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풍을 절 골로만 가던 초등학교 시절
왜 우린 소풍을 늘 절 골로 가지 하고 의아해했다
그러다 고학년이 되어 좀 더 멀리 간 곳은 대각사
절 골보다는 큰 절이었지만 키만 멀대처럼 큰 부처님 옆에
사진을 찍고 나면 별로 할 것이 없었다.
부모님이 해마다 한 번은 절에 갔다 와서
스님이 올해 너는 물 조심 하고 불조심하라고 하더라
그러니 물가에 가지 말라고 했는데
저수지에 가서 물놀이하다 빠져 죽을뻔했다
해마다 똑같은 말이 고장 난 시계가 하루 두 번 시간 맞추듯
맞춰 버린 사건이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연극 보고
여름 성경 학교에 과자 주고 연필 주는데 혹해서
예배당에 다니기 시작한 이후로
어머니는 태몽이 불교적이었다 말하면 못마땅해하셨다
찬송가가 입에 붙고 주기도문이 국민교육헌장처럼 줄줄 나올 무렵부터
방황하고 레지오마리에 부단장을 하며 십자군 기사처럼
마음엔 깊은 신앙이 박혔었다
아내를 만나면서 자주 가던 조계사
그리고 전국 사찰을 찾아 다니기도 했지만
뭔지도 모르고 다닌 날들
캐나다 이민 와서 다니기 시작한 서광사
오늘은 유튜브로 부처님오신날 조계사 법회를 봤다
#작가의 변
이민 왔을 때 직장을 바로 못 구해서 밴쿠버 서광사에 가서 사찰 일들을 많이 도왔다. 절에는 늘 일이 있었다. 밭에 채소를 가꾸는 일, 사찰에 관련된 일, 초파일 때가 다가오면 연등을 만드는데 연잎을 하나하나 풀로 붙이는 줄 처음 알았다. 하지만 직장도 없고 가지고 온 돈도 없어 연등을 달지 못했다. 그런데 내가 만든 연등이 열 개 정도는 되겠다고 생각하면 걸려 있는 연등에 다른 사람들 이름이 적혀 있어도 부듯했다. 사실 평소 불전함에 넣는 성의가 얼마 안 되니 초파일 연등값이나 정월 초하루 기도, 백중기도 등에 들어오는 수입으로 사찰이 운영되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렇게 들어오는 수입으로는 사찰을 건축한다든지, 보수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가끔 큰 보살님 왔다고 아주 시주를 많이 하신 보살님이라고 다들 절절매고 우리처럼 연등도 잘 못다는 신도는 때로 막 대하는 것 아닌가 하는 서운함도 있었다. 그리고 어느 기사에서 오느 사찰의 연등은 천만 원짜리가 넘는 것도 있고 백만 원, 십만 원 등 차등이 있다는 기사를 보고 아내에게 물어봤더니 부처님 근처는 더 비싸고 구석은 더 싸고 그렇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천만 원짜리가 있냐고 물으니 그거야 더 많이 내는 신자도 있겠지 한다. 교회처럼 십일조를 내는 것 아니니 행사 때마다 수입이 보장돼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싶다.
캐나다에서는 헌금을 하고 영수증을 제출하면 세금 공제가 된다. 그런데 어떤 아는 분이 세금 공제를 받을 생각으로 진짜 헌금을 많이 낸 영수증을 제출했는데 세무서에서 당신은 제출한 수입에 비해 헌금을 많이 냈는데 십일조 역으로 계산하면 당신 수입이 신고한 것보다 훨씬 많으니 세금을 더 내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연등을 밝혀서 연꽃 연자를 쓰는 줄 알았는데 불꽃 연자다. 사실 연등에서 아기 부처님이 태어나지 않았나 하는 생각하기도 했다. 그리고 가난한 난타라는 여인이 구걸로 얻은 닷 푼의 돈으로 기름을 사는데 기름을 팔던 상인이 가엽게 여겨 기름을 많이 줘서 여인의 등불은 꺼지지 않고 다른 왕족이나, 귀족들이 밝힌 등불은 꺼졌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공양을 더 올리고 싶어도 가진 것이 그것밖에 없어 그 여인은 가진 전 재산을 올린 것이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현대의 연등은 가격이 매겨져 있어서 그만한 돈을 마련하지 못한 사람들은 연들을 아예 켜지 못한다.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정성을 다해야 함에도 정작 연등을 만들고도 가족의 연등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는 때도 있다.
부처님은 우리들 마음속에 있다고 가르치지만, 현실에서는 더 많은 공양을 하고 보시를 한 불자들이 예전의 왕족이나 귀족 같은 대접을 받는 것이 현실이고 서민들은 점점 멀어 지게 되는 것도 현실이다. 일요일 법회에는 신도들이 많아 복잡하기도 하고 마치 기득권을 가진 사람처럼 행동하는 신도도 있어서 일요 법회는 잘 참석하지 않다 보니 아예 법회 참석이 뜸해지게 된다. 나도 쓸모 있는 신도라는 생각보다는 괜히 왔구나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물론 신앙은 남에게 보여 주는 것이 아니다. 나의 믿음이고 내가 좋아서 하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천주교와 불교는 좀 자상하지 못한 면이 있다. 개신교나 일부 사이비 종교는 아주 끈질기게 전도하고 친절한 면이 있다. 물론 목적을 가지고 친절한 그것이 문제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평일 날 가면 스님과 식사를 같이 할 수 있고 운이 좋으면 스님 방에 가서 좋은 말씀도 듣고 차도 한잔 얻어먹을 수 있다. 그리고 공양주 보살이 제사 지내고 남은 떡이라고 가져가라고 하는 일도 있다. 하루 종일 절에서 일을 하고 집에 오면 아침에 가서 저녁에 오는 경우도 많았다. 사찰 내의 일이 표가 나지 않는 일이 많다. 농사일도 그렇고, 청소하거나 연등을 만드는 일등이 그렇다. 누구는 봉사해서 공양이 만들어지고 신도가 맛있게 공양하고 집으로 가게 되고 행사가 끝나고 철거하고 정리하는 일도 누구 인가의 손길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지금도 시골 암자에 홀로 기거하는 스님은 연등 하나 밝히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어렵게 살아가는 경우도 많다. 물론 여름에야 농사를 짓고 산나물을 따고 해서 자급자족한다지만 쌀이나 생활필수품이 필요하면 내려와서 사서 가게 되어 있다. 큰 사찰에서 그런 암자도 보살피면서 나누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 바로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 진짜 이유가 아닐까 한다. 요즘은 세상이 하도 눈 깜짝할 사이에 바뀌고 변화가 무쌍하니 천수천안관음보살님으로는 힘들지 않나 싶다. 그 몸 나투어 수만으로 돌봐도 세상은 원하는 것도 많고 돌 봐야 할 어려운 사정도 많다. 모두가 어렵게 살 때는 힘들 줄 모르지만, 고래등 같은 기와집인 이웃집이 날마다 잔치를 하며 살아간다면 이웃이 심사가 뒤틀리게 되어 있다. 종교도 기본적으로 내세의 행복도 행복이지만 현생의 복록을 위해 늘 기도한다. 즉 다 함께 잘사는 세상이 결국은 지상 낙원이다.
지난 4월11일 강릉 산불에 대웅전을 비롯한 건물 4채가 모두 불타버리고 부처님도 불타버린 사찰이 있다. 강릉 인월사이다. 대성 스님(83)과 주지 재범 스님(60)이 계신 곳이다. 스님의 승복까지 불에 탓지만 작은 성금이 들어 온 것조차 이웃 이재민을 위해 다 쓰고 있다고 한다. 서울에서 공연 기획을 하는 분과 변호사 등이 가서 부처님오신날 슬퍼할 스님과 신도를 위해 작은 콘서트를 열었다고 한다. 이런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부처님오신날, 우리가 생각해야 할 일이 아닐까 한다.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생각하고 함께 즐거워해야 즐거움도 배가 되고 괴로움은 줄어든다.
부처님오신날 방송을 보면서 고려 시대의 사찰 모습을 보는 듯했다. 그 결과 조선대에 철저히 배척받던 시절이 있었다. 불교도 첨단 산업시대를 따라가야 하지만 기본적인 마음만은 변하지 않아야 한다. 자비와 무소유를 되새겨야 할 것이다. 부처님도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을 통과하는 것보다 힘들다고 한 말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되새길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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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은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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