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88. 네가 그곳에 있어
[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88. 네가 그곳에 있어
  • 전재민 시인
  • 승인 2022.11.21 15: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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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온 날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없지만
발길이 닿는 곳은
눈길 가는 곳은
뱃머리처럼 태평양을 향하고
떠나올 땐 기약 없던 고국

새가 둥지를 떠나듯이
뱀이 허물을 벗듯이
가는 길
눈길 가는 곳에만 마음을 두었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떠나온 둥지처럼
고향 땅 흙냄새 같은 된장 내음이 그리움이고
매콤한 장작 타는 내음이 친구 같더라.







#작가의 변
그리움은 불쑥불쑥 전화도 안 하고 들이닥치는 손님처럼 마음을 헤집어 놓고 만신창이로 먼바다를 바라보게 만든다. 처음 이민왔을 때만 해도 그 그리움은 정당한 이유가 있는 듯 보였다. 두고 온 가족과 두고 온 친구만으로도 충분히 그 이유가 됐다. 하지만 이젠 한국에 산 날이나 캐나다에 산 날이 비슷해져 오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놈의 그리움은 떠나지 않고 늘 불쑥불쑥 찾아와 불청객처럼 괴롭히다 떠나가면서 그리움을 가슴에 잔뜩 묻혀 놓고 떠나가는 것이다.

이민을 떠나올 때 가족 중에 한 사람의 보증을 서는 바람에 호텔로 월급 압류가 들어오고 인천 가좌동 은행 빚으로 산 빌라는 팔릴 기미가 보이지 않아 땡전 한 푼 없이 이민을 떠나는가 싶었는데, 어떻게 변통해서 600만 원을 들고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게 되었다. 그 이민 자금엔 한국에서 부친 이민 이삿짐 비용과 밴쿠버 항구에서 집까지 이사 비용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믿기 힘들다고 선금만 내고 나머지 금액과 밴쿠버 이사 비용은 후불로 지급하기로 하고 이민을 왔는데, 이삿짐이 밤늦게 다른 집 다 내려주고 도착을 한 것이었다. 그래서 일부 밴쿠버 이삿짐 비용을 감해 주는 것으로 합의했는데, 그렇다고 해도 그 이삿짐 비용을 지불하고 모텔에 일주일 묵으면서 아파트 구하러 다녔으니 모텔 비용과 음식 비용 등등은 물론 아파트 보증금과 한 달 렌트비 지불하고 나니 남은 돈은 겨우 2달 렌트비와 최저 생계 비용이었다. 아이들이 아파트에서 신나게 뛰어다녀 정착 서비스를 한 사람들 조언을 따라 찹쌀떡 한 상자 사서 아래층에 가 우리 쌍둥이들이 말려도 많이 뛴다고 이해를 바란다고 하니 그런 걱정말라고 했다. 나중에 살아 보니 그 집에도 많은 식구가 살아 시끄럽고 밤늦게 싸우는 소리가 침대도 없이 바닥에 귀를 대고 자는 위층 우리 집까지 선명히 들렸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뛰지 말라고 입에 달고 살았는데 아이들이 나중에 커서 엄마 아빠가 뛰지 말라고 말한 것이 스트레스였다고 했다.

영어 ESL공부를 하고 저녁과 주말엔 한 식당에서 일하게 됐다. 한 달 늦게 온 친구가 사장에게 말해 취직시켜 준 덕분이다. 지금은 없어진 신라 회관이라는 식당은 한식, 중식(짜장, 짬뽕, 탕수육 등), 일식 바를 하는 곳이었는데 친구는 일식 보조, 난 한식과 중식 보조였다. 한국에서 특급 호텔 다닌 것으로 조리사 취업 이민을 왔지만 직장 생활은 사회생활 처음 하는 직장인 같은 취급을 받았다. 한국에선 특급 호텔 다닌다고 일반 식당에 일하는 사람은 깔보던 젊은 혈기가 속에서 부글부글 끓었다. 당시엔 밴쿠버의 한인타운은 브로드웨이와 킹스웨이 선상에 있었고 일하러 가는 길은 레치몬드에서 버스를 타고 그랜빌 길을 통해 가다 브로드웨이에서 갈아타는 것이었는데 편도 2시간은 걸렸다. 환승 버스가 30분은 늘 걸렸기 때문이다. 당시에 브로드웨이엔 로얄 서울관, 원조 서울관, 캠비로드에 아리랑 등이 있었고 킹스웨이에도 왕가마, 이학 부페등 식당과 선물점 등은 물론 비디오 가게와 한인 식품점이던 웨스턴 마켓 등이 있었다. 한국 식당에선 12시 넘어서 일이 끝나면 버스가 끊어져 사장이 집까지 태워다 주거나 양아저씨가 태워다 주는 일이 많았다. 일 끝나고 술 한잔하고도 마찬가지였다.







영어 학교는 재미있었지만 좀처럼 늘지는 않았다. 그래도 크렌베리 농장 견학도 가고 이력서 수정도 늘 도움받고 같이 공부하던 중국인들, 특히 97년 홍콩 반환을 앞두고 이민을 온 사람들이 많았고 인도, 이란 난민 등이 있었는데 동병상련이라 그런가 아주 친하게 지내고 나중에 마트에서 만나면 중고등학교 동창을 만난 것처럼 반갑기도 하고 그랬다. 그리고 식료품 잡화점 하던 한국 아줌마에게 영어 도움은 많이 받았고 코인라운드리를 나중에 하게 된 아저씨와도 자주 어울렸다. 같은 아파트를 살았고 104호 아파트를 살아서 104호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 104호 성호네가 떠나왔던 토론토로 돌아 가게 되고 코인 라운더리 하는 집이 사업을 시작하고, 또 다른 한국인 목사가 같은 아파트에 이사를 오고, 또 다른 한국인이 이사와 코인 라운더리를 하고 같은 아파트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이웃사촌처럼 지내던 시절도 있었다. 이민 사회 어려움을 나누면서. 그리고 당시엔 한국 식품점과 한국 비디오 빌려다 보는 한국 드라마는 힘든 이민 생활의 유일한 낙이었다. 돌아보면 힘들고 미래가 불투명했어도 재미있었던 시절이었다. 물론 컴퓨터도 없고,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어서 영자신문에 구인란을 보면서 이력서를 써서 우편으로 보내던 어찌 보면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같은 나날이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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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온 날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없지만
발길이 닿는 곳은
눈길 가는 곳은
뱃머리처럼 태평양을 향하고
떠나올 땐 기약 없던 고국

새가 둥지를 떠나듯이
뱀이 허물을 벗듯이
가는 길
눈길 가는 곳에만 마음을 두었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떠나온 둥지처럼
고향 땅 흙냄새 같은 된장 내음이 그리움이고
매콤한 장작 타는 내음이 친구 같더라.





떠나온 날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없지만
발길이 닿는 곳은
눈길 가는 곳은
뱃머리처럼 태평양을 향하고
떠나올 땐 기약 없던 고국

새가 둥지를 떠나듯이
뱀이 허물을 벗듯이
가는 길
눈길 가는 곳에만 마음을 두었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떠나온 둥지처럼
고향 땅 흙냄새 같은 된장 내음이 그리움이고
매콤한 장작 타는 내음이 친구 같더라.







#작가의 변
그리움은 불쑥불쑥 전화도 안 하고 들이닥치는 손님처럼 마음을 헤집어 놓고 만신창이로 먼바다를 바라보게 만든다. 처음 이민왔을 때만 해도 그 그리움은 정당한 이유가 있는 듯 보였다. 두고 온 가족과 두고 온 친구만으로도 충분히 그 이유가 됐다. 하지만 이젠 한국에 산 날이나 캐나다에 산 날이 비슷해져 오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놈의 그리움은 떠나지 않고 늘 불쑥불쑥 찾아와 불청객처럼 괴롭히다 떠나가면서 그리움을 가슴에 잔뜩 묻혀 놓고 떠나가는 것이다.

이민을 떠나올 때 가족 중에 한 사람의 보증을 서는 바람에 호텔로 월급 압류가 들어오고 인천 가좌동 은행 빚으로 산 빌라는 팔릴 기미가 보이지 않아 땡전 한 푼 없이 이민을 떠나는가 싶었는데, 어떻게 변통해서 600만 원을 들고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게 되었다. 그 이민 자금엔 한국에서 부친 이민 이삿짐 비용과 밴쿠버 항구에서 집까지 이사 비용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믿기 힘들다고 선금만 내고 나머지 금액과 밴쿠버 이사 비용은 후불로 지급하기로 하고 이민을 왔는데, 이삿짐이 밤늦게 다른 집 다 내려주고 도착을 한 것이었다. 그래서 일부 밴쿠버 이삿짐 비용을 감해 주는 것으로 합의했는데, 그렇다고 해도 그 이삿짐 비용을 지불하고 모텔에 일주일 묵으면서 아파트 구하러 다녔으니 모텔 비용과 음식 비용 등등은 물론 아파트 보증금과 한 달 렌트비 지불하고 나니 남은 돈은 겨우 2달 렌트비와 최저 생계 비용이었다. 아이들이 아파트에서 신나게 뛰어다녀 정착 서비스를 한 사람들 조언을 따라 찹쌀떡 한 상자 사서 아래층에 가 우리 쌍둥이들이 말려도 많이 뛴다고 이해를 바란다고 하니 그런 걱정말라고 했다. 나중에 살아 보니 그 집에도 많은 식구가 살아 시끄럽고 밤늦게 싸우는 소리가 침대도 없이 바닥에 귀를 대고 자는 위층 우리 집까지 선명히 들렸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뛰지 말라고 입에 달고 살았는데 아이들이 나중에 커서 엄마 아빠가 뛰지 말라고 말한 것이 스트레스였다고 했다.

영어 ESL공부를 하고 저녁과 주말엔 한 식당에서 일하게 됐다. 한 달 늦게 온 친구가 사장에게 말해 취직시켜 준 덕분이다. 지금은 없어진 신라 회관이라는 식당은 한식, 중식(짜장, 짬뽕, 탕수육 등), 일식 바를 하는 곳이었는데 친구는 일식 보조, 난 한식과 중식 보조였다. 한국에서 특급 호텔 다닌 것으로 조리사 취업 이민을 왔지만 직장 생활은 사회생활 처음 하는 직장인 같은 취급을 받았다. 한국에선 특급 호텔 다닌다고 일반 식당에 일하는 사람은 깔보던 젊은 혈기가 속에서 부글부글 끓었다. 당시엔 밴쿠버의 한인타운은 브로드웨이와 킹스웨이 선상에 있었고 일하러 가는 길은 레치몬드에서 버스를 타고 그랜빌 길을 통해 가다 브로드웨이에서 갈아타는 것이었는데 편도 2시간은 걸렸다. 환승 버스가 30분은 늘 걸렸기 때문이다. 당시에 브로드웨이엔 로얄 서울관, 원조 서울관, 캠비로드에 아리랑 등이 있었고 킹스웨이에도 왕가마, 이학 부페등 식당과 선물점 등은 물론 비디오 가게와 한인 식품점이던 웨스턴 마켓 등이 있었다. 한국 식당에선 12시 넘어서 일이 끝나면 버스가 끊어져 사장이 집까지 태워다 주거나 양아저씨가 태워다 주는 일이 많았다. 일 끝나고 술 한잔하고도 마찬가지였다.







영어 학교는 재미있었지만 좀처럼 늘지는 않았다. 그래도 크렌베리 농장 견학도 가고 이력서 수정도 늘 도움받고 같이 공부하던 중국인들, 특히 97년 홍콩 반환을 앞두고 이민을 온 사람들이 많았고 인도, 이란 난민 등이 있었는데 동병상련이라 그런가 아주 친하게 지내고 나중에 마트에서 만나면 중고등학교 동창을 만난 것처럼 반갑기도 하고 그랬다. 그리고 식료품 잡화점 하던 한국 아줌마에게 영어 도움은 많이 받았고 코인라운드리를 나중에 하게 된 아저씨와도 자주 어울렸다. 같은 아파트를 살았고 104호 아파트를 살아서 104호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 104호 성호네가 떠나왔던 토론토로 돌아 가게 되고 코인 라운더리 하는 집이 사업을 시작하고, 또 다른 한국인 목사가 같은 아파트에 이사를 오고, 또 다른 한국인이 이사와 코인 라운더리를 하고 같은 아파트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이웃사촌처럼 지내던 시절도 있었다. 이민 사회 어려움을 나누면서. 그리고 당시엔 한국 식품점과 한국 비디오 빌려다 보는 한국 드라마는 힘든 이민 생활의 유일한 낙이었다. 돌아보면 힘들고 미래가 불투명했어도 재미있었던 시절이었다. 물론 컴퓨터도 없고,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어서 영자신문에 구인란을 보면서 이력서를 써서 우편으로 보내던 어찌 보면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같은 나날이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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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변
그리움은 불쑥불쑥 전화도 안 하고 들이닥치는 손님처럼 마음을 헤집어 놓고 만신창이로 먼바다를 바라보게 만든다. 처음 이민왔을 때만 해도 그 그리움은 정당한 이유가 있는 듯 보였다. 두고 온 가족과 두고 온 친구만으로도 충분히 그 이유가 됐다. 하지만 이젠 한국에 산 날이나 캐나다에 산 날이 비슷해져 오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놈의 그리움은 떠나지 않고 늘 불쑥불쑥 찾아와 불청객처럼 괴롭히다 떠나가면서 그리움을 가슴에 잔뜩 묻혀 놓고 떠나가는 것이다.

이민을 떠나올 때 가족 중에 한 사람의 보증을 서는 바람에 호텔로 월급 압류가 들어오고 인천 가좌동 은행 빚으로 산 빌라는 팔릴 기미가 보이지 않아 땡전 한 푼 없이 이민을 떠나는가 싶었는데, 어떻게 변통해서 600만 원을 들고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게 되었다. 그 이민 자금엔 한국에서 부친 이민 이삿짐 비용과 밴쿠버 항구에서 집까지 이사 비용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믿기 힘들다고 선금만 내고 나머지 금액과 밴쿠버 이사 비용은 후불로 지급하기로 하고 이민을 왔는데, 이삿짐이 밤늦게 다른 집 다 내려주고 도착을 한 것이었다. 그래서 일부 밴쿠버 이삿짐 비용을 감해 주는 것으로 합의했는데, 그렇다고 해도 그 이삿짐 비용을 지불하고 모텔에 일주일 묵으면서 아파트 구하러 다녔으니 모텔 비용과 음식 비용 등등은 물론 아파트 보증금과 한 달 렌트비 지불하고 나니 남은 돈은 겨우 2달 렌트비와 최저 생계 비용이었다. 아이들이 아파트에서 신나게 뛰어다녀 정착 서비스를 한 사람들 조언을 따라 찹쌀떡 한 상자 사서 아래층에 가 우리 쌍둥이들이 말려도 많이 뛴다고 이해를 바란다고 하니 그런 걱정말라고 했다. 나중에 살아 보니 그 집에도 많은 식구가 살아 시끄럽고 밤늦게 싸우는 소리가 침대도 없이 바닥에 귀를 대고 자는 위층 우리 집까지 선명히 들렸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뛰지 말라고 입에 달고 살았는데 아이들이 나중에 커서 엄마 아빠가 뛰지 말라고 말한 것이 스트레스였다고 했다.

영어 ESL공부를 하고 저녁과 주말엔 한 식당에서 일하게 됐다. 한 달 늦게 온 친구가 사장에게 말해 취직시켜 준 덕분이다. 지금은 없어진 신라 회관이라는 식당은 한식, 중식(짜장, 짬뽕, 탕수육 등), 일식 바를 하는 곳이었는데 친구는 일식 보조, 난 한식과 중식 보조였다. 한국에서 특급 호텔 다닌 것으로 조리사 취업 이민을 왔지만 직장 생활은 사회생활 처음 하는 직장인 같은 취급을 받았다. 한국에선 특급 호텔 다닌다고 일반 식당에 일하는 사람은 깔보던 젊은 혈기가 속에서 부글부글 끓었다. 당시엔 밴쿠버의 한인타운은 브로드웨이와 킹스웨이 선상에 있었고 일하러 가는 길은 레치몬드에서 버스를 타고 그랜빌 길을 통해 가다 브로드웨이에서 갈아타는 것이었는데 편도 2시간은 걸렸다. 환승 버스가 30분은 늘 걸렸기 때문이다. 당시에 브로드웨이엔 로얄 서울관, 원조 서울관, 캠비로드에 아리랑 등이 있었고 킹스웨이에도 왕가마, 이학 부페등 식당과 선물점 등은 물론 비디오 가게와 한인 식품점이던 웨스턴 마켓 등이 있었다. 한국 식당에선 12시 넘어서 일이 끝나면 버스가 끊어져 사장이 집까지 태워다 주거나 양아저씨가 태워다 주는 일이 많았다. 일 끝나고 술 한잔하고도 마찬가지였다.





떠나온 날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없지만
발길이 닿는 곳은
눈길 가는 곳은
뱃머리처럼 태평양을 향하고
떠나올 땐 기약 없던 고국

새가 둥지를 떠나듯이
뱀이 허물을 벗듯이
가는 길
눈길 가는 곳에만 마음을 두었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떠나온 둥지처럼
고향 땅 흙냄새 같은 된장 내음이 그리움이고
매콤한 장작 타는 내음이 친구 같더라.







#작가의 변
그리움은 불쑥불쑥 전화도 안 하고 들이닥치는 손님처럼 마음을 헤집어 놓고 만신창이로 먼바다를 바라보게 만든다. 처음 이민왔을 때만 해도 그 그리움은 정당한 이유가 있는 듯 보였다. 두고 온 가족과 두고 온 친구만으로도 충분히 그 이유가 됐다. 하지만 이젠 한국에 산 날이나 캐나다에 산 날이 비슷해져 오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놈의 그리움은 떠나지 않고 늘 불쑥불쑥 찾아와 불청객처럼 괴롭히다 떠나가면서 그리움을 가슴에 잔뜩 묻혀 놓고 떠나가는 것이다.

이민을 떠나올 때 가족 중에 한 사람의 보증을 서는 바람에 호텔로 월급 압류가 들어오고 인천 가좌동 은행 빚으로 산 빌라는 팔릴 기미가 보이지 않아 땡전 한 푼 없이 이민을 떠나는가 싶었는데, 어떻게 변통해서 600만 원을 들고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게 되었다. 그 이민 자금엔 한국에서 부친 이민 이삿짐 비용과 밴쿠버 항구에서 집까지 이사 비용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믿기 힘들다고 선금만 내고 나머지 금액과 밴쿠버 이사 비용은 후불로 지급하기로 하고 이민을 왔는데, 이삿짐이 밤늦게 다른 집 다 내려주고 도착을 한 것이었다. 그래서 일부 밴쿠버 이삿짐 비용을 감해 주는 것으로 합의했는데, 그렇다고 해도 그 이삿짐 비용을 지불하고 모텔에 일주일 묵으면서 아파트 구하러 다녔으니 모텔 비용과 음식 비용 등등은 물론 아파트 보증금과 한 달 렌트비 지불하고 나니 남은 돈은 겨우 2달 렌트비와 최저 생계 비용이었다. 아이들이 아파트에서 신나게 뛰어다녀 정착 서비스를 한 사람들 조언을 따라 찹쌀떡 한 상자 사서 아래층에 가 우리 쌍둥이들이 말려도 많이 뛴다고 이해를 바란다고 하니 그런 걱정말라고 했다. 나중에 살아 보니 그 집에도 많은 식구가 살아 시끄럽고 밤늦게 싸우는 소리가 침대도 없이 바닥에 귀를 대고 자는 위층 우리 집까지 선명히 들렸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뛰지 말라고 입에 달고 살았는데 아이들이 나중에 커서 엄마 아빠가 뛰지 말라고 말한 것이 스트레스였다고 했다.

영어 ESL공부를 하고 저녁과 주말엔 한 식당에서 일하게 됐다. 한 달 늦게 온 친구가 사장에게 말해 취직시켜 준 덕분이다. 지금은 없어진 신라 회관이라는 식당은 한식, 중식(짜장, 짬뽕, 탕수육 등), 일식 바를 하는 곳이었는데 친구는 일식 보조, 난 한식과 중식 보조였다. 한국에서 특급 호텔 다닌 것으로 조리사 취업 이민을 왔지만 직장 생활은 사회생활 처음 하는 직장인 같은 취급을 받았다. 한국에선 특급 호텔 다닌다고 일반 식당에 일하는 사람은 깔보던 젊은 혈기가 속에서 부글부글 끓었다. 당시엔 밴쿠버의 한인타운은 브로드웨이와 킹스웨이 선상에 있었고 일하러 가는 길은 레치몬드에서 버스를 타고 그랜빌 길을 통해 가다 브로드웨이에서 갈아타는 것이었는데 편도 2시간은 걸렸다. 환승 버스가 30분은 늘 걸렸기 때문이다. 당시에 브로드웨이엔 로얄 서울관, 원조 서울관, 캠비로드에 아리랑 등이 있었고 킹스웨이에도 왕가마, 이학 부페등 식당과 선물점 등은 물론 비디오 가게와 한인 식품점이던 웨스턴 마켓 등이 있었다. 한국 식당에선 12시 넘어서 일이 끝나면 버스가 끊어져 사장이 집까지 태워다 주거나 양아저씨가 태워다 주는 일이 많았다. 일 끝나고 술 한잔하고도 마찬가지였다.







영어 학교는 재미있었지만 좀처럼 늘지는 않았다. 그래도 크렌베리 농장 견학도 가고 이력서 수정도 늘 도움받고 같이 공부하던 중국인들, 특히 97년 홍콩 반환을 앞두고 이민을 온 사람들이 많았고 인도, 이란 난민 등이 있었는데 동병상련이라 그런가 아주 친하게 지내고 나중에 마트에서 만나면 중고등학교 동창을 만난 것처럼 반갑기도 하고 그랬다. 그리고 식료품 잡화점 하던 한국 아줌마에게 영어 도움은 많이 받았고 코인라운드리를 나중에 하게 된 아저씨와도 자주 어울렸다. 같은 아파트를 살았고 104호 아파트를 살아서 104호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 104호 성호네가 떠나왔던 토론토로 돌아 가게 되고 코인 라운더리 하는 집이 사업을 시작하고, 또 다른 한국인 목사가 같은 아파트에 이사를 오고, 또 다른 한국인이 이사와 코인 라운더리를 하고 같은 아파트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이웃사촌처럼 지내던 시절도 있었다. 이민 사회 어려움을 나누면서. 그리고 당시엔 한국 식품점과 한국 비디오 빌려다 보는 한국 드라마는 힘든 이민 생활의 유일한 낙이었다. 돌아보면 힘들고 미래가 불투명했어도 재미있었던 시절이었다. 물론 컴퓨터도 없고,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어서 영자신문에 구인란을 보면서 이력서를 써서 우편으로 보내던 어찌 보면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같은 나날이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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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학교는 재미있었지만 좀처럼 늘지는 않았다. 그래도 크렌베리 농장 견학도 가고 이력서 수정도 늘 도움받고 같이 공부하던 중국인들, 특히 97년 홍콩 반환을 앞두고 이민을 온 사람들이 많았고 인도, 이란 난민 등이 있었는데 동병상련이라 그런가 아주 친하게 지내고 나중에 마트에서 만나면 중고등학교 동창을 만난 것처럼 반갑기도 하고 그랬다. 그리고 식료품 잡화점 하던 한국 아줌마에게 영어 도움은 많이 받았고 코인라운드리를 나중에 하게 된 아저씨와도 자주 어울렸다. 같은 아파트를 살았고 104호 아파트를 살아서 104호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 104호 성호네가 떠나왔던 토론토로 돌아 가게 되고 코인 라운더리 하는 집이 사업을 시작하고, 또 다른 한국인 목사가 같은 아파트에 이사를 오고, 또 다른 한국인이 이사와 코인 라운더리를 하고 같은 아파트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이웃사촌처럼 지내던 시절도 있었다. 이민 사회 어려움을 나누면서. 그리고 당시엔 한국 식품점과 한국 비디오 빌려다 보는 한국 드라마는 힘든 이민 생활의 유일한 낙이었다. 돌아보면 힘들고 미래가 불투명했어도 재미있었던 시절이었다. 물론 컴퓨터도 없고,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어서 영자신문에 구인란을 보면서 이력서를 써서 우편으로 보내던 어찌 보면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같은 나날이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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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온 날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없지만
발길이 닿는 곳은
눈길 가는 곳은
뱃머리처럼 태평양을 향하고
떠나올 땐 기약 없던 고국

새가 둥지를 떠나듯이
뱀이 허물을 벗듯이
가는 길
눈길 가는 곳에만 마음을 두었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떠나온 둥지처럼
고향 땅 흙냄새 같은 된장 내음이 그리움이고
매콤한 장작 타는 내음이 친구 같더라.







#작가의 변
그리움은 불쑥불쑥 전화도 안 하고 들이닥치는 손님처럼 마음을 헤집어 놓고 만신창이로 먼바다를 바라보게 만든다. 처음 이민왔을 때만 해도 그 그리움은 정당한 이유가 있는 듯 보였다. 두고 온 가족과 두고 온 친구만으로도 충분히 그 이유가 됐다. 하지만 이젠 한국에 산 날이나 캐나다에 산 날이 비슷해져 오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놈의 그리움은 떠나지 않고 늘 불쑥불쑥 찾아와 불청객처럼 괴롭히다 떠나가면서 그리움을 가슴에 잔뜩 묻혀 놓고 떠나가는 것이다.

이민을 떠나올 때 가족 중에 한 사람의 보증을 서는 바람에 호텔로 월급 압류가 들어오고 인천 가좌동 은행 빚으로 산 빌라는 팔릴 기미가 보이지 않아 땡전 한 푼 없이 이민을 떠나는가 싶었는데, 어떻게 변통해서 600만 원을 들고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게 되었다. 그 이민 자금엔 한국에서 부친 이민 이삿짐 비용과 밴쿠버 항구에서 집까지 이사 비용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믿기 힘들다고 선금만 내고 나머지 금액과 밴쿠버 이사 비용은 후불로 지급하기로 하고 이민을 왔는데, 이삿짐이 밤늦게 다른 집 다 내려주고 도착을 한 것이었다. 그래서 일부 밴쿠버 이삿짐 비용을 감해 주는 것으로 합의했는데, 그렇다고 해도 그 이삿짐 비용을 지불하고 모텔에 일주일 묵으면서 아파트 구하러 다녔으니 모텔 비용과 음식 비용 등등은 물론 아파트 보증금과 한 달 렌트비 지불하고 나니 남은 돈은 겨우 2달 렌트비와 최저 생계 비용이었다. 아이들이 아파트에서 신나게 뛰어다녀 정착 서비스를 한 사람들 조언을 따라 찹쌀떡 한 상자 사서 아래층에 가 우리 쌍둥이들이 말려도 많이 뛴다고 이해를 바란다고 하니 그런 걱정말라고 했다. 나중에 살아 보니 그 집에도 많은 식구가 살아 시끄럽고 밤늦게 싸우는 소리가 침대도 없이 바닥에 귀를 대고 자는 위층 우리 집까지 선명히 들렸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뛰지 말라고 입에 달고 살았는데 아이들이 나중에 커서 엄마 아빠가 뛰지 말라고 말한 것이 스트레스였다고 했다.

영어 ESL공부를 하고 저녁과 주말엔 한 식당에서 일하게 됐다. 한 달 늦게 온 친구가 사장에게 말해 취직시켜 준 덕분이다. 지금은 없어진 신라 회관이라는 식당은 한식, 중식(짜장, 짬뽕, 탕수육 등), 일식 바를 하는 곳이었는데 친구는 일식 보조, 난 한식과 중식 보조였다. 한국에서 특급 호텔 다닌 것으로 조리사 취업 이민을 왔지만 직장 생활은 사회생활 처음 하는 직장인 같은 취급을 받았다. 한국에선 특급 호텔 다닌다고 일반 식당에 일하는 사람은 깔보던 젊은 혈기가 속에서 부글부글 끓었다. 당시엔 밴쿠버의 한인타운은 브로드웨이와 킹스웨이 선상에 있었고 일하러 가는 길은 레치몬드에서 버스를 타고 그랜빌 길을 통해 가다 브로드웨이에서 갈아타는 것이었는데 편도 2시간은 걸렸다. 환승 버스가 30분은 늘 걸렸기 때문이다. 당시에 브로드웨이엔 로얄 서울관, 원조 서울관, 캠비로드에 아리랑 등이 있었고 킹스웨이에도 왕가마, 이학 부페등 식당과 선물점 등은 물론 비디오 가게와 한인 식품점이던 웨스턴 마켓 등이 있었다. 한국 식당에선 12시 넘어서 일이 끝나면 버스가 끊어져 사장이 집까지 태워다 주거나 양아저씨가 태워다 주는 일이 많았다. 일 끝나고 술 한잔하고도 마찬가지였다.







영어 학교는 재미있었지만 좀처럼 늘지는 않았다. 그래도 크렌베리 농장 견학도 가고 이력서 수정도 늘 도움받고 같이 공부하던 중국인들, 특히 97년 홍콩 반환을 앞두고 이민을 온 사람들이 많았고 인도, 이란 난민 등이 있었는데 동병상련이라 그런가 아주 친하게 지내고 나중에 마트에서 만나면 중고등학교 동창을 만난 것처럼 반갑기도 하고 그랬다. 그리고 식료품 잡화점 하던 한국 아줌마에게 영어 도움은 많이 받았고 코인라운드리를 나중에 하게 된 아저씨와도 자주 어울렸다. 같은 아파트를 살았고 104호 아파트를 살아서 104호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 104호 성호네가 떠나왔던 토론토로 돌아 가게 되고 코인 라운더리 하는 집이 사업을 시작하고, 또 다른 한국인 목사가 같은 아파트에 이사를 오고, 또 다른 한국인이 이사와 코인 라운더리를 하고 같은 아파트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이웃사촌처럼 지내던 시절도 있었다. 이민 사회 어려움을 나누면서. 그리고 당시엔 한국 식품점과 한국 비디오 빌려다 보는 한국 드라마는 힘든 이민 생활의 유일한 낙이었다. 돌아보면 힘들고 미래가 불투명했어도 재미있었던 시절이었다. 물론 컴퓨터도 없고,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어서 영자신문에 구인란을 보면서 이력서를 써서 우편으로 보내던 어찌 보면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같은 나날이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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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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