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10. 전세 사기와 까마귀
[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10. 전세 사기와 까마귀
  • 전재민 시인
  • 승인 2023.04.24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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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은 집을 안 짓는 깡패라지

까치가 집을 다 짓고 나면 뺏어 버린단다.


 







#작가의 변

캐나다에서는 까치 구경을 못해 증명할 길이 없는데, 집 짓는 꼴을 못 봤다. 나무에 새까맣게 앉아서 남의 불행을 기다리다 살을 파먹고 잔디밭을 농부가 밭을 갈아엎은 곳처럼 뒤집어 엎어 숨어 있던 굼벵이들을 잡아먹는다.

빌라 왕이란 놈들이 수백 채씩 해쳐 먹고 배 째라 하는데, 하루하루 일수 찍듯 모은 재산으로 전세를 얻었건만 주인 잘 못 만나 홀랑 날려 먹은 사람들이 기가 막혀 세상 하직하고 남은 세입자들이 울부짖는데, 까마귀 같은 놈들이 경매 낙찰받아 갈 곳 없는 사람들에게 나가라고 밀어낸다. 갈 곳 없는 사람들 낙화암 궁녀들처럼 단체 투신할까 두렵다. 나라도 있고 나라님도 있는데 나라 잃은 백성 같다.

믿음이 없는 사회

이번 주에만 미국에서는 몇 건의 총격 사건이 있었다. 학교 치어리더들이 연습을 마치고 차에 타자마자 자동차의 차주가 와서 학생 치어리더들을 향해 총을 발사해 사망과 부상자들이 나왔다. 차를 잘못 탄 치어리더들에게 차주가 총질을 한 것이다. 집을 잘못 찾아서 문을 두드렸는데 집주인이 총을 쏴서 죽은 사건이 발생했는데 사고를 당한 학생이 흑인이어서 흑백 갈등으로까지 번졌다. 그뿐이 아니고 경찰이 주소를 잘못 찾아서 본부에 무전 연락을 하고있는 와중에 집주인이 밖에서 난데없이 시끄럽게 문을 두드리니까 총을 들고 문을 열었다가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번졌다. 그리고 미국이나 캐나다엔 시골 막다른 길에 ‘프라이빗’이라고 쓴 개인 사유지 길이 있다. 어쩌다 길을 따라가다 보면 그 집 앞에 터가 좀 넓은 곳에서차를 돌려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런데 그렇게 길을 잘못 들어 차를 돌려 나오는 차를 향해 총을 쏴서 운전자와 함께 타고 있는 여자 친구가 죽었다.

아침에 밥을 먹다가 딸에게 “이 사건들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딸은 “겁나는 사회”라고 했다. 나는 우리가 오래전에 보던 서부 영화 즉 서부 개척 시대를 배경으로 쌍권총을 차고 말을 달리던 그 영화에서 누구든 먼저 발견하고 먼저 쏘는 사람들이 이기는 그 영화가 생각이 났다. 누구도 믿지 못하는 사회,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사회, 즉 사회 자체가 경직되어서 누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바로 반응하는, 아니 건들지 않아도 반응하는 그런 사회 말이다.

위에 사건들을 보면 “아이 엠 쏘리” 하고 “유어 웰 컴” 하면 그냥 넘어갈 일 들이다. 상대에게 잘못이 있다면 잘못을 일깨워주고 다시 그러지 말라고 주의를 당부하면 될 일이다. 아니,“사실 미안합니다.”로 끝날 일이다. 그런데 이유도 묻지 않고 총기를 사용해서 상대를 죽이고 보는 이 사회를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한국에서 개고기를 먹는다고 외국의 동물보호 단체에서 한국은 야만적인 국가라고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미국의 현재 상황이 더 야만적인 사회 같아 보인다. 동물도 아닌 사람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단 죽이고 보는 사회를 어떤 설명이 가능할까. 사람의 생명도 동물의 생명도 소중하다. 각 종교적 교리를 봐도 국가의 법으로 봐도 살인은 가장 첫 번째로 금하는 계율 중 하나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사회에 대한 적개심, 개인적인 불만, 정신 질환 등등의 이유로 묻지 마 범죄나 무차별 사격을 가하는 일이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심심치 않게 벌어지고 있다.







자신을 아끼는 사람이 타인도 아낄 수 있다. 사람은 소우주라고 한다. 머리를 우주와 같이 보고 몸체를 대지 땅으로 본다. 팔다리는 그 몸체를 수행하는 일들을 한다. 물론 하늘도 있어야 하고 땅도 있어야 한다. 사람의 몸은 머리와 몸체가 따로 떨어질 수 없다. 지구 별이 하늘과 땅을 가지고 존재하듯이 말이다. 하지만 머리와 몸체만 있다고, 숨만 쉰다고 살아 있는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살아 있는 인간은 생각한다. 아니 동물도 그 작고 큼의 차이지만 생각하고 저를 사랑하는 주인에게 더욱 잘 보이려고 꼬리를 흔들고 애교를 부린다. 물론 그것은 생각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일종의 몸이 반응하는 것처럼 먹이에 대한 반응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먹이를 주면서 훈련을 시키면 더욱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양심을 가지고 있고 그 양심은 살아가는 기준이 된다. 아니 혹자는 그 양심이 하느님이자 하느님과 소통하는 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양심을 한 번 두 번 어기고 욕망과 오욕칠정을 위한 길로 들어서면 나중엔 양심에서 어떤 말을 해도 듣지 않게 된다. 아니 양심이 밥 먹여 주더냐, 돈이 밥 먹여 주지하면서 돈의 노예가 된다. 물질의 노예가 된다. 물질문명과 과학이 발달해서 생활이 나날이 편리하고 편안해졌다고 우리가 행복할까?

아궁이에 불을 피워서 가마솥에 밥을 하려면 잠시도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밥솥을 씻는 일조차 물을 길어 오는 일처럼 모든 일은 쉬운 것이 없다. 두레박을 던져서 우물에서 물을 길어 물동이를 채워서 머리에 이고 아니면 어깨에 맨 물동이 지게를 지고 오다 보면 걸음걸이마다 출렁거려 물이 많이 줄어들고 만다. 그래서 가마솥에 물을 채우고 불을 피우고 밥을 하고 국을 끓이고 찌개를 끓여서 먹던 그 시절이 불행하지만은 않았다. 다만 불편했을 뿐이다. 밥은 전기밥솥이 한다고 하지만 쌀을 씻어 물을 적당히 잡아 압력솥의 압력이 제대로 됐는지 전기는 연결이 됐는지 잡곡밥 버튼은 제대로 눌렸는지 살피고 나서야 밥이 된다. 반찬도 패소나 생선을 개울가에 가지 않고 싱크대에서 씻고 준비하면 그만큼 동선이 짧으니 시간도 단축된다. 어떻게 하는 줄 모르면 헤매지만, 요즘은 손바닥 안에 컴퓨터인 스마트폰 속에 유튜브에 요리 영상이 많아 대충 따라 하고 조리법을 따라 하면 먹을만한 음식들이 나온다. 그래도 그것조차 하기 싫어한다.

마르지 않은 청솔가지를 아궁이에 넣으면 매운 연기가 부엌에 꽉 차 뿌옇게 변한다. 그러면 울고 싶지 않아도 화생방 훈련 시간에 최루가스를 뿌린 듯이 울 수밖에 없다. 아니 1980년대 대학가에서 늘 있던 전투경찰과 대학생들의 대치로 화염병이 날아다니고 최루가스가 발사되고 백골단이 학교 건물까지 쫓아와서 학생들을 잡아가던 그 시절 그 최루가스처럼 눈물 콧물을 다 흘려야 한다. 그렇게 고생해서 만든 음식이라도 사람 구경하기 힘든 시절이라 누군가 식사 때에 맞춰서 오거나 와서 식사 시간이 되어도 안 가면 기꺼이 숟가락 하나를 더 얹어서 함께 밥을 먹는다. 정은 나누면 나눌수록 기쁨이 된다. 그렇게 믿음이 지탱하는 사회가 된다. 이웃이지만 이웃이 아니고 같은 동네 살아도 서로를 모르는 사회에서는 서로를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고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서로에게 악마처럼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힘들 때 누군가의 도움을 받은 사람은 누군가에게 돌려주고 싶어진다. 일종의 품앗이처럼 돌아가면서 누군가를 도우면 마음엔 더없이 편안한 행복이 찾아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을 때는 빚을 진 것처럼 부담이 되지만 누군가를 돕게 되면 그만큼 보상으로 행복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전세 사기를 당해서 집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한 많은 사람을 남의 일처럼 내팽개치고 그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린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고 그 집 앞에 국화 몇 송이만 나뒹구는 이런 상황은 미국의 묻지 마 총기 사고와 다를 바 없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함께 해결해야 하는 일인 것이다. 물론 나라의 지도자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위기에 처한 사람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아무 말 대잔치’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나는 무엇인가 하려고 시도했다는 생색만 내려고 하는 것과 같다. 나라님조차 ‘아무 말 대잔치’로 하루아침에 나라가 위험해지고 운신의 폭이 줄어드는 상황을 맞아 걱정하자 아내가 “당신 어디에 살아.” “캐나다.” 그러니 걱정은 그만하라고, 당신 코가 석자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내 코가 석자다. 난 지금 캐나다 국민으로 살고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 뉴스에 흥분하고 미국의 뉴스에 안타까워한다. 정말로 걱정도 팔자다. 당장 한국에 가면 외국인 취급을 받는다. 캐나다에선 출생증명서가 없으면 이민 증명서가 필요하다. 아무리 수십 년이 되어도 시민권을 가지고 있어도 이민자로 불린다. 내가 내 발로 온 이민이지만 상황이 그리 내몰린 측면도 없지 않다. 그리고 아무리 살아도 이방인 취급을 받는 캐나다는 정이 안 간다. 그렇다고 한국에 가면 국민 취급을 받느냐 그것도 아니다. 외국인 취급을 받는다. 그러니 이곳에서도 저곳에서도 이방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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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은 집을 안 짓는 깡패라지

까치가 집을 다 짓고 나면 뺏어 버린단다.

 





놈은 집을 안 짓는 깡패라지

까치가 집을 다 짓고 나면 뺏어 버린단다.


 







#작가의 변

캐나다에서는 까치 구경을 못해 증명할 길이 없는데, 집 짓는 꼴을 못 봤다. 나무에 새까맣게 앉아서 남의 불행을 기다리다 살을 파먹고 잔디밭을 농부가 밭을 갈아엎은 곳처럼 뒤집어 엎어 숨어 있던 굼벵이들을 잡아먹는다.

빌라 왕이란 놈들이 수백 채씩 해쳐 먹고 배 째라 하는데, 하루하루 일수 찍듯 모은 재산으로 전세를 얻었건만 주인 잘 못 만나 홀랑 날려 먹은 사람들이 기가 막혀 세상 하직하고 남은 세입자들이 울부짖는데, 까마귀 같은 놈들이 경매 낙찰받아 갈 곳 없는 사람들에게 나가라고 밀어낸다. 갈 곳 없는 사람들 낙화암 궁녀들처럼 단체 투신할까 두렵다. 나라도 있고 나라님도 있는데 나라 잃은 백성 같다.

믿음이 없는 사회

이번 주에만 미국에서는 몇 건의 총격 사건이 있었다. 학교 치어리더들이 연습을 마치고 차에 타자마자 자동차의 차주가 와서 학생 치어리더들을 향해 총을 발사해 사망과 부상자들이 나왔다. 차를 잘못 탄 치어리더들에게 차주가 총질을 한 것이다. 집을 잘못 찾아서 문을 두드렸는데 집주인이 총을 쏴서 죽은 사건이 발생했는데 사고를 당한 학생이 흑인이어서 흑백 갈등으로까지 번졌다. 그뿐이 아니고 경찰이 주소를 잘못 찾아서 본부에 무전 연락을 하고있는 와중에 집주인이 밖에서 난데없이 시끄럽게 문을 두드리니까 총을 들고 문을 열었다가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번졌다. 그리고 미국이나 캐나다엔 시골 막다른 길에 ‘프라이빗’이라고 쓴 개인 사유지 길이 있다. 어쩌다 길을 따라가다 보면 그 집 앞에 터가 좀 넓은 곳에서차를 돌려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런데 그렇게 길을 잘못 들어 차를 돌려 나오는 차를 향해 총을 쏴서 운전자와 함께 타고 있는 여자 친구가 죽었다.

아침에 밥을 먹다가 딸에게 “이 사건들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딸은 “겁나는 사회”라고 했다. 나는 우리가 오래전에 보던 서부 영화 즉 서부 개척 시대를 배경으로 쌍권총을 차고 말을 달리던 그 영화에서 누구든 먼저 발견하고 먼저 쏘는 사람들이 이기는 그 영화가 생각이 났다. 누구도 믿지 못하는 사회,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사회, 즉 사회 자체가 경직되어서 누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바로 반응하는, 아니 건들지 않아도 반응하는 그런 사회 말이다.

위에 사건들을 보면 “아이 엠 쏘리” 하고 “유어 웰 컴” 하면 그냥 넘어갈 일 들이다. 상대에게 잘못이 있다면 잘못을 일깨워주고 다시 그러지 말라고 주의를 당부하면 될 일이다. 아니,“사실 미안합니다.”로 끝날 일이다. 그런데 이유도 묻지 않고 총기를 사용해서 상대를 죽이고 보는 이 사회를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한국에서 개고기를 먹는다고 외국의 동물보호 단체에서 한국은 야만적인 국가라고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미국의 현재 상황이 더 야만적인 사회 같아 보인다. 동물도 아닌 사람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단 죽이고 보는 사회를 어떤 설명이 가능할까. 사람의 생명도 동물의 생명도 소중하다. 각 종교적 교리를 봐도 국가의 법으로 봐도 살인은 가장 첫 번째로 금하는 계율 중 하나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사회에 대한 적개심, 개인적인 불만, 정신 질환 등등의 이유로 묻지 마 범죄나 무차별 사격을 가하는 일이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심심치 않게 벌어지고 있다.







자신을 아끼는 사람이 타인도 아낄 수 있다. 사람은 소우주라고 한다. 머리를 우주와 같이 보고 몸체를 대지 땅으로 본다. 팔다리는 그 몸체를 수행하는 일들을 한다. 물론 하늘도 있어야 하고 땅도 있어야 한다. 사람의 몸은 머리와 몸체가 따로 떨어질 수 없다. 지구 별이 하늘과 땅을 가지고 존재하듯이 말이다. 하지만 머리와 몸체만 있다고, 숨만 쉰다고 살아 있는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살아 있는 인간은 생각한다. 아니 동물도 그 작고 큼의 차이지만 생각하고 저를 사랑하는 주인에게 더욱 잘 보이려고 꼬리를 흔들고 애교를 부린다. 물론 그것은 생각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일종의 몸이 반응하는 것처럼 먹이에 대한 반응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먹이를 주면서 훈련을 시키면 더욱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양심을 가지고 있고 그 양심은 살아가는 기준이 된다. 아니 혹자는 그 양심이 하느님이자 하느님과 소통하는 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양심을 한 번 두 번 어기고 욕망과 오욕칠정을 위한 길로 들어서면 나중엔 양심에서 어떤 말을 해도 듣지 않게 된다. 아니 양심이 밥 먹여 주더냐, 돈이 밥 먹여 주지하면서 돈의 노예가 된다. 물질의 노예가 된다. 물질문명과 과학이 발달해서 생활이 나날이 편리하고 편안해졌다고 우리가 행복할까?

아궁이에 불을 피워서 가마솥에 밥을 하려면 잠시도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밥솥을 씻는 일조차 물을 길어 오는 일처럼 모든 일은 쉬운 것이 없다. 두레박을 던져서 우물에서 물을 길어 물동이를 채워서 머리에 이고 아니면 어깨에 맨 물동이 지게를 지고 오다 보면 걸음걸이마다 출렁거려 물이 많이 줄어들고 만다. 그래서 가마솥에 물을 채우고 불을 피우고 밥을 하고 국을 끓이고 찌개를 끓여서 먹던 그 시절이 불행하지만은 않았다. 다만 불편했을 뿐이다. 밥은 전기밥솥이 한다고 하지만 쌀을 씻어 물을 적당히 잡아 압력솥의 압력이 제대로 됐는지 전기는 연결이 됐는지 잡곡밥 버튼은 제대로 눌렸는지 살피고 나서야 밥이 된다. 반찬도 패소나 생선을 개울가에 가지 않고 싱크대에서 씻고 준비하면 그만큼 동선이 짧으니 시간도 단축된다. 어떻게 하는 줄 모르면 헤매지만, 요즘은 손바닥 안에 컴퓨터인 스마트폰 속에 유튜브에 요리 영상이 많아 대충 따라 하고 조리법을 따라 하면 먹을만한 음식들이 나온다. 그래도 그것조차 하기 싫어한다.

마르지 않은 청솔가지를 아궁이에 넣으면 매운 연기가 부엌에 꽉 차 뿌옇게 변한다. 그러면 울고 싶지 않아도 화생방 훈련 시간에 최루가스를 뿌린 듯이 울 수밖에 없다. 아니 1980년대 대학가에서 늘 있던 전투경찰과 대학생들의 대치로 화염병이 날아다니고 최루가스가 발사되고 백골단이 학교 건물까지 쫓아와서 학생들을 잡아가던 그 시절 그 최루가스처럼 눈물 콧물을 다 흘려야 한다. 그렇게 고생해서 만든 음식이라도 사람 구경하기 힘든 시절이라 누군가 식사 때에 맞춰서 오거나 와서 식사 시간이 되어도 안 가면 기꺼이 숟가락 하나를 더 얹어서 함께 밥을 먹는다. 정은 나누면 나눌수록 기쁨이 된다. 그렇게 믿음이 지탱하는 사회가 된다. 이웃이지만 이웃이 아니고 같은 동네 살아도 서로를 모르는 사회에서는 서로를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고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서로에게 악마처럼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힘들 때 누군가의 도움을 받은 사람은 누군가에게 돌려주고 싶어진다. 일종의 품앗이처럼 돌아가면서 누군가를 도우면 마음엔 더없이 편안한 행복이 찾아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을 때는 빚을 진 것처럼 부담이 되지만 누군가를 돕게 되면 그만큼 보상으로 행복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전세 사기를 당해서 집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한 많은 사람을 남의 일처럼 내팽개치고 그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린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고 그 집 앞에 국화 몇 송이만 나뒹구는 이런 상황은 미국의 묻지 마 총기 사고와 다를 바 없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함께 해결해야 하는 일인 것이다. 물론 나라의 지도자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위기에 처한 사람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아무 말 대잔치’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나는 무엇인가 하려고 시도했다는 생색만 내려고 하는 것과 같다. 나라님조차 ‘아무 말 대잔치’로 하루아침에 나라가 위험해지고 운신의 폭이 줄어드는 상황을 맞아 걱정하자 아내가 “당신 어디에 살아.” “캐나다.” 그러니 걱정은 그만하라고, 당신 코가 석자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내 코가 석자다. 난 지금 캐나다 국민으로 살고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 뉴스에 흥분하고 미국의 뉴스에 안타까워한다. 정말로 걱정도 팔자다. 당장 한국에 가면 외국인 취급을 받는다. 캐나다에선 출생증명서가 없으면 이민 증명서가 필요하다. 아무리 수십 년이 되어도 시민권을 가지고 있어도 이민자로 불린다. 내가 내 발로 온 이민이지만 상황이 그리 내몰린 측면도 없지 않다. 그리고 아무리 살아도 이방인 취급을 받는 캐나다는 정이 안 간다. 그렇다고 한국에 가면 국민 취급을 받느냐 그것도 아니다. 외국인 취급을 받는다. 그러니 이곳에서도 저곳에서도 이방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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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변

캐나다에서는 까치 구경을 못해 증명할 길이 없는데, 집 짓는 꼴을 못 봤다. 나무에 새까맣게 앉아서 남의 불행을 기다리다 살을 파먹고 잔디밭을 농부가 밭을 갈아엎은 곳처럼 뒤집어 엎어 숨어 있던 굼벵이들을 잡아먹는다.

빌라 왕이란 놈들이 수백 채씩 해쳐 먹고 배 째라 하는데, 하루하루 일수 찍듯 모은 재산으로 전세를 얻었건만 주인 잘 못 만나 홀랑 날려 먹은 사람들이 기가 막혀 세상 하직하고 남은 세입자들이 울부짖는데, 까마귀 같은 놈들이 경매 낙찰받아 갈 곳 없는 사람들에게 나가라고 밀어낸다. 갈 곳 없는 사람들 낙화암 궁녀들처럼 단체 투신할까 두렵다. 나라도 있고 나라님도 있는데 나라 잃은 백성 같다.

믿음이 없는 사회

이번 주에만 미국에서는 몇 건의 총격 사건이 있었다. 학교 치어리더들이 연습을 마치고 차에 타자마자 자동차의 차주가 와서 학생 치어리더들을 향해 총을 발사해 사망과 부상자들이 나왔다. 차를 잘못 탄 치어리더들에게 차주가 총질을 한 것이다. 집을 잘못 찾아서 문을 두드렸는데 집주인이 총을 쏴서 죽은 사건이 발생했는데 사고를 당한 학생이 흑인이어서 흑백 갈등으로까지 번졌다. 그뿐이 아니고 경찰이 주소를 잘못 찾아서 본부에 무전 연락을 하고있는 와중에 집주인이 밖에서 난데없이 시끄럽게 문을 두드리니까 총을 들고 문을 열었다가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번졌다. 그리고 미국이나 캐나다엔 시골 막다른 길에 ‘프라이빗’이라고 쓴 개인 사유지 길이 있다. 어쩌다 길을 따라가다 보면 그 집 앞에 터가 좀 넓은 곳에서차를 돌려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런데 그렇게 길을 잘못 들어 차를 돌려 나오는 차를 향해 총을 쏴서 운전자와 함께 타고 있는 여자 친구가 죽었다.

아침에 밥을 먹다가 딸에게 “이 사건들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딸은 “겁나는 사회”라고 했다. 나는 우리가 오래전에 보던 서부 영화 즉 서부 개척 시대를 배경으로 쌍권총을 차고 말을 달리던 그 영화에서 누구든 먼저 발견하고 먼저 쏘는 사람들이 이기는 그 영화가 생각이 났다. 누구도 믿지 못하는 사회,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사회, 즉 사회 자체가 경직되어서 누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바로 반응하는, 아니 건들지 않아도 반응하는 그런 사회 말이다.

위에 사건들을 보면 “아이 엠 쏘리” 하고 “유어 웰 컴” 하면 그냥 넘어갈 일 들이다. 상대에게 잘못이 있다면 잘못을 일깨워주고 다시 그러지 말라고 주의를 당부하면 될 일이다. 아니,“사실 미안합니다.”로 끝날 일이다. 그런데 이유도 묻지 않고 총기를 사용해서 상대를 죽이고 보는 이 사회를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한국에서 개고기를 먹는다고 외국의 동물보호 단체에서 한국은 야만적인 국가라고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미국의 현재 상황이 더 야만적인 사회 같아 보인다. 동물도 아닌 사람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단 죽이고 보는 사회를 어떤 설명이 가능할까. 사람의 생명도 동물의 생명도 소중하다. 각 종교적 교리를 봐도 국가의 법으로 봐도 살인은 가장 첫 번째로 금하는 계율 중 하나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사회에 대한 적개심, 개인적인 불만, 정신 질환 등등의 이유로 묻지 마 범죄나 무차별 사격을 가하는 일이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심심치 않게 벌어지고 있다.





놈은 집을 안 짓는 깡패라지

까치가 집을 다 짓고 나면 뺏어 버린단다.


 







#작가의 변

캐나다에서는 까치 구경을 못해 증명할 길이 없는데, 집 짓는 꼴을 못 봤다. 나무에 새까맣게 앉아서 남의 불행을 기다리다 살을 파먹고 잔디밭을 농부가 밭을 갈아엎은 곳처럼 뒤집어 엎어 숨어 있던 굼벵이들을 잡아먹는다.

빌라 왕이란 놈들이 수백 채씩 해쳐 먹고 배 째라 하는데, 하루하루 일수 찍듯 모은 재산으로 전세를 얻었건만 주인 잘 못 만나 홀랑 날려 먹은 사람들이 기가 막혀 세상 하직하고 남은 세입자들이 울부짖는데, 까마귀 같은 놈들이 경매 낙찰받아 갈 곳 없는 사람들에게 나가라고 밀어낸다. 갈 곳 없는 사람들 낙화암 궁녀들처럼 단체 투신할까 두렵다. 나라도 있고 나라님도 있는데 나라 잃은 백성 같다.

믿음이 없는 사회

이번 주에만 미국에서는 몇 건의 총격 사건이 있었다. 학교 치어리더들이 연습을 마치고 차에 타자마자 자동차의 차주가 와서 학생 치어리더들을 향해 총을 발사해 사망과 부상자들이 나왔다. 차를 잘못 탄 치어리더들에게 차주가 총질을 한 것이다. 집을 잘못 찾아서 문을 두드렸는데 집주인이 총을 쏴서 죽은 사건이 발생했는데 사고를 당한 학생이 흑인이어서 흑백 갈등으로까지 번졌다. 그뿐이 아니고 경찰이 주소를 잘못 찾아서 본부에 무전 연락을 하고있는 와중에 집주인이 밖에서 난데없이 시끄럽게 문을 두드리니까 총을 들고 문을 열었다가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번졌다. 그리고 미국이나 캐나다엔 시골 막다른 길에 ‘프라이빗’이라고 쓴 개인 사유지 길이 있다. 어쩌다 길을 따라가다 보면 그 집 앞에 터가 좀 넓은 곳에서차를 돌려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런데 그렇게 길을 잘못 들어 차를 돌려 나오는 차를 향해 총을 쏴서 운전자와 함께 타고 있는 여자 친구가 죽었다.

아침에 밥을 먹다가 딸에게 “이 사건들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딸은 “겁나는 사회”라고 했다. 나는 우리가 오래전에 보던 서부 영화 즉 서부 개척 시대를 배경으로 쌍권총을 차고 말을 달리던 그 영화에서 누구든 먼저 발견하고 먼저 쏘는 사람들이 이기는 그 영화가 생각이 났다. 누구도 믿지 못하는 사회,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사회, 즉 사회 자체가 경직되어서 누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바로 반응하는, 아니 건들지 않아도 반응하는 그런 사회 말이다.

위에 사건들을 보면 “아이 엠 쏘리” 하고 “유어 웰 컴” 하면 그냥 넘어갈 일 들이다. 상대에게 잘못이 있다면 잘못을 일깨워주고 다시 그러지 말라고 주의를 당부하면 될 일이다. 아니,“사실 미안합니다.”로 끝날 일이다. 그런데 이유도 묻지 않고 총기를 사용해서 상대를 죽이고 보는 이 사회를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한국에서 개고기를 먹는다고 외국의 동물보호 단체에서 한국은 야만적인 국가라고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미국의 현재 상황이 더 야만적인 사회 같아 보인다. 동물도 아닌 사람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단 죽이고 보는 사회를 어떤 설명이 가능할까. 사람의 생명도 동물의 생명도 소중하다. 각 종교적 교리를 봐도 국가의 법으로 봐도 살인은 가장 첫 번째로 금하는 계율 중 하나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사회에 대한 적개심, 개인적인 불만, 정신 질환 등등의 이유로 묻지 마 범죄나 무차별 사격을 가하는 일이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심심치 않게 벌어지고 있다.







자신을 아끼는 사람이 타인도 아낄 수 있다. 사람은 소우주라고 한다. 머리를 우주와 같이 보고 몸체를 대지 땅으로 본다. 팔다리는 그 몸체를 수행하는 일들을 한다. 물론 하늘도 있어야 하고 땅도 있어야 한다. 사람의 몸은 머리와 몸체가 따로 떨어질 수 없다. 지구 별이 하늘과 땅을 가지고 존재하듯이 말이다. 하지만 머리와 몸체만 있다고, 숨만 쉰다고 살아 있는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살아 있는 인간은 생각한다. 아니 동물도 그 작고 큼의 차이지만 생각하고 저를 사랑하는 주인에게 더욱 잘 보이려고 꼬리를 흔들고 애교를 부린다. 물론 그것은 생각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일종의 몸이 반응하는 것처럼 먹이에 대한 반응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먹이를 주면서 훈련을 시키면 더욱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양심을 가지고 있고 그 양심은 살아가는 기준이 된다. 아니 혹자는 그 양심이 하느님이자 하느님과 소통하는 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양심을 한 번 두 번 어기고 욕망과 오욕칠정을 위한 길로 들어서면 나중엔 양심에서 어떤 말을 해도 듣지 않게 된다. 아니 양심이 밥 먹여 주더냐, 돈이 밥 먹여 주지하면서 돈의 노예가 된다. 물질의 노예가 된다. 물질문명과 과학이 발달해서 생활이 나날이 편리하고 편안해졌다고 우리가 행복할까?

아궁이에 불을 피워서 가마솥에 밥을 하려면 잠시도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밥솥을 씻는 일조차 물을 길어 오는 일처럼 모든 일은 쉬운 것이 없다. 두레박을 던져서 우물에서 물을 길어 물동이를 채워서 머리에 이고 아니면 어깨에 맨 물동이 지게를 지고 오다 보면 걸음걸이마다 출렁거려 물이 많이 줄어들고 만다. 그래서 가마솥에 물을 채우고 불을 피우고 밥을 하고 국을 끓이고 찌개를 끓여서 먹던 그 시절이 불행하지만은 않았다. 다만 불편했을 뿐이다. 밥은 전기밥솥이 한다고 하지만 쌀을 씻어 물을 적당히 잡아 압력솥의 압력이 제대로 됐는지 전기는 연결이 됐는지 잡곡밥 버튼은 제대로 눌렸는지 살피고 나서야 밥이 된다. 반찬도 패소나 생선을 개울가에 가지 않고 싱크대에서 씻고 준비하면 그만큼 동선이 짧으니 시간도 단축된다. 어떻게 하는 줄 모르면 헤매지만, 요즘은 손바닥 안에 컴퓨터인 스마트폰 속에 유튜브에 요리 영상이 많아 대충 따라 하고 조리법을 따라 하면 먹을만한 음식들이 나온다. 그래도 그것조차 하기 싫어한다.

마르지 않은 청솔가지를 아궁이에 넣으면 매운 연기가 부엌에 꽉 차 뿌옇게 변한다. 그러면 울고 싶지 않아도 화생방 훈련 시간에 최루가스를 뿌린 듯이 울 수밖에 없다. 아니 1980년대 대학가에서 늘 있던 전투경찰과 대학생들의 대치로 화염병이 날아다니고 최루가스가 발사되고 백골단이 학교 건물까지 쫓아와서 학생들을 잡아가던 그 시절 그 최루가스처럼 눈물 콧물을 다 흘려야 한다. 그렇게 고생해서 만든 음식이라도 사람 구경하기 힘든 시절이라 누군가 식사 때에 맞춰서 오거나 와서 식사 시간이 되어도 안 가면 기꺼이 숟가락 하나를 더 얹어서 함께 밥을 먹는다. 정은 나누면 나눌수록 기쁨이 된다. 그렇게 믿음이 지탱하는 사회가 된다. 이웃이지만 이웃이 아니고 같은 동네 살아도 서로를 모르는 사회에서는 서로를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고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서로에게 악마처럼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힘들 때 누군가의 도움을 받은 사람은 누군가에게 돌려주고 싶어진다. 일종의 품앗이처럼 돌아가면서 누군가를 도우면 마음엔 더없이 편안한 행복이 찾아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을 때는 빚을 진 것처럼 부담이 되지만 누군가를 돕게 되면 그만큼 보상으로 행복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전세 사기를 당해서 집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한 많은 사람을 남의 일처럼 내팽개치고 그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린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고 그 집 앞에 국화 몇 송이만 나뒹구는 이런 상황은 미국의 묻지 마 총기 사고와 다를 바 없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함께 해결해야 하는 일인 것이다. 물론 나라의 지도자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위기에 처한 사람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아무 말 대잔치’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나는 무엇인가 하려고 시도했다는 생색만 내려고 하는 것과 같다. 나라님조차 ‘아무 말 대잔치’로 하루아침에 나라가 위험해지고 운신의 폭이 줄어드는 상황을 맞아 걱정하자 아내가 “당신 어디에 살아.” “캐나다.” 그러니 걱정은 그만하라고, 당신 코가 석자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내 코가 석자다. 난 지금 캐나다 국민으로 살고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 뉴스에 흥분하고 미국의 뉴스에 안타까워한다. 정말로 걱정도 팔자다. 당장 한국에 가면 외국인 취급을 받는다. 캐나다에선 출생증명서가 없으면 이민 증명서가 필요하다. 아무리 수십 년이 되어도 시민권을 가지고 있어도 이민자로 불린다. 내가 내 발로 온 이민이지만 상황이 그리 내몰린 측면도 없지 않다. 그리고 아무리 살아도 이방인 취급을 받는 캐나다는 정이 안 간다. 그렇다고 한국에 가면 국민 취급을 받느냐 그것도 아니다. 외국인 취급을 받는다. 그러니 이곳에서도 저곳에서도 이방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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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아끼는 사람이 타인도 아낄 수 있다. 사람은 소우주라고 한다. 머리를 우주와 같이 보고 몸체를 대지 땅으로 본다. 팔다리는 그 몸체를 수행하는 일들을 한다. 물론 하늘도 있어야 하고 땅도 있어야 한다. 사람의 몸은 머리와 몸체가 따로 떨어질 수 없다. 지구 별이 하늘과 땅을 가지고 존재하듯이 말이다. 하지만 머리와 몸체만 있다고, 숨만 쉰다고 살아 있는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살아 있는 인간은 생각한다. 아니 동물도 그 작고 큼의 차이지만 생각하고 저를 사랑하는 주인에게 더욱 잘 보이려고 꼬리를 흔들고 애교를 부린다. 물론 그것은 생각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일종의 몸이 반응하는 것처럼 먹이에 대한 반응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먹이를 주면서 훈련을 시키면 더욱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양심을 가지고 있고 그 양심은 살아가는 기준이 된다. 아니 혹자는 그 양심이 하느님이자 하느님과 소통하는 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양심을 한 번 두 번 어기고 욕망과 오욕칠정을 위한 길로 들어서면 나중엔 양심에서 어떤 말을 해도 듣지 않게 된다. 아니 양심이 밥 먹여 주더냐, 돈이 밥 먹여 주지하면서 돈의 노예가 된다. 물질의 노예가 된다. 물질문명과 과학이 발달해서 생활이 나날이 편리하고 편안해졌다고 우리가 행복할까?

아궁이에 불을 피워서 가마솥에 밥을 하려면 잠시도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밥솥을 씻는 일조차 물을 길어 오는 일처럼 모든 일은 쉬운 것이 없다. 두레박을 던져서 우물에서 물을 길어 물동이를 채워서 머리에 이고 아니면 어깨에 맨 물동이 지게를 지고 오다 보면 걸음걸이마다 출렁거려 물이 많이 줄어들고 만다. 그래서 가마솥에 물을 채우고 불을 피우고 밥을 하고 국을 끓이고 찌개를 끓여서 먹던 그 시절이 불행하지만은 않았다. 다만 불편했을 뿐이다. 밥은 전기밥솥이 한다고 하지만 쌀을 씻어 물을 적당히 잡아 압력솥의 압력이 제대로 됐는지 전기는 연결이 됐는지 잡곡밥 버튼은 제대로 눌렸는지 살피고 나서야 밥이 된다. 반찬도 패소나 생선을 개울가에 가지 않고 싱크대에서 씻고 준비하면 그만큼 동선이 짧으니 시간도 단축된다. 어떻게 하는 줄 모르면 헤매지만, 요즘은 손바닥 안에 컴퓨터인 스마트폰 속에 유튜브에 요리 영상이 많아 대충 따라 하고 조리법을 따라 하면 먹을만한 음식들이 나온다. 그래도 그것조차 하기 싫어한다.

마르지 않은 청솔가지를 아궁이에 넣으면 매운 연기가 부엌에 꽉 차 뿌옇게 변한다. 그러면 울고 싶지 않아도 화생방 훈련 시간에 최루가스를 뿌린 듯이 울 수밖에 없다. 아니 1980년대 대학가에서 늘 있던 전투경찰과 대학생들의 대치로 화염병이 날아다니고 최루가스가 발사되고 백골단이 학교 건물까지 쫓아와서 학생들을 잡아가던 그 시절 그 최루가스처럼 눈물 콧물을 다 흘려야 한다. 그렇게 고생해서 만든 음식이라도 사람 구경하기 힘든 시절이라 누군가 식사 때에 맞춰서 오거나 와서 식사 시간이 되어도 안 가면 기꺼이 숟가락 하나를 더 얹어서 함께 밥을 먹는다. 정은 나누면 나눌수록 기쁨이 된다. 그렇게 믿음이 지탱하는 사회가 된다. 이웃이지만 이웃이 아니고 같은 동네 살아도 서로를 모르는 사회에서는 서로를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고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서로에게 악마처럼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힘들 때 누군가의 도움을 받은 사람은 누군가에게 돌려주고 싶어진다. 일종의 품앗이처럼 돌아가면서 누군가를 도우면 마음엔 더없이 편안한 행복이 찾아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을 때는 빚을 진 것처럼 부담이 되지만 누군가를 돕게 되면 그만큼 보상으로 행복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전세 사기를 당해서 집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한 많은 사람을 남의 일처럼 내팽개치고 그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린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고 그 집 앞에 국화 몇 송이만 나뒹구는 이런 상황은 미국의 묻지 마 총기 사고와 다를 바 없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함께 해결해야 하는 일인 것이다. 물론 나라의 지도자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위기에 처한 사람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아무 말 대잔치’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나는 무엇인가 하려고 시도했다는 생색만 내려고 하는 것과 같다. 나라님조차 ‘아무 말 대잔치’로 하루아침에 나라가 위험해지고 운신의 폭이 줄어드는 상황을 맞아 걱정하자 아내가 “당신 어디에 살아.” “캐나다.” 그러니 걱정은 그만하라고, 당신 코가 석자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내 코가 석자다. 난 지금 캐나다 국민으로 살고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 뉴스에 흥분하고 미국의 뉴스에 안타까워한다. 정말로 걱정도 팔자다. 당장 한국에 가면 외국인 취급을 받는다. 캐나다에선 출생증명서가 없으면 이민 증명서가 필요하다. 아무리 수십 년이 되어도 시민권을 가지고 있어도 이민자로 불린다. 내가 내 발로 온 이민이지만 상황이 그리 내몰린 측면도 없지 않다. 그리고 아무리 살아도 이방인 취급을 받는 캐나다는 정이 안 간다. 그렇다고 한국에 가면 국민 취급을 받느냐 그것도 아니다. 외국인 취급을 받는다. 그러니 이곳에서도 저곳에서도 이방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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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은 집을 안 짓는 깡패라지

까치가 집을 다 짓고 나면 뺏어 버린단다.


 







#작가의 변

캐나다에서는 까치 구경을 못해 증명할 길이 없는데, 집 짓는 꼴을 못 봤다. 나무에 새까맣게 앉아서 남의 불행을 기다리다 살을 파먹고 잔디밭을 농부가 밭을 갈아엎은 곳처럼 뒤집어 엎어 숨어 있던 굼벵이들을 잡아먹는다.

빌라 왕이란 놈들이 수백 채씩 해쳐 먹고 배 째라 하는데, 하루하루 일수 찍듯 모은 재산으로 전세를 얻었건만 주인 잘 못 만나 홀랑 날려 먹은 사람들이 기가 막혀 세상 하직하고 남은 세입자들이 울부짖는데, 까마귀 같은 놈들이 경매 낙찰받아 갈 곳 없는 사람들에게 나가라고 밀어낸다. 갈 곳 없는 사람들 낙화암 궁녀들처럼 단체 투신할까 두렵다. 나라도 있고 나라님도 있는데 나라 잃은 백성 같다.

믿음이 없는 사회

이번 주에만 미국에서는 몇 건의 총격 사건이 있었다. 학교 치어리더들이 연습을 마치고 차에 타자마자 자동차의 차주가 와서 학생 치어리더들을 향해 총을 발사해 사망과 부상자들이 나왔다. 차를 잘못 탄 치어리더들에게 차주가 총질을 한 것이다. 집을 잘못 찾아서 문을 두드렸는데 집주인이 총을 쏴서 죽은 사건이 발생했는데 사고를 당한 학생이 흑인이어서 흑백 갈등으로까지 번졌다. 그뿐이 아니고 경찰이 주소를 잘못 찾아서 본부에 무전 연락을 하고있는 와중에 집주인이 밖에서 난데없이 시끄럽게 문을 두드리니까 총을 들고 문을 열었다가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번졌다. 그리고 미국이나 캐나다엔 시골 막다른 길에 ‘프라이빗’이라고 쓴 개인 사유지 길이 있다. 어쩌다 길을 따라가다 보면 그 집 앞에 터가 좀 넓은 곳에서차를 돌려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런데 그렇게 길을 잘못 들어 차를 돌려 나오는 차를 향해 총을 쏴서 운전자와 함께 타고 있는 여자 친구가 죽었다.

아침에 밥을 먹다가 딸에게 “이 사건들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딸은 “겁나는 사회”라고 했다. 나는 우리가 오래전에 보던 서부 영화 즉 서부 개척 시대를 배경으로 쌍권총을 차고 말을 달리던 그 영화에서 누구든 먼저 발견하고 먼저 쏘는 사람들이 이기는 그 영화가 생각이 났다. 누구도 믿지 못하는 사회,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사회, 즉 사회 자체가 경직되어서 누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바로 반응하는, 아니 건들지 않아도 반응하는 그런 사회 말이다.

위에 사건들을 보면 “아이 엠 쏘리” 하고 “유어 웰 컴” 하면 그냥 넘어갈 일 들이다. 상대에게 잘못이 있다면 잘못을 일깨워주고 다시 그러지 말라고 주의를 당부하면 될 일이다. 아니,“사실 미안합니다.”로 끝날 일이다. 그런데 이유도 묻지 않고 총기를 사용해서 상대를 죽이고 보는 이 사회를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한국에서 개고기를 먹는다고 외국의 동물보호 단체에서 한국은 야만적인 국가라고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미국의 현재 상황이 더 야만적인 사회 같아 보인다. 동물도 아닌 사람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단 죽이고 보는 사회를 어떤 설명이 가능할까. 사람의 생명도 동물의 생명도 소중하다. 각 종교적 교리를 봐도 국가의 법으로 봐도 살인은 가장 첫 번째로 금하는 계율 중 하나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사회에 대한 적개심, 개인적인 불만, 정신 질환 등등의 이유로 묻지 마 범죄나 무차별 사격을 가하는 일이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심심치 않게 벌어지고 있다.







자신을 아끼는 사람이 타인도 아낄 수 있다. 사람은 소우주라고 한다. 머리를 우주와 같이 보고 몸체를 대지 땅으로 본다. 팔다리는 그 몸체를 수행하는 일들을 한다. 물론 하늘도 있어야 하고 땅도 있어야 한다. 사람의 몸은 머리와 몸체가 따로 떨어질 수 없다. 지구 별이 하늘과 땅을 가지고 존재하듯이 말이다. 하지만 머리와 몸체만 있다고, 숨만 쉰다고 살아 있는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살아 있는 인간은 생각한다. 아니 동물도 그 작고 큼의 차이지만 생각하고 저를 사랑하는 주인에게 더욱 잘 보이려고 꼬리를 흔들고 애교를 부린다. 물론 그것은 생각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일종의 몸이 반응하는 것처럼 먹이에 대한 반응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먹이를 주면서 훈련을 시키면 더욱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양심을 가지고 있고 그 양심은 살아가는 기준이 된다. 아니 혹자는 그 양심이 하느님이자 하느님과 소통하는 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양심을 한 번 두 번 어기고 욕망과 오욕칠정을 위한 길로 들어서면 나중엔 양심에서 어떤 말을 해도 듣지 않게 된다. 아니 양심이 밥 먹여 주더냐, 돈이 밥 먹여 주지하면서 돈의 노예가 된다. 물질의 노예가 된다. 물질문명과 과학이 발달해서 생활이 나날이 편리하고 편안해졌다고 우리가 행복할까?

아궁이에 불을 피워서 가마솥에 밥을 하려면 잠시도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밥솥을 씻는 일조차 물을 길어 오는 일처럼 모든 일은 쉬운 것이 없다. 두레박을 던져서 우물에서 물을 길어 물동이를 채워서 머리에 이고 아니면 어깨에 맨 물동이 지게를 지고 오다 보면 걸음걸이마다 출렁거려 물이 많이 줄어들고 만다. 그래서 가마솥에 물을 채우고 불을 피우고 밥을 하고 국을 끓이고 찌개를 끓여서 먹던 그 시절이 불행하지만은 않았다. 다만 불편했을 뿐이다. 밥은 전기밥솥이 한다고 하지만 쌀을 씻어 물을 적당히 잡아 압력솥의 압력이 제대로 됐는지 전기는 연결이 됐는지 잡곡밥 버튼은 제대로 눌렸는지 살피고 나서야 밥이 된다. 반찬도 패소나 생선을 개울가에 가지 않고 싱크대에서 씻고 준비하면 그만큼 동선이 짧으니 시간도 단축된다. 어떻게 하는 줄 모르면 헤매지만, 요즘은 손바닥 안에 컴퓨터인 스마트폰 속에 유튜브에 요리 영상이 많아 대충 따라 하고 조리법을 따라 하면 먹을만한 음식들이 나온다. 그래도 그것조차 하기 싫어한다.

마르지 않은 청솔가지를 아궁이에 넣으면 매운 연기가 부엌에 꽉 차 뿌옇게 변한다. 그러면 울고 싶지 않아도 화생방 훈련 시간에 최루가스를 뿌린 듯이 울 수밖에 없다. 아니 1980년대 대학가에서 늘 있던 전투경찰과 대학생들의 대치로 화염병이 날아다니고 최루가스가 발사되고 백골단이 학교 건물까지 쫓아와서 학생들을 잡아가던 그 시절 그 최루가스처럼 눈물 콧물을 다 흘려야 한다. 그렇게 고생해서 만든 음식이라도 사람 구경하기 힘든 시절이라 누군가 식사 때에 맞춰서 오거나 와서 식사 시간이 되어도 안 가면 기꺼이 숟가락 하나를 더 얹어서 함께 밥을 먹는다. 정은 나누면 나눌수록 기쁨이 된다. 그렇게 믿음이 지탱하는 사회가 된다. 이웃이지만 이웃이 아니고 같은 동네 살아도 서로를 모르는 사회에서는 서로를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고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서로에게 악마처럼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힘들 때 누군가의 도움을 받은 사람은 누군가에게 돌려주고 싶어진다. 일종의 품앗이처럼 돌아가면서 누군가를 도우면 마음엔 더없이 편안한 행복이 찾아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을 때는 빚을 진 것처럼 부담이 되지만 누군가를 돕게 되면 그만큼 보상으로 행복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전세 사기를 당해서 집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한 많은 사람을 남의 일처럼 내팽개치고 그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린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고 그 집 앞에 국화 몇 송이만 나뒹구는 이런 상황은 미국의 묻지 마 총기 사고와 다를 바 없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함께 해결해야 하는 일인 것이다. 물론 나라의 지도자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위기에 처한 사람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아무 말 대잔치’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나는 무엇인가 하려고 시도했다는 생색만 내려고 하는 것과 같다. 나라님조차 ‘아무 말 대잔치’로 하루아침에 나라가 위험해지고 운신의 폭이 줄어드는 상황을 맞아 걱정하자 아내가 “당신 어디에 살아.” “캐나다.” 그러니 걱정은 그만하라고, 당신 코가 석자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내 코가 석자다. 난 지금 캐나다 국민으로 살고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 뉴스에 흥분하고 미국의 뉴스에 안타까워한다. 정말로 걱정도 팔자다. 당장 한국에 가면 외국인 취급을 받는다. 캐나다에선 출생증명서가 없으면 이민 증명서가 필요하다. 아무리 수십 년이 되어도 시민권을 가지고 있어도 이민자로 불린다. 내가 내 발로 온 이민이지만 상황이 그리 내몰린 측면도 없지 않다. 그리고 아무리 살아도 이방인 취급을 받는 캐나다는 정이 안 간다. 그렇다고 한국에 가면 국민 취급을 받느냐 그것도 아니다. 외국인 취급을 받는다. 그러니 이곳에서도 저곳에서도 이방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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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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