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78. 세상은 나를 보고
[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78. 세상은 나를 보고
  • 전재민 시인
  • 승인 2022.09.13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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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나를 보고 바보가 되라 하네

눈감고 귀 닫아 세상을 보지 말라 하네

내가 이익을 보면 네가 손해 보는 세상

평생 손이 마를 날이 없이 일해도

허리가 굽어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해도

남들은 주식으로 벌고 선물로 벌고 부동산으로 잘도 돈 버는 세상

바보처럼 쉬는 날 쉬지 못하고

명절에 가족하고 지내지도 못하고

열심히 살아도 열심히 산 죄라며

가난 굴레 벗어나질 못해

바보처럼 허허 웃지만

악착같이 따지며 시장통 아줌마처럼

억척스레 살고 싶지만

세상은 나를 보고

너는 착하니까 바보가 되라 하네.
 







#작가의 변
옷이 날개라 했다. 아무리 잘난 사람도 입은 입성이 거지꼴을 하고 있으면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남들에게 보이는 외출복은 가능하면 새것에다 깨끗하고 단정한 것을 입는다. 특히 명절에는 그랬다. 새것을 사지 않더라도 깨끗이 빨아서 입는 정말 마음에서 우러난 성의를 보이는 것이다.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처럼 날개 달린 옷을 입고 선녀처럼 날 수 있다면 어떨까. 나는 것은 좋지만 날개는 불편할 것 같다. 전깃줄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새처럼 편하게 벌러덩 눕지 못할 것 같다.

추석이 다가오니 어린 시절 추석이 떠오른다. 일 년에 한두 번 받는 양말이나 옷 선물을 받던 그 어린 시절 새 양말을 신고 또는 새 옷을 입고 차례상 앞에 서서 차례를 지내던 나는 새 양말, 새 옷에 대한 느낌이 달랐던 것 같다.

추운 겨울 팬티도 입지 못하고 홑껍데기 바지를 입고 영하의 날씨에 바람이 심하게 불던 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난 정말이지 저체온증에 거의 다가갔던 날이었다. 그 바지는 어머니가 따뜻하게 입고 다니라고 시장에서 사줘 입혀 준 것이지만 뜨개질한 바지처럼 바람이 숭숭 들어왔고 아랫도리부터 얼어붙었다. 바람이 살이 에인다는 말이 딱 그 순간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다른 옷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빨아 입으면 입을 옷이 없는 단벌이었던 적이 많았던 것 같다.

츄리닝은 무릎이 늘어져서 이상한 모습을 할 때까지 입었고 추워하면서도 내복은 또 답답해서 잘 못 입었던 난 겨울이면 화로를 끼고 살았고 장판이 누렇게 타도록 뜨끈뜨끈하게 불을 땐 아랫목에서 이불 덮고 겨울을 나던 때도 많았다. 방에서 잠을 자고 이불을 개어 놓으면 거실이 되어 밥상을 들이면 밥 먹는 곳이 되었던 어린 시절의 집엔 마루와 웃방, 사랑방이 있었지만, 사랑방은 불을 때지 않아 늘 냉골의 곡식 등을 쌓아두는 방이었다. 광에는 콩깍지 등을 쌓아두는 소 사료 창고였고 디딜방아가 신기하고도 집에 어울리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 옷을 못 입고 다녔어도 옷을 못 입는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다들 시장에서 사 온 고만고만한 옷 들이기 때문이었다. 마당에 걸린 빨랫줄에 널어놓은 빨래는 그래서 신경을 쓸 물건이 못 되었던 것 같다. 브랜드가 있는 옷을 사달라고 조르거나 때 쓰는 일도 없었는데 보지도 알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모르면 약이다.

학교에 들어가서 다른 아이들이 스파이크라는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 것을 보고 나도 운동화를 신고 싶다고 생각했다. 고무신 신고 뛰어가다 땀이 난 발 때문에 미끌미끌하니 벗겨지기 일쑤였다. 그래서 뛸 때는 고무신을 벗어서 들고 뛰던 아이들이 생각이 난다. 타이어 표 고무신은 검정 고무신이었고, 놀 때는 자동차로 변해 모래를 실어 나르는 덤프트럭이 되기도 했다. 장난감이라 해봐야 나무를 잘라 만든 자치기나, 수숫대를 잘라서 끌고 다니기도 하고 닥나무로 만든 활과 수숫대로 만든 화살이 우리가 가지고 놀던 놀이 기구가 아니었나 싶다.

세상은 변했고 유명브랜드가 아니면 입지 않는다는 아이들이 많고 나 또한 기성 교복보다 맞춤 교복이 좋다는 것을 알고 양복점에서 맞추어 입었던 기억이 있다. 한 번은 ‘댄디’라는 기성복 점에서 교복을 사고 소풍 갔다가 용바위에서 바위에 앉았는데 엉덩이와 앞 자크 밑에까지 투두둑 바느질이 뜯어져 혼난 적이 있고 나서 기성복에 대한 불신이 생겼었다.

양말 한 켤레에도 감사하면서 명절을 맞이하던 그 시절 차례상 앞에 선 아버지와 아들이 눈에 보인다. 조기 선물 세트가 오백만 원이 넘고 갈비 세트 등 명절 선물 세트 광고가 인터넷에서 많이 보인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민 와서 명절에 선물을 주고받지 않고 살아 온 터라, 무릎이 툭 튀어나온 츄리닝이 생각나고 검정 고무신이 떠오른다. 단 한 벌 뿐이던 옷과 신발. 그때와 비교하면 얼마나 잘사는 것인지 가늠 안 된다. 그래도 그때가 더 행복했었던 것 같은 느낌은 왜일까? 비교하고 비교당하는 삶 때문은 아닐까? 언젠가 아이들이 어처구니없이 당하는 일을 보고 어이가 없어 그렇게 당하지만 말고 다부지지 못하냐고 한 적이 있다. 아이들은 아빠 엄마가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를 주지 말고 싸우지 말라고 가르치지 않았느냐고 한다. 그래도 그것은 아니지, 네 밥그릇은 네가 찾아 먹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한 적이 있다. 언제인가서부터 정의로운 일 의로운 일을 하면 나댄 다거나 설친다고 하는 경우가 많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누가 당해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것은 괜히 나섰다가 나선 사람만 이상한 사람이 되고 정작 당한 사람은 슬그머니 내려버리는 일도 종종 일어난다.

평생을 농부로 살다 간 아버지나 그 수발을 들다가 먼 세상으로 간 어머니를 생각해 보면 두 분에게도 행복한 순간이 있었을까? 있다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을 한다. 법이 없어도 산다는 말을 늘 듣고 평생을 살다 간 아버지가 그렇게 불리는 게 싫었다. 법이 없어도 산다는 말은 착하다는 말을 듣기 좋게 하는 말이고 그 속뜻을 되새겨 보면 사실 바보 같은 사람이라는 말과 통한다.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참지 않고 머리를 당당하게 들고 따질 수 있는 사람, 내 것은 빼앗기지 않고 챙길 줄 아는 사람이 정상이 아닐까?

부당한 일을 부당하다고 말하지 못하고 참고 내 것을 빼앗기고도 챙기지 못하는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있다. 내가 조금 몸이 고되게 희생하면 명절에 가정이 화목하다던 어머니는 잠도 자지 못하고 혼자서 전이며 나물이며 차례 음식을 다 준비하셨다. 작은아버지와 어머니는 차례 전날 오셔서는 어머니가 전을 부쳐서 가져다주면 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마시는 술상 옆에서 부침개를 먹으며 ‘형님, 부침개가 정말 맛이 참 좋네유.’라고 추임새를 넣어 주는 정도. 나는 안다. 일을 맡기면 답답해서 본인이 다 하려고 했던 것을. 그래도, 답답해도 맡길 것은 맡기고 함께 해야 하는 것이었다. 부당한 일을 당하고 늘 희생당하는 삶으로 불만이 쌓이면 그것이 병이 된다. 물론 말로는 못 당한다는 말로 일을 다 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말로 하는 그 사람은 자기의 생각을 말로 표현해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이해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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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나를 보고 바보가 되라 하네

눈감고 귀 닫아 세상을 보지 말라 하네

내가 이익을 보면 네가 손해 보는 세상

평생 손이 마를 날이 없이 일해도

허리가 굽어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해도

남들은 주식으로 벌고 선물로 벌고 부동산으로 잘도 돈 버는 세상

바보처럼 쉬는 날 쉬지 못하고

명절에 가족하고 지내지도 못하고

열심히 살아도 열심히 산 죄라며

가난 굴레 벗어나질 못해

바보처럼 허허 웃지만

악착같이 따지며 시장통 아줌마처럼

억척스레 살고 싶지만

세상은 나를 보고

너는 착하니까 바보가 되라 하네.
 





세상은 나를 보고 바보가 되라 하네

눈감고 귀 닫아 세상을 보지 말라 하네

내가 이익을 보면 네가 손해 보는 세상

평생 손이 마를 날이 없이 일해도

허리가 굽어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해도

남들은 주식으로 벌고 선물로 벌고 부동산으로 잘도 돈 버는 세상

바보처럼 쉬는 날 쉬지 못하고

명절에 가족하고 지내지도 못하고

열심히 살아도 열심히 산 죄라며

가난 굴레 벗어나질 못해

바보처럼 허허 웃지만

악착같이 따지며 시장통 아줌마처럼

억척스레 살고 싶지만

세상은 나를 보고

너는 착하니까 바보가 되라 하네.
 







#작가의 변
옷이 날개라 했다. 아무리 잘난 사람도 입은 입성이 거지꼴을 하고 있으면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남들에게 보이는 외출복은 가능하면 새것에다 깨끗하고 단정한 것을 입는다. 특히 명절에는 그랬다. 새것을 사지 않더라도 깨끗이 빨아서 입는 정말 마음에서 우러난 성의를 보이는 것이다.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처럼 날개 달린 옷을 입고 선녀처럼 날 수 있다면 어떨까. 나는 것은 좋지만 날개는 불편할 것 같다. 전깃줄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새처럼 편하게 벌러덩 눕지 못할 것 같다.

추석이 다가오니 어린 시절 추석이 떠오른다. 일 년에 한두 번 받는 양말이나 옷 선물을 받던 그 어린 시절 새 양말을 신고 또는 새 옷을 입고 차례상 앞에 서서 차례를 지내던 나는 새 양말, 새 옷에 대한 느낌이 달랐던 것 같다.

추운 겨울 팬티도 입지 못하고 홑껍데기 바지를 입고 영하의 날씨에 바람이 심하게 불던 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난 정말이지 저체온증에 거의 다가갔던 날이었다. 그 바지는 어머니가 따뜻하게 입고 다니라고 시장에서 사줘 입혀 준 것이지만 뜨개질한 바지처럼 바람이 숭숭 들어왔고 아랫도리부터 얼어붙었다. 바람이 살이 에인다는 말이 딱 그 순간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다른 옷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빨아 입으면 입을 옷이 없는 단벌이었던 적이 많았던 것 같다.

츄리닝은 무릎이 늘어져서 이상한 모습을 할 때까지 입었고 추워하면서도 내복은 또 답답해서 잘 못 입었던 난 겨울이면 화로를 끼고 살았고 장판이 누렇게 타도록 뜨끈뜨끈하게 불을 땐 아랫목에서 이불 덮고 겨울을 나던 때도 많았다. 방에서 잠을 자고 이불을 개어 놓으면 거실이 되어 밥상을 들이면 밥 먹는 곳이 되었던 어린 시절의 집엔 마루와 웃방, 사랑방이 있었지만, 사랑방은 불을 때지 않아 늘 냉골의 곡식 등을 쌓아두는 방이었다. 광에는 콩깍지 등을 쌓아두는 소 사료 창고였고 디딜방아가 신기하고도 집에 어울리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 옷을 못 입고 다녔어도 옷을 못 입는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다들 시장에서 사 온 고만고만한 옷 들이기 때문이었다. 마당에 걸린 빨랫줄에 널어놓은 빨래는 그래서 신경을 쓸 물건이 못 되었던 것 같다. 브랜드가 있는 옷을 사달라고 조르거나 때 쓰는 일도 없었는데 보지도 알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모르면 약이다.

학교에 들어가서 다른 아이들이 스파이크라는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 것을 보고 나도 운동화를 신고 싶다고 생각했다. 고무신 신고 뛰어가다 땀이 난 발 때문에 미끌미끌하니 벗겨지기 일쑤였다. 그래서 뛸 때는 고무신을 벗어서 들고 뛰던 아이들이 생각이 난다. 타이어 표 고무신은 검정 고무신이었고, 놀 때는 자동차로 변해 모래를 실어 나르는 덤프트럭이 되기도 했다. 장난감이라 해봐야 나무를 잘라 만든 자치기나, 수숫대를 잘라서 끌고 다니기도 하고 닥나무로 만든 활과 수숫대로 만든 화살이 우리가 가지고 놀던 놀이 기구가 아니었나 싶다.

세상은 변했고 유명브랜드가 아니면 입지 않는다는 아이들이 많고 나 또한 기성 교복보다 맞춤 교복이 좋다는 것을 알고 양복점에서 맞추어 입었던 기억이 있다. 한 번은 ‘댄디’라는 기성복 점에서 교복을 사고 소풍 갔다가 용바위에서 바위에 앉았는데 엉덩이와 앞 자크 밑에까지 투두둑 바느질이 뜯어져 혼난 적이 있고 나서 기성복에 대한 불신이 생겼었다.

양말 한 켤레에도 감사하면서 명절을 맞이하던 그 시절 차례상 앞에 선 아버지와 아들이 눈에 보인다. 조기 선물 세트가 오백만 원이 넘고 갈비 세트 등 명절 선물 세트 광고가 인터넷에서 많이 보인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민 와서 명절에 선물을 주고받지 않고 살아 온 터라, 무릎이 툭 튀어나온 츄리닝이 생각나고 검정 고무신이 떠오른다. 단 한 벌 뿐이던 옷과 신발. 그때와 비교하면 얼마나 잘사는 것인지 가늠 안 된다. 그래도 그때가 더 행복했었던 것 같은 느낌은 왜일까? 비교하고 비교당하는 삶 때문은 아닐까? 언젠가 아이들이 어처구니없이 당하는 일을 보고 어이가 없어 그렇게 당하지만 말고 다부지지 못하냐고 한 적이 있다. 아이들은 아빠 엄마가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를 주지 말고 싸우지 말라고 가르치지 않았느냐고 한다. 그래도 그것은 아니지, 네 밥그릇은 네가 찾아 먹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한 적이 있다. 언제인가서부터 정의로운 일 의로운 일을 하면 나댄 다거나 설친다고 하는 경우가 많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누가 당해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것은 괜히 나섰다가 나선 사람만 이상한 사람이 되고 정작 당한 사람은 슬그머니 내려버리는 일도 종종 일어난다.

평생을 농부로 살다 간 아버지나 그 수발을 들다가 먼 세상으로 간 어머니를 생각해 보면 두 분에게도 행복한 순간이 있었을까? 있다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을 한다. 법이 없어도 산다는 말을 늘 듣고 평생을 살다 간 아버지가 그렇게 불리는 게 싫었다. 법이 없어도 산다는 말은 착하다는 말을 듣기 좋게 하는 말이고 그 속뜻을 되새겨 보면 사실 바보 같은 사람이라는 말과 통한다.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참지 않고 머리를 당당하게 들고 따질 수 있는 사람, 내 것은 빼앗기지 않고 챙길 줄 아는 사람이 정상이 아닐까?

부당한 일을 부당하다고 말하지 못하고 참고 내 것을 빼앗기고도 챙기지 못하는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있다. 내가 조금 몸이 고되게 희생하면 명절에 가정이 화목하다던 어머니는 잠도 자지 못하고 혼자서 전이며 나물이며 차례 음식을 다 준비하셨다. 작은아버지와 어머니는 차례 전날 오셔서는 어머니가 전을 부쳐서 가져다주면 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마시는 술상 옆에서 부침개를 먹으며 ‘형님, 부침개가 정말 맛이 참 좋네유.’라고 추임새를 넣어 주는 정도. 나는 안다. 일을 맡기면 답답해서 본인이 다 하려고 했던 것을. 그래도, 답답해도 맡길 것은 맡기고 함께 해야 하는 것이었다. 부당한 일을 당하고 늘 희생당하는 삶으로 불만이 쌓이면 그것이 병이 된다. 물론 말로는 못 당한다는 말로 일을 다 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말로 하는 그 사람은 자기의 생각을 말로 표현해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이해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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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변
옷이 날개라 했다. 아무리 잘난 사람도 입은 입성이 거지꼴을 하고 있으면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남들에게 보이는 외출복은 가능하면 새것에다 깨끗하고 단정한 것을 입는다. 특히 명절에는 그랬다. 새것을 사지 않더라도 깨끗이 빨아서 입는 정말 마음에서 우러난 성의를 보이는 것이다.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처럼 날개 달린 옷을 입고 선녀처럼 날 수 있다면 어떨까. 나는 것은 좋지만 날개는 불편할 것 같다. 전깃줄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새처럼 편하게 벌러덩 눕지 못할 것 같다.

추석이 다가오니 어린 시절 추석이 떠오른다. 일 년에 한두 번 받는 양말이나 옷 선물을 받던 그 어린 시절 새 양말을 신고 또는 새 옷을 입고 차례상 앞에 서서 차례를 지내던 나는 새 양말, 새 옷에 대한 느낌이 달랐던 것 같다.

추운 겨울 팬티도 입지 못하고 홑껍데기 바지를 입고 영하의 날씨에 바람이 심하게 불던 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난 정말이지 저체온증에 거의 다가갔던 날이었다. 그 바지는 어머니가 따뜻하게 입고 다니라고 시장에서 사줘 입혀 준 것이지만 뜨개질한 바지처럼 바람이 숭숭 들어왔고 아랫도리부터 얼어붙었다. 바람이 살이 에인다는 말이 딱 그 순간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다른 옷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빨아 입으면 입을 옷이 없는 단벌이었던 적이 많았던 것 같다.

츄리닝은 무릎이 늘어져서 이상한 모습을 할 때까지 입었고 추워하면서도 내복은 또 답답해서 잘 못 입었던 난 겨울이면 화로를 끼고 살았고 장판이 누렇게 타도록 뜨끈뜨끈하게 불을 땐 아랫목에서 이불 덮고 겨울을 나던 때도 많았다. 방에서 잠을 자고 이불을 개어 놓으면 거실이 되어 밥상을 들이면 밥 먹는 곳이 되었던 어린 시절의 집엔 마루와 웃방, 사랑방이 있었지만, 사랑방은 불을 때지 않아 늘 냉골의 곡식 등을 쌓아두는 방이었다. 광에는 콩깍지 등을 쌓아두는 소 사료 창고였고 디딜방아가 신기하고도 집에 어울리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 옷을 못 입고 다녔어도 옷을 못 입는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다들 시장에서 사 온 고만고만한 옷 들이기 때문이었다. 마당에 걸린 빨랫줄에 널어놓은 빨래는 그래서 신경을 쓸 물건이 못 되었던 것 같다. 브랜드가 있는 옷을 사달라고 조르거나 때 쓰는 일도 없었는데 보지도 알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모르면 약이다.

학교에 들어가서 다른 아이들이 스파이크라는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 것을 보고 나도 운동화를 신고 싶다고 생각했다. 고무신 신고 뛰어가다 땀이 난 발 때문에 미끌미끌하니 벗겨지기 일쑤였다. 그래서 뛸 때는 고무신을 벗어서 들고 뛰던 아이들이 생각이 난다. 타이어 표 고무신은 검정 고무신이었고, 놀 때는 자동차로 변해 모래를 실어 나르는 덤프트럭이 되기도 했다. 장난감이라 해봐야 나무를 잘라 만든 자치기나, 수숫대를 잘라서 끌고 다니기도 하고 닥나무로 만든 활과 수숫대로 만든 화살이 우리가 가지고 놀던 놀이 기구가 아니었나 싶다.

세상은 변했고 유명브랜드가 아니면 입지 않는다는 아이들이 많고 나 또한 기성 교복보다 맞춤 교복이 좋다는 것을 알고 양복점에서 맞추어 입었던 기억이 있다. 한 번은 ‘댄디’라는 기성복 점에서 교복을 사고 소풍 갔다가 용바위에서 바위에 앉았는데 엉덩이와 앞 자크 밑에까지 투두둑 바느질이 뜯어져 혼난 적이 있고 나서 기성복에 대한 불신이 생겼었다.

양말 한 켤레에도 감사하면서 명절을 맞이하던 그 시절 차례상 앞에 선 아버지와 아들이 눈에 보인다. 조기 선물 세트가 오백만 원이 넘고 갈비 세트 등 명절 선물 세트 광고가 인터넷에서 많이 보인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민 와서 명절에 선물을 주고받지 않고 살아 온 터라, 무릎이 툭 튀어나온 츄리닝이 생각나고 검정 고무신이 떠오른다. 단 한 벌 뿐이던 옷과 신발. 그때와 비교하면 얼마나 잘사는 것인지 가늠 안 된다. 그래도 그때가 더 행복했었던 것 같은 느낌은 왜일까? 비교하고 비교당하는 삶 때문은 아닐까? 언젠가 아이들이 어처구니없이 당하는 일을 보고 어이가 없어 그렇게 당하지만 말고 다부지지 못하냐고 한 적이 있다. 아이들은 아빠 엄마가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를 주지 말고 싸우지 말라고 가르치지 않았느냐고 한다. 그래도 그것은 아니지, 네 밥그릇은 네가 찾아 먹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한 적이 있다. 언제인가서부터 정의로운 일 의로운 일을 하면 나댄 다거나 설친다고 하는 경우가 많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누가 당해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것은 괜히 나섰다가 나선 사람만 이상한 사람이 되고 정작 당한 사람은 슬그머니 내려버리는 일도 종종 일어난다.

평생을 농부로 살다 간 아버지나 그 수발을 들다가 먼 세상으로 간 어머니를 생각해 보면 두 분에게도 행복한 순간이 있었을까? 있다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을 한다. 법이 없어도 산다는 말을 늘 듣고 평생을 살다 간 아버지가 그렇게 불리는 게 싫었다. 법이 없어도 산다는 말은 착하다는 말을 듣기 좋게 하는 말이고 그 속뜻을 되새겨 보면 사실 바보 같은 사람이라는 말과 통한다.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참지 않고 머리를 당당하게 들고 따질 수 있는 사람, 내 것은 빼앗기지 않고 챙길 줄 아는 사람이 정상이 아닐까?

부당한 일을 부당하다고 말하지 못하고 참고 내 것을 빼앗기고도 챙기지 못하는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있다. 내가 조금 몸이 고되게 희생하면 명절에 가정이 화목하다던 어머니는 잠도 자지 못하고 혼자서 전이며 나물이며 차례 음식을 다 준비하셨다. 작은아버지와 어머니는 차례 전날 오셔서는 어머니가 전을 부쳐서 가져다주면 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마시는 술상 옆에서 부침개를 먹으며 ‘형님, 부침개가 정말 맛이 참 좋네유.’라고 추임새를 넣어 주는 정도. 나는 안다. 일을 맡기면 답답해서 본인이 다 하려고 했던 것을. 그래도, 답답해도 맡길 것은 맡기고 함께 해야 하는 것이었다. 부당한 일을 당하고 늘 희생당하는 삶으로 불만이 쌓이면 그것이 병이 된다. 물론 말로는 못 당한다는 말로 일을 다 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말로 하는 그 사람은 자기의 생각을 말로 표현해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이해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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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나를 보고 바보가 되라 하네

눈감고 귀 닫아 세상을 보지 말라 하네

내가 이익을 보면 네가 손해 보는 세상

평생 손이 마를 날이 없이 일해도

허리가 굽어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해도

남들은 주식으로 벌고 선물로 벌고 부동산으로 잘도 돈 버는 세상

바보처럼 쉬는 날 쉬지 못하고

명절에 가족하고 지내지도 못하고

열심히 살아도 열심히 산 죄라며

가난 굴레 벗어나질 못해

바보처럼 허허 웃지만

악착같이 따지며 시장통 아줌마처럼

억척스레 살고 싶지만

세상은 나를 보고

너는 착하니까 바보가 되라 하네.
 







#작가의 변
옷이 날개라 했다. 아무리 잘난 사람도 입은 입성이 거지꼴을 하고 있으면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남들에게 보이는 외출복은 가능하면 새것에다 깨끗하고 단정한 것을 입는다. 특히 명절에는 그랬다. 새것을 사지 않더라도 깨끗이 빨아서 입는 정말 마음에서 우러난 성의를 보이는 것이다.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처럼 날개 달린 옷을 입고 선녀처럼 날 수 있다면 어떨까. 나는 것은 좋지만 날개는 불편할 것 같다. 전깃줄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새처럼 편하게 벌러덩 눕지 못할 것 같다.

추석이 다가오니 어린 시절 추석이 떠오른다. 일 년에 한두 번 받는 양말이나 옷 선물을 받던 그 어린 시절 새 양말을 신고 또는 새 옷을 입고 차례상 앞에 서서 차례를 지내던 나는 새 양말, 새 옷에 대한 느낌이 달랐던 것 같다.

추운 겨울 팬티도 입지 못하고 홑껍데기 바지를 입고 영하의 날씨에 바람이 심하게 불던 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난 정말이지 저체온증에 거의 다가갔던 날이었다. 그 바지는 어머니가 따뜻하게 입고 다니라고 시장에서 사줘 입혀 준 것이지만 뜨개질한 바지처럼 바람이 숭숭 들어왔고 아랫도리부터 얼어붙었다. 바람이 살이 에인다는 말이 딱 그 순간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다른 옷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빨아 입으면 입을 옷이 없는 단벌이었던 적이 많았던 것 같다.

츄리닝은 무릎이 늘어져서 이상한 모습을 할 때까지 입었고 추워하면서도 내복은 또 답답해서 잘 못 입었던 난 겨울이면 화로를 끼고 살았고 장판이 누렇게 타도록 뜨끈뜨끈하게 불을 땐 아랫목에서 이불 덮고 겨울을 나던 때도 많았다. 방에서 잠을 자고 이불을 개어 놓으면 거실이 되어 밥상을 들이면 밥 먹는 곳이 되었던 어린 시절의 집엔 마루와 웃방, 사랑방이 있었지만, 사랑방은 불을 때지 않아 늘 냉골의 곡식 등을 쌓아두는 방이었다. 광에는 콩깍지 등을 쌓아두는 소 사료 창고였고 디딜방아가 신기하고도 집에 어울리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 옷을 못 입고 다녔어도 옷을 못 입는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다들 시장에서 사 온 고만고만한 옷 들이기 때문이었다. 마당에 걸린 빨랫줄에 널어놓은 빨래는 그래서 신경을 쓸 물건이 못 되었던 것 같다. 브랜드가 있는 옷을 사달라고 조르거나 때 쓰는 일도 없었는데 보지도 알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모르면 약이다.

학교에 들어가서 다른 아이들이 스파이크라는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 것을 보고 나도 운동화를 신고 싶다고 생각했다. 고무신 신고 뛰어가다 땀이 난 발 때문에 미끌미끌하니 벗겨지기 일쑤였다. 그래서 뛸 때는 고무신을 벗어서 들고 뛰던 아이들이 생각이 난다. 타이어 표 고무신은 검정 고무신이었고, 놀 때는 자동차로 변해 모래를 실어 나르는 덤프트럭이 되기도 했다. 장난감이라 해봐야 나무를 잘라 만든 자치기나, 수숫대를 잘라서 끌고 다니기도 하고 닥나무로 만든 활과 수숫대로 만든 화살이 우리가 가지고 놀던 놀이 기구가 아니었나 싶다.

세상은 변했고 유명브랜드가 아니면 입지 않는다는 아이들이 많고 나 또한 기성 교복보다 맞춤 교복이 좋다는 것을 알고 양복점에서 맞추어 입었던 기억이 있다. 한 번은 ‘댄디’라는 기성복 점에서 교복을 사고 소풍 갔다가 용바위에서 바위에 앉았는데 엉덩이와 앞 자크 밑에까지 투두둑 바느질이 뜯어져 혼난 적이 있고 나서 기성복에 대한 불신이 생겼었다.

양말 한 켤레에도 감사하면서 명절을 맞이하던 그 시절 차례상 앞에 선 아버지와 아들이 눈에 보인다. 조기 선물 세트가 오백만 원이 넘고 갈비 세트 등 명절 선물 세트 광고가 인터넷에서 많이 보인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민 와서 명절에 선물을 주고받지 않고 살아 온 터라, 무릎이 툭 튀어나온 츄리닝이 생각나고 검정 고무신이 떠오른다. 단 한 벌 뿐이던 옷과 신발. 그때와 비교하면 얼마나 잘사는 것인지 가늠 안 된다. 그래도 그때가 더 행복했었던 것 같은 느낌은 왜일까? 비교하고 비교당하는 삶 때문은 아닐까? 언젠가 아이들이 어처구니없이 당하는 일을 보고 어이가 없어 그렇게 당하지만 말고 다부지지 못하냐고 한 적이 있다. 아이들은 아빠 엄마가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를 주지 말고 싸우지 말라고 가르치지 않았느냐고 한다. 그래도 그것은 아니지, 네 밥그릇은 네가 찾아 먹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한 적이 있다. 언제인가서부터 정의로운 일 의로운 일을 하면 나댄 다거나 설친다고 하는 경우가 많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누가 당해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것은 괜히 나섰다가 나선 사람만 이상한 사람이 되고 정작 당한 사람은 슬그머니 내려버리는 일도 종종 일어난다.

평생을 농부로 살다 간 아버지나 그 수발을 들다가 먼 세상으로 간 어머니를 생각해 보면 두 분에게도 행복한 순간이 있었을까? 있다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을 한다. 법이 없어도 산다는 말을 늘 듣고 평생을 살다 간 아버지가 그렇게 불리는 게 싫었다. 법이 없어도 산다는 말은 착하다는 말을 듣기 좋게 하는 말이고 그 속뜻을 되새겨 보면 사실 바보 같은 사람이라는 말과 통한다.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참지 않고 머리를 당당하게 들고 따질 수 있는 사람, 내 것은 빼앗기지 않고 챙길 줄 아는 사람이 정상이 아닐까?

부당한 일을 부당하다고 말하지 못하고 참고 내 것을 빼앗기고도 챙기지 못하는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있다. 내가 조금 몸이 고되게 희생하면 명절에 가정이 화목하다던 어머니는 잠도 자지 못하고 혼자서 전이며 나물이며 차례 음식을 다 준비하셨다. 작은아버지와 어머니는 차례 전날 오셔서는 어머니가 전을 부쳐서 가져다주면 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마시는 술상 옆에서 부침개를 먹으며 ‘형님, 부침개가 정말 맛이 참 좋네유.’라고 추임새를 넣어 주는 정도. 나는 안다. 일을 맡기면 답답해서 본인이 다 하려고 했던 것을. 그래도, 답답해도 맡길 것은 맡기고 함께 해야 하는 것이었다. 부당한 일을 당하고 늘 희생당하는 삶으로 불만이 쌓이면 그것이 병이 된다. 물론 말로는 못 당한다는 말로 일을 다 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말로 하는 그 사람은 자기의 생각을 말로 표현해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이해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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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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