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92. 있지만 없고 있어도 보이지 않는
[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92. 있지만 없고 있어도 보이지 않는
  • 전재민 시인
  • 승인 2022.12.20 00: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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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인다는 것
보이지 않는다는 것
얼마나 허망한 것이더냐

안개가 아파트를 가리니
어둠이 내려도 보이지 않고

저 아파트는 내가 눈을 깜박 일 때마다
보이지 않는다

아파트는 움직이지도 않고 그 대로 있을 뿐인데.

 







#작가의 변
사람이 살아가는 것 자체가 불안의 연속이다. 마음은 있지만 자판을 두드리지 못해 애태울 때가 많다. 시험 종료시간 10분 전, ‘이제 마무리하고 이름은 잘 썼나, 수험 번호는 잘 썼나 체크하고 마무리하세요’. 아직 풀어야 할 문제는 많은데 벌써 마무리라니 문제를 읽을 시간조차 부족하다. 마음은 조급한데 손가락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고 심장은 제멋대로 쿵쾅거리면서 굿을 해댄다. 남들보다 먼저 시험 문제를 다 풀고 나도 불안한 것은 마찬가지다. 그래서 문제를 다시 보면 다른 지문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고치면 늘 틀린다. 시험 전에 벼락치기로 공부하면 공부를 하긴 한 것 같은데 이게 정답인지 저게 정답인지 헛갈릴 때가 더 많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불안한 것이 어디 시험 때 만일까? 산다는 것은 내일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다. 해서 내일을 위해서 내 가족을 위해서 뭘 자꾸 쌓아 두려고 한다. 쌓아 두려고 한다는 마음과 쌓아 놓는다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옛날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던 ‘형제가 추수가 끝난 논의 노적가리 중에 형의 노적가리에 동생이 자기의 수확한 벼를 쌓고 형은 동생을 생각해서 동생의 노적에 쌓는다’는 형제의 우애를 이야기 한 것이다. 그 내용과 농심라면의 한자 농자와 왜 연결되었는지는 몰라도, 농심이 그런 형제간의 우애와 양보하는 미덕이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사람은 늘 자기가 생각한 거를 마음 밑바닥에 깔고 살아간다. 아무리 교육받아도 변치 않는 양심 같은 게 있는 것이다.

젊어서 요리학원 다닐 때 노량진역 맞은편 빌딩 지하에 있는 주점에서 일한 적이 있다. 독서실에서 새우처럼 꾸부리고 자는 것조차 돈이 없어 못하게 되고 잠을 재워 줄 수 있는 일자리가 필요했다. 주점 주방 안에 사장님이 피곤할 때 누워 있는 전기장판보다 조금 더 큰 방이 있었다. 그래도 누워 있을 공간이 있다는 것은 마음의 위로를 주었다. 계산하고 음식을 나르고 술을 날랐다. 웨이터 겸 케셔였는 데 바쁜 시간엔 모든 테이블을 다 살피는 것이 쉽지 않았고, 그런 환경을 이용해서 여러 명의 여학생이 와서 하나씩 화장실 간다고 나가다 한 명이 남은 것을 놓치면 그 테이블에서 먹은 것을 다 놓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의 양심을 믿었고 그들은 나의 그 믿음을 이용했다. 보이지 않는 양심이 나에겐 믿음이었고 그들에겐 이용할 수 있는 어리바리한 시골 청년인 나의 그런 믿음이었다. 한 번, 두 번 속다 보니 나도 모든 손님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모든 손님이 이젠 먹고 돈 안 내고 도망갈 도둑처럼 보였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것 또한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자주 생각나는 것은 아니지만 난 그때 일들이 잊히지 않고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나는 때가 있다. 아주 특별했던 순간들은 더욱 그렇다. 사장님과 사모님은 자주 싸웠다. 물론 대림동 아파트로 데려가서 맛있는 것도 해 주기도 하고 가족처럼 대했지만 가족은 아니었다. 어떤 일 때문이었는지 기억은 없지만 사장님이 사모님을 소주병으로 머리를 때리기도 했던 것 같다. 기억이 왜곡되었을 수도 있지만 그 순간은 최악의 순간이었던 것 같다. 주방에 가스 밸브를 늘 점검하고 출입문도 점검하고 잠을 자지만, 화장실 갔다 올 때 잠결에 안 잠그고 다시 잘 수도 있어 늘 긴장했다. 특히 가스 냄새는 민감했다. 지하인데다 출입문을 잠근 상태라 혹시라도 가스가 새면 안되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영업장에서 잠자는 것이 불법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지만 당시엔 재워 주는 것만으로도 황송할 따름이었으니까.

노량진에는 많은 수험생이 모인다. 물론 나처럼 그냥 일하기 위해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도 있었으리라. 미래를 보지 못하던 그때, 보라매 공원에서 연설하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행동하는 양심이 늘 머리에 있었던 때이다. 요즘 송중기가 나오는 재벌 집 막내아들을 보면서 내가 다시 그 시대로 돌아간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시골에서 올라와서 독서실과 자취방을 전전하던 나의 서울살이 6여 년은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난 그때 내가 불행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주점 쪽방에서 잠을 자면서도 허름한 독서실에서 굶거나 라면, 밥에 고추장을 비벼 먹는 날이 많았어도 불행하다고 느끼진 않았다. 그것은 내가 잘사는 사람들과 비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이는 건물이 안개로 보이지 않게 된다고 해도 건물이 없는 것이 아니다. 꿈은 볼 수도 없지만 꿈을 꾼 것이 없던 일이 되진 않는다. 눈에 보이는 것도 보이지 않는 것도 눈뜨고 사는 순간과 눈을 감고 죽음에 이르는 순간과 다른 것처럼 삶은 그런 것이다. 내가 없어진다고 해도 바위나 숲은 그대로 일 테고 내가 만지거나 지나간다고 숲이나 바위가 달라지진 않는다. 그럼에도 지난 온 과거보다 당장 내일이 불안하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오늘과 다르지 않겠지만 어느 순간 내가 막에서 내려올 수도 있는 연극 같은 것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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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인다는 것
보이지 않는다는 것
얼마나 허망한 것이더냐

안개가 아파트를 가리니
어둠이 내려도 보이지 않고

저 아파트는 내가 눈을 깜박 일 때마다
보이지 않는다

아파트는 움직이지도 않고 그 대로 있을 뿐인데.

 





보인다는 것
보이지 않는다는 것
얼마나 허망한 것이더냐

안개가 아파트를 가리니
어둠이 내려도 보이지 않고

저 아파트는 내가 눈을 깜박 일 때마다
보이지 않는다

아파트는 움직이지도 않고 그 대로 있을 뿐인데.

 







#작가의 변
사람이 살아가는 것 자체가 불안의 연속이다. 마음은 있지만 자판을 두드리지 못해 애태울 때가 많다. 시험 종료시간 10분 전, ‘이제 마무리하고 이름은 잘 썼나, 수험 번호는 잘 썼나 체크하고 마무리하세요’. 아직 풀어야 할 문제는 많은데 벌써 마무리라니 문제를 읽을 시간조차 부족하다. 마음은 조급한데 손가락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고 심장은 제멋대로 쿵쾅거리면서 굿을 해댄다. 남들보다 먼저 시험 문제를 다 풀고 나도 불안한 것은 마찬가지다. 그래서 문제를 다시 보면 다른 지문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고치면 늘 틀린다. 시험 전에 벼락치기로 공부하면 공부를 하긴 한 것 같은데 이게 정답인지 저게 정답인지 헛갈릴 때가 더 많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불안한 것이 어디 시험 때 만일까? 산다는 것은 내일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다. 해서 내일을 위해서 내 가족을 위해서 뭘 자꾸 쌓아 두려고 한다. 쌓아 두려고 한다는 마음과 쌓아 놓는다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옛날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던 ‘형제가 추수가 끝난 논의 노적가리 중에 형의 노적가리에 동생이 자기의 수확한 벼를 쌓고 형은 동생을 생각해서 동생의 노적에 쌓는다’는 형제의 우애를 이야기 한 것이다. 그 내용과 농심라면의 한자 농자와 왜 연결되었는지는 몰라도, 농심이 그런 형제간의 우애와 양보하는 미덕이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사람은 늘 자기가 생각한 거를 마음 밑바닥에 깔고 살아간다. 아무리 교육받아도 변치 않는 양심 같은 게 있는 것이다.

젊어서 요리학원 다닐 때 노량진역 맞은편 빌딩 지하에 있는 주점에서 일한 적이 있다. 독서실에서 새우처럼 꾸부리고 자는 것조차 돈이 없어 못하게 되고 잠을 재워 줄 수 있는 일자리가 필요했다. 주점 주방 안에 사장님이 피곤할 때 누워 있는 전기장판보다 조금 더 큰 방이 있었다. 그래도 누워 있을 공간이 있다는 것은 마음의 위로를 주었다. 계산하고 음식을 나르고 술을 날랐다. 웨이터 겸 케셔였는 데 바쁜 시간엔 모든 테이블을 다 살피는 것이 쉽지 않았고, 그런 환경을 이용해서 여러 명의 여학생이 와서 하나씩 화장실 간다고 나가다 한 명이 남은 것을 놓치면 그 테이블에서 먹은 것을 다 놓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의 양심을 믿었고 그들은 나의 그 믿음을 이용했다. 보이지 않는 양심이 나에겐 믿음이었고 그들에겐 이용할 수 있는 어리바리한 시골 청년인 나의 그런 믿음이었다. 한 번, 두 번 속다 보니 나도 모든 손님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모든 손님이 이젠 먹고 돈 안 내고 도망갈 도둑처럼 보였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것 또한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자주 생각나는 것은 아니지만 난 그때 일들이 잊히지 않고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나는 때가 있다. 아주 특별했던 순간들은 더욱 그렇다. 사장님과 사모님은 자주 싸웠다. 물론 대림동 아파트로 데려가서 맛있는 것도 해 주기도 하고 가족처럼 대했지만 가족은 아니었다. 어떤 일 때문이었는지 기억은 없지만 사장님이 사모님을 소주병으로 머리를 때리기도 했던 것 같다. 기억이 왜곡되었을 수도 있지만 그 순간은 최악의 순간이었던 것 같다. 주방에 가스 밸브를 늘 점검하고 출입문도 점검하고 잠을 자지만, 화장실 갔다 올 때 잠결에 안 잠그고 다시 잘 수도 있어 늘 긴장했다. 특히 가스 냄새는 민감했다. 지하인데다 출입문을 잠근 상태라 혹시라도 가스가 새면 안되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영업장에서 잠자는 것이 불법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지만 당시엔 재워 주는 것만으로도 황송할 따름이었으니까.

노량진에는 많은 수험생이 모인다. 물론 나처럼 그냥 일하기 위해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도 있었으리라. 미래를 보지 못하던 그때, 보라매 공원에서 연설하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행동하는 양심이 늘 머리에 있었던 때이다. 요즘 송중기가 나오는 재벌 집 막내아들을 보면서 내가 다시 그 시대로 돌아간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시골에서 올라와서 독서실과 자취방을 전전하던 나의 서울살이 6여 년은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난 그때 내가 불행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주점 쪽방에서 잠을 자면서도 허름한 독서실에서 굶거나 라면, 밥에 고추장을 비벼 먹는 날이 많았어도 불행하다고 느끼진 않았다. 그것은 내가 잘사는 사람들과 비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이는 건물이 안개로 보이지 않게 된다고 해도 건물이 없는 것이 아니다. 꿈은 볼 수도 없지만 꿈을 꾼 것이 없던 일이 되진 않는다. 눈에 보이는 것도 보이지 않는 것도 눈뜨고 사는 순간과 눈을 감고 죽음에 이르는 순간과 다른 것처럼 삶은 그런 것이다. 내가 없어진다고 해도 바위나 숲은 그대로 일 테고 내가 만지거나 지나간다고 숲이나 바위가 달라지진 않는다. 그럼에도 지난 온 과거보다 당장 내일이 불안하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오늘과 다르지 않겠지만 어느 순간 내가 막에서 내려올 수도 있는 연극 같은 것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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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변
사람이 살아가는 것 자체가 불안의 연속이다. 마음은 있지만 자판을 두드리지 못해 애태울 때가 많다. 시험 종료시간 10분 전, ‘이제 마무리하고 이름은 잘 썼나, 수험 번호는 잘 썼나 체크하고 마무리하세요’. 아직 풀어야 할 문제는 많은데 벌써 마무리라니 문제를 읽을 시간조차 부족하다. 마음은 조급한데 손가락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고 심장은 제멋대로 쿵쾅거리면서 굿을 해댄다. 남들보다 먼저 시험 문제를 다 풀고 나도 불안한 것은 마찬가지다. 그래서 문제를 다시 보면 다른 지문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고치면 늘 틀린다. 시험 전에 벼락치기로 공부하면 공부를 하긴 한 것 같은데 이게 정답인지 저게 정답인지 헛갈릴 때가 더 많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불안한 것이 어디 시험 때 만일까? 산다는 것은 내일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다. 해서 내일을 위해서 내 가족을 위해서 뭘 자꾸 쌓아 두려고 한다. 쌓아 두려고 한다는 마음과 쌓아 놓는다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옛날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던 ‘형제가 추수가 끝난 논의 노적가리 중에 형의 노적가리에 동생이 자기의 수확한 벼를 쌓고 형은 동생을 생각해서 동생의 노적에 쌓는다’는 형제의 우애를 이야기 한 것이다. 그 내용과 농심라면의 한자 농자와 왜 연결되었는지는 몰라도, 농심이 그런 형제간의 우애와 양보하는 미덕이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사람은 늘 자기가 생각한 거를 마음 밑바닥에 깔고 살아간다. 아무리 교육받아도 변치 않는 양심 같은 게 있는 것이다.

젊어서 요리학원 다닐 때 노량진역 맞은편 빌딩 지하에 있는 주점에서 일한 적이 있다. 독서실에서 새우처럼 꾸부리고 자는 것조차 돈이 없어 못하게 되고 잠을 재워 줄 수 있는 일자리가 필요했다. 주점 주방 안에 사장님이 피곤할 때 누워 있는 전기장판보다 조금 더 큰 방이 있었다. 그래도 누워 있을 공간이 있다는 것은 마음의 위로를 주었다. 계산하고 음식을 나르고 술을 날랐다. 웨이터 겸 케셔였는 데 바쁜 시간엔 모든 테이블을 다 살피는 것이 쉽지 않았고, 그런 환경을 이용해서 여러 명의 여학생이 와서 하나씩 화장실 간다고 나가다 한 명이 남은 것을 놓치면 그 테이블에서 먹은 것을 다 놓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의 양심을 믿었고 그들은 나의 그 믿음을 이용했다. 보이지 않는 양심이 나에겐 믿음이었고 그들에겐 이용할 수 있는 어리바리한 시골 청년인 나의 그런 믿음이었다. 한 번, 두 번 속다 보니 나도 모든 손님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모든 손님이 이젠 먹고 돈 안 내고 도망갈 도둑처럼 보였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것 또한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자주 생각나는 것은 아니지만 난 그때 일들이 잊히지 않고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나는 때가 있다. 아주 특별했던 순간들은 더욱 그렇다. 사장님과 사모님은 자주 싸웠다. 물론 대림동 아파트로 데려가서 맛있는 것도 해 주기도 하고 가족처럼 대했지만 가족은 아니었다. 어떤 일 때문이었는지 기억은 없지만 사장님이 사모님을 소주병으로 머리를 때리기도 했던 것 같다. 기억이 왜곡되었을 수도 있지만 그 순간은 최악의 순간이었던 것 같다. 주방에 가스 밸브를 늘 점검하고 출입문도 점검하고 잠을 자지만, 화장실 갔다 올 때 잠결에 안 잠그고 다시 잘 수도 있어 늘 긴장했다. 특히 가스 냄새는 민감했다. 지하인데다 출입문을 잠근 상태라 혹시라도 가스가 새면 안되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영업장에서 잠자는 것이 불법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지만 당시엔 재워 주는 것만으로도 황송할 따름이었으니까.

노량진에는 많은 수험생이 모인다. 물론 나처럼 그냥 일하기 위해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도 있었으리라. 미래를 보지 못하던 그때, 보라매 공원에서 연설하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행동하는 양심이 늘 머리에 있었던 때이다. 요즘 송중기가 나오는 재벌 집 막내아들을 보면서 내가 다시 그 시대로 돌아간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시골에서 올라와서 독서실과 자취방을 전전하던 나의 서울살이 6여 년은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난 그때 내가 불행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주점 쪽방에서 잠을 자면서도 허름한 독서실에서 굶거나 라면, 밥에 고추장을 비벼 먹는 날이 많았어도 불행하다고 느끼진 않았다. 그것은 내가 잘사는 사람들과 비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이는 건물이 안개로 보이지 않게 된다고 해도 건물이 없는 것이 아니다. 꿈은 볼 수도 없지만 꿈을 꾼 것이 없던 일이 되진 않는다. 눈에 보이는 것도 보이지 않는 것도 눈뜨고 사는 순간과 눈을 감고 죽음에 이르는 순간과 다른 것처럼 삶은 그런 것이다. 내가 없어진다고 해도 바위나 숲은 그대로 일 테고 내가 만지거나 지나간다고 숲이나 바위가 달라지진 않는다. 그럼에도 지난 온 과거보다 당장 내일이 불안하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오늘과 다르지 않겠지만 어느 순간 내가 막에서 내려올 수도 있는 연극 같은 것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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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인다는 것
보이지 않는다는 것
얼마나 허망한 것이더냐

안개가 아파트를 가리니
어둠이 내려도 보이지 않고

저 아파트는 내가 눈을 깜박 일 때마다
보이지 않는다

아파트는 움직이지도 않고 그 대로 있을 뿐인데.

 







#작가의 변
사람이 살아가는 것 자체가 불안의 연속이다. 마음은 있지만 자판을 두드리지 못해 애태울 때가 많다. 시험 종료시간 10분 전, ‘이제 마무리하고 이름은 잘 썼나, 수험 번호는 잘 썼나 체크하고 마무리하세요’. 아직 풀어야 할 문제는 많은데 벌써 마무리라니 문제를 읽을 시간조차 부족하다. 마음은 조급한데 손가락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고 심장은 제멋대로 쿵쾅거리면서 굿을 해댄다. 남들보다 먼저 시험 문제를 다 풀고 나도 불안한 것은 마찬가지다. 그래서 문제를 다시 보면 다른 지문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고치면 늘 틀린다. 시험 전에 벼락치기로 공부하면 공부를 하긴 한 것 같은데 이게 정답인지 저게 정답인지 헛갈릴 때가 더 많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불안한 것이 어디 시험 때 만일까? 산다는 것은 내일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다. 해서 내일을 위해서 내 가족을 위해서 뭘 자꾸 쌓아 두려고 한다. 쌓아 두려고 한다는 마음과 쌓아 놓는다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옛날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던 ‘형제가 추수가 끝난 논의 노적가리 중에 형의 노적가리에 동생이 자기의 수확한 벼를 쌓고 형은 동생을 생각해서 동생의 노적에 쌓는다’는 형제의 우애를 이야기 한 것이다. 그 내용과 농심라면의 한자 농자와 왜 연결되었는지는 몰라도, 농심이 그런 형제간의 우애와 양보하는 미덕이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사람은 늘 자기가 생각한 거를 마음 밑바닥에 깔고 살아간다. 아무리 교육받아도 변치 않는 양심 같은 게 있는 것이다.

젊어서 요리학원 다닐 때 노량진역 맞은편 빌딩 지하에 있는 주점에서 일한 적이 있다. 독서실에서 새우처럼 꾸부리고 자는 것조차 돈이 없어 못하게 되고 잠을 재워 줄 수 있는 일자리가 필요했다. 주점 주방 안에 사장님이 피곤할 때 누워 있는 전기장판보다 조금 더 큰 방이 있었다. 그래도 누워 있을 공간이 있다는 것은 마음의 위로를 주었다. 계산하고 음식을 나르고 술을 날랐다. 웨이터 겸 케셔였는 데 바쁜 시간엔 모든 테이블을 다 살피는 것이 쉽지 않았고, 그런 환경을 이용해서 여러 명의 여학생이 와서 하나씩 화장실 간다고 나가다 한 명이 남은 것을 놓치면 그 테이블에서 먹은 것을 다 놓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의 양심을 믿었고 그들은 나의 그 믿음을 이용했다. 보이지 않는 양심이 나에겐 믿음이었고 그들에겐 이용할 수 있는 어리바리한 시골 청년인 나의 그런 믿음이었다. 한 번, 두 번 속다 보니 나도 모든 손님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모든 손님이 이젠 먹고 돈 안 내고 도망갈 도둑처럼 보였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것 또한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자주 생각나는 것은 아니지만 난 그때 일들이 잊히지 않고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나는 때가 있다. 아주 특별했던 순간들은 더욱 그렇다. 사장님과 사모님은 자주 싸웠다. 물론 대림동 아파트로 데려가서 맛있는 것도 해 주기도 하고 가족처럼 대했지만 가족은 아니었다. 어떤 일 때문이었는지 기억은 없지만 사장님이 사모님을 소주병으로 머리를 때리기도 했던 것 같다. 기억이 왜곡되었을 수도 있지만 그 순간은 최악의 순간이었던 것 같다. 주방에 가스 밸브를 늘 점검하고 출입문도 점검하고 잠을 자지만, 화장실 갔다 올 때 잠결에 안 잠그고 다시 잘 수도 있어 늘 긴장했다. 특히 가스 냄새는 민감했다. 지하인데다 출입문을 잠근 상태라 혹시라도 가스가 새면 안되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영업장에서 잠자는 것이 불법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지만 당시엔 재워 주는 것만으로도 황송할 따름이었으니까.

노량진에는 많은 수험생이 모인다. 물론 나처럼 그냥 일하기 위해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도 있었으리라. 미래를 보지 못하던 그때, 보라매 공원에서 연설하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행동하는 양심이 늘 머리에 있었던 때이다. 요즘 송중기가 나오는 재벌 집 막내아들을 보면서 내가 다시 그 시대로 돌아간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시골에서 올라와서 독서실과 자취방을 전전하던 나의 서울살이 6여 년은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난 그때 내가 불행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주점 쪽방에서 잠을 자면서도 허름한 독서실에서 굶거나 라면, 밥에 고추장을 비벼 먹는 날이 많았어도 불행하다고 느끼진 않았다. 그것은 내가 잘사는 사람들과 비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이는 건물이 안개로 보이지 않게 된다고 해도 건물이 없는 것이 아니다. 꿈은 볼 수도 없지만 꿈을 꾼 것이 없던 일이 되진 않는다. 눈에 보이는 것도 보이지 않는 것도 눈뜨고 사는 순간과 눈을 감고 죽음에 이르는 순간과 다른 것처럼 삶은 그런 것이다. 내가 없어진다고 해도 바위나 숲은 그대로 일 테고 내가 만지거나 지나간다고 숲이나 바위가 달라지진 않는다. 그럼에도 지난 온 과거보다 당장 내일이 불안하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오늘과 다르지 않겠지만 어느 순간 내가 막에서 내려올 수도 있는 연극 같은 것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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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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