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56. 고향 연가
[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56. 고향 연가
  • 전재민 시인
  • 승인 2024.04.04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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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쿠버의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부산 앞바다 비린내 코끝을 스치고

하늘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목소리
바람에 실려 내 귓가에 맴돈다

밴쿠버에 비가 내리면
고향의 비도 함께 내리는 것 같아
내 눈엔 고향집 마당 빗물이 흐른다

밴쿠버에서 길을 가다
한국어를 듣는 순간
고향 사투리 듣듯 고개 돌리고

밴쿠버 벚꽃이 피면
고향 동산 붉은 진달래 가슴에 피고
나는 어느새 어린이 되어 달리고 있다

밴쿠버 밤하늘에 별이 빛나면
고향의 별도 멍석에 누운 가족도 내게 다가온다

유행가 가사를 흥얼거리면
고향의 노래가 내 입술을 들썩댄다.
 







#작가의 변
고향에서 산 것을 따져 보니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외지로 떠돌아다니기 시작했으니, 18세까지만 고향에 있었던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고향이라고 부모님이 계시면 가끔 내려가던 서울살이나 군 생활 중에 휴가 때마다 집을 찾아 들던 날들도 있으니 딱히 18까지만 살았다고 하기도 그렇기도 하다.
지금은 고향 땅에 외지인이나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으리라. 젊은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테고 내가 아는 어르신들은 다 돌아가시거나 이제 돌아 가을날이 언제일지 모르는 분들 이거나 그럴테니 말이다.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처가 집도 장모님, 처남 둘 다 모두 먼저 세상을 떠났으나, 누님과 동생은 아직 고향과 서울에 있어 언제든 가서 만나면 반갑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아버지 어머니 계실 때처럼 마음이 편하지는 않다. 한국에 가서 묵을 때가 없다는 말도 많이 한다. 사실 낯선 여행지처럼 숙박업소에 자면서 고국을 방문하고 싶지는 않은 마음도 마음 한편에 있는 것이다. 물론 캐나다에서도 타지 아니 밴쿠버에서도 어디 멀리 떨어진 곳에 간다면 물론 숙박업소에 묵어야 하고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어느 스님이 30년을 절 밥을 먹어도 지방에서 서울에 볼일이 있어서 서울의 사찰에 가면 묵을 방이 없어서 숙박업소에 묵는다고 말했다. 설령 묵게 되더라도 템플스테이용 방이 비면 그 방에 할인해서 묵고 온다고 말하셨다. 난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스님이 출가하고 떠돌아다니는 경우가 많은데 방이 없어 일반 숙박 시설에 묵어야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스님이 방문하면 그곳이 서울이 됐든 지방이 되었든, 손님이기보다는 승려로 대우해서 가족처럼 지내는 것이 정상이 아닌가 싶다.

내가 아는 어느 종교는 다른 나라의 같은 종교 단체에 가면 미리 서로 연락을 해서 신도들의 집에서 묵을 수 있게 해 준다고 들었다. 신도와 신도들 간에도 그런데, 하물며 출가한 승려를 사찰에서 템플스테이에 밀려 방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내가 어릴 때 집에는 생선장수(주로 소금에 절인 간고등어나 말린 북어 등), 여러가지를 파는 만물 장수, 엿장수 등 이것저것 팔러 다니는 사람부터, 상이용사라면서 돈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는 사람, 대문 앞에서 목탁만 계속 두들기고 있던 탁발하는 승려 등 여러 사람의 방문이 있었다.

한 번은 울산에서 학생들이 눈 구경하겠다고 제천까지 왔다는 데 우리 마당에 텐트를 쳐도 되겠냐고 해서 그러라고 하고 삼시세끼를 먹여서 보내기도 했다. 박물 장수니 생선 장수, 옷장수 등도 식사 때가 되면 물을 말아 먹는 상황이라도 같이 한 술 뜨고 가라고 했다. 물론 나도 걸어서 5분도 안 되는 친구네 집에서 놀다가 점심때가 되면 점심을 먹고 저녁녘이 되어 서야 집에 돌아오고는 했다.







불사해서 부처님에게 금박 옷을 입히고 도로를 포장하는 등, 늘 불사가 끊이지 않는 사찰도 많다. 그리고 이젠 전국의 사찰이 코스튬플레이와 국립공원 안에 사찰이 있어 입장료를 받는다고 말이 많은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서울 조계사에도 법회가 끝나고 점심 공양을 할 때 돈을 내는 것으로 알고 있다. 밴쿠버는 아직까지 점심 공양을 하면서 돈을 내지는 않는다. 한국교회들도 예배가 끝나면 점심을 함께 먹는 교회들이 대부분이다.

식구라는 말이 있다. 함께 공양하면 더욱 친해 질 가능성이 크다. 물론 준비하고 공양하는 일이 번거롭지만, 식구가 되기 위해서는 함께 밥을 먹으면 친분이 두터워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친구 사이에도 서로 계산을 따로 하더라도 함께 밥을 먹으면 왠지 더욱 친밀해진 느낌을 받는다.

밴쿠버 구세군 같은 경우 노숙자 쉘터 즉 쉼터를 운영하면서 노숙자와 배고파서 오는 사람들을 위해 하루 400명 이상에게 음식을 제공한다. 교회 단체에서 운영하는 노숙자 쉼터에서도 비슷한 역할을 한다. 내가 아는 성남의 가톨릭 신부가 하는 노숙자 무료 급식소도 음식도 깔끔하고 정성을 다해 노숙자들에게 봉사한다. 밴쿠버 같은 경우 도네이션이 있지만 연방 정부와 주 정부, 시 같은 자치단체의 지원이 큰 역할을 한다. 한국교회들은 선교 목적으로 길거리에서 도시락을 배포하기도 한다.

같은 종단의 같은 길을 가는 승려를 사찰에서 묵지 못하게 하고 일반 숙박업소에서 묵게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이 된다. 템플스테이로 수입을 올리는 거면 종교가 일반 숙박업소와 다른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본다. 안 그래도 해인사, 법주사 등에서 스님들의 도박 문제, 여 신도와 불미스러운 문제 등 여러 가지 문제가 터질 때마다 드는 생각은 스님도 은퇴하면 버림받지 않는 삶을 살았으면 한다는 것이다. 주지 스님이나 유명 고승같이 상좌를 두고 생활하지는 못해도 최소한 먹고 사는 문제에 아무런 구속받지 않고 염불에 정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지방에 작은 사찰엔 스님 혼자 암자에서 생활하면서 공양과 불 때기 농사 등을 모두 해결하면서 살다가 입적하는 스님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출가한 스님은 누구나 죽을 때가 되어 구차해지지 않았으면 한다. 아프거나 필요한 것이 있을 때는 무리 없이 해결될 수 있었으면 한다. 그래야 총무원장에 목숨 걸지 않고 주지를 하겠다고 권력다툼 비슷한 것을 하지 않을 것이니까 말이다. 출가한 스님이 대처의 정치하는 사람들처럼 권력욕과 물욕에 빠지면 안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학교 법인이나 병원 법인, 요양원 같은 것을 종교의 이름으로 설립하고 종교가 사회에 기여할 부분을 넓히고 기여도를 넓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대한민국은 복지가 미흡해서 은퇴하고도 다시 취직하는 국민이 대다수이고 모두가 그렇게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농촌에는 은퇴할 나이가 지난 노인들만 농촌을 지키고 있으니 당연히 은퇴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된다. 그래도 농촌에서도 꾸준히 수입이 나올 수 있는 사업을 만들어서 농촌에 살아도 일정한 수입이 나올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정치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다. 모두가 떠난 농촌은 빈집만 을씨년스럽게 남아 있음에도 땅값이 오르거나 개발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팔지도 않고 묵히는 빈집도 많다고 들었다. 캐나다도 농촌을 떠나 도시로 떠나는 인구가 많아 농촌의 젊은이들이 없다고 들었다. 그리고 캐나다는 기계를 이용한 대규모 농사를 짓기 때문에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대부분 규모 있는 사업체와 같다. 농촌에서 생산해서 출하하는 농산물의 가격과 마트에서 팔리는 가격의 괴리가 심해서 농촌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이 많이 실망한다. 열심히 일하는 근로자나 농민, 어민 등이 잘사는 나라가 돼야 한다. 국민이 못살고 빚에 허덕이면 동맥경화처럼 막혀서 나라도 힘들어지는 법이다. 모두가 함께 잘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종교도 정치도 바른길로 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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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쿠버의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부산 앞바다 비린내 코끝을 스치고

하늘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목소리
바람에 실려 내 귓가에 맴돈다

밴쿠버에 비가 내리면
고향의 비도 함께 내리는 것 같아
내 눈엔 고향집 마당 빗물이 흐른다

밴쿠버에서 길을 가다
한국어를 듣는 순간
고향 사투리 듣듯 고개 돌리고

밴쿠버 벚꽃이 피면
고향 동산 붉은 진달래 가슴에 피고
나는 어느새 어린이 되어 달리고 있다

밴쿠버 밤하늘에 별이 빛나면
고향의 별도 멍석에 누운 가족도 내게 다가온다

유행가 가사를 흥얼거리면
고향의 노래가 내 입술을 들썩댄다.
 





밴쿠버의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부산 앞바다 비린내 코끝을 스치고

하늘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목소리
바람에 실려 내 귓가에 맴돈다

밴쿠버에 비가 내리면
고향의 비도 함께 내리는 것 같아
내 눈엔 고향집 마당 빗물이 흐른다

밴쿠버에서 길을 가다
한국어를 듣는 순간
고향 사투리 듣듯 고개 돌리고

밴쿠버 벚꽃이 피면
고향 동산 붉은 진달래 가슴에 피고
나는 어느새 어린이 되어 달리고 있다

밴쿠버 밤하늘에 별이 빛나면
고향의 별도 멍석에 누운 가족도 내게 다가온다

유행가 가사를 흥얼거리면
고향의 노래가 내 입술을 들썩댄다.
 







#작가의 변
고향에서 산 것을 따져 보니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외지로 떠돌아다니기 시작했으니, 18세까지만 고향에 있었던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고향이라고 부모님이 계시면 가끔 내려가던 서울살이나 군 생활 중에 휴가 때마다 집을 찾아 들던 날들도 있으니 딱히 18까지만 살았다고 하기도 그렇기도 하다.
지금은 고향 땅에 외지인이나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으리라. 젊은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테고 내가 아는 어르신들은 다 돌아가시거나 이제 돌아 가을날이 언제일지 모르는 분들 이거나 그럴테니 말이다.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처가 집도 장모님, 처남 둘 다 모두 먼저 세상을 떠났으나, 누님과 동생은 아직 고향과 서울에 있어 언제든 가서 만나면 반갑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아버지 어머니 계실 때처럼 마음이 편하지는 않다. 한국에 가서 묵을 때가 없다는 말도 많이 한다. 사실 낯선 여행지처럼 숙박업소에 자면서 고국을 방문하고 싶지는 않은 마음도 마음 한편에 있는 것이다. 물론 캐나다에서도 타지 아니 밴쿠버에서도 어디 멀리 떨어진 곳에 간다면 물론 숙박업소에 묵어야 하고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어느 스님이 30년을 절 밥을 먹어도 지방에서 서울에 볼일이 있어서 서울의 사찰에 가면 묵을 방이 없어서 숙박업소에 묵는다고 말했다. 설령 묵게 되더라도 템플스테이용 방이 비면 그 방에 할인해서 묵고 온다고 말하셨다. 난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스님이 출가하고 떠돌아다니는 경우가 많은데 방이 없어 일반 숙박 시설에 묵어야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스님이 방문하면 그곳이 서울이 됐든 지방이 되었든, 손님이기보다는 승려로 대우해서 가족처럼 지내는 것이 정상이 아닌가 싶다.

내가 아는 어느 종교는 다른 나라의 같은 종교 단체에 가면 미리 서로 연락을 해서 신도들의 집에서 묵을 수 있게 해 준다고 들었다. 신도와 신도들 간에도 그런데, 하물며 출가한 승려를 사찰에서 템플스테이에 밀려 방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내가 어릴 때 집에는 생선장수(주로 소금에 절인 간고등어나 말린 북어 등), 여러가지를 파는 만물 장수, 엿장수 등 이것저것 팔러 다니는 사람부터, 상이용사라면서 돈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는 사람, 대문 앞에서 목탁만 계속 두들기고 있던 탁발하는 승려 등 여러 사람의 방문이 있었다.

한 번은 울산에서 학생들이 눈 구경하겠다고 제천까지 왔다는 데 우리 마당에 텐트를 쳐도 되겠냐고 해서 그러라고 하고 삼시세끼를 먹여서 보내기도 했다. 박물 장수니 생선 장수, 옷장수 등도 식사 때가 되면 물을 말아 먹는 상황이라도 같이 한 술 뜨고 가라고 했다. 물론 나도 걸어서 5분도 안 되는 친구네 집에서 놀다가 점심때가 되면 점심을 먹고 저녁녘이 되어 서야 집에 돌아오고는 했다.







불사해서 부처님에게 금박 옷을 입히고 도로를 포장하는 등, 늘 불사가 끊이지 않는 사찰도 많다. 그리고 이젠 전국의 사찰이 코스튬플레이와 국립공원 안에 사찰이 있어 입장료를 받는다고 말이 많은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서울 조계사에도 법회가 끝나고 점심 공양을 할 때 돈을 내는 것으로 알고 있다. 밴쿠버는 아직까지 점심 공양을 하면서 돈을 내지는 않는다. 한국교회들도 예배가 끝나면 점심을 함께 먹는 교회들이 대부분이다.

식구라는 말이 있다. 함께 공양하면 더욱 친해 질 가능성이 크다. 물론 준비하고 공양하는 일이 번거롭지만, 식구가 되기 위해서는 함께 밥을 먹으면 친분이 두터워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친구 사이에도 서로 계산을 따로 하더라도 함께 밥을 먹으면 왠지 더욱 친밀해진 느낌을 받는다.

밴쿠버 구세군 같은 경우 노숙자 쉘터 즉 쉼터를 운영하면서 노숙자와 배고파서 오는 사람들을 위해 하루 400명 이상에게 음식을 제공한다. 교회 단체에서 운영하는 노숙자 쉼터에서도 비슷한 역할을 한다. 내가 아는 성남의 가톨릭 신부가 하는 노숙자 무료 급식소도 음식도 깔끔하고 정성을 다해 노숙자들에게 봉사한다. 밴쿠버 같은 경우 도네이션이 있지만 연방 정부와 주 정부, 시 같은 자치단체의 지원이 큰 역할을 한다. 한국교회들은 선교 목적으로 길거리에서 도시락을 배포하기도 한다.

같은 종단의 같은 길을 가는 승려를 사찰에서 묵지 못하게 하고 일반 숙박업소에서 묵게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이 된다. 템플스테이로 수입을 올리는 거면 종교가 일반 숙박업소와 다른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본다. 안 그래도 해인사, 법주사 등에서 스님들의 도박 문제, 여 신도와 불미스러운 문제 등 여러 가지 문제가 터질 때마다 드는 생각은 스님도 은퇴하면 버림받지 않는 삶을 살았으면 한다는 것이다. 주지 스님이나 유명 고승같이 상좌를 두고 생활하지는 못해도 최소한 먹고 사는 문제에 아무런 구속받지 않고 염불에 정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지방에 작은 사찰엔 스님 혼자 암자에서 생활하면서 공양과 불 때기 농사 등을 모두 해결하면서 살다가 입적하는 스님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출가한 스님은 누구나 죽을 때가 되어 구차해지지 않았으면 한다. 아프거나 필요한 것이 있을 때는 무리 없이 해결될 수 있었으면 한다. 그래야 총무원장에 목숨 걸지 않고 주지를 하겠다고 권력다툼 비슷한 것을 하지 않을 것이니까 말이다. 출가한 스님이 대처의 정치하는 사람들처럼 권력욕과 물욕에 빠지면 안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학교 법인이나 병원 법인, 요양원 같은 것을 종교의 이름으로 설립하고 종교가 사회에 기여할 부분을 넓히고 기여도를 넓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대한민국은 복지가 미흡해서 은퇴하고도 다시 취직하는 국민이 대다수이고 모두가 그렇게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농촌에는 은퇴할 나이가 지난 노인들만 농촌을 지키고 있으니 당연히 은퇴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된다. 그래도 농촌에서도 꾸준히 수입이 나올 수 있는 사업을 만들어서 농촌에 살아도 일정한 수입이 나올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정치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다. 모두가 떠난 농촌은 빈집만 을씨년스럽게 남아 있음에도 땅값이 오르거나 개발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팔지도 않고 묵히는 빈집도 많다고 들었다. 캐나다도 농촌을 떠나 도시로 떠나는 인구가 많아 농촌의 젊은이들이 없다고 들었다. 그리고 캐나다는 기계를 이용한 대규모 농사를 짓기 때문에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대부분 규모 있는 사업체와 같다. 농촌에서 생산해서 출하하는 농산물의 가격과 마트에서 팔리는 가격의 괴리가 심해서 농촌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이 많이 실망한다. 열심히 일하는 근로자나 농민, 어민 등이 잘사는 나라가 돼야 한다. 국민이 못살고 빚에 허덕이면 동맥경화처럼 막혀서 나라도 힘들어지는 법이다. 모두가 함께 잘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종교도 정치도 바른길로 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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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변
고향에서 산 것을 따져 보니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외지로 떠돌아다니기 시작했으니, 18세까지만 고향에 있었던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고향이라고 부모님이 계시면 가끔 내려가던 서울살이나 군 생활 중에 휴가 때마다 집을 찾아 들던 날들도 있으니 딱히 18까지만 살았다고 하기도 그렇기도 하다.
지금은 고향 땅에 외지인이나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으리라. 젊은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테고 내가 아는 어르신들은 다 돌아가시거나 이제 돌아 가을날이 언제일지 모르는 분들 이거나 그럴테니 말이다.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처가 집도 장모님, 처남 둘 다 모두 먼저 세상을 떠났으나, 누님과 동생은 아직 고향과 서울에 있어 언제든 가서 만나면 반갑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아버지 어머니 계실 때처럼 마음이 편하지는 않다. 한국에 가서 묵을 때가 없다는 말도 많이 한다. 사실 낯선 여행지처럼 숙박업소에 자면서 고국을 방문하고 싶지는 않은 마음도 마음 한편에 있는 것이다. 물론 캐나다에서도 타지 아니 밴쿠버에서도 어디 멀리 떨어진 곳에 간다면 물론 숙박업소에 묵어야 하고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어느 스님이 30년을 절 밥을 먹어도 지방에서 서울에 볼일이 있어서 서울의 사찰에 가면 묵을 방이 없어서 숙박업소에 묵는다고 말했다. 설령 묵게 되더라도 템플스테이용 방이 비면 그 방에 할인해서 묵고 온다고 말하셨다. 난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스님이 출가하고 떠돌아다니는 경우가 많은데 방이 없어 일반 숙박 시설에 묵어야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스님이 방문하면 그곳이 서울이 됐든 지방이 되었든, 손님이기보다는 승려로 대우해서 가족처럼 지내는 것이 정상이 아닌가 싶다.

내가 아는 어느 종교는 다른 나라의 같은 종교 단체에 가면 미리 서로 연락을 해서 신도들의 집에서 묵을 수 있게 해 준다고 들었다. 신도와 신도들 간에도 그런데, 하물며 출가한 승려를 사찰에서 템플스테이에 밀려 방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내가 어릴 때 집에는 생선장수(주로 소금에 절인 간고등어나 말린 북어 등), 여러가지를 파는 만물 장수, 엿장수 등 이것저것 팔러 다니는 사람부터, 상이용사라면서 돈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는 사람, 대문 앞에서 목탁만 계속 두들기고 있던 탁발하는 승려 등 여러 사람의 방문이 있었다.

한 번은 울산에서 학생들이 눈 구경하겠다고 제천까지 왔다는 데 우리 마당에 텐트를 쳐도 되겠냐고 해서 그러라고 하고 삼시세끼를 먹여서 보내기도 했다. 박물 장수니 생선 장수, 옷장수 등도 식사 때가 되면 물을 말아 먹는 상황이라도 같이 한 술 뜨고 가라고 했다. 물론 나도 걸어서 5분도 안 되는 친구네 집에서 놀다가 점심때가 되면 점심을 먹고 저녁녘이 되어 서야 집에 돌아오고는 했다.





밴쿠버의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부산 앞바다 비린내 코끝을 스치고

하늘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목소리
바람에 실려 내 귓가에 맴돈다

밴쿠버에 비가 내리면
고향의 비도 함께 내리는 것 같아
내 눈엔 고향집 마당 빗물이 흐른다

밴쿠버에서 길을 가다
한국어를 듣는 순간
고향 사투리 듣듯 고개 돌리고

밴쿠버 벚꽃이 피면
고향 동산 붉은 진달래 가슴에 피고
나는 어느새 어린이 되어 달리고 있다

밴쿠버 밤하늘에 별이 빛나면
고향의 별도 멍석에 누운 가족도 내게 다가온다

유행가 가사를 흥얼거리면
고향의 노래가 내 입술을 들썩댄다.
 







#작가의 변
고향에서 산 것을 따져 보니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외지로 떠돌아다니기 시작했으니, 18세까지만 고향에 있었던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고향이라고 부모님이 계시면 가끔 내려가던 서울살이나 군 생활 중에 휴가 때마다 집을 찾아 들던 날들도 있으니 딱히 18까지만 살았다고 하기도 그렇기도 하다.
지금은 고향 땅에 외지인이나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으리라. 젊은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테고 내가 아는 어르신들은 다 돌아가시거나 이제 돌아 가을날이 언제일지 모르는 분들 이거나 그럴테니 말이다.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처가 집도 장모님, 처남 둘 다 모두 먼저 세상을 떠났으나, 누님과 동생은 아직 고향과 서울에 있어 언제든 가서 만나면 반갑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아버지 어머니 계실 때처럼 마음이 편하지는 않다. 한국에 가서 묵을 때가 없다는 말도 많이 한다. 사실 낯선 여행지처럼 숙박업소에 자면서 고국을 방문하고 싶지는 않은 마음도 마음 한편에 있는 것이다. 물론 캐나다에서도 타지 아니 밴쿠버에서도 어디 멀리 떨어진 곳에 간다면 물론 숙박업소에 묵어야 하고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어느 스님이 30년을 절 밥을 먹어도 지방에서 서울에 볼일이 있어서 서울의 사찰에 가면 묵을 방이 없어서 숙박업소에 묵는다고 말했다. 설령 묵게 되더라도 템플스테이용 방이 비면 그 방에 할인해서 묵고 온다고 말하셨다. 난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스님이 출가하고 떠돌아다니는 경우가 많은데 방이 없어 일반 숙박 시설에 묵어야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스님이 방문하면 그곳이 서울이 됐든 지방이 되었든, 손님이기보다는 승려로 대우해서 가족처럼 지내는 것이 정상이 아닌가 싶다.

내가 아는 어느 종교는 다른 나라의 같은 종교 단체에 가면 미리 서로 연락을 해서 신도들의 집에서 묵을 수 있게 해 준다고 들었다. 신도와 신도들 간에도 그런데, 하물며 출가한 승려를 사찰에서 템플스테이에 밀려 방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내가 어릴 때 집에는 생선장수(주로 소금에 절인 간고등어나 말린 북어 등), 여러가지를 파는 만물 장수, 엿장수 등 이것저것 팔러 다니는 사람부터, 상이용사라면서 돈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는 사람, 대문 앞에서 목탁만 계속 두들기고 있던 탁발하는 승려 등 여러 사람의 방문이 있었다.

한 번은 울산에서 학생들이 눈 구경하겠다고 제천까지 왔다는 데 우리 마당에 텐트를 쳐도 되겠냐고 해서 그러라고 하고 삼시세끼를 먹여서 보내기도 했다. 박물 장수니 생선 장수, 옷장수 등도 식사 때가 되면 물을 말아 먹는 상황이라도 같이 한 술 뜨고 가라고 했다. 물론 나도 걸어서 5분도 안 되는 친구네 집에서 놀다가 점심때가 되면 점심을 먹고 저녁녘이 되어 서야 집에 돌아오고는 했다.







불사해서 부처님에게 금박 옷을 입히고 도로를 포장하는 등, 늘 불사가 끊이지 않는 사찰도 많다. 그리고 이젠 전국의 사찰이 코스튬플레이와 국립공원 안에 사찰이 있어 입장료를 받는다고 말이 많은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서울 조계사에도 법회가 끝나고 점심 공양을 할 때 돈을 내는 것으로 알고 있다. 밴쿠버는 아직까지 점심 공양을 하면서 돈을 내지는 않는다. 한국교회들도 예배가 끝나면 점심을 함께 먹는 교회들이 대부분이다.

식구라는 말이 있다. 함께 공양하면 더욱 친해 질 가능성이 크다. 물론 준비하고 공양하는 일이 번거롭지만, 식구가 되기 위해서는 함께 밥을 먹으면 친분이 두터워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친구 사이에도 서로 계산을 따로 하더라도 함께 밥을 먹으면 왠지 더욱 친밀해진 느낌을 받는다.

밴쿠버 구세군 같은 경우 노숙자 쉘터 즉 쉼터를 운영하면서 노숙자와 배고파서 오는 사람들을 위해 하루 400명 이상에게 음식을 제공한다. 교회 단체에서 운영하는 노숙자 쉼터에서도 비슷한 역할을 한다. 내가 아는 성남의 가톨릭 신부가 하는 노숙자 무료 급식소도 음식도 깔끔하고 정성을 다해 노숙자들에게 봉사한다. 밴쿠버 같은 경우 도네이션이 있지만 연방 정부와 주 정부, 시 같은 자치단체의 지원이 큰 역할을 한다. 한국교회들은 선교 목적으로 길거리에서 도시락을 배포하기도 한다.

같은 종단의 같은 길을 가는 승려를 사찰에서 묵지 못하게 하고 일반 숙박업소에서 묵게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이 된다. 템플스테이로 수입을 올리는 거면 종교가 일반 숙박업소와 다른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본다. 안 그래도 해인사, 법주사 등에서 스님들의 도박 문제, 여 신도와 불미스러운 문제 등 여러 가지 문제가 터질 때마다 드는 생각은 스님도 은퇴하면 버림받지 않는 삶을 살았으면 한다는 것이다. 주지 스님이나 유명 고승같이 상좌를 두고 생활하지는 못해도 최소한 먹고 사는 문제에 아무런 구속받지 않고 염불에 정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지방에 작은 사찰엔 스님 혼자 암자에서 생활하면서 공양과 불 때기 농사 등을 모두 해결하면서 살다가 입적하는 스님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출가한 스님은 누구나 죽을 때가 되어 구차해지지 않았으면 한다. 아프거나 필요한 것이 있을 때는 무리 없이 해결될 수 있었으면 한다. 그래야 총무원장에 목숨 걸지 않고 주지를 하겠다고 권력다툼 비슷한 것을 하지 않을 것이니까 말이다. 출가한 스님이 대처의 정치하는 사람들처럼 권력욕과 물욕에 빠지면 안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학교 법인이나 병원 법인, 요양원 같은 것을 종교의 이름으로 설립하고 종교가 사회에 기여할 부분을 넓히고 기여도를 넓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대한민국은 복지가 미흡해서 은퇴하고도 다시 취직하는 국민이 대다수이고 모두가 그렇게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농촌에는 은퇴할 나이가 지난 노인들만 농촌을 지키고 있으니 당연히 은퇴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된다. 그래도 농촌에서도 꾸준히 수입이 나올 수 있는 사업을 만들어서 농촌에 살아도 일정한 수입이 나올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정치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다. 모두가 떠난 농촌은 빈집만 을씨년스럽게 남아 있음에도 땅값이 오르거나 개발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팔지도 않고 묵히는 빈집도 많다고 들었다. 캐나다도 농촌을 떠나 도시로 떠나는 인구가 많아 농촌의 젊은이들이 없다고 들었다. 그리고 캐나다는 기계를 이용한 대규모 농사를 짓기 때문에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대부분 규모 있는 사업체와 같다. 농촌에서 생산해서 출하하는 농산물의 가격과 마트에서 팔리는 가격의 괴리가 심해서 농촌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이 많이 실망한다. 열심히 일하는 근로자나 농민, 어민 등이 잘사는 나라가 돼야 한다. 국민이 못살고 빚에 허덕이면 동맥경화처럼 막혀서 나라도 힘들어지는 법이다. 모두가 함께 잘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종교도 정치도 바른길로 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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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해서 부처님에게 금박 옷을 입히고 도로를 포장하는 등, 늘 불사가 끊이지 않는 사찰도 많다. 그리고 이젠 전국의 사찰이 코스튬플레이와 국립공원 안에 사찰이 있어 입장료를 받는다고 말이 많은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서울 조계사에도 법회가 끝나고 점심 공양을 할 때 돈을 내는 것으로 알고 있다. 밴쿠버는 아직까지 점심 공양을 하면서 돈을 내지는 않는다. 한국교회들도 예배가 끝나면 점심을 함께 먹는 교회들이 대부분이다.

식구라는 말이 있다. 함께 공양하면 더욱 친해 질 가능성이 크다. 물론 준비하고 공양하는 일이 번거롭지만, 식구가 되기 위해서는 함께 밥을 먹으면 친분이 두터워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친구 사이에도 서로 계산을 따로 하더라도 함께 밥을 먹으면 왠지 더욱 친밀해진 느낌을 받는다.

밴쿠버 구세군 같은 경우 노숙자 쉘터 즉 쉼터를 운영하면서 노숙자와 배고파서 오는 사람들을 위해 하루 400명 이상에게 음식을 제공한다. 교회 단체에서 운영하는 노숙자 쉼터에서도 비슷한 역할을 한다. 내가 아는 성남의 가톨릭 신부가 하는 노숙자 무료 급식소도 음식도 깔끔하고 정성을 다해 노숙자들에게 봉사한다. 밴쿠버 같은 경우 도네이션이 있지만 연방 정부와 주 정부, 시 같은 자치단체의 지원이 큰 역할을 한다. 한국교회들은 선교 목적으로 길거리에서 도시락을 배포하기도 한다.

같은 종단의 같은 길을 가는 승려를 사찰에서 묵지 못하게 하고 일반 숙박업소에서 묵게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이 된다. 템플스테이로 수입을 올리는 거면 종교가 일반 숙박업소와 다른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본다. 안 그래도 해인사, 법주사 등에서 스님들의 도박 문제, 여 신도와 불미스러운 문제 등 여러 가지 문제가 터질 때마다 드는 생각은 스님도 은퇴하면 버림받지 않는 삶을 살았으면 한다는 것이다. 주지 스님이나 유명 고승같이 상좌를 두고 생활하지는 못해도 최소한 먹고 사는 문제에 아무런 구속받지 않고 염불에 정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지방에 작은 사찰엔 스님 혼자 암자에서 생활하면서 공양과 불 때기 농사 등을 모두 해결하면서 살다가 입적하는 스님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출가한 스님은 누구나 죽을 때가 되어 구차해지지 않았으면 한다. 아프거나 필요한 것이 있을 때는 무리 없이 해결될 수 있었으면 한다. 그래야 총무원장에 목숨 걸지 않고 주지를 하겠다고 권력다툼 비슷한 것을 하지 않을 것이니까 말이다. 출가한 스님이 대처의 정치하는 사람들처럼 권력욕과 물욕에 빠지면 안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학교 법인이나 병원 법인, 요양원 같은 것을 종교의 이름으로 설립하고 종교가 사회에 기여할 부분을 넓히고 기여도를 넓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대한민국은 복지가 미흡해서 은퇴하고도 다시 취직하는 국민이 대다수이고 모두가 그렇게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농촌에는 은퇴할 나이가 지난 노인들만 농촌을 지키고 있으니 당연히 은퇴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된다. 그래도 농촌에서도 꾸준히 수입이 나올 수 있는 사업을 만들어서 농촌에 살아도 일정한 수입이 나올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정치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다. 모두가 떠난 농촌은 빈집만 을씨년스럽게 남아 있음에도 땅값이 오르거나 개발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팔지도 않고 묵히는 빈집도 많다고 들었다. 캐나다도 농촌을 떠나 도시로 떠나는 인구가 많아 농촌의 젊은이들이 없다고 들었다. 그리고 캐나다는 기계를 이용한 대규모 농사를 짓기 때문에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대부분 규모 있는 사업체와 같다. 농촌에서 생산해서 출하하는 농산물의 가격과 마트에서 팔리는 가격의 괴리가 심해서 농촌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이 많이 실망한다. 열심히 일하는 근로자나 농민, 어민 등이 잘사는 나라가 돼야 한다. 국민이 못살고 빚에 허덕이면 동맥경화처럼 막혀서 나라도 힘들어지는 법이다. 모두가 함께 잘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종교도 정치도 바른길로 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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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쿠버의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부산 앞바다 비린내 코끝을 스치고

하늘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목소리
바람에 실려 내 귓가에 맴돈다

밴쿠버에 비가 내리면
고향의 비도 함께 내리는 것 같아
내 눈엔 고향집 마당 빗물이 흐른다

밴쿠버에서 길을 가다
한국어를 듣는 순간
고향 사투리 듣듯 고개 돌리고

밴쿠버 벚꽃이 피면
고향 동산 붉은 진달래 가슴에 피고
나는 어느새 어린이 되어 달리고 있다

밴쿠버 밤하늘에 별이 빛나면
고향의 별도 멍석에 누운 가족도 내게 다가온다

유행가 가사를 흥얼거리면
고향의 노래가 내 입술을 들썩댄다.
 







#작가의 변
고향에서 산 것을 따져 보니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외지로 떠돌아다니기 시작했으니, 18세까지만 고향에 있었던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고향이라고 부모님이 계시면 가끔 내려가던 서울살이나 군 생활 중에 휴가 때마다 집을 찾아 들던 날들도 있으니 딱히 18까지만 살았다고 하기도 그렇기도 하다.
지금은 고향 땅에 외지인이나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으리라. 젊은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테고 내가 아는 어르신들은 다 돌아가시거나 이제 돌아 가을날이 언제일지 모르는 분들 이거나 그럴테니 말이다.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처가 집도 장모님, 처남 둘 다 모두 먼저 세상을 떠났으나, 누님과 동생은 아직 고향과 서울에 있어 언제든 가서 만나면 반갑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아버지 어머니 계실 때처럼 마음이 편하지는 않다. 한국에 가서 묵을 때가 없다는 말도 많이 한다. 사실 낯선 여행지처럼 숙박업소에 자면서 고국을 방문하고 싶지는 않은 마음도 마음 한편에 있는 것이다. 물론 캐나다에서도 타지 아니 밴쿠버에서도 어디 멀리 떨어진 곳에 간다면 물론 숙박업소에 묵어야 하고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어느 스님이 30년을 절 밥을 먹어도 지방에서 서울에 볼일이 있어서 서울의 사찰에 가면 묵을 방이 없어서 숙박업소에 묵는다고 말했다. 설령 묵게 되더라도 템플스테이용 방이 비면 그 방에 할인해서 묵고 온다고 말하셨다. 난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스님이 출가하고 떠돌아다니는 경우가 많은데 방이 없어 일반 숙박 시설에 묵어야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스님이 방문하면 그곳이 서울이 됐든 지방이 되었든, 손님이기보다는 승려로 대우해서 가족처럼 지내는 것이 정상이 아닌가 싶다.

내가 아는 어느 종교는 다른 나라의 같은 종교 단체에 가면 미리 서로 연락을 해서 신도들의 집에서 묵을 수 있게 해 준다고 들었다. 신도와 신도들 간에도 그런데, 하물며 출가한 승려를 사찰에서 템플스테이에 밀려 방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내가 어릴 때 집에는 생선장수(주로 소금에 절인 간고등어나 말린 북어 등), 여러가지를 파는 만물 장수, 엿장수 등 이것저것 팔러 다니는 사람부터, 상이용사라면서 돈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는 사람, 대문 앞에서 목탁만 계속 두들기고 있던 탁발하는 승려 등 여러 사람의 방문이 있었다.

한 번은 울산에서 학생들이 눈 구경하겠다고 제천까지 왔다는 데 우리 마당에 텐트를 쳐도 되겠냐고 해서 그러라고 하고 삼시세끼를 먹여서 보내기도 했다. 박물 장수니 생선 장수, 옷장수 등도 식사 때가 되면 물을 말아 먹는 상황이라도 같이 한 술 뜨고 가라고 했다. 물론 나도 걸어서 5분도 안 되는 친구네 집에서 놀다가 점심때가 되면 점심을 먹고 저녁녘이 되어 서야 집에 돌아오고는 했다.







불사해서 부처님에게 금박 옷을 입히고 도로를 포장하는 등, 늘 불사가 끊이지 않는 사찰도 많다. 그리고 이젠 전국의 사찰이 코스튬플레이와 국립공원 안에 사찰이 있어 입장료를 받는다고 말이 많은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서울 조계사에도 법회가 끝나고 점심 공양을 할 때 돈을 내는 것으로 알고 있다. 밴쿠버는 아직까지 점심 공양을 하면서 돈을 내지는 않는다. 한국교회들도 예배가 끝나면 점심을 함께 먹는 교회들이 대부분이다.

식구라는 말이 있다. 함께 공양하면 더욱 친해 질 가능성이 크다. 물론 준비하고 공양하는 일이 번거롭지만, 식구가 되기 위해서는 함께 밥을 먹으면 친분이 두터워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친구 사이에도 서로 계산을 따로 하더라도 함께 밥을 먹으면 왠지 더욱 친밀해진 느낌을 받는다.

밴쿠버 구세군 같은 경우 노숙자 쉘터 즉 쉼터를 운영하면서 노숙자와 배고파서 오는 사람들을 위해 하루 400명 이상에게 음식을 제공한다. 교회 단체에서 운영하는 노숙자 쉼터에서도 비슷한 역할을 한다. 내가 아는 성남의 가톨릭 신부가 하는 노숙자 무료 급식소도 음식도 깔끔하고 정성을 다해 노숙자들에게 봉사한다. 밴쿠버 같은 경우 도네이션이 있지만 연방 정부와 주 정부, 시 같은 자치단체의 지원이 큰 역할을 한다. 한국교회들은 선교 목적으로 길거리에서 도시락을 배포하기도 한다.

같은 종단의 같은 길을 가는 승려를 사찰에서 묵지 못하게 하고 일반 숙박업소에서 묵게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이 된다. 템플스테이로 수입을 올리는 거면 종교가 일반 숙박업소와 다른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본다. 안 그래도 해인사, 법주사 등에서 스님들의 도박 문제, 여 신도와 불미스러운 문제 등 여러 가지 문제가 터질 때마다 드는 생각은 스님도 은퇴하면 버림받지 않는 삶을 살았으면 한다는 것이다. 주지 스님이나 유명 고승같이 상좌를 두고 생활하지는 못해도 최소한 먹고 사는 문제에 아무런 구속받지 않고 염불에 정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지방에 작은 사찰엔 스님 혼자 암자에서 생활하면서 공양과 불 때기 농사 등을 모두 해결하면서 살다가 입적하는 스님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출가한 스님은 누구나 죽을 때가 되어 구차해지지 않았으면 한다. 아프거나 필요한 것이 있을 때는 무리 없이 해결될 수 있었으면 한다. 그래야 총무원장에 목숨 걸지 않고 주지를 하겠다고 권력다툼 비슷한 것을 하지 않을 것이니까 말이다. 출가한 스님이 대처의 정치하는 사람들처럼 권력욕과 물욕에 빠지면 안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학교 법인이나 병원 법인, 요양원 같은 것을 종교의 이름으로 설립하고 종교가 사회에 기여할 부분을 넓히고 기여도를 넓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대한민국은 복지가 미흡해서 은퇴하고도 다시 취직하는 국민이 대다수이고 모두가 그렇게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농촌에는 은퇴할 나이가 지난 노인들만 농촌을 지키고 있으니 당연히 은퇴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된다. 그래도 농촌에서도 꾸준히 수입이 나올 수 있는 사업을 만들어서 농촌에 살아도 일정한 수입이 나올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정치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다. 모두가 떠난 농촌은 빈집만 을씨년스럽게 남아 있음에도 땅값이 오르거나 개발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팔지도 않고 묵히는 빈집도 많다고 들었다. 캐나다도 농촌을 떠나 도시로 떠나는 인구가 많아 농촌의 젊은이들이 없다고 들었다. 그리고 캐나다는 기계를 이용한 대규모 농사를 짓기 때문에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대부분 규모 있는 사업체와 같다. 농촌에서 생산해서 출하하는 농산물의 가격과 마트에서 팔리는 가격의 괴리가 심해서 농촌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이 많이 실망한다. 열심히 일하는 근로자나 농민, 어민 등이 잘사는 나라가 돼야 한다. 국민이 못살고 빚에 허덕이면 동맥경화처럼 막혀서 나라도 힘들어지는 법이다. 모두가 함께 잘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종교도 정치도 바른길로 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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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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