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말하면 할수록
그녀 몸에 가시가 돋았다
그녀 말에 가시가 돋아나더니
점점 온몸에 가시가 돋아
동그란 공에 온통 가시가 돋아나듯
가시가 돋았다.
모국어가 영어가 아니라
그녀 유창한 영어가 처음엔 부러웠고
다음엔 왜라는 물음표만 한가득
도움을 원하는 그녀의 당당한 모습이
처음엔 좋았다
그러다 좀 심하다 싶었고
나중엔 이건 아니지 싶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시에 찔릴까
렌트비 내는 날짜가 지났고
정부 보조금이 늦게 나왔는데
빨리 달라는 그녀의 재촉이
마치 빚쟁이가 빚 받으러 온 것 같다
그리고 그녀는 공무원들한테
불친절하다고 말하고 있다
처음엔 담당자 저런 남자 싫어
그 다음엔 수퍼바이저에게 대답하라 재촉하고
굳게 닫혔던 문에서 매니저가 나와서
설명한다
역시 목소리가 크고 봐야 하나
온몸에 가시돔을 한 그녀가
방안에 공기를 긴장하게 한다
나도 아무것도 모르는 옆에 할아버지처럼
물끄러미 바라보고 싶다.
#작가의 변
이민 온 지 30여 년이 다 되어 가지만 여전히 서류를 쓸 때 캐나다에서 태어났느냐 해외서 태어났다면 어디서 태어났느냐, 어머니의 언어는 무엇이냐. 즉 모국어가 무엇이냐를 묻는다.
요즘에 이민 오거나 유학을 오는 학생들은 대부분 영어를 잘하는 편이다. 우리가 이민 올 때만 해도 영어를 대부분 못했다. 당시 홍콩이 영국령에서 중국으로 반환된다고 하여 많은 사람이 이민을 왔다. 홍콩에서 온 사람들은 그래도 영어로 공부하는 학교를 다녀서 영어가 우리보다는 나았지만, 어른들은 사회생활하면서 중국어만 쓰다 보니 영어가 잘 안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당시엔 영어 학교같이 다니던 학생들이 순진했던 것 같다. 학생들끼리 학생들 집에 모여 잔치 비슷하게 모임을 했으니 말이다. 그 후로 모두들 사회 생활하느라 바쁘고 이곳저곳 흩어져 살다 보니 서로의 안부를 모르고 수십 년이 흘렀다.
캐나다에 처음 로컬직장을 잡아서 기내식 회사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들하고도 한 달에 한 번 중국 식당에 모여서 고량주에 소주 양주를 섞어 마시면서 노래방에도 함께 가고 즐거웠던 젊은 날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과도 함께 직장을 다니지 않아 연락이 뜸해지고 이젠 연락하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다. 캐나다는 직장 동료로 만나던, 개인적으로 만나던 계속 만날 계기가 없으면 다시 연락하는 경우가 드물다. 물론 필요하면 서로 연락을 하기도 하지만 필요하지 않으면 만나지 않게 된다. 처음 직장이던 기내식 회사도 사실은 이제 아는 사람들 대부분이 은퇴했다. 왜냐하면 내가 거의 가장 어린 나이였으니 이젠 다들 은퇴해서 조용히 사는지 우연이라도 만날 법도 한데 만나는 것조차 힘들다. 그래도 요즘에 한국의 고교 동창들의 소식을 밴드로 가끔 들을 수 있어서 좋긴 하지만 모임에 한 번도 나가지 못한 아쉬움은 오히려 더 크다. 이젠 동창들은 아들딸들 장가 시집가고 손주들 자랑하는 나이가 됐다. 젊은 날처럼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없어지고 나 자신이 점점 작아지는 것 같다. 나이 들면 키도 준다는 데, 마음도 줄어드는 것은 아닌가 싶다. 마음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감이 줄어드는 것이리라.
초등학교 때 장래 희망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많은 학생은 대통령을 말했다. 육사만 가면 대통령을 할 것만 같았다. 육사를 간 건 아니지만 말이다. 난 어느 대학에 가지 하고 한참 고민하던 때가 있었다. 실업계 고등학교니까 취업해야 정상이었지만 취업은 될 것 같지도 않고 내 길이 아닌 것 같았다. 용산에 철도 전문대와 세무대학, 그리고 서울 예전 문창과가 내가 가고 싶었던 대학이었고, 모집 요강과 원서를 사 들고 오기도 했다. 그러다 학력고사 성적을 받아 들고는 연대 원주 캠퍼스를 가려고 몰래 면접까지 봤는데 아버지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때부터 아버지 얼굴을 밥상머리에서 마주하는 것조차 싫었다. 무작정 집에서 나가자고 시험을 본 곳이 청주직업훈련원이었다. 그렇게 나의 사회생활이자 객지 생활은 시작되고 지금까지 고향으로 돌아 가지 못하고 이역만리 머나먼 타국까지 와서 조국을 그리워하고 조국의 친구들을 그리워한다.
아들은 왜 원어민처럼 영어를 못하냐고 묻고 남들처럼 공부해서 조리사보다는 더 나은 직장을 잡지 못했냐고 말한다. 자기가 면접 본 한국 아줌마는 영어 공부를 해서 어카운턴트 즉 회계사가 되어 있던데 왜 아빠는 그렇게 하지 못했냐, 아빠가 돈도 못 버는 조리사 직업을 가지는 바람에 우리가 가난해 집도 없고, 렌트 아파트에서 매니저한테 싫은 소리를 듣고 검사를 받고 쫓겨날지 몰라 전전 궁금하지 않냐고 말했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다.
나도 왜 캐나다에서 태어나 영어를 잘하고 공부를 잘해서 남들보다 잘 살지 못했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운명이 있고 모든 직업은 다 필요하고 중요하다. 돈을 많이 버는 직업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아들 또래의 젊은 친구들은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이 중요한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직업으로서의 사명감 그런 것도 찾아보기 힘들다. 사실 돈을 잘 벌기로는 의사도 잘 벌지만, 의사보다 컴퓨터 엔지니어가 더 잘 벌어서 컴퓨터로 전공을 바꾸려 했던 것을 이해하면서도 결과적으로 그 학과에 적응하지 못해 학교를 그만둔 것까지 내 탓을 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해스팅의 노숙자들은 대부분 캐나다에서 태어나거나 이곳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이다. 당연히 영어를 잘한다. 그들은 한때 잘못된 선택으로 마약 중독이나 알코올 중독 등에 빠져 노숙자의 길에 들어섰다. 물론 안 그런 사람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이 그렇다.
몇 년 전 퇴직한 대학교수를 돌보는 일을 하던 지인이 그분들은 미국에서 대학교수를 하던 사람들인데 치매가 걸리니 영어는 다 잊어버리고 한국말만 한다고 한다. 그리고 교양이 넘치던 모습은 어디 가고 막말하기도 한다고 한다. 캐나다는 다문화 국가이다. 버스나 전철을 타보면 여러 가지 언어가 들려 온다. 때론 모르는 언어가 톤이 높으면 시끄러운 때도 있다. 캐나다의 공식 언어는 영어와 불어지만 사실 서부에서는 불어를 하는 사람들은 소수이다. 오히려 중국인과 인도 사람들이 인구 비례로는 더 크다. 필리핀 인구도 많다. 그들은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기 때문에 캐나다에서 취업하는 것이 한국인보다는 쉬운 편이다. 인도인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필리핀인이나 인도인들이 자기들끼리 쓰는 말은 영어는 아니다.
캐나다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은 백인이 가지는 사고를 한다. 겉모습은 동양인이지만 생각과 관습, 언어는 캐나다이다. 아들이 나에게 왜 부자가 못됐냐고 하는 것도, 좀 더 좋은 직업을 가지지 그랬냐는 것도 이해는 한다. 하지만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해서 살아가길 바란다. 그리고 모든 직업은 소중하며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모두가 행복하게 삶을 영위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부자라고 행복하고 마냥 좋은 것은 아니고, 그 부자 집안에서도 피 튀기는 재산 싸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언어는 의사소통의 중요한 도구이다. 하지만 때로 언어로 인해 많은 마음의 상처를 받기도 한다. 말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은 또 다른 말로 말이 그만큼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말하지 않아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으면 답답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말을 듣고 가슴이 찢기는 고통을 맛보는 지옥에 있을 거라면 차라리 말하지 않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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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은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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