 죽어 가는 사람도 많다. 물론 정기적으로 병원에 가서 검진받아도 암을 발견하지 못하다 4기가 지나 서야 알게 되는 경우도 많다.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참선 수행을 하는 스님들의 평균수명이 도시에 살던 목사들보다 20년이나 적다는 그의 가설이 얼마나 뜬금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도시에 공기도 안 좋고 세속에서 찌든 목사들이 더 사는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아파도 기도하면 해결 가능하다고 말하는 전도사 친구가 있다. 우리가 어려운 일에 닥칠 때 마다 하느님 앞에 기도하지 않아서라고 말한다. 즉 그의 말에 의하면 하느님의 영험한 힘이 부처님의 능력을 넘어선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감기에 걸리면 약을 먹고 낫는 것이 정상이지 기도해서 나아지기를 바라는 것은 모순이자 종교를 마치 만병통치약으로 여기는 것과 같다.

종교의 궁극적 목적은 심신의 안정이다. 그럼에도 항상 친구와 이웃의 종교를 비하하고 전도하려는 자세는 정말 잘못된 자세라고 생각한다. 서로의 종교를 존중할 때 서로가 편안해진다는 아주 기본조차도 잊은 것이다.

성철 스님의 유언까지 끌어와서 원죄에 대해서 말하려 하는 그 의도는 알겠으나 나는 원죄에 대한 생각을 일반인들에게 묻고 싶다.

요즘엔 부모에게 유산을 물려받아 출발부터 부자인 사람들이 정말 많다. 성경에도 불경에도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지만, 현대인들은 재산을 많이 물려주는 부모들을 더 소중하게 여긴다. 물려줄 유산이 없는 부모는 다른 부모가 그렇게 유산을 물려줄 때 뭣을 했냐고 따지기까지 한다. 부모들도 아파트 한 채라도 물려 주려고 안간힘을 쓰고 정작 유산을 상속하고 나서 부모를 돌보지 않아 현대판 고려장의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기도 한다.

그런데 수천 년 전에 있었던 원죄로 인해 모든 인류가 아담과 하와의 에덴동산에서 먹지 말라는 과일을 사탄의 꾀임에 빠져 먹었다는 그 원죄로 인류가 죽음의 고통과 에덴동산에서 내쳐 짐을 당했다는 신화 같은 그 이야기 속의 원죄로 인해 인류 모두가 고통 속에 살고 죽음의 고통을 맛봐야 한다면 믿을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그리고 성경에도 로마서에서만 이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그럼에도 예수의 죽음이 인류의 원죄를 대속하기 위해 이 땅에 왔다는 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계속 이런 말도 안되는 성철스님의 유언까지 끌어들이는 행태가 이해되지 않는다.

서로의 종교를 존중해야 하는 기본을 지키지 않고,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얻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해되지 않는다. 불경을 성경을 합리화하기 위한 도구로 연구하고 일부 구절을 인용해서 거봐라 하는 것은 타 종교를 모욕하는 것이다.

유산 상속에서도 부모의 재산 중에 부채가 더 많으면 유산 상속을 거부하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태어나기도 수천 년 전에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인 원죄로 인해 우리는 에덴동산에서 살지 못하고 죽음의 그늘에서 살아간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그 유산을 받을지 의문이다. 하지만 예수가 이 땅에 와서 인류의 죄를 대신해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대속했다는 그 말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신도들이 이상한 것이 아닌가 싶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설에 의하면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자 하느님과 같은 일체인데 대속을 한다는 자체도 좀 코미디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성철스님의 어록 중에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선문답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그 당연한 말을 고승이 했으니, 무언가 깊은 뜻이 있다고 싶지만, 사실 우매한 일반인들이 보기엔 당연한 말을 쓸데없이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우리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가장 기본적인 명제도 잊고 지식의 바다에서 끝없이 지식을 갈구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지구의 깊은 곳 심연의 바닷속에도 가보지 못한 인류가 우주 정복을 운운하는 것과 같다. 심해 바다에 이상 망측하게 생긴 어류가 나타나면 대지진의 전조니 하면서 인류의 언론들이 화들짝 놀라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만큼 인류는 내일이 두려운 것이다. 종교가 인류에게 끼치는 영향이 큰 것은 그들 마음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크기 때문이다. 재림예수라든지 미륵불의 이야기를 그냥 이야기로 치부하고 정작 예수의 재림에도 미륵불의 출현에도 인류는 정작 믿지 않을지도 모른다.

폭우, 폭염, 홍수, 가뭄, 지진, 해일 등은 물론 지구의 온난화 등 우리에게 닥친 위기에 정부는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그저 집에서 나오지 말거나 대피하라는 비상 안내문밖에 내놓지 못하듯이 종교가 불안해하는 인류에게 불사나 시주, 템플스테이, 누워있는 와불세우기 등으로 재정 불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진정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불교 본연의 일 즉 부처님의 자비를 실천해야 할 것이다.

폭우와 폭염, 홍수와 가뭄, 지진, 태풍 같은 것들을 과학으로 해결할 생각은 하지 않고 무기를 만드는 일에만 집중하는 세계 모든 나라들은 아직도 원시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기 때문에 힘을 기르려고 하는 것이다. 자연재해를 공동으로 해결할 생각이나 연구하기보다는 남의 땅을 뺏고 남의 재산을 빼앗아 내 배를 불리려고 하는 것이다.

의학이 발달해서 오래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나니 노년층의 연금 등 노인들에 들어가는 재정에 대해 많은 정부에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요양원에서 병원에서 침대에 누워서 십 년 이상을 산다는 것은 고문이다. 누구나 아프지 않고 살다가 죽는 것을 꿈꾼다. 하지만 현대 의학이 발달하면서 오히려 생명은 연장되었는지 몰라도 사람답게 사는 삶이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 될 것이다.

빈 병을 줍고 폐지를 주우면서 살아가는 노인들이 많다. 그들이 그렇게 살아가도 행복하다면 문제가 안 되지만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사는 것이라면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미 천년을 누워있는 와불을 일으켜 세우는 것보다 이 땅에 살아도 부처님의 법을 모르고 살아가는 노인들을 위해 호스피스 병동을 세우고 그들이 죽음에서 두렵지 않게 하는 것이 종교가 해야 하는 것이다. 아프고 배고픈 홈리스나 노인들에게 한 끼 배불리 먹이고 머리 아픈 이에게 진통제를 줄 수 있는 종교가 참 종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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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라 부르지 마라
천사라 불리는 형상만 있을 뿐이다.
천사를 부르지 마라
의지하는 마음만 생길 뿐이니
천사조차 시간이 지나면 솜사탕처럼 사라지고.





천사라 부르지 마라
천사라 불리는 형상만 있을 뿐이다.
천사를 부르지 마라
의지하는 마음만 생길 뿐이니
천사조차 시간이 지나면 솜사탕처럼 사라지고.







#작가의 변
며칠 전 친구가 카톡으로 이런 글을 보내왔다.

[풀리지 않던 의문]​

고승들의 수명을 조사하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한국 불교의 큰 스님이신

효봉 스님은 79세,

이청담 스님은 70세,

성철 스님은 82세,

법정 스님은 79세에 돌아가셨다.

이분들은 불교계의 고승들로 다 훌륭하신 분들이다.

그런데 90세를 넘기신 분이 없었다.​

그러나 훌륭하셨던 개신교 목사님들 중에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님은 99세,

영등포교회 방지일 목사님은 104세,

충현교회 김창인 목사님은 96세,

경동교회 강원용 목사님은 90세에 돌아가셨다. 모두 90세를 넘기셨다.

고승들의 평균수명은 77.5세이고,

훌륭하셨던 목사님들의 평균수명은 97세다.

고승들과의 평균수명이 자그마치 20년이나 차이가 난다. 원인은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사람이 건강해지려면 가장 많이 먹는 것을

가장 좋은 것으로 먹어야 한다.

그렇다면 사람이 가장 많이 먹는 것은 무엇일까?

공기다.

공기는 잠잘 때도 먹어야 한다.

“나, 공기 먹는 것이 지겨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죽어야 한다.

두 번째로 많이 먹는 것은 물이다.

그래서 좋은 공기와좋은 물을 먹으면

세포가 건강해진다.

그런데 스님들은 깊은 산속에서

깨끗한 공기와 깨끗한 물을 마실 뿐만 아니라

오염되지 않은 온갖 좋은 채소와 산나물과 약초를 먹으며 산다.

더군다나 108번뇌에서 벗어나기 위해

참선을 하며 무념을 유지한다.

곧 고요한 평안을 유지하며

108번뇌에서 벗어나 해탈한다.

그러나 목사님들은 공기도 좋지 않은 도시에 살면서

매일 새벽 설교와 주일설교와 수요설교를 준비하느라 힘든 시간을 보내며

또 교인들로부터는 온갖 근심거리를 들으며 산다.

그런데도 목사님들의 평균수명은 고승들보다 20년이나 더 길었다.

4~5년도 아니고 20년이면 엄청난 차이다.

이것은 내가 풀 수 없는 의문 중의 의문이었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1993년 성철 스님이 내놓으셨다.

스님은 이런 유언을 남기고 떠나셨다.

(93/11.9조선, 동아, 일간 신문들)

“내 인생을 잘못 선택했다.

나는 지옥에 간다.

내 죄는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데

내 어찌 감당하랴.

내가 80년 동안 포교한 것이 헛것이로다.

우리는 구원이 없다.

죗값을 해결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

성철 스님이 “죄의 값”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셨다.

내가 금강경을 십여 차례 읽으면서 깜짝 놀란 일이 있었다.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 예수님의

가르침과 똑같은 말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강경에 없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내 죄는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데 내 어찌 감당하랴. 우리는 구원이 없다.

죗값을 해결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

성철 스님께서 죄의 문제를 정확히 짚은 것이다.

자신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까?

핵폭탄을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지 않았을까?

지은 죄를 잊어버린다고 잊힐 수 있을까?

죄를 짓고도 “내가 지은 죄는 기억나지 않아” 이러면

자신이 “위선자”가 된다는 사실에 더욱 갈등하게 된다.

이런 갈등이 고승들의 수명을 단축시켰으리라 생각해 본다.

그러나 목사님들은 늘 회개하며 죄를 씻고 산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깨끗하게 살려고 노력한다. 이것이 고승들과 다른 점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속의 은혜를 믿고 날마다 지은 죄를 회개하며 살면

정신만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온몸의 세포까지 건강해진다고 믿는다.

우리 모두,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생각하며,

날마다 회개하면서, 천국에 이르기를 축복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출처] [풀리지 않던 의문] (이상 펌글)







나는 이 글을 읽고 이 글을 쓴 이가 불교에 조금 관심이 있는 이라는 생각과 그가 불교에 관심을 가지면서, 그 불교 관심을 불교를 이해하고 공부하는 곳에 사용하지 않고 불교를 비방하는 곳에 사용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수의 나이가 뭐가 중요한지 나는 이해 할 수 없다. 건강하게 살다가 아프지 않고 최대한 빠르게 죽는 것이 사실은 가장 행복한 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에는 아파도 병원에 거리가 멀어서 돈이 없어서 등의 이유로 가지 못하고 죽는 사람들이 많았다. 물론 지금도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하고 그냥 병을 키우다가 죽어 가는 사람도 많다. 물론 정기적으로 병원에 가서 검진받아도 암을 발견하지 못하다 4기가 지나 서야 알게 되는 경우도 많다.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참선 수행을 하는 스님들의 평균수명이 도시에 살던 목사들보다 20년이나 적다는 그의 가설이 얼마나 뜬금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도시에 공기도 안 좋고 세속에서 찌든 목사들이 더 사는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아파도 기도하면 해결 가능하다고 말하는 전도사 친구가 있다. 우리가 어려운 일에 닥칠 때 마다 하느님 앞에 기도하지 않아서라고 말한다. 즉 그의 말에 의하면 하느님의 영험한 힘이 부처님의 능력을 넘어선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감기에 걸리면 약을 먹고 낫는 것이 정상이지 기도해서 나아지기를 바라는 것은 모순이자 종교를 마치 만병통치약으로 여기는 것과 같다.

종교의 궁극적 목적은 심신의 안정이다. 그럼에도 항상 친구와 이웃의 종교를 비하하고 전도하려는 자세는 정말 잘못된 자세라고 생각한다. 서로의 종교를 존중할 때 서로가 편안해진다는 아주 기본조차도 잊은 것이다.

성철 스님의 유언까지 끌어와서 원죄에 대해서 말하려 하는 그 의도는 알겠으나 나는 원죄에 대한 생각을 일반인들에게 묻고 싶다.

요즘엔 부모에게 유산을 물려받아 출발부터 부자인 사람들이 정말 많다. 성경에도 불경에도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지만, 현대인들은 재산을 많이 물려주는 부모들을 더 소중하게 여긴다. 물려줄 유산이 없는 부모는 다른 부모가 그렇게 유산을 물려줄 때 뭣을 했냐고 따지기까지 한다. 부모들도 아파트 한 채라도 물려 주려고 안간힘을 쓰고 정작 유산을 상속하고 나서 부모를 돌보지 않아 현대판 고려장의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기도 한다.

그런데 수천 년 전에 있었던 원죄로 인해 모든 인류가 아담과 하와의 에덴동산에서 먹지 말라는 과일을 사탄의 꾀임에 빠져 먹었다는 그 원죄로 인류가 죽음의 고통과 에덴동산에서 내쳐 짐을 당했다는 신화 같은 그 이야기 속의 원죄로 인해 인류 모두가 고통 속에 살고 죽음의 고통을 맛봐야 한다면 믿을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그리고 성경에도 로마서에서만 이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그럼에도 예수의 죽음이 인류의 원죄를 대속하기 위해 이 땅에 왔다는 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계속 이런 말도 안되는 성철스님의 유언까지 끌어들이는 행태가 이해되지 않는다.

서로의 종교를 존중해야 하는 기본을 지키지 않고,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얻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해되지 않는다. 불경을 성경을 합리화하기 위한 도구로 연구하고 일부 구절을 인용해서 거봐라 하는 것은 타 종교를 모욕하는 것이다.

유산 상속에서도 부모의 재산 중에 부채가 더 많으면 유산 상속을 거부하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태어나기도 수천 년 전에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인 원죄로 인해 우리는 에덴동산에서 살지 못하고 죽음의 그늘에서 살아간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그 유산을 받을지 의문이다. 하지만 예수가 이 땅에 와서 인류의 죄를 대신해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대속했다는 그 말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신도들이 이상한 것이 아닌가 싶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설에 의하면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자 하느님과 같은 일체인데 대속을 한다는 자체도 좀 코미디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성철스님의 어록 중에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선문답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그 당연한 말을 고승이 했으니, 무언가 깊은 뜻이 있다고 싶지만, 사실 우매한 일반인들이 보기엔 당연한 말을 쓸데없이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우리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가장 기본적인 명제도 잊고 지식의 바다에서 끝없이 지식을 갈구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지구의 깊은 곳 심연의 바닷속에도 가보지 못한 인류가 우주 정복을 운운하는 것과 같다. 심해 바다에 이상 망측하게 생긴 어류가 나타나면 대지진의 전조니 하면서 인류의 언론들이 화들짝 놀라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만큼 인류는 내일이 두려운 것이다. 종교가 인류에게 끼치는 영향이 큰 것은 그들 마음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크기 때문이다. 재림예수라든지 미륵불의 이야기를 그냥 이야기로 치부하고 정작 예수의 재림에도 미륵불의 출현에도 인류는 정작 믿지 않을지도 모른다.

폭우, 폭염, 홍수, 가뭄, 지진, 해일 등은 물론 지구의 온난화 등 우리에게 닥친 위기에 정부는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그저 집에서 나오지 말거나 대피하라는 비상 안내문밖에 내놓지 못하듯이 종교가 불안해하는 인류에게 불사나 시주, 템플스테이, 누워있는 와불세우기 등으로 재정 불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진정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불교 본연의 일 즉 부처님의 자비를 실천해야 할 것이다.

폭우와 폭염, 홍수와 가뭄, 지진, 태풍 같은 것들을 과학으로 해결할 생각은 하지 않고 무기를 만드는 일에만 집중하는 세계 모든 나라들은 아직도 원시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기 때문에 힘을 기르려고 하는 것이다. 자연재해를 공동으로 해결할 생각이나 연구하기보다는 남의 땅을 뺏고 남의 재산을 빼앗아 내 배를 불리려고 하는 것이다.

의학이 발달해서 오래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나니 노년층의 연금 등 노인들에 들어가는 재정에 대해 많은 정부에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요양원에서 병원에서 침대에 누워서 십 년 이상을 산다는 것은 고문이다. 누구나 아프지 않고 살다가 죽는 것을 꿈꾼다. 하지만 현대 의학이 발달하면서 오히려 생명은 연장되었는지 몰라도 사람답게 사는 삶이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 될 것이다.

빈 병을 줍고 폐지를 주우면서 살아가는 노인들이 많다. 그들이 그렇게 살아가도 행복하다면 문제가 안 되지만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사는 것이라면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미 천년을 누워있는 와불을 일으켜 세우는 것보다 이 땅에 살아도 부처님의 법을 모르고 살아가는 노인들을 위해 호스피스 병동을 세우고 그들이 죽음에서 두렵지 않게 하는 것이 종교가 해야 하는 것이다. 아프고 배고픈 홈리스나 노인들에게 한 끼 배불리 먹이고 머리 아픈 이에게 진통제를 줄 수 있는 종교가 참 종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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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변
며칠 전 친구가 카톡으로 이런 글을 보내왔다.

[풀리지 않던 의문]​

고승들의 수명을 조사하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한국 불교의 큰 스님이신

효봉 스님은 79세,

이청담 스님은 70세,

성철 스님은 82세,

법정 스님은 79세에 돌아가셨다.

이분들은 불교계의 고승들로 다 훌륭하신 분들이다.

그런데 90세를 넘기신 분이 없었다.​

그러나 훌륭하셨던 개신교 목사님들 중에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님은 99세,

영등포교회 방지일 목사님은 104세,

충현교회 김창인 목사님은 96세,

경동교회 강원용 목사님은 90세에 돌아가셨다. 모두 90세를 넘기셨다.

고승들의 평균수명은 77.5세이고,

훌륭하셨던 목사님들의 평균수명은 97세다.

고승들과의 평균수명이 자그마치 20년이나 차이가 난다. 원인은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사람이 건강해지려면 가장 많이 먹는 것을

가장 좋은 것으로 먹어야 한다.

그렇다면 사람이 가장 많이 먹는 것은 무엇일까?

공기다.

공기는 잠잘 때도 먹어야 한다.

“나, 공기 먹는 것이 지겨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죽어야 한다.

두 번째로 많이 먹는 것은 물이다.

그래서 좋은 공기와좋은 물을 먹으면

세포가 건강해진다.

그런데 스님들은 깊은 산속에서

깨끗한 공기와 깨끗한 물을 마실 뿐만 아니라

오염되지 않은 온갖 좋은 채소와 산나물과 약초를 먹으며 산다.

더군다나 108번뇌에서 벗어나기 위해

참선을 하며 무념을 유지한다.

곧 고요한 평안을 유지하며

108번뇌에서 벗어나 해탈한다.

그러나 목사님들은 공기도 좋지 않은 도시에 살면서

매일 새벽 설교와 주일설교와 수요설교를 준비하느라 힘든 시간을 보내며

또 교인들로부터는 온갖 근심거리를 들으며 산다.

그런데도 목사님들의 평균수명은 고승들보다 20년이나 더 길었다.

4~5년도 아니고 20년이면 엄청난 차이다.

이것은 내가 풀 수 없는 의문 중의 의문이었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1993년 성철 스님이 내놓으셨다.

스님은 이런 유언을 남기고 떠나셨다.

(93/11.9조선, 동아, 일간 신문들)

“내 인생을 잘못 선택했다.

나는 지옥에 간다.

내 죄는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데

내 어찌 감당하랴.

내가 80년 동안 포교한 것이 헛것이로다.

우리는 구원이 없다.

죗값을 해결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

성철 스님이 “죄의 값”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셨다.

내가 금강경을 십여 차례 읽으면서 깜짝 놀란 일이 있었다.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 예수님의

가르침과 똑같은 말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강경에 없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내 죄는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데 내 어찌 감당하랴. 우리는 구원이 없다.

죗값을 해결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

성철 스님께서 죄의 문제를 정확히 짚은 것이다.

자신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까?

핵폭탄을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지 않았을까?

지은 죄를 잊어버린다고 잊힐 수 있을까?

죄를 짓고도 “내가 지은 죄는 기억나지 않아” 이러면

자신이 “위선자”가 된다는 사실에 더욱 갈등하게 된다.

이런 갈등이 고승들의 수명을 단축시켰으리라 생각해 본다.

그러나 목사님들은 늘 회개하며 죄를 씻고 산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깨끗하게 살려고 노력한다. 이것이 고승들과 다른 점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속의 은혜를 믿고 날마다 지은 죄를 회개하며 살면

정신만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온몸의 세포까지 건강해진다고 믿는다.

우리 모두,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생각하며,

날마다 회개하면서, 천국에 이르기를 축복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출처] [풀리지 않던 의문] (이상 펌글)





천사라 부르지 마라
천사라 불리는 형상만 있을 뿐이다.
천사를 부르지 마라
의지하는 마음만 생길 뿐이니
천사조차 시간이 지나면 솜사탕처럼 사라지고.







#작가의 변
며칠 전 친구가 카톡으로 이런 글을 보내왔다.

[풀리지 않던 의문]​

고승들의 수명을 조사하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한국 불교의 큰 스님이신

효봉 스님은 79세,

이청담 스님은 70세,

성철 스님은 82세,

법정 스님은 79세에 돌아가셨다.

이분들은 불교계의 고승들로 다 훌륭하신 분들이다.

그런데 90세를 넘기신 분이 없었다.​

그러나 훌륭하셨던 개신교 목사님들 중에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님은 99세,

영등포교회 방지일 목사님은 104세,

충현교회 김창인 목사님은 96세,

경동교회 강원용 목사님은 90세에 돌아가셨다. 모두 90세를 넘기셨다.

고승들의 평균수명은 77.5세이고,

훌륭하셨던 목사님들의 평균수명은 97세다.

고승들과의 평균수명이 자그마치 20년이나 차이가 난다. 원인은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사람이 건강해지려면 가장 많이 먹는 것을

가장 좋은 것으로 먹어야 한다.

그렇다면 사람이 가장 많이 먹는 것은 무엇일까?

공기다.

공기는 잠잘 때도 먹어야 한다.

“나, 공기 먹는 것이 지겨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죽어야 한다.

두 번째로 많이 먹는 것은 물이다.

그래서 좋은 공기와좋은 물을 먹으면

세포가 건강해진다.

그런데 스님들은 깊은 산속에서

깨끗한 공기와 깨끗한 물을 마실 뿐만 아니라

오염되지 않은 온갖 좋은 채소와 산나물과 약초를 먹으며 산다.

더군다나 108번뇌에서 벗어나기 위해

참선을 하며 무념을 유지한다.

곧 고요한 평안을 유지하며

108번뇌에서 벗어나 해탈한다.

그러나 목사님들은 공기도 좋지 않은 도시에 살면서

매일 새벽 설교와 주일설교와 수요설교를 준비하느라 힘든 시간을 보내며

또 교인들로부터는 온갖 근심거리를 들으며 산다.

그런데도 목사님들의 평균수명은 고승들보다 20년이나 더 길었다.

4~5년도 아니고 20년이면 엄청난 차이다.

이것은 내가 풀 수 없는 의문 중의 의문이었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1993년 성철 스님이 내놓으셨다.

스님은 이런 유언을 남기고 떠나셨다.

(93/11.9조선, 동아, 일간 신문들)

“내 인생을 잘못 선택했다.

나는 지옥에 간다.

내 죄는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데

내 어찌 감당하랴.

내가 80년 동안 포교한 것이 헛것이로다.

우리는 구원이 없다.

죗값을 해결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

성철 스님이 “죄의 값”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셨다.

내가 금강경을 십여 차례 읽으면서 깜짝 놀란 일이 있었다.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 예수님의

가르침과 똑같은 말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강경에 없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내 죄는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데 내 어찌 감당하랴. 우리는 구원이 없다.

죗값을 해결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

성철 스님께서 죄의 문제를 정확히 짚은 것이다.

자신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까?

핵폭탄을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지 않았을까?

지은 죄를 잊어버린다고 잊힐 수 있을까?

죄를 짓고도 “내가 지은 죄는 기억나지 않아” 이러면

자신이 “위선자”가 된다는 사실에 더욱 갈등하게 된다.

이런 갈등이 고승들의 수명을 단축시켰으리라 생각해 본다.

그러나 목사님들은 늘 회개하며 죄를 씻고 산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깨끗하게 살려고 노력한다. 이것이 고승들과 다른 점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속의 은혜를 믿고 날마다 지은 죄를 회개하며 살면

정신만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온몸의 세포까지 건강해진다고 믿는다.

우리 모두,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생각하며,

날마다 회개하면서, 천국에 이르기를 축복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출처] [풀리지 않던 의문] (이상 펌글)







나는 이 글을 읽고 이 글을 쓴 이가 불교에 조금 관심이 있는 이라는 생각과 그가 불교에 관심을 가지면서, 그 불교 관심을 불교를 이해하고 공부하는 곳에 사용하지 않고 불교를 비방하는 곳에 사용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수의 나이가 뭐가 중요한지 나는 이해 할 수 없다. 건강하게 살다가 아프지 않고 최대한 빠르게 죽는 것이 사실은 가장 행복한 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에는 아파도 병원에 거리가 멀어서 돈이 없어서 등의 이유로 가지 못하고 죽는 사람들이 많았다. 물론 지금도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하고 그냥 병을 키우다가 죽어 가는 사람도 많다. 물론 정기적으로 병원에 가서 검진받아도 암을 발견하지 못하다 4기가 지나 서야 알게 되는 경우도 많다.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참선 수행을 하는 스님들의 평균수명이 도시에 살던 목사들보다 20년이나 적다는 그의 가설이 얼마나 뜬금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도시에 공기도 안 좋고 세속에서 찌든 목사들이 더 사는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아파도 기도하면 해결 가능하다고 말하는 전도사 친구가 있다. 우리가 어려운 일에 닥칠 때 마다 하느님 앞에 기도하지 않아서라고 말한다. 즉 그의 말에 의하면 하느님의 영험한 힘이 부처님의 능력을 넘어선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감기에 걸리면 약을 먹고 낫는 것이 정상이지 기도해서 나아지기를 바라는 것은 모순이자 종교를 마치 만병통치약으로 여기는 것과 같다.

종교의 궁극적 목적은 심신의 안정이다. 그럼에도 항상 친구와 이웃의 종교를 비하하고 전도하려는 자세는 정말 잘못된 자세라고 생각한다. 서로의 종교를 존중할 때 서로가 편안해진다는 아주 기본조차도 잊은 것이다.

성철 스님의 유언까지 끌어와서 원죄에 대해서 말하려 하는 그 의도는 알겠으나 나는 원죄에 대한 생각을 일반인들에게 묻고 싶다.

요즘엔 부모에게 유산을 물려받아 출발부터 부자인 사람들이 정말 많다. 성경에도 불경에도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지만, 현대인들은 재산을 많이 물려주는 부모들을 더 소중하게 여긴다. 물려줄 유산이 없는 부모는 다른 부모가 그렇게 유산을 물려줄 때 뭣을 했냐고 따지기까지 한다. 부모들도 아파트 한 채라도 물려 주려고 안간힘을 쓰고 정작 유산을 상속하고 나서 부모를 돌보지 않아 현대판 고려장의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기도 한다.

그런데 수천 년 전에 있었던 원죄로 인해 모든 인류가 아담과 하와의 에덴동산에서 먹지 말라는 과일을 사탄의 꾀임에 빠져 먹었다는 그 원죄로 인류가 죽음의 고통과 에덴동산에서 내쳐 짐을 당했다는 신화 같은 그 이야기 속의 원죄로 인해 인류 모두가 고통 속에 살고 죽음의 고통을 맛봐야 한다면 믿을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그리고 성경에도 로마서에서만 이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그럼에도 예수의 죽음이 인류의 원죄를 대속하기 위해 이 땅에 왔다는 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계속 이런 말도 안되는 성철스님의 유언까지 끌어들이는 행태가 이해되지 않는다.

서로의 종교를 존중해야 하는 기본을 지키지 않고,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얻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해되지 않는다. 불경을 성경을 합리화하기 위한 도구로 연구하고 일부 구절을 인용해서 거봐라 하는 것은 타 종교를 모욕하는 것이다.

유산 상속에서도 부모의 재산 중에 부채가 더 많으면 유산 상속을 거부하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태어나기도 수천 년 전에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인 원죄로 인해 우리는 에덴동산에서 살지 못하고 죽음의 그늘에서 살아간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그 유산을 받을지 의문이다. 하지만 예수가 이 땅에 와서 인류의 죄를 대신해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대속했다는 그 말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신도들이 이상한 것이 아닌가 싶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설에 의하면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자 하느님과 같은 일체인데 대속을 한다는 자체도 좀 코미디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성철스님의 어록 중에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선문답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그 당연한 말을 고승이 했으니, 무언가 깊은 뜻이 있다고 싶지만, 사실 우매한 일반인들이 보기엔 당연한 말을 쓸데없이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우리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가장 기본적인 명제도 잊고 지식의 바다에서 끝없이 지식을 갈구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지구의 깊은 곳 심연의 바닷속에도 가보지 못한 인류가 우주 정복을 운운하는 것과 같다. 심해 바다에 이상 망측하게 생긴 어류가 나타나면 대지진의 전조니 하면서 인류의 언론들이 화들짝 놀라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만큼 인류는 내일이 두려운 것이다. 종교가 인류에게 끼치는 영향이 큰 것은 그들 마음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크기 때문이다. 재림예수라든지 미륵불의 이야기를 그냥 이야기로 치부하고 정작 예수의 재림에도 미륵불의 출현에도 인류는 정작 믿지 않을지도 모른다.

폭우, 폭염, 홍수, 가뭄, 지진, 해일 등은 물론 지구의 온난화 등 우리에게 닥친 위기에 정부는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그저 집에서 나오지 말거나 대피하라는 비상 안내문밖에 내놓지 못하듯이 종교가 불안해하는 인류에게 불사나 시주, 템플스테이, 누워있는 와불세우기 등으로 재정 불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진정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불교 본연의 일 즉 부처님의 자비를 실천해야 할 것이다.

폭우와 폭염, 홍수와 가뭄, 지진, 태풍 같은 것들을 과학으로 해결할 생각은 하지 않고 무기를 만드는 일에만 집중하는 세계 모든 나라들은 아직도 원시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기 때문에 힘을 기르려고 하는 것이다. 자연재해를 공동으로 해결할 생각이나 연구하기보다는 남의 땅을 뺏고 남의 재산을 빼앗아 내 배를 불리려고 하는 것이다.

의학이 발달해서 오래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나니 노년층의 연금 등 노인들에 들어가는 재정에 대해 많은 정부에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요양원에서 병원에서 침대에 누워서 십 년 이상을 산다는 것은 고문이다. 누구나 아프지 않고 살다가 죽는 것을 꿈꾼다. 하지만 현대 의학이 발달하면서 오히려 생명은 연장되었는지 몰라도 사람답게 사는 삶이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 될 것이다.

빈 병을 줍고 폐지를 주우면서 살아가는 노인들이 많다. 그들이 그렇게 살아가도 행복하다면 문제가 안 되지만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사는 것이라면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미 천년을 누워있는 와불을 일으켜 세우는 것보다 이 땅에 살아도 부처님의 법을 모르고 살아가는 노인들을 위해 호스피스 병동을 세우고 그들이 죽음에서 두렵지 않게 하는 것이 종교가 해야 하는 것이다. 아프고 배고픈 홈리스나 노인들에게 한 끼 배불리 먹이고 머리 아픈 이에게 진통제를 줄 수 있는 종교가 참 종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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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글을 읽고 이 글을 쓴 이가 불교에 조금 관심이 있는 이라는 생각과 그가 불교에 관심을 가지면서, 그 불교 관심을 불교를 이해하고 공부하는 곳에 사용하지 않고 불교를 비방하는 곳에 사용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수의 나이가 뭐가 중요한지 나는 이해 할 수 없다. 건강하게 살다가 아프지 않고 최대한 빠르게 죽는 것이 사실은 가장 행복한 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에는 아파도 병원에 거리가 멀어서 돈이 없어서 등의 이유로 가지 못하고 죽는 사람들이 많았다. 물론 지금도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하고 그냥 병을 키우다가 죽어 가는 사람도 많다. 물론 정기적으로 병원에 가서 검진받아도 암을 발견하지 못하다 4기가 지나 서야 알게 되는 경우도 많다.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참선 수행을 하는 스님들의 평균수명이 도시에 살던 목사들보다 20년이나 적다는 그의 가설이 얼마나 뜬금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도시에 공기도 안 좋고 세속에서 찌든 목사들이 더 사는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아파도 기도하면 해결 가능하다고 말하는 전도사 친구가 있다. 우리가 어려운 일에 닥칠 때 마다 하느님 앞에 기도하지 않아서라고 말한다. 즉 그의 말에 의하면 하느님의 영험한 힘이 부처님의 능력을 넘어선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감기에 걸리면 약을 먹고 낫는 것이 정상이지 기도해서 나아지기를 바라는 것은 모순이자 종교를 마치 만병통치약으로 여기는 것과 같다.

종교의 궁극적 목적은 심신의 안정이다. 그럼에도 항상 친구와 이웃의 종교를 비하하고 전도하려는 자세는 정말 잘못된 자세라고 생각한다. 서로의 종교를 존중할 때 서로가 편안해진다는 아주 기본조차도 잊은 것이다.

성철 스님의 유언까지 끌어와서 원죄에 대해서 말하려 하는 그 의도는 알겠으나 나는 원죄에 대한 생각을 일반인들에게 묻고 싶다.

요즘엔 부모에게 유산을 물려받아 출발부터 부자인 사람들이 정말 많다. 성경에도 불경에도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지만, 현대인들은 재산을 많이 물려주는 부모들을 더 소중하게 여긴다. 물려줄 유산이 없는 부모는 다른 부모가 그렇게 유산을 물려줄 때 뭣을 했냐고 따지기까지 한다. 부모들도 아파트 한 채라도 물려 주려고 안간힘을 쓰고 정작 유산을 상속하고 나서 부모를 돌보지 않아 현대판 고려장의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기도 한다.

그런데 수천 년 전에 있었던 원죄로 인해 모든 인류가 아담과 하와의 에덴동산에서 먹지 말라는 과일을 사탄의 꾀임에 빠져 먹었다는 그 원죄로 인류가 죽음의 고통과 에덴동산에서 내쳐 짐을 당했다는 신화 같은 그 이야기 속의 원죄로 인해 인류 모두가 고통 속에 살고 죽음의 고통을 맛봐야 한다면 믿을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그리고 성경에도 로마서에서만 이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그럼에도 예수의 죽음이 인류의 원죄를 대속하기 위해 이 땅에 왔다는 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계속 이런 말도 안되는 성철스님의 유언까지 끌어들이는 행태가 이해되지 않는다.

서로의 종교를 존중해야 하는 기본을 지키지 않고,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얻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해되지 않는다. 불경을 성경을 합리화하기 위한 도구로 연구하고 일부 구절을 인용해서 거봐라 하는 것은 타 종교를 모욕하는 것이다.

유산 상속에서도 부모의 재산 중에 부채가 더 많으면 유산 상속을 거부하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태어나기도 수천 년 전에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인 원죄로 인해 우리는 에덴동산에서 살지 못하고 죽음의 그늘에서 살아간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그 유산을 받을지 의문이다. 하지만 예수가 이 땅에 와서 인류의 죄를 대신해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대속했다는 그 말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신도들이 이상한 것이 아닌가 싶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설에 의하면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자 하느님과 같은 일체인데 대속을 한다는 자체도 좀 코미디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성철스님의 어록 중에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선문답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그 당연한 말을 고승이 했으니, 무언가 깊은 뜻이 있다고 싶지만, 사실 우매한 일반인들이 보기엔 당연한 말을 쓸데없이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우리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가장 기본적인 명제도 잊고 지식의 바다에서 끝없이 지식을 갈구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천사라 부르지 마라
천사라 불리는 형상만 있을 뿐이다.
천사를 부르지 마라
의지하는 마음만 생길 뿐이니
천사조차 시간이 지나면 솜사탕처럼 사라지고.







#작가의 변
며칠 전 친구가 카톡으로 이런 글을 보내왔다.

[풀리지 않던 의문]​

고승들의 수명을 조사하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한국 불교의 큰 스님이신

효봉 스님은 79세,

이청담 스님은 70세,

성철 스님은 82세,

법정 스님은 79세에 돌아가셨다.

이분들은 불교계의 고승들로 다 훌륭하신 분들이다.

그런데 90세를 넘기신 분이 없었다.​

그러나 훌륭하셨던 개신교 목사님들 중에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님은 99세,

영등포교회 방지일 목사님은 104세,

충현교회 김창인 목사님은 96세,

경동교회 강원용 목사님은 90세에 돌아가셨다. 모두 90세를 넘기셨다.

고승들의 평균수명은 77.5세이고,

훌륭하셨던 목사님들의 평균수명은 97세다.

고승들과의 평균수명이 자그마치 20년이나 차이가 난다. 원인은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사람이 건강해지려면 가장 많이 먹는 것을

가장 좋은 것으로 먹어야 한다.

그렇다면 사람이 가장 많이 먹는 것은 무엇일까?

공기다.

공기는 잠잘 때도 먹어야 한다.

“나, 공기 먹는 것이 지겨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죽어야 한다.

두 번째로 많이 먹는 것은 물이다.

그래서 좋은 공기와좋은 물을 먹으면

세포가 건강해진다.

그런데 스님들은 깊은 산속에서

깨끗한 공기와 깨끗한 물을 마실 뿐만 아니라

오염되지 않은 온갖 좋은 채소와 산나물과 약초를 먹으며 산다.

더군다나 108번뇌에서 벗어나기 위해

참선을 하며 무념을 유지한다.

곧 고요한 평안을 유지하며

108번뇌에서 벗어나 해탈한다.

그러나 목사님들은 공기도 좋지 않은 도시에 살면서

매일 새벽 설교와 주일설교와 수요설교를 준비하느라 힘든 시간을 보내며

또 교인들로부터는 온갖 근심거리를 들으며 산다.

그런데도 목사님들의 평균수명은 고승들보다 20년이나 더 길었다.

4~5년도 아니고 20년이면 엄청난 차이다.

이것은 내가 풀 수 없는 의문 중의 의문이었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1993년 성철 스님이 내놓으셨다.

스님은 이런 유언을 남기고 떠나셨다.

(93/11.9조선, 동아, 일간 신문들)

“내 인생을 잘못 선택했다.

나는 지옥에 간다.

내 죄는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데

내 어찌 감당하랴.

내가 80년 동안 포교한 것이 헛것이로다.

우리는 구원이 없다.

죗값을 해결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

성철 스님이 “죄의 값”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셨다.

내가 금강경을 십여 차례 읽으면서 깜짝 놀란 일이 있었다.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 예수님의

가르침과 똑같은 말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강경에 없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내 죄는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데 내 어찌 감당하랴. 우리는 구원이 없다.

죗값을 해결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

성철 스님께서 죄의 문제를 정확히 짚은 것이다.

자신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까?

핵폭탄을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지 않았을까?

지은 죄를 잊어버린다고 잊힐 수 있을까?

죄를 짓고도 “내가 지은 죄는 기억나지 않아” 이러면

자신이 “위선자”가 된다는 사실에 더욱 갈등하게 된다.

이런 갈등이 고승들의 수명을 단축시켰으리라 생각해 본다.

그러나 목사님들은 늘 회개하며 죄를 씻고 산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깨끗하게 살려고 노력한다. 이것이 고승들과 다른 점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속의 은혜를 믿고 날마다 지은 죄를 회개하며 살면

정신만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온몸의 세포까지 건강해진다고 믿는다.

우리 모두,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생각하며,

날마다 회개하면서, 천국에 이르기를 축복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출처] [풀리지 않던 의문] (이상 펌글)







나는 이 글을 읽고 이 글을 쓴 이가 불교에 조금 관심이 있는 이라는 생각과 그가 불교에 관심을 가지면서, 그 불교 관심을 불교를 이해하고 공부하는 곳에 사용하지 않고 불교를 비방하는 곳에 사용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수의 나이가 뭐가 중요한지 나는 이해 할 수 없다. 건강하게 살다가 아프지 않고 최대한 빠르게 죽는 것이 사실은 가장 행복한 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에는 아파도 병원에 거리가 멀어서 돈이 없어서 등의 이유로 가지 못하고 죽는 사람들이 많았다. 물론 지금도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하고 그냥 병을 키우다가 죽어 가는 사람도 많다. 물론 정기적으로 병원에 가서 검진받아도 암을 발견하지 못하다 4기가 지나 서야 알게 되는 경우도 많다.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참선 수행을 하는 스님들의 평균수명이 도시에 살던 목사들보다 20년이나 적다는 그의 가설이 얼마나 뜬금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도시에 공기도 안 좋고 세속에서 찌든 목사들이 더 사는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아파도 기도하면 해결 가능하다고 말하는 전도사 친구가 있다. 우리가 어려운 일에 닥칠 때 마다 하느님 앞에 기도하지 않아서라고 말한다. 즉 그의 말에 의하면 하느님의 영험한 힘이 부처님의 능력을 넘어선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감기에 걸리면 약을 먹고 낫는 것이 정상이지 기도해서 나아지기를 바라는 것은 모순이자 종교를 마치 만병통치약으로 여기는 것과 같다.

종교의 궁극적 목적은 심신의 안정이다. 그럼에도 항상 친구와 이웃의 종교를 비하하고 전도하려는 자세는 정말 잘못된 자세라고 생각한다. 서로의 종교를 존중할 때 서로가 편안해진다는 아주 기본조차도 잊은 것이다.

성철 스님의 유언까지 끌어와서 원죄에 대해서 말하려 하는 그 의도는 알겠으나 나는 원죄에 대한 생각을 일반인들에게 묻고 싶다.

요즘엔 부모에게 유산을 물려받아 출발부터 부자인 사람들이 정말 많다. 성경에도 불경에도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지만, 현대인들은 재산을 많이 물려주는 부모들을 더 소중하게 여긴다. 물려줄 유산이 없는 부모는 다른 부모가 그렇게 유산을 물려줄 때 뭣을 했냐고 따지기까지 한다. 부모들도 아파트 한 채라도 물려 주려고 안간힘을 쓰고 정작 유산을 상속하고 나서 부모를 돌보지 않아 현대판 고려장의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기도 한다.

그런데 수천 년 전에 있었던 원죄로 인해 모든 인류가 아담과 하와의 에덴동산에서 먹지 말라는 과일을 사탄의 꾀임에 빠져 먹었다는 그 원죄로 인류가 죽음의 고통과 에덴동산에서 내쳐 짐을 당했다는 신화 같은 그 이야기 속의 원죄로 인해 인류 모두가 고통 속에 살고 죽음의 고통을 맛봐야 한다면 믿을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그리고 성경에도 로마서에서만 이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그럼에도 예수의 죽음이 인류의 원죄를 대속하기 위해 이 땅에 왔다는 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계속 이런 말도 안되는 성철스님의 유언까지 끌어들이는 행태가 이해되지 않는다.

서로의 종교를 존중해야 하는 기본을 지키지 않고,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얻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해되지 않는다. 불경을 성경을 합리화하기 위한 도구로 연구하고 일부 구절을 인용해서 거봐라 하는 것은 타 종교를 모욕하는 것이다.

유산 상속에서도 부모의 재산 중에 부채가 더 많으면 유산 상속을 거부하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태어나기도 수천 년 전에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인 원죄로 인해 우리는 에덴동산에서 살지 못하고 죽음의 그늘에서 살아간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그 유산을 받을지 의문이다. 하지만 예수가 이 땅에 와서 인류의 죄를 대신해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대속했다는 그 말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신도들이 이상한 것이 아닌가 싶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설에 의하면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자 하느님과 같은 일체인데 대속을 한다는 자체도 좀 코미디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성철스님의 어록 중에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선문답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그 당연한 말을 고승이 했으니, 무언가 깊은 뜻이 있다고 싶지만, 사실 우매한 일반인들이 보기엔 당연한 말을 쓸데없이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우리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가장 기본적인 명제도 잊고 지식의 바다에서 끝없이 지식을 갈구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지구의 깊은 곳 심연의 바닷속에도 가보지 못한 인류가 우주 정복을 운운하는 것과 같다. 심해 바다에 이상 망측하게 생긴 어류가 나타나면 대지진의 전조니 하면서 인류의 언론들이 화들짝 놀라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만큼 인류는 내일이 두려운 것이다. 종교가 인류에게 끼치는 영향이 큰 것은 그들 마음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크기 때문이다. 재림예수라든지 미륵불의 이야기를 그냥 이야기로 치부하고 정작 예수의 재림에도 미륵불의 출현에도 인류는 정작 믿지 않을지도 모른다.

폭우, 폭염, 홍수, 가뭄, 지진, 해일 등은 물론 지구의 온난화 등 우리에게 닥친 위기에 정부는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그저 집에서 나오지 말거나 대피하라는 비상 안내문밖에 내놓지 못하듯이 종교가 불안해하는 인류에게 불사나 시주, 템플스테이, 누워있는 와불세우기 등으로 재정 불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진정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불교 본연의 일 즉 부처님의 자비를 실천해야 할 것이다.

폭우와 폭염, 홍수와 가뭄, 지진, 태풍 같은 것들을 과학으로 해결할 생각은 하지 않고 무기를 만드는 일에만 집중하는 세계 모든 나라들은 아직도 원시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기 때문에 힘을 기르려고 하는 것이다. 자연재해를 공동으로 해결할 생각이나 연구하기보다는 남의 땅을 뺏고 남의 재산을 빼앗아 내 배를 불리려고 하는 것이다.

의학이 발달해서 오래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나니 노년층의 연금 등 노인들에 들어가는 재정에 대해 많은 정부에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요양원에서 병원에서 침대에 누워서 십 년 이상을 산다는 것은 고문이다. 누구나 아프지 않고 살다가 죽는 것을 꿈꾼다. 하지만 현대 의학이 발달하면서 오히려 생명은 연장되었는지 몰라도 사람답게 사는 삶이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 될 것이다.

빈 병을 줍고 폐지를 주우면서 살아가는 노인들이 많다. 그들이 그렇게 살아가도 행복하다면 문제가 안 되지만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사는 것이라면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미 천년을 누워있는 와불을 일으켜 세우는 것보다 이 땅에 살아도 부처님의 법을 모르고 살아가는 노인들을 위해 호스피스 병동을 세우고 그들이 죽음에서 두렵지 않게 하는 것이 종교가 해야 하는 것이다. 아프고 배고픈 홈리스나 노인들에게 한 끼 배불리 먹이고 머리 아픈 이에게 진통제를 줄 수 있는 종교가 참 종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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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깊은 곳 심연의 바닷속에도 가보지 못한 인류가 우주 정복을 운운하는 것과 같다. 심해 바다에 이상 망측하게 생긴 어류가 나타나면 대지진의 전조니 하면서 인류의 언론들이 화들짝 놀라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만큼 인류는 내일이 두려운 것이다. 종교가 인류에게 끼치는 영향이 큰 것은 그들 마음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크기 때문이다. 재림예수라든지 미륵불의 이야기를 그냥 이야기로 치부하고 정작 예수의 재림에도 미륵불의 출현에도 인류는 정작 믿지 않을지도 모른다.

폭우, 폭염, 홍수, 가뭄, 지진, 해일 등은 물론 지구의 온난화 등 우리에게 닥친 위기에 정부는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그저 집에서 나오지 말거나 대피하라는 비상 안내문밖에 내놓지 못하듯이 종교가 불안해하는 인류에게 불사나 시주, 템플스테이, 누워있는 와불세우기 등으로 재정 불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진정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불교 본연의 일 즉 부처님의 자비를 실천해야 할 것이다.

폭우와 폭염, 홍수와 가뭄, 지진, 태풍 같은 것들을 과학으로 해결할 생각은 하지 않고 무기를 만드는 일에만 집중하는 세계 모든 나라들은 아직도 원시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기 때문에 힘을 기르려고 하는 것이다. 자연재해를 공동으로 해결할 생각이나 연구하기보다는 남의 땅을 뺏고 남의 재산을 빼앗아 내 배를 불리려고 하는 것이다.

의학이 발달해서 오래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나니 노년층의 연금 등 노인들에 들어가는 재정에 대해 많은 정부에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요양원에서 병원에서 침대에 누워서 십 년 이상을 산다는 것은 고문이다. 누구나 아프지 않고 살다가 죽는 것을 꿈꾼다. 하지만 현대 의학이 발달하면서 오히려 생명은 연장되었는지 몰라도 사람답게 사는 삶이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 될 것이다.

빈 병을 줍고 폐지를 주우면서 살아가는 노인들이 많다. 그들이 그렇게 살아가도 행복하다면 문제가 안 되지만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사는 것이라면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미 천년을 누워있는 와불을 일으켜 세우는 것보다 이 땅에 살아도 부처님의 법을 모르고 살아가는 노인들을 위해 호스피스 병동을 세우고 그들이 죽음에서 두렵지 않게 하는 것이 종교가 해야 하는 것이다. 아프고 배고픈 홈리스나 노인들에게 한 끼 배불리 먹이고 머리 아픈 이에게 진통제를 줄 수 있는 종교가 참 종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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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라 부르지 마라
천사라 불리는 형상만 있을 뿐이다.
천사를 부르지 마라
의지하는 마음만 생길 뿐이니
천사조차 시간이 지나면 솜사탕처럼 사라지고.







#작가의 변
며칠 전 친구가 카톡으로 이런 글을 보내왔다.

[풀리지 않던 의문]​

고승들의 수명을 조사하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한국 불교의 큰 스님이신

효봉 스님은 79세,

이청담 스님은 70세,

성철 스님은 82세,

법정 스님은 79세에 돌아가셨다.

이분들은 불교계의 고승들로 다 훌륭하신 분들이다.

그런데 90세를 넘기신 분이 없었다.​

그러나 훌륭하셨던 개신교 목사님들 중에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님은 99세,

영등포교회 방지일 목사님은 104세,

충현교회 김창인 목사님은 96세,

경동교회 강원용 목사님은 90세에 돌아가셨다. 모두 90세를 넘기셨다.

고승들의 평균수명은 77.5세이고,

훌륭하셨던 목사님들의 평균수명은 97세다.

고승들과의 평균수명이 자그마치 20년이나 차이가 난다. 원인은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사람이 건강해지려면 가장 많이 먹는 것을

가장 좋은 것으로 먹어야 한다.

그렇다면 사람이 가장 많이 먹는 것은 무엇일까?

공기다.

공기는 잠잘 때도 먹어야 한다.

“나, 공기 먹는 것이 지겨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죽어야 한다.

두 번째로 많이 먹는 것은 물이다.

그래서 좋은 공기와좋은 물을 먹으면

세포가 건강해진다.

그런데 스님들은 깊은 산속에서

깨끗한 공기와 깨끗한 물을 마실 뿐만 아니라

오염되지 않은 온갖 좋은 채소와 산나물과 약초를 먹으며 산다.

더군다나 108번뇌에서 벗어나기 위해

참선을 하며 무념을 유지한다.

곧 고요한 평안을 유지하며

108번뇌에서 벗어나 해탈한다.

그러나 목사님들은 공기도 좋지 않은 도시에 살면서

매일 새벽 설교와 주일설교와 수요설교를 준비하느라 힘든 시간을 보내며

또 교인들로부터는 온갖 근심거리를 들으며 산다.

그런데도 목사님들의 평균수명은 고승들보다 20년이나 더 길었다.

4~5년도 아니고 20년이면 엄청난 차이다.

이것은 내가 풀 수 없는 의문 중의 의문이었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1993년 성철 스님이 내놓으셨다.

스님은 이런 유언을 남기고 떠나셨다.

(93/11.9조선, 동아, 일간 신문들)

“내 인생을 잘못 선택했다.

나는 지옥에 간다.

내 죄는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데

내 어찌 감당하랴.

내가 80년 동안 포교한 것이 헛것이로다.

우리는 구원이 없다.

죗값을 해결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

성철 스님이 “죄의 값”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셨다.

내가 금강경을 십여 차례 읽으면서 깜짝 놀란 일이 있었다.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 예수님의

가르침과 똑같은 말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강경에 없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내 죄는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데 내 어찌 감당하랴. 우리는 구원이 없다.

죗값을 해결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

성철 스님께서 죄의 문제를 정확히 짚은 것이다.

자신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까?

핵폭탄을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지 않았을까?

지은 죄를 잊어버린다고 잊힐 수 있을까?

죄를 짓고도 “내가 지은 죄는 기억나지 않아” 이러면

자신이 “위선자”가 된다는 사실에 더욱 갈등하게 된다.

이런 갈등이 고승들의 수명을 단축시켰으리라 생각해 본다.

그러나 목사님들은 늘 회개하며 죄를 씻고 산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깨끗하게 살려고 노력한다. 이것이 고승들과 다른 점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속의 은혜를 믿고 날마다 지은 죄를 회개하며 살면

정신만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온몸의 세포까지 건강해진다고 믿는다.

우리 모두,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생각하며,

날마다 회개하면서, 천국에 이르기를 축복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출처] [풀리지 않던 의문] (이상 펌글)







나는 이 글을 읽고 이 글을 쓴 이가 불교에 조금 관심이 있는 이라는 생각과 그가 불교에 관심을 가지면서, 그 불교 관심을 불교를 이해하고 공부하는 곳에 사용하지 않고 불교를 비방하는 곳에 사용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수의 나이가 뭐가 중요한지 나는 이해 할 수 없다. 건강하게 살다가 아프지 않고 최대한 빠르게 죽는 것이 사실은 가장 행복한 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에는 아파도 병원에 거리가 멀어서 돈이 없어서 등의 이유로 가지 못하고 죽는 사람들이 많았다. 물론 지금도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하고 그냥 병을 키우다가 죽어 가는 사람도 많다. 물론 정기적으로 병원에 가서 검진받아도 암을 발견하지 못하다 4기가 지나 서야 알게 되는 경우도 많다.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참선 수행을 하는 스님들의 평균수명이 도시에 살던 목사들보다 20년이나 적다는 그의 가설이 얼마나 뜬금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도시에 공기도 안 좋고 세속에서 찌든 목사들이 더 사는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아파도 기도하면 해결 가능하다고 말하는 전도사 친구가 있다. 우리가 어려운 일에 닥칠 때 마다 하느님 앞에 기도하지 않아서라고 말한다. 즉 그의 말에 의하면 하느님의 영험한 힘이 부처님의 능력을 넘어선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감기에 걸리면 약을 먹고 낫는 것이 정상이지 기도해서 나아지기를 바라는 것은 모순이자 종교를 마치 만병통치약으로 여기는 것과 같다.

종교의 궁극적 목적은 심신의 안정이다. 그럼에도 항상 친구와 이웃의 종교를 비하하고 전도하려는 자세는 정말 잘못된 자세라고 생각한다. 서로의 종교를 존중할 때 서로가 편안해진다는 아주 기본조차도 잊은 것이다.

성철 스님의 유언까지 끌어와서 원죄에 대해서 말하려 하는 그 의도는 알겠으나 나는 원죄에 대한 생각을 일반인들에게 묻고 싶다.

요즘엔 부모에게 유산을 물려받아 출발부터 부자인 사람들이 정말 많다. 성경에도 불경에도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지만, 현대인들은 재산을 많이 물려주는 부모들을 더 소중하게 여긴다. 물려줄 유산이 없는 부모는 다른 부모가 그렇게 유산을 물려줄 때 뭣을 했냐고 따지기까지 한다. 부모들도 아파트 한 채라도 물려 주려고 안간힘을 쓰고 정작 유산을 상속하고 나서 부모를 돌보지 않아 현대판 고려장의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기도 한다.

그런데 수천 년 전에 있었던 원죄로 인해 모든 인류가 아담과 하와의 에덴동산에서 먹지 말라는 과일을 사탄의 꾀임에 빠져 먹었다는 그 원죄로 인류가 죽음의 고통과 에덴동산에서 내쳐 짐을 당했다는 신화 같은 그 이야기 속의 원죄로 인해 인류 모두가 고통 속에 살고 죽음의 고통을 맛봐야 한다면 믿을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그리고 성경에도 로마서에서만 이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그럼에도 예수의 죽음이 인류의 원죄를 대속하기 위해 이 땅에 왔다는 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계속 이런 말도 안되는 성철스님의 유언까지 끌어들이는 행태가 이해되지 않는다.

서로의 종교를 존중해야 하는 기본을 지키지 않고,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얻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해되지 않는다. 불경을 성경을 합리화하기 위한 도구로 연구하고 일부 구절을 인용해서 거봐라 하는 것은 타 종교를 모욕하는 것이다.

유산 상속에서도 부모의 재산 중에 부채가 더 많으면 유산 상속을 거부하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태어나기도 수천 년 전에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인 원죄로 인해 우리는 에덴동산에서 살지 못하고 죽음의 그늘에서 살아간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그 유산을 받을지 의문이다. 하지만 예수가 이 땅에 와서 인류의 죄를 대신해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대속했다는 그 말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신도들이 이상한 것이 아닌가 싶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설에 의하면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자 하느님과 같은 일체인데 대속을 한다는 자체도 좀 코미디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성철스님의 어록 중에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선문답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그 당연한 말을 고승이 했으니, 무언가 깊은 뜻이 있다고 싶지만, 사실 우매한 일반인들이 보기엔 당연한 말을 쓸데없이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우리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가장 기본적인 명제도 잊고 지식의 바다에서 끝없이 지식을 갈구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지구의 깊은 곳 심연의 바닷속에도 가보지 못한 인류가 우주 정복을 운운하는 것과 같다. 심해 바다에 이상 망측하게 생긴 어류가 나타나면 대지진의 전조니 하면서 인류의 언론들이 화들짝 놀라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만큼 인류는 내일이 두려운 것이다. 종교가 인류에게 끼치는 영향이 큰 것은 그들 마음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크기 때문이다. 재림예수라든지 미륵불의 이야기를 그냥 이야기로 치부하고 정작 예수의 재림에도 미륵불의 출현에도 인류는 정작 믿지 않을지도 모른다.

폭우, 폭염, 홍수, 가뭄, 지진, 해일 등은 물론 지구의 온난화 등 우리에게 닥친 위기에 정부는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그저 집에서 나오지 말거나 대피하라는 비상 안내문밖에 내놓지 못하듯이 종교가 불안해하는 인류에게 불사나 시주, 템플스테이, 누워있는 와불세우기 등으로 재정 불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진정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불교 본연의 일 즉 부처님의 자비를 실천해야 할 것이다.

폭우와 폭염, 홍수와 가뭄, 지진, 태풍 같은 것들을 과학으로 해결할 생각은 하지 않고 무기를 만드는 일에만 집중하는 세계 모든 나라들은 아직도 원시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기 때문에 힘을 기르려고 하는 것이다. 자연재해를 공동으로 해결할 생각이나 연구하기보다는 남의 땅을 뺏고 남의 재산을 빼앗아 내 배를 불리려고 하는 것이다.

의학이 발달해서 오래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나니 노년층의 연금 등 노인들에 들어가는 재정에 대해 많은 정부에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요양원에서 병원에서 침대에 누워서 십 년 이상을 산다는 것은 고문이다. 누구나 아프지 않고 살다가 죽는 것을 꿈꾼다. 하지만 현대 의학이 발달하면서 오히려 생명은 연장되었는지 몰라도 사람답게 사는 삶이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 될 것이다.

빈 병을 줍고 폐지를 주우면서 살아가는 노인들이 많다. 그들이 그렇게 살아가도 행복하다면 문제가 안 되지만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사는 것이라면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미 천년을 누워있는 와불을 일으켜 세우는 것보다 이 땅에 살아도 부처님의 법을 모르고 살아가는 노인들을 위해 호스피스 병동을 세우고 그들이 죽음에서 두렵지 않게 하는 것이 종교가 해야 하는 것이다. 아프고 배고픈 홈리스나 노인들에게 한 끼 배불리 먹이고 머리 아픈 이에게 진통제를 줄 수 있는 종교가 참 종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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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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