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고 흐린 날이 무예 대수라고
비 오고 흐리니 운전하는 데 불편하고
마음까지 불편해
비 오고 흐리다 맑는 것이 밴쿠버 날씨인 걸
몰랐냐는 아들.
#작가의 변
겨울 내내 비 오는 밴쿠버는 사람을 우울하게 한다. 날씨가 사람의 기분과 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아주 크다. 날마다 고기압과 저기압을 말하는 일별로 재미있지 않은 일기예보를 사람들은 날마다 관심 있게 지켜본다. 과학이 발달한 현대에서도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과거에도 날씨는 사람들의 삶에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쳐 왔다. 아니, 사람들의 삶뿐만이 아니라 전쟁에도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전쟁도 사실 추위가 전쟁의 승패를 좌우했다. 과거 화살을 쏘아서 하던 전쟁에서는 날씨가 화살의 거리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승패에도 영향을 미쳤다. 화공을 쓴다면 바람이 우리 쪽으로 불 때 오히려 화공을 사용한 당사자가 당하기 마련이다. 현대의 고급 스포츠인 골프에서도 바람의 영향은 경기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골프만 그런 것은 아니다. 축구도 예약된 시간에 폭우가 쏟아 지면 수중전이 되어 버리거나 경기가 취소된다.
농사를 짓는 경우도 날씨의 영향은 크다. 비가 오지 않고 가뭄이 들면 논을 갈이조차 못하고 작물을 심을 수도 없다. 홍수가 나면 모든 걸 삼킬 듯이 밀려드는 물로 인해 모든 걸 잃게 된다. 폭풍우가 치고 태풍이 불면 바다에 고기잡이를 나간 어부들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뭍으로 돌아 오게 된다. 그래서 어부들은 특히 날씨에 민감하다. 생명이 달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우크라이나와 중동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지역의 전쟁에 세계의 관심이 쏠려 있다. 더불어 미국의 대선에도 사람들의 관심이 많다. 두 전쟁은 미국의 대통령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전쟁이 끝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세계는 날씨와 이상기후에 시달린 지 오래되었다. NASA에서 달에 인간을 보냈던 것이 아득히 오래된 일이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기후변화와 지구의 각종 날씨 변화에 대처하지 못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있다. 홍수와 가뭄, 사막에서 시작된 미세 먼지가 북경과 만주를 거쳐 한반도에 봄마다 찾아오는 불청객이기도 하다. 캐나다는 겨울엔 눈이 많이 쌓이는 추운 지방이지만 그 덕분에 겨울엔 산불에 대한 걱정이 없다가 눈이 녹기 시작하는 시기가 되면 산불 때문에 온 국민의 신경이 곤두선다. 그리고 가뭄과 토네이도가 겹치면 사람들이 사는 지역은 속절없이 자연재해의 피해 지역이 된다. 캐나다는 지진이 자주 나지는 않지만, 지진이나 화산 활동이 심한 그린란드나 인도네시아, 일본 등에서는 사람들이 늘 불안함을 안고 살아간다.
사람들은 좋은 날씨를 바라지만 비 오는 날도 있어야 하고 바람도 불어야 하고 화산 활동도 있어야 살아 있는 지구가 맞다. 바람도 안 불고 화산 활동도 없고 지진도 없다면 지구는 죽은 지구와 같다. 우리는 죽은 지구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활발하게 활동하는 지구에서 지구가 활동하는 자연재해를 피해 가면서 안전하게 살아가야 한다. 비가 오지 않는 중동 아랍 에미레이트에서 얼마 전 기록적인 폭우가 있었고 사람들은 정부가 계속해서 시도해 온 인공 강우가 문제라고 말했지만, 아직 과학이 그 정도로 발달했다고 믿고 싶지는 않다. 사람들은 안전한 삶을 위해 튼튼한 콘크리트 성을 쌓고 고층 건물을 올리지만 지진 등 자연재해에서는 순두부가 뭉개지듯 속절없이 무너진다. 해안가 아름다운 뷰어를 좋아하지만, 해안가는 불의 고리 즉 지진 지대이기도 해서 언제 대형 지진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그 알 수 없다는 이유로 각 도시는 건설을 끝없이 하고 있다. 공항을 짓고 대형 건물을 짓는다. 너무 많은 건물이 지하까지 파면서 지어져 땅이 그 중량을 이겨 내지 못하고 점점 내려앉고 있다는 중국의 상하이나 기타 동부 해안지대는 이미 심각한 상황이다.
기독교의 세계관에 의하면 하느님이 낮과 밤을 있으라 하시니 그대로 되고, 흙으로 하느님 형상대로 인간을 빚어서 숨을 불어 넣었다고 한다. 마치 도자기 굽듯이 사람을 만들어 낸 게 눈에 선하다. 그 남자 인간이 외롭지 않게 갈빗대를 빼서 여자 사람을 만들었다고 한다. 마치 도인이나 마술에서 속임수를 써서 사람들을 현혹하는 그 모습을 연상시킨다. 도인이 구름을 타고 다닌다는 이야기는 이야기로 듣고 흘리지만, 예수가 물 위를 걸었다는 것은 기적이라면서 많은 사람이 믿고 따른다. 성경의 내용은 인간이 수천 년 동안 써오고 이야기로 전해진 신화적 요소를 묶어 만든 것으로 신약 성서도 사실 예수 사후 시간이 지난 후에 제자들과 다른 저자들이 책으로 만들었다. 현장에서 보고 들은 기록 즉 조선왕조실록처럼 사관이 사실을 기록한 게 아님에도 사람들은 그것을 역사적 사실보다 더 진실처럼 믿으면서 전파하고 있다.
불교의 수많은 경전도 사실은 부처님 사후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던 것들을 결집해 토론하고 기록한 것들이다. 후에 많은 승려에 의해 해석이 입혀지고 이해를 높이기 위한 설명이 더해지기도 했다. 오늘날 불교의 성지인 인도는 불교가 쇠퇴하고 힌두교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네팔이나 티베트 그리고 동아시아인 한국과 대만, 일본에서 불교가 번창했다. 물론 동남아 여러 나라도 아직도 불교가 국교인 나라들이 많이 있다. 역사도 기록과 유물을 함께 연구하여 사실인지 인증한다. 하지만 종교는 성스러운 세계로 취급되면 연구가 불경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오늘날까지도 이슬람과 기독교가 서로 성지로 내세우는 예루살렘과 이슬람 성지 메카와 메디아 등은 성지순례를 평생의 숙원사업으로 여기는 이슬람 종교적 신념으로 인해 더욱 중요한 곳이 되어 가고 있다.
많은 현대인은 무종교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내세운다. 종교가 생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이슬람 국가와 이란처럼 신정일치를 보이는 국가 외에 많은 서구 유럽의 국가들은 교회의 쇠퇴와 교회 유지에 어려움을 말하고 있다. 대한민국도 인구의 급격한 감소로 인해 스님이 되려는 출가자들이 급격히 줄어들어 젊은 승려가 줄어들고 가톨릭의 신부가 되기 위한 신 학생도 줄고 있다. 이는 마치 날씨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유행처럼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고 종교가 가르치는 믿음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그 현상은 급격히 늘어나 유럽의 성당과 교회가 현상 유지조차 못 해서 다른 용도로 사용하거나 매각되는 현상이 늘어나고 있다. 서로 사이비라고 손가락질하는 사이비 종교가 점점 늘어난다. 이는 사람들이 삶이 힘들고 기존의 종교나 정치를 믿지 못하는 틈새를 공략해서 생겨난 것일 것이다. 당장 돈이 필요하지만, 은행은 문턱이 높고, 마귀나 사탄의 속삭임처럼 스캠이 늘고 있다. 이 전화 사기는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보이스피싱이 아닌 다른 얼굴로 불쌍한 척하면서 도움의 손길을 요구하지만, 실상은 보이스피싱에 도와주려던 사람까지 불법에 이용되게 만들기도 한다.
하느님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이야기도 좀 허무맹랑하지만 진화론만 믿기에도 찜찜한 구석이 많다. 진화론으로만 따지만 원숭이도 환경적 요인으로 인해 사람으로 진화하기도 해야 하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불교의 윤회론을 기독교인들에게 말하면 기가 찬 듯 웃는다. 개가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게 말이 되느냐면서 말이다. 그럼 도자기 굽듯이 사람을 흙으로 빗어 숨을 불어 넣는 다는 것은 말이 될까? 모든 걸 하느님이 창조했다는 데, 왜 하느님은 전쟁을 좋아하는 인간을 만들었을까? 왜 성품이 나쁘고 악랄한 사람들이 더 잘사는 세상을 만들고 선량한 사람이 늘 피해를 받고 힘들어하는 사회를 만들었을까 묻고 싶다. 에덴동산에서는 죽지도 않고 천국과 같은 세상에서 잘살다가 아담이 이브의 꼬임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고 원죄를 지었다고 하는데 하느님은 정말 잔인하다 생각하게 된다. 아득한 옛날 이브의 잘못으로 지금까지 인류가 고통 속에 살아야 한다는 원죄론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세상에는 즐겁고 괴롭고 좋고 나쁜 것이 존재하지만 내가 눈을 감으면 아무것도 모른다. 즉 내가 죽고 나면 세상이 아무리 잘살고 행복해도 나와는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자신을 희생해서 사고나 천재지변에서 다른 생명을 살리고 자신은 죽는 길을 택한다. 우리는 TV를 통해 수없이 많은 어린 생명들이 탄 세월호가 경찰의 미흡한 대응으로 죽어 간 현장을 목격했다. 살릴 수 있는 상황에서도 살리지 못한 것에 안타까워했다. 이태원 참사도 오송 참사도 모든 인터넷과 영상이 발달해서 현장을 생생하게 보면서도 죽어 가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같은 모습을 보고 누구는 그게 왜 정치 탓이냐고 말하고 정치가 책임 안 지면 누가 책임을 지냐고 말하기도 한다. 수없이 많은 사람이 날마다 태어나고 죽어 간다. 자연사가 아닌 사고사가 없게 하고 태어난 사람들이 행복하게 잘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정치나 종교의 궁극적 목적이다. 아니 종교는 수없이 많은 두려움과 환란에서도 마음이 평화로울 수 있도록 하는 게 궁극적 목적이다. 스님이나 재가불자들의 목표가 깨우침을 이루기 위한 것이지만 우리는 현실에 살고 있다. 날마다 좋은 날이 아니고 비 오고 바람 부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종교는 어렵고 힘든 노숙자 같은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종교 이어야 한다. 희망이 되는 종교인이어야 한다. 나만 깨우치겠다고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들었다면 조선 시대의 생리학적과 별반 다르지 않다. 백성이 죽어 나가도 공맹을 외치던 그 학자들과 다르지 않다. 종교는 늘 현실과 미래의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 관세음보살님이 다 보살필 것으로 생각지 않는다. 스님들이 관세음보살의 현신이 되어 종교가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의 현신이 되어 희망을 주어야 한다. 그래야 흐리고 바람 불고 태풍이 오는 날을 견딜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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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은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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