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94. 새해
[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94. 새해
  • 전재민 시인
  • 승인 2023.01.03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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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도 오늘도 같은 날이지만
어제는 지난해 오늘은 새해
시계는 같은 동그라미를 그리며 돌지만
다른 동그라미처럼 재깍재깍 소리를 낸다

살아가는 일이
살아 내는 일이
때론 힘들고 힘들어도
그래도 살아 내야 한다고
빛나는 날이 아니어도
따뜻한 날이 아니어도

춥고 어두운 날에도 희망이란 촛불을 켜고
한 발 한 발 내디디듯이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한다고
건강 하라고 행복 하라고 덕담을 주고받아도
밥은 먹었냐 물어 주는 이 있어 행복한 날이라고.

 







#작가의 변
사실 새해라는 것도 우리 인간이 만들어 놓은 마음의 함정일 수 있다. 어제도 오늘도 같은데 새해라고 말하고 아주 많이 다른 새해엔 또 다른 희망의 풍선을 수억만 개 항아의 모래만큼이나 하늘에 띄워 놓고 새해를 바라보고 소원을 빌듯이 마음엔 희망의 연을 띄우는 것인지 모른다. 어제와 오늘이라고 나누어 놓았지만 자정엔 잠을 자던지 잠자기 전이라도 내일 이라기보단 오늘이기를 바란다. 아직 잠자리에 잠들지 않았으므로.

어린 시절 아버지와 나는 정치적 성향이 달라서 늘 언쟁이 있었다. 아버지는 누런 공화당 당원증을 아주 자랑스러워하셨다. 그리고 가운데 국회의원 명함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새겨져 있고 주변으로 깨알 같은 날짜들이 박혀 있는 12달이 빙 둘러 있는 벽에 붙이는 국회의원 달력을 벽에 붙이고 살았다. 그 흙벽돌로 만든 배불뚝이 벽엔 누런 꽃무늬 벽지가 무늬가 맞지 않아 아마추어가 한 일을 뽐내면서 벽을 채우고 있거나 때론 신문지로 초벌을 한 채로 붙어있기도 했다. 서생원 쥐들의 놀이터 천장에는 철사를 얼기설기 엮어서 만든 천장엔 밀가루 풀을 쒀 신문을 한 장 한 장 바르고 벽지를 발라 마무리했는데 수수로 만든 빗자루로 잘 쓸어 줘야 벽지가 제대로 붙는데 그렇지 않으면 전체가 떨어지고는 했다. 애벌 바른 신문지가 마르고 나서 벽지를 바르는 것도 중요한 것이었다.

마당을 쓸 때는 댑싸리로 만든 빗자루로 늘 마당을 쓸었는데 그러고 보니 지금은 모두 플라스틱 빗자루다.

세월의 나이테처럼 가끔은 지직거리는 오래된 레코드판의 음악처럼 우리가 살아왔던 세월이 그 세월의 틈새에 끼어 누렇게 바래가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갈 것만 같다. 아버지는 일제 시대인 1922년에 태어나셨다. 그러니까 살아계셨다면 올해 100세인 것이 맞지만 아주 오래전에 이미 이 세상을 떠나 나비처럼 훨훨 날아가셨다. 그러니 나와는 세대 차이가 아주 많이 났다. 아버지가 낳아서 살아 온 시대와 내가 낳아서 살아 온 시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아버지는 시골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농사지을 땅이 없었다. 그리고 일본 징용으로 끌려가서 해외인 일본 고베에 다녀온 것이 해외를 다녀온 것의 전부였다. 술만 먹으면 일본 노래를 부르고 일본 징용에서 있었던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해 주셨다. 일본 여자가 꼬셨는데 만약 그곳에서 주저앉았다면 너를 일본에서 만날 수도 있었을 거라고 말이다. 일본에 가기 전 아버지는 이미 어머니와 결혼을 한 상태였다. 아버지가 일본 징용에서 돌아오고 동네 반장 일을 하면서 모곡(반장 일에 대한 동네 사람들의 품삸)으로 산을 개간하는 것으로 받아 사흘 갈이 밭을 마련했다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조부와 백부, 그리고 작은아버지까지 모시고 대가족이 살아가는 동안 아버지 것은 없었다. 형들이 자꾸만 죽으니 어디 가서 물어보게 되었고 어느 날 사립문을 부수고 북쪽으로 가라고 해서 남의 트럭을 빌려 타고 무작정 제천으로 와서 남의 행랑에 살면서 그 집 일을 해주면서 머슴살이했다고 한다. 그 상황이 너무도 억울해서 어머니는 시부모가 사는 시댁에 가서 소라도 한 마리를 끌고 오려고 했는데 시어머니가 설거지물을 끼얹으면서 우리는 어떻게 살라고 그걸 끌고 가느냐고 했다고 평생 시간이 있을 때마다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 시댁의 농지는 부모를 모신다는 이유로 작은아버지에게 상속됐다.

명절마다 전날에 작은아버지와 작은어머니가 왔다. 때론 고기 한 근 사서 들고 때론 제사에 쓸 과자라며 색소든 과자들과 산자 정도를 사 왔지만 이미 어머니가 대부분 준비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제사나 차례상은 전날부터 밤늦게까지 어머니가 준비하고 아버지와 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는 어머니가 부친 부침개에 술을 먹는 것이 명절의 일상이었다.

그런 아버지는 늦둥이로 둔 아들이 나와 정치적 성향이 달라 늘 말다툼 아닌 말다툼을 했다. 아무리 말을 해도 그냥 고집으로 독재 정당을 찍는 것이 얼마나 싫었던지. 아무리 농사를 지어도 가을에 추수하면 농협에서 낸 빚을 갚기도 늘 벅찼다. 큰돈을 만지기 위해서는 소를 키워 소라도 내다 팔아야 큰돈을 만질 수 있고 농사를 짓는 데도 필요하니 집에 소는 늘 있었고 소 꼴을 베고 소똥을 치우는 등의 일은 나도 해야 하는 일이었다. 돈 되는 농작물이라고 고추 농사와 배추 농사는 늘 아버지가 짓던 농작물이다. 나는 오이 농장이나 참외 수박 같은 농작물을 하는 다른 집처럼 했으면 좋지 않을까 했지만, 아버지는 늘 같은 농작물을 지었고 농협 빚은 늘 갚아도 갚아도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그곳에 있었다.







나는 아버지와 다른 삶을 살겠다고 시골을 뛰쳐나와 서울에서 월세방을 전전하고 날마다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다 해외로 이민을 왔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아버지의 발자국을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힘든 삶을 살아 온 듯 하다. 직업이 농부가 아닌 조리사였고 한국이 아닌 캐나다였지만 나의 삶도 늘 여유가 없이 쫓기듯 살아 온 삶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이 살아 내는 일이 아무리 힘들고 힘겨운 순간순간이 이어진다고 해도 희망을 놓지 않는 이유는 삶에서 희망을 빼면 삶은 쭉정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새해도 오늘과 별반 다르지 않겠지만 달이 차면 기울고 다시 차오르듯 우리의 삶도 희망의 사과나무에 날마다 물을 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 세상에 삶은 어찌 보면 꿈 같은 날 들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름다운 꿈을 꾸길 원하면서 희망찬 새해를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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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도 오늘도 같은 날이지만
어제는 지난해 오늘은 새해
시계는 같은 동그라미를 그리며 돌지만
다른 동그라미처럼 재깍재깍 소리를 낸다

살아가는 일이
살아 내는 일이
때론 힘들고 힘들어도
그래도 살아 내야 한다고
빛나는 날이 아니어도
따뜻한 날이 아니어도

춥고 어두운 날에도 희망이란 촛불을 켜고
한 발 한 발 내디디듯이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한다고
건강 하라고 행복 하라고 덕담을 주고받아도
밥은 먹었냐 물어 주는 이 있어 행복한 날이라고.

 





 

어제도 오늘도 같은 날이지만
어제는 지난해 오늘은 새해
시계는 같은 동그라미를 그리며 돌지만
다른 동그라미처럼 재깍재깍 소리를 낸다

살아가는 일이
살아 내는 일이
때론 힘들고 힘들어도
그래도 살아 내야 한다고
빛나는 날이 아니어도
따뜻한 날이 아니어도

춥고 어두운 날에도 희망이란 촛불을 켜고
한 발 한 발 내디디듯이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한다고
건강 하라고 행복 하라고 덕담을 주고받아도
밥은 먹었냐 물어 주는 이 있어 행복한 날이라고.

 







#작가의 변
사실 새해라는 것도 우리 인간이 만들어 놓은 마음의 함정일 수 있다. 어제도 오늘도 같은데 새해라고 말하고 아주 많이 다른 새해엔 또 다른 희망의 풍선을 수억만 개 항아의 모래만큼이나 하늘에 띄워 놓고 새해를 바라보고 소원을 빌듯이 마음엔 희망의 연을 띄우는 것인지 모른다. 어제와 오늘이라고 나누어 놓았지만 자정엔 잠을 자던지 잠자기 전이라도 내일 이라기보단 오늘이기를 바란다. 아직 잠자리에 잠들지 않았으므로.

어린 시절 아버지와 나는 정치적 성향이 달라서 늘 언쟁이 있었다. 아버지는 누런 공화당 당원증을 아주 자랑스러워하셨다. 그리고 가운데 국회의원 명함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새겨져 있고 주변으로 깨알 같은 날짜들이 박혀 있는 12달이 빙 둘러 있는 벽에 붙이는 국회의원 달력을 벽에 붙이고 살았다. 그 흙벽돌로 만든 배불뚝이 벽엔 누런 꽃무늬 벽지가 무늬가 맞지 않아 아마추어가 한 일을 뽐내면서 벽을 채우고 있거나 때론 신문지로 초벌을 한 채로 붙어있기도 했다. 서생원 쥐들의 놀이터 천장에는 철사를 얼기설기 엮어서 만든 천장엔 밀가루 풀을 쒀 신문을 한 장 한 장 바르고 벽지를 발라 마무리했는데 수수로 만든 빗자루로 잘 쓸어 줘야 벽지가 제대로 붙는데 그렇지 않으면 전체가 떨어지고는 했다. 애벌 바른 신문지가 마르고 나서 벽지를 바르는 것도 중요한 것이었다.

마당을 쓸 때는 댑싸리로 만든 빗자루로 늘 마당을 쓸었는데 그러고 보니 지금은 모두 플라스틱 빗자루다.

세월의 나이테처럼 가끔은 지직거리는 오래된 레코드판의 음악처럼 우리가 살아왔던 세월이 그 세월의 틈새에 끼어 누렇게 바래가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갈 것만 같다. 아버지는 일제 시대인 1922년에 태어나셨다. 그러니까 살아계셨다면 올해 100세인 것이 맞지만 아주 오래전에 이미 이 세상을 떠나 나비처럼 훨훨 날아가셨다. 그러니 나와는 세대 차이가 아주 많이 났다. 아버지가 낳아서 살아 온 시대와 내가 낳아서 살아 온 시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아버지는 시골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농사지을 땅이 없었다. 그리고 일본 징용으로 끌려가서 해외인 일본 고베에 다녀온 것이 해외를 다녀온 것의 전부였다. 술만 먹으면 일본 노래를 부르고 일본 징용에서 있었던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해 주셨다. 일본 여자가 꼬셨는데 만약 그곳에서 주저앉았다면 너를 일본에서 만날 수도 있었을 거라고 말이다. 일본에 가기 전 아버지는 이미 어머니와 결혼을 한 상태였다. 아버지가 일본 징용에서 돌아오고 동네 반장 일을 하면서 모곡(반장 일에 대한 동네 사람들의 품삸)으로 산을 개간하는 것으로 받아 사흘 갈이 밭을 마련했다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조부와 백부, 그리고 작은아버지까지 모시고 대가족이 살아가는 동안 아버지 것은 없었다. 형들이 자꾸만 죽으니 어디 가서 물어보게 되었고 어느 날 사립문을 부수고 북쪽으로 가라고 해서 남의 트럭을 빌려 타고 무작정 제천으로 와서 남의 행랑에 살면서 그 집 일을 해주면서 머슴살이했다고 한다. 그 상황이 너무도 억울해서 어머니는 시부모가 사는 시댁에 가서 소라도 한 마리를 끌고 오려고 했는데 시어머니가 설거지물을 끼얹으면서 우리는 어떻게 살라고 그걸 끌고 가느냐고 했다고 평생 시간이 있을 때마다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 시댁의 농지는 부모를 모신다는 이유로 작은아버지에게 상속됐다.

명절마다 전날에 작은아버지와 작은어머니가 왔다. 때론 고기 한 근 사서 들고 때론 제사에 쓸 과자라며 색소든 과자들과 산자 정도를 사 왔지만 이미 어머니가 대부분 준비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제사나 차례상은 전날부터 밤늦게까지 어머니가 준비하고 아버지와 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는 어머니가 부친 부침개에 술을 먹는 것이 명절의 일상이었다.

그런 아버지는 늦둥이로 둔 아들이 나와 정치적 성향이 달라 늘 말다툼 아닌 말다툼을 했다. 아무리 말을 해도 그냥 고집으로 독재 정당을 찍는 것이 얼마나 싫었던지. 아무리 농사를 지어도 가을에 추수하면 농협에서 낸 빚을 갚기도 늘 벅찼다. 큰돈을 만지기 위해서는 소를 키워 소라도 내다 팔아야 큰돈을 만질 수 있고 농사를 짓는 데도 필요하니 집에 소는 늘 있었고 소 꼴을 베고 소똥을 치우는 등의 일은 나도 해야 하는 일이었다. 돈 되는 농작물이라고 고추 농사와 배추 농사는 늘 아버지가 짓던 농작물이다. 나는 오이 농장이나 참외 수박 같은 농작물을 하는 다른 집처럼 했으면 좋지 않을까 했지만, 아버지는 늘 같은 농작물을 지었고 농협 빚은 늘 갚아도 갚아도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그곳에 있었다.







나는 아버지와 다른 삶을 살겠다고 시골을 뛰쳐나와 서울에서 월세방을 전전하고 날마다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다 해외로 이민을 왔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아버지의 발자국을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힘든 삶을 살아 온 듯 하다. 직업이 농부가 아닌 조리사였고 한국이 아닌 캐나다였지만 나의 삶도 늘 여유가 없이 쫓기듯 살아 온 삶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이 살아 내는 일이 아무리 힘들고 힘겨운 순간순간이 이어진다고 해도 희망을 놓지 않는 이유는 삶에서 희망을 빼면 삶은 쭉정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새해도 오늘과 별반 다르지 않겠지만 달이 차면 기울고 다시 차오르듯 우리의 삶도 희망의 사과나무에 날마다 물을 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 세상에 삶은 어찌 보면 꿈 같은 날 들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름다운 꿈을 꾸길 원하면서 희망찬 새해를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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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변
사실 새해라는 것도 우리 인간이 만들어 놓은 마음의 함정일 수 있다. 어제도 오늘도 같은데 새해라고 말하고 아주 많이 다른 새해엔 또 다른 희망의 풍선을 수억만 개 항아의 모래만큼이나 하늘에 띄워 놓고 새해를 바라보고 소원을 빌듯이 마음엔 희망의 연을 띄우는 것인지 모른다. 어제와 오늘이라고 나누어 놓았지만 자정엔 잠을 자던지 잠자기 전이라도 내일 이라기보단 오늘이기를 바란다. 아직 잠자리에 잠들지 않았으므로.

어린 시절 아버지와 나는 정치적 성향이 달라서 늘 언쟁이 있었다. 아버지는 누런 공화당 당원증을 아주 자랑스러워하셨다. 그리고 가운데 국회의원 명함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새겨져 있고 주변으로 깨알 같은 날짜들이 박혀 있는 12달이 빙 둘러 있는 벽에 붙이는 국회의원 달력을 벽에 붙이고 살았다. 그 흙벽돌로 만든 배불뚝이 벽엔 누런 꽃무늬 벽지가 무늬가 맞지 않아 아마추어가 한 일을 뽐내면서 벽을 채우고 있거나 때론 신문지로 초벌을 한 채로 붙어있기도 했다. 서생원 쥐들의 놀이터 천장에는 철사를 얼기설기 엮어서 만든 천장엔 밀가루 풀을 쒀 신문을 한 장 한 장 바르고 벽지를 발라 마무리했는데 수수로 만든 빗자루로 잘 쓸어 줘야 벽지가 제대로 붙는데 그렇지 않으면 전체가 떨어지고는 했다. 애벌 바른 신문지가 마르고 나서 벽지를 바르는 것도 중요한 것이었다.

마당을 쓸 때는 댑싸리로 만든 빗자루로 늘 마당을 쓸었는데 그러고 보니 지금은 모두 플라스틱 빗자루다.

세월의 나이테처럼 가끔은 지직거리는 오래된 레코드판의 음악처럼 우리가 살아왔던 세월이 그 세월의 틈새에 끼어 누렇게 바래가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갈 것만 같다. 아버지는 일제 시대인 1922년에 태어나셨다. 그러니까 살아계셨다면 올해 100세인 것이 맞지만 아주 오래전에 이미 이 세상을 떠나 나비처럼 훨훨 날아가셨다. 그러니 나와는 세대 차이가 아주 많이 났다. 아버지가 낳아서 살아 온 시대와 내가 낳아서 살아 온 시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아버지는 시골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농사지을 땅이 없었다. 그리고 일본 징용으로 끌려가서 해외인 일본 고베에 다녀온 것이 해외를 다녀온 것의 전부였다. 술만 먹으면 일본 노래를 부르고 일본 징용에서 있었던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해 주셨다. 일본 여자가 꼬셨는데 만약 그곳에서 주저앉았다면 너를 일본에서 만날 수도 있었을 거라고 말이다. 일본에 가기 전 아버지는 이미 어머니와 결혼을 한 상태였다. 아버지가 일본 징용에서 돌아오고 동네 반장 일을 하면서 모곡(반장 일에 대한 동네 사람들의 품삸)으로 산을 개간하는 것으로 받아 사흘 갈이 밭을 마련했다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조부와 백부, 그리고 작은아버지까지 모시고 대가족이 살아가는 동안 아버지 것은 없었다. 형들이 자꾸만 죽으니 어디 가서 물어보게 되었고 어느 날 사립문을 부수고 북쪽으로 가라고 해서 남의 트럭을 빌려 타고 무작정 제천으로 와서 남의 행랑에 살면서 그 집 일을 해주면서 머슴살이했다고 한다. 그 상황이 너무도 억울해서 어머니는 시부모가 사는 시댁에 가서 소라도 한 마리를 끌고 오려고 했는데 시어머니가 설거지물을 끼얹으면서 우리는 어떻게 살라고 그걸 끌고 가느냐고 했다고 평생 시간이 있을 때마다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 시댁의 농지는 부모를 모신다는 이유로 작은아버지에게 상속됐다.

명절마다 전날에 작은아버지와 작은어머니가 왔다. 때론 고기 한 근 사서 들고 때론 제사에 쓸 과자라며 색소든 과자들과 산자 정도를 사 왔지만 이미 어머니가 대부분 준비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제사나 차례상은 전날부터 밤늦게까지 어머니가 준비하고 아버지와 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는 어머니가 부친 부침개에 술을 먹는 것이 명절의 일상이었다.

그런 아버지는 늦둥이로 둔 아들이 나와 정치적 성향이 달라 늘 말다툼 아닌 말다툼을 했다. 아무리 말을 해도 그냥 고집으로 독재 정당을 찍는 것이 얼마나 싫었던지. 아무리 농사를 지어도 가을에 추수하면 농협에서 낸 빚을 갚기도 늘 벅찼다. 큰돈을 만지기 위해서는 소를 키워 소라도 내다 팔아야 큰돈을 만질 수 있고 농사를 짓는 데도 필요하니 집에 소는 늘 있었고 소 꼴을 베고 소똥을 치우는 등의 일은 나도 해야 하는 일이었다. 돈 되는 농작물이라고 고추 농사와 배추 농사는 늘 아버지가 짓던 농작물이다. 나는 오이 농장이나 참외 수박 같은 농작물을 하는 다른 집처럼 했으면 좋지 않을까 했지만, 아버지는 늘 같은 농작물을 지었고 농협 빚은 늘 갚아도 갚아도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그곳에 있었다.





 

어제도 오늘도 같은 날이지만
어제는 지난해 오늘은 새해
시계는 같은 동그라미를 그리며 돌지만
다른 동그라미처럼 재깍재깍 소리를 낸다

살아가는 일이
살아 내는 일이
때론 힘들고 힘들어도
그래도 살아 내야 한다고
빛나는 날이 아니어도
따뜻한 날이 아니어도

춥고 어두운 날에도 희망이란 촛불을 켜고
한 발 한 발 내디디듯이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한다고
건강 하라고 행복 하라고 덕담을 주고받아도
밥은 먹었냐 물어 주는 이 있어 행복한 날이라고.

 







#작가의 변
사실 새해라는 것도 우리 인간이 만들어 놓은 마음의 함정일 수 있다. 어제도 오늘도 같은데 새해라고 말하고 아주 많이 다른 새해엔 또 다른 희망의 풍선을 수억만 개 항아의 모래만큼이나 하늘에 띄워 놓고 새해를 바라보고 소원을 빌듯이 마음엔 희망의 연을 띄우는 것인지 모른다. 어제와 오늘이라고 나누어 놓았지만 자정엔 잠을 자던지 잠자기 전이라도 내일 이라기보단 오늘이기를 바란다. 아직 잠자리에 잠들지 않았으므로.

어린 시절 아버지와 나는 정치적 성향이 달라서 늘 언쟁이 있었다. 아버지는 누런 공화당 당원증을 아주 자랑스러워하셨다. 그리고 가운데 국회의원 명함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새겨져 있고 주변으로 깨알 같은 날짜들이 박혀 있는 12달이 빙 둘러 있는 벽에 붙이는 국회의원 달력을 벽에 붙이고 살았다. 그 흙벽돌로 만든 배불뚝이 벽엔 누런 꽃무늬 벽지가 무늬가 맞지 않아 아마추어가 한 일을 뽐내면서 벽을 채우고 있거나 때론 신문지로 초벌을 한 채로 붙어있기도 했다. 서생원 쥐들의 놀이터 천장에는 철사를 얼기설기 엮어서 만든 천장엔 밀가루 풀을 쒀 신문을 한 장 한 장 바르고 벽지를 발라 마무리했는데 수수로 만든 빗자루로 잘 쓸어 줘야 벽지가 제대로 붙는데 그렇지 않으면 전체가 떨어지고는 했다. 애벌 바른 신문지가 마르고 나서 벽지를 바르는 것도 중요한 것이었다.

마당을 쓸 때는 댑싸리로 만든 빗자루로 늘 마당을 쓸었는데 그러고 보니 지금은 모두 플라스틱 빗자루다.

세월의 나이테처럼 가끔은 지직거리는 오래된 레코드판의 음악처럼 우리가 살아왔던 세월이 그 세월의 틈새에 끼어 누렇게 바래가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갈 것만 같다. 아버지는 일제 시대인 1922년에 태어나셨다. 그러니까 살아계셨다면 올해 100세인 것이 맞지만 아주 오래전에 이미 이 세상을 떠나 나비처럼 훨훨 날아가셨다. 그러니 나와는 세대 차이가 아주 많이 났다. 아버지가 낳아서 살아 온 시대와 내가 낳아서 살아 온 시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아버지는 시골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농사지을 땅이 없었다. 그리고 일본 징용으로 끌려가서 해외인 일본 고베에 다녀온 것이 해외를 다녀온 것의 전부였다. 술만 먹으면 일본 노래를 부르고 일본 징용에서 있었던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해 주셨다. 일본 여자가 꼬셨는데 만약 그곳에서 주저앉았다면 너를 일본에서 만날 수도 있었을 거라고 말이다. 일본에 가기 전 아버지는 이미 어머니와 결혼을 한 상태였다. 아버지가 일본 징용에서 돌아오고 동네 반장 일을 하면서 모곡(반장 일에 대한 동네 사람들의 품삸)으로 산을 개간하는 것으로 받아 사흘 갈이 밭을 마련했다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조부와 백부, 그리고 작은아버지까지 모시고 대가족이 살아가는 동안 아버지 것은 없었다. 형들이 자꾸만 죽으니 어디 가서 물어보게 되었고 어느 날 사립문을 부수고 북쪽으로 가라고 해서 남의 트럭을 빌려 타고 무작정 제천으로 와서 남의 행랑에 살면서 그 집 일을 해주면서 머슴살이했다고 한다. 그 상황이 너무도 억울해서 어머니는 시부모가 사는 시댁에 가서 소라도 한 마리를 끌고 오려고 했는데 시어머니가 설거지물을 끼얹으면서 우리는 어떻게 살라고 그걸 끌고 가느냐고 했다고 평생 시간이 있을 때마다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 시댁의 농지는 부모를 모신다는 이유로 작은아버지에게 상속됐다.

명절마다 전날에 작은아버지와 작은어머니가 왔다. 때론 고기 한 근 사서 들고 때론 제사에 쓸 과자라며 색소든 과자들과 산자 정도를 사 왔지만 이미 어머니가 대부분 준비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제사나 차례상은 전날부터 밤늦게까지 어머니가 준비하고 아버지와 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는 어머니가 부친 부침개에 술을 먹는 것이 명절의 일상이었다.

그런 아버지는 늦둥이로 둔 아들이 나와 정치적 성향이 달라 늘 말다툼 아닌 말다툼을 했다. 아무리 말을 해도 그냥 고집으로 독재 정당을 찍는 것이 얼마나 싫었던지. 아무리 농사를 지어도 가을에 추수하면 농협에서 낸 빚을 갚기도 늘 벅찼다. 큰돈을 만지기 위해서는 소를 키워 소라도 내다 팔아야 큰돈을 만질 수 있고 농사를 짓는 데도 필요하니 집에 소는 늘 있었고 소 꼴을 베고 소똥을 치우는 등의 일은 나도 해야 하는 일이었다. 돈 되는 농작물이라고 고추 농사와 배추 농사는 늘 아버지가 짓던 농작물이다. 나는 오이 농장이나 참외 수박 같은 농작물을 하는 다른 집처럼 했으면 좋지 않을까 했지만, 아버지는 늘 같은 농작물을 지었고 농협 빚은 늘 갚아도 갚아도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그곳에 있었다.







나는 아버지와 다른 삶을 살겠다고 시골을 뛰쳐나와 서울에서 월세방을 전전하고 날마다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다 해외로 이민을 왔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아버지의 발자국을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힘든 삶을 살아 온 듯 하다. 직업이 농부가 아닌 조리사였고 한국이 아닌 캐나다였지만 나의 삶도 늘 여유가 없이 쫓기듯 살아 온 삶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이 살아 내는 일이 아무리 힘들고 힘겨운 순간순간이 이어진다고 해도 희망을 놓지 않는 이유는 삶에서 희망을 빼면 삶은 쭉정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새해도 오늘과 별반 다르지 않겠지만 달이 차면 기울고 다시 차오르듯 우리의 삶도 희망의 사과나무에 날마다 물을 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 세상에 삶은 어찌 보면 꿈 같은 날 들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름다운 꿈을 꾸길 원하면서 희망찬 새해를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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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버지와 다른 삶을 살겠다고 시골을 뛰쳐나와 서울에서 월세방을 전전하고 날마다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다 해외로 이민을 왔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아버지의 발자국을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힘든 삶을 살아 온 듯 하다. 직업이 농부가 아닌 조리사였고 한국이 아닌 캐나다였지만 나의 삶도 늘 여유가 없이 쫓기듯 살아 온 삶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이 살아 내는 일이 아무리 힘들고 힘겨운 순간순간이 이어진다고 해도 희망을 놓지 않는 이유는 삶에서 희망을 빼면 삶은 쭉정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새해도 오늘과 별반 다르지 않겠지만 달이 차면 기울고 다시 차오르듯 우리의 삶도 희망의 사과나무에 날마다 물을 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 세상에 삶은 어찌 보면 꿈 같은 날 들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름다운 꿈을 꾸길 원하면서 희망찬 새해를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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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도 오늘도 같은 날이지만
어제는 지난해 오늘은 새해
시계는 같은 동그라미를 그리며 돌지만
다른 동그라미처럼 재깍재깍 소리를 낸다

살아가는 일이
살아 내는 일이
때론 힘들고 힘들어도
그래도 살아 내야 한다고
빛나는 날이 아니어도
따뜻한 날이 아니어도

춥고 어두운 날에도 희망이란 촛불을 켜고
한 발 한 발 내디디듯이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한다고
건강 하라고 행복 하라고 덕담을 주고받아도
밥은 먹었냐 물어 주는 이 있어 행복한 날이라고.

 







#작가의 변
사실 새해라는 것도 우리 인간이 만들어 놓은 마음의 함정일 수 있다. 어제도 오늘도 같은데 새해라고 말하고 아주 많이 다른 새해엔 또 다른 희망의 풍선을 수억만 개 항아의 모래만큼이나 하늘에 띄워 놓고 새해를 바라보고 소원을 빌듯이 마음엔 희망의 연을 띄우는 것인지 모른다. 어제와 오늘이라고 나누어 놓았지만 자정엔 잠을 자던지 잠자기 전이라도 내일 이라기보단 오늘이기를 바란다. 아직 잠자리에 잠들지 않았으므로.

어린 시절 아버지와 나는 정치적 성향이 달라서 늘 언쟁이 있었다. 아버지는 누런 공화당 당원증을 아주 자랑스러워하셨다. 그리고 가운데 국회의원 명함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새겨져 있고 주변으로 깨알 같은 날짜들이 박혀 있는 12달이 빙 둘러 있는 벽에 붙이는 국회의원 달력을 벽에 붙이고 살았다. 그 흙벽돌로 만든 배불뚝이 벽엔 누런 꽃무늬 벽지가 무늬가 맞지 않아 아마추어가 한 일을 뽐내면서 벽을 채우고 있거나 때론 신문지로 초벌을 한 채로 붙어있기도 했다. 서생원 쥐들의 놀이터 천장에는 철사를 얼기설기 엮어서 만든 천장엔 밀가루 풀을 쒀 신문을 한 장 한 장 바르고 벽지를 발라 마무리했는데 수수로 만든 빗자루로 잘 쓸어 줘야 벽지가 제대로 붙는데 그렇지 않으면 전체가 떨어지고는 했다. 애벌 바른 신문지가 마르고 나서 벽지를 바르는 것도 중요한 것이었다.

마당을 쓸 때는 댑싸리로 만든 빗자루로 늘 마당을 쓸었는데 그러고 보니 지금은 모두 플라스틱 빗자루다.

세월의 나이테처럼 가끔은 지직거리는 오래된 레코드판의 음악처럼 우리가 살아왔던 세월이 그 세월의 틈새에 끼어 누렇게 바래가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갈 것만 같다. 아버지는 일제 시대인 1922년에 태어나셨다. 그러니까 살아계셨다면 올해 100세인 것이 맞지만 아주 오래전에 이미 이 세상을 떠나 나비처럼 훨훨 날아가셨다. 그러니 나와는 세대 차이가 아주 많이 났다. 아버지가 낳아서 살아 온 시대와 내가 낳아서 살아 온 시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아버지는 시골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농사지을 땅이 없었다. 그리고 일본 징용으로 끌려가서 해외인 일본 고베에 다녀온 것이 해외를 다녀온 것의 전부였다. 술만 먹으면 일본 노래를 부르고 일본 징용에서 있었던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해 주셨다. 일본 여자가 꼬셨는데 만약 그곳에서 주저앉았다면 너를 일본에서 만날 수도 있었을 거라고 말이다. 일본에 가기 전 아버지는 이미 어머니와 결혼을 한 상태였다. 아버지가 일본 징용에서 돌아오고 동네 반장 일을 하면서 모곡(반장 일에 대한 동네 사람들의 품삸)으로 산을 개간하는 것으로 받아 사흘 갈이 밭을 마련했다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조부와 백부, 그리고 작은아버지까지 모시고 대가족이 살아가는 동안 아버지 것은 없었다. 형들이 자꾸만 죽으니 어디 가서 물어보게 되었고 어느 날 사립문을 부수고 북쪽으로 가라고 해서 남의 트럭을 빌려 타고 무작정 제천으로 와서 남의 행랑에 살면서 그 집 일을 해주면서 머슴살이했다고 한다. 그 상황이 너무도 억울해서 어머니는 시부모가 사는 시댁에 가서 소라도 한 마리를 끌고 오려고 했는데 시어머니가 설거지물을 끼얹으면서 우리는 어떻게 살라고 그걸 끌고 가느냐고 했다고 평생 시간이 있을 때마다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 시댁의 농지는 부모를 모신다는 이유로 작은아버지에게 상속됐다.

명절마다 전날에 작은아버지와 작은어머니가 왔다. 때론 고기 한 근 사서 들고 때론 제사에 쓸 과자라며 색소든 과자들과 산자 정도를 사 왔지만 이미 어머니가 대부분 준비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제사나 차례상은 전날부터 밤늦게까지 어머니가 준비하고 아버지와 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는 어머니가 부친 부침개에 술을 먹는 것이 명절의 일상이었다.

그런 아버지는 늦둥이로 둔 아들이 나와 정치적 성향이 달라 늘 말다툼 아닌 말다툼을 했다. 아무리 말을 해도 그냥 고집으로 독재 정당을 찍는 것이 얼마나 싫었던지. 아무리 농사를 지어도 가을에 추수하면 농협에서 낸 빚을 갚기도 늘 벅찼다. 큰돈을 만지기 위해서는 소를 키워 소라도 내다 팔아야 큰돈을 만질 수 있고 농사를 짓는 데도 필요하니 집에 소는 늘 있었고 소 꼴을 베고 소똥을 치우는 등의 일은 나도 해야 하는 일이었다. 돈 되는 농작물이라고 고추 농사와 배추 농사는 늘 아버지가 짓던 농작물이다. 나는 오이 농장이나 참외 수박 같은 농작물을 하는 다른 집처럼 했으면 좋지 않을까 했지만, 아버지는 늘 같은 농작물을 지었고 농협 빚은 늘 갚아도 갚아도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그곳에 있었다.







나는 아버지와 다른 삶을 살겠다고 시골을 뛰쳐나와 서울에서 월세방을 전전하고 날마다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다 해외로 이민을 왔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아버지의 발자국을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힘든 삶을 살아 온 듯 하다. 직업이 농부가 아닌 조리사였고 한국이 아닌 캐나다였지만 나의 삶도 늘 여유가 없이 쫓기듯 살아 온 삶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이 살아 내는 일이 아무리 힘들고 힘겨운 순간순간이 이어진다고 해도 희망을 놓지 않는 이유는 삶에서 희망을 빼면 삶은 쭉정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새해도 오늘과 별반 다르지 않겠지만 달이 차면 기울고 다시 차오르듯 우리의 삶도 희망의 사과나무에 날마다 물을 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 세상에 삶은 어찌 보면 꿈 같은 날 들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름다운 꿈을 꾸길 원하면서 희망찬 새해를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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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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