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06. 아들아 내 아들아
[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106. 아들아 내 아들아
  • 전재민 시인
  • 승인 2023.03.27 13: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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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하물며 우린 아비와 아들로 만난 사이
억 겁 인연이 만들어낸 귀한 만남이라니

벌써 강산이 세 번이나 변할 세월이 많이 흘러 갔어도
네가 아기였을 때 까만 눈동자를 잊을 수 없다

아주 조금 먹고 아주 조금씩 싸는 아이였던 아들
똥을 싸고 오줌을 싸도 부시시 졸린 눈을 비비며 흐뭇한 미소

세상 다른 엄마 아빠처럼 발가락을 빨고
똥 기저귀를 갈아주고 밥을 먹어도 구수하기만 했지

커 가면서 머리가 깨지고 생선 가시가 목에 걸리고
아이들과 싸워도 튼튼하게 만 자라달라 기도했었다

나의 아버지가 떠나고
아들 모습에서 아버지 모습이 자꾸만 겹쳐 보이면
빛 받으러 온 빚쟁이 같은 아들 모습이 아버지 환영처럼 보였지

배고프지 않게 큰 것을 감사하며 밥 위에 얹은 감자 개떡을 그리워 하고
검정 고무신 말고 나도 운동화가 가지고 싶었던 아비의 시간은 시골을 떠나
노량진 독서실 책상 아래 구부리고 잠을 자던 나의 모습

너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다르듯
네가 나를 대신 할 수 없는데
자꾸만 날 대신해 나의 꿈을 펼쳐 주길 원했는지 모른다.

내가 너를 사랑하듯
너도 나를 사랑해 달라고 말하진 않았지만
마음속으론 바라고 있었는지 몰라

짝사랑은 너무나도 힘든 것을 알거든
메아리 없는 외침은 너무도 외롭다는 것을 알거든.

 







#작가의 변
나는 나의 직업에 대해서 부끄럽지 않다. 돈을 많이 버는 고소득 직종이 아니니 자랑스럽다고 말하기도 좀 무엇하지만, 평생을 먹고살게 해주고 넉넉하지 않아도 가족이 함께하게 해준 직업이다. 사실 나의 직업에는 몇 번의 변화가 있었다. 은행원이 되려고 상업 고등학교를 갔고, 그곳에서 나는 글을 쓰는 나의 소질을 발견하고 글을 쓰는 직업을 갖겠다는 꿈을 꾸었지만 아버지는 반대했다. 아버지 얼굴조차 마주하고 싶지 않아 청주 직업훈련원에서 기계 조립기능사를 취득하고 농업 기계 회사에서 금형을 배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주를 묻혀서 그라인드로 갈아 금형을 만드는 선배와 설계 도면만 봐도 머리가 아픈 것은 물론, 손톱 밑에 늘 새까맣게 기름때를 묻히고 날마다 잔업을 4시간 이상씩 해도 월세방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당시 전북 기계 공고의 선배가 직업 훈련원 출신인 나를 무시하고 괴롭히는 것도 견디기 힘들었다. 방위 산업체 혜택을 2년 넘게 받고 있어서 절반 남은 5년을 채우면 군 복무도 자유로웠지만 기꺼이 공군에 지원해 군에 가게 된 것은 현실 도피적 성격도 강했다.

나의 부모님은 도둑질이 아니고 열심히 일하는 직업이면 다 괜찮다고 말했었다. 물론 면 서기를 하면서 농사를 짓던 동네 형님의 모습이 부모님이 가장 원하던 모습이었다. 시골 초등학교의 아이들은 장래 희망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농부라고 대답한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대통령, 선생님, 공무원, 회사원, 경찰관 등등 그들이 본 모습 중에 멋져 보이는 직업을 장래 희망으로 말하고는 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을 낳고 어려서부터 아파서 병원 가는 일이 많아 다른 것은 바라지 않는다면서 건강하기만을 바란다고 했다. 다른 아이들과 함께 피아노 학원에 다니고 수영 레슨을 다니고, 태권도 교습받고 하면서 슬슬 욕심이 생겼다. 혹시 우리 아이들에게 피아노에 재능이 특별한 것은 아닐까? 수영을 잘해서 수영 선수로 키울 수 있지 않을까? 태권도는 어떨까? 농구는 어떨까? 혹시 탤런트나 연기에 재능은 있지 않을까? 다양한 강습과 학원 교습을 시키면서 사실은 부모인 나의 바람도 키웠다.

그런데 아이들이 소방차를 좋아하고 소방차를 갖고 노는 것을 보니 혹시 소방 공무원이 되려 나 하는 생각도 하고, 그림을 잘 그리니 화가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아이들이 커 가면서 부모의 꿈도 커 갔으며 좋겠지만, 아이들이 커 가면서 부모의 희망은 오히려 쪼그라들어 현실적이다. 그리고 아이들이 원하는 것이 부모가 원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면 세상 돌아가는 현실적인 이야기도 곁들이게 된다. 아이들이 포켓몬 카드를 모으는 데만 열중하는데 쓸데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부모다. 지금도 아이들이 일본 만화의 영향을 받아서 일본은 동화 속의 나라라고 착각하는 젊은이가 많은 것은 어릴 적 만화 영화의 영향이 크다.

공부해라, 공부해라 한다고 공부하는 아이들이 얼마나 될까? 그 결과는 대학 지원할 때 나오게 된다. 세컨랭귀지를 하지 않으면 대학 입학이 힘든 캐나다의 입시 제도상 불어가 힘들다고 중국어로 바꿀 때 이미 중국어도 힘들다고 말했고, 한국어 공부도 하지 않은 채 한국어 능력 시험을 봤으면 했던 것도 부모의 욕심이 작용했는지 모른다.







캐나다는 많은 부모가 18살이면 독립시킨다. 아니 나이 들어 부모와 함께 있으면 능력 없는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다. 어찌 어찌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잡아도 처음부터 좋은 직장을 잡을 수 없다. 다른 사람 자식들은 변호사가 되었다, 오래 만에 만난 아이들의 초등학교 학부모가 아들이 의사가 됐다, 뭐 이런 이야길 들으면 잘됐네요 하고 말을 하지만 우리 아이들도 그리 잘됐으면 하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직업이라는 것이 평생을 해야 하는 것이고 싫으며 할 수도 없고 능률도 오르지 않는다. 요즘은 직업의 초점을 연봉을 얼마 받느냐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의사가 되기 위해, 변호사가 되기 위해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다시 학교를 다니는 학생도 많다. 컴퓨터 엔지니어가 미래 직업이고 연봉도 좋으니 그걸 하겠다는 아들은, 범죄수사과 졸업, 회계 학과 졸업 예정인데 컴퓨터를 또 배운다고 기술 대학에 들어갔다가 왕따를 당하고 힘들어하면서 모든 것을 부모 탓이라고 말했다.

아버지 직업이 그룹 따돌림하는 아이들보다 못하고, 더 가난해서 자기가 왕따 당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의 직업이 다른 직업보다 나은 직업이라 말하진 못해도, 아들에게 무시당하니 분했다. 그런 사고를 가진 아들이 미웠다. 그리고 아버지가 범죄수사과에 가라고 해서 갔다고 원망하면서, 바로 컴퓨터 학과에 갔다면 지금처럼 힘들지 않았을 거라고 원망한다. 사실 난 아들이 범죄수사과을 나와 경찰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지만 본인이 싫다고 했다. 그래서 회계학으로 바꾼 것도 본인이다. 그리고 컴퓨터 학과에 가려 했지만, 고등학교 때 수학을 공부 안 해서 다시 고등학교에 가서 공부할 정도로 집념이 있어 보여 잘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모든 것을 부모의 탓으로 돌리고 학교에 학폭의 한 부분인 따돌림 때문에 우울증 치료까지 하고있는 현재 상황을 학교에 문제 제기했지만, 아들은 그것조차 아빠를 위한 것이지 나는 원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따돌림으로 인한 피해로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있다. 어디 가서 팍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감시하고 교수까지 한편이 되어 괴롭히니 집에 돌아오면 날마다 힘들어하고 학교 가고 싶지 않다고 하던 아들. 피해자는 학교를 못 다니고 가해자는 멀쩡하게 학교 다니는 상황이 납득가지 않지만, 부모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세상엔 돈보다 귀한 것을 쫓는 많은 직업이 있다. 글을 쓰는 많은 작가도 베스트셀러를 만들어도 아주 부자로 살기 힘들고, 신부나 스님 같은 성직자들도 원래 돈을 보고 택한 직업은 아니다. 민주 사회라고 해도 자본 중심인 사회라서 늘 돈이 먼저인 세상에서 미래의 젊은이들이 돈만을 좇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있다. 대학도 이미 돈을 잘 버는 직업을 잡기 위한 수단이 되어 버린지 오래다.

어릴 땐 아이들이 기쁨이었다. 잘 먹고 잘 싸는 것이 행복이었다. 기고 뒤집고 다른 아이들이 다 하는 것도 신기했다. 그런데 나이 들어가는 아들이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가슴에 대못을 박는 말만 하고 미래가 불안해지니 내 미래가 불안한 느낌이다. 불교 인연법에 의하면 은혜를 갚으러 오는 자식과 빚을 받으러 오는 자식이 있다는 데 정말 빚을 받으러 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착하기만 해서는 살아가지 못하는 사회. 불공정과 불의에 맞서 싸우는 의연한 아들을 원하지만 기울어진 운동장만 탓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 가슴이 꽉 막힌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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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하물며 우린 아비와 아들로 만난 사이
억 겁 인연이 만들어낸 귀한 만남이라니

벌써 강산이 세 번이나 변할 세월이 많이 흘러 갔어도
네가 아기였을 때 까만 눈동자를 잊을 수 없다

아주 조금 먹고 아주 조금씩 싸는 아이였던 아들
똥을 싸고 오줌을 싸도 부시시 졸린 눈을 비비며 흐뭇한 미소

세상 다른 엄마 아빠처럼 발가락을 빨고
똥 기저귀를 갈아주고 밥을 먹어도 구수하기만 했지

커 가면서 머리가 깨지고 생선 가시가 목에 걸리고
아이들과 싸워도 튼튼하게 만 자라달라 기도했었다

나의 아버지가 떠나고
아들 모습에서 아버지 모습이 자꾸만 겹쳐 보이면
빛 받으러 온 빚쟁이 같은 아들 모습이 아버지 환영처럼 보였지

배고프지 않게 큰 것을 감사하며 밥 위에 얹은 감자 개떡을 그리워 하고
검정 고무신 말고 나도 운동화가 가지고 싶었던 아비의 시간은 시골을 떠나
노량진 독서실 책상 아래 구부리고 잠을 자던 나의 모습

너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다르듯
네가 나를 대신 할 수 없는데
자꾸만 날 대신해 나의 꿈을 펼쳐 주길 원했는지 모른다.

내가 너를 사랑하듯
너도 나를 사랑해 달라고 말하진 않았지만
마음속으론 바라고 있었는지 몰라

짝사랑은 너무나도 힘든 것을 알거든
메아리 없는 외침은 너무도 외롭다는 것을 알거든.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하물며 우린 아비와 아들로 만난 사이
억 겁 인연이 만들어낸 귀한 만남이라니

벌써 강산이 세 번이나 변할 세월이 많이 흘러 갔어도
네가 아기였을 때 까만 눈동자를 잊을 수 없다

아주 조금 먹고 아주 조금씩 싸는 아이였던 아들
똥을 싸고 오줌을 싸도 부시시 졸린 눈을 비비며 흐뭇한 미소

세상 다른 엄마 아빠처럼 발가락을 빨고
똥 기저귀를 갈아주고 밥을 먹어도 구수하기만 했지

커 가면서 머리가 깨지고 생선 가시가 목에 걸리고
아이들과 싸워도 튼튼하게 만 자라달라 기도했었다

나의 아버지가 떠나고
아들 모습에서 아버지 모습이 자꾸만 겹쳐 보이면
빛 받으러 온 빚쟁이 같은 아들 모습이 아버지 환영처럼 보였지

배고프지 않게 큰 것을 감사하며 밥 위에 얹은 감자 개떡을 그리워 하고
검정 고무신 말고 나도 운동화가 가지고 싶었던 아비의 시간은 시골을 떠나
노량진 독서실 책상 아래 구부리고 잠을 자던 나의 모습

너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다르듯
네가 나를 대신 할 수 없는데
자꾸만 날 대신해 나의 꿈을 펼쳐 주길 원했는지 모른다.

내가 너를 사랑하듯
너도 나를 사랑해 달라고 말하진 않았지만
마음속으론 바라고 있었는지 몰라

짝사랑은 너무나도 힘든 것을 알거든
메아리 없는 외침은 너무도 외롭다는 것을 알거든.

 







#작가의 변
나는 나의 직업에 대해서 부끄럽지 않다. 돈을 많이 버는 고소득 직종이 아니니 자랑스럽다고 말하기도 좀 무엇하지만, 평생을 먹고살게 해주고 넉넉하지 않아도 가족이 함께하게 해준 직업이다. 사실 나의 직업에는 몇 번의 변화가 있었다. 은행원이 되려고 상업 고등학교를 갔고, 그곳에서 나는 글을 쓰는 나의 소질을 발견하고 글을 쓰는 직업을 갖겠다는 꿈을 꾸었지만 아버지는 반대했다. 아버지 얼굴조차 마주하고 싶지 않아 청주 직업훈련원에서 기계 조립기능사를 취득하고 농업 기계 회사에서 금형을 배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주를 묻혀서 그라인드로 갈아 금형을 만드는 선배와 설계 도면만 봐도 머리가 아픈 것은 물론, 손톱 밑에 늘 새까맣게 기름때를 묻히고 날마다 잔업을 4시간 이상씩 해도 월세방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당시 전북 기계 공고의 선배가 직업 훈련원 출신인 나를 무시하고 괴롭히는 것도 견디기 힘들었다. 방위 산업체 혜택을 2년 넘게 받고 있어서 절반 남은 5년을 채우면 군 복무도 자유로웠지만 기꺼이 공군에 지원해 군에 가게 된 것은 현실 도피적 성격도 강했다.

나의 부모님은 도둑질이 아니고 열심히 일하는 직업이면 다 괜찮다고 말했었다. 물론 면 서기를 하면서 농사를 짓던 동네 형님의 모습이 부모님이 가장 원하던 모습이었다. 시골 초등학교의 아이들은 장래 희망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농부라고 대답한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대통령, 선생님, 공무원, 회사원, 경찰관 등등 그들이 본 모습 중에 멋져 보이는 직업을 장래 희망으로 말하고는 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을 낳고 어려서부터 아파서 병원 가는 일이 많아 다른 것은 바라지 않는다면서 건강하기만을 바란다고 했다. 다른 아이들과 함께 피아노 학원에 다니고 수영 레슨을 다니고, 태권도 교습받고 하면서 슬슬 욕심이 생겼다. 혹시 우리 아이들에게 피아노에 재능이 특별한 것은 아닐까? 수영을 잘해서 수영 선수로 키울 수 있지 않을까? 태권도는 어떨까? 농구는 어떨까? 혹시 탤런트나 연기에 재능은 있지 않을까? 다양한 강습과 학원 교습을 시키면서 사실은 부모인 나의 바람도 키웠다.

그런데 아이들이 소방차를 좋아하고 소방차를 갖고 노는 것을 보니 혹시 소방 공무원이 되려 나 하는 생각도 하고, 그림을 잘 그리니 화가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아이들이 커 가면서 부모의 꿈도 커 갔으며 좋겠지만, 아이들이 커 가면서 부모의 희망은 오히려 쪼그라들어 현실적이다. 그리고 아이들이 원하는 것이 부모가 원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면 세상 돌아가는 현실적인 이야기도 곁들이게 된다. 아이들이 포켓몬 카드를 모으는 데만 열중하는데 쓸데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부모다. 지금도 아이들이 일본 만화의 영향을 받아서 일본은 동화 속의 나라라고 착각하는 젊은이가 많은 것은 어릴 적 만화 영화의 영향이 크다.

공부해라, 공부해라 한다고 공부하는 아이들이 얼마나 될까? 그 결과는 대학 지원할 때 나오게 된다. 세컨랭귀지를 하지 않으면 대학 입학이 힘든 캐나다의 입시 제도상 불어가 힘들다고 중국어로 바꿀 때 이미 중국어도 힘들다고 말했고, 한국어 공부도 하지 않은 채 한국어 능력 시험을 봤으면 했던 것도 부모의 욕심이 작용했는지 모른다.







캐나다는 많은 부모가 18살이면 독립시킨다. 아니 나이 들어 부모와 함께 있으면 능력 없는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다. 어찌 어찌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잡아도 처음부터 좋은 직장을 잡을 수 없다. 다른 사람 자식들은 변호사가 되었다, 오래 만에 만난 아이들의 초등학교 학부모가 아들이 의사가 됐다, 뭐 이런 이야길 들으면 잘됐네요 하고 말을 하지만 우리 아이들도 그리 잘됐으면 하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직업이라는 것이 평생을 해야 하는 것이고 싫으며 할 수도 없고 능률도 오르지 않는다. 요즘은 직업의 초점을 연봉을 얼마 받느냐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의사가 되기 위해, 변호사가 되기 위해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다시 학교를 다니는 학생도 많다. 컴퓨터 엔지니어가 미래 직업이고 연봉도 좋으니 그걸 하겠다는 아들은, 범죄수사과 졸업, 회계 학과 졸업 예정인데 컴퓨터를 또 배운다고 기술 대학에 들어갔다가 왕따를 당하고 힘들어하면서 모든 것을 부모 탓이라고 말했다.

아버지 직업이 그룹 따돌림하는 아이들보다 못하고, 더 가난해서 자기가 왕따 당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의 직업이 다른 직업보다 나은 직업이라 말하진 못해도, 아들에게 무시당하니 분했다. 그런 사고를 가진 아들이 미웠다. 그리고 아버지가 범죄수사과에 가라고 해서 갔다고 원망하면서, 바로 컴퓨터 학과에 갔다면 지금처럼 힘들지 않았을 거라고 원망한다. 사실 난 아들이 범죄수사과을 나와 경찰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지만 본인이 싫다고 했다. 그래서 회계학으로 바꾼 것도 본인이다. 그리고 컴퓨터 학과에 가려 했지만, 고등학교 때 수학을 공부 안 해서 다시 고등학교에 가서 공부할 정도로 집념이 있어 보여 잘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모든 것을 부모의 탓으로 돌리고 학교에 학폭의 한 부분인 따돌림 때문에 우울증 치료까지 하고있는 현재 상황을 학교에 문제 제기했지만, 아들은 그것조차 아빠를 위한 것이지 나는 원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따돌림으로 인한 피해로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있다. 어디 가서 팍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감시하고 교수까지 한편이 되어 괴롭히니 집에 돌아오면 날마다 힘들어하고 학교 가고 싶지 않다고 하던 아들. 피해자는 학교를 못 다니고 가해자는 멀쩡하게 학교 다니는 상황이 납득가지 않지만, 부모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세상엔 돈보다 귀한 것을 쫓는 많은 직업이 있다. 글을 쓰는 많은 작가도 베스트셀러를 만들어도 아주 부자로 살기 힘들고, 신부나 스님 같은 성직자들도 원래 돈을 보고 택한 직업은 아니다. 민주 사회라고 해도 자본 중심인 사회라서 늘 돈이 먼저인 세상에서 미래의 젊은이들이 돈만을 좇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있다. 대학도 이미 돈을 잘 버는 직업을 잡기 위한 수단이 되어 버린지 오래다.

어릴 땐 아이들이 기쁨이었다. 잘 먹고 잘 싸는 것이 행복이었다. 기고 뒤집고 다른 아이들이 다 하는 것도 신기했다. 그런데 나이 들어가는 아들이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가슴에 대못을 박는 말만 하고 미래가 불안해지니 내 미래가 불안한 느낌이다. 불교 인연법에 의하면 은혜를 갚으러 오는 자식과 빚을 받으러 오는 자식이 있다는 데 정말 빚을 받으러 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착하기만 해서는 살아가지 못하는 사회. 불공정과 불의에 맞서 싸우는 의연한 아들을 원하지만 기울어진 운동장만 탓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 가슴이 꽉 막힌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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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변
나는 나의 직업에 대해서 부끄럽지 않다. 돈을 많이 버는 고소득 직종이 아니니 자랑스럽다고 말하기도 좀 무엇하지만, 평생을 먹고살게 해주고 넉넉하지 않아도 가족이 함께하게 해준 직업이다. 사실 나의 직업에는 몇 번의 변화가 있었다. 은행원이 되려고 상업 고등학교를 갔고, 그곳에서 나는 글을 쓰는 나의 소질을 발견하고 글을 쓰는 직업을 갖겠다는 꿈을 꾸었지만 아버지는 반대했다. 아버지 얼굴조차 마주하고 싶지 않아 청주 직업훈련원에서 기계 조립기능사를 취득하고 농업 기계 회사에서 금형을 배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주를 묻혀서 그라인드로 갈아 금형을 만드는 선배와 설계 도면만 봐도 머리가 아픈 것은 물론, 손톱 밑에 늘 새까맣게 기름때를 묻히고 날마다 잔업을 4시간 이상씩 해도 월세방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당시 전북 기계 공고의 선배가 직업 훈련원 출신인 나를 무시하고 괴롭히는 것도 견디기 힘들었다. 방위 산업체 혜택을 2년 넘게 받고 있어서 절반 남은 5년을 채우면 군 복무도 자유로웠지만 기꺼이 공군에 지원해 군에 가게 된 것은 현실 도피적 성격도 강했다.

나의 부모님은 도둑질이 아니고 열심히 일하는 직업이면 다 괜찮다고 말했었다. 물론 면 서기를 하면서 농사를 짓던 동네 형님의 모습이 부모님이 가장 원하던 모습이었다. 시골 초등학교의 아이들은 장래 희망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농부라고 대답한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대통령, 선생님, 공무원, 회사원, 경찰관 등등 그들이 본 모습 중에 멋져 보이는 직업을 장래 희망으로 말하고는 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을 낳고 어려서부터 아파서 병원 가는 일이 많아 다른 것은 바라지 않는다면서 건강하기만을 바란다고 했다. 다른 아이들과 함께 피아노 학원에 다니고 수영 레슨을 다니고, 태권도 교습받고 하면서 슬슬 욕심이 생겼다. 혹시 우리 아이들에게 피아노에 재능이 특별한 것은 아닐까? 수영을 잘해서 수영 선수로 키울 수 있지 않을까? 태권도는 어떨까? 농구는 어떨까? 혹시 탤런트나 연기에 재능은 있지 않을까? 다양한 강습과 학원 교습을 시키면서 사실은 부모인 나의 바람도 키웠다.

그런데 아이들이 소방차를 좋아하고 소방차를 갖고 노는 것을 보니 혹시 소방 공무원이 되려 나 하는 생각도 하고, 그림을 잘 그리니 화가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아이들이 커 가면서 부모의 꿈도 커 갔으며 좋겠지만, 아이들이 커 가면서 부모의 희망은 오히려 쪼그라들어 현실적이다. 그리고 아이들이 원하는 것이 부모가 원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면 세상 돌아가는 현실적인 이야기도 곁들이게 된다. 아이들이 포켓몬 카드를 모으는 데만 열중하는데 쓸데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부모다. 지금도 아이들이 일본 만화의 영향을 받아서 일본은 동화 속의 나라라고 착각하는 젊은이가 많은 것은 어릴 적 만화 영화의 영향이 크다.

공부해라, 공부해라 한다고 공부하는 아이들이 얼마나 될까? 그 결과는 대학 지원할 때 나오게 된다. 세컨랭귀지를 하지 않으면 대학 입학이 힘든 캐나다의 입시 제도상 불어가 힘들다고 중국어로 바꿀 때 이미 중국어도 힘들다고 말했고, 한국어 공부도 하지 않은 채 한국어 능력 시험을 봤으면 했던 것도 부모의 욕심이 작용했는지 모른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하물며 우린 아비와 아들로 만난 사이
억 겁 인연이 만들어낸 귀한 만남이라니

벌써 강산이 세 번이나 변할 세월이 많이 흘러 갔어도
네가 아기였을 때 까만 눈동자를 잊을 수 없다

아주 조금 먹고 아주 조금씩 싸는 아이였던 아들
똥을 싸고 오줌을 싸도 부시시 졸린 눈을 비비며 흐뭇한 미소

세상 다른 엄마 아빠처럼 발가락을 빨고
똥 기저귀를 갈아주고 밥을 먹어도 구수하기만 했지

커 가면서 머리가 깨지고 생선 가시가 목에 걸리고
아이들과 싸워도 튼튼하게 만 자라달라 기도했었다

나의 아버지가 떠나고
아들 모습에서 아버지 모습이 자꾸만 겹쳐 보이면
빛 받으러 온 빚쟁이 같은 아들 모습이 아버지 환영처럼 보였지

배고프지 않게 큰 것을 감사하며 밥 위에 얹은 감자 개떡을 그리워 하고
검정 고무신 말고 나도 운동화가 가지고 싶었던 아비의 시간은 시골을 떠나
노량진 독서실 책상 아래 구부리고 잠을 자던 나의 모습

너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다르듯
네가 나를 대신 할 수 없는데
자꾸만 날 대신해 나의 꿈을 펼쳐 주길 원했는지 모른다.

내가 너를 사랑하듯
너도 나를 사랑해 달라고 말하진 않았지만
마음속으론 바라고 있었는지 몰라

짝사랑은 너무나도 힘든 것을 알거든
메아리 없는 외침은 너무도 외롭다는 것을 알거든.

 







#작가의 변
나는 나의 직업에 대해서 부끄럽지 않다. 돈을 많이 버는 고소득 직종이 아니니 자랑스럽다고 말하기도 좀 무엇하지만, 평생을 먹고살게 해주고 넉넉하지 않아도 가족이 함께하게 해준 직업이다. 사실 나의 직업에는 몇 번의 변화가 있었다. 은행원이 되려고 상업 고등학교를 갔고, 그곳에서 나는 글을 쓰는 나의 소질을 발견하고 글을 쓰는 직업을 갖겠다는 꿈을 꾸었지만 아버지는 반대했다. 아버지 얼굴조차 마주하고 싶지 않아 청주 직업훈련원에서 기계 조립기능사를 취득하고 농업 기계 회사에서 금형을 배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주를 묻혀서 그라인드로 갈아 금형을 만드는 선배와 설계 도면만 봐도 머리가 아픈 것은 물론, 손톱 밑에 늘 새까맣게 기름때를 묻히고 날마다 잔업을 4시간 이상씩 해도 월세방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당시 전북 기계 공고의 선배가 직업 훈련원 출신인 나를 무시하고 괴롭히는 것도 견디기 힘들었다. 방위 산업체 혜택을 2년 넘게 받고 있어서 절반 남은 5년을 채우면 군 복무도 자유로웠지만 기꺼이 공군에 지원해 군에 가게 된 것은 현실 도피적 성격도 강했다.

나의 부모님은 도둑질이 아니고 열심히 일하는 직업이면 다 괜찮다고 말했었다. 물론 면 서기를 하면서 농사를 짓던 동네 형님의 모습이 부모님이 가장 원하던 모습이었다. 시골 초등학교의 아이들은 장래 희망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농부라고 대답한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대통령, 선생님, 공무원, 회사원, 경찰관 등등 그들이 본 모습 중에 멋져 보이는 직업을 장래 희망으로 말하고는 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을 낳고 어려서부터 아파서 병원 가는 일이 많아 다른 것은 바라지 않는다면서 건강하기만을 바란다고 했다. 다른 아이들과 함께 피아노 학원에 다니고 수영 레슨을 다니고, 태권도 교습받고 하면서 슬슬 욕심이 생겼다. 혹시 우리 아이들에게 피아노에 재능이 특별한 것은 아닐까? 수영을 잘해서 수영 선수로 키울 수 있지 않을까? 태권도는 어떨까? 농구는 어떨까? 혹시 탤런트나 연기에 재능은 있지 않을까? 다양한 강습과 학원 교습을 시키면서 사실은 부모인 나의 바람도 키웠다.

그런데 아이들이 소방차를 좋아하고 소방차를 갖고 노는 것을 보니 혹시 소방 공무원이 되려 나 하는 생각도 하고, 그림을 잘 그리니 화가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아이들이 커 가면서 부모의 꿈도 커 갔으며 좋겠지만, 아이들이 커 가면서 부모의 희망은 오히려 쪼그라들어 현실적이다. 그리고 아이들이 원하는 것이 부모가 원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면 세상 돌아가는 현실적인 이야기도 곁들이게 된다. 아이들이 포켓몬 카드를 모으는 데만 열중하는데 쓸데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부모다. 지금도 아이들이 일본 만화의 영향을 받아서 일본은 동화 속의 나라라고 착각하는 젊은이가 많은 것은 어릴 적 만화 영화의 영향이 크다.

공부해라, 공부해라 한다고 공부하는 아이들이 얼마나 될까? 그 결과는 대학 지원할 때 나오게 된다. 세컨랭귀지를 하지 않으면 대학 입학이 힘든 캐나다의 입시 제도상 불어가 힘들다고 중국어로 바꿀 때 이미 중국어도 힘들다고 말했고, 한국어 공부도 하지 않은 채 한국어 능력 시험을 봤으면 했던 것도 부모의 욕심이 작용했는지 모른다.







캐나다는 많은 부모가 18살이면 독립시킨다. 아니 나이 들어 부모와 함께 있으면 능력 없는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다. 어찌 어찌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잡아도 처음부터 좋은 직장을 잡을 수 없다. 다른 사람 자식들은 변호사가 되었다, 오래 만에 만난 아이들의 초등학교 학부모가 아들이 의사가 됐다, 뭐 이런 이야길 들으면 잘됐네요 하고 말을 하지만 우리 아이들도 그리 잘됐으면 하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직업이라는 것이 평생을 해야 하는 것이고 싫으며 할 수도 없고 능률도 오르지 않는다. 요즘은 직업의 초점을 연봉을 얼마 받느냐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의사가 되기 위해, 변호사가 되기 위해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다시 학교를 다니는 학생도 많다. 컴퓨터 엔지니어가 미래 직업이고 연봉도 좋으니 그걸 하겠다는 아들은, 범죄수사과 졸업, 회계 학과 졸업 예정인데 컴퓨터를 또 배운다고 기술 대학에 들어갔다가 왕따를 당하고 힘들어하면서 모든 것을 부모 탓이라고 말했다.

아버지 직업이 그룹 따돌림하는 아이들보다 못하고, 더 가난해서 자기가 왕따 당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의 직업이 다른 직업보다 나은 직업이라 말하진 못해도, 아들에게 무시당하니 분했다. 그런 사고를 가진 아들이 미웠다. 그리고 아버지가 범죄수사과에 가라고 해서 갔다고 원망하면서, 바로 컴퓨터 학과에 갔다면 지금처럼 힘들지 않았을 거라고 원망한다. 사실 난 아들이 범죄수사과을 나와 경찰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지만 본인이 싫다고 했다. 그래서 회계학으로 바꾼 것도 본인이다. 그리고 컴퓨터 학과에 가려 했지만, 고등학교 때 수학을 공부 안 해서 다시 고등학교에 가서 공부할 정도로 집념이 있어 보여 잘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모든 것을 부모의 탓으로 돌리고 학교에 학폭의 한 부분인 따돌림 때문에 우울증 치료까지 하고있는 현재 상황을 학교에 문제 제기했지만, 아들은 그것조차 아빠를 위한 것이지 나는 원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따돌림으로 인한 피해로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있다. 어디 가서 팍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감시하고 교수까지 한편이 되어 괴롭히니 집에 돌아오면 날마다 힘들어하고 학교 가고 싶지 않다고 하던 아들. 피해자는 학교를 못 다니고 가해자는 멀쩡하게 학교 다니는 상황이 납득가지 않지만, 부모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세상엔 돈보다 귀한 것을 쫓는 많은 직업이 있다. 글을 쓰는 많은 작가도 베스트셀러를 만들어도 아주 부자로 살기 힘들고, 신부나 스님 같은 성직자들도 원래 돈을 보고 택한 직업은 아니다. 민주 사회라고 해도 자본 중심인 사회라서 늘 돈이 먼저인 세상에서 미래의 젊은이들이 돈만을 좇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있다. 대학도 이미 돈을 잘 버는 직업을 잡기 위한 수단이 되어 버린지 오래다.

어릴 땐 아이들이 기쁨이었다. 잘 먹고 잘 싸는 것이 행복이었다. 기고 뒤집고 다른 아이들이 다 하는 것도 신기했다. 그런데 나이 들어가는 아들이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가슴에 대못을 박는 말만 하고 미래가 불안해지니 내 미래가 불안한 느낌이다. 불교 인연법에 의하면 은혜를 갚으러 오는 자식과 빚을 받으러 오는 자식이 있다는 데 정말 빚을 받으러 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착하기만 해서는 살아가지 못하는 사회. 불공정과 불의에 맞서 싸우는 의연한 아들을 원하지만 기울어진 운동장만 탓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 가슴이 꽉 막힌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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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는 많은 부모가 18살이면 독립시킨다. 아니 나이 들어 부모와 함께 있으면 능력 없는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다. 어찌 어찌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잡아도 처음부터 좋은 직장을 잡을 수 없다. 다른 사람 자식들은 변호사가 되었다, 오래 만에 만난 아이들의 초등학교 학부모가 아들이 의사가 됐다, 뭐 이런 이야길 들으면 잘됐네요 하고 말을 하지만 우리 아이들도 그리 잘됐으면 하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직업이라는 것이 평생을 해야 하는 것이고 싫으며 할 수도 없고 능률도 오르지 않는다. 요즘은 직업의 초점을 연봉을 얼마 받느냐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의사가 되기 위해, 변호사가 되기 위해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다시 학교를 다니는 학생도 많다. 컴퓨터 엔지니어가 미래 직업이고 연봉도 좋으니 그걸 하겠다는 아들은, 범죄수사과 졸업, 회계 학과 졸업 예정인데 컴퓨터를 또 배운다고 기술 대학에 들어갔다가 왕따를 당하고 힘들어하면서 모든 것을 부모 탓이라고 말했다.

아버지 직업이 그룹 따돌림하는 아이들보다 못하고, 더 가난해서 자기가 왕따 당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의 직업이 다른 직업보다 나은 직업이라 말하진 못해도, 아들에게 무시당하니 분했다. 그런 사고를 가진 아들이 미웠다. 그리고 아버지가 범죄수사과에 가라고 해서 갔다고 원망하면서, 바로 컴퓨터 학과에 갔다면 지금처럼 힘들지 않았을 거라고 원망한다. 사실 난 아들이 범죄수사과을 나와 경찰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지만 본인이 싫다고 했다. 그래서 회계학으로 바꾼 것도 본인이다. 그리고 컴퓨터 학과에 가려 했지만, 고등학교 때 수학을 공부 안 해서 다시 고등학교에 가서 공부할 정도로 집념이 있어 보여 잘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모든 것을 부모의 탓으로 돌리고 학교에 학폭의 한 부분인 따돌림 때문에 우울증 치료까지 하고있는 현재 상황을 학교에 문제 제기했지만, 아들은 그것조차 아빠를 위한 것이지 나는 원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따돌림으로 인한 피해로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있다. 어디 가서 팍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감시하고 교수까지 한편이 되어 괴롭히니 집에 돌아오면 날마다 힘들어하고 학교 가고 싶지 않다고 하던 아들. 피해자는 학교를 못 다니고 가해자는 멀쩡하게 학교 다니는 상황이 납득가지 않지만, 부모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세상엔 돈보다 귀한 것을 쫓는 많은 직업이 있다. 글을 쓰는 많은 작가도 베스트셀러를 만들어도 아주 부자로 살기 힘들고, 신부나 스님 같은 성직자들도 원래 돈을 보고 택한 직업은 아니다. 민주 사회라고 해도 자본 중심인 사회라서 늘 돈이 먼저인 세상에서 미래의 젊은이들이 돈만을 좇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있다. 대학도 이미 돈을 잘 버는 직업을 잡기 위한 수단이 되어 버린지 오래다.

어릴 땐 아이들이 기쁨이었다. 잘 먹고 잘 싸는 것이 행복이었다. 기고 뒤집고 다른 아이들이 다 하는 것도 신기했다. 그런데 나이 들어가는 아들이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가슴에 대못을 박는 말만 하고 미래가 불안해지니 내 미래가 불안한 느낌이다. 불교 인연법에 의하면 은혜를 갚으러 오는 자식과 빚을 받으러 오는 자식이 있다는 데 정말 빚을 받으러 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착하기만 해서는 살아가지 못하는 사회. 불공정과 불의에 맞서 싸우는 의연한 아들을 원하지만 기울어진 운동장만 탓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 가슴이 꽉 막힌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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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하물며 우린 아비와 아들로 만난 사이
억 겁 인연이 만들어낸 귀한 만남이라니

벌써 강산이 세 번이나 변할 세월이 많이 흘러 갔어도
네가 아기였을 때 까만 눈동자를 잊을 수 없다

아주 조금 먹고 아주 조금씩 싸는 아이였던 아들
똥을 싸고 오줌을 싸도 부시시 졸린 눈을 비비며 흐뭇한 미소

세상 다른 엄마 아빠처럼 발가락을 빨고
똥 기저귀를 갈아주고 밥을 먹어도 구수하기만 했지

커 가면서 머리가 깨지고 생선 가시가 목에 걸리고
아이들과 싸워도 튼튼하게 만 자라달라 기도했었다

나의 아버지가 떠나고
아들 모습에서 아버지 모습이 자꾸만 겹쳐 보이면
빛 받으러 온 빚쟁이 같은 아들 모습이 아버지 환영처럼 보였지

배고프지 않게 큰 것을 감사하며 밥 위에 얹은 감자 개떡을 그리워 하고
검정 고무신 말고 나도 운동화가 가지고 싶었던 아비의 시간은 시골을 떠나
노량진 독서실 책상 아래 구부리고 잠을 자던 나의 모습

너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다르듯
네가 나를 대신 할 수 없는데
자꾸만 날 대신해 나의 꿈을 펼쳐 주길 원했는지 모른다.

내가 너를 사랑하듯
너도 나를 사랑해 달라고 말하진 않았지만
마음속으론 바라고 있었는지 몰라

짝사랑은 너무나도 힘든 것을 알거든
메아리 없는 외침은 너무도 외롭다는 것을 알거든.

 







#작가의 변
나는 나의 직업에 대해서 부끄럽지 않다. 돈을 많이 버는 고소득 직종이 아니니 자랑스럽다고 말하기도 좀 무엇하지만, 평생을 먹고살게 해주고 넉넉하지 않아도 가족이 함께하게 해준 직업이다. 사실 나의 직업에는 몇 번의 변화가 있었다. 은행원이 되려고 상업 고등학교를 갔고, 그곳에서 나는 글을 쓰는 나의 소질을 발견하고 글을 쓰는 직업을 갖겠다는 꿈을 꾸었지만 아버지는 반대했다. 아버지 얼굴조차 마주하고 싶지 않아 청주 직업훈련원에서 기계 조립기능사를 취득하고 농업 기계 회사에서 금형을 배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주를 묻혀서 그라인드로 갈아 금형을 만드는 선배와 설계 도면만 봐도 머리가 아픈 것은 물론, 손톱 밑에 늘 새까맣게 기름때를 묻히고 날마다 잔업을 4시간 이상씩 해도 월세방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당시 전북 기계 공고의 선배가 직업 훈련원 출신인 나를 무시하고 괴롭히는 것도 견디기 힘들었다. 방위 산업체 혜택을 2년 넘게 받고 있어서 절반 남은 5년을 채우면 군 복무도 자유로웠지만 기꺼이 공군에 지원해 군에 가게 된 것은 현실 도피적 성격도 강했다.

나의 부모님은 도둑질이 아니고 열심히 일하는 직업이면 다 괜찮다고 말했었다. 물론 면 서기를 하면서 농사를 짓던 동네 형님의 모습이 부모님이 가장 원하던 모습이었다. 시골 초등학교의 아이들은 장래 희망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농부라고 대답한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대통령, 선생님, 공무원, 회사원, 경찰관 등등 그들이 본 모습 중에 멋져 보이는 직업을 장래 희망으로 말하고는 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을 낳고 어려서부터 아파서 병원 가는 일이 많아 다른 것은 바라지 않는다면서 건강하기만을 바란다고 했다. 다른 아이들과 함께 피아노 학원에 다니고 수영 레슨을 다니고, 태권도 교습받고 하면서 슬슬 욕심이 생겼다. 혹시 우리 아이들에게 피아노에 재능이 특별한 것은 아닐까? 수영을 잘해서 수영 선수로 키울 수 있지 않을까? 태권도는 어떨까? 농구는 어떨까? 혹시 탤런트나 연기에 재능은 있지 않을까? 다양한 강습과 학원 교습을 시키면서 사실은 부모인 나의 바람도 키웠다.

그런데 아이들이 소방차를 좋아하고 소방차를 갖고 노는 것을 보니 혹시 소방 공무원이 되려 나 하는 생각도 하고, 그림을 잘 그리니 화가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아이들이 커 가면서 부모의 꿈도 커 갔으며 좋겠지만, 아이들이 커 가면서 부모의 희망은 오히려 쪼그라들어 현실적이다. 그리고 아이들이 원하는 것이 부모가 원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면 세상 돌아가는 현실적인 이야기도 곁들이게 된다. 아이들이 포켓몬 카드를 모으는 데만 열중하는데 쓸데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부모다. 지금도 아이들이 일본 만화의 영향을 받아서 일본은 동화 속의 나라라고 착각하는 젊은이가 많은 것은 어릴 적 만화 영화의 영향이 크다.

공부해라, 공부해라 한다고 공부하는 아이들이 얼마나 될까? 그 결과는 대학 지원할 때 나오게 된다. 세컨랭귀지를 하지 않으면 대학 입학이 힘든 캐나다의 입시 제도상 불어가 힘들다고 중국어로 바꿀 때 이미 중국어도 힘들다고 말했고, 한국어 공부도 하지 않은 채 한국어 능력 시험을 봤으면 했던 것도 부모의 욕심이 작용했는지 모른다.







캐나다는 많은 부모가 18살이면 독립시킨다. 아니 나이 들어 부모와 함께 있으면 능력 없는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다. 어찌 어찌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잡아도 처음부터 좋은 직장을 잡을 수 없다. 다른 사람 자식들은 변호사가 되었다, 오래 만에 만난 아이들의 초등학교 학부모가 아들이 의사가 됐다, 뭐 이런 이야길 들으면 잘됐네요 하고 말을 하지만 우리 아이들도 그리 잘됐으면 하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직업이라는 것이 평생을 해야 하는 것이고 싫으며 할 수도 없고 능률도 오르지 않는다. 요즘은 직업의 초점을 연봉을 얼마 받느냐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의사가 되기 위해, 변호사가 되기 위해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다시 학교를 다니는 학생도 많다. 컴퓨터 엔지니어가 미래 직업이고 연봉도 좋으니 그걸 하겠다는 아들은, 범죄수사과 졸업, 회계 학과 졸업 예정인데 컴퓨터를 또 배운다고 기술 대학에 들어갔다가 왕따를 당하고 힘들어하면서 모든 것을 부모 탓이라고 말했다.

아버지 직업이 그룹 따돌림하는 아이들보다 못하고, 더 가난해서 자기가 왕따 당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의 직업이 다른 직업보다 나은 직업이라 말하진 못해도, 아들에게 무시당하니 분했다. 그런 사고를 가진 아들이 미웠다. 그리고 아버지가 범죄수사과에 가라고 해서 갔다고 원망하면서, 바로 컴퓨터 학과에 갔다면 지금처럼 힘들지 않았을 거라고 원망한다. 사실 난 아들이 범죄수사과을 나와 경찰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지만 본인이 싫다고 했다. 그래서 회계학으로 바꾼 것도 본인이다. 그리고 컴퓨터 학과에 가려 했지만, 고등학교 때 수학을 공부 안 해서 다시 고등학교에 가서 공부할 정도로 집념이 있어 보여 잘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모든 것을 부모의 탓으로 돌리고 학교에 학폭의 한 부분인 따돌림 때문에 우울증 치료까지 하고있는 현재 상황을 학교에 문제 제기했지만, 아들은 그것조차 아빠를 위한 것이지 나는 원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따돌림으로 인한 피해로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있다. 어디 가서 팍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감시하고 교수까지 한편이 되어 괴롭히니 집에 돌아오면 날마다 힘들어하고 학교 가고 싶지 않다고 하던 아들. 피해자는 학교를 못 다니고 가해자는 멀쩡하게 학교 다니는 상황이 납득가지 않지만, 부모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세상엔 돈보다 귀한 것을 쫓는 많은 직업이 있다. 글을 쓰는 많은 작가도 베스트셀러를 만들어도 아주 부자로 살기 힘들고, 신부나 스님 같은 성직자들도 원래 돈을 보고 택한 직업은 아니다. 민주 사회라고 해도 자본 중심인 사회라서 늘 돈이 먼저인 세상에서 미래의 젊은이들이 돈만을 좇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있다. 대학도 이미 돈을 잘 버는 직업을 잡기 위한 수단이 되어 버린지 오래다.

어릴 땐 아이들이 기쁨이었다. 잘 먹고 잘 싸는 것이 행복이었다. 기고 뒤집고 다른 아이들이 다 하는 것도 신기했다. 그런데 나이 들어가는 아들이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가슴에 대못을 박는 말만 하고 미래가 불안해지니 내 미래가 불안한 느낌이다. 불교 인연법에 의하면 은혜를 갚으러 오는 자식과 빚을 받으러 오는 자식이 있다는 데 정말 빚을 받으러 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착하기만 해서는 살아가지 못하는 사회. 불공정과 불의에 맞서 싸우는 의연한 아들을 원하지만 기울어진 운동장만 탓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 가슴이 꽉 막힌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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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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