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말 재정 2만 원…소속 회원 365명 단체로 성장
1923년 말 재정 2만 원…소속 회원 365명 단체로 성장
  • 선학원백년사편찬위원회
  • 승인 2023.04.06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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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공제회 지방 19개 지부 중 범어사, 직지사, 정혜사, 망월사와 함께 적극적으로 활동에 참여했던 마하연의 일제강점기 때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건판(건판 1624) 사진.



경성사무소를 비롯하여 지방의 19개 지부 가운데 범어사, 직지사, 정혜사, 망월사, 마하연 등 5개 지부가 선우공제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는 상황이었다. 처음 시작할 때 19개 지부에 비해 그 숫자가 크게 부족해 동력과 활력이 많이 떨어지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지방 지부의 활동 저하는 중앙 경성사무소의 김남전, 강도봉, 김석두, 오성월 스님이 선미대(禪米代)로 매월 1원씩 의연하기로 자원함으로써 해결하였다는 점이다. 이들 4명의 선학원 설립 조사들의 역할과 책임의식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이 시기 대본산으로 재정이 상대적으로 넉넉했던 해인사, 통도사의 지원이 없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선원이 활성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나마 대본산 범어사(15명)가 있고, 말사인 직지사 선원의 인원이 20명으로 가장 많았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김천 직지사의 선풍 진작이 다른 곳보다 활발하였다는 점과 이후 선우공제회 경성 사무소가 김천 직지사로 이전되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자료이기도 하다.

1923년 3월 29일 선우공제회 제2회 정기총회를 거쳐 새롭게 임원을 개선하였다. 3부 이사로 서무부 이사 기석호, 재무부 이사 신환옹(申幻翁), 수도부 이사 강도봉 등을 선임하였다. 또한 새롭게 선출된 평의원은 다음과 같다.

마하사 대표 이계봉(李戒奉)·김숙암(金淑庵), 직지사 대표 윤퇴운(尹退雲)·피중현(皮重鉉), 통도사 대표 김성해(金聖海)·이한산(李寒山), 해인사 대표 김영해(金泳海)·김영수(金英守), 천은사 대표 하용화(河龍華)·정대하(鄭大河), 정혜사 대표 황용음(黃龍吟)·길호연(吉浩然), 불영사 대표 이보화(李寶化)·김법융(金法融), 망월사 대표 정석암(鄭石庵)·이해산(李海山), 범어사 대표 강영명(姜永明)·김설산(金雪山), 김경석(金慶奭), 월정사 대표 박혜명(朴慧明)

지방의 10개 선원에 선우공제회 지부가 설치되어 실질적으로 운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통도사, 해인사, 범어사 등 경남 3본산의 참여가 주목된다. 또한 금강산 마하연을 비롯하여 직지사, 통도사, 해인사, 천은사, 정혜사, 불영사, 망월사 등 8개 사찰은 대표가 각각 2명인 것에 비해 구월산 월정사는 대표 1명, 그리고 범어사는 대표가 3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통해서도 범어사의 역할과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다.
선우공제회 지방 19개 지부 중 범어사, 직지사, 정혜사, 망월사와 함께 적극적으로 활동에 참여했던 마하연의 일제강점기 때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건판(건판 1624) 사진.

경성사무소를 비롯하여 지방의 19개 지부 가운데 범어사, 직지사, 정혜사, 망월사, 마하연 등 5개 지부가 선우공제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는 상황이었다. 처음 시작할 때 19개 지부에 비해 그 숫자가 크게 부족해 동력과 활력이 많이 떨어지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지방 지부의 활동 저하는 중앙 경성사무소의 김남전, 강도봉, 김석두, 오성월 스님이 선미대(禪米代)로 매월 1원씩 의연하기로 자원함으로써 해결하였다는 점이다. 이들 4명의 선학원 설립 조사들의 역할과 책임의식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이 시기 대본산으로 재정이 상대적으로 넉넉했던 해인사, 통도사의 지원이 없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선원이 활성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나마 대본산 범어사(15명)가 있고, 말사인 직지사 선원의 인원이 20명으로 가장 많았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김천 직지사의 선풍 진작이 다른 곳보다 활발하였다는 점과 이후 선우공제회 경성 사무소가 김천 직지사로 이전되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자료이기도 하다.

1923년 3월 29일 선우공제회 제2회 정기총회를 거쳐 새롭게 임원을 개선하였다. 3부 이사로 서무부 이사 기석호, 재무부 이사 신환옹(申幻翁), 수도부 이사 강도봉 등을 선임하였다. 또한 새롭게 선출된 평의원은 다음과 같다.

마하사 대표 이계봉(李戒奉)·김숙암(金淑庵), 직지사 대표 윤퇴운(尹退雲)·피중현(皮重鉉), 통도사 대표 김성해(金聖海)·이한산(李寒山), 해인사 대표 김영해(金泳海)·김영수(金英守), 천은사 대표 하용화(河龍華)·정대하(鄭大河), 정혜사 대표 황용음(黃龍吟)·길호연(吉浩然), 불영사 대표 이보화(李寶化)·김법융(金法融), 망월사 대표 정석암(鄭石庵)·이해산(李海山), 범어사 대표 강영명(姜永明)·김설산(金雪山), 김경석(金慶奭), 월정사 대표 박혜명(朴慧明)

지방의 10개 선원에 선우공제회 지부가 설치되어 실질적으로 운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통도사, 해인사, 범어사 등 경남 3본산의 참여가 주목된다. 또한 금강산 마하연을 비롯하여 직지사, 통도사, 해인사, 천은사, 정혜사, 불영사, 망월사 등 8개 사찰은 대표가 각각 2명인 것에 비해 구월산 월정사는 대표 1명, 그리고 범어사는 대표가 3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통해서도 범어사의 역할과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다.

1922년 3월 선우공제회 창립 당시 19개 지부로 출발하였는데, 평의원은 이들 지부에서 골고루 선임되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23년 3월 2차 정기총회에서 평의원 20명은 마하사, 직지사, 통도사, 해인사, 천은사, 정혜사, 불영사, 망월사, 범어사, 월정사 등 10개 지부의 인물들로 구성되었다. 이는 실질적으로 지방 지부의 역할이 이들 10개 사찰에 불과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선학원의 선우공제회 중앙본부 이후 선우공제회 사무소의 인력을 중심으로 선우공제회 업무가 진행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에 직면한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김천 직지사로 사무소를 옮긴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한편 선우공제회의 재산과 재정 상황은 1923년 말 쌀과 금전을 합해 대략 2만 원 정도를 보유하고 있었다. 재정적으로 어려움이 큰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또한 1924년에는 통상회원 203명, 특별회원 162명으로 모두 365명의 회원이 소속된 수좌 중심의 단체로 성장한 셈이다. 그러나 선우공제회 설립 초기부터 가장 큰 문제는 안정적인 재정확보였다. 회의 때마다 재정 확립에 대한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선우공제회 유지방식은 재래의 선원(禪院) 토지와 새롭게 편입된 신입토지(新入土地)의 수입 10분의 2와 기타 희사금으로 충당하기로 하였다. 1924년도 결산을 보면 수입이 563원, 지출이 300원이어서 재정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던 셈이다. 더욱이 불영사, 해인사, 정혜사, 표훈사 등의 수좌들이 상당액의 토지를 헌납하였고, 김남전 스님도 사재 1만원을 기부함으로써 선우공제회 운영의 기반이 안정되어 갔다.

헌납 부동산 현황

강원 울진군 불영사 이설운(李雪耘) 답(畓) 연수(年收) 80석(石)
경남 합천군 해인사 김영해(金映海) 답 1만 101평〔42두(斗) 2승락(升落)〕, 전(田) 764평(4두 3승락)
강원 회양군 표훈사 이성혜(李性惠) 답 3255평(40두락)
강원 회양군 표훈사 이성윤(李性潤) 답 4228평(13두락)
강원 회양군 표훈사 김도권(金道權) 답 21두락
충남 예산군 정혜사 송만공(宋滿空) 답 6173평

모든 조직의 가장 큰 문제는 안정적 재정확보와 운영에 있다. 실제 선우공제회의 어려움은 이런 재정적인 어려움보다 총독부가 선우공제회의 재단법인을 허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3. 선우공제회의 재편과 직지사 이전

1924년 3월 15일 안국동 선우공제회 사무소에서 제3회 정기총회가 개최되었다.8) 회원 17명이 참석한 가운데 임시의장 한용운 주재로 회의가 진행되었다. 참석자의 주축은 선우공제회 사무소 인사들로 강도봉, 김남전, 한용운, 신환옹, 김덕률(金德律), 김세권(金世權) 등 6명이었고, 범어사 오리산, 직지사 서대암(徐對庵), 허일권(許一權), 망월사 김성경(金性敬), 통도사 양병선(梁柄善), 해인사 김정암(金定庵), 정영신(鄭永信), 김거봉(金巨奉), 보덕사 이각원(李覺元), 정혜사 황용음, 김초안(金初眼) 등이 참석하였다. 이들 가운데 선우공제회 사무소 측에서 참석해 의장직을 수행한 만해 한용운과 해인사 대표 3명 가운데 한 명인 젊은 수좌 정영신(전강)이 주목되는 인물이다. 이날 회의에서 가장 중요한 사안은 사단법인 선우공제회 정관(禪友共濟會定款)의 통과였다. 참석자 전원의 만장일치로 통과된 정관은 현재 그 실물을 확인할 수 없어, 정확한 사단법인 정관의 내용을 알기 어렵다. 이는 사단법인 선우공제회의 향후 사업 계획과 내용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이날 새로운 임원 개선이 진행되었다. 서무부 이사 강도봉과 간사 김정암(金定庵), 재무부 이사 신환옹과 간사 김초안(金初眼), 수도부 이사 한용운과 간사 이각원(李覺元) 등으로 바뀌어 새로운 체제를 구축하였다. 이날 정기총회에서 만해 한용운은 의장으로 사회를 보며 회의를 주관하였고, 동시에 선우공제회 수도부 이사가 됨으로써 본격적으로 선학원 활동에 임원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또한 평의원(20명)이 윤퇴운(尹退雲), 황경운(黃耕雲), 오리산, 김영해(金映海), 김보광(金普光), 김석두, 이설운(李雪耘), 김덕률, 김남전, 김성해(金聖海), 서대암, 오성월, 이혜봉, 기석호, 전서경(全西耕), 김법융, 이보화(李寶化), 이성경, 김명오(金明旿), 한설고(韓雪皐) 등으로 개선되었고, 법주(法主)로 신혜월(申慧月) 스님을 추대하였다. 체제를 새롭게 재편하는 동시에 선우공제회를 사단법인화하여 사업을 안정적으로 진행하며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장시키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 총독부의 비협조로 선우공제회의 사업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제3회 정기총회에서 통과된 정관에 기초하여 1923년 9월 6일 사단법인 선우공제회 설립허가원을 총독부에 제출하였다. 이를 검토한 총독부 학무국은 1923년 12월 20일 법인의 정관 중 몇 개 조목을 개정하라는 이유로 반려하였다. 이에 선우공제회 사무소는 다시 12월 25일 재차 수정하여 접수하고, 여러 차례 교섭한 결과 머지않아 허가가 될 것이라 기대하였다.9) 그러나 끝내 총독부는 사단법인 선우공제회 설립 허가를 해주지 않았다. 이러한 총독부의 비협조와 보이지 않는 탄압 속에서 이듬해인 1924년 3월 15일 회원 20여 명을 소집하여 선후책 마련에 나섰다. 이에 선우공제회 사무소 유지비와 기타 경비문제를 해결하고자 서울 선학원에 있는 사무소를 김천의 직지사로 이전하기로 하였다. 총독부의 선우공제회 탄압에 따른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상황 전개였던 셈이다. 또한 19개 지부로 시작한 선우공제회에서 31본산에 해당하는 본사 7개 가운데 건봉사, 석왕사, 선암사, 해인사 등 유력한 사찰에서 지부 활동이 활성화되지 못했다는 점도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물론 선우공제회 사무소가 서울에 있다는 문제 제기도 있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결정적 이유는 아닐 것이다.

선우공제회 사무소의 직지사 이전과 함께 서무 윤퇴운(직지사), 재무 황용음(정혜사), 서기 심원전(범어사)을 선임하여 근무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번 제3회 정기총회에서 임원을 개선하였다. 그러나 회의를 통해 가결한 나머지 사안이 제대로 실행되지 못함에 따라 회의록을 송부하지 않고 선우공제회 법인 허가가 이루어진 뒤에 특별히 임시총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그러나 선우공제회의 법인화는 조선 총독부의 방해로 끝내 성사되지 못하였다. 총독부의 지연작전으로 사단법인이 되지 못하자 법인화를 상정한 모든 사업이 점차 부실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선우공제회가 침체되는 상황이 되었다.

1924년 3월 15일 회의 결과 1924년 4월 즈음 선우공제회 본부는 직지사로 이전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선학원 운영의 중심인물이었던 김남전 스님이 1924년에 직지사에 주석하고 있다는 점과 일맥상통하는 바이다. 이는 1924년 중반 선우공제회가 운영상으로 상당한 어려움에 처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에 1926년 5월 1일 서울 중앙의 선학원이 범어사 포교소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선학원의 중도 퇴진은 곧 선우공제회 활동의 정지를 뜻한다. 1923년 이래 사단법인을 신청했지만 일제는 10년이 지나도록 허가하지 않았다. 적어도 1932년까지 직지사에 선우공제회가 소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선우공제회의 활동의 재개는 1933년 이후 재단법인 조선불교선리참구원의 시대를 기다려야 했다.

[주] -----

8) 선학원 회의록을 잘 정리하였지만 제3회 정기총회가 1924년 11월 15일에 개최된 것으로 오기하였다. 정광호(1999), 《한국불교최근백년사편년》, 인하대학교출판부, 254쪽.

9) ‘本事務所 移轉에 關한 件’, 禪庶 發제55호(1924년 4월 20일), 《한국근현대불교자료전집》 65, 민족사(1996), 35~36쪽.

10) 직지사 소재 선우공제회 李炭翁의 명단이 나오기 때문이다. 《회광》 2호(1932. 3), 116쪽; 김광식(2015), <조계종과 선학원, ‘同根’의 역사 및 이념>, 《문학 사학 철학》 43·44합집, 한국불교사연구소, 1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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