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81. 아파할 때마다
[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81. 아파할 때마다
  • 전재민 시인
  • 승인 2022.10.03 14: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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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내린 동굴 같은
시간이 멈춘 버린 엘리베이터에서
숨을 가쁘게 몰아쉬면서도
손전화가 살아 있어 아들에게 전화한다

아빠 나한테 하면 어떻게
911에 전화해
911 안내가 주소를 묻는다. 나 주소 모르는데
전화 목록에 주소를 적어 두고도
생각은 나지 않고 어린아이처럼 뜨거운 눈물만 주룩 흐른다

우울감과 두려움 때문일까, 얼굴 반쪽이 마비되고
다리에 힘도 풀려 털푸덕 구석 바닥에 앉아
시끄러운 소음이 들리고 태양을 처음 마주하듯
밝아졌다

괜찮냐고 부축한 소방대원 손에 끌려 밖으로 나와
하염없이 엠블런스를 기다린다

응급 처치 요원 교육받을 때 스트로크 증세를 확인한다
양손에 힘줘봐라. 눈을 감고 손들어 봐라. 힘껏 밀어봐라. 손가락 몇개? 이거 따라와봐.
스트로크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엘리베이터에 갇혀 한 시간
엠블런스 기다리느라 또 한 시간
뉴웨스트 병원으로 가는 응급차 안에서 정맥에 주사기를 꼽고
병원 도착하자마자 전쟁 통에 널브러진 패잔 병 같은 환자가 즐비한
병원 복도를 고속도로처럼 응급 요원이 잘도 달린다.
곧바로 씨티 찍고 피검사하고 구석에 기다리는데
나 벌써 죽은 건가 싶다 가도 응급 요원이 보디가드
수호신 같다.

써리 병원으로 다시 오는 중에
그래도 중증이 아니어서 다행이고 빨리 발견해 다행이다
나 저녁 못 먹어 배고픈데 했더니
샌드위치와 크래커 얻어다 준 응급 요원이
천사 같다.


#작가의 변
지난 월요일에 엘리베이터 사고로 스트로크 즉 뇌경색을 다시 얻었다. 사람 일이란 참으로 모를 일이다. 같은 회사에서 지역이 다른 지점으로 이동한 지 이틀 만에 그것도 퇴근길에 엘리베이터에 갇혀 있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새로 옮긴 곳이어서 아직 전화도 개통되지 않았고 와이파이도 사고 당일에 연결이 되었다. 사고가 있고 집에 돌아와서 아내가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꿈자리가 안 좋아서 전에 일하던 곳으로 돌아가라고 했다고 했다.

지나 보니 그런 결과가 있었을 뿐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다면 그거 개꿈이라고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파도 엠블런스를 부르는 일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 그리고 엠블런스를 탄다는 것은 별로 달가운 일도 아니다. 가능하다면 엠블런스를 안 타는 것이 좋다. 눈에 빤히 보이는 병원을 가지 못하고 계단에 앉아서 1시간을 엠블런스를 기다리는 것은 불안한 시간이었다. 그래도 소방서 구급대원 5명과 다른 회사 직원들이 함께 엠블런스를 기다려 주고 있었지만 불안함은 가시지 않았다. 엠블런스가 오고 엠블런스 침대에 실려 써리를 떠나 뉴웨스트로 가면서 써리엔 스트로크 수술이 가능하지 않아서 간다는 말을 듣고 3년 전 리치몬드 병원에서 밴쿠버병원으로 가던 일이 떠올랐다. 그로부터 일 년은 치료하느라 지나갔다. 아니 2년이 거의 치료과정에 있었다. 올해부터 일을 제대로 하나 싶었지만, 툭하면 직장을 더 이상 다니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고 힘든 한 해였는데 결국 마무리는 또 이렇게 되는구나 싶다 가도 그래도 이만하길 다행이라면서 스스로 위로한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아파서 병원에 간다. 하지만 평소엔 그것을 잊고 지낸다. 그것을 평소에도 생각하면 얼마나 괴롭겠는가? 침대 위에서 병원 복도를 지나치며 다양한 환자들이 다양한 신음소리를 내면서 기다리고 치료받는 것을 봤다. 나도 분명 환자인데 나는 그 순간 제3자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소설의 전지적 작가 시점이나 제3자적 시점이었달까? 나는 내가 환자 임을 순간적으로 잊고 있었는지 모른다. 저승사자에게 이끌려 이승에서 저승을 가듯.

씨티 스캔을 하면서 침대를 옮기고 주사를 맞고 뜨거운 것이 온 몸을 타고 흐를 때 살아 있음을 느낀다. 나도 치료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돼지 저울에 달듯 나를 싸서 달아 올려 몸무게를 잴 때는 흡사 내가 돼지 잡는 날 돼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처음엔 밖에 누군가 있을 거고 금방 나올 줄 알았다. 하지만 불이 꺼지고 아무도 곁에 오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 누군가에게 전화를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집으로 전화했고, 회사 전화도 했지만 헤드 오피스였던 것 같다. 911을 부르라는 말에 그제야 911을 부르게 된 것이다. 폐쇄로 인한 두려움과 공포가 밀려오고 숨은 점점 가빠오고 불안함과 이러다 갑자기 엘리베이터가 툭 떨어져 죽는 것은 아닐까 하는 공포가 엄습했다. 그렇다고 해도 2층이어서 고층보단 충격이 덜할 것인데 2층이라는 생각조차 잊었다. 그저 불안할 뿐.

살면서 땅이 꺼지는 싱크홀 증상이나 지진, 태풍, 건물의 무너짐 등 자연재해는 언제든 일어 난다. 특히 교통사고는 운전하면서 가장 자주 대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을 잊고 산다. 그것을 평소에 생각하고 두려움을 느낀다면 생활 자체가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엘리베이터에서 갇히니 별의별 생각이 들고 두려움에 떨었다. 결과적으론 죽음이 두려웠던 것이다. 어둠이 죽음과 가까워서일까? 가장 불안한 순간에 믿는 종교에 기대어 기도한다는데 기도는 하지 않은 것 같다. 그저 불안에 떨었던 생각뿐. 그리고 내가 아프면 우리 가족은 어떻게 하나 렌트비와 생활비 걱정을 가장 먼저 하게 되는 것은 여유가 없는 도시민의 일반적인 걱정 중 하나이다. 그리고 이미 2번째라서 앞으로 일은 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살아야 한다. 살아 내야 한다. 나를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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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내린 동굴 같은
시간이 멈춘 버린 엘리베이터에서
숨을 가쁘게 몰아쉬면서도
손전화가 살아 있어 아들에게 전화한다

아빠 나한테 하면 어떻게
911에 전화해
911 안내가 주소를 묻는다. 나 주소 모르는데
전화 목록에 주소를 적어 두고도
생각은 나지 않고 어린아이처럼 뜨거운 눈물만 주룩 흐른다

우울감과 두려움 때문일까, 얼굴 반쪽이 마비되고
다리에 힘도 풀려 털푸덕 구석 바닥에 앉아
시끄러운 소음이 들리고 태양을 처음 마주하듯
밝아졌다

괜찮냐고 부축한 소방대원 손에 끌려 밖으로 나와
하염없이 엠블런스를 기다린다

응급 처치 요원 교육받을 때 스트로크 증세를 확인한다
양손에 힘줘봐라. 눈을 감고 손들어 봐라. 힘껏 밀어봐라. 손가락 몇개? 이거 따라와봐.
스트로크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엘리베이터에 갇혀 한 시간
엠블런스 기다리느라 또 한 시간
뉴웨스트 병원으로 가는 응급차 안에서 정맥에 주사기를 꼽고
병원 도착하자마자 전쟁 통에 널브러진 패잔 병 같은 환자가 즐비한
병원 복도를 고속도로처럼 응급 요원이 잘도 달린다.
곧바로 씨티 찍고 피검사하고 구석에 기다리는데
나 벌써 죽은 건가 싶다 가도 응급 요원이 보디가드
수호신 같다.

써리 병원으로 다시 오는 중에
그래도 중증이 아니어서 다행이고 빨리 발견해 다행이다
나 저녁 못 먹어 배고픈데 했더니
샌드위치와 크래커 얻어다 준 응급 요원이
천사 같다.

#작가의 변
지난 월요일에 엘리베이터 사고로 스트로크 즉 뇌경색을 다시 얻었다. 사람 일이란 참으로 모를 일이다. 같은 회사에서 지역이 다른 지점으로 이동한 지 이틀 만에 그것도 퇴근길에 엘리베이터에 갇혀 있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새로 옮긴 곳이어서 아직 전화도 개통되지 않았고 와이파이도 사고 당일에 연결이 되었다. 사고가 있고 집에 돌아와서 아내가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꿈자리가 안 좋아서 전에 일하던 곳으로 돌아가라고 했다고 했다.

지나 보니 그런 결과가 있었을 뿐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다면 그거 개꿈이라고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파도 엠블런스를 부르는 일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 그리고 엠블런스를 탄다는 것은 별로 달가운 일도 아니다. 가능하다면 엠블런스를 안 타는 것이 좋다. 눈에 빤히 보이는 병원을 가지 못하고 계단에 앉아서 1시간을 엠블런스를 기다리는 것은 불안한 시간이었다. 그래도 소방서 구급대원 5명과 다른 회사 직원들이 함께 엠블런스를 기다려 주고 있었지만 불안함은 가시지 않았다. 엠블런스가 오고 엠블런스 침대에 실려 써리를 떠나 뉴웨스트로 가면서 써리엔 스트로크 수술이 가능하지 않아서 간다는 말을 듣고 3년 전 리치몬드 병원에서 밴쿠버병원으로 가던 일이 떠올랐다. 그로부터 일 년은 치료하느라 지나갔다. 아니 2년이 거의 치료과정에 있었다. 올해부터 일을 제대로 하나 싶었지만, 툭하면 직장을 더 이상 다니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고 힘든 한 해였는데 결국 마무리는 또 이렇게 되는구나 싶다 가도 그래도 이만하길 다행이라면서 스스로 위로한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아파서 병원에 간다. 하지만 평소엔 그것을 잊고 지낸다. 그것을 평소에도 생각하면 얼마나 괴롭겠는가? 침대 위에서 병원 복도를 지나치며 다양한 환자들이 다양한 신음소리를 내면서 기다리고 치료받는 것을 봤다. 나도 분명 환자인데 나는 그 순간 제3자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소설의 전지적 작가 시점이나 제3자적 시점이었달까? 나는 내가 환자 임을 순간적으로 잊고 있었는지 모른다. 저승사자에게 이끌려 이승에서 저승을 가듯.

씨티 스캔을 하면서 침대를 옮기고 주사를 맞고 뜨거운 것이 온 몸을 타고 흐를 때 살아 있음을 느낀다. 나도 치료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돼지 저울에 달듯 나를 싸서 달아 올려 몸무게를 잴 때는 흡사 내가 돼지 잡는 날 돼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처음엔 밖에 누군가 있을 거고 금방 나올 줄 알았다. 하지만 불이 꺼지고 아무도 곁에 오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 누군가에게 전화를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집으로 전화했고, 회사 전화도 했지만 헤드 오피스였던 것 같다. 911을 부르라는 말에 그제야 911을 부르게 된 것이다. 폐쇄로 인한 두려움과 공포가 밀려오고 숨은 점점 가빠오고 불안함과 이러다 갑자기 엘리베이터가 툭 떨어져 죽는 것은 아닐까 하는 공포가 엄습했다. 그렇다고 해도 2층이어서 고층보단 충격이 덜할 것인데 2층이라는 생각조차 잊었다. 그저 불안할 뿐.

살면서 땅이 꺼지는 싱크홀 증상이나 지진, 태풍, 건물의 무너짐 등 자연재해는 언제든 일어 난다. 특히 교통사고는 운전하면서 가장 자주 대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을 잊고 산다. 그것을 평소에 생각하고 두려움을 느낀다면 생활 자체가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엘리베이터에서 갇히니 별의별 생각이 들고 두려움에 떨었다. 결과적으론 죽음이 두려웠던 것이다. 어둠이 죽음과 가까워서일까? 가장 불안한 순간에 믿는 종교에 기대어 기도한다는데 기도는 하지 않은 것 같다. 그저 불안에 떨었던 생각뿐. 그리고 내가 아프면 우리 가족은 어떻게 하나 렌트비와 생활비 걱정을 가장 먼저 하게 되는 것은 여유가 없는 도시민의 일반적인 걱정 중 하나이다. 그리고 이미 2번째라서 앞으로 일은 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살아야 한다. 살아 내야 한다. 나를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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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내린 동굴 같은
시간이 멈춘 버린 엘리베이터에서
숨을 가쁘게 몰아쉬면서도
손전화가 살아 있어 아들에게 전화한다

아빠 나한테 하면 어떻게
911에 전화해
911 안내가 주소를 묻는다. 나 주소 모르는데
전화 목록에 주소를 적어 두고도
생각은 나지 않고 어린아이처럼 뜨거운 눈물만 주룩 흐른다

우울감과 두려움 때문일까, 얼굴 반쪽이 마비되고
다리에 힘도 풀려 털푸덕 구석 바닥에 앉아
시끄러운 소음이 들리고 태양을 처음 마주하듯
밝아졌다

괜찮냐고 부축한 소방대원 손에 끌려 밖으로 나와
하염없이 엠블런스를 기다린다

응급 처치 요원 교육받을 때 스트로크 증세를 확인한다
양손에 힘줘봐라. 눈을 감고 손들어 봐라. 힘껏 밀어봐라. 손가락 몇개? 이거 따라와봐.
스트로크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엘리베이터에 갇혀 한 시간
엠블런스 기다리느라 또 한 시간
뉴웨스트 병원으로 가는 응급차 안에서 정맥에 주사기를 꼽고
병원 도착하자마자 전쟁 통에 널브러진 패잔 병 같은 환자가 즐비한
병원 복도를 고속도로처럼 응급 요원이 잘도 달린다.
곧바로 씨티 찍고 피검사하고 구석에 기다리는데
나 벌써 죽은 건가 싶다 가도 응급 요원이 보디가드
수호신 같다.

써리 병원으로 다시 오는 중에
그래도 중증이 아니어서 다행이고 빨리 발견해 다행이다
나 저녁 못 먹어 배고픈데 했더니
샌드위치와 크래커 얻어다 준 응급 요원이
천사 같다.


#작가의 변
지난 월요일에 엘리베이터 사고로 스트로크 즉 뇌경색을 다시 얻었다. 사람 일이란 참으로 모를 일이다. 같은 회사에서 지역이 다른 지점으로 이동한 지 이틀 만에 그것도 퇴근길에 엘리베이터에 갇혀 있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새로 옮긴 곳이어서 아직 전화도 개통되지 않았고 와이파이도 사고 당일에 연결이 되었다. 사고가 있고 집에 돌아와서 아내가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꿈자리가 안 좋아서 전에 일하던 곳으로 돌아가라고 했다고 했다.

지나 보니 그런 결과가 있었을 뿐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다면 그거 개꿈이라고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파도 엠블런스를 부르는 일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 그리고 엠블런스를 탄다는 것은 별로 달가운 일도 아니다. 가능하다면 엠블런스를 안 타는 것이 좋다. 눈에 빤히 보이는 병원을 가지 못하고 계단에 앉아서 1시간을 엠블런스를 기다리는 것은 불안한 시간이었다. 그래도 소방서 구급대원 5명과 다른 회사 직원들이 함께 엠블런스를 기다려 주고 있었지만 불안함은 가시지 않았다. 엠블런스가 오고 엠블런스 침대에 실려 써리를 떠나 뉴웨스트로 가면서 써리엔 스트로크 수술이 가능하지 않아서 간다는 말을 듣고 3년 전 리치몬드 병원에서 밴쿠버병원으로 가던 일이 떠올랐다. 그로부터 일 년은 치료하느라 지나갔다. 아니 2년이 거의 치료과정에 있었다. 올해부터 일을 제대로 하나 싶었지만, 툭하면 직장을 더 이상 다니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고 힘든 한 해였는데 결국 마무리는 또 이렇게 되는구나 싶다 가도 그래도 이만하길 다행이라면서 스스로 위로한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아파서 병원에 간다. 하지만 평소엔 그것을 잊고 지낸다. 그것을 평소에도 생각하면 얼마나 괴롭겠는가? 침대 위에서 병원 복도를 지나치며 다양한 환자들이 다양한 신음소리를 내면서 기다리고 치료받는 것을 봤다. 나도 분명 환자인데 나는 그 순간 제3자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소설의 전지적 작가 시점이나 제3자적 시점이었달까? 나는 내가 환자 임을 순간적으로 잊고 있었는지 모른다. 저승사자에게 이끌려 이승에서 저승을 가듯.

씨티 스캔을 하면서 침대를 옮기고 주사를 맞고 뜨거운 것이 온 몸을 타고 흐를 때 살아 있음을 느낀다. 나도 치료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돼지 저울에 달듯 나를 싸서 달아 올려 몸무게를 잴 때는 흡사 내가 돼지 잡는 날 돼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처음엔 밖에 누군가 있을 거고 금방 나올 줄 알았다. 하지만 불이 꺼지고 아무도 곁에 오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 누군가에게 전화를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집으로 전화했고, 회사 전화도 했지만 헤드 오피스였던 것 같다. 911을 부르라는 말에 그제야 911을 부르게 된 것이다. 폐쇄로 인한 두려움과 공포가 밀려오고 숨은 점점 가빠오고 불안함과 이러다 갑자기 엘리베이터가 툭 떨어져 죽는 것은 아닐까 하는 공포가 엄습했다. 그렇다고 해도 2층이어서 고층보단 충격이 덜할 것인데 2층이라는 생각조차 잊었다. 그저 불안할 뿐.

살면서 땅이 꺼지는 싱크홀 증상이나 지진, 태풍, 건물의 무너짐 등 자연재해는 언제든 일어 난다. 특히 교통사고는 운전하면서 가장 자주 대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을 잊고 산다. 그것을 평소에 생각하고 두려움을 느낀다면 생활 자체가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엘리베이터에서 갇히니 별의별 생각이 들고 두려움에 떨었다. 결과적으론 죽음이 두려웠던 것이다. 어둠이 죽음과 가까워서일까? 가장 불안한 순간에 믿는 종교에 기대어 기도한다는데 기도는 하지 않은 것 같다. 그저 불안에 떨었던 생각뿐. 그리고 내가 아프면 우리 가족은 어떻게 하나 렌트비와 생활비 걱정을 가장 먼저 하게 되는 것은 여유가 없는 도시민의 일반적인 걱정 중 하나이다. 그리고 이미 2번째라서 앞으로 일은 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살아야 한다. 살아 내야 한다. 나를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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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이 기사에 대한 반론 및 기사 제보 mytrea7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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