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수좌대회, 선학원 재건·선풍 진작 계기 마련
전선수좌대회, 선학원 재건·선풍 진작 계기 마련
  • 이창윤 기자
  • 승인 2023.04.28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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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과 침술에 능했던 적음 스님이 주석하면서 선학원은 신도들이 모여들었고 재건의 기회를 맞게 됐다. 사진은 초부당 적음 스님 건당식.
한의학과 침술에 능했던 적음 스님이 주석하면서 선학원은 신도들이 모여들었고 재건의 기회를 맞게 됐다. 사진은 초부당 적음 스님 건당식.

1. 선학원 재건의 배경

선학원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불교의 유입으로 대처승들이 늘어가던 시기인 1921년 11월 항일 의식이 강하였던 송만공(宋滿空), 백용성(白龍城), 오성월(吳惺月), 김남전(金南泉), 강도봉(康道峰) 등의 승려들이 선풍진작을 표방하면서 창립된 사찰이다.1) 선학원의 창설과 더불어 비구 선승들은 선풍을 진작시키고, 자립자애하기 위해서 1922년 3월 30일에서 4월 1일까지 선학원에서 선우공제회(禪友共濟會)를 조직하였다. 선우공제회는 출범 초기에 본부를 선학원에 두고 중앙조직은 서무부, 수도부, 재무부 등의 3부를 두고 전국 19개 사찰에 지부를 두었다. 선우공제회는 창립총회에서 조직, 임원 선출, 재정, 지방 조직, 운영 방침 등의 문제를 결정하였다.2)

그러나 전통 불교의 선맥(禪脈)을 수호하겠다는 비구 선승들의 의지와 달리 선학원은 설립 초기부터 몇 가지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 문제는 일제 강점기 불교계가 안고 있었던 구조적인 것에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첫째, 당시 불교계의 주류세력이었던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 간부들과 31본산 주지승들의 선(禪) 수행과 교학 진흥의 방책에 대한 인식이 깊지 못한 것이었다. 당시 불교계 주류 세력은 전통 수행방법과 강원교육을 수구적이라 비판하면서 경학 연구에 서구 신학문을 도입한 학교 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3)

둘째, 일본불교의 유입과 더불어 일본 유학승들이 귀국하면 환속하고 만다는 것이었다. ‘승려들의 동경 유학 역사가 이미 오래되었지만 학업을 마치고 돌아온 자들 중에 결혼하여 처자식을 데리고 귀국하지 않은 자는 한 사람도 없다’4)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셋째, 처자를 거느리고 살림하는 대처승들의 증가로 비구승들의 수행 여건이 열악해졌다. 비구승들은 수행할 공간을 얻지 못하고 일의일발(一衣一鉢)의 한 몸도 제대로 유지하기가 힘든 상황이었다.5)

넷째,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요인이 되었지만 결정적인 원인은 재정난 때문이었다. 선학원은 출범 초기부터 운영난에 직면하고 있었다.6) 각종 기록에 산견되는 바에 의하면 일제의 관권에 의탁하여 종단과 사찰의 운영권을 장악하고 있던 주지들은 대부분 대처승으로 전통 선에 대한 인식이 희박하였다. 이들 주지들은 대처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선학원과 선우공제회의 활동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비구승들의 처지는 갈수록 어려워졌고, 선학원의 재정 상황 또한 말이 아니었다. 선우공제회 또한 1924년경부터 운영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이 무렵 선우공제회 사무소를 재정문제로 인하여 직지사로 옮겼다는 기록이 보인다.7) 이 기록은 선학원과 선우공제회에서 중요한 활동을 하고 있었던 김남전 스님이 1924년 4월경 거처를 잠시 김천 직지사로 옮겼는데 선우공제회 또한 직지사로 옮겨졌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후 1926년경에 선학원은 이전부터 연고를 가지고 있던 범어사 포교소로 전환되었다.8) 선학원이 범어사 포교당으로 전환되었다는 의미는 선학원과 선우공제회가 더 이상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후 선학원 창립 초기에 참여하였던 백용성, 송만공 등 항일 의식이 강하였던 승려들은 제각기 흩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선우공제회의 재정난이 심각하여 더 이상 본부를 두었던 선학원에서 활동하기가 어려웠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이러한 제반 요인들을 살펴볼 때 비구 선승들은 정법을 수호하겠다는 굳은 의지에서 선학원 설립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당시 불교계의 재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주류 세력은 대처승이었던 까닭에 비구 선승들의 처지는 날로 어려워졌고, 이들의 정법을 수호하려는 의지는 위기를 맞고 있었다.

2. 선학원의 재건과 선풍 진작(禪風振作)

이러한 상황으로 인하여 위기에 봉착하였던 선학원은 1931년 적음 스님이 선학원에 머물게 되면서 새롭게 재건되는 계기를 맞게 된다. 그는 만공의 제자로서 한의학과 침술에 능하였다. 만공은 적음에게 초부(草夫)라는 별명을 지어 주었는데 이 별명은 ‘산야의 풀(약초)을 가지고 중생들의 괴로움을 덜어 주는 친구’라는 뜻이었다. 적음 스님에게 또 하나의 특징은 병든 많은 사람들을 고치되 치료비를 받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치료를 받았던 사람들 가운데 그를 찾아오는 이들이 있었고, 병이 나은 사람은 일단 감사한 생각을 가지기 마련이었다. 그리하여 어떤 형태로든 그 성의를 표하게 되었다. 한 마디로 적음 스님이 선학원으로 온 뒤로부터는 신도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그리하여 몇 년 동안 빈 집이나 다름없던 선학원은 다시 활기를 찾게 되었다.9)

적음 선사는 선학원을 인계받은 즉시 이탄옹(李炭翁)을 입승(立繩)으로 하여 납자 및 신도 20여 명이 참가하여 참선을 시작하였다. 또한 백용성, 한용운, 이탄옹, 유엽, 김남전, 도진호, 김경주, 김태흡, 송만공, 조금포 등의 승려들이 일반 신도들에게 설법과 강화(講話) 등의 행사를 거행하였다. 이로써 선학원은 중흥의 계기를 맞게 되었다.10) 재건된 선학원은 선의 대중화를 지향하면서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미 있는 일들을 시작하였다. 지금까지 선 수행에서 소외되었던 여성들을 위한 부인선우회 조직, 기관지인 《선원(禪苑)》 발간, 재단법인 조선불교선리참구원 설립, 선종 창종 등이 그것이다.

선풍을 진작시키고 선의 대중화를 지향하겠다는 선학원의 의지 표명은 남녀선우회의 결성으로 구체화되었다. 남녀선우회는 불법의 요체인 선의 대중화를 위하여 결성된 조직으로 회원은 70여 명밖에 되지 않았지만 선학원 재건에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나섰다. 특히 부인선우회는 1920년대 초반에 결성되었던 조선불교청년회의 방계 단체였던 조선불교여자청년회에서 활동하였거나 1930년대를 전후하여 여성 단체에서 활약하였던 소위 신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선 수행 단체로 창립되었다. 부인선우회는 지금까지 남성 중심의 수행에서 배재되었던 여성들의 지위를 회복하고, 독자적인 공간을 확보하여 수행에 정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부인선우회는 여성이라는 점에서 남성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각종 구호사업에 참여하는 등 무주상(無住相) 보시를 실천하는 데도 적극적이었다.

선학원에 모여든 선승들은 1931년 전국의 수좌들을 소집하여 비구 선승들의 의견을 결집하여 선 수행을 활성화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3월 14일 전선수좌대회(全鮮首座大會) 개최 소집문을 전국 사찰에 발송하였다.11) 이어서 3월 23일 선학원 큰 방에서 전선수좌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서 교무원 종회에 중앙선원 설치 건의안을 25일 제출하기로 하였다. 이 건의안은 중앙선원을 수좌들의 중심체로서 위상을 갖게 하기 위한 조치로 이해된다. 그러나 교무원 종회12)는 27일 중앙선원 설치에는 동의하지만 예산 부족으로 지원을 부결시켰다. 선학원이 이렇게 전선수좌대회를 개최할 수 있었던 배경은 1929년 1월에 조선불교선교양종 승려대회가 각황사에서 개최된 데서 찾을 수 있다. 이 승려대회에서 불교계의 입법 기관으로서 종회와 집행부인 교무원이 성립되였다. 이 종회는 ‘종문(宗門)의 만기(萬機)를 공결(公決)하기 위한’ 기구로서 불교계를 대표할 수 있는 기관이었다.13)

선학원이 전선수좌대회를 개최하고 교무원 중앙종회에 중앙선원 설치를 건의할 수 있었던 것은 선학원이 전국 선원과 연결망을 가진 대표기관이라는 자신감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런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적음 화상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어느 정도 재정적인 자립 기반이 확립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14) 선학원은 이를 계기로 선방 중수를 위한 기부금을 모집하고, 7일간의 지장기도와 김태흡의 《열반경》 강의, 백용성·설석우·기석호 등의 설법과 일반 대중들의 7일간 철야용맹정진을 실시할 수 있었고, 회향 법회에 200여 명이 참석하였다.15)

요컨대 전선수좌대회를 통하여 선학원은 그간의 침체기를 극복하고 재건의 기회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것은 단순히 선학원 재건을 넘어서 조선 불교계에 선풍을 진작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 적음 화상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선학원은 창립 초기의 선승들을 위촉하여 대중법회를 개최하였다. 나아가 전국 선승들의 의사를 결집시키기 위해 전국수좌대회를 3차례나 개최하여 비구승들의 수행 조건을 개선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전국수좌대회 개최 결과 비구승들이 마음 놓고 수행할 수 있는 사찰 몇 곳을 지정해 달라는 건의서를 교무원 중앙종회에 제출하기도 하였다. 이 건의는 채택되지 않았지만 비구 수행승들이 정체성 확보를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비구 선승들의 정체성 확보를 위한 노력은 여성 불자들에게도 이어져 부인선우회가 창립될 수 있었다.

[주] -----

1) 오경후(2006), <일제하 禪學院의 설립과 중흥의 배경>, 《동방학지》 136,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67∼168쪽.

2) 김광식(1994), <일제하 선학원의 운영과 성격>, 《한국독립운동사연구》 8, 289쪽.

3) 강석주·박경훈 공저(2002), 《불교근세백년》 개정판, 민족사, 127쪽.

4) 伽倻衲子(1926), <背恩忘德(第一信)>, 《불교》 제23호 불교사, 31∼32쪽.

5) 정광호 편(1999), <禪友共濟會趣旨書>, 《韓國佛敎最近百年史編年》, 인하대학교출판부, 250쪽.

6) 김광식, 앞의 논문, 293쪽.

7) (1996), <선우공제회 제3회 정기총회록>, 《近代佛敎其他資料》 65 民族社, 35쪽.

8) 김광식, 앞의 논문, 293∼294쪽.

9) 정광호(1994), <한국 전통 선맥의 계승운동>, 《근대한일불교관계사연구》, 인하대출판부, 199쪽.

10) 선학원(1931), <禪學院日記要抄>, 《禪苑》, 창간호 10월. 28쪽 ; 선학원(1932), 《禪苑》 제2호 2월, 85∼86쪽.

11) 앞의 <禪學院日記要抄>, 《禪苑》 창간호, 28쪽.

12) 이 교무원 종회는 1924년에 설립된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이 아니고 1929년 조선불교선교양종승려대회에서 결의된 교무원과 더불어 성립된 종회이다.〔김광식(1996), <조선불교선교양종 승려대회의 개최와 성격>, 한국근대불교사연구》, 민족사. 참조〕

13) 김광식(1996), <조선불교선교양종 승려대회의 개최와 성격>, 《한국근대불교사연구》, 민족사, 334쪽.

14) 김광식, 앞의 논문, 297쪽.

15) 선학원(1932), <禪學院日記要抄>, 《禪苑》 제3호, 73∼74쪽.

선학원백년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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