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석사 등 열 곳에 사찰 세워 화엄교학 널리 펼쳐
부석사 등 열 곳에 사찰 세워 화엄교학 널리 펼쳐
  • 김경집
  • 승인 2023.01.18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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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부석사 전경. 사진 산사세계유산등재추진위, 문화재청 제공.



의상의 출가와 구법

의상은 진평왕 47년(625) 경주에서 김한신(金韓信)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나면서 영특하였고 자라면서 호걸다움이 있었다. 성인이 되자 세상과 인연을 끊고 진리의 세계에 들어가고자 하였다. 나이 29세에 경주 황복사(皇福寺)에서 출가하였다.

수행 시절 의상의 도력은 남들보다 뛰어났다. 탑을 돌 때 계단으로 오르지 않고 허공을 밟고 올라갔다. 함께 도는 무리에서 세 자나 떨어져 돌았다. 의상이 무리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세상 사람이 이를 보면 반드시 괴이하다고 하므로 가르칠 것은 못 된다.” 하였다.

당나라 땅에 교종(敎宗)이 왕성함을 듣고 원효와 함께 요동으로 갔다가 변방의 순라군에게 잡혀 수십 일 동안 갇혔다가 돌아왔다. 661년 당나라로 가는 배를 타고 중국으로 갔다. 처음 양주(楊洲)에 머물렀다. 이곳을 다스리는 유지인(劉至仁)의 배려로 관아 안에 머물렀는데 공양이 지극하였다. 얼마 있지 않아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로 가서 지엄(智儼)을 만났다.

지엄은 전날 밤 꿈에 큰 나무 하나가 해동에서 나서 그 가지와 잎이 널리 퍼져 중국에까지 와서 덮고, 그 위에는 봉황의 둥지가 있는데, 올라가서 보니 마니보주(摩尼寶珠)가 하나 있어 광명이 멀리까지 비쳤다. 꿈을 깨고는 놀랍고 이상히 여겨 청소하고 기다렸더니 의상이 바로 왔다. 특별한 예의로 맞아 조용히 말하기를, “나의 어제 꿈은 그대가 나에게 올 징조였다”고 하고 제자가 됨을 허락하였다. 의상은 지엄이 문하에서 화엄의 미묘한 뜻을 연찬하였다. 지엄 역시 학문을 상의할 영특한 자질을 만난 것을 기뻐하였다.

당나라에서 불교를 공부하는 의상의 신통력은 남달랐다. 이웃에 있는 도선 율사가 재를 지낼 때면 매번 하늘에서 음식을 보내왔다. 하루는 도선이 의상을 초청하여 공양하려는데 때가 지나도 하늘의 공양이 오지 않았다. 의상이 빈 바리때로 돌아간 후 천사(天使)가 다다랐다.

율사가 “오늘은 어째서 늦었는가?”라고 물으니, 천사가 말하기를, “온 골짜기에 신병(神兵)이 가로막고 있어 들어 올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이에 율사는 의상이 신의 호위를 받고 있으며, 그의 도력이 자기보다 뛰어남을 인정하였다. 도선은 공양물을 그대로 남겨두었다가 다음날 지엄과 의상 두 대사를 청하여 그 사유를 자세히 말하였다.

그러자 의상이 도선에게 말하기를, “스님은 이미 천제(天帝)의 존경을 받고 계시니 일찍이 듣건대 제석궁(帝釋宮)에는 부처님의 40개 이 가운데 한 어금니가 있다고 합니다. 이것을 인간 세상에 내려 보내어 복되게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였다. 율사가 그 뜻을 천제에게 전하자 7일 뒤 보내 주었고, 의상은 이것을 대궐에 모셨다.



부산 범어사 소장 국보 《삼국유사》 권4~5 ‘의상전교’. 문화재청 제공, 불교저널 자료사진.



의상의 귀국과 활동

의상이 당나라에서 불법을 연찬할 때는 고구려와 대치할 때였다. 668년 고구려를 점령한 당나라는 신라마저 병합하려고 하였다. 이를 인지한 문무왕이 군사를 일으키자 당나라 고종은 김인문을 불러 말하기를, “너희들이 우리 군사를 청해 고구려를 멸하고도 우리를 해치려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하였다. 그를 옥에 가두고 군사 50만 명을 조련하여 설방(薛邦)을 장수로 삼아 신라를 치려고 하였다.

김인문은 의상을 만나 그 사실을 알리고 신라로 전할 것을 부탁하였다. 스승 지엄을 대신해서 중국 화엄종을 이끌던 의상은 그 자리를 버리고 귀국하였다. 문무왕을 만나 그 사실을 아뢰니 여러 신하를 모아 놓고 방어책을 물었다. 각간 김천존이 아뢰기를, “근래에 명랑법사가 용궁에 들어가서 비법을 전수해왔으니 그를 불러 물어 보십시오.”하였다.

왕궁에 들어온 명랑이 아뢰기를, “낭산 남쪽 신유림이 있으니, 그곳에 사천왕사를 세우고 도량을 개설함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이때 정주(貞州)에서 사자가 와서 보고하기를, “당나라 군사들이 수없이 우리 국경에 이르러 바다 위를 순회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왕이 명랑을 불러서 말하기를, “일이 이미 급박하게 되었으니 어찌하면 좋겠소?” 하였다.

명랑은 채색 비단으로 임시로 절을 짓고, 풀로 오방 신상을 만들었다. 유가명승(瑜伽名僧) 12명과 명랑이 문두루비밀법(文豆婁秘密法)을 설하자 풍랑이 크게 일어 당나라 배가 모두 침몰하였다. 그 후 절을 고쳐 짓고 사천왕사라고 하였다.

신라의 위기를 막은 의상은 강원도로 갔다. 관음보살의 진신이 머문다는 해변의 굴 안을 보고 낙산(洛山)이라 이름 하였다. 그가 심신을 가지런히 하고 기도하였다. 7일째 새벽 좌구(座具)를 물 위에 띄웠더니 용천(龍天)의 팔부(八部) 시종이 굴속으로 인도하였다. 공중을 향하여 예배를 드리니 수정 염주 한 꾸러미를 내어주므로 의상이 받아 물러났다. 동해의 용 역시 여의보주 한 알을 바치므로 법사가 받들고 나왔다. 다시 7일을 재계하고 나서 곧 관음의 진용을 보았다. 관음이 말하기를, “자리 위의 산정에 한 쌍의 대나무가 솟아날 것이니, 그 땅에 불전을 지음이 마땅하리라” 하였다. 법사가 그 말을 듣고 굴 밖으로 나오니 과연 대나무가 땅에서 솟아 나왔다. 이에 금당을 짓고 관음상을 모시니 원만한 모습과 고운 자질은 하늘이 낸 듯하였다. 그 절 이름을 낙산사라 하고 의상은 받은 두 구슬을 성전에 모셔두고 떠났다.

의상은 문무왕의 정치에도 올곧은 직언을 많이 하였다. 문무왕은 삼한을 통일하기 위해 많은 전쟁과 산성 축성으로 백성들을 어렵게 하였다. 대업을 이룬 후에도 경주 외곽에 성을 쌓고자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의상은 글을 보내 아뢰기를, “왕의 정교(政敎)가 밝으면, 비록 풀 언덕에 땅 금을 그어서 성으로 삼아도 백성이 감히 넘지 못하고, 가히 재앙을 씻어서 복이 될 것이나, 정교가 밝지 못하면, 비록 장성이 있더라도 재해를 없앨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왕은 이에 역사를 중지하였다.



영주 부석사 부석. 사진 Eugene Kim(https://flic.kr/p/8RjxAm) / CC BY 2.0
영주 부석사 전경. 사진 산사세계유산등재추진위, 문화재청 제공.

의상의 출가와 구법

의상은 진평왕 47년(625) 경주에서 김한신(金韓信)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나면서 영특하였고 자라면서 호걸다움이 있었다. 성인이 되자 세상과 인연을 끊고 진리의 세계에 들어가고자 하였다. 나이 29세에 경주 황복사(皇福寺)에서 출가하였다.

수행 시절 의상의 도력은 남들보다 뛰어났다. 탑을 돌 때 계단으로 오르지 않고 허공을 밟고 올라갔다. 함께 도는 무리에서 세 자나 떨어져 돌았다. 의상이 무리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세상 사람이 이를 보면 반드시 괴이하다고 하므로 가르칠 것은 못 된다.” 하였다.

당나라 땅에 교종(敎宗)이 왕성함을 듣고 원효와 함께 요동으로 갔다가 변방의 순라군에게 잡혀 수십 일 동안 갇혔다가 돌아왔다. 661년 당나라로 가는 배를 타고 중국으로 갔다. 처음 양주(楊洲)에 머물렀다. 이곳을 다스리는 유지인(劉至仁)의 배려로 관아 안에 머물렀는데 공양이 지극하였다. 얼마 있지 않아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로 가서 지엄(智儼)을 만났다.

지엄은 전날 밤 꿈에 큰 나무 하나가 해동에서 나서 그 가지와 잎이 널리 퍼져 중국에까지 와서 덮고, 그 위에는 봉황의 둥지가 있는데, 올라가서 보니 마니보주(摩尼寶珠)가 하나 있어 광명이 멀리까지 비쳤다. 꿈을 깨고는 놀랍고 이상히 여겨 청소하고 기다렸더니 의상이 바로 왔다. 특별한 예의로 맞아 조용히 말하기를, “나의 어제 꿈은 그대가 나에게 올 징조였다”고 하고 제자가 됨을 허락하였다. 의상은 지엄이 문하에서 화엄의 미묘한 뜻을 연찬하였다. 지엄 역시 학문을 상의할 영특한 자질을 만난 것을 기뻐하였다.

당나라에서 불교를 공부하는 의상의 신통력은 남달랐다. 이웃에 있는 도선 율사가 재를 지낼 때면 매번 하늘에서 음식을 보내왔다. 하루는 도선이 의상을 초청하여 공양하려는데 때가 지나도 하늘의 공양이 오지 않았다. 의상이 빈 바리때로 돌아간 후 천사(天使)가 다다랐다.

율사가 “오늘은 어째서 늦었는가?”라고 물으니, 천사가 말하기를, “온 골짜기에 신병(神兵)이 가로막고 있어 들어 올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이에 율사는 의상이 신의 호위를 받고 있으며, 그의 도력이 자기보다 뛰어남을 인정하였다. 도선은 공양물을 그대로 남겨두었다가 다음날 지엄과 의상 두 대사를 청하여 그 사유를 자세히 말하였다.

그러자 의상이 도선에게 말하기를, “스님은 이미 천제(天帝)의 존경을 받고 계시니 일찍이 듣건대 제석궁(帝釋宮)에는 부처님의 40개 이 가운데 한 어금니가 있다고 합니다. 이것을 인간 세상에 내려 보내어 복되게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였다. 율사가 그 뜻을 천제에게 전하자 7일 뒤 보내 주었고, 의상은 이것을 대궐에 모셨다.

부산 범어사 소장 국보 《삼국유사》 권4~5 ‘의상전교’. 문화재청 제공, 불교저널 자료사진.
부산 범어사 소장 국보 《삼국유사》 권4~5 ‘의상전교’. 문화재청 제공, 불교저널 자료사진.

의상의 귀국과 활동

의상이 당나라에서 불법을 연찬할 때는 고구려와 대치할 때였다. 668년 고구려를 점령한 당나라는 신라마저 병합하려고 하였다. 이를 인지한 문무왕이 군사를 일으키자 당나라 고종은 김인문을 불러 말하기를, “너희들이 우리 군사를 청해 고구려를 멸하고도 우리를 해치려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하였다. 그를 옥에 가두고 군사 50만 명을 조련하여 설방(薛邦)을 장수로 삼아 신라를 치려고 하였다.

김인문은 의상을 만나 그 사실을 알리고 신라로 전할 것을 부탁하였다. 스승 지엄을 대신해서 중국 화엄종을 이끌던 의상은 그 자리를 버리고 귀국하였다. 문무왕을 만나 그 사실을 아뢰니 여러 신하를 모아 놓고 방어책을 물었다. 각간 김천존이 아뢰기를, “근래에 명랑법사가 용궁에 들어가서 비법을 전수해왔으니 그를 불러 물어 보십시오.”하였다.

왕궁에 들어온 명랑이 아뢰기를, “낭산 남쪽 신유림이 있으니, 그곳에 사천왕사를 세우고 도량을 개설함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이때 정주(貞州)에서 사자가 와서 보고하기를, “당나라 군사들이 수없이 우리 국경에 이르러 바다 위를 순회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왕이 명랑을 불러서 말하기를, “일이 이미 급박하게 되었으니 어찌하면 좋겠소?” 하였다.

명랑은 채색 비단으로 임시로 절을 짓고, 풀로 오방 신상을 만들었다. 유가명승(瑜伽名僧) 12명과 명랑이 문두루비밀법(文豆婁秘密法)을 설하자 풍랑이 크게 일어 당나라 배가 모두 침몰하였다. 그 후 절을 고쳐 짓고 사천왕사라고 하였다.

신라의 위기를 막은 의상은 강원도로 갔다. 관음보살의 진신이 머문다는 해변의 굴 안을 보고 낙산(洛山)이라 이름 하였다. 그가 심신을 가지런히 하고 기도하였다. 7일째 새벽 좌구(座具)를 물 위에 띄웠더니 용천(龍天)의 팔부(八部) 시종이 굴속으로 인도하였다. 공중을 향하여 예배를 드리니 수정 염주 한 꾸러미를 내어주므로 의상이 받아 물러났다. 동해의 용 역시 여의보주 한 알을 바치므로 법사가 받들고 나왔다. 다시 7일을 재계하고 나서 곧 관음의 진용을 보았다. 관음이 말하기를, “자리 위의 산정에 한 쌍의 대나무가 솟아날 것이니, 그 땅에 불전을 지음이 마땅하리라” 하였다. 법사가 그 말을 듣고 굴 밖으로 나오니 과연 대나무가 땅에서 솟아 나왔다. 이에 금당을 짓고 관음상을 모시니 원만한 모습과 고운 자질은 하늘이 낸 듯하였다. 그 절 이름을 낙산사라 하고 의상은 받은 두 구슬을 성전에 모셔두고 떠났다.

의상은 문무왕의 정치에도 올곧은 직언을 많이 하였다. 문무왕은 삼한을 통일하기 위해 많은 전쟁과 산성 축성으로 백성들을 어렵게 하였다. 대업을 이룬 후에도 경주 외곽에 성을 쌓고자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의상은 글을 보내 아뢰기를, “왕의 정교(政敎)가 밝으면, 비록 풀 언덕에 땅 금을 그어서 성으로 삼아도 백성이 감히 넘지 못하고, 가히 재앙을 씻어서 복이 될 것이나, 정교가 밝지 못하면, 비록 장성이 있더라도 재해를 없앨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왕은 이에 역사를 중지하였다.

영주 부석사 부석. 사진 Eugene Kim(https://flic.kr/p/8RjxAm) / CC BY 2.0

부석사 창건과 선묘 낭자

의상은 676년 조정의 뜻을 받들어 사찰을 창건하고 화엄의 이치를 펼치려 하였다. 태백산 부석사를 세운 곳에 이르자 땅이 신령하고 산이 수려하니 참된 법륜을 돌릴 만한 곳임을 알았다. 그러나 그곳에는 이미 잡된 무리 오백 명이나 모여 있었다.

그때 의상을 항상 따라다니며 지키던 선묘룡(善妙龍)은 대사의 생각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등주(登州) 해안에 있는 신도의 딸이었다. 의상을 보자 연모하는 마음이 일어나 고백하였다. 그러나 마음이 돌과 같은 의상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 앞에서 대원을 발하여 말하길‚ “내세에 태어나 스님께 귀명하고 대승을 배우고 익혀 대사를 성취하리다.” 하였다.

의상이 급히 귀국할 때 신도 집에 다시 들른 후 상선을 탔다. 선묘가 뒤늦게 해안가로 달려갔으나 배는 이미 멀리 가고 있었다. 그녀가 맹세하기를‚ ‘이 몸이 큰 용으로 변하여 저 배의 선체와 노를 지키는 날개가 되어 대사가 무사히 본국에 돌아가 법을 전할 수 있게 하리라.’ 하였다. 그런 후 바다에 뛰어들자 마침내 용이 되어 혹은 약동하고 혹은 굽이치면서 배를 안전하게 이끌었다.

신라에서도 항상 의상을 보호하던 선묘용이 허공에서 대변신을 일으켜 커다란 바위로 변했다. 넓이와 깊이가 1리쯤 되는 바위가 되어 허공에서 막 떨어질 듯 말 듯 하니 잡된 무리들은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절을 창건하고 그런 연유에 따라 부석사라 이름 하였다. 의상은 이곳에서 화엄경을 설하기 시작하였다. 겨울에는 햇빛이 있는 낮에‚ 여름에는 서늘한 저녁에 강설하였다. 사람을 부르지 않아도 저절로 찾아왔다. 국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전답과 노비를 하사하자 대사가 아뢰기를 ‚ “내 법은 지위의 높고 낮음을 평등하게 보고‚ 신분의 귀하고 천함을 없이하여 한가지로 합니다. 《열반경》에는 여덟 가지 부정한 재물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데 내 어찌 전답을 소유하고 노비를 소유하겠습니까. 빈도는 법계를 집으로 삼고, 발우를 가지고 밭을 갈아 익기를 기다립니다. 법신의 혜명‚ 즉 지혜로운 생명이 이 몸을 빌려서 살고 있습니다.” 하였다.

자신이 말한 바대로 의상은 의복과 병(甁)과 발우(鉢盂)의 세 가지 것 외에 아무것도 몸에 지니지 않았다. 대개 제자들이 도움을 청하면 서두르지 않고‚ 조용히 가라앉는 때를 기다린 후에 깨우쳐 주었다. 의문 나는 점을 술술 풀어서 조금도 찌꺼기가 남지 않게 하였다.

의상은 태백산 부석사를 포함하여 열 곳에 절을 세워 화엄 교학을 전했다. 원주의 비마라사, 가야산 해인사, 비슬산 옥천사, 금정산 범어사, 지리산 화엄사 등이다. 또한 <법계도>를 짓고 간략한 주석을 붙여 일승의 중요한 핵심을 나타냈다.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는데 그 가운데 오진(悟眞), 지통(智通), 표훈(表訓), 진정(眞定), 진장(眞藏), 도융(道融), 양원(良圓), 상원(相源), 능인(能仁), 의적(義寂)이 10 대덕이다. 흥륜사 금당에 신라 10성을 모실 때 의상은 아도, 염촉, 혜숙, 안함과 동쪽에, 서쪽에는 표훈, 사파, 원효, 혜공, 자장이 모셔졌다.

김경집 |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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