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마 재발견해 인간 행복 추구하고 세계에 불법 재현”
“다르마 재발견해 인간 행복 추구하고 세계에 불법 재현”
  • 서현욱 기자
  • 승인 2022.12.07 16:28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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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국회정각회 12월 정기법회…법륜 스님 법문
“믿음은 개인 자유, 종파·사상 달라도 존중해야”
“불교의 윤회는 인도 전통사회의 윤회와 다르다”




“종교적 윤회는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하지만, 붓다가 가르치신 윤회는 행과 불행을 되풀이하는 것에서 벗어난 것이며,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을 해탈, 열반이라고 한다. 해탈은 누구나 가능하다는 게 붓다의 가르침이다.…종교가 다르고 믿음이 다른 것은 헌법이 보장한 개인의 자유이다. 종파도 다르고 사상도 다를 수 있지만 이를 존중해야 한다. 인도 전통사상에서 이어진 종교적인 것에서 답을 찾지 말고 붓다의 다르마를 재발견해 널리 사람들에게 알리고 종교의 차원을 넘어 인간을 행복하게 하고 불법을 다시 세계에 재현할 수 있을 것이다.”

정도회 지도법사 법륜 스님은 7일 국회의사당 정각선원에서 열린 국회정각회 12월 정기법회에서 이같이 법문했다. 법륜 스님은 “종교적 믿음과 다르마(불법, 담마)는 다른 것”이라며 “신앙적적 믿음은 개인의 자유지만, 불자는 붓다의 다르마, 담마의 진실을 배우고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법륜 스님은 이날 국회정각회 정기법회에 초청법사로 ‘윤회와 해탈’을 주제로 법문했다.

스님은 ‘윤회와 해탈’이 종교적·신앙적 의미와 다르마와는 다른 의미라고 지적했다. 스님은 “믿음이 중심되는 것이 종교이고, 진실을 탐구해 사실을 밝히는 게 다르마, 진리”라며 인도 전통사상과 한두교의 윤회와 해탈은 붓다께서 설한 가르침과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했다.

법륜 스님은 “인간은 모를 때 두려워한다. 모르는 사람을 만났을 때 불안하고, 모르는 곳에 갈 때가 불안하다. 어두울 때가 불안하고, 모르는 일할 때 마음은 불안하고 두렵다.”며 “모르는 것 중 가장 모르는 것은 죽은 뒤 이야기이다. 그래서 죽음에 두려움이 있다.”고 했다.

이어 “두려움을 극복하려고 예부터 여러 생각이 나왔다. 먼저 ‘안 죽고 영원히 산다’는 것이다. 영생 추구의 흐름은 지금도 있다. 그런데 영원히 살 수 없다. 또 나온 생각이 ‘죽어서 좋은 데 간다’는 것이다. 여기보다 더 좋은 데 가니까 두려움이 줄어든다. 그래서 천당과 지옥이 생겼다. 그런데 죽어서 좋은 데 간다는 생각을 믿는 사람은 두렵지 않고 믿지 않는 사람은 두려움이 있다.”고 했다.

스님은 “인도 사람들이 더 좋은 생각을 해냈다. 죽어서 좋은 데 가도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니, 죽은 뒤에 다시 태어난다. 헤어져도 금방 다시 만난다는 생각이다.”며 “인도 사람은 사람이 죽으면 우는 게 우리보다 적다. 다시 태어난다고 하니 죽은 시신 오래 두지 않고 , 장례도 당일 화장한다.”고 했다. .

이어 “다시 태어난다는 게 ‘윤회’인데, 인도의 역사로 보면 원주민인 드라비다족으로부터 시작한다. 현재 인도 주류문화를 이룬 아리안도 윤회를 받아들여 인도 전통사상이자 신앙이 됐다.”며 “불교도 인도에서 태어나 이것을 받아들였다. 윤회를 믿으면 불교 신자이고 밎지 않으면 불교 신자가 아니다고들 한다.”며 “그런데 인도 전통사상은 힌두교의 사상과 같다. 이는 불교의 아이덴티티가 될 수 없다.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윤회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고 인조 전통신앙”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럼 불교도 윤회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부처님이 말씀하신 윤회는 인도 전통신앙의 윤회와 같겠느냐”며 “부처님은 더 본질적인 것을 탐구했다. 부처님은 두려움이 죽음 때문이 아닌 무지 때문에 생긴다고 하셨다. 인간 고뇌의 근원을 탐구해 보니 결국 무지 때문에 생긴다. 그래서 무지, 무명을 타파하면 두려움이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는 신과 인간의 모든 굴레부터 벗어났다’, ‘무명을 타파했다’고 하셨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니 관심의 대상은 죽음이 아니다. 이것이 믿음을 통한 종교와 탐구를 통한 진리, 다르마의 차이”라고 강조했다.







스님은 “불교의 핵심 가르침은 무명을 타파해 해탈하는 것이다. 불교라는 종교는 윤회에 의해 좋은 삶을 받거나, 좋은 세상에 태어나는 것을 신앙으로 삼지만, 결국 우리 신앙과 진리(다르마)와 모순되는 관계에 놓여 있다.”고 지적했다.

법륜 스님은 “‘윤회를 한다, 안 한다’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이는 주 관심사에서 벗어난 것이다.”라며 “비유하면, 우리는 하늘을 보면서 ‘해가 뜨고 진다’고 말한다. 태양이 지구를 돌고 있구나라고 경험적으로 생각했다. 뜬다는 것은 시작이고, 진다는 것은 ‘멸’이다.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더 깊이 탐구하면 태양이 지구를 돈다는 것은 현실에서 모순이 생긴다. 연구 거듭해 보니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게 아니라 지구가 돈다. 더 탐구하니 태양은 그냥 있고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다. 지구가 자전하니 태양이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한다. 감각적으로 해가 뜨고 진다거나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진실을 알면 태양은 뜨는 것도 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무시무종”이라고 했다.

이어 “진리는 무시무종이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어떻게 시작됐지’라는 질문이 나온다. 그래서 창조론이 나온다. 또 끝이 있다고 생각하니 당연히 종말론이 나온다. 그러면 누가 창조했느냐, 어떻게 종말이 오느냐. 이런 것의 근저에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는 인식 때문”이라며 “무시무종이면 창조론이나 종말론이 나올 수 없다.”고 했다.

법륜 스님은 “두려움이 있고,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거냐’고 하면 내생 천당 극락 얘기가 나오지만, 두려움이 없어지면 그런 얘기할 필요가 없어진다.”며 “그래서 ‘윤회하지 않는다’, ‘천국이 없다’, ‘내생이 없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런 생각의 뿌리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것이 탐구를 통해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했다.







법륜 스님은 믿음과 전통문화의 문제가 진리, 다르마의 문제를 다르게 보아야 하는데, 이를 뒤섞어 보기 때문에 의문이 생긴다고 보았다.

스님은 “이미 깨달음을 얻어 두려움이 없어진 사람도, 일상적 용어나 전통적 문화에서 나온 용어를 쓰지 않는 것은 아니다.”며 “이는 용어의 문제이지 진리의 문제는 아니다. 하나의 문화적 현상일 뿐이다.”고 했다.

스님은 "본질을 알면 물을 게 없어진다. 전통적으로 윤회는 사람이 죽으면 어느 세상에 가던지 새로 태어나던지 해야 한다. 그러려면 자아라는 알맹이가 있어야 한다. 자아가 있어야 천당도 가고 지옥도 가고 사람도 되고 개도 된다.“면서 ”그런데 부처님의 교설은 무아라 했고 실체가 없다고 가르치셨다. 무아 무상 공은 탐구를 통한 진리를 발견한 표상이고 윤회는 전통적인 문화의 군상이다. 믿음의 군상에 내생이 있느냐, 신이 있느냐, 어느 게 맞느냐 하면 관점을 잘 못잡은 것이다. 믿음의 문제여서 진리냐 아니냐 논하는 자체가 사물을 보는 관점이 잘못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믿음은 개인 마다 다르고, 간섭할 수 없다. 신이 있느냐는 논쟁거리가 아니라 믿음이 다르구나로 접근해야 한다.“며 ”우리는 믿음의 문제를 진리의 측면에서 논쟁하나보니 끝이 없고 결온이 나지 않는다. 믿음은 재인의 자유이고, 헌법이 보장한 것“이라며 ”믿음에 대해 우열을 논하거나 진리를 논하는 것은 어리석다. 마지 헌법이 자유라는 권리를 보장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법륜 스님은 붓다의 가르침인 ‘윤회’는 인도 전통사상의 윤회와는 다른 개념”이라며 “붓다는 왜 사람이 괴로운가를 고민했다. 의식이 없다.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다. 어떤 현상도 원인 없이 생겨나는 것은 없다. 저절로 생긴 게 없다. 원인이 있어 결과가 있다. 원인을 지으면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는 결과가 반드시 나타난다.”고 했다.

이어 “천안지는 지금 내가 이런 말과 행동을 하면 아직 결과가 안 드러났지만 미래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힘이다. 결과를 예측하지 못하니 나쁜 행위가 가능하다. 결과를 알면 누가 나쁜 짓을 하겠나”라며 “숙명지는 지금 일어나는 현상의 결과를 보고 원인을 알아내는 것이고, 원인을 알아보고 결과를 예측하는 게 천안지”라며 “부처님은 6년 고행을 하면서 원인과 결과를 알았다. 괴로움의 뿌리 중 하나가 욕망인데, 욕망을 충족하면 기분이 좋다. 기분이 좋은 것을 행복으로 삼는다. 그런데 사람은 다 원하는 것을 이루려 하는데, 이루어지지 않아 괴롭고 기분 나쁘고 불행하다. 이루어졌더라도 욕망이 커지는 성질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붓다가 태자 시절 욕망의 충족이 남보다 나았으니 행복하다고 볼 수 있지만 욕망은 끝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붓다는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해 욕망을 따르는 게 해탈의 길이 아니고 행복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며 “그래서 욕망의 씨를 말려야 한다는 출가 사문의 가르침을 따랐다. 그것이 고행주의이다. 그런데 붓다는 피골이 상접할 때까지 누구보다 고행을 했지만, 해탈하지 못했다. 그래서 고행을 덜 해서 그런가, 아니면 너무 해서 그런가, 자신을 돌아보고 삶을 돌아봤다. 그래서 출가 후 욕망을 억제했는데 욕망을 따라가는 것만이 욕망의 노예가 아닌, 욕망을 거부하는 것도 욕망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또 “욕망을 따라가서 얻은 기쁨이 쾌락이고, 욕망에서 벗어나 얻은 기쁨이 고행이었지만, 어떤 것을 억제하고 따라가는 게 해탈은 아니었다. 욕망에서 자유로워져야 하는 것을 알았다. 욕구가 일어나는 걸 알뿐이지, ‘먹어야지’ ‘안 먹어야지’ 하지도 말라. 욕망이 일어나는구나는 것 알아야 한다고 했다. 이게 알아차림이다. 다만 알아차리기만 해라. 이것이 새로운 것의 발견 ‘중도’이다. 중도로 해탈을 증득했다.”면서 “바라는 바가 이루어져 기분 좋은 게 행이면, 반드시 원하는 것이 안 이루어지면 불행하다. 행과 불행이 되풀이된다. 우리 삶은 돈을 벌어서 기분이 좋았다면 돈을 잃으면 불행이 온다. 누구를 만나서 기뻤다면 헤어지면 괴롭다. 락(樂)과 고(苦)가 되풀이하는 게 ‘윤회’”라고 했다.

법륜 스님은 “중생의 삶은 고락이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고락을 분리해 락만 얻겠다는 것은 현실서 이룰 수 없다. 젊음이 낙이라면 늙음은 고다. 밖에서 아름다움의 본질은 내부는 더러움이다. 부처님이 가르친 윤회는 고락이 되풀이하는 것”이라며 “그래서 고는 락이고 락은 고이다. 이를 알아야 사성제의 첫 번째 고성제를 알게 된다.”고 했다.

이어 “‘고’인지 모르기 때문에 ‘락’에 매달려서 고의 과보를 계속 받는다. 이게 윤회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뿌리는 욕망인데, 욕망을 알아차리는 것이 욕망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고, 그러면 고가 발생하지 않는다.”면서 “고가 영원히 발생하지 않으면 락도 발생하지 않으니, 고가 사라짐과 동시에 락이 사라진 것을 ‘고요정적’이라고 하고, 이것이 열반”이라고 했다.

스님은 “파도의 오르고 내리는 것이 윤회라면 적정은 고요함이다. 불교의 열반은 우리 식으로 행복으로 번역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즐거움의 행복과는 다른 것이다. 즐거움으로 하면 행복이 아니고 열반이다. 그런데 니르바나로 하면 무쓴 뜻인지 모른다.”면서 “괴로움에 벗어나는 걸 해탈, 세속적 말로 자유인데 내 맘대로 하는 자유와 혼돈이 된다. 세속적 자유와 달리 ‘참자유’, ‘참행복’이라고 해야 하는데, 내 맘대로 해서 얻는 자유가 아닌 욕망에서 벗어나 고락이 윤회하지 않는 자유를 말한다. 자기를 이기는 자가 진정한 영웅이라고 붓다는 말한다.”고 했다.

또 “고가 소멸됐다는 관점에서는 열반이라고 한다. 해탈, 열반이란 용어를 쓰지만 인도 말로는 니르바나이다.”며 “불교가 추구하는 이상은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 고요적정, 자유로움, 해탈과 열반이 불교의 궁극적 목적이다. 신앙은 복을 받고 극락에 가는 게 이상인데, 이는 신앙적 이상”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수행적 관점에서는 빠르냐, 느리냐, 다음 생이 있느냐, 극락에 가느냐 하는 것은 논의의 대상이 안 된다.”며 “그래서 붓다는 그 당시에도 계급 차별을 부정하고 성차별을 부정했다. 지금도 인도서 안 되지만 2600년 전 그런 가르침 편 것은 굉장한 일”이라며 “붓다의 가르침도 500년 정도 지나자 계급과 성차별을 합리화하는 것으로 바뀐다. 그래서 복을 많이 지어야 남자가 되고 왕이 되고, 전생에 죄를 많이 지으면 거지가 되고 장애인이 된다고 하는데 이건 인권침해다. 장애인 차별, 여성 차별, 신분 차별을 전생을 빌려 차별하는 것, 이런 운명론이나 사주팔자 신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을 불교는 부정한다.”고 했다.

“종교적 윤회는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하지만, 붓다가 가르치신 윤회는 행과 불행을 되풀이하는 것에서 벗어난 것이며,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을 해탈, 열반이라고 한다. 해탈은 누구나 가능하다는 게 붓다의 가르침이다.…종교가 다르고 믿음이 다른 것은 헌법이 보장한 개인의 자유이다. 종파도 다르고 사상도 다를 수 있지만 이를 존중해야 한다. 인도 전통사상에서 이어진 종교적인 것에서 답을 찾지 말고 붓다의 다르마를 재발견해 널리 사람들에게 알리고 종교의 차원을 넘어 인간을 행복하게 하고 불법을 다시 세계에 재현할 수 있을 것이다.”

정도회 지도법사 법륜 스님은 7일 국회의사당 정각선원에서 열린 국회정각회 12월 정기법회에서 이같이 법문했다. 법륜 스님은 “종교적 믿음과 다르마(불법, 담마)는 다른 것”이라며 “신앙적적 믿음은 개인의 자유지만, 불자는 붓다의 다르마, 담마의 진실을 배우고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종교적 윤회는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하지만, 붓다가 가르치신 윤회는 행과 불행을 되풀이하는 것에서 벗어난 것이며,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을 해탈, 열반이라고 한다. 해탈은 누구나 가능하다는 게 붓다의 가르침이다.…종교가 다르고 믿음이 다른 것은 헌법이 보장한 개인의 자유이다. 종파도 다르고 사상도 다를 수 있지만 이를 존중해야 한다. 인도 전통사상에서 이어진 종교적인 것에서 답을 찾지 말고 붓다의 다르마를 재발견해 널리 사람들에게 알리고 종교의 차원을 넘어 인간을 행복하게 하고 불법을 다시 세계에 재현할 수 있을 것이다.”

정도회 지도법사 법륜 스님은 7일 국회의사당 정각선원에서 열린 국회정각회 12월 정기법회에서 이같이 법문했다. 법륜 스님은 “종교적 믿음과 다르마(불법, 담마)는 다른 것”이라며 “신앙적적 믿음은 개인의 자유지만, 불자는 붓다의 다르마, 담마의 진실을 배우고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법륜 스님은 이날 국회정각회 정기법회에 초청법사로 ‘윤회와 해탈’을 주제로 법문했다.

스님은 ‘윤회와 해탈’이 종교적·신앙적 의미와 다르마와는 다른 의미라고 지적했다. 스님은 “믿음이 중심되는 것이 종교이고, 진실을 탐구해 사실을 밝히는 게 다르마, 진리”라며 인도 전통사상과 한두교의 윤회와 해탈은 붓다께서 설한 가르침과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했다.

법륜 스님은 “인간은 모를 때 두려워한다. 모르는 사람을 만났을 때 불안하고, 모르는 곳에 갈 때가 불안하다. 어두울 때가 불안하고, 모르는 일할 때 마음은 불안하고 두렵다.”며 “모르는 것 중 가장 모르는 것은 죽은 뒤 이야기이다. 그래서 죽음에 두려움이 있다.”고 했다.

이어 “두려움을 극복하려고 예부터 여러 생각이 나왔다. 먼저 ‘안 죽고 영원히 산다’는 것이다. 영생 추구의 흐름은 지금도 있다. 그런데 영원히 살 수 없다. 또 나온 생각이 ‘죽어서 좋은 데 간다’는 것이다. 여기보다 더 좋은 데 가니까 두려움이 줄어든다. 그래서 천당과 지옥이 생겼다. 그런데 죽어서 좋은 데 간다는 생각을 믿는 사람은 두렵지 않고 믿지 않는 사람은 두려움이 있다.”고 했다.

스님은 “인도 사람들이 더 좋은 생각을 해냈다. 죽어서 좋은 데 가도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니, 죽은 뒤에 다시 태어난다. 헤어져도 금방 다시 만난다는 생각이다.”며 “인도 사람은 사람이 죽으면 우는 게 우리보다 적다. 다시 태어난다고 하니 죽은 시신 오래 두지 않고 , 장례도 당일 화장한다.”고 했다. .

이어 “다시 태어난다는 게 ‘윤회’인데, 인도의 역사로 보면 원주민인 드라비다족으로부터 시작한다. 현재 인도 주류문화를 이룬 아리안도 윤회를 받아들여 인도 전통사상이자 신앙이 됐다.”며 “불교도 인도에서 태어나 이것을 받아들였다. 윤회를 믿으면 불교 신자이고 밎지 않으면 불교 신자가 아니다고들 한다.”며 “그런데 인도 전통사상은 힌두교의 사상과 같다. 이는 불교의 아이덴티티가 될 수 없다.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윤회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고 인조 전통신앙”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럼 불교도 윤회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부처님이 말씀하신 윤회는 인도 전통신앙의 윤회와 같겠느냐”며 “부처님은 더 본질적인 것을 탐구했다. 부처님은 두려움이 죽음 때문이 아닌 무지 때문에 생긴다고 하셨다. 인간 고뇌의 근원을 탐구해 보니 결국 무지 때문에 생긴다. 그래서 무지, 무명을 타파하면 두려움이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는 신과 인간의 모든 굴레부터 벗어났다’, ‘무명을 타파했다’고 하셨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니 관심의 대상은 죽음이 아니다. 이것이 믿음을 통한 종교와 탐구를 통한 진리, 다르마의 차이”라고 강조했다.







스님은 “불교의 핵심 가르침은 무명을 타파해 해탈하는 것이다. 불교라는 종교는 윤회에 의해 좋은 삶을 받거나, 좋은 세상에 태어나는 것을 신앙으로 삼지만, 결국 우리 신앙과 진리(다르마)와 모순되는 관계에 놓여 있다.”고 지적했다.

법륜 스님은 “‘윤회를 한다, 안 한다’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이는 주 관심사에서 벗어난 것이다.”라며 “비유하면, 우리는 하늘을 보면서 ‘해가 뜨고 진다’고 말한다. 태양이 지구를 돌고 있구나라고 경험적으로 생각했다. 뜬다는 것은 시작이고, 진다는 것은 ‘멸’이다.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더 깊이 탐구하면 태양이 지구를 돈다는 것은 현실에서 모순이 생긴다. 연구 거듭해 보니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게 아니라 지구가 돈다. 더 탐구하니 태양은 그냥 있고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다. 지구가 자전하니 태양이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한다. 감각적으로 해가 뜨고 진다거나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진실을 알면 태양은 뜨는 것도 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무시무종”이라고 했다.

이어 “진리는 무시무종이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어떻게 시작됐지’라는 질문이 나온다. 그래서 창조론이 나온다. 또 끝이 있다고 생각하니 당연히 종말론이 나온다. 그러면 누가 창조했느냐, 어떻게 종말이 오느냐. 이런 것의 근저에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는 인식 때문”이라며 “무시무종이면 창조론이나 종말론이 나올 수 없다.”고 했다.

법륜 스님은 “두려움이 있고,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거냐’고 하면 내생 천당 극락 얘기가 나오지만, 두려움이 없어지면 그런 얘기할 필요가 없어진다.”며 “그래서 ‘윤회하지 않는다’, ‘천국이 없다’, ‘내생이 없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런 생각의 뿌리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것이 탐구를 통해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했다.







법륜 스님은 믿음과 전통문화의 문제가 진리, 다르마의 문제를 다르게 보아야 하는데, 이를 뒤섞어 보기 때문에 의문이 생긴다고 보았다.

스님은 “이미 깨달음을 얻어 두려움이 없어진 사람도, 일상적 용어나 전통적 문화에서 나온 용어를 쓰지 않는 것은 아니다.”며 “이는 용어의 문제이지 진리의 문제는 아니다. 하나의 문화적 현상일 뿐이다.”고 했다.

스님은 "본질을 알면 물을 게 없어진다. 전통적으로 윤회는 사람이 죽으면 어느 세상에 가던지 새로 태어나던지 해야 한다. 그러려면 자아라는 알맹이가 있어야 한다. 자아가 있어야 천당도 가고 지옥도 가고 사람도 되고 개도 된다.“면서 ”그런데 부처님의 교설은 무아라 했고 실체가 없다고 가르치셨다. 무아 무상 공은 탐구를 통한 진리를 발견한 표상이고 윤회는 전통적인 문화의 군상이다. 믿음의 군상에 내생이 있느냐, 신이 있느냐, 어느 게 맞느냐 하면 관점을 잘 못잡은 것이다. 믿음의 문제여서 진리냐 아니냐 논하는 자체가 사물을 보는 관점이 잘못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믿음은 개인 마다 다르고, 간섭할 수 없다. 신이 있느냐는 논쟁거리가 아니라 믿음이 다르구나로 접근해야 한다.“며 ”우리는 믿음의 문제를 진리의 측면에서 논쟁하나보니 끝이 없고 결온이 나지 않는다. 믿음은 재인의 자유이고, 헌법이 보장한 것“이라며 ”믿음에 대해 우열을 논하거나 진리를 논하는 것은 어리석다. 마지 헌법이 자유라는 권리를 보장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법륜 스님은 붓다의 가르침인 ‘윤회’는 인도 전통사상의 윤회와는 다른 개념”이라며 “붓다는 왜 사람이 괴로운가를 고민했다. 의식이 없다.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다. 어떤 현상도 원인 없이 생겨나는 것은 없다. 저절로 생긴 게 없다. 원인이 있어 결과가 있다. 원인을 지으면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는 결과가 반드시 나타난다.”고 했다.

이어 “천안지는 지금 내가 이런 말과 행동을 하면 아직 결과가 안 드러났지만 미래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힘이다. 결과를 예측하지 못하니 나쁜 행위가 가능하다. 결과를 알면 누가 나쁜 짓을 하겠나”라며 “숙명지는 지금 일어나는 현상의 결과를 보고 원인을 알아내는 것이고, 원인을 알아보고 결과를 예측하는 게 천안지”라며 “부처님은 6년 고행을 하면서 원인과 결과를 알았다. 괴로움의 뿌리 중 하나가 욕망인데, 욕망을 충족하면 기분이 좋다. 기분이 좋은 것을 행복으로 삼는다. 그런데 사람은 다 원하는 것을 이루려 하는데, 이루어지지 않아 괴롭고 기분 나쁘고 불행하다. 이루어졌더라도 욕망이 커지는 성질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붓다가 태자 시절 욕망의 충족이 남보다 나았으니 행복하다고 볼 수 있지만 욕망은 끝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붓다는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해 욕망을 따르는 게 해탈의 길이 아니고 행복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며 “그래서 욕망의 씨를 말려야 한다는 출가 사문의 가르침을 따랐다. 그것이 고행주의이다. 그런데 붓다는 피골이 상접할 때까지 누구보다 고행을 했지만, 해탈하지 못했다. 그래서 고행을 덜 해서 그런가, 아니면 너무 해서 그런가, 자신을 돌아보고 삶을 돌아봤다. 그래서 출가 후 욕망을 억제했는데 욕망을 따라가는 것만이 욕망의 노예가 아닌, 욕망을 거부하는 것도 욕망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또 “욕망을 따라가서 얻은 기쁨이 쾌락이고, 욕망에서 벗어나 얻은 기쁨이 고행이었지만, 어떤 것을 억제하고 따라가는 게 해탈은 아니었다. 욕망에서 자유로워져야 하는 것을 알았다. 욕구가 일어나는 걸 알뿐이지, ‘먹어야지’ ‘안 먹어야지’ 하지도 말라. 욕망이 일어나는구나는 것 알아야 한다고 했다. 이게 알아차림이다. 다만 알아차리기만 해라. 이것이 새로운 것의 발견 ‘중도’이다. 중도로 해탈을 증득했다.”면서 “바라는 바가 이루어져 기분 좋은 게 행이면, 반드시 원하는 것이 안 이루어지면 불행하다. 행과 불행이 되풀이된다. 우리 삶은 돈을 벌어서 기분이 좋았다면 돈을 잃으면 불행이 온다. 누구를 만나서 기뻤다면 헤어지면 괴롭다. 락(樂)과 고(苦)가 되풀이하는 게 ‘윤회’”라고 했다.

법륜 스님은 “중생의 삶은 고락이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고락을 분리해 락만 얻겠다는 것은 현실서 이룰 수 없다. 젊음이 낙이라면 늙음은 고다. 밖에서 아름다움의 본질은 내부는 더러움이다. 부처님이 가르친 윤회는 고락이 되풀이하는 것”이라며 “그래서 고는 락이고 락은 고이다. 이를 알아야 사성제의 첫 번째 고성제를 알게 된다.”고 했다.

이어 “‘고’인지 모르기 때문에 ‘락’에 매달려서 고의 과보를 계속 받는다. 이게 윤회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뿌리는 욕망인데, 욕망을 알아차리는 것이 욕망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고, 그러면 고가 발생하지 않는다.”면서 “고가 영원히 발생하지 않으면 락도 발생하지 않으니, 고가 사라짐과 동시에 락이 사라진 것을 ‘고요정적’이라고 하고, 이것이 열반”이라고 했다.

스님은 “파도의 오르고 내리는 것이 윤회라면 적정은 고요함이다. 불교의 열반은 우리 식으로 행복으로 번역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즐거움의 행복과는 다른 것이다. 즐거움으로 하면 행복이 아니고 열반이다. 그런데 니르바나로 하면 무쓴 뜻인지 모른다.”면서 “괴로움에 벗어나는 걸 해탈, 세속적 말로 자유인데 내 맘대로 하는 자유와 혼돈이 된다. 세속적 자유와 달리 ‘참자유’, ‘참행복’이라고 해야 하는데, 내 맘대로 해서 얻는 자유가 아닌 욕망에서 벗어나 고락이 윤회하지 않는 자유를 말한다. 자기를 이기는 자가 진정한 영웅이라고 붓다는 말한다.”고 했다.

또 “고가 소멸됐다는 관점에서는 열반이라고 한다. 해탈, 열반이란 용어를 쓰지만 인도 말로는 니르바나이다.”며 “불교가 추구하는 이상은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 고요적정, 자유로움, 해탈과 열반이 불교의 궁극적 목적이다. 신앙은 복을 받고 극락에 가는 게 이상인데, 이는 신앙적 이상”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수행적 관점에서는 빠르냐, 느리냐, 다음 생이 있느냐, 극락에 가느냐 하는 것은 논의의 대상이 안 된다.”며 “그래서 붓다는 그 당시에도 계급 차별을 부정하고 성차별을 부정했다. 지금도 인도서 안 되지만 2600년 전 그런 가르침 편 것은 굉장한 일”이라며 “붓다의 가르침도 500년 정도 지나자 계급과 성차별을 합리화하는 것으로 바뀐다. 그래서 복을 많이 지어야 남자가 되고 왕이 되고, 전생에 죄를 많이 지으면 거지가 되고 장애인이 된다고 하는데 이건 인권침해다. 장애인 차별, 여성 차별, 신분 차별을 전생을 빌려 차별하는 것, 이런 운명론이나 사주팔자 신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을 불교는 부정한다.”고 했다.

법륜 스님은 이날 국회정각회 정기법회에 초청법사로 ‘윤회와 해탈’을 주제로 법문했다.

스님은 ‘윤회와 해탈’이 종교적·신앙적 의미와 다르마와는 다른 의미라고 지적했다. 스님은 “믿음이 중심되는 것이 종교이고, 진실을 탐구해 사실을 밝히는 게 다르마, 진리”라며 인도 전통사상과 한두교의 윤회와 해탈은 붓다께서 설한 가르침과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했다.

법륜 스님은 “인간은 모를 때 두려워한다. 모르는 사람을 만났을 때 불안하고, 모르는 곳에 갈 때가 불안하다. 어두울 때가 불안하고, 모르는 일할 때 마음은 불안하고 두렵다.”며 “모르는 것 중 가장 모르는 것은 죽은 뒤 이야기이다. 그래서 죽음에 두려움이 있다.”고 했다.

이어 “두려움을 극복하려고 예부터 여러 생각이 나왔다. 먼저 ‘안 죽고 영원히 산다’는 것이다. 영생 추구의 흐름은 지금도 있다. 그런데 영원히 살 수 없다. 또 나온 생각이 ‘죽어서 좋은 데 간다’는 것이다. 여기보다 더 좋은 데 가니까 두려움이 줄어든다. 그래서 천당과 지옥이 생겼다. 그런데 죽어서 좋은 데 간다는 생각을 믿는 사람은 두렵지 않고 믿지 않는 사람은 두려움이 있다.”고 했다.

스님은 “인도 사람들이 더 좋은 생각을 해냈다. 죽어서 좋은 데 가도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니, 죽은 뒤에 다시 태어난다. 헤어져도 금방 다시 만난다는 생각이다.”며 “인도 사람은 사람이 죽으면 우는 게 우리보다 적다. 다시 태어난다고 하니 죽은 시신 오래 두지 않고 , 장례도 당일 화장한다.”고 했다. .

이어 “다시 태어난다는 게 ‘윤회’인데, 인도의 역사로 보면 원주민인 드라비다족으로부터 시작한다. 현재 인도 주류문화를 이룬 아리안도 윤회를 받아들여 인도 전통사상이자 신앙이 됐다.”며 “불교도 인도에서 태어나 이것을 받아들였다. 윤회를 믿으면 불교 신자이고 밎지 않으면 불교 신자가 아니다고들 한다.”며 “그런데 인도 전통사상은 힌두교의 사상과 같다. 이는 불교의 아이덴티티가 될 수 없다.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윤회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고 인조 전통신앙”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럼 불교도 윤회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부처님이 말씀하신 윤회는 인도 전통신앙의 윤회와 같겠느냐”며 “부처님은 더 본질적인 것을 탐구했다. 부처님은 두려움이 죽음 때문이 아닌 무지 때문에 생긴다고 하셨다. 인간 고뇌의 근원을 탐구해 보니 결국 무지 때문에 생긴다. 그래서 무지, 무명을 타파하면 두려움이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는 신과 인간의 모든 굴레부터 벗어났다’, ‘무명을 타파했다’고 하셨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니 관심의 대상은 죽음이 아니다. 이것이 믿음을 통한 종교와 탐구를 통한 진리, 다르마의 차이”라고 강조했다.





“종교적 윤회는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하지만, 붓다가 가르치신 윤회는 행과 불행을 되풀이하는 것에서 벗어난 것이며,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을 해탈, 열반이라고 한다. 해탈은 누구나 가능하다는 게 붓다의 가르침이다.…종교가 다르고 믿음이 다른 것은 헌법이 보장한 개인의 자유이다. 종파도 다르고 사상도 다를 수 있지만 이를 존중해야 한다. 인도 전통사상에서 이어진 종교적인 것에서 답을 찾지 말고 붓다의 다르마를 재발견해 널리 사람들에게 알리고 종교의 차원을 넘어 인간을 행복하게 하고 불법을 다시 세계에 재현할 수 있을 것이다.”

정도회 지도법사 법륜 스님은 7일 국회의사당 정각선원에서 열린 국회정각회 12월 정기법회에서 이같이 법문했다. 법륜 스님은 “종교적 믿음과 다르마(불법, 담마)는 다른 것”이라며 “신앙적적 믿음은 개인의 자유지만, 불자는 붓다의 다르마, 담마의 진실을 배우고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법륜 스님은 이날 국회정각회 정기법회에 초청법사로 ‘윤회와 해탈’을 주제로 법문했다.

스님은 ‘윤회와 해탈’이 종교적·신앙적 의미와 다르마와는 다른 의미라고 지적했다. 스님은 “믿음이 중심되는 것이 종교이고, 진실을 탐구해 사실을 밝히는 게 다르마, 진리”라며 인도 전통사상과 한두교의 윤회와 해탈은 붓다께서 설한 가르침과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했다.

법륜 스님은 “인간은 모를 때 두려워한다. 모르는 사람을 만났을 때 불안하고, 모르는 곳에 갈 때가 불안하다. 어두울 때가 불안하고, 모르는 일할 때 마음은 불안하고 두렵다.”며 “모르는 것 중 가장 모르는 것은 죽은 뒤 이야기이다. 그래서 죽음에 두려움이 있다.”고 했다.

이어 “두려움을 극복하려고 예부터 여러 생각이 나왔다. 먼저 ‘안 죽고 영원히 산다’는 것이다. 영생 추구의 흐름은 지금도 있다. 그런데 영원히 살 수 없다. 또 나온 생각이 ‘죽어서 좋은 데 간다’는 것이다. 여기보다 더 좋은 데 가니까 두려움이 줄어든다. 그래서 천당과 지옥이 생겼다. 그런데 죽어서 좋은 데 간다는 생각을 믿는 사람은 두렵지 않고 믿지 않는 사람은 두려움이 있다.”고 했다.

스님은 “인도 사람들이 더 좋은 생각을 해냈다. 죽어서 좋은 데 가도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니, 죽은 뒤에 다시 태어난다. 헤어져도 금방 다시 만난다는 생각이다.”며 “인도 사람은 사람이 죽으면 우는 게 우리보다 적다. 다시 태어난다고 하니 죽은 시신 오래 두지 않고 , 장례도 당일 화장한다.”고 했다. .

이어 “다시 태어난다는 게 ‘윤회’인데, 인도의 역사로 보면 원주민인 드라비다족으로부터 시작한다. 현재 인도 주류문화를 이룬 아리안도 윤회를 받아들여 인도 전통사상이자 신앙이 됐다.”며 “불교도 인도에서 태어나 이것을 받아들였다. 윤회를 믿으면 불교 신자이고 밎지 않으면 불교 신자가 아니다고들 한다.”며 “그런데 인도 전통사상은 힌두교의 사상과 같다. 이는 불교의 아이덴티티가 될 수 없다.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윤회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고 인조 전통신앙”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럼 불교도 윤회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부처님이 말씀하신 윤회는 인도 전통신앙의 윤회와 같겠느냐”며 “부처님은 더 본질적인 것을 탐구했다. 부처님은 두려움이 죽음 때문이 아닌 무지 때문에 생긴다고 하셨다. 인간 고뇌의 근원을 탐구해 보니 결국 무지 때문에 생긴다. 그래서 무지, 무명을 타파하면 두려움이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는 신과 인간의 모든 굴레부터 벗어났다’, ‘무명을 타파했다’고 하셨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니 관심의 대상은 죽음이 아니다. 이것이 믿음을 통한 종교와 탐구를 통한 진리, 다르마의 차이”라고 강조했다.







스님은 “불교의 핵심 가르침은 무명을 타파해 해탈하는 것이다. 불교라는 종교는 윤회에 의해 좋은 삶을 받거나, 좋은 세상에 태어나는 것을 신앙으로 삼지만, 결국 우리 신앙과 진리(다르마)와 모순되는 관계에 놓여 있다.”고 지적했다.

법륜 스님은 “‘윤회를 한다, 안 한다’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이는 주 관심사에서 벗어난 것이다.”라며 “비유하면, 우리는 하늘을 보면서 ‘해가 뜨고 진다’고 말한다. 태양이 지구를 돌고 있구나라고 경험적으로 생각했다. 뜬다는 것은 시작이고, 진다는 것은 ‘멸’이다.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더 깊이 탐구하면 태양이 지구를 돈다는 것은 현실에서 모순이 생긴다. 연구 거듭해 보니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게 아니라 지구가 돈다. 더 탐구하니 태양은 그냥 있고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다. 지구가 자전하니 태양이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한다. 감각적으로 해가 뜨고 진다거나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진실을 알면 태양은 뜨는 것도 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무시무종”이라고 했다.

이어 “진리는 무시무종이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어떻게 시작됐지’라는 질문이 나온다. 그래서 창조론이 나온다. 또 끝이 있다고 생각하니 당연히 종말론이 나온다. 그러면 누가 창조했느냐, 어떻게 종말이 오느냐. 이런 것의 근저에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는 인식 때문”이라며 “무시무종이면 창조론이나 종말론이 나올 수 없다.”고 했다.

법륜 스님은 “두려움이 있고,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거냐’고 하면 내생 천당 극락 얘기가 나오지만, 두려움이 없어지면 그런 얘기할 필요가 없어진다.”며 “그래서 ‘윤회하지 않는다’, ‘천국이 없다’, ‘내생이 없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런 생각의 뿌리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것이 탐구를 통해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했다.







법륜 스님은 믿음과 전통문화의 문제가 진리, 다르마의 문제를 다르게 보아야 하는데, 이를 뒤섞어 보기 때문에 의문이 생긴다고 보았다.

스님은 “이미 깨달음을 얻어 두려움이 없어진 사람도, 일상적 용어나 전통적 문화에서 나온 용어를 쓰지 않는 것은 아니다.”며 “이는 용어의 문제이지 진리의 문제는 아니다. 하나의 문화적 현상일 뿐이다.”고 했다.

스님은 "본질을 알면 물을 게 없어진다. 전통적으로 윤회는 사람이 죽으면 어느 세상에 가던지 새로 태어나던지 해야 한다. 그러려면 자아라는 알맹이가 있어야 한다. 자아가 있어야 천당도 가고 지옥도 가고 사람도 되고 개도 된다.“면서 ”그런데 부처님의 교설은 무아라 했고 실체가 없다고 가르치셨다. 무아 무상 공은 탐구를 통한 진리를 발견한 표상이고 윤회는 전통적인 문화의 군상이다. 믿음의 군상에 내생이 있느냐, 신이 있느냐, 어느 게 맞느냐 하면 관점을 잘 못잡은 것이다. 믿음의 문제여서 진리냐 아니냐 논하는 자체가 사물을 보는 관점이 잘못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믿음은 개인 마다 다르고, 간섭할 수 없다. 신이 있느냐는 논쟁거리가 아니라 믿음이 다르구나로 접근해야 한다.“며 ”우리는 믿음의 문제를 진리의 측면에서 논쟁하나보니 끝이 없고 결온이 나지 않는다. 믿음은 재인의 자유이고, 헌법이 보장한 것“이라며 ”믿음에 대해 우열을 논하거나 진리를 논하는 것은 어리석다. 마지 헌법이 자유라는 권리를 보장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법륜 스님은 붓다의 가르침인 ‘윤회’는 인도 전통사상의 윤회와는 다른 개념”이라며 “붓다는 왜 사람이 괴로운가를 고민했다. 의식이 없다.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다. 어떤 현상도 원인 없이 생겨나는 것은 없다. 저절로 생긴 게 없다. 원인이 있어 결과가 있다. 원인을 지으면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는 결과가 반드시 나타난다.”고 했다.

이어 “천안지는 지금 내가 이런 말과 행동을 하면 아직 결과가 안 드러났지만 미래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힘이다. 결과를 예측하지 못하니 나쁜 행위가 가능하다. 결과를 알면 누가 나쁜 짓을 하겠나”라며 “숙명지는 지금 일어나는 현상의 결과를 보고 원인을 알아내는 것이고, 원인을 알아보고 결과를 예측하는 게 천안지”라며 “부처님은 6년 고행을 하면서 원인과 결과를 알았다. 괴로움의 뿌리 중 하나가 욕망인데, 욕망을 충족하면 기분이 좋다. 기분이 좋은 것을 행복으로 삼는다. 그런데 사람은 다 원하는 것을 이루려 하는데, 이루어지지 않아 괴롭고 기분 나쁘고 불행하다. 이루어졌더라도 욕망이 커지는 성질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붓다가 태자 시절 욕망의 충족이 남보다 나았으니 행복하다고 볼 수 있지만 욕망은 끝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붓다는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해 욕망을 따르는 게 해탈의 길이 아니고 행복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며 “그래서 욕망의 씨를 말려야 한다는 출가 사문의 가르침을 따랐다. 그것이 고행주의이다. 그런데 붓다는 피골이 상접할 때까지 누구보다 고행을 했지만, 해탈하지 못했다. 그래서 고행을 덜 해서 그런가, 아니면 너무 해서 그런가, 자신을 돌아보고 삶을 돌아봤다. 그래서 출가 후 욕망을 억제했는데 욕망을 따라가는 것만이 욕망의 노예가 아닌, 욕망을 거부하는 것도 욕망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또 “욕망을 따라가서 얻은 기쁨이 쾌락이고, 욕망에서 벗어나 얻은 기쁨이 고행이었지만, 어떤 것을 억제하고 따라가는 게 해탈은 아니었다. 욕망에서 자유로워져야 하는 것을 알았다. 욕구가 일어나는 걸 알뿐이지, ‘먹어야지’ ‘안 먹어야지’ 하지도 말라. 욕망이 일어나는구나는 것 알아야 한다고 했다. 이게 알아차림이다. 다만 알아차리기만 해라. 이것이 새로운 것의 발견 ‘중도’이다. 중도로 해탈을 증득했다.”면서 “바라는 바가 이루어져 기분 좋은 게 행이면, 반드시 원하는 것이 안 이루어지면 불행하다. 행과 불행이 되풀이된다. 우리 삶은 돈을 벌어서 기분이 좋았다면 돈을 잃으면 불행이 온다. 누구를 만나서 기뻤다면 헤어지면 괴롭다. 락(樂)과 고(苦)가 되풀이하는 게 ‘윤회’”라고 했다.

법륜 스님은 “중생의 삶은 고락이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고락을 분리해 락만 얻겠다는 것은 현실서 이룰 수 없다. 젊음이 낙이라면 늙음은 고다. 밖에서 아름다움의 본질은 내부는 더러움이다. 부처님이 가르친 윤회는 고락이 되풀이하는 것”이라며 “그래서 고는 락이고 락은 고이다. 이를 알아야 사성제의 첫 번째 고성제를 알게 된다.”고 했다.

이어 “‘고’인지 모르기 때문에 ‘락’에 매달려서 고의 과보를 계속 받는다. 이게 윤회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뿌리는 욕망인데, 욕망을 알아차리는 것이 욕망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고, 그러면 고가 발생하지 않는다.”면서 “고가 영원히 발생하지 않으면 락도 발생하지 않으니, 고가 사라짐과 동시에 락이 사라진 것을 ‘고요정적’이라고 하고, 이것이 열반”이라고 했다.

스님은 “파도의 오르고 내리는 것이 윤회라면 적정은 고요함이다. 불교의 열반은 우리 식으로 행복으로 번역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즐거움의 행복과는 다른 것이다. 즐거움으로 하면 행복이 아니고 열반이다. 그런데 니르바나로 하면 무쓴 뜻인지 모른다.”면서 “괴로움에 벗어나는 걸 해탈, 세속적 말로 자유인데 내 맘대로 하는 자유와 혼돈이 된다. 세속적 자유와 달리 ‘참자유’, ‘참행복’이라고 해야 하는데, 내 맘대로 해서 얻는 자유가 아닌 욕망에서 벗어나 고락이 윤회하지 않는 자유를 말한다. 자기를 이기는 자가 진정한 영웅이라고 붓다는 말한다.”고 했다.

또 “고가 소멸됐다는 관점에서는 열반이라고 한다. 해탈, 열반이란 용어를 쓰지만 인도 말로는 니르바나이다.”며 “불교가 추구하는 이상은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 고요적정, 자유로움, 해탈과 열반이 불교의 궁극적 목적이다. 신앙은 복을 받고 극락에 가는 게 이상인데, 이는 신앙적 이상”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수행적 관점에서는 빠르냐, 느리냐, 다음 생이 있느냐, 극락에 가느냐 하는 것은 논의의 대상이 안 된다.”며 “그래서 붓다는 그 당시에도 계급 차별을 부정하고 성차별을 부정했다. 지금도 인도서 안 되지만 2600년 전 그런 가르침 편 것은 굉장한 일”이라며 “붓다의 가르침도 500년 정도 지나자 계급과 성차별을 합리화하는 것으로 바뀐다. 그래서 복을 많이 지어야 남자가 되고 왕이 되고, 전생에 죄를 많이 지으면 거지가 되고 장애인이 된다고 하는데 이건 인권침해다. 장애인 차별, 여성 차별, 신분 차별을 전생을 빌려 차별하는 것, 이런 운명론이나 사주팔자 신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을 불교는 부정한다.”고 했다.

스님은 “불교의 핵심 가르침은 무명을 타파해 해탈하는 것이다. 불교라는 종교는 윤회에 의해 좋은 삶을 받거나, 좋은 세상에 태어나는 것을 신앙으로 삼지만, 결국 우리 신앙과 진리(다르마)와 모순되는 관계에 놓여 있다.”고 지적했다.

법륜 스님은 “‘윤회를 한다, 안 한다’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이는 주 관심사에서 벗어난 것이다.”라며 “비유하면, 우리는 하늘을 보면서 ‘해가 뜨고 진다’고 말한다. 태양이 지구를 돌고 있구나라고 경험적으로 생각했다. 뜬다는 것은 시작이고, 진다는 것은 ‘멸’이다.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더 깊이 탐구하면 태양이 지구를 돈다는 것은 현실에서 모순이 생긴다. 연구 거듭해 보니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게 아니라 지구가 돈다. 더 탐구하니 태양은 그냥 있고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다. 지구가 자전하니 태양이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한다. 감각적으로 해가 뜨고 진다거나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진실을 알면 태양은 뜨는 것도 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무시무종”이라고 했다.

이어 “진리는 무시무종이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어떻게 시작됐지’라는 질문이 나온다. 그래서 창조론이 나온다. 또 끝이 있다고 생각하니 당연히 종말론이 나온다. 그러면 누가 창조했느냐, 어떻게 종말이 오느냐. 이런 것의 근저에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는 인식 때문”이라며 “무시무종이면 창조론이나 종말론이 나올 수 없다.”고 했다.

법륜 스님은 “두려움이 있고,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거냐’고 하면 내생 천당 극락 얘기가 나오지만, 두려움이 없어지면 그런 얘기할 필요가 없어진다.”며 “그래서 ‘윤회하지 않는다’, ‘천국이 없다’, ‘내생이 없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런 생각의 뿌리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것이 탐구를 통해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했다.





“종교적 윤회는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하지만, 붓다가 가르치신 윤회는 행과 불행을 되풀이하는 것에서 벗어난 것이며,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을 해탈, 열반이라고 한다. 해탈은 누구나 가능하다는 게 붓다의 가르침이다.…종교가 다르고 믿음이 다른 것은 헌법이 보장한 개인의 자유이다. 종파도 다르고 사상도 다를 수 있지만 이를 존중해야 한다. 인도 전통사상에서 이어진 종교적인 것에서 답을 찾지 말고 붓다의 다르마를 재발견해 널리 사람들에게 알리고 종교의 차원을 넘어 인간을 행복하게 하고 불법을 다시 세계에 재현할 수 있을 것이다.”

정도회 지도법사 법륜 스님은 7일 국회의사당 정각선원에서 열린 국회정각회 12월 정기법회에서 이같이 법문했다. 법륜 스님은 “종교적 믿음과 다르마(불법, 담마)는 다른 것”이라며 “신앙적적 믿음은 개인의 자유지만, 불자는 붓다의 다르마, 담마의 진실을 배우고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법륜 스님은 이날 국회정각회 정기법회에 초청법사로 ‘윤회와 해탈’을 주제로 법문했다.

스님은 ‘윤회와 해탈’이 종교적·신앙적 의미와 다르마와는 다른 의미라고 지적했다. 스님은 “믿음이 중심되는 것이 종교이고, 진실을 탐구해 사실을 밝히는 게 다르마, 진리”라며 인도 전통사상과 한두교의 윤회와 해탈은 붓다께서 설한 가르침과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했다.

법륜 스님은 “인간은 모를 때 두려워한다. 모르는 사람을 만났을 때 불안하고, 모르는 곳에 갈 때가 불안하다. 어두울 때가 불안하고, 모르는 일할 때 마음은 불안하고 두렵다.”며 “모르는 것 중 가장 모르는 것은 죽은 뒤 이야기이다. 그래서 죽음에 두려움이 있다.”고 했다.

이어 “두려움을 극복하려고 예부터 여러 생각이 나왔다. 먼저 ‘안 죽고 영원히 산다’는 것이다. 영생 추구의 흐름은 지금도 있다. 그런데 영원히 살 수 없다. 또 나온 생각이 ‘죽어서 좋은 데 간다’는 것이다. 여기보다 더 좋은 데 가니까 두려움이 줄어든다. 그래서 천당과 지옥이 생겼다. 그런데 죽어서 좋은 데 간다는 생각을 믿는 사람은 두렵지 않고 믿지 않는 사람은 두려움이 있다.”고 했다.

스님은 “인도 사람들이 더 좋은 생각을 해냈다. 죽어서 좋은 데 가도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니, 죽은 뒤에 다시 태어난다. 헤어져도 금방 다시 만난다는 생각이다.”며 “인도 사람은 사람이 죽으면 우는 게 우리보다 적다. 다시 태어난다고 하니 죽은 시신 오래 두지 않고 , 장례도 당일 화장한다.”고 했다. .

이어 “다시 태어난다는 게 ‘윤회’인데, 인도의 역사로 보면 원주민인 드라비다족으로부터 시작한다. 현재 인도 주류문화를 이룬 아리안도 윤회를 받아들여 인도 전통사상이자 신앙이 됐다.”며 “불교도 인도에서 태어나 이것을 받아들였다. 윤회를 믿으면 불교 신자이고 밎지 않으면 불교 신자가 아니다고들 한다.”며 “그런데 인도 전통사상은 힌두교의 사상과 같다. 이는 불교의 아이덴티티가 될 수 없다.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윤회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고 인조 전통신앙”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럼 불교도 윤회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부처님이 말씀하신 윤회는 인도 전통신앙의 윤회와 같겠느냐”며 “부처님은 더 본질적인 것을 탐구했다. 부처님은 두려움이 죽음 때문이 아닌 무지 때문에 생긴다고 하셨다. 인간 고뇌의 근원을 탐구해 보니 결국 무지 때문에 생긴다. 그래서 무지, 무명을 타파하면 두려움이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는 신과 인간의 모든 굴레부터 벗어났다’, ‘무명을 타파했다’고 하셨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니 관심의 대상은 죽음이 아니다. 이것이 믿음을 통한 종교와 탐구를 통한 진리, 다르마의 차이”라고 강조했다.







스님은 “불교의 핵심 가르침은 무명을 타파해 해탈하는 것이다. 불교라는 종교는 윤회에 의해 좋은 삶을 받거나, 좋은 세상에 태어나는 것을 신앙으로 삼지만, 결국 우리 신앙과 진리(다르마)와 모순되는 관계에 놓여 있다.”고 지적했다.

법륜 스님은 “‘윤회를 한다, 안 한다’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이는 주 관심사에서 벗어난 것이다.”라며 “비유하면, 우리는 하늘을 보면서 ‘해가 뜨고 진다’고 말한다. 태양이 지구를 돌고 있구나라고 경험적으로 생각했다. 뜬다는 것은 시작이고, 진다는 것은 ‘멸’이다.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더 깊이 탐구하면 태양이 지구를 돈다는 것은 현실에서 모순이 생긴다. 연구 거듭해 보니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게 아니라 지구가 돈다. 더 탐구하니 태양은 그냥 있고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다. 지구가 자전하니 태양이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한다. 감각적으로 해가 뜨고 진다거나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진실을 알면 태양은 뜨는 것도 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무시무종”이라고 했다.

이어 “진리는 무시무종이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어떻게 시작됐지’라는 질문이 나온다. 그래서 창조론이 나온다. 또 끝이 있다고 생각하니 당연히 종말론이 나온다. 그러면 누가 창조했느냐, 어떻게 종말이 오느냐. 이런 것의 근저에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는 인식 때문”이라며 “무시무종이면 창조론이나 종말론이 나올 수 없다.”고 했다.

법륜 스님은 “두려움이 있고,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거냐’고 하면 내생 천당 극락 얘기가 나오지만, 두려움이 없어지면 그런 얘기할 필요가 없어진다.”며 “그래서 ‘윤회하지 않는다’, ‘천국이 없다’, ‘내생이 없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런 생각의 뿌리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것이 탐구를 통해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했다.







법륜 스님은 믿음과 전통문화의 문제가 진리, 다르마의 문제를 다르게 보아야 하는데, 이를 뒤섞어 보기 때문에 의문이 생긴다고 보았다.

스님은 “이미 깨달음을 얻어 두려움이 없어진 사람도, 일상적 용어나 전통적 문화에서 나온 용어를 쓰지 않는 것은 아니다.”며 “이는 용어의 문제이지 진리의 문제는 아니다. 하나의 문화적 현상일 뿐이다.”고 했다.

스님은 "본질을 알면 물을 게 없어진다. 전통적으로 윤회는 사람이 죽으면 어느 세상에 가던지 새로 태어나던지 해야 한다. 그러려면 자아라는 알맹이가 있어야 한다. 자아가 있어야 천당도 가고 지옥도 가고 사람도 되고 개도 된다.“면서 ”그런데 부처님의 교설은 무아라 했고 실체가 없다고 가르치셨다. 무아 무상 공은 탐구를 통한 진리를 발견한 표상이고 윤회는 전통적인 문화의 군상이다. 믿음의 군상에 내생이 있느냐, 신이 있느냐, 어느 게 맞느냐 하면 관점을 잘 못잡은 것이다. 믿음의 문제여서 진리냐 아니냐 논하는 자체가 사물을 보는 관점이 잘못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믿음은 개인 마다 다르고, 간섭할 수 없다. 신이 있느냐는 논쟁거리가 아니라 믿음이 다르구나로 접근해야 한다.“며 ”우리는 믿음의 문제를 진리의 측면에서 논쟁하나보니 끝이 없고 결온이 나지 않는다. 믿음은 재인의 자유이고, 헌법이 보장한 것“이라며 ”믿음에 대해 우열을 논하거나 진리를 논하는 것은 어리석다. 마지 헌법이 자유라는 권리를 보장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법륜 스님은 붓다의 가르침인 ‘윤회’는 인도 전통사상의 윤회와는 다른 개념”이라며 “붓다는 왜 사람이 괴로운가를 고민했다. 의식이 없다.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다. 어떤 현상도 원인 없이 생겨나는 것은 없다. 저절로 생긴 게 없다. 원인이 있어 결과가 있다. 원인을 지으면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는 결과가 반드시 나타난다.”고 했다.

이어 “천안지는 지금 내가 이런 말과 행동을 하면 아직 결과가 안 드러났지만 미래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힘이다. 결과를 예측하지 못하니 나쁜 행위가 가능하다. 결과를 알면 누가 나쁜 짓을 하겠나”라며 “숙명지는 지금 일어나는 현상의 결과를 보고 원인을 알아내는 것이고, 원인을 알아보고 결과를 예측하는 게 천안지”라며 “부처님은 6년 고행을 하면서 원인과 결과를 알았다. 괴로움의 뿌리 중 하나가 욕망인데, 욕망을 충족하면 기분이 좋다. 기분이 좋은 것을 행복으로 삼는다. 그런데 사람은 다 원하는 것을 이루려 하는데, 이루어지지 않아 괴롭고 기분 나쁘고 불행하다. 이루어졌더라도 욕망이 커지는 성질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붓다가 태자 시절 욕망의 충족이 남보다 나았으니 행복하다고 볼 수 있지만 욕망은 끝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붓다는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해 욕망을 따르는 게 해탈의 길이 아니고 행복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며 “그래서 욕망의 씨를 말려야 한다는 출가 사문의 가르침을 따랐다. 그것이 고행주의이다. 그런데 붓다는 피골이 상접할 때까지 누구보다 고행을 했지만, 해탈하지 못했다. 그래서 고행을 덜 해서 그런가, 아니면 너무 해서 그런가, 자신을 돌아보고 삶을 돌아봤다. 그래서 출가 후 욕망을 억제했는데 욕망을 따라가는 것만이 욕망의 노예가 아닌, 욕망을 거부하는 것도 욕망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또 “욕망을 따라가서 얻은 기쁨이 쾌락이고, 욕망에서 벗어나 얻은 기쁨이 고행이었지만, 어떤 것을 억제하고 따라가는 게 해탈은 아니었다. 욕망에서 자유로워져야 하는 것을 알았다. 욕구가 일어나는 걸 알뿐이지, ‘먹어야지’ ‘안 먹어야지’ 하지도 말라. 욕망이 일어나는구나는 것 알아야 한다고 했다. 이게 알아차림이다. 다만 알아차리기만 해라. 이것이 새로운 것의 발견 ‘중도’이다. 중도로 해탈을 증득했다.”면서 “바라는 바가 이루어져 기분 좋은 게 행이면, 반드시 원하는 것이 안 이루어지면 불행하다. 행과 불행이 되풀이된다. 우리 삶은 돈을 벌어서 기분이 좋았다면 돈을 잃으면 불행이 온다. 누구를 만나서 기뻤다면 헤어지면 괴롭다. 락(樂)과 고(苦)가 되풀이하는 게 ‘윤회’”라고 했다.

법륜 스님은 “중생의 삶은 고락이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고락을 분리해 락만 얻겠다는 것은 현실서 이룰 수 없다. 젊음이 낙이라면 늙음은 고다. 밖에서 아름다움의 본질은 내부는 더러움이다. 부처님이 가르친 윤회는 고락이 되풀이하는 것”이라며 “그래서 고는 락이고 락은 고이다. 이를 알아야 사성제의 첫 번째 고성제를 알게 된다.”고 했다.

이어 “‘고’인지 모르기 때문에 ‘락’에 매달려서 고의 과보를 계속 받는다. 이게 윤회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뿌리는 욕망인데, 욕망을 알아차리는 것이 욕망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고, 그러면 고가 발생하지 않는다.”면서 “고가 영원히 발생하지 않으면 락도 발생하지 않으니, 고가 사라짐과 동시에 락이 사라진 것을 ‘고요정적’이라고 하고, 이것이 열반”이라고 했다.

스님은 “파도의 오르고 내리는 것이 윤회라면 적정은 고요함이다. 불교의 열반은 우리 식으로 행복으로 번역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즐거움의 행복과는 다른 것이다. 즐거움으로 하면 행복이 아니고 열반이다. 그런데 니르바나로 하면 무쓴 뜻인지 모른다.”면서 “괴로움에 벗어나는 걸 해탈, 세속적 말로 자유인데 내 맘대로 하는 자유와 혼돈이 된다. 세속적 자유와 달리 ‘참자유’, ‘참행복’이라고 해야 하는데, 내 맘대로 해서 얻는 자유가 아닌 욕망에서 벗어나 고락이 윤회하지 않는 자유를 말한다. 자기를 이기는 자가 진정한 영웅이라고 붓다는 말한다.”고 했다.

또 “고가 소멸됐다는 관점에서는 열반이라고 한다. 해탈, 열반이란 용어를 쓰지만 인도 말로는 니르바나이다.”며 “불교가 추구하는 이상은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 고요적정, 자유로움, 해탈과 열반이 불교의 궁극적 목적이다. 신앙은 복을 받고 극락에 가는 게 이상인데, 이는 신앙적 이상”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수행적 관점에서는 빠르냐, 느리냐, 다음 생이 있느냐, 극락에 가느냐 하는 것은 논의의 대상이 안 된다.”며 “그래서 붓다는 그 당시에도 계급 차별을 부정하고 성차별을 부정했다. 지금도 인도서 안 되지만 2600년 전 그런 가르침 편 것은 굉장한 일”이라며 “붓다의 가르침도 500년 정도 지나자 계급과 성차별을 합리화하는 것으로 바뀐다. 그래서 복을 많이 지어야 남자가 되고 왕이 되고, 전생에 죄를 많이 지으면 거지가 되고 장애인이 된다고 하는데 이건 인권침해다. 장애인 차별, 여성 차별, 신분 차별을 전생을 빌려 차별하는 것, 이런 운명론이나 사주팔자 신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을 불교는 부정한다.”고 했다.

법륜 스님은 믿음과 전통문화의 문제가 진리, 다르마의 문제를 다르게 보아야 하는데, 이를 뒤섞어 보기 때문에 의문이 생긴다고 보았다.

스님은 “이미 깨달음을 얻어 두려움이 없어진 사람도, 일상적 용어나 전통적 문화에서 나온 용어를 쓰지 않는 것은 아니다.”며 “이는 용어의 문제이지 진리의 문제는 아니다. 하나의 문화적 현상일 뿐이다.”고 했다.

스님은 "본질을 알면 물을 게 없어진다. 전통적으로 윤회는 사람이 죽으면 어느 세상에 가던지 새로 태어나던지 해야 한다. 그러려면 자아라는 알맹이가 있어야 한다. 자아가 있어야 천당도 가고 지옥도 가고 사람도 되고 개도 된다.“면서 ”그런데 부처님의 교설은 무아라 했고 실체가 없다고 가르치셨다. 무아 무상 공은 탐구를 통한 진리를 발견한 표상이고 윤회는 전통적인 문화의 군상이다. 믿음의 군상에 내생이 있느냐, 신이 있느냐, 어느 게 맞느냐 하면 관점을 잘 못잡은 것이다. 믿음의 문제여서 진리냐 아니냐 논하는 자체가 사물을 보는 관점이 잘못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믿음은 개인 마다 다르고, 간섭할 수 없다. 신이 있느냐는 논쟁거리가 아니라 믿음이 다르구나로 접근해야 한다.“며 ”우리는 믿음의 문제를 진리의 측면에서 논쟁하나보니 끝이 없고 결온이 나지 않는다. 믿음은 재인의 자유이고, 헌법이 보장한 것“이라며 ”믿음에 대해 우열을 논하거나 진리를 논하는 것은 어리석다. 마지 헌법이 자유라는 권리를 보장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법륜 스님은 붓다의 가르침인 ‘윤회’는 인도 전통사상의 윤회와는 다른 개념”이라며 “붓다는 왜 사람이 괴로운가를 고민했다. 의식이 없다.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다. 어떤 현상도 원인 없이 생겨나는 것은 없다. 저절로 생긴 게 없다. 원인이 있어 결과가 있다. 원인을 지으면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는 결과가 반드시 나타난다.”고 했다.

이어 “천안지는 지금 내가 이런 말과 행동을 하면 아직 결과가 안 드러났지만 미래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힘이다. 결과를 예측하지 못하니 나쁜 행위가 가능하다. 결과를 알면 누가 나쁜 짓을 하겠나”라며 “숙명지는 지금 일어나는 현상의 결과를 보고 원인을 알아내는 것이고, 원인을 알아보고 결과를 예측하는 게 천안지”라며 “부처님은 6년 고행을 하면서 원인과 결과를 알았다. 괴로움의 뿌리 중 하나가 욕망인데, 욕망을 충족하면 기분이 좋다. 기분이 좋은 것을 행복으로 삼는다. 그런데 사람은 다 원하는 것을 이루려 하는데, 이루어지지 않아 괴롭고 기분 나쁘고 불행하다. 이루어졌더라도 욕망이 커지는 성질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붓다가 태자 시절 욕망의 충족이 남보다 나았으니 행복하다고 볼 수 있지만 욕망은 끝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붓다는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해 욕망을 따르는 게 해탈의 길이 아니고 행복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며 “그래서 욕망의 씨를 말려야 한다는 출가 사문의 가르침을 따랐다. 그것이 고행주의이다. 그런데 붓다는 피골이 상접할 때까지 누구보다 고행을 했지만, 해탈하지 못했다. 그래서 고행을 덜 해서 그런가, 아니면 너무 해서 그런가, 자신을 돌아보고 삶을 돌아봤다. 그래서 출가 후 욕망을 억제했는데 욕망을 따라가는 것만이 욕망의 노예가 아닌, 욕망을 거부하는 것도 욕망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종교적 윤회는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하지만, 붓다가 가르치신 윤회는 행과 불행을 되풀이하는 것에서 벗어난 것이며,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을 해탈, 열반이라고 한다. 해탈은 누구나 가능하다는 게 붓다의 가르침이다.…종교가 다르고 믿음이 다른 것은 헌법이 보장한 개인의 자유이다. 종파도 다르고 사상도 다를 수 있지만 이를 존중해야 한다. 인도 전통사상에서 이어진 종교적인 것에서 답을 찾지 말고 붓다의 다르마를 재발견해 널리 사람들에게 알리고 종교의 차원을 넘어 인간을 행복하게 하고 불법을 다시 세계에 재현할 수 있을 것이다.”

정도회 지도법사 법륜 스님은 7일 국회의사당 정각선원에서 열린 국회정각회 12월 정기법회에서 이같이 법문했다. 법륜 스님은 “종교적 믿음과 다르마(불법, 담마)는 다른 것”이라며 “신앙적적 믿음은 개인의 자유지만, 불자는 붓다의 다르마, 담마의 진실을 배우고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법륜 스님은 이날 국회정각회 정기법회에 초청법사로 ‘윤회와 해탈’을 주제로 법문했다.

스님은 ‘윤회와 해탈’이 종교적·신앙적 의미와 다르마와는 다른 의미라고 지적했다. 스님은 “믿음이 중심되는 것이 종교이고, 진실을 탐구해 사실을 밝히는 게 다르마, 진리”라며 인도 전통사상과 한두교의 윤회와 해탈은 붓다께서 설한 가르침과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했다.

법륜 스님은 “인간은 모를 때 두려워한다. 모르는 사람을 만났을 때 불안하고, 모르는 곳에 갈 때가 불안하다. 어두울 때가 불안하고, 모르는 일할 때 마음은 불안하고 두렵다.”며 “모르는 것 중 가장 모르는 것은 죽은 뒤 이야기이다. 그래서 죽음에 두려움이 있다.”고 했다.

이어 “두려움을 극복하려고 예부터 여러 생각이 나왔다. 먼저 ‘안 죽고 영원히 산다’는 것이다. 영생 추구의 흐름은 지금도 있다. 그런데 영원히 살 수 없다. 또 나온 생각이 ‘죽어서 좋은 데 간다’는 것이다. 여기보다 더 좋은 데 가니까 두려움이 줄어든다. 그래서 천당과 지옥이 생겼다. 그런데 죽어서 좋은 데 간다는 생각을 믿는 사람은 두렵지 않고 믿지 않는 사람은 두려움이 있다.”고 했다.

스님은 “인도 사람들이 더 좋은 생각을 해냈다. 죽어서 좋은 데 가도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니, 죽은 뒤에 다시 태어난다. 헤어져도 금방 다시 만난다는 생각이다.”며 “인도 사람은 사람이 죽으면 우는 게 우리보다 적다. 다시 태어난다고 하니 죽은 시신 오래 두지 않고 , 장례도 당일 화장한다.”고 했다. .

이어 “다시 태어난다는 게 ‘윤회’인데, 인도의 역사로 보면 원주민인 드라비다족으로부터 시작한다. 현재 인도 주류문화를 이룬 아리안도 윤회를 받아들여 인도 전통사상이자 신앙이 됐다.”며 “불교도 인도에서 태어나 이것을 받아들였다. 윤회를 믿으면 불교 신자이고 밎지 않으면 불교 신자가 아니다고들 한다.”며 “그런데 인도 전통사상은 힌두교의 사상과 같다. 이는 불교의 아이덴티티가 될 수 없다.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윤회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고 인조 전통신앙”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럼 불교도 윤회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부처님이 말씀하신 윤회는 인도 전통신앙의 윤회와 같겠느냐”며 “부처님은 더 본질적인 것을 탐구했다. 부처님은 두려움이 죽음 때문이 아닌 무지 때문에 생긴다고 하셨다. 인간 고뇌의 근원을 탐구해 보니 결국 무지 때문에 생긴다. 그래서 무지, 무명을 타파하면 두려움이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는 신과 인간의 모든 굴레부터 벗어났다’, ‘무명을 타파했다’고 하셨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니 관심의 대상은 죽음이 아니다. 이것이 믿음을 통한 종교와 탐구를 통한 진리, 다르마의 차이”라고 강조했다.







스님은 “불교의 핵심 가르침은 무명을 타파해 해탈하는 것이다. 불교라는 종교는 윤회에 의해 좋은 삶을 받거나, 좋은 세상에 태어나는 것을 신앙으로 삼지만, 결국 우리 신앙과 진리(다르마)와 모순되는 관계에 놓여 있다.”고 지적했다.

법륜 스님은 “‘윤회를 한다, 안 한다’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이는 주 관심사에서 벗어난 것이다.”라며 “비유하면, 우리는 하늘을 보면서 ‘해가 뜨고 진다’고 말한다. 태양이 지구를 돌고 있구나라고 경험적으로 생각했다. 뜬다는 것은 시작이고, 진다는 것은 ‘멸’이다.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더 깊이 탐구하면 태양이 지구를 돈다는 것은 현실에서 모순이 생긴다. 연구 거듭해 보니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게 아니라 지구가 돈다. 더 탐구하니 태양은 그냥 있고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다. 지구가 자전하니 태양이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한다. 감각적으로 해가 뜨고 진다거나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진실을 알면 태양은 뜨는 것도 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무시무종”이라고 했다.

이어 “진리는 무시무종이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어떻게 시작됐지’라는 질문이 나온다. 그래서 창조론이 나온다. 또 끝이 있다고 생각하니 당연히 종말론이 나온다. 그러면 누가 창조했느냐, 어떻게 종말이 오느냐. 이런 것의 근저에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는 인식 때문”이라며 “무시무종이면 창조론이나 종말론이 나올 수 없다.”고 했다.

법륜 스님은 “두려움이 있고,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거냐’고 하면 내생 천당 극락 얘기가 나오지만, 두려움이 없어지면 그런 얘기할 필요가 없어진다.”며 “그래서 ‘윤회하지 않는다’, ‘천국이 없다’, ‘내생이 없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런 생각의 뿌리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것이 탐구를 통해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했다.







법륜 스님은 믿음과 전통문화의 문제가 진리, 다르마의 문제를 다르게 보아야 하는데, 이를 뒤섞어 보기 때문에 의문이 생긴다고 보았다.

스님은 “이미 깨달음을 얻어 두려움이 없어진 사람도, 일상적 용어나 전통적 문화에서 나온 용어를 쓰지 않는 것은 아니다.”며 “이는 용어의 문제이지 진리의 문제는 아니다. 하나의 문화적 현상일 뿐이다.”고 했다.

스님은 "본질을 알면 물을 게 없어진다. 전통적으로 윤회는 사람이 죽으면 어느 세상에 가던지 새로 태어나던지 해야 한다. 그러려면 자아라는 알맹이가 있어야 한다. 자아가 있어야 천당도 가고 지옥도 가고 사람도 되고 개도 된다.“면서 ”그런데 부처님의 교설은 무아라 했고 실체가 없다고 가르치셨다. 무아 무상 공은 탐구를 통한 진리를 발견한 표상이고 윤회는 전통적인 문화의 군상이다. 믿음의 군상에 내생이 있느냐, 신이 있느냐, 어느 게 맞느냐 하면 관점을 잘 못잡은 것이다. 믿음의 문제여서 진리냐 아니냐 논하는 자체가 사물을 보는 관점이 잘못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믿음은 개인 마다 다르고, 간섭할 수 없다. 신이 있느냐는 논쟁거리가 아니라 믿음이 다르구나로 접근해야 한다.“며 ”우리는 믿음의 문제를 진리의 측면에서 논쟁하나보니 끝이 없고 결온이 나지 않는다. 믿음은 재인의 자유이고, 헌법이 보장한 것“이라며 ”믿음에 대해 우열을 논하거나 진리를 논하는 것은 어리석다. 마지 헌법이 자유라는 권리를 보장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법륜 스님은 붓다의 가르침인 ‘윤회’는 인도 전통사상의 윤회와는 다른 개념”이라며 “붓다는 왜 사람이 괴로운가를 고민했다. 의식이 없다.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다. 어떤 현상도 원인 없이 생겨나는 것은 없다. 저절로 생긴 게 없다. 원인이 있어 결과가 있다. 원인을 지으면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는 결과가 반드시 나타난다.”고 했다.

이어 “천안지는 지금 내가 이런 말과 행동을 하면 아직 결과가 안 드러났지만 미래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힘이다. 결과를 예측하지 못하니 나쁜 행위가 가능하다. 결과를 알면 누가 나쁜 짓을 하겠나”라며 “숙명지는 지금 일어나는 현상의 결과를 보고 원인을 알아내는 것이고, 원인을 알아보고 결과를 예측하는 게 천안지”라며 “부처님은 6년 고행을 하면서 원인과 결과를 알았다. 괴로움의 뿌리 중 하나가 욕망인데, 욕망을 충족하면 기분이 좋다. 기분이 좋은 것을 행복으로 삼는다. 그런데 사람은 다 원하는 것을 이루려 하는데, 이루어지지 않아 괴롭고 기분 나쁘고 불행하다. 이루어졌더라도 욕망이 커지는 성질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붓다가 태자 시절 욕망의 충족이 남보다 나았으니 행복하다고 볼 수 있지만 욕망은 끝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붓다는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해 욕망을 따르는 게 해탈의 길이 아니고 행복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며 “그래서 욕망의 씨를 말려야 한다는 출가 사문의 가르침을 따랐다. 그것이 고행주의이다. 그런데 붓다는 피골이 상접할 때까지 누구보다 고행을 했지만, 해탈하지 못했다. 그래서 고행을 덜 해서 그런가, 아니면 너무 해서 그런가, 자신을 돌아보고 삶을 돌아봤다. 그래서 출가 후 욕망을 억제했는데 욕망을 따라가는 것만이 욕망의 노예가 아닌, 욕망을 거부하는 것도 욕망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또 “욕망을 따라가서 얻은 기쁨이 쾌락이고, 욕망에서 벗어나 얻은 기쁨이 고행이었지만, 어떤 것을 억제하고 따라가는 게 해탈은 아니었다. 욕망에서 자유로워져야 하는 것을 알았다. 욕구가 일어나는 걸 알뿐이지, ‘먹어야지’ ‘안 먹어야지’ 하지도 말라. 욕망이 일어나는구나는 것 알아야 한다고 했다. 이게 알아차림이다. 다만 알아차리기만 해라. 이것이 새로운 것의 발견 ‘중도’이다. 중도로 해탈을 증득했다.”면서 “바라는 바가 이루어져 기분 좋은 게 행이면, 반드시 원하는 것이 안 이루어지면 불행하다. 행과 불행이 되풀이된다. 우리 삶은 돈을 벌어서 기분이 좋았다면 돈을 잃으면 불행이 온다. 누구를 만나서 기뻤다면 헤어지면 괴롭다. 락(樂)과 고(苦)가 되풀이하는 게 ‘윤회’”라고 했다.

법륜 스님은 “중생의 삶은 고락이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고락을 분리해 락만 얻겠다는 것은 현실서 이룰 수 없다. 젊음이 낙이라면 늙음은 고다. 밖에서 아름다움의 본질은 내부는 더러움이다. 부처님이 가르친 윤회는 고락이 되풀이하는 것”이라며 “그래서 고는 락이고 락은 고이다. 이를 알아야 사성제의 첫 번째 고성제를 알게 된다.”고 했다.

이어 “‘고’인지 모르기 때문에 ‘락’에 매달려서 고의 과보를 계속 받는다. 이게 윤회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뿌리는 욕망인데, 욕망을 알아차리는 것이 욕망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고, 그러면 고가 발생하지 않는다.”면서 “고가 영원히 발생하지 않으면 락도 발생하지 않으니, 고가 사라짐과 동시에 락이 사라진 것을 ‘고요정적’이라고 하고, 이것이 열반”이라고 했다.

스님은 “파도의 오르고 내리는 것이 윤회라면 적정은 고요함이다. 불교의 열반은 우리 식으로 행복으로 번역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즐거움의 행복과는 다른 것이다. 즐거움으로 하면 행복이 아니고 열반이다. 그런데 니르바나로 하면 무쓴 뜻인지 모른다.”면서 “괴로움에 벗어나는 걸 해탈, 세속적 말로 자유인데 내 맘대로 하는 자유와 혼돈이 된다. 세속적 자유와 달리 ‘참자유’, ‘참행복’이라고 해야 하는데, 내 맘대로 해서 얻는 자유가 아닌 욕망에서 벗어나 고락이 윤회하지 않는 자유를 말한다. 자기를 이기는 자가 진정한 영웅이라고 붓다는 말한다.”고 했다.

또 “고가 소멸됐다는 관점에서는 열반이라고 한다. 해탈, 열반이란 용어를 쓰지만 인도 말로는 니르바나이다.”며 “불교가 추구하는 이상은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 고요적정, 자유로움, 해탈과 열반이 불교의 궁극적 목적이다. 신앙은 복을 받고 극락에 가는 게 이상인데, 이는 신앙적 이상”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수행적 관점에서는 빠르냐, 느리냐, 다음 생이 있느냐, 극락에 가느냐 하는 것은 논의의 대상이 안 된다.”며 “그래서 붓다는 그 당시에도 계급 차별을 부정하고 성차별을 부정했다. 지금도 인도서 안 되지만 2600년 전 그런 가르침 편 것은 굉장한 일”이라며 “붓다의 가르침도 500년 정도 지나자 계급과 성차별을 합리화하는 것으로 바뀐다. 그래서 복을 많이 지어야 남자가 되고 왕이 되고, 전생에 죄를 많이 지으면 거지가 되고 장애인이 된다고 하는데 이건 인권침해다. 장애인 차별, 여성 차별, 신분 차별을 전생을 빌려 차별하는 것, 이런 운명론이나 사주팔자 신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을 불교는 부정한다.”고 했다.

또 “욕망을 따라가서 얻은 기쁨이 쾌락이고, 욕망에서 벗어나 얻은 기쁨이 고행이었지만, 어떤 것을 억제하고 따라가는 게 해탈은 아니었다. 욕망에서 자유로워져야 하는 것을 알았다. 욕구가 일어나는 걸 알뿐이지, ‘먹어야지’ ‘안 먹어야지’ 하지도 말라. 욕망이 일어나는구나는 것 알아야 한다고 했다. 이게 알아차림이다. 다만 알아차리기만 해라. 이것이 새로운 것의 발견 ‘중도’이다. 중도로 해탈을 증득했다.”면서 “바라는 바가 이루어져 기분 좋은 게 행이면, 반드시 원하는 것이 안 이루어지면 불행하다. 행과 불행이 되풀이된다. 우리 삶은 돈을 벌어서 기분이 좋았다면 돈을 잃으면 불행이 온다. 누구를 만나서 기뻤다면 헤어지면 괴롭다. 락(樂)과 고(苦)가 되풀이하는 게 ‘윤회’”라고 했다.

법륜 스님은 “중생의 삶은 고락이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고락을 분리해 락만 얻겠다는 것은 현실서 이룰 수 없다. 젊음이 낙이라면 늙음은 고다. 밖에서 아름다움의 본질은 내부는 더러움이다. 부처님이 가르친 윤회는 고락이 되풀이하는 것”이라며 “그래서 고는 락이고 락은 고이다. 이를 알아야 사성제의 첫 번째 고성제를 알게 된다.”고 했다.

이어 “‘고’인지 모르기 때문에 ‘락’에 매달려서 고의 과보를 계속 받는다. 이게 윤회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뿌리는 욕망인데, 욕망을 알아차리는 것이 욕망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고, 그러면 고가 발생하지 않는다.”면서 “고가 영원히 발생하지 않으면 락도 발생하지 않으니, 고가 사라짐과 동시에 락이 사라진 것을 ‘고요정적’이라고 하고, 이것이 열반”이라고 했다.

스님은 “파도의 오르고 내리는 것이 윤회라면 적정은 고요함이다. 불교의 열반은 우리 식으로 행복으로 번역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즐거움의 행복과는 다른 것이다. 즐거움으로 하면 행복이 아니고 열반이다. 그런데 니르바나로 하면 무쓴 뜻인지 모른다.”면서 “괴로움에 벗어나는 걸 해탈, 세속적 말로 자유인데 내 맘대로 하는 자유와 혼돈이 된다. 세속적 자유와 달리 ‘참자유’, ‘참행복’이라고 해야 하는데, 내 맘대로 해서 얻는 자유가 아닌 욕망에서 벗어나 고락이 윤회하지 않는 자유를 말한다. 자기를 이기는 자가 진정한 영웅이라고 붓다는 말한다.”고 했다.

또 “고가 소멸됐다는 관점에서는 열반이라고 한다. 해탈, 열반이란 용어를 쓰지만 인도 말로는 니르바나이다.”며 “불교가 추구하는 이상은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 고요적정, 자유로움, 해탈과 열반이 불교의 궁극적 목적이다. 신앙은 복을 받고 극락에 가는 게 이상인데, 이는 신앙적 이상”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수행적 관점에서는 빠르냐, 느리냐, 다음 생이 있느냐, 극락에 가느냐 하는 것은 논의의 대상이 안 된다.”며 “그래서 붓다는 그 당시에도 계급 차별을 부정하고 성차별을 부정했다. 지금도 인도서 안 되지만 2600년 전 그런 가르침 편 것은 굉장한 일”이라며 “붓다의 가르침도 500년 정도 지나자 계급과 성차별을 합리화하는 것으로 바뀐다. 그래서 복을 많이 지어야 남자가 되고 왕이 되고, 전생에 죄를 많이 지으면 거지가 되고 장애인이 된다고 하는데 이건 인권침해다. 장애인 차별, 여성 차별, 신분 차별을 전생을 빌려 차별하는 것, 이런 운명론이나 사주팔자 신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을 불교는 부정한다.”고 했다.





“종교적 윤회는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하지만, 붓다가 가르치신 윤회는 행과 불행을 되풀이하는 것에서 벗어난 것이며,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을 해탈, 열반이라고 한다. 해탈은 누구나 가능하다는 게 붓다의 가르침이다.…종교가 다르고 믿음이 다른 것은 헌법이 보장한 개인의 자유이다. 종파도 다르고 사상도 다를 수 있지만 이를 존중해야 한다. 인도 전통사상에서 이어진 종교적인 것에서 답을 찾지 말고 붓다의 다르마를 재발견해 널리 사람들에게 알리고 종교의 차원을 넘어 인간을 행복하게 하고 불법을 다시 세계에 재현할 수 있을 것이다.”

정도회 지도법사 법륜 스님은 7일 국회의사당 정각선원에서 열린 국회정각회 12월 정기법회에서 이같이 법문했다. 법륜 스님은 “종교적 믿음과 다르마(불법, 담마)는 다른 것”이라며 “신앙적적 믿음은 개인의 자유지만, 불자는 붓다의 다르마, 담마의 진실을 배우고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법륜 스님은 이날 국회정각회 정기법회에 초청법사로 ‘윤회와 해탈’을 주제로 법문했다.

스님은 ‘윤회와 해탈’이 종교적·신앙적 의미와 다르마와는 다른 의미라고 지적했다. 스님은 “믿음이 중심되는 것이 종교이고, 진실을 탐구해 사실을 밝히는 게 다르마, 진리”라며 인도 전통사상과 한두교의 윤회와 해탈은 붓다께서 설한 가르침과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했다.

법륜 스님은 “인간은 모를 때 두려워한다. 모르는 사람을 만났을 때 불안하고, 모르는 곳에 갈 때가 불안하다. 어두울 때가 불안하고, 모르는 일할 때 마음은 불안하고 두렵다.”며 “모르는 것 중 가장 모르는 것은 죽은 뒤 이야기이다. 그래서 죽음에 두려움이 있다.”고 했다.

이어 “두려움을 극복하려고 예부터 여러 생각이 나왔다. 먼저 ‘안 죽고 영원히 산다’는 것이다. 영생 추구의 흐름은 지금도 있다. 그런데 영원히 살 수 없다. 또 나온 생각이 ‘죽어서 좋은 데 간다’는 것이다. 여기보다 더 좋은 데 가니까 두려움이 줄어든다. 그래서 천당과 지옥이 생겼다. 그런데 죽어서 좋은 데 간다는 생각을 믿는 사람은 두렵지 않고 믿지 않는 사람은 두려움이 있다.”고 했다.

스님은 “인도 사람들이 더 좋은 생각을 해냈다. 죽어서 좋은 데 가도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니, 죽은 뒤에 다시 태어난다. 헤어져도 금방 다시 만난다는 생각이다.”며 “인도 사람은 사람이 죽으면 우는 게 우리보다 적다. 다시 태어난다고 하니 죽은 시신 오래 두지 않고 , 장례도 당일 화장한다.”고 했다. .

이어 “다시 태어난다는 게 ‘윤회’인데, 인도의 역사로 보면 원주민인 드라비다족으로부터 시작한다. 현재 인도 주류문화를 이룬 아리안도 윤회를 받아들여 인도 전통사상이자 신앙이 됐다.”며 “불교도 인도에서 태어나 이것을 받아들였다. 윤회를 믿으면 불교 신자이고 밎지 않으면 불교 신자가 아니다고들 한다.”며 “그런데 인도 전통사상은 힌두교의 사상과 같다. 이는 불교의 아이덴티티가 될 수 없다.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윤회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고 인조 전통신앙”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럼 불교도 윤회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부처님이 말씀하신 윤회는 인도 전통신앙의 윤회와 같겠느냐”며 “부처님은 더 본질적인 것을 탐구했다. 부처님은 두려움이 죽음 때문이 아닌 무지 때문에 생긴다고 하셨다. 인간 고뇌의 근원을 탐구해 보니 결국 무지 때문에 생긴다. 그래서 무지, 무명을 타파하면 두려움이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는 신과 인간의 모든 굴레부터 벗어났다’, ‘무명을 타파했다’고 하셨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니 관심의 대상은 죽음이 아니다. 이것이 믿음을 통한 종교와 탐구를 통한 진리, 다르마의 차이”라고 강조했다.







스님은 “불교의 핵심 가르침은 무명을 타파해 해탈하는 것이다. 불교라는 종교는 윤회에 의해 좋은 삶을 받거나, 좋은 세상에 태어나는 것을 신앙으로 삼지만, 결국 우리 신앙과 진리(다르마)와 모순되는 관계에 놓여 있다.”고 지적했다.

법륜 스님은 “‘윤회를 한다, 안 한다’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이는 주 관심사에서 벗어난 것이다.”라며 “비유하면, 우리는 하늘을 보면서 ‘해가 뜨고 진다’고 말한다. 태양이 지구를 돌고 있구나라고 경험적으로 생각했다. 뜬다는 것은 시작이고, 진다는 것은 ‘멸’이다.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더 깊이 탐구하면 태양이 지구를 돈다는 것은 현실에서 모순이 생긴다. 연구 거듭해 보니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게 아니라 지구가 돈다. 더 탐구하니 태양은 그냥 있고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다. 지구가 자전하니 태양이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한다. 감각적으로 해가 뜨고 진다거나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진실을 알면 태양은 뜨는 것도 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무시무종”이라고 했다.

이어 “진리는 무시무종이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어떻게 시작됐지’라는 질문이 나온다. 그래서 창조론이 나온다. 또 끝이 있다고 생각하니 당연히 종말론이 나온다. 그러면 누가 창조했느냐, 어떻게 종말이 오느냐. 이런 것의 근저에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는 인식 때문”이라며 “무시무종이면 창조론이나 종말론이 나올 수 없다.”고 했다.

법륜 스님은 “두려움이 있고,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거냐’고 하면 내생 천당 극락 얘기가 나오지만, 두려움이 없어지면 그런 얘기할 필요가 없어진다.”며 “그래서 ‘윤회하지 않는다’, ‘천국이 없다’, ‘내생이 없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런 생각의 뿌리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것이 탐구를 통해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했다.







법륜 스님은 믿음과 전통문화의 문제가 진리, 다르마의 문제를 다르게 보아야 하는데, 이를 뒤섞어 보기 때문에 의문이 생긴다고 보았다.

스님은 “이미 깨달음을 얻어 두려움이 없어진 사람도, 일상적 용어나 전통적 문화에서 나온 용어를 쓰지 않는 것은 아니다.”며 “이는 용어의 문제이지 진리의 문제는 아니다. 하나의 문화적 현상일 뿐이다.”고 했다.

스님은 "본질을 알면 물을 게 없어진다. 전통적으로 윤회는 사람이 죽으면 어느 세상에 가던지 새로 태어나던지 해야 한다. 그러려면 자아라는 알맹이가 있어야 한다. 자아가 있어야 천당도 가고 지옥도 가고 사람도 되고 개도 된다.“면서 ”그런데 부처님의 교설은 무아라 했고 실체가 없다고 가르치셨다. 무아 무상 공은 탐구를 통한 진리를 발견한 표상이고 윤회는 전통적인 문화의 군상이다. 믿음의 군상에 내생이 있느냐, 신이 있느냐, 어느 게 맞느냐 하면 관점을 잘 못잡은 것이다. 믿음의 문제여서 진리냐 아니냐 논하는 자체가 사물을 보는 관점이 잘못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믿음은 개인 마다 다르고, 간섭할 수 없다. 신이 있느냐는 논쟁거리가 아니라 믿음이 다르구나로 접근해야 한다.“며 ”우리는 믿음의 문제를 진리의 측면에서 논쟁하나보니 끝이 없고 결온이 나지 않는다. 믿음은 재인의 자유이고, 헌법이 보장한 것“이라며 ”믿음에 대해 우열을 논하거나 진리를 논하는 것은 어리석다. 마지 헌법이 자유라는 권리를 보장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법륜 스님은 붓다의 가르침인 ‘윤회’는 인도 전통사상의 윤회와는 다른 개념”이라며 “붓다는 왜 사람이 괴로운가를 고민했다. 의식이 없다.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다. 어떤 현상도 원인 없이 생겨나는 것은 없다. 저절로 생긴 게 없다. 원인이 있어 결과가 있다. 원인을 지으면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는 결과가 반드시 나타난다.”고 했다.

이어 “천안지는 지금 내가 이런 말과 행동을 하면 아직 결과가 안 드러났지만 미래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힘이다. 결과를 예측하지 못하니 나쁜 행위가 가능하다. 결과를 알면 누가 나쁜 짓을 하겠나”라며 “숙명지는 지금 일어나는 현상의 결과를 보고 원인을 알아내는 것이고, 원인을 알아보고 결과를 예측하는 게 천안지”라며 “부처님은 6년 고행을 하면서 원인과 결과를 알았다. 괴로움의 뿌리 중 하나가 욕망인데, 욕망을 충족하면 기분이 좋다. 기분이 좋은 것을 행복으로 삼는다. 그런데 사람은 다 원하는 것을 이루려 하는데, 이루어지지 않아 괴롭고 기분 나쁘고 불행하다. 이루어졌더라도 욕망이 커지는 성질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붓다가 태자 시절 욕망의 충족이 남보다 나았으니 행복하다고 볼 수 있지만 욕망은 끝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붓다는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해 욕망을 따르는 게 해탈의 길이 아니고 행복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며 “그래서 욕망의 씨를 말려야 한다는 출가 사문의 가르침을 따랐다. 그것이 고행주의이다. 그런데 붓다는 피골이 상접할 때까지 누구보다 고행을 했지만, 해탈하지 못했다. 그래서 고행을 덜 해서 그런가, 아니면 너무 해서 그런가, 자신을 돌아보고 삶을 돌아봤다. 그래서 출가 후 욕망을 억제했는데 욕망을 따라가는 것만이 욕망의 노예가 아닌, 욕망을 거부하는 것도 욕망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또 “욕망을 따라가서 얻은 기쁨이 쾌락이고, 욕망에서 벗어나 얻은 기쁨이 고행이었지만, 어떤 것을 억제하고 따라가는 게 해탈은 아니었다. 욕망에서 자유로워져야 하는 것을 알았다. 욕구가 일어나는 걸 알뿐이지, ‘먹어야지’ ‘안 먹어야지’ 하지도 말라. 욕망이 일어나는구나는 것 알아야 한다고 했다. 이게 알아차림이다. 다만 알아차리기만 해라. 이것이 새로운 것의 발견 ‘중도’이다. 중도로 해탈을 증득했다.”면서 “바라는 바가 이루어져 기분 좋은 게 행이면, 반드시 원하는 것이 안 이루어지면 불행하다. 행과 불행이 되풀이된다. 우리 삶은 돈을 벌어서 기분이 좋았다면 돈을 잃으면 불행이 온다. 누구를 만나서 기뻤다면 헤어지면 괴롭다. 락(樂)과 고(苦)가 되풀이하는 게 ‘윤회’”라고 했다.

법륜 스님은 “중생의 삶은 고락이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고락을 분리해 락만 얻겠다는 것은 현실서 이룰 수 없다. 젊음이 낙이라면 늙음은 고다. 밖에서 아름다움의 본질은 내부는 더러움이다. 부처님이 가르친 윤회는 고락이 되풀이하는 것”이라며 “그래서 고는 락이고 락은 고이다. 이를 알아야 사성제의 첫 번째 고성제를 알게 된다.”고 했다.

이어 “‘고’인지 모르기 때문에 ‘락’에 매달려서 고의 과보를 계속 받는다. 이게 윤회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뿌리는 욕망인데, 욕망을 알아차리는 것이 욕망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고, 그러면 고가 발생하지 않는다.”면서 “고가 영원히 발생하지 않으면 락도 발생하지 않으니, 고가 사라짐과 동시에 락이 사라진 것을 ‘고요정적’이라고 하고, 이것이 열반”이라고 했다.

스님은 “파도의 오르고 내리는 것이 윤회라면 적정은 고요함이다. 불교의 열반은 우리 식으로 행복으로 번역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즐거움의 행복과는 다른 것이다. 즐거움으로 하면 행복이 아니고 열반이다. 그런데 니르바나로 하면 무쓴 뜻인지 모른다.”면서 “괴로움에 벗어나는 걸 해탈, 세속적 말로 자유인데 내 맘대로 하는 자유와 혼돈이 된다. 세속적 자유와 달리 ‘참자유’, ‘참행복’이라고 해야 하는데, 내 맘대로 해서 얻는 자유가 아닌 욕망에서 벗어나 고락이 윤회하지 않는 자유를 말한다. 자기를 이기는 자가 진정한 영웅이라고 붓다는 말한다.”고 했다.

또 “고가 소멸됐다는 관점에서는 열반이라고 한다. 해탈, 열반이란 용어를 쓰지만 인도 말로는 니르바나이다.”며 “불교가 추구하는 이상은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 고요적정, 자유로움, 해탈과 열반이 불교의 궁극적 목적이다. 신앙은 복을 받고 극락에 가는 게 이상인데, 이는 신앙적 이상”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수행적 관점에서는 빠르냐, 느리냐, 다음 생이 있느냐, 극락에 가느냐 하는 것은 논의의 대상이 안 된다.”며 “그래서 붓다는 그 당시에도 계급 차별을 부정하고 성차별을 부정했다. 지금도 인도서 안 되지만 2600년 전 그런 가르침 편 것은 굉장한 일”이라며 “붓다의 가르침도 500년 정도 지나자 계급과 성차별을 합리화하는 것으로 바뀐다. 그래서 복을 많이 지어야 남자가 되고 왕이 되고, 전생에 죄를 많이 지으면 거지가 되고 장애인이 된다고 하는데 이건 인권침해다. 장애인 차별, 여성 차별, 신분 차별을 전생을 빌려 차별하는 것, 이런 운명론이나 사주팔자 신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을 불교는 부정한다.”고 했다.

법륜 스님은 “미래 문명에는 불교만이 아닌 모든 종교가 점점 사람에게 멀어진다.”며 “배가 고프면 밥을 주고 가난하면 복을 주는 게 우리 요구의 본질이지만, 먹고 입고 자는 게 많이 해결돼 천국 같은 시대가 됐지만 고뇌는 줄어지지 않는다. 이것의 해결법은 부처님 가르침밖에 없다. 붓다의 다르마는 모든 이에게 해당한다. 환경문제 해결, 빈곤 퇴치, 차별 해결, 인권옹호, 개인 행복 추구에도 다르마는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 때문에 불교인들이 전통적 신앙을 갖더라도, 비중을 어디로 넓여야 할까. 진리를 탐구하는 쪽으로, 어떤 고뇌에 처하던 고뇌 없이 사는 삶을 추구하는 게 좋겠다.”면서 “수행하지 않아 자식, 부모, 아내, 남편을 원망한다. 모순 아닌가. 이 세상 사람 중에 가장 맘에 드는 사람 골라잡은 게 아내거나 남편인데 원망하고 산다.”고 했다.

이어 “모순을 일으키는 이유는 욕구, 원하는 것을 이루려던 게 안되면 원망한다. 내가 원하는 자식이, 원하는 아내가 안 되어 주는 데서 생긴다. 지나가는 사람에게는 원망하지 않는 것은 바라는 게 없기 때문”이라며 “상처주는 삶은 어리석다. 다르마를 터득하고 불법의 진실을 밝히면 사람을 소중히 여기게 된다. 종교는 달라도, 믿음은 개인의 자유고 종파도 다르고 사상 다를 수 있지만 존중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공부하면 좋겠다.”고 했다.

이날 법회에는 유수 스님, 주호영 국회정각회장, 이원욱 국회정각회 명예회장, 송언석·이명수·민병덕·조명희·권인숙 국회의원, 조기열 국회직원불자회장, 손숙자 국회직원불자회 부회장 등 50여 명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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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2022-12-13 09:25:58
때때로 한마리 새가 울거나
바람이 나뭇가지로 스칠때면
혹은 한마리 개가 머나먼 농가에서 짖을대
나는 한참동안 귀를 귀울이고 침묵울 지켜야 합니다

나의 영혼은 옛날로 돌아갑니다
천년전 잊어버린 시절에
새와 불어대는 바람이 나와 바슷하고
나의 형제였던 그 옛날로!

나의 영혼은 나무도 되고 동물도 되고
흐트러진 구름도 됩니다
변한 모습, 낯선 모습으로 돌아와서
내게 묻습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요?

g33 2022-12-10 00:26:17
믿음 종교 사상이 다를 수 있지만, 존경까지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배타적이 되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아자씨 2022-12-09 22:07:32
얘야. 헛소리 아
내 여러군데. 님봤네. 불교는. 입중심아냐

너는. 입중시ㅁ으로. 알해 그것도모르고
남들이들으면 그럴듯

행동개차반이고. 구체적수행과 수행법은없어
타종교로개종해도 돼. 같은 무속인이야
건방진자 같은 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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