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38. 전쟁과 평화
[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38. 전쟁과 평화
  • 전재민 시인
  • 승인 2023.11.22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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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길.

강풍이 부는
허허벌판에선
그저 몸을 숨길
작은 바위라도
찾기에 바빴습니다

눈보라 치는
언덕에선
눈보라에서
잠시라도
비껴있으면 했었습니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은
나무 그늘에 서라도
찰나를 넘기고 싶었습니다

햇빛이 따가우면
따가워서 햇빛을
피하려 그늘로 피하고 싶었습니다

종이 상자 뒤집어쓴
길거리의 사람처럼
바람을 피하고 싶던 날이

눈보라 치는
날에도 하늘을
활강하는 독수리처럼
날고 싶던 날이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
어느날처럼 우산을 내미는
그런 사람이 나타나기를

햇빛이 따갑던
밭이랑 쭈그리고 앉은
어머니 생각에
선글라스 속 눈물이 고여
가슴으로 흐르던

바람 들어
구멍 숭숭 뚫린 우무처럼
뼈마디에도
가슴에도
바람구멍 숭숭
뚫렸을 어머니처럼
우리 가슴에
바람구멍을 안고/

 







#작가의 변
11월 11일은 캐나다의 리멤버런스데이, 즉 현충일이다. 한국에서는 빼빼로 데이라고 해서 즐기는 것 같던데, 같은 날이지만 다른 모습이다. 빼빼로 데이라서 빼빼로를 먹고 가래떡을 먹는 거야 각자가 즐길 일이지만 만약 캐나다에 와서 한국의 빼빼로 데이를 생각한다면 그건 좀 아닌 것 같다. 캐나다에서는 현충일에 많은 시민이 충혼탑에 모여 전쟁으로 목숨을 바친 용사와 전쟁으로 인해 다친 상이군인들을 기념하고 그분들의 헌신에 감사하는 날이다.

우리가 듣던 베트남 전쟁이나 한국전쟁과 유럽에서 일어난 1차 전쟁과 2차 전쟁은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여겨졌었다. 하지만 문명이 발달하면서 전쟁의 상황이 실시간으로 보도 되고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포탄이 날아다니는 현장을 보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전쟁놀이가 많은 컴퓨터 게임 영상 때문에 사람들은 전쟁에 익숙해져 있는지도 모르는데 실제 전쟁은 오히려 각색된 영화나 컴퓨터 게임보다 덜 체감 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아무리 전쟁이 인류에게 미치는 영향이 엄청나다고 말을 해도 사람들은 컴퓨터 게임에서 나의 분신이 게임에서 죽는 것을 바라지 않는 마음만큼도 못한 마음을 쓸지도 모른다.

현대사회는 전쟁 말고도 죽음의 그림자가 너무도 가까이서 우리의 주변을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게 차량이지만 자동차 사고로 늘 사람이 다치고 죽어 가는 것을 길이에서 영상에서 지켜보면서 우리는 살아간다. 살아가기 위해서만이 아니고 때로는 욕심 때문에 길을 가는 사람을 해치고 물건을 빼앗는 강도를 하기도 하고 마약을 하기 위해 돈이 필요하게 된 사람들이 행인을 다치게 하기도 하고 집을 부수고 들어가 훔치기도 한다.

사실 개인만 그런 것이 아니다. 힘없는 국가는 늘 강도를 당하듯이 당하는 경우가 많다. 남의 나라 바다에 들어가서 불법 조업을 하는 것도 남의 물건을 도둑질하는 것이고, 남의 나라를 갑자기 쳐들어가서 땅을 빼앗는 것도 물론 도둑질이다. 그러니 국가나 가정집이나 도둑을 맞지 않기 위해 힘을 기르고 방범카메라를 설치하고 방법 창살을 설치하고 방법 담장을 설치하듯이 국가도 4미터의 높은 담벼락을 설치하기도 한다.

캐나다도 러시아와 미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세계적으로 영토가 가장 넓은 나라 중 하나인 캐나다는 인구는 남한 인구와 비슷하다. 사람이 살 만한 조건을 갖춘 곳은 캐나다 남부 지역이라, 대부분 사람은 이 미국과 국경 지역에 몰려 살고 있다. 그런데 최근엔 캐나다에도 직장을 찾아 도시로 도시로 몰려들고 이민자들도 지방에 가면 오히려 인종차별을 더 받기에 도시에 몰려 살게 되면서 도시의 인구는 계속해서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도시에 인구가 늘어나니 범죄도 늘어나고 교통사고도 늘고 교통 체증도 늘고 도시의 삶은 전쟁 같은 삶이 되어 버렸다. 인구가 몰려 당연히 부동산 가격이 치솟고 렌트비도 많이 올라 밴쿠버는 세계에서 제일 비싸다는 뉴욕과 비슷한 수준이 되었다. 삶이 곧 전쟁이라는 말은 우리의 현실에 딱 어울리는 말이다. 캐나다가 선진국이라고 하지만 전자기술 등을 보면 한국이 늘 발전한 나라 같아 보인다. 그럼에도 캐나다가 한국보다 나은 것을 들라면 그래도 캐나다에선 은퇴 후에 생활을 정부에서 보장한다고 하는 것이다. 물론 물가가 오르고 부동산이 올라 풍족하게 살아가지는 못해도 폐지를 주워 생활하지 않아도 된다. 캐나다에도 빈 병을 주워서 생계를 유지 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전거를 끌고 다니면서 쓰레기봉투에 빈 병과 빈 깡통 등을 주워 리사이클 업소에 가져다주면 바로 현금을 주는데 한국에서 박스를 줍는 것보다는 수입이 더 좋고 줍는 조건도 좋다고 할 수 있다.

전쟁에 참전한 상이용사와 그 가족들에 대한 정부의 지원도 전쟁으로 죽거나 다친 참전 용사는 2천불 정도의 보조금을 지급하고, 참전 용사 배우자는 3천불에 아이당 4백불 정도를 지원받는다. 물론 전쟁으로 산화한 용사의 목숨값을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 하지만 전쟁으로 내가 죽어도 가족들이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것은 중요하다. 전쟁에 참전하고 아무런 보상도 없다면 참전을 주저하게 될 것이다. 가족이나 어린 자녀가 있다면 더욱 그렇다.

이것은 산업 현장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내가 회사에서 일하다가 죽었는데 아무런 보상도 없다고 생각해 보라 누가 목숨을 바쳐 일을 하겠는가? 하지만 최근 많은 회사의 행태를 보면 그룹 회장은 수억의 월급을 받아 가면서도 노동자들의 급여는 5개월 이상 체납한 회사도 있다. 대부분 회사는 직원들을 가족이라고 부르지만 실제 가족은 이미 회삿돈을 다 빼돌려서 부동산에 투자하고 기타 자산에도 투자한다. 노동자들에겐 회사의 경영난을 이유로 급여와 퇴직금, 상여금 등을 지급하지 못하는 회사들이 많다. 미국이나 캐나다는 퇴직금이 없다. 그 대신 퇴직하고 은퇴 연금을 지급하는 회사들이 많다. 물론 정규직일 때만 해당된다. 그래서 많은 노조 회사는 캐주얼 잡이나 임시직을 이용하는데 이런 직종은 퇴직하면 은퇴 자금이 없다. 10년 넘게 회사에서 일해도 말이다. 즉 회사는 경영자나 노동자가 같은 상황에서 일을 한다고 하지만 노동자들은 늘 희생을 강요당한다.

수없이 많은 노동자가 전쟁 같은 상황의 노동 조건에서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다. 이들도 사실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용사와 같은 희생인 데 말이다. 일반적으로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노동자 하면 빨갱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수많은 노동자가 산업 현장에서 목숨을 잃고 사라지고 손가락을 잃고 손을 잃고 하는 경우는 우리 주변에서 아주 많이 보아 왔다. 그럼에도 노동자들이 회사에 충성하는 것은 직장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업이 발달하면 할수록 노동자들이 설 자리가 없어진다. 로봇 팔이 대신하고 외국인 노동자들이 대신하는 일이 많아진다. 취업을 하고 싶어도 로컬 노동자들을 쓰지 않고 외국인 노동자들만 쓰는 경우도 많다. 건설 노동자, 농업 노동자가 그렇다. 캐나다나 한국이나 같은 것으로 알고 있다.

캐나다 현충일에 전쟁으로 산화한 호국영령을 생각하면서 노동으로 현장을 지키다 사망한 많은 노동자도 생각해 본다. 그리고 노동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조건이 되어 가는 사회도 생각한다.

일을 하지 못해도 정부가 생활을 보장하는 기본 소득이 있다면 좋겠지만, 아니라면 살아 있는 것이 지옥인 세상이 열리는 것이다. 앞으로 점점 더 AI를 비롯한 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실업 인구는 늘어 날 것이다. 아니 인구가 줄어드니 점점 더 기계나 로봇에 의존하려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로봇이 만능은 아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을 보면서 전쟁으로 희생된 군인보다, 수없는 민간인의 희생을 지켜보게 된다. 그들은 부지불식간 이승에서 저승으로 떠났다. 전쟁 명령을 내린 몇몇 수뇌부에 의해 수없이 많은 어린 영혼과 민간인의 희생을 테러리스트라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세계에 영향력이 있다는 UN의 영향력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은 종교 전쟁이기도 하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전쟁이다. 하나님은 평화를 위해 인간을 창조했는데 인간이 늘 말을 안 듣고 싸움박질만 하는 말 안 듣는 아이들인지 아니면 하느님이 전쟁을 좋아하는 전쟁의 신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쟁이 나면 수없이 많은 어린이와 여성들이 가장 피해를 본다. 그리고 군수 물자를 대는 회사들은 전쟁을 원한다. 그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

현충일에 호국영령을 위로하고 기리면서도 전쟁의 상황으로 내몰고 있는 위정자들이 늘 책임도 지지 않고 희생은 약자들이 지는 이 현상을 창조주가 만들어 놓은 것인지 묻고 싶다. 늘 듣는 이야기 하느님은 늘 계획이 있다는 그 말이 머리를 맴돈다. 우박으로 혼내주고 바닷길을 열어 탈출하게 했다는 그 만화 같은 말을 믿어야 할지 생각하면서 말이다. 물을 움 켜 쥐어도 손으로 잡지 못하고 그물을 빠져나가는 바람처럼 우리가 알 수 없는 세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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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길.

강풍이 부는
허허벌판에선
그저 몸을 숨길
작은 바위라도
찾기에 바빴습니다

눈보라 치는
언덕에선
눈보라에서
잠시라도
비껴있으면 했었습니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은
나무 그늘에 서라도
찰나를 넘기고 싶었습니다

햇빛이 따가우면
따가워서 햇빛을
피하려 그늘로 피하고 싶었습니다

종이 상자 뒤집어쓴
길거리의 사람처럼
바람을 피하고 싶던 날이

눈보라 치는
날에도 하늘을
활강하는 독수리처럼
날고 싶던 날이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
어느날처럼 우산을 내미는
그런 사람이 나타나기를

햇빛이 따갑던
밭이랑 쭈그리고 앉은
어머니 생각에
선글라스 속 눈물이 고여
가슴으로 흐르던

바람 들어
구멍 숭숭 뚫린 우무처럼
뼈마디에도
가슴에도
바람구멍 숭숭
뚫렸을 어머니처럼
우리 가슴에
바람구멍을 안고/

 





바람길.

강풍이 부는
허허벌판에선
그저 몸을 숨길
작은 바위라도
찾기에 바빴습니다

눈보라 치는
언덕에선
눈보라에서
잠시라도
비껴있으면 했었습니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은
나무 그늘에 서라도
찰나를 넘기고 싶었습니다

햇빛이 따가우면
따가워서 햇빛을
피하려 그늘로 피하고 싶었습니다

종이 상자 뒤집어쓴
길거리의 사람처럼
바람을 피하고 싶던 날이

눈보라 치는
날에도 하늘을
활강하는 독수리처럼
날고 싶던 날이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
어느날처럼 우산을 내미는
그런 사람이 나타나기를

햇빛이 따갑던
밭이랑 쭈그리고 앉은
어머니 생각에
선글라스 속 눈물이 고여
가슴으로 흐르던

바람 들어
구멍 숭숭 뚫린 우무처럼
뼈마디에도
가슴에도
바람구멍 숭숭
뚫렸을 어머니처럼
우리 가슴에
바람구멍을 안고/

 







#작가의 변
11월 11일은 캐나다의 리멤버런스데이, 즉 현충일이다. 한국에서는 빼빼로 데이라고 해서 즐기는 것 같던데, 같은 날이지만 다른 모습이다. 빼빼로 데이라서 빼빼로를 먹고 가래떡을 먹는 거야 각자가 즐길 일이지만 만약 캐나다에 와서 한국의 빼빼로 데이를 생각한다면 그건 좀 아닌 것 같다. 캐나다에서는 현충일에 많은 시민이 충혼탑에 모여 전쟁으로 목숨을 바친 용사와 전쟁으로 인해 다친 상이군인들을 기념하고 그분들의 헌신에 감사하는 날이다.

우리가 듣던 베트남 전쟁이나 한국전쟁과 유럽에서 일어난 1차 전쟁과 2차 전쟁은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여겨졌었다. 하지만 문명이 발달하면서 전쟁의 상황이 실시간으로 보도 되고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포탄이 날아다니는 현장을 보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전쟁놀이가 많은 컴퓨터 게임 영상 때문에 사람들은 전쟁에 익숙해져 있는지도 모르는데 실제 전쟁은 오히려 각색된 영화나 컴퓨터 게임보다 덜 체감 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아무리 전쟁이 인류에게 미치는 영향이 엄청나다고 말을 해도 사람들은 컴퓨터 게임에서 나의 분신이 게임에서 죽는 것을 바라지 않는 마음만큼도 못한 마음을 쓸지도 모른다.

현대사회는 전쟁 말고도 죽음의 그림자가 너무도 가까이서 우리의 주변을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게 차량이지만 자동차 사고로 늘 사람이 다치고 죽어 가는 것을 길이에서 영상에서 지켜보면서 우리는 살아간다. 살아가기 위해서만이 아니고 때로는 욕심 때문에 길을 가는 사람을 해치고 물건을 빼앗는 강도를 하기도 하고 마약을 하기 위해 돈이 필요하게 된 사람들이 행인을 다치게 하기도 하고 집을 부수고 들어가 훔치기도 한다.

사실 개인만 그런 것이 아니다. 힘없는 국가는 늘 강도를 당하듯이 당하는 경우가 많다. 남의 나라 바다에 들어가서 불법 조업을 하는 것도 남의 물건을 도둑질하는 것이고, 남의 나라를 갑자기 쳐들어가서 땅을 빼앗는 것도 물론 도둑질이다. 그러니 국가나 가정집이나 도둑을 맞지 않기 위해 힘을 기르고 방범카메라를 설치하고 방법 창살을 설치하고 방법 담장을 설치하듯이 국가도 4미터의 높은 담벼락을 설치하기도 한다.

캐나다도 러시아와 미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세계적으로 영토가 가장 넓은 나라 중 하나인 캐나다는 인구는 남한 인구와 비슷하다. 사람이 살 만한 조건을 갖춘 곳은 캐나다 남부 지역이라, 대부분 사람은 이 미국과 국경 지역에 몰려 살고 있다. 그런데 최근엔 캐나다에도 직장을 찾아 도시로 도시로 몰려들고 이민자들도 지방에 가면 오히려 인종차별을 더 받기에 도시에 몰려 살게 되면서 도시의 인구는 계속해서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도시에 인구가 늘어나니 범죄도 늘어나고 교통사고도 늘고 교통 체증도 늘고 도시의 삶은 전쟁 같은 삶이 되어 버렸다. 인구가 몰려 당연히 부동산 가격이 치솟고 렌트비도 많이 올라 밴쿠버는 세계에서 제일 비싸다는 뉴욕과 비슷한 수준이 되었다. 삶이 곧 전쟁이라는 말은 우리의 현실에 딱 어울리는 말이다. 캐나다가 선진국이라고 하지만 전자기술 등을 보면 한국이 늘 발전한 나라 같아 보인다. 그럼에도 캐나다가 한국보다 나은 것을 들라면 그래도 캐나다에선 은퇴 후에 생활을 정부에서 보장한다고 하는 것이다. 물론 물가가 오르고 부동산이 올라 풍족하게 살아가지는 못해도 폐지를 주워 생활하지 않아도 된다. 캐나다에도 빈 병을 주워서 생계를 유지 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전거를 끌고 다니면서 쓰레기봉투에 빈 병과 빈 깡통 등을 주워 리사이클 업소에 가져다주면 바로 현금을 주는데 한국에서 박스를 줍는 것보다는 수입이 더 좋고 줍는 조건도 좋다고 할 수 있다.

전쟁에 참전한 상이용사와 그 가족들에 대한 정부의 지원도 전쟁으로 죽거나 다친 참전 용사는 2천불 정도의 보조금을 지급하고, 참전 용사 배우자는 3천불에 아이당 4백불 정도를 지원받는다. 물론 전쟁으로 산화한 용사의 목숨값을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 하지만 전쟁으로 내가 죽어도 가족들이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것은 중요하다. 전쟁에 참전하고 아무런 보상도 없다면 참전을 주저하게 될 것이다. 가족이나 어린 자녀가 있다면 더욱 그렇다.

이것은 산업 현장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내가 회사에서 일하다가 죽었는데 아무런 보상도 없다고 생각해 보라 누가 목숨을 바쳐 일을 하겠는가? 하지만 최근 많은 회사의 행태를 보면 그룹 회장은 수억의 월급을 받아 가면서도 노동자들의 급여는 5개월 이상 체납한 회사도 있다. 대부분 회사는 직원들을 가족이라고 부르지만 실제 가족은 이미 회삿돈을 다 빼돌려서 부동산에 투자하고 기타 자산에도 투자한다. 노동자들에겐 회사의 경영난을 이유로 급여와 퇴직금, 상여금 등을 지급하지 못하는 회사들이 많다. 미국이나 캐나다는 퇴직금이 없다. 그 대신 퇴직하고 은퇴 연금을 지급하는 회사들이 많다. 물론 정규직일 때만 해당된다. 그래서 많은 노조 회사는 캐주얼 잡이나 임시직을 이용하는데 이런 직종은 퇴직하면 은퇴 자금이 없다. 10년 넘게 회사에서 일해도 말이다. 즉 회사는 경영자나 노동자가 같은 상황에서 일을 한다고 하지만 노동자들은 늘 희생을 강요당한다.

수없이 많은 노동자가 전쟁 같은 상황의 노동 조건에서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다. 이들도 사실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용사와 같은 희생인 데 말이다. 일반적으로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노동자 하면 빨갱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수많은 노동자가 산업 현장에서 목숨을 잃고 사라지고 손가락을 잃고 손을 잃고 하는 경우는 우리 주변에서 아주 많이 보아 왔다. 그럼에도 노동자들이 회사에 충성하는 것은 직장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업이 발달하면 할수록 노동자들이 설 자리가 없어진다. 로봇 팔이 대신하고 외국인 노동자들이 대신하는 일이 많아진다. 취업을 하고 싶어도 로컬 노동자들을 쓰지 않고 외국인 노동자들만 쓰는 경우도 많다. 건설 노동자, 농업 노동자가 그렇다. 캐나다나 한국이나 같은 것으로 알고 있다.

캐나다 현충일에 전쟁으로 산화한 호국영령을 생각하면서 노동으로 현장을 지키다 사망한 많은 노동자도 생각해 본다. 그리고 노동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조건이 되어 가는 사회도 생각한다.

일을 하지 못해도 정부가 생활을 보장하는 기본 소득이 있다면 좋겠지만, 아니라면 살아 있는 것이 지옥인 세상이 열리는 것이다. 앞으로 점점 더 AI를 비롯한 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실업 인구는 늘어 날 것이다. 아니 인구가 줄어드니 점점 더 기계나 로봇에 의존하려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로봇이 만능은 아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을 보면서 전쟁으로 희생된 군인보다, 수없는 민간인의 희생을 지켜보게 된다. 그들은 부지불식간 이승에서 저승으로 떠났다. 전쟁 명령을 내린 몇몇 수뇌부에 의해 수없이 많은 어린 영혼과 민간인의 희생을 테러리스트라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세계에 영향력이 있다는 UN의 영향력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은 종교 전쟁이기도 하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전쟁이다. 하나님은 평화를 위해 인간을 창조했는데 인간이 늘 말을 안 듣고 싸움박질만 하는 말 안 듣는 아이들인지 아니면 하느님이 전쟁을 좋아하는 전쟁의 신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쟁이 나면 수없이 많은 어린이와 여성들이 가장 피해를 본다. 그리고 군수 물자를 대는 회사들은 전쟁을 원한다. 그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

현충일에 호국영령을 위로하고 기리면서도 전쟁의 상황으로 내몰고 있는 위정자들이 늘 책임도 지지 않고 희생은 약자들이 지는 이 현상을 창조주가 만들어 놓은 것인지 묻고 싶다. 늘 듣는 이야기 하느님은 늘 계획이 있다는 그 말이 머리를 맴돈다. 우박으로 혼내주고 바닷길을 열어 탈출하게 했다는 그 만화 같은 말을 믿어야 할지 생각하면서 말이다. 물을 움 켜 쥐어도 손으로 잡지 못하고 그물을 빠져나가는 바람처럼 우리가 알 수 없는 세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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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변
11월 11일은 캐나다의 리멤버런스데이, 즉 현충일이다. 한국에서는 빼빼로 데이라고 해서 즐기는 것 같던데, 같은 날이지만 다른 모습이다. 빼빼로 데이라서 빼빼로를 먹고 가래떡을 먹는 거야 각자가 즐길 일이지만 만약 캐나다에 와서 한국의 빼빼로 데이를 생각한다면 그건 좀 아닌 것 같다. 캐나다에서는 현충일에 많은 시민이 충혼탑에 모여 전쟁으로 목숨을 바친 용사와 전쟁으로 인해 다친 상이군인들을 기념하고 그분들의 헌신에 감사하는 날이다.

우리가 듣던 베트남 전쟁이나 한국전쟁과 유럽에서 일어난 1차 전쟁과 2차 전쟁은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여겨졌었다. 하지만 문명이 발달하면서 전쟁의 상황이 실시간으로 보도 되고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포탄이 날아다니는 현장을 보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전쟁놀이가 많은 컴퓨터 게임 영상 때문에 사람들은 전쟁에 익숙해져 있는지도 모르는데 실제 전쟁은 오히려 각색된 영화나 컴퓨터 게임보다 덜 체감 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아무리 전쟁이 인류에게 미치는 영향이 엄청나다고 말을 해도 사람들은 컴퓨터 게임에서 나의 분신이 게임에서 죽는 것을 바라지 않는 마음만큼도 못한 마음을 쓸지도 모른다.

현대사회는 전쟁 말고도 죽음의 그림자가 너무도 가까이서 우리의 주변을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게 차량이지만 자동차 사고로 늘 사람이 다치고 죽어 가는 것을 길이에서 영상에서 지켜보면서 우리는 살아간다. 살아가기 위해서만이 아니고 때로는 욕심 때문에 길을 가는 사람을 해치고 물건을 빼앗는 강도를 하기도 하고 마약을 하기 위해 돈이 필요하게 된 사람들이 행인을 다치게 하기도 하고 집을 부수고 들어가 훔치기도 한다.

사실 개인만 그런 것이 아니다. 힘없는 국가는 늘 강도를 당하듯이 당하는 경우가 많다. 남의 나라 바다에 들어가서 불법 조업을 하는 것도 남의 물건을 도둑질하는 것이고, 남의 나라를 갑자기 쳐들어가서 땅을 빼앗는 것도 물론 도둑질이다. 그러니 국가나 가정집이나 도둑을 맞지 않기 위해 힘을 기르고 방범카메라를 설치하고 방법 창살을 설치하고 방법 담장을 설치하듯이 국가도 4미터의 높은 담벼락을 설치하기도 한다.

캐나다도 러시아와 미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세계적으로 영토가 가장 넓은 나라 중 하나인 캐나다는 인구는 남한 인구와 비슷하다. 사람이 살 만한 조건을 갖춘 곳은 캐나다 남부 지역이라, 대부분 사람은 이 미국과 국경 지역에 몰려 살고 있다. 그런데 최근엔 캐나다에도 직장을 찾아 도시로 도시로 몰려들고 이민자들도 지방에 가면 오히려 인종차별을 더 받기에 도시에 몰려 살게 되면서 도시의 인구는 계속해서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도시에 인구가 늘어나니 범죄도 늘어나고 교통사고도 늘고 교통 체증도 늘고 도시의 삶은 전쟁 같은 삶이 되어 버렸다. 인구가 몰려 당연히 부동산 가격이 치솟고 렌트비도 많이 올라 밴쿠버는 세계에서 제일 비싸다는 뉴욕과 비슷한 수준이 되었다. 삶이 곧 전쟁이라는 말은 우리의 현실에 딱 어울리는 말이다. 캐나다가 선진국이라고 하지만 전자기술 등을 보면 한국이 늘 발전한 나라 같아 보인다. 그럼에도 캐나다가 한국보다 나은 것을 들라면 그래도 캐나다에선 은퇴 후에 생활을 정부에서 보장한다고 하는 것이다. 물론 물가가 오르고 부동산이 올라 풍족하게 살아가지는 못해도 폐지를 주워 생활하지 않아도 된다. 캐나다에도 빈 병을 주워서 생계를 유지 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전거를 끌고 다니면서 쓰레기봉투에 빈 병과 빈 깡통 등을 주워 리사이클 업소에 가져다주면 바로 현금을 주는데 한국에서 박스를 줍는 것보다는 수입이 더 좋고 줍는 조건도 좋다고 할 수 있다.

전쟁에 참전한 상이용사와 그 가족들에 대한 정부의 지원도 전쟁으로 죽거나 다친 참전 용사는 2천불 정도의 보조금을 지급하고, 참전 용사 배우자는 3천불에 아이당 4백불 정도를 지원받는다. 물론 전쟁으로 산화한 용사의 목숨값을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 하지만 전쟁으로 내가 죽어도 가족들이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것은 중요하다. 전쟁에 참전하고 아무런 보상도 없다면 참전을 주저하게 될 것이다. 가족이나 어린 자녀가 있다면 더욱 그렇다.

이것은 산업 현장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내가 회사에서 일하다가 죽었는데 아무런 보상도 없다고 생각해 보라 누가 목숨을 바쳐 일을 하겠는가? 하지만 최근 많은 회사의 행태를 보면 그룹 회장은 수억의 월급을 받아 가면서도 노동자들의 급여는 5개월 이상 체납한 회사도 있다. 대부분 회사는 직원들을 가족이라고 부르지만 실제 가족은 이미 회삿돈을 다 빼돌려서 부동산에 투자하고 기타 자산에도 투자한다. 노동자들에겐 회사의 경영난을 이유로 급여와 퇴직금, 상여금 등을 지급하지 못하는 회사들이 많다. 미국이나 캐나다는 퇴직금이 없다. 그 대신 퇴직하고 은퇴 연금을 지급하는 회사들이 많다. 물론 정규직일 때만 해당된다. 그래서 많은 노조 회사는 캐주얼 잡이나 임시직을 이용하는데 이런 직종은 퇴직하면 은퇴 자금이 없다. 10년 넘게 회사에서 일해도 말이다. 즉 회사는 경영자나 노동자가 같은 상황에서 일을 한다고 하지만 노동자들은 늘 희생을 강요당한다.

수없이 많은 노동자가 전쟁 같은 상황의 노동 조건에서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다. 이들도 사실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용사와 같은 희생인 데 말이다. 일반적으로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노동자 하면 빨갱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수많은 노동자가 산업 현장에서 목숨을 잃고 사라지고 손가락을 잃고 손을 잃고 하는 경우는 우리 주변에서 아주 많이 보아 왔다. 그럼에도 노동자들이 회사에 충성하는 것은 직장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업이 발달하면 할수록 노동자들이 설 자리가 없어진다. 로봇 팔이 대신하고 외국인 노동자들이 대신하는 일이 많아진다. 취업을 하고 싶어도 로컬 노동자들을 쓰지 않고 외국인 노동자들만 쓰는 경우도 많다. 건설 노동자, 농업 노동자가 그렇다. 캐나다나 한국이나 같은 것으로 알고 있다.

캐나다 현충일에 전쟁으로 산화한 호국영령을 생각하면서 노동으로 현장을 지키다 사망한 많은 노동자도 생각해 본다. 그리고 노동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조건이 되어 가는 사회도 생각한다.

일을 하지 못해도 정부가 생활을 보장하는 기본 소득이 있다면 좋겠지만, 아니라면 살아 있는 것이 지옥인 세상이 열리는 것이다. 앞으로 점점 더 AI를 비롯한 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실업 인구는 늘어 날 것이다. 아니 인구가 줄어드니 점점 더 기계나 로봇에 의존하려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로봇이 만능은 아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을 보면서 전쟁으로 희생된 군인보다, 수없는 민간인의 희생을 지켜보게 된다. 그들은 부지불식간 이승에서 저승으로 떠났다. 전쟁 명령을 내린 몇몇 수뇌부에 의해 수없이 많은 어린 영혼과 민간인의 희생을 테러리스트라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세계에 영향력이 있다는 UN의 영향력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은 종교 전쟁이기도 하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전쟁이다. 하나님은 평화를 위해 인간을 창조했는데 인간이 늘 말을 안 듣고 싸움박질만 하는 말 안 듣는 아이들인지 아니면 하느님이 전쟁을 좋아하는 전쟁의 신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쟁이 나면 수없이 많은 어린이와 여성들이 가장 피해를 본다. 그리고 군수 물자를 대는 회사들은 전쟁을 원한다. 그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

현충일에 호국영령을 위로하고 기리면서도 전쟁의 상황으로 내몰고 있는 위정자들이 늘 책임도 지지 않고 희생은 약자들이 지는 이 현상을 창조주가 만들어 놓은 것인지 묻고 싶다. 늘 듣는 이야기 하느님은 늘 계획이 있다는 그 말이 머리를 맴돈다. 우박으로 혼내주고 바닷길을 열어 탈출하게 했다는 그 만화 같은 말을 믿어야 할지 생각하면서 말이다. 물을 움 켜 쥐어도 손으로 잡지 못하고 그물을 빠져나가는 바람처럼 우리가 알 수 없는 세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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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길.

강풍이 부는
허허벌판에선
그저 몸을 숨길
작은 바위라도
찾기에 바빴습니다

눈보라 치는
언덕에선
눈보라에서
잠시라도
비껴있으면 했었습니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은
나무 그늘에 서라도
찰나를 넘기고 싶었습니다

햇빛이 따가우면
따가워서 햇빛을
피하려 그늘로 피하고 싶었습니다

종이 상자 뒤집어쓴
길거리의 사람처럼
바람을 피하고 싶던 날이

눈보라 치는
날에도 하늘을
활강하는 독수리처럼
날고 싶던 날이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
어느날처럼 우산을 내미는
그런 사람이 나타나기를

햇빛이 따갑던
밭이랑 쭈그리고 앉은
어머니 생각에
선글라스 속 눈물이 고여
가슴으로 흐르던

바람 들어
구멍 숭숭 뚫린 우무처럼
뼈마디에도
가슴에도
바람구멍 숭숭
뚫렸을 어머니처럼
우리 가슴에
바람구멍을 안고/

 







#작가의 변
11월 11일은 캐나다의 리멤버런스데이, 즉 현충일이다. 한국에서는 빼빼로 데이라고 해서 즐기는 것 같던데, 같은 날이지만 다른 모습이다. 빼빼로 데이라서 빼빼로를 먹고 가래떡을 먹는 거야 각자가 즐길 일이지만 만약 캐나다에 와서 한국의 빼빼로 데이를 생각한다면 그건 좀 아닌 것 같다. 캐나다에서는 현충일에 많은 시민이 충혼탑에 모여 전쟁으로 목숨을 바친 용사와 전쟁으로 인해 다친 상이군인들을 기념하고 그분들의 헌신에 감사하는 날이다.

우리가 듣던 베트남 전쟁이나 한국전쟁과 유럽에서 일어난 1차 전쟁과 2차 전쟁은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여겨졌었다. 하지만 문명이 발달하면서 전쟁의 상황이 실시간으로 보도 되고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포탄이 날아다니는 현장을 보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전쟁놀이가 많은 컴퓨터 게임 영상 때문에 사람들은 전쟁에 익숙해져 있는지도 모르는데 실제 전쟁은 오히려 각색된 영화나 컴퓨터 게임보다 덜 체감 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아무리 전쟁이 인류에게 미치는 영향이 엄청나다고 말을 해도 사람들은 컴퓨터 게임에서 나의 분신이 게임에서 죽는 것을 바라지 않는 마음만큼도 못한 마음을 쓸지도 모른다.

현대사회는 전쟁 말고도 죽음의 그림자가 너무도 가까이서 우리의 주변을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게 차량이지만 자동차 사고로 늘 사람이 다치고 죽어 가는 것을 길이에서 영상에서 지켜보면서 우리는 살아간다. 살아가기 위해서만이 아니고 때로는 욕심 때문에 길을 가는 사람을 해치고 물건을 빼앗는 강도를 하기도 하고 마약을 하기 위해 돈이 필요하게 된 사람들이 행인을 다치게 하기도 하고 집을 부수고 들어가 훔치기도 한다.

사실 개인만 그런 것이 아니다. 힘없는 국가는 늘 강도를 당하듯이 당하는 경우가 많다. 남의 나라 바다에 들어가서 불법 조업을 하는 것도 남의 물건을 도둑질하는 것이고, 남의 나라를 갑자기 쳐들어가서 땅을 빼앗는 것도 물론 도둑질이다. 그러니 국가나 가정집이나 도둑을 맞지 않기 위해 힘을 기르고 방범카메라를 설치하고 방법 창살을 설치하고 방법 담장을 설치하듯이 국가도 4미터의 높은 담벼락을 설치하기도 한다.

캐나다도 러시아와 미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세계적으로 영토가 가장 넓은 나라 중 하나인 캐나다는 인구는 남한 인구와 비슷하다. 사람이 살 만한 조건을 갖춘 곳은 캐나다 남부 지역이라, 대부분 사람은 이 미국과 국경 지역에 몰려 살고 있다. 그런데 최근엔 캐나다에도 직장을 찾아 도시로 도시로 몰려들고 이민자들도 지방에 가면 오히려 인종차별을 더 받기에 도시에 몰려 살게 되면서 도시의 인구는 계속해서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도시에 인구가 늘어나니 범죄도 늘어나고 교통사고도 늘고 교통 체증도 늘고 도시의 삶은 전쟁 같은 삶이 되어 버렸다. 인구가 몰려 당연히 부동산 가격이 치솟고 렌트비도 많이 올라 밴쿠버는 세계에서 제일 비싸다는 뉴욕과 비슷한 수준이 되었다. 삶이 곧 전쟁이라는 말은 우리의 현실에 딱 어울리는 말이다. 캐나다가 선진국이라고 하지만 전자기술 등을 보면 한국이 늘 발전한 나라 같아 보인다. 그럼에도 캐나다가 한국보다 나은 것을 들라면 그래도 캐나다에선 은퇴 후에 생활을 정부에서 보장한다고 하는 것이다. 물론 물가가 오르고 부동산이 올라 풍족하게 살아가지는 못해도 폐지를 주워 생활하지 않아도 된다. 캐나다에도 빈 병을 주워서 생계를 유지 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전거를 끌고 다니면서 쓰레기봉투에 빈 병과 빈 깡통 등을 주워 리사이클 업소에 가져다주면 바로 현금을 주는데 한국에서 박스를 줍는 것보다는 수입이 더 좋고 줍는 조건도 좋다고 할 수 있다.

전쟁에 참전한 상이용사와 그 가족들에 대한 정부의 지원도 전쟁으로 죽거나 다친 참전 용사는 2천불 정도의 보조금을 지급하고, 참전 용사 배우자는 3천불에 아이당 4백불 정도를 지원받는다. 물론 전쟁으로 산화한 용사의 목숨값을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 하지만 전쟁으로 내가 죽어도 가족들이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것은 중요하다. 전쟁에 참전하고 아무런 보상도 없다면 참전을 주저하게 될 것이다. 가족이나 어린 자녀가 있다면 더욱 그렇다.

이것은 산업 현장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내가 회사에서 일하다가 죽었는데 아무런 보상도 없다고 생각해 보라 누가 목숨을 바쳐 일을 하겠는가? 하지만 최근 많은 회사의 행태를 보면 그룹 회장은 수억의 월급을 받아 가면서도 노동자들의 급여는 5개월 이상 체납한 회사도 있다. 대부분 회사는 직원들을 가족이라고 부르지만 실제 가족은 이미 회삿돈을 다 빼돌려서 부동산에 투자하고 기타 자산에도 투자한다. 노동자들에겐 회사의 경영난을 이유로 급여와 퇴직금, 상여금 등을 지급하지 못하는 회사들이 많다. 미국이나 캐나다는 퇴직금이 없다. 그 대신 퇴직하고 은퇴 연금을 지급하는 회사들이 많다. 물론 정규직일 때만 해당된다. 그래서 많은 노조 회사는 캐주얼 잡이나 임시직을 이용하는데 이런 직종은 퇴직하면 은퇴 자금이 없다. 10년 넘게 회사에서 일해도 말이다. 즉 회사는 경영자나 노동자가 같은 상황에서 일을 한다고 하지만 노동자들은 늘 희생을 강요당한다.

수없이 많은 노동자가 전쟁 같은 상황의 노동 조건에서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다. 이들도 사실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용사와 같은 희생인 데 말이다. 일반적으로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노동자 하면 빨갱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수많은 노동자가 산업 현장에서 목숨을 잃고 사라지고 손가락을 잃고 손을 잃고 하는 경우는 우리 주변에서 아주 많이 보아 왔다. 그럼에도 노동자들이 회사에 충성하는 것은 직장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업이 발달하면 할수록 노동자들이 설 자리가 없어진다. 로봇 팔이 대신하고 외국인 노동자들이 대신하는 일이 많아진다. 취업을 하고 싶어도 로컬 노동자들을 쓰지 않고 외국인 노동자들만 쓰는 경우도 많다. 건설 노동자, 농업 노동자가 그렇다. 캐나다나 한국이나 같은 것으로 알고 있다.

캐나다 현충일에 전쟁으로 산화한 호국영령을 생각하면서 노동으로 현장을 지키다 사망한 많은 노동자도 생각해 본다. 그리고 노동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조건이 되어 가는 사회도 생각한다.

일을 하지 못해도 정부가 생활을 보장하는 기본 소득이 있다면 좋겠지만, 아니라면 살아 있는 것이 지옥인 세상이 열리는 것이다. 앞으로 점점 더 AI를 비롯한 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실업 인구는 늘어 날 것이다. 아니 인구가 줄어드니 점점 더 기계나 로봇에 의존하려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로봇이 만능은 아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을 보면서 전쟁으로 희생된 군인보다, 수없는 민간인의 희생을 지켜보게 된다. 그들은 부지불식간 이승에서 저승으로 떠났다. 전쟁 명령을 내린 몇몇 수뇌부에 의해 수없이 많은 어린 영혼과 민간인의 희생을 테러리스트라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세계에 영향력이 있다는 UN의 영향력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은 종교 전쟁이기도 하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전쟁이다. 하나님은 평화를 위해 인간을 창조했는데 인간이 늘 말을 안 듣고 싸움박질만 하는 말 안 듣는 아이들인지 아니면 하느님이 전쟁을 좋아하는 전쟁의 신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쟁이 나면 수없이 많은 어린이와 여성들이 가장 피해를 본다. 그리고 군수 물자를 대는 회사들은 전쟁을 원한다. 그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

현충일에 호국영령을 위로하고 기리면서도 전쟁의 상황으로 내몰고 있는 위정자들이 늘 책임도 지지 않고 희생은 약자들이 지는 이 현상을 창조주가 만들어 놓은 것인지 묻고 싶다. 늘 듣는 이야기 하느님은 늘 계획이 있다는 그 말이 머리를 맴돈다. 우박으로 혼내주고 바닷길을 열어 탈출하게 했다는 그 만화 같은 말을 믿어야 할지 생각하면서 말이다. 물을 움 켜 쥐어도 손으로 잡지 못하고 그물을 빠져나가는 바람처럼 우리가 알 수 없는 세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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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이 기사에 대한 반론 및 기사 제보 mytrea7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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