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99. 부부
[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99. 부부
  • 전재민 시인
  • 승인 2023.02.06 23:45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얼떨결에 가슴으로 사랑하고
그때는 세상엔 사랑뿐인 줄 알았다

하지만 사랑 열매인 아이들을 낳아 기르고
삶에 찌들어 가면서 토닥토닥 사랑싸움 아닌 싸움을 하고

부부는 사는 게 사랑만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상처뿐인 사랑처럼 상처 많은 삶 속에
사랑이 늘 숨 쉬고 있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작가의 변
처음 물었을 때는 안 간다고 하다가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 지팡이를 짚고 퍼블릭 마켓에 버스 타고 갔다. 갈 때는 왜 갔는지 몰랐는데 중국 물건 파는 곳에서 아내가 찾는 것은 부적이었다. 아니면 부적을 쓰는 종이라도 사려고 했던 것 같다. 아들이 직장에서도 학교에서도 따돌림을 당한다. 그것이 사주에 귀문살이 들어서 그렇다면서 아내는 부적이라도 해주면 나을까 싶었던 게다.

사실 며칠 전 아들과 나만 집에 있을 때 9월 말부터 지금까지 내가 신청한 상해 보험도, 실업 보험도 아무것도 받지 못한 상태다. 집에 돌아온 딸은 아빠가 수입이 없어 도와주겠다며 내가 실업 보험을 받으면 자기가 돕는 렌트비 한두 달 안 내면 안 되냐 했다고 아들한테 전했다. 렌트비와 공과금 등 최소한 3,000달러는 있어야 한 달을 생활하는데, 지금 몇 달째 나의 수입이 없다는 말에 아들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래서 내가 지금 학교를 그만두거나 파트 타임으로 바꾸기를 원하느냐, 묻길래 그것은 아니고 지금 우리 가족이 처한 상황을 말하는 거라고 했다. 또한 지난번에 엄마와 얘기하면서 화내며 노트북을 던진 것은 잘못했다고 말했더니, 나 어릴 때 아빠는 직접 나한테 물건을 던지기도 하고 나를 때리기도 했다고 했다. 웃으면서 그래서 이제 아픈 아빠보다 힘이 세니까 아빠를 때리기라도 하려고 하느냐 물으니, 아빠는 그랬는데 나는 그러면 안 되냐고 되물었다. 순간 힘없이 늘어진 이빨 빠진 사자가 가족의 무리에서도 쫓겨나던 다큐멘터리가 생각이 났다. 다음 날 아들이 딸한테 말하고 아내는 나에게 쓸데없는 말을 해서, 왜 아들 스트레스만 더 받게 하냐며 하등에 도움이 안 된다고 말했다.

아들은 범죄 수사학과 전문대를 졸업했다. 당시에 고등학교 수학 성적이 안 좋아 다른 학과를 갈 수 없을 듯해서 그곳에 가서 경찰이 되는 것은 어떻겠냐고 해서 들어갔다. 처음엔 열심히 했다. 하지만 봉사 활동으로 파출소에서 일하면서 차별을 느끼고는 경찰을 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같은 학교 회계학과 1학년에 다시 들어가 졸업했다. 그런데 회계사도 시작은 연봉이 얼마 안 된다고 몇 년 전부터 컴퓨터학과 BCIT를 가고 싶어 했지만, 고등학교 성적 때문에 들어갈 수 없자 고등학교에 다시 가서 수학 수업을 다시 듣기도 했다. 하지만 원하던 성적이 나오지 않았고, 회계학과 졸업 성적으로 원하던 컴퓨터 엔지니어학과를 들어갈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기초가 없이 게임만 하던 아들은 스파르타식 교육을 하는 학교를 힘들어했다. 그리고 다른 학생들과 함께하는 프로젝트가 많은데, 따돌린다고 했다.

그래서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들의 표정만 살펴야 했다. 그러다 아들이 다른 학생 부모들은 부자들이라 아들에게 한 달에 몇천 불씩 용돈을 준다는데 아빠는 왜 공부를 안 해서 주방에서 30년을 넘게 일해도 시간당 20불 좀 넘는 돈 받는 일을 하냐고 부모를 원망했다. 나도 대학에 간다고 했을 때 대학 보내 준다던 아버지가 농약 먹고 죽는다는 바람에 청주 직업훈련원에 들어가 기술을 배우고 기술직을 하려다 내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아 조리사가 되고, 나중에 직장에 일하면서 야간 경희대 조리과를 나왔다. 그럼에도 돈을 못 버는 직업이라고 아들에게 원망을 들으니 내가 살아 온 세월이 허망했다. 아내도 사업한다고 하다 아파트를 팔고 가격에 계속 올라 더 이상 집이 없는 것과 주식으로 돈 좀 벌어 보라고 했더니, 주식해서 조금 남은 돈도 다 날렸다고 늘 나를 원망한다. 정말 열심히 살아왔다. 조리장으로, 조리사로, 자부심도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아프고 병들어 힘 없어지니 더욱 힘들어진다. 직업이 돈만으로 좋고 나쁨이 결정되는 것이 아닌데 요즘 세대는 연봉으로 직업이 좋고 나쁨을 구분하고 돈을 못 벌면 결혼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아내가 뭘 살까 물어서 치킨하고 오징어튀김 사라고 했다.

에스컬레이터가 고장 나 아내만 올라가고 난 밖에서 기다린다고 했다.

아내한테 전화가 수차례 왔는데 받지 않았다고 화를 냈다.

밖에서 기다린다고 했잖아 했더니 언제 그랬냐고 하면서 쓸데도 없는데 전화도 안 받는다고 화를 냈다.

저녁에 푸드 코트에서 사 온 폭찹을 딸이 먹고 있어 나도 당연히 폭 찹을 먹을 줄 알았는데 나보고 고등어 먹을래 묻더니 싫다고 했는데도 고등어를 주면서 뇌경색 걸렸으면서 고기를 너무 좋아한다고 핀잔을 줬다.

고등어를 먹으면서 왠지 서운하고 차별받는 느낌이 들었다.

아내는 내 건강을 위해서라는데 다른 때는 식구들 먹을 걸 주면서 먹으려고 사 온 음식은 아들과 딸만 주니 서운하다고 했다. 그러니 어른이 돼서 참을성도 없다고 핀잔을 준다. 나이 먹을수록 조그만 일에도 서럽다.

올해 3월이면 결혼 30주년 진주혼식을 맞이한다. 결혼 25주년 은혼식도 그냥 지나갔다. 올해 30주년도 내 형편은 아주 안 좋다. 남남으로 만나 부부로 살아간다는 것은 나를 버리고 우리로 살아간다는 말이다.

내 삶의 전체를 놓고 볼 때 결혼 전과 결혼 후 기간이 얼추 비슷해졌다. 두 달 후에 생일이 다가오는 결혼기념일, 우리 아이들이 벌써 내가 결혼했던 그 나이가 됐다. 아직도 우리 아들은 베이비라는 아내와 덩치가 산만해서 아빠보다 머리 하나 키가 더 큰아들.







결혼 전 고등학교 졸업하고 객지 생활을 하다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고 한 번도 해외여행을 해보지도 비행기를 타 본 적도 없는 나는 이역만리 머나먼 캐나다에 정착하고 이제 한국에서 살던 날과 캐나다에서 산 날이 얼추 비슷해진 것이다.

그동안 나의 가족이었던 부모님과 형제들은 하늘나라로 또는 머나먼 타국 땅에 헤어져 기억 속 가족 마음속 가족으로만 남았다.

나의 부모님처럼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부모님들이 결혼을 결정하고 얼굴도 보지 못하고 결혼했던 결혼이 아닌, 좋아 죽을 정도로 좋아서 결혼했던 살다 보면 사랑만으로 결혼 생활을 할 수 없으며 결혼은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내 편이 아니더라도 남의 편은 되지 말아야 할 부부. 그놈의 정 때문에 의리 때문에 살아간다는 노년. 하지만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게 가능할까.

살아만 달라고, 살려만 달라고, 기도하던 날도 있었다. 쌍둥이와 아내 중에 한쪽을 선택하라던 인천 길 병원 산부인과 과장의 말이 생생하기만 한데 때로 티격태격하다 보면 그때의 애절하게 사랑했던 우리는 어디로 가고 남의 편인 배우자만 보인다.

몇 년 전 정신과 치료 상담 중에 나의 우울증과 불안 등의 증세가 뇌경색의 후유증과 더불어 직장에서만 이루어 진 것이 아니고 가정에서도 상당 부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의사는 당장 오늘이라도 가정에서 격리해야 한다고 했었다. 하지만 가정에서 행복하기만 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힘들 때 내 편이 되어 주고 상처에 소금을 뿌리지 않고 감싸 줄 수 있는 믿음만 있다면 아무리 티격태격한다 해도 부부 관계가 돌아오지 못할 루비콘강을 건너는 일은 없을 것이다

-------------------------------------------------------------------------------------------------

#작가의 변
처음 물었을 때는 안 간다고 하다가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 지팡이를 짚고 퍼블릭 마켓에 버스 타고 갔다. 갈 때는 왜 갔는지 몰랐는데 중국 물건 파는 곳에서 아내가 찾는 것은 부적이었다. 아니면 부적을 쓰는 종이라도 사려고 했던 것 같다. 아들이 직장에서도 학교에서도 따돌림을 당한다. 그것이 사주에 귀문살이 들어서 그렇다면서 아내는 부적이라도 해주면 나을까 싶었던 게다.

사실 며칠 전 아들과 나만 집에 있을 때 9월 말부터 지금까지 내가 신청한 상해 보험도, 실업 보험도 아무것도 받지 못한 상태다. 집에 돌아온 딸은 아빠가 수입이 없어 도와주겠다며 내가 실업 보험을 받으면 자기가 돕는 렌트비 한두 달 안 내면 안 되냐 했다고 아들한테 전했다. 렌트비와 공과금 등 최소한 3,000달러는 있어야 한 달을 생활하는데, 지금 몇 달째 나의 수입이 없다는 말에 아들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래서 내가 지금 학교를 그만두거나 파트 타임으로 바꾸기를 원하느냐, 묻길래 그것은 아니고 지금 우리 가족이 처한 상황을 말하는 거라고 했다. 또한 지난번에 엄마와 얘기하면서 화내며 노트북을 던진 것은 잘못했다고 말했더니, 나 어릴 때 아빠는 직접 나한테 물건을 던지기도 하고 나를 때리기도 했다고 했다. 웃으면서 그래서 이제 아픈 아빠보다 힘이 세니까 아빠를 때리기라도 하려고 하느냐 물으니, 아빠는 그랬는데 나는 그러면 안 되냐고 되물었다. 순간 힘없이 늘어진 이빨 빠진 사자가 가족의 무리에서도 쫓겨나던 다큐멘터리가 생각이 났다. 다음 날 아들이 딸한테 말하고 아내는 나에게 쓸데없는 말을 해서, 왜 아들 스트레스만 더 받게 하냐며 하등에 도움이 안 된다고 말했다.

아들은 범죄 수사학과 전문대를 졸업했다. 당시에 고등학교 수학 성적이 안 좋아 다른 학과를 갈 수 없을 듯해서 그곳에 가서 경찰이 되는 것은 어떻겠냐고 해서 들어갔다. 처음엔 열심히 했다. 하지만 봉사 활동으로 파출소에서 일하면서 차별을 느끼고는 경찰을 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같은 학교 회계학과 1학년에 다시 들어가 졸업했다. 그런데 회계사도 시작은 연봉이 얼마 안 된다고 몇 년 전부터 컴퓨터학과 BCIT를 가고 싶어 했지만, 고등학교 성적 때문에 들어갈 수 없자 고등학교에 다시 가서 수학 수업을 다시 듣기도 했다. 하지만 원하던 성적이 나오지 않았고, 회계학과 졸업 성적으로 원하던 컴퓨터 엔지니어학과를 들어갈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기초가 없이 게임만 하던 아들은 스파르타식 교육을 하는 학교를 힘들어했다. 그리고 다른 학생들과 함께하는 프로젝트가 많은데, 따돌린다고 했다.

그래서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들의 표정만 살펴야 했다. 그러다 아들이 다른 학생 부모들은 부자들이라 아들에게 한 달에 몇천 불씩 용돈을 준다는데 아빠는 왜 공부를 안 해서 주방에서 30년을 넘게 일해도 시간당 20불 좀 넘는 돈 받는 일을 하냐고 부모를 원망했다. 나도 대학에 간다고 했을 때 대학 보내 준다던 아버지가 농약 먹고 죽는다는 바람에 청주 직업훈련원에 들어가 기술을 배우고 기술직을 하려다 내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아 조리사가 되고, 나중에 직장에 일하면서 야간 경희대 조리과를 나왔다. 그럼에도 돈을 못 버는 직업이라고 아들에게 원망을 들으니 내가 살아 온 세월이 허망했다. 아내도 사업한다고 하다 아파트를 팔고 가격에 계속 올라 더 이상 집이 없는 것과 주식으로 돈 좀 벌어 보라고 했더니, 주식해서 조금 남은 돈도 다 날렸다고 늘 나를 원망한다. 정말 열심히 살아왔다. 조리장으로, 조리사로, 자부심도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아프고 병들어 힘 없어지니 더욱 힘들어진다. 직업이 돈만으로 좋고 나쁨이 결정되는 것이 아닌데 요즘 세대는 연봉으로 직업이 좋고 나쁨을 구분하고 돈을 못 벌면 결혼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작가의 변
처음 물었을 때는 안 간다고 하다가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 지팡이를 짚고 퍼블릭 마켓에 버스 타고 갔다. 갈 때는 왜 갔는지 몰랐는데 중국 물건 파는 곳에서 아내가 찾는 것은 부적이었다. 아니면 부적을 쓰는 종이라도 사려고 했던 것 같다. 아들이 직장에서도 학교에서도 따돌림을 당한다. 그것이 사주에 귀문살이 들어서 그렇다면서 아내는 부적이라도 해주면 나을까 싶었던 게다.

사실 며칠 전 아들과 나만 집에 있을 때 9월 말부터 지금까지 내가 신청한 상해 보험도, 실업 보험도 아무것도 받지 못한 상태다. 집에 돌아온 딸은 아빠가 수입이 없어 도와주겠다며 내가 실업 보험을 받으면 자기가 돕는 렌트비 한두 달 안 내면 안 되냐 했다고 아들한테 전했다. 렌트비와 공과금 등 최소한 3,000달러는 있어야 한 달을 생활하는데, 지금 몇 달째 나의 수입이 없다는 말에 아들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래서 내가 지금 학교를 그만두거나 파트 타임으로 바꾸기를 원하느냐, 묻길래 그것은 아니고 지금 우리 가족이 처한 상황을 말하는 거라고 했다. 또한 지난번에 엄마와 얘기하면서 화내며 노트북을 던진 것은 잘못했다고 말했더니, 나 어릴 때 아빠는 직접 나한테 물건을 던지기도 하고 나를 때리기도 했다고 했다. 웃으면서 그래서 이제 아픈 아빠보다 힘이 세니까 아빠를 때리기라도 하려고 하느냐 물으니, 아빠는 그랬는데 나는 그러면 안 되냐고 되물었다. 순간 힘없이 늘어진 이빨 빠진 사자가 가족의 무리에서도 쫓겨나던 다큐멘터리가 생각이 났다. 다음 날 아들이 딸한테 말하고 아내는 나에게 쓸데없는 말을 해서, 왜 아들 스트레스만 더 받게 하냐며 하등에 도움이 안 된다고 말했다.

아들은 범죄 수사학과 전문대를 졸업했다. 당시에 고등학교 수학 성적이 안 좋아 다른 학과를 갈 수 없을 듯해서 그곳에 가서 경찰이 되는 것은 어떻겠냐고 해서 들어갔다. 처음엔 열심히 했다. 하지만 봉사 활동으로 파출소에서 일하면서 차별을 느끼고는 경찰을 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같은 학교 회계학과 1학년에 다시 들어가 졸업했다. 그런데 회계사도 시작은 연봉이 얼마 안 된다고 몇 년 전부터 컴퓨터학과 BCIT를 가고 싶어 했지만, 고등학교 성적 때문에 들어갈 수 없자 고등학교에 다시 가서 수학 수업을 다시 듣기도 했다. 하지만 원하던 성적이 나오지 않았고, 회계학과 졸업 성적으로 원하던 컴퓨터 엔지니어학과를 들어갈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기초가 없이 게임만 하던 아들은 스파르타식 교육을 하는 학교를 힘들어했다. 그리고 다른 학생들과 함께하는 프로젝트가 많은데, 따돌린다고 했다.

그래서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들의 표정만 살펴야 했다. 그러다 아들이 다른 학생 부모들은 부자들이라 아들에게 한 달에 몇천 불씩 용돈을 준다는데 아빠는 왜 공부를 안 해서 주방에서 30년을 넘게 일해도 시간당 20불 좀 넘는 돈 받는 일을 하냐고 부모를 원망했다. 나도 대학에 간다고 했을 때 대학 보내 준다던 아버지가 농약 먹고 죽는다는 바람에 청주 직업훈련원에 들어가 기술을 배우고 기술직을 하려다 내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아 조리사가 되고, 나중에 직장에 일하면서 야간 경희대 조리과를 나왔다. 그럼에도 돈을 못 버는 직업이라고 아들에게 원망을 들으니 내가 살아 온 세월이 허망했다. 아내도 사업한다고 하다 아파트를 팔고 가격에 계속 올라 더 이상 집이 없는 것과 주식으로 돈 좀 벌어 보라고 했더니, 주식해서 조금 남은 돈도 다 날렸다고 늘 나를 원망한다. 정말 열심히 살아왔다. 조리장으로, 조리사로, 자부심도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아프고 병들어 힘 없어지니 더욱 힘들어진다. 직업이 돈만으로 좋고 나쁨이 결정되는 것이 아닌데 요즘 세대는 연봉으로 직업이 좋고 나쁨을 구분하고 돈을 못 벌면 결혼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아내가 뭘 살까 물어서 치킨하고 오징어튀김 사라고 했다.

에스컬레이터가 고장 나 아내만 올라가고 난 밖에서 기다린다고 했다.

아내한테 전화가 수차례 왔는데 받지 않았다고 화를 냈다.

밖에서 기다린다고 했잖아 했더니 언제 그랬냐고 하면서 쓸데도 없는데 전화도 안 받는다고 화를 냈다.

저녁에 푸드 코트에서 사 온 폭찹을 딸이 먹고 있어 나도 당연히 폭 찹을 먹을 줄 알았는데 나보고 고등어 먹을래 묻더니 싫다고 했는데도 고등어를 주면서 뇌경색 걸렸으면서 고기를 너무 좋아한다고 핀잔을 줬다.

고등어를 먹으면서 왠지 서운하고 차별받는 느낌이 들었다.

아내는 내 건강을 위해서라는데 다른 때는 식구들 먹을 걸 주면서 먹으려고 사 온 음식은 아들과 딸만 주니 서운하다고 했다. 그러니 어른이 돼서 참을성도 없다고 핀잔을 준다. 나이 먹을수록 조그만 일에도 서럽다.

올해 3월이면 결혼 30주년 진주혼식을 맞이한다. 결혼 25주년 은혼식도 그냥 지나갔다. 올해 30주년도 내 형편은 아주 안 좋다. 남남으로 만나 부부로 살아간다는 것은 나를 버리고 우리로 살아간다는 말이다.

내 삶의 전체를 놓고 볼 때 결혼 전과 결혼 후 기간이 얼추 비슷해졌다. 두 달 후에 생일이 다가오는 결혼기념일, 우리 아이들이 벌써 내가 결혼했던 그 나이가 됐다. 아직도 우리 아들은 베이비라는 아내와 덩치가 산만해서 아빠보다 머리 하나 키가 더 큰아들.







결혼 전 고등학교 졸업하고 객지 생활을 하다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고 한 번도 해외여행을 해보지도 비행기를 타 본 적도 없는 나는 이역만리 머나먼 캐나다에 정착하고 이제 한국에서 살던 날과 캐나다에서 산 날이 얼추 비슷해진 것이다.

그동안 나의 가족이었던 부모님과 형제들은 하늘나라로 또는 머나먼 타국 땅에 헤어져 기억 속 가족 마음속 가족으로만 남았다.

나의 부모님처럼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부모님들이 결혼을 결정하고 얼굴도 보지 못하고 결혼했던 결혼이 아닌, 좋아 죽을 정도로 좋아서 결혼했던 살다 보면 사랑만으로 결혼 생활을 할 수 없으며 결혼은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내 편이 아니더라도 남의 편은 되지 말아야 할 부부. 그놈의 정 때문에 의리 때문에 살아간다는 노년. 하지만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게 가능할까.

살아만 달라고, 살려만 달라고, 기도하던 날도 있었다. 쌍둥이와 아내 중에 한쪽을 선택하라던 인천 길 병원 산부인과 과장의 말이 생생하기만 한데 때로 티격태격하다 보면 그때의 애절하게 사랑했던 우리는 어디로 가고 남의 편인 배우자만 보인다.

몇 년 전 정신과 치료 상담 중에 나의 우울증과 불안 등의 증세가 뇌경색의 후유증과 더불어 직장에서만 이루어 진 것이 아니고 가정에서도 상당 부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의사는 당장 오늘이라도 가정에서 격리해야 한다고 했었다. 하지만 가정에서 행복하기만 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힘들 때 내 편이 되어 주고 상처에 소금을 뿌리지 않고 감싸 줄 수 있는 믿음만 있다면 아무리 티격태격한다 해도 부부 관계가 돌아오지 못할 루비콘강을 건너는 일은 없을 것이다

-------------------------------------------------------------------------------------------------

아내가 뭘 살까 물어서 치킨하고 오징어튀김 사라고 했다.

에스컬레이터가 고장 나 아내만 올라가고 난 밖에서 기다린다고 했다.

아내한테 전화가 수차례 왔는데 받지 않았다고 화를 냈다.

밖에서 기다린다고 했잖아 했더니 언제 그랬냐고 하면서 쓸데도 없는데 전화도 안 받는다고 화를 냈다.

저녁에 푸드 코트에서 사 온 폭찹을 딸이 먹고 있어 나도 당연히 폭 찹을 먹을 줄 알았는데 나보고 고등어 먹을래 묻더니 싫다고 했는데도 고등어를 주면서 뇌경색 걸렸으면서 고기를 너무 좋아한다고 핀잔을 줬다.

고등어를 먹으면서 왠지 서운하고 차별받는 느낌이 들었다.

아내는 내 건강을 위해서라는데 다른 때는 식구들 먹을 걸 주면서 먹으려고 사 온 음식은 아들과 딸만 주니 서운하다고 했다. 그러니 어른이 돼서 참을성도 없다고 핀잔을 준다. 나이 먹을수록 조그만 일에도 서럽다.

올해 3월이면 결혼 30주년 진주혼식을 맞이한다. 결혼 25주년 은혼식도 그냥 지나갔다. 올해 30주년도 내 형편은 아주 안 좋다. 남남으로 만나 부부로 살아간다는 것은 나를 버리고 우리로 살아간다는 말이다.

내 삶의 전체를 놓고 볼 때 결혼 전과 결혼 후 기간이 얼추 비슷해졌다. 두 달 후에 생일이 다가오는 결혼기념일, 우리 아이들이 벌써 내가 결혼했던 그 나이가 됐다. 아직도 우리 아들은 베이비라는 아내와 덩치가 산만해서 아빠보다 머리 하나 키가 더 큰아들.





#작가의 변
처음 물었을 때는 안 간다고 하다가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 지팡이를 짚고 퍼블릭 마켓에 버스 타고 갔다. 갈 때는 왜 갔는지 몰랐는데 중국 물건 파는 곳에서 아내가 찾는 것은 부적이었다. 아니면 부적을 쓰는 종이라도 사려고 했던 것 같다. 아들이 직장에서도 학교에서도 따돌림을 당한다. 그것이 사주에 귀문살이 들어서 그렇다면서 아내는 부적이라도 해주면 나을까 싶었던 게다.

사실 며칠 전 아들과 나만 집에 있을 때 9월 말부터 지금까지 내가 신청한 상해 보험도, 실업 보험도 아무것도 받지 못한 상태다. 집에 돌아온 딸은 아빠가 수입이 없어 도와주겠다며 내가 실업 보험을 받으면 자기가 돕는 렌트비 한두 달 안 내면 안 되냐 했다고 아들한테 전했다. 렌트비와 공과금 등 최소한 3,000달러는 있어야 한 달을 생활하는데, 지금 몇 달째 나의 수입이 없다는 말에 아들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래서 내가 지금 학교를 그만두거나 파트 타임으로 바꾸기를 원하느냐, 묻길래 그것은 아니고 지금 우리 가족이 처한 상황을 말하는 거라고 했다. 또한 지난번에 엄마와 얘기하면서 화내며 노트북을 던진 것은 잘못했다고 말했더니, 나 어릴 때 아빠는 직접 나한테 물건을 던지기도 하고 나를 때리기도 했다고 했다. 웃으면서 그래서 이제 아픈 아빠보다 힘이 세니까 아빠를 때리기라도 하려고 하느냐 물으니, 아빠는 그랬는데 나는 그러면 안 되냐고 되물었다. 순간 힘없이 늘어진 이빨 빠진 사자가 가족의 무리에서도 쫓겨나던 다큐멘터리가 생각이 났다. 다음 날 아들이 딸한테 말하고 아내는 나에게 쓸데없는 말을 해서, 왜 아들 스트레스만 더 받게 하냐며 하등에 도움이 안 된다고 말했다.

아들은 범죄 수사학과 전문대를 졸업했다. 당시에 고등학교 수학 성적이 안 좋아 다른 학과를 갈 수 없을 듯해서 그곳에 가서 경찰이 되는 것은 어떻겠냐고 해서 들어갔다. 처음엔 열심히 했다. 하지만 봉사 활동으로 파출소에서 일하면서 차별을 느끼고는 경찰을 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같은 학교 회계학과 1학년에 다시 들어가 졸업했다. 그런데 회계사도 시작은 연봉이 얼마 안 된다고 몇 년 전부터 컴퓨터학과 BCIT를 가고 싶어 했지만, 고등학교 성적 때문에 들어갈 수 없자 고등학교에 다시 가서 수학 수업을 다시 듣기도 했다. 하지만 원하던 성적이 나오지 않았고, 회계학과 졸업 성적으로 원하던 컴퓨터 엔지니어학과를 들어갈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기초가 없이 게임만 하던 아들은 스파르타식 교육을 하는 학교를 힘들어했다. 그리고 다른 학생들과 함께하는 프로젝트가 많은데, 따돌린다고 했다.

그래서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들의 표정만 살펴야 했다. 그러다 아들이 다른 학생 부모들은 부자들이라 아들에게 한 달에 몇천 불씩 용돈을 준다는데 아빠는 왜 공부를 안 해서 주방에서 30년을 넘게 일해도 시간당 20불 좀 넘는 돈 받는 일을 하냐고 부모를 원망했다. 나도 대학에 간다고 했을 때 대학 보내 준다던 아버지가 농약 먹고 죽는다는 바람에 청주 직업훈련원에 들어가 기술을 배우고 기술직을 하려다 내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아 조리사가 되고, 나중에 직장에 일하면서 야간 경희대 조리과를 나왔다. 그럼에도 돈을 못 버는 직업이라고 아들에게 원망을 들으니 내가 살아 온 세월이 허망했다. 아내도 사업한다고 하다 아파트를 팔고 가격에 계속 올라 더 이상 집이 없는 것과 주식으로 돈 좀 벌어 보라고 했더니, 주식해서 조금 남은 돈도 다 날렸다고 늘 나를 원망한다. 정말 열심히 살아왔다. 조리장으로, 조리사로, 자부심도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아프고 병들어 힘 없어지니 더욱 힘들어진다. 직업이 돈만으로 좋고 나쁨이 결정되는 것이 아닌데 요즘 세대는 연봉으로 직업이 좋고 나쁨을 구분하고 돈을 못 벌면 결혼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아내가 뭘 살까 물어서 치킨하고 오징어튀김 사라고 했다.

에스컬레이터가 고장 나 아내만 올라가고 난 밖에서 기다린다고 했다.

아내한테 전화가 수차례 왔는데 받지 않았다고 화를 냈다.

밖에서 기다린다고 했잖아 했더니 언제 그랬냐고 하면서 쓸데도 없는데 전화도 안 받는다고 화를 냈다.

저녁에 푸드 코트에서 사 온 폭찹을 딸이 먹고 있어 나도 당연히 폭 찹을 먹을 줄 알았는데 나보고 고등어 먹을래 묻더니 싫다고 했는데도 고등어를 주면서 뇌경색 걸렸으면서 고기를 너무 좋아한다고 핀잔을 줬다.

고등어를 먹으면서 왠지 서운하고 차별받는 느낌이 들었다.

아내는 내 건강을 위해서라는데 다른 때는 식구들 먹을 걸 주면서 먹으려고 사 온 음식은 아들과 딸만 주니 서운하다고 했다. 그러니 어른이 돼서 참을성도 없다고 핀잔을 준다. 나이 먹을수록 조그만 일에도 서럽다.

올해 3월이면 결혼 30주년 진주혼식을 맞이한다. 결혼 25주년 은혼식도 그냥 지나갔다. 올해 30주년도 내 형편은 아주 안 좋다. 남남으로 만나 부부로 살아간다는 것은 나를 버리고 우리로 살아간다는 말이다.

내 삶의 전체를 놓고 볼 때 결혼 전과 결혼 후 기간이 얼추 비슷해졌다. 두 달 후에 생일이 다가오는 결혼기념일, 우리 아이들이 벌써 내가 결혼했던 그 나이가 됐다. 아직도 우리 아들은 베이비라는 아내와 덩치가 산만해서 아빠보다 머리 하나 키가 더 큰아들.







결혼 전 고등학교 졸업하고 객지 생활을 하다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고 한 번도 해외여행을 해보지도 비행기를 타 본 적도 없는 나는 이역만리 머나먼 캐나다에 정착하고 이제 한국에서 살던 날과 캐나다에서 산 날이 얼추 비슷해진 것이다.

그동안 나의 가족이었던 부모님과 형제들은 하늘나라로 또는 머나먼 타국 땅에 헤어져 기억 속 가족 마음속 가족으로만 남았다.

나의 부모님처럼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부모님들이 결혼을 결정하고 얼굴도 보지 못하고 결혼했던 결혼이 아닌, 좋아 죽을 정도로 좋아서 결혼했던 살다 보면 사랑만으로 결혼 생활을 할 수 없으며 결혼은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내 편이 아니더라도 남의 편은 되지 말아야 할 부부. 그놈의 정 때문에 의리 때문에 살아간다는 노년. 하지만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게 가능할까.

살아만 달라고, 살려만 달라고, 기도하던 날도 있었다. 쌍둥이와 아내 중에 한쪽을 선택하라던 인천 길 병원 산부인과 과장의 말이 생생하기만 한데 때로 티격태격하다 보면 그때의 애절하게 사랑했던 우리는 어디로 가고 남의 편인 배우자만 보인다.

몇 년 전 정신과 치료 상담 중에 나의 우울증과 불안 등의 증세가 뇌경색의 후유증과 더불어 직장에서만 이루어 진 것이 아니고 가정에서도 상당 부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의사는 당장 오늘이라도 가정에서 격리해야 한다고 했었다. 하지만 가정에서 행복하기만 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힘들 때 내 편이 되어 주고 상처에 소금을 뿌리지 않고 감싸 줄 수 있는 믿음만 있다면 아무리 티격태격한다 해도 부부 관계가 돌아오지 못할 루비콘강을 건너는 일은 없을 것이다

-------------------------------------------------------------------------------------------------

결혼 전 고등학교 졸업하고 객지 생활을 하다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고 한 번도 해외여행을 해보지도 비행기를 타 본 적도 없는 나는 이역만리 머나먼 캐나다에 정착하고 이제 한국에서 살던 날과 캐나다에서 산 날이 얼추 비슷해진 것이다.

그동안 나의 가족이었던 부모님과 형제들은 하늘나라로 또는 머나먼 타국 땅에 헤어져 기억 속 가족 마음속 가족으로만 남았다.

나의 부모님처럼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부모님들이 결혼을 결정하고 얼굴도 보지 못하고 결혼했던 결혼이 아닌, 좋아 죽을 정도로 좋아서 결혼했던 살다 보면 사랑만으로 결혼 생활을 할 수 없으며 결혼은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내 편이 아니더라도 남의 편은 되지 말아야 할 부부. 그놈의 정 때문에 의리 때문에 살아간다는 노년. 하지만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게 가능할까.

살아만 달라고, 살려만 달라고, 기도하던 날도 있었다. 쌍둥이와 아내 중에 한쪽을 선택하라던 인천 길 병원 산부인과 과장의 말이 생생하기만 한데 때로 티격태격하다 보면 그때의 애절하게 사랑했던 우리는 어디로 가고 남의 편인 배우자만 보인다.

몇 년 전 정신과 치료 상담 중에 나의 우울증과 불안 등의 증세가 뇌경색의 후유증과 더불어 직장에서만 이루어 진 것이 아니고 가정에서도 상당 부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의사는 당장 오늘이라도 가정에서 격리해야 한다고 했었다. 하지만 가정에서 행복하기만 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힘들 때 내 편이 되어 주고 상처에 소금을 뿌리지 않고 감싸 줄 수 있는 믿음만 있다면 아무리 티격태격한다 해도 부부 관계가 돌아오지 못할 루비콘강을 건너는 일은 없을 것이다

-------------------------------------------------------------------------------------------------





#작가의 변
처음 물었을 때는 안 간다고 하다가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 지팡이를 짚고 퍼블릭 마켓에 버스 타고 갔다. 갈 때는 왜 갔는지 몰랐는데 중국 물건 파는 곳에서 아내가 찾는 것은 부적이었다. 아니면 부적을 쓰는 종이라도 사려고 했던 것 같다. 아들이 직장에서도 학교에서도 따돌림을 당한다. 그것이 사주에 귀문살이 들어서 그렇다면서 아내는 부적이라도 해주면 나을까 싶었던 게다.

사실 며칠 전 아들과 나만 집에 있을 때 9월 말부터 지금까지 내가 신청한 상해 보험도, 실업 보험도 아무것도 받지 못한 상태다. 집에 돌아온 딸은 아빠가 수입이 없어 도와주겠다며 내가 실업 보험을 받으면 자기가 돕는 렌트비 한두 달 안 내면 안 되냐 했다고 아들한테 전했다. 렌트비와 공과금 등 최소한 3,000달러는 있어야 한 달을 생활하는데, 지금 몇 달째 나의 수입이 없다는 말에 아들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래서 내가 지금 학교를 그만두거나 파트 타임으로 바꾸기를 원하느냐, 묻길래 그것은 아니고 지금 우리 가족이 처한 상황을 말하는 거라고 했다. 또한 지난번에 엄마와 얘기하면서 화내며 노트북을 던진 것은 잘못했다고 말했더니, 나 어릴 때 아빠는 직접 나한테 물건을 던지기도 하고 나를 때리기도 했다고 했다. 웃으면서 그래서 이제 아픈 아빠보다 힘이 세니까 아빠를 때리기라도 하려고 하느냐 물으니, 아빠는 그랬는데 나는 그러면 안 되냐고 되물었다. 순간 힘없이 늘어진 이빨 빠진 사자가 가족의 무리에서도 쫓겨나던 다큐멘터리가 생각이 났다. 다음 날 아들이 딸한테 말하고 아내는 나에게 쓸데없는 말을 해서, 왜 아들 스트레스만 더 받게 하냐며 하등에 도움이 안 된다고 말했다.

아들은 범죄 수사학과 전문대를 졸업했다. 당시에 고등학교 수학 성적이 안 좋아 다른 학과를 갈 수 없을 듯해서 그곳에 가서 경찰이 되는 것은 어떻겠냐고 해서 들어갔다. 처음엔 열심히 했다. 하지만 봉사 활동으로 파출소에서 일하면서 차별을 느끼고는 경찰을 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같은 학교 회계학과 1학년에 다시 들어가 졸업했다. 그런데 회계사도 시작은 연봉이 얼마 안 된다고 몇 년 전부터 컴퓨터학과 BCIT를 가고 싶어 했지만, 고등학교 성적 때문에 들어갈 수 없자 고등학교에 다시 가서 수학 수업을 다시 듣기도 했다. 하지만 원하던 성적이 나오지 않았고, 회계학과 졸업 성적으로 원하던 컴퓨터 엔지니어학과를 들어갈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기초가 없이 게임만 하던 아들은 스파르타식 교육을 하는 학교를 힘들어했다. 그리고 다른 학생들과 함께하는 프로젝트가 많은데, 따돌린다고 했다.

그래서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들의 표정만 살펴야 했다. 그러다 아들이 다른 학생 부모들은 부자들이라 아들에게 한 달에 몇천 불씩 용돈을 준다는데 아빠는 왜 공부를 안 해서 주방에서 30년을 넘게 일해도 시간당 20불 좀 넘는 돈 받는 일을 하냐고 부모를 원망했다. 나도 대학에 간다고 했을 때 대학 보내 준다던 아버지가 농약 먹고 죽는다는 바람에 청주 직업훈련원에 들어가 기술을 배우고 기술직을 하려다 내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아 조리사가 되고, 나중에 직장에 일하면서 야간 경희대 조리과를 나왔다. 그럼에도 돈을 못 버는 직업이라고 아들에게 원망을 들으니 내가 살아 온 세월이 허망했다. 아내도 사업한다고 하다 아파트를 팔고 가격에 계속 올라 더 이상 집이 없는 것과 주식으로 돈 좀 벌어 보라고 했더니, 주식해서 조금 남은 돈도 다 날렸다고 늘 나를 원망한다. 정말 열심히 살아왔다. 조리장으로, 조리사로, 자부심도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아프고 병들어 힘 없어지니 더욱 힘들어진다. 직업이 돈만으로 좋고 나쁨이 결정되는 것이 아닌데 요즘 세대는 연봉으로 직업이 좋고 나쁨을 구분하고 돈을 못 벌면 결혼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아내가 뭘 살까 물어서 치킨하고 오징어튀김 사라고 했다.

에스컬레이터가 고장 나 아내만 올라가고 난 밖에서 기다린다고 했다.

아내한테 전화가 수차례 왔는데 받지 않았다고 화를 냈다.

밖에서 기다린다고 했잖아 했더니 언제 그랬냐고 하면서 쓸데도 없는데 전화도 안 받는다고 화를 냈다.

저녁에 푸드 코트에서 사 온 폭찹을 딸이 먹고 있어 나도 당연히 폭 찹을 먹을 줄 알았는데 나보고 고등어 먹을래 묻더니 싫다고 했는데도 고등어를 주면서 뇌경색 걸렸으면서 고기를 너무 좋아한다고 핀잔을 줬다.

고등어를 먹으면서 왠지 서운하고 차별받는 느낌이 들었다.

아내는 내 건강을 위해서라는데 다른 때는 식구들 먹을 걸 주면서 먹으려고 사 온 음식은 아들과 딸만 주니 서운하다고 했다. 그러니 어른이 돼서 참을성도 없다고 핀잔을 준다. 나이 먹을수록 조그만 일에도 서럽다.

올해 3월이면 결혼 30주년 진주혼식을 맞이한다. 결혼 25주년 은혼식도 그냥 지나갔다. 올해 30주년도 내 형편은 아주 안 좋다. 남남으로 만나 부부로 살아간다는 것은 나를 버리고 우리로 살아간다는 말이다.

내 삶의 전체를 놓고 볼 때 결혼 전과 결혼 후 기간이 얼추 비슷해졌다. 두 달 후에 생일이 다가오는 결혼기념일, 우리 아이들이 벌써 내가 결혼했던 그 나이가 됐다. 아직도 우리 아들은 베이비라는 아내와 덩치가 산만해서 아빠보다 머리 하나 키가 더 큰아들.







결혼 전 고등학교 졸업하고 객지 생활을 하다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고 한 번도 해외여행을 해보지도 비행기를 타 본 적도 없는 나는 이역만리 머나먼 캐나다에 정착하고 이제 한국에서 살던 날과 캐나다에서 산 날이 얼추 비슷해진 것이다.

그동안 나의 가족이었던 부모님과 형제들은 하늘나라로 또는 머나먼 타국 땅에 헤어져 기억 속 가족 마음속 가족으로만 남았다.

나의 부모님처럼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부모님들이 결혼을 결정하고 얼굴도 보지 못하고 결혼했던 결혼이 아닌, 좋아 죽을 정도로 좋아서 결혼했던 살다 보면 사랑만으로 결혼 생활을 할 수 없으며 결혼은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내 편이 아니더라도 남의 편은 되지 말아야 할 부부. 그놈의 정 때문에 의리 때문에 살아간다는 노년. 하지만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게 가능할까.

살아만 달라고, 살려만 달라고, 기도하던 날도 있었다. 쌍둥이와 아내 중에 한쪽을 선택하라던 인천 길 병원 산부인과 과장의 말이 생생하기만 한데 때로 티격태격하다 보면 그때의 애절하게 사랑했던 우리는 어디로 가고 남의 편인 배우자만 보인다.

몇 년 전 정신과 치료 상담 중에 나의 우울증과 불안 등의 증세가 뇌경색의 후유증과 더불어 직장에서만 이루어 진 것이 아니고 가정에서도 상당 부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의사는 당장 오늘이라도 가정에서 격리해야 한다고 했었다. 하지만 가정에서 행복하기만 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힘들 때 내 편이 되어 주고 상처에 소금을 뿌리지 않고 감싸 줄 수 있는 믿음만 있다면 아무리 티격태격한다 해도 부부 관계가 돌아오지 못할 루비콘강을 건너는 일은 없을 것이다

-------------------------------------------------------------------------------------------------

#전재민(Terry)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이 기사에 대한 반론 및 기사 제보 mytrea70@gmail.com]

"이 기사를 응원합니다." 불교닷컴 자발적 유료화 신청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아자씨 2023-02-07 23:56:26
송가인님. 화이팅
엄마 말쓰미. 키가 안맞는다고. 언쟁 비슷끼라 ㆍㆍㆍ
ㅎㅎㅎ

엄 마. 말이. 맞아유

건강히시고. 좋은노래 부탁혀유

히트ㄱㆍㄱ도. 있어야. 엄니 한테. 물어봐유
송가인이어라. ㆍㆍㆍ

  •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11길 16 대형빌딩 4층
  • 대표전화 : (02) 734-7336
  • 팩스 : (02) 6280-2551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석만
  • 대표 : 이석만
  • 사업자번호 : 101-11-47022
  • 법인명 : 불교닷컴
  • 제호 : 불교닷컴
  • 등록번호 : 서울, 아05082
  • 등록일 : 2018-04-05
  • 발행일 : 2006-01-21
  • 발행인 : 이석만
  • 편집인 : 이석만
  • 불교닷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불교닷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asan2580@gmail.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