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관사 국가무형문화재 제126호 국행수륙재 설행
진관사 국가무형문화재 제126호 국행수륙재 설행
  • 서현욱 기자
  • 승인 2022.08.22 15:50
  • 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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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입재, 49일간 7재 봉행 10월 9일 회향
종범 스님 “해탈 이룰 공양으로 대안정토에서 자재하길”
계호 스님 “모두 행복하고 편안한 공덕 쌓는 자리되길”




국가무형문화재 126호 ‘진관사 국행수륙재’가 설행된다.

서울 북한산 진관사(주지 법해 스님)와 사단법인 진관사국행수륙재보존회는 22일 오전 국행수륙재를 입재했다. 이날부터 진관사는 7주간 7번의 재를 올리며 49일간 국행수륙재를 봉행한다.

진관사는 이날 대웅전과 함월당, 명부전에 공양물을 올리고, 명종으로 수륙재 입재를 알렸다. 국행수륙재 입재날, 영가를 맞는 시련소와 일주문 앞에서 영가에게 차와 국수를 대접하는 대령소, 영가의 고단함과 번뇌를 깨끗이 씻기는 관욕소가 경내 함월당에 차려졌다. 대령관욕을 시작으로 회주 계호 스님과 주지 법해 스님 등이 배례하고 심대근 신도회장 등 신도들이 10여 명씩 짝을 이뤄 배례하고 잔을 올렸다. 시식과 관욕이 이어졌고, 종범 스님모든 영가를 위해 법을 설했다. 진관사는 국행수륙재를 위해 직위에 따라 각자의 소임을 정하여 적은 용상방을 걸었고, 불전에 올릴 공양구를 마련하는 등의 임무를 맡는 여섯 종류의 책임자와 소임을 적은 육색방을 걸었다.







올해 국행수륙재는 이날 전 중앙승가대학교 총장 종범 스님이 ‘수월의 도량을 세우고 공화의 불사를 성취하다’라는 주제 법문 속에 설행됐다. 초재는 8월 28일 전 중앙승가대 총장 태원 스님이 ‘왕생정토, 어떻게 준비하는가’를 주제로 설하며, 2재는 9월 4일 봉녕사 강주 대우 스님이 ‘보시하는 사회와 공덕의 세계’를, 3재는 9월 11일 진관사 회주 계호 스님이 ‘수륙재의 봉원적 의미와 실천적 가치’, 4재는 9월 18일 송광사 율주 지현 스님이 ‘수륙재 영가들을 위한 계’, 5재는 9월 25일 전국비구니회장 본각 스님이 ‘대시회(大施會)를 열다-화엄경탐현기’, 6재는 10월 2일 조계종 어산어장 인묵 스님이 ‘범음범패의 기원과 그 수승한 공덕’를 각각 법문하며 설행할 예정이다. 마지막 7재는 조계종 전 전계대화상이자 원로의원인 성우 스님이 ‘수륙재의 소통과 회통, 그리고 고통의 구제’를 주제로 법문하며, 49일간의 국행수륙재를 회향한다. 회향인 7재는 10월 9일 오전 9시부터 오전 11시 30분까지 대웅전 앞 마당에서 낮재가 열리며, 같은 날 오후 12시 30분부터 오후3시까지 같은 장소에서 밤재가 열린다.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수륙재인 칠칠재(사십구재) 형식으로 진행되는 진관사 수륙재는 낮에는 돌아가신 영령을 정성껏 모셔 석가모니 부처님의 영산회상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게 하고, 밤에는 외로이 생을 마감한 무주고혼에게 공양을 올려 고통에서 벗어나게 한다.
현대의 국행수륙재는 49일간 일곱 차례 재를 설행하며,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낮재와 밤재로 나누어 이부 구성의 전통을 잇고 있다. 올해 수륙재 회향날 오전은 수륙재 낮재에 해당하는 시련, 대령, 관욕, 신중작법, 괘불이운, 영산작법, 법문이 진행되며, 오후는 밤재로 수륙연기, 사자단, 오로단, 상단, 중단, 하단, 회향봉송 순으로 진행된다. 시련 의식은 행사에 참여한 일반인 누구나 명다리를 잡고 진관사 마당에서부터 일주문까지 함께 걸으며 참여한다. 수륙재는 산자와 죽은 자를 모두 아울러 공양한다는 의미도 있다. 회향날은 수륙과를 나눈다.  







수륙재 각 단에는 조선 태조와 진관 국사, 백초월 스님,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등의 위패를 봉안한다. 국태민안과 국운융창을 염원하고 민중의 아픔을 달래는 무주고혼의 위패도 모셔진다. 그러면서도 수륙재 참석 대중이 하나가 되어 이웃과 사회를 돌아보는 기회도 삼는다. 49일 수륙재 기간 지역어르신들을 위해 잔치를 벌여 위무하고, 이웃에게는 쌀 등을 나눈다.

전통적인 수륙재가 망자 천도 중심이라면 진관사의 현대 수륙재는 이웃과 더불어함께 살기 위한 나눔행이 더해졌다.







 







전 중앙승가대 총장 종범 스님은 “마음이 모든 여래를 만들고 세계와 중생도 만든다. 일체 근심 걱정이 망상이니, 망상이 만든 것이 헛된 생각이라는 것을 깨우쳐 크게 편안한 청정국토를 만들자는 것이 수륙재”라며 “향단을 건설하고 향과 꽃, 등촉, 다과와 진수 등 육법공양을 올려 독경하고 설법하며 관법을 짓고 축원하는 모든 것은 마음이며 수륙재는 마음법으로 의식이 구조화된 것으로 해탈을 이루는 공양물로 대안정토에서 자재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기연한다”고 설했다.







올해 국행수륙재는 조계종 원로의원 성우 스님을 증명으로 진관사 회주 계호 스님이 재주를 맡는다. 법희 불필 스님 등이 선덕으로, 주지 법해 스님이 승법(乘法), 재 의식은 어산어장 동희 스님이 이끄는 진관사 국행수륙재보존회가 맡는다. 수륙재보존회 스님들이 범패 등 어산으로 참여한다. 수륙재 보존회 스님들은 진관사 수륙재학교 범패학과·법인학과·작법학과에서 수학했거나 수학 중이다. 올해 국행수륙재는 국행수륙재를 이끄는 어장 동희 스님이 한국 불교 역사상 최초의 비구니 어산어장으로 지정돼 더 의미를 더했다.

수륙재는 물과 육지에 떠도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 등 혼령들에게 법을 설하고 음식을 평등하게 베풀어 그들을 구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불교전통의례이다.

수륙재 의식은 중국 양나라 무제(武帝)에 의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교에 신심이 두터운 무제는 유주무주(有住無住)의 고혼들을 널리 구제함이 제일가는 공덕이라 생각하고, 승려들과 상의한 후 스스로 의식문(儀式文)을 만들었다. 그 의식문에 따라 505년에 금산사(金山寺)에서 재를 베푼 것이 그 시초이다. 그 뒤 당나라에서는 그 의식이 유명계(幽冥界)를 이익되게 한다고 하여 크게 융성하였다. 송나라 때에는 희령 연간(熙寧年間)에 동천(東川)이 <수륙문(水陸文)> 3권을 다시 지어 이를 널리 보급함으로써 수륙재가 크게 성행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수륙재가 행하여진 것은 고려 때부터이다. 광종 때에 때때로 성대히 열린 바 있었는데 970년(광종 21)에 갈양사(葛陽寺)에서 개설된 수륙도량이 그 최초의 예이다. 선종 때에는 태사국사(太史局事)로 있었던 최사겸(崔士謙)이 수륙재의 의식절차를 적어놓은 <수륙의문(水陸儀文)>을 송나라에서 구해 온 것을 계기로 보제사(普濟寺)에 수륙당(水陸堂)을 새로 세움으로써 수륙재를 더욱 성대히 격식에 맞게 하였다. 또한, 일연(一然)의 제자 혼구(混丘)가 <신편수륙의문(新編水陸儀文)>을 찬술함으로써 이 의식은 더욱 널리 성하게 되었다. 이 의식은 충목왕 때까지 계속 열렸음을 <고려사>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조선 태조로부터 시작된다.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억울하게 학살당한 고려 왕족과 친인척 그리고 전쟁으로 죽어간 귀족 및 장군들의 넋을 달래기 위한 명분과 자기 후손의 안녕을 도모하고 불안정한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아 새 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하려는 목적으로 수륙재를 거행했다. 이를 위해 도성 근처 국가 수륙사의 건립을 모색해 태조 6년 진관사에 모두 59칸의 대규모 수륙사(水陸寺)를 건립했고, 이를 기념해 권근에게 지시해 후대에 보여주도록 조성기를 남겼다.

권근의 <양촌집>에 따르면 태조는 “짐이 국가를 맡게 됨은 오직 선대 임금들께서 적경하신 덕이니, 조상의 덕에 보답하는 일을 힘쓰지 않아서는 안 되겠노라. 신하와 백성들 가운데 목숨을 바쳤거나 혹은 스스로 죽은 자 가운데 제사를 지내지 못해 저승길에서 굶주리고 구제받을 수 없는 이들을 생각하니 매우 가련하도다. 이제 옛 절에 수륙도량을 마련해 해마다 재를 베풀어서 선대 임금의 명복을 빌고 또한 중생들도 복되고 하고 싶으니 너희들이 가서 합당한 곳을 살펴보라.”고 하명한다.

이에 권근은 “(삼각산과 도봉산의) 사찰 가운데 진관사가 가장 뛰어납니다.”라고 고했다.







또 권근의 <양촌집>에 따르면 태조 이성계는 “2월 신묘일에 주상께서 친히 거동하며 보시고 삼단의 위치를 정했고, 3월 무오일에 또한 거동해 보고, 가을 9월에 공사가 끝났다. 삼단이 모두 3칸 집인데, 중단과 하단 두 단은 좌우에 욕실이 각각 3칸이 있어 하단은 좌우에 별도로 조종의 영실을 각각 8칸씩 설치했다. 대문 행랑 부엌 곳간 갖추어지지 않은 곳이 없어 모두 59칸이라. 사치스럽지 않고 누추하지도 않아 제도에 맞았다.”고 적고 있다.

권근은 또 “이달 24일 계유에 주상께서 또한 친히 거동하여 보시고 28일 정축에 신 권근을 불러 그 시말을 기록하여 후세에 보이도록 하셨다.”고 전한다.

태조는 4번이나 진관사를 찾을 만큼 국행수륙재에 공을 들였다. 조선 시대에는 비록 억불정책으로 불교 의식이 유교 의식으로 많이 바뀌어 갔지만, 태조는 진관사(津寬寺)를 국행수륙재(國行水陸齋)를 여는 사사(寺社)로 지정해 전란 속에 죽은 민초들과 기근에 죽은 민초들, 왕실 조상을 천도하기 위해 국행수륙재를 베풀었다. 왕조와 백성들의 안락과 평안, 신생 왕조인 조선의 국운융창을 진관사서 빌었다. 

1395년(태조 4)에는 견암사(見巖寺)와 석왕사(釋王寺) 관음굴(觀音窟) 등에서 고려 왕 씨의 영혼을 달래는 수륙재를 베풀었다. 그 이후 배불정책에 따른 불교 의식의 유교화 정책은 수륙재를 국행으로 거행하는 문제를 놓고 많은 논란을 벌이게 되나 오랜 전통으로 계속되어 오던 수륙재를 쉽게 폐지 시키지는 못했다. 억불(抑佛)로 이름 높은 태종도 국행수륙재 폐지의 상소문을 받았으나 대대로 거행하여 온 유풍을 쉽게 폐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국행을 고집했다.







처음에는 매년 2월 15일에 거행되었으나 1415년(태종 15)부터는 1월 15일로 변경하여 실시했다. 이 수륙재는 대체로 1515년(중종 10)경까지 크게 변동 없이 계속됐다. 왕실이 직접 그 시주가 되어 때때로 수륙재를 열게 돼 유생들의 시비와 비난을 받았으나, 1606년(선조 39) 6월에 창의문 밖에서 있었던 수륙재나 1433년(세종 15)에 효령대군이 시주가 된 한강에서의 수륙재 때에는 양반·평민 등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길을 메울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중종 때에 이르러서 유생들의 강력한 반대로 수륙재가 국행으로 거행되는 것이 금지됐고, 민간을 통해서만 전승돼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조선 태조 이후 1900년대까지 면면히 이어졌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쳐 6·25전쟁 참화로 잠시 중단됐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1977년 자운 스님과 전 회주인 진관 스님이 복원해 윤년마다 설행했다가 지난 2011년부터 현 회주 계호 스님이 연례 행사로 탈바꿈시켜 옛 명성을 되찾았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세미나 등을 통해 고증하고 원형을 복원해 국가무형문화재 제126호로 지정됐고, 매년 문화재청이 나서 국행수륙재를 기록하고 연구해 가고 있다. 진관사는 조선 태조 이후 600여 년 동안 수륙재 설행의 중심 사찰로 불교 의례의 전통을 계승해 왔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연극·음악·무용·문학·미술이 결합한 종합예술로 공연적 요소가 무궁무진해 그 가치가 더욱 높다. 불자들에게는 나와 타인, 뭇 생명과 함께하는 ‘공양’과 보시의 진정한 의미를 실천하고, 시민들에게는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과 함께 화합과 소통 그리고 나눔을 즐기는 축제의 장으로 수륙재는 의미를 확장하고 있다.

국가무형문화재 126호 ‘진관사 국행수륙재’가 설행된다.

서울 북한산 진관사(주지 법해 스님)와 사단법인 진관사국행수륙재보존회는 22일 오전 국행수륙재를 입재했다. 이날부터 진관사는 7주간 7번의 재를 올리며 49일간 국행수륙재를 봉행한다.

진관사는 이날 대웅전과 함월당, 명부전에 공양물을 올리고, 명종으로 수륙재 입재를 알렸다. 국행수륙재 입재날, 영가를 맞는 시련소와 일주문 앞에서 영가에게 차와 국수를 대접하는 대령소, 영가의 고단함과 번뇌를 깨끗이 씻기는 관욕소가 경내 함월당에 차려졌다. 대령관욕을 시작으로 회주 계호 스님과 주지 법해 스님 등이 배례하고 심대근 신도회장 등 신도들이 10여 명씩 짝을 이뤄 배례하고 잔을 올렸다. 시식과 관욕이 이어졌고, 종범 스님모든 영가를 위해 법을 설했다. 진관사는 국행수륙재를 위해 직위에 따라 각자의 소임을 정하여 적은 용상방을 걸었고, 불전에 올릴 공양구를 마련하는 등의 임무를 맡는 여섯 종류의 책임자와 소임을 적은 육색방을 걸었다.





국가무형문화재 126호 ‘진관사 국행수륙재’가 설행된다.

서울 북한산 진관사(주지 법해 스님)와 사단법인 진관사국행수륙재보존회는 22일 오전 국행수륙재를 입재했다. 이날부터 진관사는 7주간 7번의 재를 올리며 49일간 국행수륙재를 봉행한다.

진관사는 이날 대웅전과 함월당, 명부전에 공양물을 올리고, 명종으로 수륙재 입재를 알렸다. 국행수륙재 입재날, 영가를 맞는 시련소와 일주문 앞에서 영가에게 차와 국수를 대접하는 대령소, 영가의 고단함과 번뇌를 깨끗이 씻기는 관욕소가 경내 함월당에 차려졌다. 대령관욕을 시작으로 회주 계호 스님과 주지 법해 스님 등이 배례하고 심대근 신도회장 등 신도들이 10여 명씩 짝을 이뤄 배례하고 잔을 올렸다. 시식과 관욕이 이어졌고, 종범 스님모든 영가를 위해 법을 설했다. 진관사는 국행수륙재를 위해 직위에 따라 각자의 소임을 정하여 적은 용상방을 걸었고, 불전에 올릴 공양구를 마련하는 등의 임무를 맡는 여섯 종류의 책임자와 소임을 적은 육색방을 걸었다.







올해 국행수륙재는 이날 전 중앙승가대학교 총장 종범 스님이 ‘수월의 도량을 세우고 공화의 불사를 성취하다’라는 주제 법문 속에 설행됐다. 초재는 8월 28일 전 중앙승가대 총장 태원 스님이 ‘왕생정토, 어떻게 준비하는가’를 주제로 설하며, 2재는 9월 4일 봉녕사 강주 대우 스님이 ‘보시하는 사회와 공덕의 세계’를, 3재는 9월 11일 진관사 회주 계호 스님이 ‘수륙재의 봉원적 의미와 실천적 가치’, 4재는 9월 18일 송광사 율주 지현 스님이 ‘수륙재 영가들을 위한 계’, 5재는 9월 25일 전국비구니회장 본각 스님이 ‘대시회(大施會)를 열다-화엄경탐현기’, 6재는 10월 2일 조계종 어산어장 인묵 스님이 ‘범음범패의 기원과 그 수승한 공덕’를 각각 법문하며 설행할 예정이다. 마지막 7재는 조계종 전 전계대화상이자 원로의원인 성우 스님이 ‘수륙재의 소통과 회통, 그리고 고통의 구제’를 주제로 법문하며, 49일간의 국행수륙재를 회향한다. 회향인 7재는 10월 9일 오전 9시부터 오전 11시 30분까지 대웅전 앞 마당에서 낮재가 열리며, 같은 날 오후 12시 30분부터 오후3시까지 같은 장소에서 밤재가 열린다.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수륙재인 칠칠재(사십구재) 형식으로 진행되는 진관사 수륙재는 낮에는 돌아가신 영령을 정성껏 모셔 석가모니 부처님의 영산회상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게 하고, 밤에는 외로이 생을 마감한 무주고혼에게 공양을 올려 고통에서 벗어나게 한다.
현대의 국행수륙재는 49일간 일곱 차례 재를 설행하며,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낮재와 밤재로 나누어 이부 구성의 전통을 잇고 있다. 올해 수륙재 회향날 오전은 수륙재 낮재에 해당하는 시련, 대령, 관욕, 신중작법, 괘불이운, 영산작법, 법문이 진행되며, 오후는 밤재로 수륙연기, 사자단, 오로단, 상단, 중단, 하단, 회향봉송 순으로 진행된다. 시련 의식은 행사에 참여한 일반인 누구나 명다리를 잡고 진관사 마당에서부터 일주문까지 함께 걸으며 참여한다. 수륙재는 산자와 죽은 자를 모두 아울러 공양한다는 의미도 있다. 회향날은 수륙과를 나눈다.  







수륙재 각 단에는 조선 태조와 진관 국사, 백초월 스님,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등의 위패를 봉안한다. 국태민안과 국운융창을 염원하고 민중의 아픔을 달래는 무주고혼의 위패도 모셔진다. 그러면서도 수륙재 참석 대중이 하나가 되어 이웃과 사회를 돌아보는 기회도 삼는다. 49일 수륙재 기간 지역어르신들을 위해 잔치를 벌여 위무하고, 이웃에게는 쌀 등을 나눈다.

전통적인 수륙재가 망자 천도 중심이라면 진관사의 현대 수륙재는 이웃과 더불어함께 살기 위한 나눔행이 더해졌다.







 







전 중앙승가대 총장 종범 스님은 “마음이 모든 여래를 만들고 세계와 중생도 만든다. 일체 근심 걱정이 망상이니, 망상이 만든 것이 헛된 생각이라는 것을 깨우쳐 크게 편안한 청정국토를 만들자는 것이 수륙재”라며 “향단을 건설하고 향과 꽃, 등촉, 다과와 진수 등 육법공양을 올려 독경하고 설법하며 관법을 짓고 축원하는 모든 것은 마음이며 수륙재는 마음법으로 의식이 구조화된 것으로 해탈을 이루는 공양물로 대안정토에서 자재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기연한다”고 설했다.







올해 국행수륙재는 조계종 원로의원 성우 스님을 증명으로 진관사 회주 계호 스님이 재주를 맡는다. 법희 불필 스님 등이 선덕으로, 주지 법해 스님이 승법(乘法), 재 의식은 어산어장 동희 스님이 이끄는 진관사 국행수륙재보존회가 맡는다. 수륙재보존회 스님들이 범패 등 어산으로 참여한다. 수륙재 보존회 스님들은 진관사 수륙재학교 범패학과·법인학과·작법학과에서 수학했거나 수학 중이다. 올해 국행수륙재는 국행수륙재를 이끄는 어장 동희 스님이 한국 불교 역사상 최초의 비구니 어산어장으로 지정돼 더 의미를 더했다.

수륙재는 물과 육지에 떠도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 등 혼령들에게 법을 설하고 음식을 평등하게 베풀어 그들을 구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불교전통의례이다.

수륙재 의식은 중국 양나라 무제(武帝)에 의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교에 신심이 두터운 무제는 유주무주(有住無住)의 고혼들을 널리 구제함이 제일가는 공덕이라 생각하고, 승려들과 상의한 후 스스로 의식문(儀式文)을 만들었다. 그 의식문에 따라 505년에 금산사(金山寺)에서 재를 베푼 것이 그 시초이다. 그 뒤 당나라에서는 그 의식이 유명계(幽冥界)를 이익되게 한다고 하여 크게 융성하였다. 송나라 때에는 희령 연간(熙寧年間)에 동천(東川)이 <수륙문(水陸文)> 3권을 다시 지어 이를 널리 보급함으로써 수륙재가 크게 성행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수륙재가 행하여진 것은 고려 때부터이다. 광종 때에 때때로 성대히 열린 바 있었는데 970년(광종 21)에 갈양사(葛陽寺)에서 개설된 수륙도량이 그 최초의 예이다. 선종 때에는 태사국사(太史局事)로 있었던 최사겸(崔士謙)이 수륙재의 의식절차를 적어놓은 <수륙의문(水陸儀文)>을 송나라에서 구해 온 것을 계기로 보제사(普濟寺)에 수륙당(水陸堂)을 새로 세움으로써 수륙재를 더욱 성대히 격식에 맞게 하였다. 또한, 일연(一然)의 제자 혼구(混丘)가 <신편수륙의문(新編水陸儀文)>을 찬술함으로써 이 의식은 더욱 널리 성하게 되었다. 이 의식은 충목왕 때까지 계속 열렸음을 <고려사>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조선 태조로부터 시작된다.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억울하게 학살당한 고려 왕족과 친인척 그리고 전쟁으로 죽어간 귀족 및 장군들의 넋을 달래기 위한 명분과 자기 후손의 안녕을 도모하고 불안정한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아 새 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하려는 목적으로 수륙재를 거행했다. 이를 위해 도성 근처 국가 수륙사의 건립을 모색해 태조 6년 진관사에 모두 59칸의 대규모 수륙사(水陸寺)를 건립했고, 이를 기념해 권근에게 지시해 후대에 보여주도록 조성기를 남겼다.

권근의 <양촌집>에 따르면 태조는 “짐이 국가를 맡게 됨은 오직 선대 임금들께서 적경하신 덕이니, 조상의 덕에 보답하는 일을 힘쓰지 않아서는 안 되겠노라. 신하와 백성들 가운데 목숨을 바쳤거나 혹은 스스로 죽은 자 가운데 제사를 지내지 못해 저승길에서 굶주리고 구제받을 수 없는 이들을 생각하니 매우 가련하도다. 이제 옛 절에 수륙도량을 마련해 해마다 재를 베풀어서 선대 임금의 명복을 빌고 또한 중생들도 복되고 하고 싶으니 너희들이 가서 합당한 곳을 살펴보라.”고 하명한다.

이에 권근은 “(삼각산과 도봉산의) 사찰 가운데 진관사가 가장 뛰어납니다.”라고 고했다.







또 권근의 <양촌집>에 따르면 태조 이성계는 “2월 신묘일에 주상께서 친히 거동하며 보시고 삼단의 위치를 정했고, 3월 무오일에 또한 거동해 보고, 가을 9월에 공사가 끝났다. 삼단이 모두 3칸 집인데, 중단과 하단 두 단은 좌우에 욕실이 각각 3칸이 있어 하단은 좌우에 별도로 조종의 영실을 각각 8칸씩 설치했다. 대문 행랑 부엌 곳간 갖추어지지 않은 곳이 없어 모두 59칸이라. 사치스럽지 않고 누추하지도 않아 제도에 맞았다.”고 적고 있다.

권근은 또 “이달 24일 계유에 주상께서 또한 친히 거동하여 보시고 28일 정축에 신 권근을 불러 그 시말을 기록하여 후세에 보이도록 하셨다.”고 전한다.

태조는 4번이나 진관사를 찾을 만큼 국행수륙재에 공을 들였다. 조선 시대에는 비록 억불정책으로 불교 의식이 유교 의식으로 많이 바뀌어 갔지만, 태조는 진관사(津寬寺)를 국행수륙재(國行水陸齋)를 여는 사사(寺社)로 지정해 전란 속에 죽은 민초들과 기근에 죽은 민초들, 왕실 조상을 천도하기 위해 국행수륙재를 베풀었다. 왕조와 백성들의 안락과 평안, 신생 왕조인 조선의 국운융창을 진관사서 빌었다. 

1395년(태조 4)에는 견암사(見巖寺)와 석왕사(釋王寺) 관음굴(觀音窟) 등에서 고려 왕 씨의 영혼을 달래는 수륙재를 베풀었다. 그 이후 배불정책에 따른 불교 의식의 유교화 정책은 수륙재를 국행으로 거행하는 문제를 놓고 많은 논란을 벌이게 되나 오랜 전통으로 계속되어 오던 수륙재를 쉽게 폐지 시키지는 못했다. 억불(抑佛)로 이름 높은 태종도 국행수륙재 폐지의 상소문을 받았으나 대대로 거행하여 온 유풍을 쉽게 폐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국행을 고집했다.







처음에는 매년 2월 15일에 거행되었으나 1415년(태종 15)부터는 1월 15일로 변경하여 실시했다. 이 수륙재는 대체로 1515년(중종 10)경까지 크게 변동 없이 계속됐다. 왕실이 직접 그 시주가 되어 때때로 수륙재를 열게 돼 유생들의 시비와 비난을 받았으나, 1606년(선조 39) 6월에 창의문 밖에서 있었던 수륙재나 1433년(세종 15)에 효령대군이 시주가 된 한강에서의 수륙재 때에는 양반·평민 등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길을 메울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중종 때에 이르러서 유생들의 강력한 반대로 수륙재가 국행으로 거행되는 것이 금지됐고, 민간을 통해서만 전승돼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조선 태조 이후 1900년대까지 면면히 이어졌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쳐 6·25전쟁 참화로 잠시 중단됐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1977년 자운 스님과 전 회주인 진관 스님이 복원해 윤년마다 설행했다가 지난 2011년부터 현 회주 계호 스님이 연례 행사로 탈바꿈시켜 옛 명성을 되찾았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세미나 등을 통해 고증하고 원형을 복원해 국가무형문화재 제126호로 지정됐고, 매년 문화재청이 나서 국행수륙재를 기록하고 연구해 가고 있다. 진관사는 조선 태조 이후 600여 년 동안 수륙재 설행의 중심 사찰로 불교 의례의 전통을 계승해 왔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연극·음악·무용·문학·미술이 결합한 종합예술로 공연적 요소가 무궁무진해 그 가치가 더욱 높다. 불자들에게는 나와 타인, 뭇 생명과 함께하는 ‘공양’과 보시의 진정한 의미를 실천하고, 시민들에게는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과 함께 화합과 소통 그리고 나눔을 즐기는 축제의 장으로 수륙재는 의미를 확장하고 있다.

올해 국행수륙재는 이날 전 중앙승가대학교 총장 종범 스님이 ‘수월의 도량을 세우고 공화의 불사를 성취하다’라는 주제 법문 속에 설행됐다. 초재는 8월 28일 전 중앙승가대 총장 태원 스님이 ‘왕생정토, 어떻게 준비하는가’를 주제로 설하며, 2재는 9월 4일 봉녕사 강주 대우 스님이 ‘보시하는 사회와 공덕의 세계’를, 3재는 9월 11일 진관사 회주 계호 스님이 ‘수륙재의 봉원적 의미와 실천적 가치’, 4재는 9월 18일 송광사 율주 지현 스님이 ‘수륙재 영가들을 위한 계’, 5재는 9월 25일 전국비구니회장 본각 스님이 ‘대시회(大施會)를 열다-화엄경탐현기’, 6재는 10월 2일 조계종 어산어장 인묵 스님이 ‘범음범패의 기원과 그 수승한 공덕’를 각각 법문하며 설행할 예정이다. 마지막 7재는 조계종 전 전계대화상이자 원로의원인 성우 스님이 ‘수륙재의 소통과 회통, 그리고 고통의 구제’를 주제로 법문하며, 49일간의 국행수륙재를 회향한다. 회향인 7재는 10월 9일 오전 9시부터 오전 11시 30분까지 대웅전 앞 마당에서 낮재가 열리며, 같은 날 오후 12시 30분부터 오후3시까지 같은 장소에서 밤재가 열린다.





국가무형문화재 126호 ‘진관사 국행수륙재’가 설행된다.

서울 북한산 진관사(주지 법해 스님)와 사단법인 진관사국행수륙재보존회는 22일 오전 국행수륙재를 입재했다. 이날부터 진관사는 7주간 7번의 재를 올리며 49일간 국행수륙재를 봉행한다.

진관사는 이날 대웅전과 함월당, 명부전에 공양물을 올리고, 명종으로 수륙재 입재를 알렸다. 국행수륙재 입재날, 영가를 맞는 시련소와 일주문 앞에서 영가에게 차와 국수를 대접하는 대령소, 영가의 고단함과 번뇌를 깨끗이 씻기는 관욕소가 경내 함월당에 차려졌다. 대령관욕을 시작으로 회주 계호 스님과 주지 법해 스님 등이 배례하고 심대근 신도회장 등 신도들이 10여 명씩 짝을 이뤄 배례하고 잔을 올렸다. 시식과 관욕이 이어졌고, 종범 스님모든 영가를 위해 법을 설했다. 진관사는 국행수륙재를 위해 직위에 따라 각자의 소임을 정하여 적은 용상방을 걸었고, 불전에 올릴 공양구를 마련하는 등의 임무를 맡는 여섯 종류의 책임자와 소임을 적은 육색방을 걸었다.







올해 국행수륙재는 이날 전 중앙승가대학교 총장 종범 스님이 ‘수월의 도량을 세우고 공화의 불사를 성취하다’라는 주제 법문 속에 설행됐다. 초재는 8월 28일 전 중앙승가대 총장 태원 스님이 ‘왕생정토, 어떻게 준비하는가’를 주제로 설하며, 2재는 9월 4일 봉녕사 강주 대우 스님이 ‘보시하는 사회와 공덕의 세계’를, 3재는 9월 11일 진관사 회주 계호 스님이 ‘수륙재의 봉원적 의미와 실천적 가치’, 4재는 9월 18일 송광사 율주 지현 스님이 ‘수륙재 영가들을 위한 계’, 5재는 9월 25일 전국비구니회장 본각 스님이 ‘대시회(大施會)를 열다-화엄경탐현기’, 6재는 10월 2일 조계종 어산어장 인묵 스님이 ‘범음범패의 기원과 그 수승한 공덕’를 각각 법문하며 설행할 예정이다. 마지막 7재는 조계종 전 전계대화상이자 원로의원인 성우 스님이 ‘수륙재의 소통과 회통, 그리고 고통의 구제’를 주제로 법문하며, 49일간의 국행수륙재를 회향한다. 회향인 7재는 10월 9일 오전 9시부터 오전 11시 30분까지 대웅전 앞 마당에서 낮재가 열리며, 같은 날 오후 12시 30분부터 오후3시까지 같은 장소에서 밤재가 열린다.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수륙재인 칠칠재(사십구재) 형식으로 진행되는 진관사 수륙재는 낮에는 돌아가신 영령을 정성껏 모셔 석가모니 부처님의 영산회상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게 하고, 밤에는 외로이 생을 마감한 무주고혼에게 공양을 올려 고통에서 벗어나게 한다.
현대의 국행수륙재는 49일간 일곱 차례 재를 설행하며,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낮재와 밤재로 나누어 이부 구성의 전통을 잇고 있다. 올해 수륙재 회향날 오전은 수륙재 낮재에 해당하는 시련, 대령, 관욕, 신중작법, 괘불이운, 영산작법, 법문이 진행되며, 오후는 밤재로 수륙연기, 사자단, 오로단, 상단, 중단, 하단, 회향봉송 순으로 진행된다. 시련 의식은 행사에 참여한 일반인 누구나 명다리를 잡고 진관사 마당에서부터 일주문까지 함께 걸으며 참여한다. 수륙재는 산자와 죽은 자를 모두 아울러 공양한다는 의미도 있다. 회향날은 수륙과를 나눈다.  







수륙재 각 단에는 조선 태조와 진관 국사, 백초월 스님,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등의 위패를 봉안한다. 국태민안과 국운융창을 염원하고 민중의 아픔을 달래는 무주고혼의 위패도 모셔진다. 그러면서도 수륙재 참석 대중이 하나가 되어 이웃과 사회를 돌아보는 기회도 삼는다. 49일 수륙재 기간 지역어르신들을 위해 잔치를 벌여 위무하고, 이웃에게는 쌀 등을 나눈다.

전통적인 수륙재가 망자 천도 중심이라면 진관사의 현대 수륙재는 이웃과 더불어함께 살기 위한 나눔행이 더해졌다.







 







전 중앙승가대 총장 종범 스님은 “마음이 모든 여래를 만들고 세계와 중생도 만든다. 일체 근심 걱정이 망상이니, 망상이 만든 것이 헛된 생각이라는 것을 깨우쳐 크게 편안한 청정국토를 만들자는 것이 수륙재”라며 “향단을 건설하고 향과 꽃, 등촉, 다과와 진수 등 육법공양을 올려 독경하고 설법하며 관법을 짓고 축원하는 모든 것은 마음이며 수륙재는 마음법으로 의식이 구조화된 것으로 해탈을 이루는 공양물로 대안정토에서 자재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기연한다”고 설했다.







올해 국행수륙재는 조계종 원로의원 성우 스님을 증명으로 진관사 회주 계호 스님이 재주를 맡는다. 법희 불필 스님 등이 선덕으로, 주지 법해 스님이 승법(乘法), 재 의식은 어산어장 동희 스님이 이끄는 진관사 국행수륙재보존회가 맡는다. 수륙재보존회 스님들이 범패 등 어산으로 참여한다. 수륙재 보존회 스님들은 진관사 수륙재학교 범패학과·법인학과·작법학과에서 수학했거나 수학 중이다. 올해 국행수륙재는 국행수륙재를 이끄는 어장 동희 스님이 한국 불교 역사상 최초의 비구니 어산어장으로 지정돼 더 의미를 더했다.

수륙재는 물과 육지에 떠도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 등 혼령들에게 법을 설하고 음식을 평등하게 베풀어 그들을 구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불교전통의례이다.

수륙재 의식은 중국 양나라 무제(武帝)에 의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교에 신심이 두터운 무제는 유주무주(有住無住)의 고혼들을 널리 구제함이 제일가는 공덕이라 생각하고, 승려들과 상의한 후 스스로 의식문(儀式文)을 만들었다. 그 의식문에 따라 505년에 금산사(金山寺)에서 재를 베푼 것이 그 시초이다. 그 뒤 당나라에서는 그 의식이 유명계(幽冥界)를 이익되게 한다고 하여 크게 융성하였다. 송나라 때에는 희령 연간(熙寧年間)에 동천(東川)이 <수륙문(水陸文)> 3권을 다시 지어 이를 널리 보급함으로써 수륙재가 크게 성행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수륙재가 행하여진 것은 고려 때부터이다. 광종 때에 때때로 성대히 열린 바 있었는데 970년(광종 21)에 갈양사(葛陽寺)에서 개설된 수륙도량이 그 최초의 예이다. 선종 때에는 태사국사(太史局事)로 있었던 최사겸(崔士謙)이 수륙재의 의식절차를 적어놓은 <수륙의문(水陸儀文)>을 송나라에서 구해 온 것을 계기로 보제사(普濟寺)에 수륙당(水陸堂)을 새로 세움으로써 수륙재를 더욱 성대히 격식에 맞게 하였다. 또한, 일연(一然)의 제자 혼구(混丘)가 <신편수륙의문(新編水陸儀文)>을 찬술함으로써 이 의식은 더욱 널리 성하게 되었다. 이 의식은 충목왕 때까지 계속 열렸음을 <고려사>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조선 태조로부터 시작된다.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억울하게 학살당한 고려 왕족과 친인척 그리고 전쟁으로 죽어간 귀족 및 장군들의 넋을 달래기 위한 명분과 자기 후손의 안녕을 도모하고 불안정한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아 새 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하려는 목적으로 수륙재를 거행했다. 이를 위해 도성 근처 국가 수륙사의 건립을 모색해 태조 6년 진관사에 모두 59칸의 대규모 수륙사(水陸寺)를 건립했고, 이를 기념해 권근에게 지시해 후대에 보여주도록 조성기를 남겼다.

권근의 <양촌집>에 따르면 태조는 “짐이 국가를 맡게 됨은 오직 선대 임금들께서 적경하신 덕이니, 조상의 덕에 보답하는 일을 힘쓰지 않아서는 안 되겠노라. 신하와 백성들 가운데 목숨을 바쳤거나 혹은 스스로 죽은 자 가운데 제사를 지내지 못해 저승길에서 굶주리고 구제받을 수 없는 이들을 생각하니 매우 가련하도다. 이제 옛 절에 수륙도량을 마련해 해마다 재를 베풀어서 선대 임금의 명복을 빌고 또한 중생들도 복되고 하고 싶으니 너희들이 가서 합당한 곳을 살펴보라.”고 하명한다.

이에 권근은 “(삼각산과 도봉산의) 사찰 가운데 진관사가 가장 뛰어납니다.”라고 고했다.







또 권근의 <양촌집>에 따르면 태조 이성계는 “2월 신묘일에 주상께서 친히 거동하며 보시고 삼단의 위치를 정했고, 3월 무오일에 또한 거동해 보고, 가을 9월에 공사가 끝났다. 삼단이 모두 3칸 집인데, 중단과 하단 두 단은 좌우에 욕실이 각각 3칸이 있어 하단은 좌우에 별도로 조종의 영실을 각각 8칸씩 설치했다. 대문 행랑 부엌 곳간 갖추어지지 않은 곳이 없어 모두 59칸이라. 사치스럽지 않고 누추하지도 않아 제도에 맞았다.”고 적고 있다.

권근은 또 “이달 24일 계유에 주상께서 또한 친히 거동하여 보시고 28일 정축에 신 권근을 불러 그 시말을 기록하여 후세에 보이도록 하셨다.”고 전한다.

태조는 4번이나 진관사를 찾을 만큼 국행수륙재에 공을 들였다. 조선 시대에는 비록 억불정책으로 불교 의식이 유교 의식으로 많이 바뀌어 갔지만, 태조는 진관사(津寬寺)를 국행수륙재(國行水陸齋)를 여는 사사(寺社)로 지정해 전란 속에 죽은 민초들과 기근에 죽은 민초들, 왕실 조상을 천도하기 위해 국행수륙재를 베풀었다. 왕조와 백성들의 안락과 평안, 신생 왕조인 조선의 국운융창을 진관사서 빌었다. 

1395년(태조 4)에는 견암사(見巖寺)와 석왕사(釋王寺) 관음굴(觀音窟) 등에서 고려 왕 씨의 영혼을 달래는 수륙재를 베풀었다. 그 이후 배불정책에 따른 불교 의식의 유교화 정책은 수륙재를 국행으로 거행하는 문제를 놓고 많은 논란을 벌이게 되나 오랜 전통으로 계속되어 오던 수륙재를 쉽게 폐지 시키지는 못했다. 억불(抑佛)로 이름 높은 태종도 국행수륙재 폐지의 상소문을 받았으나 대대로 거행하여 온 유풍을 쉽게 폐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국행을 고집했다.







처음에는 매년 2월 15일에 거행되었으나 1415년(태종 15)부터는 1월 15일로 변경하여 실시했다. 이 수륙재는 대체로 1515년(중종 10)경까지 크게 변동 없이 계속됐다. 왕실이 직접 그 시주가 되어 때때로 수륙재를 열게 돼 유생들의 시비와 비난을 받았으나, 1606년(선조 39) 6월에 창의문 밖에서 있었던 수륙재나 1433년(세종 15)에 효령대군이 시주가 된 한강에서의 수륙재 때에는 양반·평민 등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길을 메울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중종 때에 이르러서 유생들의 강력한 반대로 수륙재가 국행으로 거행되는 것이 금지됐고, 민간을 통해서만 전승돼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조선 태조 이후 1900년대까지 면면히 이어졌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쳐 6·25전쟁 참화로 잠시 중단됐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1977년 자운 스님과 전 회주인 진관 스님이 복원해 윤년마다 설행했다가 지난 2011년부터 현 회주 계호 스님이 연례 행사로 탈바꿈시켜 옛 명성을 되찾았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세미나 등을 통해 고증하고 원형을 복원해 국가무형문화재 제126호로 지정됐고, 매년 문화재청이 나서 국행수륙재를 기록하고 연구해 가고 있다. 진관사는 조선 태조 이후 600여 년 동안 수륙재 설행의 중심 사찰로 불교 의례의 전통을 계승해 왔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연극·음악·무용·문학·미술이 결합한 종합예술로 공연적 요소가 무궁무진해 그 가치가 더욱 높다. 불자들에게는 나와 타인, 뭇 생명과 함께하는 ‘공양’과 보시의 진정한 의미를 실천하고, 시민들에게는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과 함께 화합과 소통 그리고 나눔을 즐기는 축제의 장으로 수륙재는 의미를 확장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수륙재인 칠칠재(사십구재) 형식으로 진행되는 진관사 수륙재는 낮에는 돌아가신 영령을 정성껏 모셔 석가모니 부처님의 영산회상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게 하고, 밤에는 외로이 생을 마감한 무주고혼에게 공양을 올려 고통에서 벗어나게 한다.
현대의 국행수륙재는 49일간 일곱 차례 재를 설행하며,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낮재와 밤재로 나누어 이부 구성의 전통을 잇고 있다. 올해 수륙재 회향날 오전은 수륙재 낮재에 해당하는 시련, 대령, 관욕, 신중작법, 괘불이운, 영산작법, 법문이 진행되며, 오후는 밤재로 수륙연기, 사자단, 오로단, 상단, 중단, 하단, 회향봉송 순으로 진행된다. 시련 의식은 행사에 참여한 일반인 누구나 명다리를 잡고 진관사 마당에서부터 일주문까지 함께 걸으며 참여한다. 수륙재는 산자와 죽은 자를 모두 아울러 공양한다는 의미도 있다. 회향날은 수륙과를 나눈다.  





국가무형문화재 126호 ‘진관사 국행수륙재’가 설행된다.

서울 북한산 진관사(주지 법해 스님)와 사단법인 진관사국행수륙재보존회는 22일 오전 국행수륙재를 입재했다. 이날부터 진관사는 7주간 7번의 재를 올리며 49일간 국행수륙재를 봉행한다.

진관사는 이날 대웅전과 함월당, 명부전에 공양물을 올리고, 명종으로 수륙재 입재를 알렸다. 국행수륙재 입재날, 영가를 맞는 시련소와 일주문 앞에서 영가에게 차와 국수를 대접하는 대령소, 영가의 고단함과 번뇌를 깨끗이 씻기는 관욕소가 경내 함월당에 차려졌다. 대령관욕을 시작으로 회주 계호 스님과 주지 법해 스님 등이 배례하고 심대근 신도회장 등 신도들이 10여 명씩 짝을 이뤄 배례하고 잔을 올렸다. 시식과 관욕이 이어졌고, 종범 스님모든 영가를 위해 법을 설했다. 진관사는 국행수륙재를 위해 직위에 따라 각자의 소임을 정하여 적은 용상방을 걸었고, 불전에 올릴 공양구를 마련하는 등의 임무를 맡는 여섯 종류의 책임자와 소임을 적은 육색방을 걸었다.







올해 국행수륙재는 이날 전 중앙승가대학교 총장 종범 스님이 ‘수월의 도량을 세우고 공화의 불사를 성취하다’라는 주제 법문 속에 설행됐다. 초재는 8월 28일 전 중앙승가대 총장 태원 스님이 ‘왕생정토, 어떻게 준비하는가’를 주제로 설하며, 2재는 9월 4일 봉녕사 강주 대우 스님이 ‘보시하는 사회와 공덕의 세계’를, 3재는 9월 11일 진관사 회주 계호 스님이 ‘수륙재의 봉원적 의미와 실천적 가치’, 4재는 9월 18일 송광사 율주 지현 스님이 ‘수륙재 영가들을 위한 계’, 5재는 9월 25일 전국비구니회장 본각 스님이 ‘대시회(大施會)를 열다-화엄경탐현기’, 6재는 10월 2일 조계종 어산어장 인묵 스님이 ‘범음범패의 기원과 그 수승한 공덕’를 각각 법문하며 설행할 예정이다. 마지막 7재는 조계종 전 전계대화상이자 원로의원인 성우 스님이 ‘수륙재의 소통과 회통, 그리고 고통의 구제’를 주제로 법문하며, 49일간의 국행수륙재를 회향한다. 회향인 7재는 10월 9일 오전 9시부터 오전 11시 30분까지 대웅전 앞 마당에서 낮재가 열리며, 같은 날 오후 12시 30분부터 오후3시까지 같은 장소에서 밤재가 열린다.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수륙재인 칠칠재(사십구재) 형식으로 진행되는 진관사 수륙재는 낮에는 돌아가신 영령을 정성껏 모셔 석가모니 부처님의 영산회상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게 하고, 밤에는 외로이 생을 마감한 무주고혼에게 공양을 올려 고통에서 벗어나게 한다.
현대의 국행수륙재는 49일간 일곱 차례 재를 설행하며,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낮재와 밤재로 나누어 이부 구성의 전통을 잇고 있다. 올해 수륙재 회향날 오전은 수륙재 낮재에 해당하는 시련, 대령, 관욕, 신중작법, 괘불이운, 영산작법, 법문이 진행되며, 오후는 밤재로 수륙연기, 사자단, 오로단, 상단, 중단, 하단, 회향봉송 순으로 진행된다. 시련 의식은 행사에 참여한 일반인 누구나 명다리를 잡고 진관사 마당에서부터 일주문까지 함께 걸으며 참여한다. 수륙재는 산자와 죽은 자를 모두 아울러 공양한다는 의미도 있다. 회향날은 수륙과를 나눈다.  







수륙재 각 단에는 조선 태조와 진관 국사, 백초월 스님,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등의 위패를 봉안한다. 국태민안과 국운융창을 염원하고 민중의 아픔을 달래는 무주고혼의 위패도 모셔진다. 그러면서도 수륙재 참석 대중이 하나가 되어 이웃과 사회를 돌아보는 기회도 삼는다. 49일 수륙재 기간 지역어르신들을 위해 잔치를 벌여 위무하고, 이웃에게는 쌀 등을 나눈다.

전통적인 수륙재가 망자 천도 중심이라면 진관사의 현대 수륙재는 이웃과 더불어함께 살기 위한 나눔행이 더해졌다.







 







전 중앙승가대 총장 종범 스님은 “마음이 모든 여래를 만들고 세계와 중생도 만든다. 일체 근심 걱정이 망상이니, 망상이 만든 것이 헛된 생각이라는 것을 깨우쳐 크게 편안한 청정국토를 만들자는 것이 수륙재”라며 “향단을 건설하고 향과 꽃, 등촉, 다과와 진수 등 육법공양을 올려 독경하고 설법하며 관법을 짓고 축원하는 모든 것은 마음이며 수륙재는 마음법으로 의식이 구조화된 것으로 해탈을 이루는 공양물로 대안정토에서 자재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기연한다”고 설했다.







올해 국행수륙재는 조계종 원로의원 성우 스님을 증명으로 진관사 회주 계호 스님이 재주를 맡는다. 법희 불필 스님 등이 선덕으로, 주지 법해 스님이 승법(乘法), 재 의식은 어산어장 동희 스님이 이끄는 진관사 국행수륙재보존회가 맡는다. 수륙재보존회 스님들이 범패 등 어산으로 참여한다. 수륙재 보존회 스님들은 진관사 수륙재학교 범패학과·법인학과·작법학과에서 수학했거나 수학 중이다. 올해 국행수륙재는 국행수륙재를 이끄는 어장 동희 스님이 한국 불교 역사상 최초의 비구니 어산어장으로 지정돼 더 의미를 더했다.

수륙재는 물과 육지에 떠도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 등 혼령들에게 법을 설하고 음식을 평등하게 베풀어 그들을 구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불교전통의례이다.

수륙재 의식은 중국 양나라 무제(武帝)에 의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교에 신심이 두터운 무제는 유주무주(有住無住)의 고혼들을 널리 구제함이 제일가는 공덕이라 생각하고, 승려들과 상의한 후 스스로 의식문(儀式文)을 만들었다. 그 의식문에 따라 505년에 금산사(金山寺)에서 재를 베푼 것이 그 시초이다. 그 뒤 당나라에서는 그 의식이 유명계(幽冥界)를 이익되게 한다고 하여 크게 융성하였다. 송나라 때에는 희령 연간(熙寧年間)에 동천(東川)이 <수륙문(水陸文)> 3권을 다시 지어 이를 널리 보급함으로써 수륙재가 크게 성행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수륙재가 행하여진 것은 고려 때부터이다. 광종 때에 때때로 성대히 열린 바 있었는데 970년(광종 21)에 갈양사(葛陽寺)에서 개설된 수륙도량이 그 최초의 예이다. 선종 때에는 태사국사(太史局事)로 있었던 최사겸(崔士謙)이 수륙재의 의식절차를 적어놓은 <수륙의문(水陸儀文)>을 송나라에서 구해 온 것을 계기로 보제사(普濟寺)에 수륙당(水陸堂)을 새로 세움으로써 수륙재를 더욱 성대히 격식에 맞게 하였다. 또한, 일연(一然)의 제자 혼구(混丘)가 <신편수륙의문(新編水陸儀文)>을 찬술함으로써 이 의식은 더욱 널리 성하게 되었다. 이 의식은 충목왕 때까지 계속 열렸음을 <고려사>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조선 태조로부터 시작된다.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억울하게 학살당한 고려 왕족과 친인척 그리고 전쟁으로 죽어간 귀족 및 장군들의 넋을 달래기 위한 명분과 자기 후손의 안녕을 도모하고 불안정한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아 새 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하려는 목적으로 수륙재를 거행했다. 이를 위해 도성 근처 국가 수륙사의 건립을 모색해 태조 6년 진관사에 모두 59칸의 대규모 수륙사(水陸寺)를 건립했고, 이를 기념해 권근에게 지시해 후대에 보여주도록 조성기를 남겼다.

권근의 <양촌집>에 따르면 태조는 “짐이 국가를 맡게 됨은 오직 선대 임금들께서 적경하신 덕이니, 조상의 덕에 보답하는 일을 힘쓰지 않아서는 안 되겠노라. 신하와 백성들 가운데 목숨을 바쳤거나 혹은 스스로 죽은 자 가운데 제사를 지내지 못해 저승길에서 굶주리고 구제받을 수 없는 이들을 생각하니 매우 가련하도다. 이제 옛 절에 수륙도량을 마련해 해마다 재를 베풀어서 선대 임금의 명복을 빌고 또한 중생들도 복되고 하고 싶으니 너희들이 가서 합당한 곳을 살펴보라.”고 하명한다.

이에 권근은 “(삼각산과 도봉산의) 사찰 가운데 진관사가 가장 뛰어납니다.”라고 고했다.







또 권근의 <양촌집>에 따르면 태조 이성계는 “2월 신묘일에 주상께서 친히 거동하며 보시고 삼단의 위치를 정했고, 3월 무오일에 또한 거동해 보고, 가을 9월에 공사가 끝났다. 삼단이 모두 3칸 집인데, 중단과 하단 두 단은 좌우에 욕실이 각각 3칸이 있어 하단은 좌우에 별도로 조종의 영실을 각각 8칸씩 설치했다. 대문 행랑 부엌 곳간 갖추어지지 않은 곳이 없어 모두 59칸이라. 사치스럽지 않고 누추하지도 않아 제도에 맞았다.”고 적고 있다.

권근은 또 “이달 24일 계유에 주상께서 또한 친히 거동하여 보시고 28일 정축에 신 권근을 불러 그 시말을 기록하여 후세에 보이도록 하셨다.”고 전한다.

태조는 4번이나 진관사를 찾을 만큼 국행수륙재에 공을 들였다. 조선 시대에는 비록 억불정책으로 불교 의식이 유교 의식으로 많이 바뀌어 갔지만, 태조는 진관사(津寬寺)를 국행수륙재(國行水陸齋)를 여는 사사(寺社)로 지정해 전란 속에 죽은 민초들과 기근에 죽은 민초들, 왕실 조상을 천도하기 위해 국행수륙재를 베풀었다. 왕조와 백성들의 안락과 평안, 신생 왕조인 조선의 국운융창을 진관사서 빌었다. 

1395년(태조 4)에는 견암사(見巖寺)와 석왕사(釋王寺) 관음굴(觀音窟) 등에서 고려 왕 씨의 영혼을 달래는 수륙재를 베풀었다. 그 이후 배불정책에 따른 불교 의식의 유교화 정책은 수륙재를 국행으로 거행하는 문제를 놓고 많은 논란을 벌이게 되나 오랜 전통으로 계속되어 오던 수륙재를 쉽게 폐지 시키지는 못했다. 억불(抑佛)로 이름 높은 태종도 국행수륙재 폐지의 상소문을 받았으나 대대로 거행하여 온 유풍을 쉽게 폐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국행을 고집했다.







처음에는 매년 2월 15일에 거행되었으나 1415년(태종 15)부터는 1월 15일로 변경하여 실시했다. 이 수륙재는 대체로 1515년(중종 10)경까지 크게 변동 없이 계속됐다. 왕실이 직접 그 시주가 되어 때때로 수륙재를 열게 돼 유생들의 시비와 비난을 받았으나, 1606년(선조 39) 6월에 창의문 밖에서 있었던 수륙재나 1433년(세종 15)에 효령대군이 시주가 된 한강에서의 수륙재 때에는 양반·평민 등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길을 메울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중종 때에 이르러서 유생들의 강력한 반대로 수륙재가 국행으로 거행되는 것이 금지됐고, 민간을 통해서만 전승돼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조선 태조 이후 1900년대까지 면면히 이어졌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쳐 6·25전쟁 참화로 잠시 중단됐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1977년 자운 스님과 전 회주인 진관 스님이 복원해 윤년마다 설행했다가 지난 2011년부터 현 회주 계호 스님이 연례 행사로 탈바꿈시켜 옛 명성을 되찾았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세미나 등을 통해 고증하고 원형을 복원해 국가무형문화재 제126호로 지정됐고, 매년 문화재청이 나서 국행수륙재를 기록하고 연구해 가고 있다. 진관사는 조선 태조 이후 600여 년 동안 수륙재 설행의 중심 사찰로 불교 의례의 전통을 계승해 왔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연극·음악·무용·문학·미술이 결합한 종합예술로 공연적 요소가 무궁무진해 그 가치가 더욱 높다. 불자들에게는 나와 타인, 뭇 생명과 함께하는 ‘공양’과 보시의 진정한 의미를 실천하고, 시민들에게는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과 함께 화합과 소통 그리고 나눔을 즐기는 축제의 장으로 수륙재는 의미를 확장하고 있다.

수륙재 각 단에는 조선 태조와 진관 국사, 백초월 스님,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등의 위패를 봉안한다. 국태민안과 국운융창을 염원하고 민중의 아픔을 달래는 무주고혼의 위패도 모셔진다. 그러면서도 수륙재 참석 대중이 하나가 되어 이웃과 사회를 돌아보는 기회도 삼는다. 49일 수륙재 기간 지역어르신들을 위해 잔치를 벌여 위무하고, 이웃에게는 쌀 등을 나눈다.

전통적인 수륙재가 망자 천도 중심이라면 진관사의 현대 수륙재는 이웃과 더불어함께 살기 위한 나눔행이 더해졌다.





국가무형문화재 126호 ‘진관사 국행수륙재’가 설행된다.

서울 북한산 진관사(주지 법해 스님)와 사단법인 진관사국행수륙재보존회는 22일 오전 국행수륙재를 입재했다. 이날부터 진관사는 7주간 7번의 재를 올리며 49일간 국행수륙재를 봉행한다.

진관사는 이날 대웅전과 함월당, 명부전에 공양물을 올리고, 명종으로 수륙재 입재를 알렸다. 국행수륙재 입재날, 영가를 맞는 시련소와 일주문 앞에서 영가에게 차와 국수를 대접하는 대령소, 영가의 고단함과 번뇌를 깨끗이 씻기는 관욕소가 경내 함월당에 차려졌다. 대령관욕을 시작으로 회주 계호 스님과 주지 법해 스님 등이 배례하고 심대근 신도회장 등 신도들이 10여 명씩 짝을 이뤄 배례하고 잔을 올렸다. 시식과 관욕이 이어졌고, 종범 스님모든 영가를 위해 법을 설했다. 진관사는 국행수륙재를 위해 직위에 따라 각자의 소임을 정하여 적은 용상방을 걸었고, 불전에 올릴 공양구를 마련하는 등의 임무를 맡는 여섯 종류의 책임자와 소임을 적은 육색방을 걸었다.







올해 국행수륙재는 이날 전 중앙승가대학교 총장 종범 스님이 ‘수월의 도량을 세우고 공화의 불사를 성취하다’라는 주제 법문 속에 설행됐다. 초재는 8월 28일 전 중앙승가대 총장 태원 스님이 ‘왕생정토, 어떻게 준비하는가’를 주제로 설하며, 2재는 9월 4일 봉녕사 강주 대우 스님이 ‘보시하는 사회와 공덕의 세계’를, 3재는 9월 11일 진관사 회주 계호 스님이 ‘수륙재의 봉원적 의미와 실천적 가치’, 4재는 9월 18일 송광사 율주 지현 스님이 ‘수륙재 영가들을 위한 계’, 5재는 9월 25일 전국비구니회장 본각 스님이 ‘대시회(大施會)를 열다-화엄경탐현기’, 6재는 10월 2일 조계종 어산어장 인묵 스님이 ‘범음범패의 기원과 그 수승한 공덕’를 각각 법문하며 설행할 예정이다. 마지막 7재는 조계종 전 전계대화상이자 원로의원인 성우 스님이 ‘수륙재의 소통과 회통, 그리고 고통의 구제’를 주제로 법문하며, 49일간의 국행수륙재를 회향한다. 회향인 7재는 10월 9일 오전 9시부터 오전 11시 30분까지 대웅전 앞 마당에서 낮재가 열리며, 같은 날 오후 12시 30분부터 오후3시까지 같은 장소에서 밤재가 열린다.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수륙재인 칠칠재(사십구재) 형식으로 진행되는 진관사 수륙재는 낮에는 돌아가신 영령을 정성껏 모셔 석가모니 부처님의 영산회상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게 하고, 밤에는 외로이 생을 마감한 무주고혼에게 공양을 올려 고통에서 벗어나게 한다.
현대의 국행수륙재는 49일간 일곱 차례 재를 설행하며,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낮재와 밤재로 나누어 이부 구성의 전통을 잇고 있다. 올해 수륙재 회향날 오전은 수륙재 낮재에 해당하는 시련, 대령, 관욕, 신중작법, 괘불이운, 영산작법, 법문이 진행되며, 오후는 밤재로 수륙연기, 사자단, 오로단, 상단, 중단, 하단, 회향봉송 순으로 진행된다. 시련 의식은 행사에 참여한 일반인 누구나 명다리를 잡고 진관사 마당에서부터 일주문까지 함께 걸으며 참여한다. 수륙재는 산자와 죽은 자를 모두 아울러 공양한다는 의미도 있다. 회향날은 수륙과를 나눈다.  







수륙재 각 단에는 조선 태조와 진관 국사, 백초월 스님,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등의 위패를 봉안한다. 국태민안과 국운융창을 염원하고 민중의 아픔을 달래는 무주고혼의 위패도 모셔진다. 그러면서도 수륙재 참석 대중이 하나가 되어 이웃과 사회를 돌아보는 기회도 삼는다. 49일 수륙재 기간 지역어르신들을 위해 잔치를 벌여 위무하고, 이웃에게는 쌀 등을 나눈다.

전통적인 수륙재가 망자 천도 중심이라면 진관사의 현대 수륙재는 이웃과 더불어함께 살기 위한 나눔행이 더해졌다.







 







전 중앙승가대 총장 종범 스님은 “마음이 모든 여래를 만들고 세계와 중생도 만든다. 일체 근심 걱정이 망상이니, 망상이 만든 것이 헛된 생각이라는 것을 깨우쳐 크게 편안한 청정국토를 만들자는 것이 수륙재”라며 “향단을 건설하고 향과 꽃, 등촉, 다과와 진수 등 육법공양을 올려 독경하고 설법하며 관법을 짓고 축원하는 모든 것은 마음이며 수륙재는 마음법으로 의식이 구조화된 것으로 해탈을 이루는 공양물로 대안정토에서 자재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기연한다”고 설했다.







올해 국행수륙재는 조계종 원로의원 성우 스님을 증명으로 진관사 회주 계호 스님이 재주를 맡는다. 법희 불필 스님 등이 선덕으로, 주지 법해 스님이 승법(乘法), 재 의식은 어산어장 동희 스님이 이끄는 진관사 국행수륙재보존회가 맡는다. 수륙재보존회 스님들이 범패 등 어산으로 참여한다. 수륙재 보존회 스님들은 진관사 수륙재학교 범패학과·법인학과·작법학과에서 수학했거나 수학 중이다. 올해 국행수륙재는 국행수륙재를 이끄는 어장 동희 스님이 한국 불교 역사상 최초의 비구니 어산어장으로 지정돼 더 의미를 더했다.

수륙재는 물과 육지에 떠도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 등 혼령들에게 법을 설하고 음식을 평등하게 베풀어 그들을 구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불교전통의례이다.

수륙재 의식은 중국 양나라 무제(武帝)에 의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교에 신심이 두터운 무제는 유주무주(有住無住)의 고혼들을 널리 구제함이 제일가는 공덕이라 생각하고, 승려들과 상의한 후 스스로 의식문(儀式文)을 만들었다. 그 의식문에 따라 505년에 금산사(金山寺)에서 재를 베푼 것이 그 시초이다. 그 뒤 당나라에서는 그 의식이 유명계(幽冥界)를 이익되게 한다고 하여 크게 융성하였다. 송나라 때에는 희령 연간(熙寧年間)에 동천(東川)이 <수륙문(水陸文)> 3권을 다시 지어 이를 널리 보급함으로써 수륙재가 크게 성행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수륙재가 행하여진 것은 고려 때부터이다. 광종 때에 때때로 성대히 열린 바 있었는데 970년(광종 21)에 갈양사(葛陽寺)에서 개설된 수륙도량이 그 최초의 예이다. 선종 때에는 태사국사(太史局事)로 있었던 최사겸(崔士謙)이 수륙재의 의식절차를 적어놓은 <수륙의문(水陸儀文)>을 송나라에서 구해 온 것을 계기로 보제사(普濟寺)에 수륙당(水陸堂)을 새로 세움으로써 수륙재를 더욱 성대히 격식에 맞게 하였다. 또한, 일연(一然)의 제자 혼구(混丘)가 <신편수륙의문(新編水陸儀文)>을 찬술함으로써 이 의식은 더욱 널리 성하게 되었다. 이 의식은 충목왕 때까지 계속 열렸음을 <고려사>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조선 태조로부터 시작된다.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억울하게 학살당한 고려 왕족과 친인척 그리고 전쟁으로 죽어간 귀족 및 장군들의 넋을 달래기 위한 명분과 자기 후손의 안녕을 도모하고 불안정한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아 새 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하려는 목적으로 수륙재를 거행했다. 이를 위해 도성 근처 국가 수륙사의 건립을 모색해 태조 6년 진관사에 모두 59칸의 대규모 수륙사(水陸寺)를 건립했고, 이를 기념해 권근에게 지시해 후대에 보여주도록 조성기를 남겼다.

권근의 <양촌집>에 따르면 태조는 “짐이 국가를 맡게 됨은 오직 선대 임금들께서 적경하신 덕이니, 조상의 덕에 보답하는 일을 힘쓰지 않아서는 안 되겠노라. 신하와 백성들 가운데 목숨을 바쳤거나 혹은 스스로 죽은 자 가운데 제사를 지내지 못해 저승길에서 굶주리고 구제받을 수 없는 이들을 생각하니 매우 가련하도다. 이제 옛 절에 수륙도량을 마련해 해마다 재를 베풀어서 선대 임금의 명복을 빌고 또한 중생들도 복되고 하고 싶으니 너희들이 가서 합당한 곳을 살펴보라.”고 하명한다.

이에 권근은 “(삼각산과 도봉산의) 사찰 가운데 진관사가 가장 뛰어납니다.”라고 고했다.







또 권근의 <양촌집>에 따르면 태조 이성계는 “2월 신묘일에 주상께서 친히 거동하며 보시고 삼단의 위치를 정했고, 3월 무오일에 또한 거동해 보고, 가을 9월에 공사가 끝났다. 삼단이 모두 3칸 집인데, 중단과 하단 두 단은 좌우에 욕실이 각각 3칸이 있어 하단은 좌우에 별도로 조종의 영실을 각각 8칸씩 설치했다. 대문 행랑 부엌 곳간 갖추어지지 않은 곳이 없어 모두 59칸이라. 사치스럽지 않고 누추하지도 않아 제도에 맞았다.”고 적고 있다.

권근은 또 “이달 24일 계유에 주상께서 또한 친히 거동하여 보시고 28일 정축에 신 권근을 불러 그 시말을 기록하여 후세에 보이도록 하셨다.”고 전한다.

태조는 4번이나 진관사를 찾을 만큼 국행수륙재에 공을 들였다. 조선 시대에는 비록 억불정책으로 불교 의식이 유교 의식으로 많이 바뀌어 갔지만, 태조는 진관사(津寬寺)를 국행수륙재(國行水陸齋)를 여는 사사(寺社)로 지정해 전란 속에 죽은 민초들과 기근에 죽은 민초들, 왕실 조상을 천도하기 위해 국행수륙재를 베풀었다. 왕조와 백성들의 안락과 평안, 신생 왕조인 조선의 국운융창을 진관사서 빌었다. 

1395년(태조 4)에는 견암사(見巖寺)와 석왕사(釋王寺) 관음굴(觀音窟) 등에서 고려 왕 씨의 영혼을 달래는 수륙재를 베풀었다. 그 이후 배불정책에 따른 불교 의식의 유교화 정책은 수륙재를 국행으로 거행하는 문제를 놓고 많은 논란을 벌이게 되나 오랜 전통으로 계속되어 오던 수륙재를 쉽게 폐지 시키지는 못했다. 억불(抑佛)로 이름 높은 태종도 국행수륙재 폐지의 상소문을 받았으나 대대로 거행하여 온 유풍을 쉽게 폐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국행을 고집했다.







처음에는 매년 2월 15일에 거행되었으나 1415년(태종 15)부터는 1월 15일로 변경하여 실시했다. 이 수륙재는 대체로 1515년(중종 10)경까지 크게 변동 없이 계속됐다. 왕실이 직접 그 시주가 되어 때때로 수륙재를 열게 돼 유생들의 시비와 비난을 받았으나, 1606년(선조 39) 6월에 창의문 밖에서 있었던 수륙재나 1433년(세종 15)에 효령대군이 시주가 된 한강에서의 수륙재 때에는 양반·평민 등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길을 메울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중종 때에 이르러서 유생들의 강력한 반대로 수륙재가 국행으로 거행되는 것이 금지됐고, 민간을 통해서만 전승돼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조선 태조 이후 1900년대까지 면면히 이어졌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쳐 6·25전쟁 참화로 잠시 중단됐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1977년 자운 스님과 전 회주인 진관 스님이 복원해 윤년마다 설행했다가 지난 2011년부터 현 회주 계호 스님이 연례 행사로 탈바꿈시켜 옛 명성을 되찾았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세미나 등을 통해 고증하고 원형을 복원해 국가무형문화재 제126호로 지정됐고, 매년 문화재청이 나서 국행수륙재를 기록하고 연구해 가고 있다. 진관사는 조선 태조 이후 600여 년 동안 수륙재 설행의 중심 사찰로 불교 의례의 전통을 계승해 왔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연극·음악·무용·문학·미술이 결합한 종합예술로 공연적 요소가 무궁무진해 그 가치가 더욱 높다. 불자들에게는 나와 타인, 뭇 생명과 함께하는 ‘공양’과 보시의 진정한 의미를 실천하고, 시민들에게는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과 함께 화합과 소통 그리고 나눔을 즐기는 축제의 장으로 수륙재는 의미를 확장하고 있다.

 





국가무형문화재 126호 ‘진관사 국행수륙재’가 설행된다.

서울 북한산 진관사(주지 법해 스님)와 사단법인 진관사국행수륙재보존회는 22일 오전 국행수륙재를 입재했다. 이날부터 진관사는 7주간 7번의 재를 올리며 49일간 국행수륙재를 봉행한다.

진관사는 이날 대웅전과 함월당, 명부전에 공양물을 올리고, 명종으로 수륙재 입재를 알렸다. 국행수륙재 입재날, 영가를 맞는 시련소와 일주문 앞에서 영가에게 차와 국수를 대접하는 대령소, 영가의 고단함과 번뇌를 깨끗이 씻기는 관욕소가 경내 함월당에 차려졌다. 대령관욕을 시작으로 회주 계호 스님과 주지 법해 스님 등이 배례하고 심대근 신도회장 등 신도들이 10여 명씩 짝을 이뤄 배례하고 잔을 올렸다. 시식과 관욕이 이어졌고, 종범 스님모든 영가를 위해 법을 설했다. 진관사는 국행수륙재를 위해 직위에 따라 각자의 소임을 정하여 적은 용상방을 걸었고, 불전에 올릴 공양구를 마련하는 등의 임무를 맡는 여섯 종류의 책임자와 소임을 적은 육색방을 걸었다.







올해 국행수륙재는 이날 전 중앙승가대학교 총장 종범 스님이 ‘수월의 도량을 세우고 공화의 불사를 성취하다’라는 주제 법문 속에 설행됐다. 초재는 8월 28일 전 중앙승가대 총장 태원 스님이 ‘왕생정토, 어떻게 준비하는가’를 주제로 설하며, 2재는 9월 4일 봉녕사 강주 대우 스님이 ‘보시하는 사회와 공덕의 세계’를, 3재는 9월 11일 진관사 회주 계호 스님이 ‘수륙재의 봉원적 의미와 실천적 가치’, 4재는 9월 18일 송광사 율주 지현 스님이 ‘수륙재 영가들을 위한 계’, 5재는 9월 25일 전국비구니회장 본각 스님이 ‘대시회(大施會)를 열다-화엄경탐현기’, 6재는 10월 2일 조계종 어산어장 인묵 스님이 ‘범음범패의 기원과 그 수승한 공덕’를 각각 법문하며 설행할 예정이다. 마지막 7재는 조계종 전 전계대화상이자 원로의원인 성우 스님이 ‘수륙재의 소통과 회통, 그리고 고통의 구제’를 주제로 법문하며, 49일간의 국행수륙재를 회향한다. 회향인 7재는 10월 9일 오전 9시부터 오전 11시 30분까지 대웅전 앞 마당에서 낮재가 열리며, 같은 날 오후 12시 30분부터 오후3시까지 같은 장소에서 밤재가 열린다.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수륙재인 칠칠재(사십구재) 형식으로 진행되는 진관사 수륙재는 낮에는 돌아가신 영령을 정성껏 모셔 석가모니 부처님의 영산회상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게 하고, 밤에는 외로이 생을 마감한 무주고혼에게 공양을 올려 고통에서 벗어나게 한다.
현대의 국행수륙재는 49일간 일곱 차례 재를 설행하며,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낮재와 밤재로 나누어 이부 구성의 전통을 잇고 있다. 올해 수륙재 회향날 오전은 수륙재 낮재에 해당하는 시련, 대령, 관욕, 신중작법, 괘불이운, 영산작법, 법문이 진행되며, 오후는 밤재로 수륙연기, 사자단, 오로단, 상단, 중단, 하단, 회향봉송 순으로 진행된다. 시련 의식은 행사에 참여한 일반인 누구나 명다리를 잡고 진관사 마당에서부터 일주문까지 함께 걸으며 참여한다. 수륙재는 산자와 죽은 자를 모두 아울러 공양한다는 의미도 있다. 회향날은 수륙과를 나눈다.  







수륙재 각 단에는 조선 태조와 진관 국사, 백초월 스님,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등의 위패를 봉안한다. 국태민안과 국운융창을 염원하고 민중의 아픔을 달래는 무주고혼의 위패도 모셔진다. 그러면서도 수륙재 참석 대중이 하나가 되어 이웃과 사회를 돌아보는 기회도 삼는다. 49일 수륙재 기간 지역어르신들을 위해 잔치를 벌여 위무하고, 이웃에게는 쌀 등을 나눈다.

전통적인 수륙재가 망자 천도 중심이라면 진관사의 현대 수륙재는 이웃과 더불어함께 살기 위한 나눔행이 더해졌다.







 







전 중앙승가대 총장 종범 스님은 “마음이 모든 여래를 만들고 세계와 중생도 만든다. 일체 근심 걱정이 망상이니, 망상이 만든 것이 헛된 생각이라는 것을 깨우쳐 크게 편안한 청정국토를 만들자는 것이 수륙재”라며 “향단을 건설하고 향과 꽃, 등촉, 다과와 진수 등 육법공양을 올려 독경하고 설법하며 관법을 짓고 축원하는 모든 것은 마음이며 수륙재는 마음법으로 의식이 구조화된 것으로 해탈을 이루는 공양물로 대안정토에서 자재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기연한다”고 설했다.







올해 국행수륙재는 조계종 원로의원 성우 스님을 증명으로 진관사 회주 계호 스님이 재주를 맡는다. 법희 불필 스님 등이 선덕으로, 주지 법해 스님이 승법(乘法), 재 의식은 어산어장 동희 스님이 이끄는 진관사 국행수륙재보존회가 맡는다. 수륙재보존회 스님들이 범패 등 어산으로 참여한다. 수륙재 보존회 스님들은 진관사 수륙재학교 범패학과·법인학과·작법학과에서 수학했거나 수학 중이다. 올해 국행수륙재는 국행수륙재를 이끄는 어장 동희 스님이 한국 불교 역사상 최초의 비구니 어산어장으로 지정돼 더 의미를 더했다.

수륙재는 물과 육지에 떠도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 등 혼령들에게 법을 설하고 음식을 평등하게 베풀어 그들을 구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불교전통의례이다.

수륙재 의식은 중국 양나라 무제(武帝)에 의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교에 신심이 두터운 무제는 유주무주(有住無住)의 고혼들을 널리 구제함이 제일가는 공덕이라 생각하고, 승려들과 상의한 후 스스로 의식문(儀式文)을 만들었다. 그 의식문에 따라 505년에 금산사(金山寺)에서 재를 베푼 것이 그 시초이다. 그 뒤 당나라에서는 그 의식이 유명계(幽冥界)를 이익되게 한다고 하여 크게 융성하였다. 송나라 때에는 희령 연간(熙寧年間)에 동천(東川)이 <수륙문(水陸文)> 3권을 다시 지어 이를 널리 보급함으로써 수륙재가 크게 성행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수륙재가 행하여진 것은 고려 때부터이다. 광종 때에 때때로 성대히 열린 바 있었는데 970년(광종 21)에 갈양사(葛陽寺)에서 개설된 수륙도량이 그 최초의 예이다. 선종 때에는 태사국사(太史局事)로 있었던 최사겸(崔士謙)이 수륙재의 의식절차를 적어놓은 <수륙의문(水陸儀文)>을 송나라에서 구해 온 것을 계기로 보제사(普濟寺)에 수륙당(水陸堂)을 새로 세움으로써 수륙재를 더욱 성대히 격식에 맞게 하였다. 또한, 일연(一然)의 제자 혼구(混丘)가 <신편수륙의문(新編水陸儀文)>을 찬술함으로써 이 의식은 더욱 널리 성하게 되었다. 이 의식은 충목왕 때까지 계속 열렸음을 <고려사>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조선 태조로부터 시작된다.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억울하게 학살당한 고려 왕족과 친인척 그리고 전쟁으로 죽어간 귀족 및 장군들의 넋을 달래기 위한 명분과 자기 후손의 안녕을 도모하고 불안정한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아 새 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하려는 목적으로 수륙재를 거행했다. 이를 위해 도성 근처 국가 수륙사의 건립을 모색해 태조 6년 진관사에 모두 59칸의 대규모 수륙사(水陸寺)를 건립했고, 이를 기념해 권근에게 지시해 후대에 보여주도록 조성기를 남겼다.

권근의 <양촌집>에 따르면 태조는 “짐이 국가를 맡게 됨은 오직 선대 임금들께서 적경하신 덕이니, 조상의 덕에 보답하는 일을 힘쓰지 않아서는 안 되겠노라. 신하와 백성들 가운데 목숨을 바쳤거나 혹은 스스로 죽은 자 가운데 제사를 지내지 못해 저승길에서 굶주리고 구제받을 수 없는 이들을 생각하니 매우 가련하도다. 이제 옛 절에 수륙도량을 마련해 해마다 재를 베풀어서 선대 임금의 명복을 빌고 또한 중생들도 복되고 하고 싶으니 너희들이 가서 합당한 곳을 살펴보라.”고 하명한다.

이에 권근은 “(삼각산과 도봉산의) 사찰 가운데 진관사가 가장 뛰어납니다.”라고 고했다.







또 권근의 <양촌집>에 따르면 태조 이성계는 “2월 신묘일에 주상께서 친히 거동하며 보시고 삼단의 위치를 정했고, 3월 무오일에 또한 거동해 보고, 가을 9월에 공사가 끝났다. 삼단이 모두 3칸 집인데, 중단과 하단 두 단은 좌우에 욕실이 각각 3칸이 있어 하단은 좌우에 별도로 조종의 영실을 각각 8칸씩 설치했다. 대문 행랑 부엌 곳간 갖추어지지 않은 곳이 없어 모두 59칸이라. 사치스럽지 않고 누추하지도 않아 제도에 맞았다.”고 적고 있다.

권근은 또 “이달 24일 계유에 주상께서 또한 친히 거동하여 보시고 28일 정축에 신 권근을 불러 그 시말을 기록하여 후세에 보이도록 하셨다.”고 전한다.

태조는 4번이나 진관사를 찾을 만큼 국행수륙재에 공을 들였다. 조선 시대에는 비록 억불정책으로 불교 의식이 유교 의식으로 많이 바뀌어 갔지만, 태조는 진관사(津寬寺)를 국행수륙재(國行水陸齋)를 여는 사사(寺社)로 지정해 전란 속에 죽은 민초들과 기근에 죽은 민초들, 왕실 조상을 천도하기 위해 국행수륙재를 베풀었다. 왕조와 백성들의 안락과 평안, 신생 왕조인 조선의 국운융창을 진관사서 빌었다. 

1395년(태조 4)에는 견암사(見巖寺)와 석왕사(釋王寺) 관음굴(觀音窟) 등에서 고려 왕 씨의 영혼을 달래는 수륙재를 베풀었다. 그 이후 배불정책에 따른 불교 의식의 유교화 정책은 수륙재를 국행으로 거행하는 문제를 놓고 많은 논란을 벌이게 되나 오랜 전통으로 계속되어 오던 수륙재를 쉽게 폐지 시키지는 못했다. 억불(抑佛)로 이름 높은 태종도 국행수륙재 폐지의 상소문을 받았으나 대대로 거행하여 온 유풍을 쉽게 폐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국행을 고집했다.







처음에는 매년 2월 15일에 거행되었으나 1415년(태종 15)부터는 1월 15일로 변경하여 실시했다. 이 수륙재는 대체로 1515년(중종 10)경까지 크게 변동 없이 계속됐다. 왕실이 직접 그 시주가 되어 때때로 수륙재를 열게 돼 유생들의 시비와 비난을 받았으나, 1606년(선조 39) 6월에 창의문 밖에서 있었던 수륙재나 1433년(세종 15)에 효령대군이 시주가 된 한강에서의 수륙재 때에는 양반·평민 등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길을 메울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중종 때에 이르러서 유생들의 강력한 반대로 수륙재가 국행으로 거행되는 것이 금지됐고, 민간을 통해서만 전승돼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조선 태조 이후 1900년대까지 면면히 이어졌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쳐 6·25전쟁 참화로 잠시 중단됐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1977년 자운 스님과 전 회주인 진관 스님이 복원해 윤년마다 설행했다가 지난 2011년부터 현 회주 계호 스님이 연례 행사로 탈바꿈시켜 옛 명성을 되찾았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세미나 등을 통해 고증하고 원형을 복원해 국가무형문화재 제126호로 지정됐고, 매년 문화재청이 나서 국행수륙재를 기록하고 연구해 가고 있다. 진관사는 조선 태조 이후 600여 년 동안 수륙재 설행의 중심 사찰로 불교 의례의 전통을 계승해 왔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연극·음악·무용·문학·미술이 결합한 종합예술로 공연적 요소가 무궁무진해 그 가치가 더욱 높다. 불자들에게는 나와 타인, 뭇 생명과 함께하는 ‘공양’과 보시의 진정한 의미를 실천하고, 시민들에게는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과 함께 화합과 소통 그리고 나눔을 즐기는 축제의 장으로 수륙재는 의미를 확장하고 있다.

전 중앙승가대 총장 종범 스님은 “마음이 모든 여래를 만들고 세계와 중생도 만든다. 일체 근심 걱정이 망상이니, 망상이 만든 것이 헛된 생각이라는 것을 깨우쳐 크게 편안한 청정국토를 만들자는 것이 수륙재”라며 “향단을 건설하고 향과 꽃, 등촉, 다과와 진수 등 육법공양을 올려 독경하고 설법하며 관법을 짓고 축원하는 모든 것은 마음이며 수륙재는 마음법으로 의식이 구조화된 것으로 해탈을 이루는 공양물로 대안정토에서 자재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기연한다”고 설했다.





국가무형문화재 126호 ‘진관사 국행수륙재’가 설행된다.

서울 북한산 진관사(주지 법해 스님)와 사단법인 진관사국행수륙재보존회는 22일 오전 국행수륙재를 입재했다. 이날부터 진관사는 7주간 7번의 재를 올리며 49일간 국행수륙재를 봉행한다.

진관사는 이날 대웅전과 함월당, 명부전에 공양물을 올리고, 명종으로 수륙재 입재를 알렸다. 국행수륙재 입재날, 영가를 맞는 시련소와 일주문 앞에서 영가에게 차와 국수를 대접하는 대령소, 영가의 고단함과 번뇌를 깨끗이 씻기는 관욕소가 경내 함월당에 차려졌다. 대령관욕을 시작으로 회주 계호 스님과 주지 법해 스님 등이 배례하고 심대근 신도회장 등 신도들이 10여 명씩 짝을 이뤄 배례하고 잔을 올렸다. 시식과 관욕이 이어졌고, 종범 스님모든 영가를 위해 법을 설했다. 진관사는 국행수륙재를 위해 직위에 따라 각자의 소임을 정하여 적은 용상방을 걸었고, 불전에 올릴 공양구를 마련하는 등의 임무를 맡는 여섯 종류의 책임자와 소임을 적은 육색방을 걸었다.







올해 국행수륙재는 이날 전 중앙승가대학교 총장 종범 스님이 ‘수월의 도량을 세우고 공화의 불사를 성취하다’라는 주제 법문 속에 설행됐다. 초재는 8월 28일 전 중앙승가대 총장 태원 스님이 ‘왕생정토, 어떻게 준비하는가’를 주제로 설하며, 2재는 9월 4일 봉녕사 강주 대우 스님이 ‘보시하는 사회와 공덕의 세계’를, 3재는 9월 11일 진관사 회주 계호 스님이 ‘수륙재의 봉원적 의미와 실천적 가치’, 4재는 9월 18일 송광사 율주 지현 스님이 ‘수륙재 영가들을 위한 계’, 5재는 9월 25일 전국비구니회장 본각 스님이 ‘대시회(大施會)를 열다-화엄경탐현기’, 6재는 10월 2일 조계종 어산어장 인묵 스님이 ‘범음범패의 기원과 그 수승한 공덕’를 각각 법문하며 설행할 예정이다. 마지막 7재는 조계종 전 전계대화상이자 원로의원인 성우 스님이 ‘수륙재의 소통과 회통, 그리고 고통의 구제’를 주제로 법문하며, 49일간의 국행수륙재를 회향한다. 회향인 7재는 10월 9일 오전 9시부터 오전 11시 30분까지 대웅전 앞 마당에서 낮재가 열리며, 같은 날 오후 12시 30분부터 오후3시까지 같은 장소에서 밤재가 열린다.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수륙재인 칠칠재(사십구재) 형식으로 진행되는 진관사 수륙재는 낮에는 돌아가신 영령을 정성껏 모셔 석가모니 부처님의 영산회상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게 하고, 밤에는 외로이 생을 마감한 무주고혼에게 공양을 올려 고통에서 벗어나게 한다.
현대의 국행수륙재는 49일간 일곱 차례 재를 설행하며,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낮재와 밤재로 나누어 이부 구성의 전통을 잇고 있다. 올해 수륙재 회향날 오전은 수륙재 낮재에 해당하는 시련, 대령, 관욕, 신중작법, 괘불이운, 영산작법, 법문이 진행되며, 오후는 밤재로 수륙연기, 사자단, 오로단, 상단, 중단, 하단, 회향봉송 순으로 진행된다. 시련 의식은 행사에 참여한 일반인 누구나 명다리를 잡고 진관사 마당에서부터 일주문까지 함께 걸으며 참여한다. 수륙재는 산자와 죽은 자를 모두 아울러 공양한다는 의미도 있다. 회향날은 수륙과를 나눈다.  







수륙재 각 단에는 조선 태조와 진관 국사, 백초월 스님,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등의 위패를 봉안한다. 국태민안과 국운융창을 염원하고 민중의 아픔을 달래는 무주고혼의 위패도 모셔진다. 그러면서도 수륙재 참석 대중이 하나가 되어 이웃과 사회를 돌아보는 기회도 삼는다. 49일 수륙재 기간 지역어르신들을 위해 잔치를 벌여 위무하고, 이웃에게는 쌀 등을 나눈다.

전통적인 수륙재가 망자 천도 중심이라면 진관사의 현대 수륙재는 이웃과 더불어함께 살기 위한 나눔행이 더해졌다.







 







전 중앙승가대 총장 종범 스님은 “마음이 모든 여래를 만들고 세계와 중생도 만든다. 일체 근심 걱정이 망상이니, 망상이 만든 것이 헛된 생각이라는 것을 깨우쳐 크게 편안한 청정국토를 만들자는 것이 수륙재”라며 “향단을 건설하고 향과 꽃, 등촉, 다과와 진수 등 육법공양을 올려 독경하고 설법하며 관법을 짓고 축원하는 모든 것은 마음이며 수륙재는 마음법으로 의식이 구조화된 것으로 해탈을 이루는 공양물로 대안정토에서 자재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기연한다”고 설했다.







올해 국행수륙재는 조계종 원로의원 성우 스님을 증명으로 진관사 회주 계호 스님이 재주를 맡는다. 법희 불필 스님 등이 선덕으로, 주지 법해 스님이 승법(乘法), 재 의식은 어산어장 동희 스님이 이끄는 진관사 국행수륙재보존회가 맡는다. 수륙재보존회 스님들이 범패 등 어산으로 참여한다. 수륙재 보존회 스님들은 진관사 수륙재학교 범패학과·법인학과·작법학과에서 수학했거나 수학 중이다. 올해 국행수륙재는 국행수륙재를 이끄는 어장 동희 스님이 한국 불교 역사상 최초의 비구니 어산어장으로 지정돼 더 의미를 더했다.

수륙재는 물과 육지에 떠도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 등 혼령들에게 법을 설하고 음식을 평등하게 베풀어 그들을 구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불교전통의례이다.

수륙재 의식은 중국 양나라 무제(武帝)에 의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교에 신심이 두터운 무제는 유주무주(有住無住)의 고혼들을 널리 구제함이 제일가는 공덕이라 생각하고, 승려들과 상의한 후 스스로 의식문(儀式文)을 만들었다. 그 의식문에 따라 505년에 금산사(金山寺)에서 재를 베푼 것이 그 시초이다. 그 뒤 당나라에서는 그 의식이 유명계(幽冥界)를 이익되게 한다고 하여 크게 융성하였다. 송나라 때에는 희령 연간(熙寧年間)에 동천(東川)이 <수륙문(水陸文)> 3권을 다시 지어 이를 널리 보급함으로써 수륙재가 크게 성행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수륙재가 행하여진 것은 고려 때부터이다. 광종 때에 때때로 성대히 열린 바 있었는데 970년(광종 21)에 갈양사(葛陽寺)에서 개설된 수륙도량이 그 최초의 예이다. 선종 때에는 태사국사(太史局事)로 있었던 최사겸(崔士謙)이 수륙재의 의식절차를 적어놓은 <수륙의문(水陸儀文)>을 송나라에서 구해 온 것을 계기로 보제사(普濟寺)에 수륙당(水陸堂)을 새로 세움으로써 수륙재를 더욱 성대히 격식에 맞게 하였다. 또한, 일연(一然)의 제자 혼구(混丘)가 <신편수륙의문(新編水陸儀文)>을 찬술함으로써 이 의식은 더욱 널리 성하게 되었다. 이 의식은 충목왕 때까지 계속 열렸음을 <고려사>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조선 태조로부터 시작된다.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억울하게 학살당한 고려 왕족과 친인척 그리고 전쟁으로 죽어간 귀족 및 장군들의 넋을 달래기 위한 명분과 자기 후손의 안녕을 도모하고 불안정한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아 새 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하려는 목적으로 수륙재를 거행했다. 이를 위해 도성 근처 국가 수륙사의 건립을 모색해 태조 6년 진관사에 모두 59칸의 대규모 수륙사(水陸寺)를 건립했고, 이를 기념해 권근에게 지시해 후대에 보여주도록 조성기를 남겼다.

권근의 <양촌집>에 따르면 태조는 “짐이 국가를 맡게 됨은 오직 선대 임금들께서 적경하신 덕이니, 조상의 덕에 보답하는 일을 힘쓰지 않아서는 안 되겠노라. 신하와 백성들 가운데 목숨을 바쳤거나 혹은 스스로 죽은 자 가운데 제사를 지내지 못해 저승길에서 굶주리고 구제받을 수 없는 이들을 생각하니 매우 가련하도다. 이제 옛 절에 수륙도량을 마련해 해마다 재를 베풀어서 선대 임금의 명복을 빌고 또한 중생들도 복되고 하고 싶으니 너희들이 가서 합당한 곳을 살펴보라.”고 하명한다.

이에 권근은 “(삼각산과 도봉산의) 사찰 가운데 진관사가 가장 뛰어납니다.”라고 고했다.







또 권근의 <양촌집>에 따르면 태조 이성계는 “2월 신묘일에 주상께서 친히 거동하며 보시고 삼단의 위치를 정했고, 3월 무오일에 또한 거동해 보고, 가을 9월에 공사가 끝났다. 삼단이 모두 3칸 집인데, 중단과 하단 두 단은 좌우에 욕실이 각각 3칸이 있어 하단은 좌우에 별도로 조종의 영실을 각각 8칸씩 설치했다. 대문 행랑 부엌 곳간 갖추어지지 않은 곳이 없어 모두 59칸이라. 사치스럽지 않고 누추하지도 않아 제도에 맞았다.”고 적고 있다.

권근은 또 “이달 24일 계유에 주상께서 또한 친히 거동하여 보시고 28일 정축에 신 권근을 불러 그 시말을 기록하여 후세에 보이도록 하셨다.”고 전한다.

태조는 4번이나 진관사를 찾을 만큼 국행수륙재에 공을 들였다. 조선 시대에는 비록 억불정책으로 불교 의식이 유교 의식으로 많이 바뀌어 갔지만, 태조는 진관사(津寬寺)를 국행수륙재(國行水陸齋)를 여는 사사(寺社)로 지정해 전란 속에 죽은 민초들과 기근에 죽은 민초들, 왕실 조상을 천도하기 위해 국행수륙재를 베풀었다. 왕조와 백성들의 안락과 평안, 신생 왕조인 조선의 국운융창을 진관사서 빌었다. 

1395년(태조 4)에는 견암사(見巖寺)와 석왕사(釋王寺) 관음굴(觀音窟) 등에서 고려 왕 씨의 영혼을 달래는 수륙재를 베풀었다. 그 이후 배불정책에 따른 불교 의식의 유교화 정책은 수륙재를 국행으로 거행하는 문제를 놓고 많은 논란을 벌이게 되나 오랜 전통으로 계속되어 오던 수륙재를 쉽게 폐지 시키지는 못했다. 억불(抑佛)로 이름 높은 태종도 국행수륙재 폐지의 상소문을 받았으나 대대로 거행하여 온 유풍을 쉽게 폐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국행을 고집했다.







처음에는 매년 2월 15일에 거행되었으나 1415년(태종 15)부터는 1월 15일로 변경하여 실시했다. 이 수륙재는 대체로 1515년(중종 10)경까지 크게 변동 없이 계속됐다. 왕실이 직접 그 시주가 되어 때때로 수륙재를 열게 돼 유생들의 시비와 비난을 받았으나, 1606년(선조 39) 6월에 창의문 밖에서 있었던 수륙재나 1433년(세종 15)에 효령대군이 시주가 된 한강에서의 수륙재 때에는 양반·평민 등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길을 메울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중종 때에 이르러서 유생들의 강력한 반대로 수륙재가 국행으로 거행되는 것이 금지됐고, 민간을 통해서만 전승돼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조선 태조 이후 1900년대까지 면면히 이어졌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쳐 6·25전쟁 참화로 잠시 중단됐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1977년 자운 스님과 전 회주인 진관 스님이 복원해 윤년마다 설행했다가 지난 2011년부터 현 회주 계호 스님이 연례 행사로 탈바꿈시켜 옛 명성을 되찾았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세미나 등을 통해 고증하고 원형을 복원해 국가무형문화재 제126호로 지정됐고, 매년 문화재청이 나서 국행수륙재를 기록하고 연구해 가고 있다. 진관사는 조선 태조 이후 600여 년 동안 수륙재 설행의 중심 사찰로 불교 의례의 전통을 계승해 왔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연극·음악·무용·문학·미술이 결합한 종합예술로 공연적 요소가 무궁무진해 그 가치가 더욱 높다. 불자들에게는 나와 타인, 뭇 생명과 함께하는 ‘공양’과 보시의 진정한 의미를 실천하고, 시민들에게는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과 함께 화합과 소통 그리고 나눔을 즐기는 축제의 장으로 수륙재는 의미를 확장하고 있다.

올해 국행수륙재는 조계종 원로의원 성우 스님을 증명으로 진관사 회주 계호 스님이 재주를 맡는다. 법희 불필 스님 등이 선덕으로, 주지 법해 스님이 승법(乘法), 재 의식은 어산어장 동희 스님이 이끄는 진관사 국행수륙재보존회가 맡는다. 수륙재보존회 스님들이 범패 등 어산으로 참여한다. 수륙재 보존회 스님들은 진관사 수륙재학교 범패학과·법인학과·작법학과에서 수학했거나 수학 중이다. 올해 국행수륙재는 국행수륙재를 이끄는 어장 동희 스님이 한국 불교 역사상 최초의 비구니 어산어장으로 지정돼 더 의미를 더했다.

수륙재는 물과 육지에 떠도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 등 혼령들에게 법을 설하고 음식을 평등하게 베풀어 그들을 구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불교전통의례이다.

수륙재 의식은 중국 양나라 무제(武帝)에 의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교에 신심이 두터운 무제는 유주무주(有住無住)의 고혼들을 널리 구제함이 제일가는 공덕이라 생각하고, 승려들과 상의한 후 스스로 의식문(儀式文)을 만들었다. 그 의식문에 따라 505년에 금산사(金山寺)에서 재를 베푼 것이 그 시초이다. 그 뒤 당나라에서는 그 의식이 유명계(幽冥界)를 이익되게 한다고 하여 크게 융성하였다. 송나라 때에는 희령 연간(熙寧年間)에 동천(東川)이 <수륙문(水陸文)> 3권을 다시 지어 이를 널리 보급함으로써 수륙재가 크게 성행하게 되었다.





국가무형문화재 126호 ‘진관사 국행수륙재’가 설행된다.

서울 북한산 진관사(주지 법해 스님)와 사단법인 진관사국행수륙재보존회는 22일 오전 국행수륙재를 입재했다. 이날부터 진관사는 7주간 7번의 재를 올리며 49일간 국행수륙재를 봉행한다.

진관사는 이날 대웅전과 함월당, 명부전에 공양물을 올리고, 명종으로 수륙재 입재를 알렸다. 국행수륙재 입재날, 영가를 맞는 시련소와 일주문 앞에서 영가에게 차와 국수를 대접하는 대령소, 영가의 고단함과 번뇌를 깨끗이 씻기는 관욕소가 경내 함월당에 차려졌다. 대령관욕을 시작으로 회주 계호 스님과 주지 법해 스님 등이 배례하고 심대근 신도회장 등 신도들이 10여 명씩 짝을 이뤄 배례하고 잔을 올렸다. 시식과 관욕이 이어졌고, 종범 스님모든 영가를 위해 법을 설했다. 진관사는 국행수륙재를 위해 직위에 따라 각자의 소임을 정하여 적은 용상방을 걸었고, 불전에 올릴 공양구를 마련하는 등의 임무를 맡는 여섯 종류의 책임자와 소임을 적은 육색방을 걸었다.







올해 국행수륙재는 이날 전 중앙승가대학교 총장 종범 스님이 ‘수월의 도량을 세우고 공화의 불사를 성취하다’라는 주제 법문 속에 설행됐다. 초재는 8월 28일 전 중앙승가대 총장 태원 스님이 ‘왕생정토, 어떻게 준비하는가’를 주제로 설하며, 2재는 9월 4일 봉녕사 강주 대우 스님이 ‘보시하는 사회와 공덕의 세계’를, 3재는 9월 11일 진관사 회주 계호 스님이 ‘수륙재의 봉원적 의미와 실천적 가치’, 4재는 9월 18일 송광사 율주 지현 스님이 ‘수륙재 영가들을 위한 계’, 5재는 9월 25일 전국비구니회장 본각 스님이 ‘대시회(大施會)를 열다-화엄경탐현기’, 6재는 10월 2일 조계종 어산어장 인묵 스님이 ‘범음범패의 기원과 그 수승한 공덕’를 각각 법문하며 설행할 예정이다. 마지막 7재는 조계종 전 전계대화상이자 원로의원인 성우 스님이 ‘수륙재의 소통과 회통, 그리고 고통의 구제’를 주제로 법문하며, 49일간의 국행수륙재를 회향한다. 회향인 7재는 10월 9일 오전 9시부터 오전 11시 30분까지 대웅전 앞 마당에서 낮재가 열리며, 같은 날 오후 12시 30분부터 오후3시까지 같은 장소에서 밤재가 열린다.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수륙재인 칠칠재(사십구재) 형식으로 진행되는 진관사 수륙재는 낮에는 돌아가신 영령을 정성껏 모셔 석가모니 부처님의 영산회상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게 하고, 밤에는 외로이 생을 마감한 무주고혼에게 공양을 올려 고통에서 벗어나게 한다.
현대의 국행수륙재는 49일간 일곱 차례 재를 설행하며,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낮재와 밤재로 나누어 이부 구성의 전통을 잇고 있다. 올해 수륙재 회향날 오전은 수륙재 낮재에 해당하는 시련, 대령, 관욕, 신중작법, 괘불이운, 영산작법, 법문이 진행되며, 오후는 밤재로 수륙연기, 사자단, 오로단, 상단, 중단, 하단, 회향봉송 순으로 진행된다. 시련 의식은 행사에 참여한 일반인 누구나 명다리를 잡고 진관사 마당에서부터 일주문까지 함께 걸으며 참여한다. 수륙재는 산자와 죽은 자를 모두 아울러 공양한다는 의미도 있다. 회향날은 수륙과를 나눈다.  







수륙재 각 단에는 조선 태조와 진관 국사, 백초월 스님,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등의 위패를 봉안한다. 국태민안과 국운융창을 염원하고 민중의 아픔을 달래는 무주고혼의 위패도 모셔진다. 그러면서도 수륙재 참석 대중이 하나가 되어 이웃과 사회를 돌아보는 기회도 삼는다. 49일 수륙재 기간 지역어르신들을 위해 잔치를 벌여 위무하고, 이웃에게는 쌀 등을 나눈다.

전통적인 수륙재가 망자 천도 중심이라면 진관사의 현대 수륙재는 이웃과 더불어함께 살기 위한 나눔행이 더해졌다.







 







전 중앙승가대 총장 종범 스님은 “마음이 모든 여래를 만들고 세계와 중생도 만든다. 일체 근심 걱정이 망상이니, 망상이 만든 것이 헛된 생각이라는 것을 깨우쳐 크게 편안한 청정국토를 만들자는 것이 수륙재”라며 “향단을 건설하고 향과 꽃, 등촉, 다과와 진수 등 육법공양을 올려 독경하고 설법하며 관법을 짓고 축원하는 모든 것은 마음이며 수륙재는 마음법으로 의식이 구조화된 것으로 해탈을 이루는 공양물로 대안정토에서 자재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기연한다”고 설했다.







올해 국행수륙재는 조계종 원로의원 성우 스님을 증명으로 진관사 회주 계호 스님이 재주를 맡는다. 법희 불필 스님 등이 선덕으로, 주지 법해 스님이 승법(乘法), 재 의식은 어산어장 동희 스님이 이끄는 진관사 국행수륙재보존회가 맡는다. 수륙재보존회 스님들이 범패 등 어산으로 참여한다. 수륙재 보존회 스님들은 진관사 수륙재학교 범패학과·법인학과·작법학과에서 수학했거나 수학 중이다. 올해 국행수륙재는 국행수륙재를 이끄는 어장 동희 스님이 한국 불교 역사상 최초의 비구니 어산어장으로 지정돼 더 의미를 더했다.

수륙재는 물과 육지에 떠도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 등 혼령들에게 법을 설하고 음식을 평등하게 베풀어 그들을 구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불교전통의례이다.

수륙재 의식은 중국 양나라 무제(武帝)에 의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교에 신심이 두터운 무제는 유주무주(有住無住)의 고혼들을 널리 구제함이 제일가는 공덕이라 생각하고, 승려들과 상의한 후 스스로 의식문(儀式文)을 만들었다. 그 의식문에 따라 505년에 금산사(金山寺)에서 재를 베푼 것이 그 시초이다. 그 뒤 당나라에서는 그 의식이 유명계(幽冥界)를 이익되게 한다고 하여 크게 융성하였다. 송나라 때에는 희령 연간(熙寧年間)에 동천(東川)이 <수륙문(水陸文)> 3권을 다시 지어 이를 널리 보급함으로써 수륙재가 크게 성행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수륙재가 행하여진 것은 고려 때부터이다. 광종 때에 때때로 성대히 열린 바 있었는데 970년(광종 21)에 갈양사(葛陽寺)에서 개설된 수륙도량이 그 최초의 예이다. 선종 때에는 태사국사(太史局事)로 있었던 최사겸(崔士謙)이 수륙재의 의식절차를 적어놓은 <수륙의문(水陸儀文)>을 송나라에서 구해 온 것을 계기로 보제사(普濟寺)에 수륙당(水陸堂)을 새로 세움으로써 수륙재를 더욱 성대히 격식에 맞게 하였다. 또한, 일연(一然)의 제자 혼구(混丘)가 <신편수륙의문(新編水陸儀文)>을 찬술함으로써 이 의식은 더욱 널리 성하게 되었다. 이 의식은 충목왕 때까지 계속 열렸음을 <고려사>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조선 태조로부터 시작된다.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억울하게 학살당한 고려 왕족과 친인척 그리고 전쟁으로 죽어간 귀족 및 장군들의 넋을 달래기 위한 명분과 자기 후손의 안녕을 도모하고 불안정한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아 새 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하려는 목적으로 수륙재를 거행했다. 이를 위해 도성 근처 국가 수륙사의 건립을 모색해 태조 6년 진관사에 모두 59칸의 대규모 수륙사(水陸寺)를 건립했고, 이를 기념해 권근에게 지시해 후대에 보여주도록 조성기를 남겼다.

권근의 <양촌집>에 따르면 태조는 “짐이 국가를 맡게 됨은 오직 선대 임금들께서 적경하신 덕이니, 조상의 덕에 보답하는 일을 힘쓰지 않아서는 안 되겠노라. 신하와 백성들 가운데 목숨을 바쳤거나 혹은 스스로 죽은 자 가운데 제사를 지내지 못해 저승길에서 굶주리고 구제받을 수 없는 이들을 생각하니 매우 가련하도다. 이제 옛 절에 수륙도량을 마련해 해마다 재를 베풀어서 선대 임금의 명복을 빌고 또한 중생들도 복되고 하고 싶으니 너희들이 가서 합당한 곳을 살펴보라.”고 하명한다.

이에 권근은 “(삼각산과 도봉산의) 사찰 가운데 진관사가 가장 뛰어납니다.”라고 고했다.







또 권근의 <양촌집>에 따르면 태조 이성계는 “2월 신묘일에 주상께서 친히 거동하며 보시고 삼단의 위치를 정했고, 3월 무오일에 또한 거동해 보고, 가을 9월에 공사가 끝났다. 삼단이 모두 3칸 집인데, 중단과 하단 두 단은 좌우에 욕실이 각각 3칸이 있어 하단은 좌우에 별도로 조종의 영실을 각각 8칸씩 설치했다. 대문 행랑 부엌 곳간 갖추어지지 않은 곳이 없어 모두 59칸이라. 사치스럽지 않고 누추하지도 않아 제도에 맞았다.”고 적고 있다.

권근은 또 “이달 24일 계유에 주상께서 또한 친히 거동하여 보시고 28일 정축에 신 권근을 불러 그 시말을 기록하여 후세에 보이도록 하셨다.”고 전한다.

태조는 4번이나 진관사를 찾을 만큼 국행수륙재에 공을 들였다. 조선 시대에는 비록 억불정책으로 불교 의식이 유교 의식으로 많이 바뀌어 갔지만, 태조는 진관사(津寬寺)를 국행수륙재(國行水陸齋)를 여는 사사(寺社)로 지정해 전란 속에 죽은 민초들과 기근에 죽은 민초들, 왕실 조상을 천도하기 위해 국행수륙재를 베풀었다. 왕조와 백성들의 안락과 평안, 신생 왕조인 조선의 국운융창을 진관사서 빌었다. 

1395년(태조 4)에는 견암사(見巖寺)와 석왕사(釋王寺) 관음굴(觀音窟) 등에서 고려 왕 씨의 영혼을 달래는 수륙재를 베풀었다. 그 이후 배불정책에 따른 불교 의식의 유교화 정책은 수륙재를 국행으로 거행하는 문제를 놓고 많은 논란을 벌이게 되나 오랜 전통으로 계속되어 오던 수륙재를 쉽게 폐지 시키지는 못했다. 억불(抑佛)로 이름 높은 태종도 국행수륙재 폐지의 상소문을 받았으나 대대로 거행하여 온 유풍을 쉽게 폐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국행을 고집했다.







처음에는 매년 2월 15일에 거행되었으나 1415년(태종 15)부터는 1월 15일로 변경하여 실시했다. 이 수륙재는 대체로 1515년(중종 10)경까지 크게 변동 없이 계속됐다. 왕실이 직접 그 시주가 되어 때때로 수륙재를 열게 돼 유생들의 시비와 비난을 받았으나, 1606년(선조 39) 6월에 창의문 밖에서 있었던 수륙재나 1433년(세종 15)에 효령대군이 시주가 된 한강에서의 수륙재 때에는 양반·평민 등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길을 메울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중종 때에 이르러서 유생들의 강력한 반대로 수륙재가 국행으로 거행되는 것이 금지됐고, 민간을 통해서만 전승돼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조선 태조 이후 1900년대까지 면면히 이어졌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쳐 6·25전쟁 참화로 잠시 중단됐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1977년 자운 스님과 전 회주인 진관 스님이 복원해 윤년마다 설행했다가 지난 2011년부터 현 회주 계호 스님이 연례 행사로 탈바꿈시켜 옛 명성을 되찾았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세미나 등을 통해 고증하고 원형을 복원해 국가무형문화재 제126호로 지정됐고, 매년 문화재청이 나서 국행수륙재를 기록하고 연구해 가고 있다. 진관사는 조선 태조 이후 600여 년 동안 수륙재 설행의 중심 사찰로 불교 의례의 전통을 계승해 왔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연극·음악·무용·문학·미술이 결합한 종합예술로 공연적 요소가 무궁무진해 그 가치가 더욱 높다. 불자들에게는 나와 타인, 뭇 생명과 함께하는 ‘공양’과 보시의 진정한 의미를 실천하고, 시민들에게는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과 함께 화합과 소통 그리고 나눔을 즐기는 축제의 장으로 수륙재는 의미를 확장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수륙재가 행하여진 것은 고려 때부터이다. 광종 때에 때때로 성대히 열린 바 있었는데 970년(광종 21)에 갈양사(葛陽寺)에서 개설된 수륙도량이 그 최초의 예이다. 선종 때에는 태사국사(太史局事)로 있었던 최사겸(崔士謙)이 수륙재의 의식절차를 적어놓은 <수륙의문(水陸儀文)>을 송나라에서 구해 온 것을 계기로 보제사(普濟寺)에 수륙당(水陸堂)을 새로 세움으로써 수륙재를 더욱 성대히 격식에 맞게 하였다. 또한, 일연(一然)의 제자 혼구(混丘)가 <신편수륙의문(新編水陸儀文)>을 찬술함으로써 이 의식은 더욱 널리 성하게 되었다. 이 의식은 충목왕 때까지 계속 열렸음을 <고려사>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조선 태조로부터 시작된다.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억울하게 학살당한 고려 왕족과 친인척 그리고 전쟁으로 죽어간 귀족 및 장군들의 넋을 달래기 위한 명분과 자기 후손의 안녕을 도모하고 불안정한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아 새 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하려는 목적으로 수륙재를 거행했다. 이를 위해 도성 근처 국가 수륙사의 건립을 모색해 태조 6년 진관사에 모두 59칸의 대규모 수륙사(水陸寺)를 건립했고, 이를 기념해 권근에게 지시해 후대에 보여주도록 조성기를 남겼다.

권근의 <양촌집>에 따르면 태조는 “짐이 국가를 맡게 됨은 오직 선대 임금들께서 적경하신 덕이니, 조상의 덕에 보답하는 일을 힘쓰지 않아서는 안 되겠노라. 신하와 백성들 가운데 목숨을 바쳤거나 혹은 스스로 죽은 자 가운데 제사를 지내지 못해 저승길에서 굶주리고 구제받을 수 없는 이들을 생각하니 매우 가련하도다. 이제 옛 절에 수륙도량을 마련해 해마다 재를 베풀어서 선대 임금의 명복을 빌고 또한 중생들도 복되고 하고 싶으니 너희들이 가서 합당한 곳을 살펴보라.”고 하명한다.

이에 권근은 “(삼각산과 도봉산의) 사찰 가운데 진관사가 가장 뛰어납니다.”라고 고했다.





국가무형문화재 126호 ‘진관사 국행수륙재’가 설행된다.

서울 북한산 진관사(주지 법해 스님)와 사단법인 진관사국행수륙재보존회는 22일 오전 국행수륙재를 입재했다. 이날부터 진관사는 7주간 7번의 재를 올리며 49일간 국행수륙재를 봉행한다.

진관사는 이날 대웅전과 함월당, 명부전에 공양물을 올리고, 명종으로 수륙재 입재를 알렸다. 국행수륙재 입재날, 영가를 맞는 시련소와 일주문 앞에서 영가에게 차와 국수를 대접하는 대령소, 영가의 고단함과 번뇌를 깨끗이 씻기는 관욕소가 경내 함월당에 차려졌다. 대령관욕을 시작으로 회주 계호 스님과 주지 법해 스님 등이 배례하고 심대근 신도회장 등 신도들이 10여 명씩 짝을 이뤄 배례하고 잔을 올렸다. 시식과 관욕이 이어졌고, 종범 스님모든 영가를 위해 법을 설했다. 진관사는 국행수륙재를 위해 직위에 따라 각자의 소임을 정하여 적은 용상방을 걸었고, 불전에 올릴 공양구를 마련하는 등의 임무를 맡는 여섯 종류의 책임자와 소임을 적은 육색방을 걸었다.







올해 국행수륙재는 이날 전 중앙승가대학교 총장 종범 스님이 ‘수월의 도량을 세우고 공화의 불사를 성취하다’라는 주제 법문 속에 설행됐다. 초재는 8월 28일 전 중앙승가대 총장 태원 스님이 ‘왕생정토, 어떻게 준비하는가’를 주제로 설하며, 2재는 9월 4일 봉녕사 강주 대우 스님이 ‘보시하는 사회와 공덕의 세계’를, 3재는 9월 11일 진관사 회주 계호 스님이 ‘수륙재의 봉원적 의미와 실천적 가치’, 4재는 9월 18일 송광사 율주 지현 스님이 ‘수륙재 영가들을 위한 계’, 5재는 9월 25일 전국비구니회장 본각 스님이 ‘대시회(大施會)를 열다-화엄경탐현기’, 6재는 10월 2일 조계종 어산어장 인묵 스님이 ‘범음범패의 기원과 그 수승한 공덕’를 각각 법문하며 설행할 예정이다. 마지막 7재는 조계종 전 전계대화상이자 원로의원인 성우 스님이 ‘수륙재의 소통과 회통, 그리고 고통의 구제’를 주제로 법문하며, 49일간의 국행수륙재를 회향한다. 회향인 7재는 10월 9일 오전 9시부터 오전 11시 30분까지 대웅전 앞 마당에서 낮재가 열리며, 같은 날 오후 12시 30분부터 오후3시까지 같은 장소에서 밤재가 열린다.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수륙재인 칠칠재(사십구재) 형식으로 진행되는 진관사 수륙재는 낮에는 돌아가신 영령을 정성껏 모셔 석가모니 부처님의 영산회상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게 하고, 밤에는 외로이 생을 마감한 무주고혼에게 공양을 올려 고통에서 벗어나게 한다.
현대의 국행수륙재는 49일간 일곱 차례 재를 설행하며,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낮재와 밤재로 나누어 이부 구성의 전통을 잇고 있다. 올해 수륙재 회향날 오전은 수륙재 낮재에 해당하는 시련, 대령, 관욕, 신중작법, 괘불이운, 영산작법, 법문이 진행되며, 오후는 밤재로 수륙연기, 사자단, 오로단, 상단, 중단, 하단, 회향봉송 순으로 진행된다. 시련 의식은 행사에 참여한 일반인 누구나 명다리를 잡고 진관사 마당에서부터 일주문까지 함께 걸으며 참여한다. 수륙재는 산자와 죽은 자를 모두 아울러 공양한다는 의미도 있다. 회향날은 수륙과를 나눈다.  







수륙재 각 단에는 조선 태조와 진관 국사, 백초월 스님,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등의 위패를 봉안한다. 국태민안과 국운융창을 염원하고 민중의 아픔을 달래는 무주고혼의 위패도 모셔진다. 그러면서도 수륙재 참석 대중이 하나가 되어 이웃과 사회를 돌아보는 기회도 삼는다. 49일 수륙재 기간 지역어르신들을 위해 잔치를 벌여 위무하고, 이웃에게는 쌀 등을 나눈다.

전통적인 수륙재가 망자 천도 중심이라면 진관사의 현대 수륙재는 이웃과 더불어함께 살기 위한 나눔행이 더해졌다.







 







전 중앙승가대 총장 종범 스님은 “마음이 모든 여래를 만들고 세계와 중생도 만든다. 일체 근심 걱정이 망상이니, 망상이 만든 것이 헛된 생각이라는 것을 깨우쳐 크게 편안한 청정국토를 만들자는 것이 수륙재”라며 “향단을 건설하고 향과 꽃, 등촉, 다과와 진수 등 육법공양을 올려 독경하고 설법하며 관법을 짓고 축원하는 모든 것은 마음이며 수륙재는 마음법으로 의식이 구조화된 것으로 해탈을 이루는 공양물로 대안정토에서 자재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기연한다”고 설했다.







올해 국행수륙재는 조계종 원로의원 성우 스님을 증명으로 진관사 회주 계호 스님이 재주를 맡는다. 법희 불필 스님 등이 선덕으로, 주지 법해 스님이 승법(乘法), 재 의식은 어산어장 동희 스님이 이끄는 진관사 국행수륙재보존회가 맡는다. 수륙재보존회 스님들이 범패 등 어산으로 참여한다. 수륙재 보존회 스님들은 진관사 수륙재학교 범패학과·법인학과·작법학과에서 수학했거나 수학 중이다. 올해 국행수륙재는 국행수륙재를 이끄는 어장 동희 스님이 한국 불교 역사상 최초의 비구니 어산어장으로 지정돼 더 의미를 더했다.

수륙재는 물과 육지에 떠도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 등 혼령들에게 법을 설하고 음식을 평등하게 베풀어 그들을 구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불교전통의례이다.

수륙재 의식은 중국 양나라 무제(武帝)에 의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교에 신심이 두터운 무제는 유주무주(有住無住)의 고혼들을 널리 구제함이 제일가는 공덕이라 생각하고, 승려들과 상의한 후 스스로 의식문(儀式文)을 만들었다. 그 의식문에 따라 505년에 금산사(金山寺)에서 재를 베푼 것이 그 시초이다. 그 뒤 당나라에서는 그 의식이 유명계(幽冥界)를 이익되게 한다고 하여 크게 융성하였다. 송나라 때에는 희령 연간(熙寧年間)에 동천(東川)이 <수륙문(水陸文)> 3권을 다시 지어 이를 널리 보급함으로써 수륙재가 크게 성행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수륙재가 행하여진 것은 고려 때부터이다. 광종 때에 때때로 성대히 열린 바 있었는데 970년(광종 21)에 갈양사(葛陽寺)에서 개설된 수륙도량이 그 최초의 예이다. 선종 때에는 태사국사(太史局事)로 있었던 최사겸(崔士謙)이 수륙재의 의식절차를 적어놓은 <수륙의문(水陸儀文)>을 송나라에서 구해 온 것을 계기로 보제사(普濟寺)에 수륙당(水陸堂)을 새로 세움으로써 수륙재를 더욱 성대히 격식에 맞게 하였다. 또한, 일연(一然)의 제자 혼구(混丘)가 <신편수륙의문(新編水陸儀文)>을 찬술함으로써 이 의식은 더욱 널리 성하게 되었다. 이 의식은 충목왕 때까지 계속 열렸음을 <고려사>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조선 태조로부터 시작된다.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억울하게 학살당한 고려 왕족과 친인척 그리고 전쟁으로 죽어간 귀족 및 장군들의 넋을 달래기 위한 명분과 자기 후손의 안녕을 도모하고 불안정한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아 새 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하려는 목적으로 수륙재를 거행했다. 이를 위해 도성 근처 국가 수륙사의 건립을 모색해 태조 6년 진관사에 모두 59칸의 대규모 수륙사(水陸寺)를 건립했고, 이를 기념해 권근에게 지시해 후대에 보여주도록 조성기를 남겼다.

권근의 <양촌집>에 따르면 태조는 “짐이 국가를 맡게 됨은 오직 선대 임금들께서 적경하신 덕이니, 조상의 덕에 보답하는 일을 힘쓰지 않아서는 안 되겠노라. 신하와 백성들 가운데 목숨을 바쳤거나 혹은 스스로 죽은 자 가운데 제사를 지내지 못해 저승길에서 굶주리고 구제받을 수 없는 이들을 생각하니 매우 가련하도다. 이제 옛 절에 수륙도량을 마련해 해마다 재를 베풀어서 선대 임금의 명복을 빌고 또한 중생들도 복되고 하고 싶으니 너희들이 가서 합당한 곳을 살펴보라.”고 하명한다.

이에 권근은 “(삼각산과 도봉산의) 사찰 가운데 진관사가 가장 뛰어납니다.”라고 고했다.







또 권근의 <양촌집>에 따르면 태조 이성계는 “2월 신묘일에 주상께서 친히 거동하며 보시고 삼단의 위치를 정했고, 3월 무오일에 또한 거동해 보고, 가을 9월에 공사가 끝났다. 삼단이 모두 3칸 집인데, 중단과 하단 두 단은 좌우에 욕실이 각각 3칸이 있어 하단은 좌우에 별도로 조종의 영실을 각각 8칸씩 설치했다. 대문 행랑 부엌 곳간 갖추어지지 않은 곳이 없어 모두 59칸이라. 사치스럽지 않고 누추하지도 않아 제도에 맞았다.”고 적고 있다.

권근은 또 “이달 24일 계유에 주상께서 또한 친히 거동하여 보시고 28일 정축에 신 권근을 불러 그 시말을 기록하여 후세에 보이도록 하셨다.”고 전한다.

태조는 4번이나 진관사를 찾을 만큼 국행수륙재에 공을 들였다. 조선 시대에는 비록 억불정책으로 불교 의식이 유교 의식으로 많이 바뀌어 갔지만, 태조는 진관사(津寬寺)를 국행수륙재(國行水陸齋)를 여는 사사(寺社)로 지정해 전란 속에 죽은 민초들과 기근에 죽은 민초들, 왕실 조상을 천도하기 위해 국행수륙재를 베풀었다. 왕조와 백성들의 안락과 평안, 신생 왕조인 조선의 국운융창을 진관사서 빌었다. 

1395년(태조 4)에는 견암사(見巖寺)와 석왕사(釋王寺) 관음굴(觀音窟) 등에서 고려 왕 씨의 영혼을 달래는 수륙재를 베풀었다. 그 이후 배불정책에 따른 불교 의식의 유교화 정책은 수륙재를 국행으로 거행하는 문제를 놓고 많은 논란을 벌이게 되나 오랜 전통으로 계속되어 오던 수륙재를 쉽게 폐지 시키지는 못했다. 억불(抑佛)로 이름 높은 태종도 국행수륙재 폐지의 상소문을 받았으나 대대로 거행하여 온 유풍을 쉽게 폐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국행을 고집했다.







처음에는 매년 2월 15일에 거행되었으나 1415년(태종 15)부터는 1월 15일로 변경하여 실시했다. 이 수륙재는 대체로 1515년(중종 10)경까지 크게 변동 없이 계속됐다. 왕실이 직접 그 시주가 되어 때때로 수륙재를 열게 돼 유생들의 시비와 비난을 받았으나, 1606년(선조 39) 6월에 창의문 밖에서 있었던 수륙재나 1433년(세종 15)에 효령대군이 시주가 된 한강에서의 수륙재 때에는 양반·평민 등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길을 메울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중종 때에 이르러서 유생들의 강력한 반대로 수륙재가 국행으로 거행되는 것이 금지됐고, 민간을 통해서만 전승돼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조선 태조 이후 1900년대까지 면면히 이어졌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쳐 6·25전쟁 참화로 잠시 중단됐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1977년 자운 스님과 전 회주인 진관 스님이 복원해 윤년마다 설행했다가 지난 2011년부터 현 회주 계호 스님이 연례 행사로 탈바꿈시켜 옛 명성을 되찾았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세미나 등을 통해 고증하고 원형을 복원해 국가무형문화재 제126호로 지정됐고, 매년 문화재청이 나서 국행수륙재를 기록하고 연구해 가고 있다. 진관사는 조선 태조 이후 600여 년 동안 수륙재 설행의 중심 사찰로 불교 의례의 전통을 계승해 왔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연극·음악·무용·문학·미술이 결합한 종합예술로 공연적 요소가 무궁무진해 그 가치가 더욱 높다. 불자들에게는 나와 타인, 뭇 생명과 함께하는 ‘공양’과 보시의 진정한 의미를 실천하고, 시민들에게는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과 함께 화합과 소통 그리고 나눔을 즐기는 축제의 장으로 수륙재는 의미를 확장하고 있다.

또 권근의 <양촌집>에 따르면 태조 이성계는 “2월 신묘일에 주상께서 친히 거동하며 보시고 삼단의 위치를 정했고, 3월 무오일에 또한 거동해 보고, 가을 9월에 공사가 끝났다. 삼단이 모두 3칸 집인데, 중단과 하단 두 단은 좌우에 욕실이 각각 3칸이 있어 하단은 좌우에 별도로 조종의 영실을 각각 8칸씩 설치했다. 대문 행랑 부엌 곳간 갖추어지지 않은 곳이 없어 모두 59칸이라. 사치스럽지 않고 누추하지도 않아 제도에 맞았다.”고 적고 있다.

권근은 또 “이달 24일 계유에 주상께서 또한 친히 거동하여 보시고 28일 정축에 신 권근을 불러 그 시말을 기록하여 후세에 보이도록 하셨다.”고 전한다.

태조는 4번이나 진관사를 찾을 만큼 국행수륙재에 공을 들였다. 조선 시대에는 비록 억불정책으로 불교 의식이 유교 의식으로 많이 바뀌어 갔지만, 태조는 진관사(津寬寺)를 국행수륙재(國行水陸齋)를 여는 사사(寺社)로 지정해 전란 속에 죽은 민초들과 기근에 죽은 민초들, 왕실 조상을 천도하기 위해 국행수륙재를 베풀었다. 왕조와 백성들의 안락과 평안, 신생 왕조인 조선의 국운융창을 진관사서 빌었다. 

1395년(태조 4)에는 견암사(見巖寺)와 석왕사(釋王寺) 관음굴(觀音窟) 등에서 고려 왕 씨의 영혼을 달래는 수륙재를 베풀었다. 그 이후 배불정책에 따른 불교 의식의 유교화 정책은 수륙재를 국행으로 거행하는 문제를 놓고 많은 논란을 벌이게 되나 오랜 전통으로 계속되어 오던 수륙재를 쉽게 폐지 시키지는 못했다. 억불(抑佛)로 이름 높은 태종도 국행수륙재 폐지의 상소문을 받았으나 대대로 거행하여 온 유풍을 쉽게 폐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국행을 고집했다.





국가무형문화재 126호 ‘진관사 국행수륙재’가 설행된다.

서울 북한산 진관사(주지 법해 스님)와 사단법인 진관사국행수륙재보존회는 22일 오전 국행수륙재를 입재했다. 이날부터 진관사는 7주간 7번의 재를 올리며 49일간 국행수륙재를 봉행한다.

진관사는 이날 대웅전과 함월당, 명부전에 공양물을 올리고, 명종으로 수륙재 입재를 알렸다. 국행수륙재 입재날, 영가를 맞는 시련소와 일주문 앞에서 영가에게 차와 국수를 대접하는 대령소, 영가의 고단함과 번뇌를 깨끗이 씻기는 관욕소가 경내 함월당에 차려졌다. 대령관욕을 시작으로 회주 계호 스님과 주지 법해 스님 등이 배례하고 심대근 신도회장 등 신도들이 10여 명씩 짝을 이뤄 배례하고 잔을 올렸다. 시식과 관욕이 이어졌고, 종범 스님모든 영가를 위해 법을 설했다. 진관사는 국행수륙재를 위해 직위에 따라 각자의 소임을 정하여 적은 용상방을 걸었고, 불전에 올릴 공양구를 마련하는 등의 임무를 맡는 여섯 종류의 책임자와 소임을 적은 육색방을 걸었다.







올해 국행수륙재는 이날 전 중앙승가대학교 총장 종범 스님이 ‘수월의 도량을 세우고 공화의 불사를 성취하다’라는 주제 법문 속에 설행됐다. 초재는 8월 28일 전 중앙승가대 총장 태원 스님이 ‘왕생정토, 어떻게 준비하는가’를 주제로 설하며, 2재는 9월 4일 봉녕사 강주 대우 스님이 ‘보시하는 사회와 공덕의 세계’를, 3재는 9월 11일 진관사 회주 계호 스님이 ‘수륙재의 봉원적 의미와 실천적 가치’, 4재는 9월 18일 송광사 율주 지현 스님이 ‘수륙재 영가들을 위한 계’, 5재는 9월 25일 전국비구니회장 본각 스님이 ‘대시회(大施會)를 열다-화엄경탐현기’, 6재는 10월 2일 조계종 어산어장 인묵 스님이 ‘범음범패의 기원과 그 수승한 공덕’를 각각 법문하며 설행할 예정이다. 마지막 7재는 조계종 전 전계대화상이자 원로의원인 성우 스님이 ‘수륙재의 소통과 회통, 그리고 고통의 구제’를 주제로 법문하며, 49일간의 국행수륙재를 회향한다. 회향인 7재는 10월 9일 오전 9시부터 오전 11시 30분까지 대웅전 앞 마당에서 낮재가 열리며, 같은 날 오후 12시 30분부터 오후3시까지 같은 장소에서 밤재가 열린다.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수륙재인 칠칠재(사십구재) 형식으로 진행되는 진관사 수륙재는 낮에는 돌아가신 영령을 정성껏 모셔 석가모니 부처님의 영산회상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게 하고, 밤에는 외로이 생을 마감한 무주고혼에게 공양을 올려 고통에서 벗어나게 한다.
현대의 국행수륙재는 49일간 일곱 차례 재를 설행하며,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낮재와 밤재로 나누어 이부 구성의 전통을 잇고 있다. 올해 수륙재 회향날 오전은 수륙재 낮재에 해당하는 시련, 대령, 관욕, 신중작법, 괘불이운, 영산작법, 법문이 진행되며, 오후는 밤재로 수륙연기, 사자단, 오로단, 상단, 중단, 하단, 회향봉송 순으로 진행된다. 시련 의식은 행사에 참여한 일반인 누구나 명다리를 잡고 진관사 마당에서부터 일주문까지 함께 걸으며 참여한다. 수륙재는 산자와 죽은 자를 모두 아울러 공양한다는 의미도 있다. 회향날은 수륙과를 나눈다.  







수륙재 각 단에는 조선 태조와 진관 국사, 백초월 스님,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등의 위패를 봉안한다. 국태민안과 국운융창을 염원하고 민중의 아픔을 달래는 무주고혼의 위패도 모셔진다. 그러면서도 수륙재 참석 대중이 하나가 되어 이웃과 사회를 돌아보는 기회도 삼는다. 49일 수륙재 기간 지역어르신들을 위해 잔치를 벌여 위무하고, 이웃에게는 쌀 등을 나눈다.

전통적인 수륙재가 망자 천도 중심이라면 진관사의 현대 수륙재는 이웃과 더불어함께 살기 위한 나눔행이 더해졌다.







 







전 중앙승가대 총장 종범 스님은 “마음이 모든 여래를 만들고 세계와 중생도 만든다. 일체 근심 걱정이 망상이니, 망상이 만든 것이 헛된 생각이라는 것을 깨우쳐 크게 편안한 청정국토를 만들자는 것이 수륙재”라며 “향단을 건설하고 향과 꽃, 등촉, 다과와 진수 등 육법공양을 올려 독경하고 설법하며 관법을 짓고 축원하는 모든 것은 마음이며 수륙재는 마음법으로 의식이 구조화된 것으로 해탈을 이루는 공양물로 대안정토에서 자재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기연한다”고 설했다.







올해 국행수륙재는 조계종 원로의원 성우 스님을 증명으로 진관사 회주 계호 스님이 재주를 맡는다. 법희 불필 스님 등이 선덕으로, 주지 법해 스님이 승법(乘法), 재 의식은 어산어장 동희 스님이 이끄는 진관사 국행수륙재보존회가 맡는다. 수륙재보존회 스님들이 범패 등 어산으로 참여한다. 수륙재 보존회 스님들은 진관사 수륙재학교 범패학과·법인학과·작법학과에서 수학했거나 수학 중이다. 올해 국행수륙재는 국행수륙재를 이끄는 어장 동희 스님이 한국 불교 역사상 최초의 비구니 어산어장으로 지정돼 더 의미를 더했다.

수륙재는 물과 육지에 떠도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 등 혼령들에게 법을 설하고 음식을 평등하게 베풀어 그들을 구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불교전통의례이다.

수륙재 의식은 중국 양나라 무제(武帝)에 의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교에 신심이 두터운 무제는 유주무주(有住無住)의 고혼들을 널리 구제함이 제일가는 공덕이라 생각하고, 승려들과 상의한 후 스스로 의식문(儀式文)을 만들었다. 그 의식문에 따라 505년에 금산사(金山寺)에서 재를 베푼 것이 그 시초이다. 그 뒤 당나라에서는 그 의식이 유명계(幽冥界)를 이익되게 한다고 하여 크게 융성하였다. 송나라 때에는 희령 연간(熙寧年間)에 동천(東川)이 <수륙문(水陸文)> 3권을 다시 지어 이를 널리 보급함으로써 수륙재가 크게 성행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수륙재가 행하여진 것은 고려 때부터이다. 광종 때에 때때로 성대히 열린 바 있었는데 970년(광종 21)에 갈양사(葛陽寺)에서 개설된 수륙도량이 그 최초의 예이다. 선종 때에는 태사국사(太史局事)로 있었던 최사겸(崔士謙)이 수륙재의 의식절차를 적어놓은 <수륙의문(水陸儀文)>을 송나라에서 구해 온 것을 계기로 보제사(普濟寺)에 수륙당(水陸堂)을 새로 세움으로써 수륙재를 더욱 성대히 격식에 맞게 하였다. 또한, 일연(一然)의 제자 혼구(混丘)가 <신편수륙의문(新編水陸儀文)>을 찬술함으로써 이 의식은 더욱 널리 성하게 되었다. 이 의식은 충목왕 때까지 계속 열렸음을 <고려사>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조선 태조로부터 시작된다.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억울하게 학살당한 고려 왕족과 친인척 그리고 전쟁으로 죽어간 귀족 및 장군들의 넋을 달래기 위한 명분과 자기 후손의 안녕을 도모하고 불안정한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아 새 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하려는 목적으로 수륙재를 거행했다. 이를 위해 도성 근처 국가 수륙사의 건립을 모색해 태조 6년 진관사에 모두 59칸의 대규모 수륙사(水陸寺)를 건립했고, 이를 기념해 권근에게 지시해 후대에 보여주도록 조성기를 남겼다.

권근의 <양촌집>에 따르면 태조는 “짐이 국가를 맡게 됨은 오직 선대 임금들께서 적경하신 덕이니, 조상의 덕에 보답하는 일을 힘쓰지 않아서는 안 되겠노라. 신하와 백성들 가운데 목숨을 바쳤거나 혹은 스스로 죽은 자 가운데 제사를 지내지 못해 저승길에서 굶주리고 구제받을 수 없는 이들을 생각하니 매우 가련하도다. 이제 옛 절에 수륙도량을 마련해 해마다 재를 베풀어서 선대 임금의 명복을 빌고 또한 중생들도 복되고 하고 싶으니 너희들이 가서 합당한 곳을 살펴보라.”고 하명한다.

이에 권근은 “(삼각산과 도봉산의) 사찰 가운데 진관사가 가장 뛰어납니다.”라고 고했다.







또 권근의 <양촌집>에 따르면 태조 이성계는 “2월 신묘일에 주상께서 친히 거동하며 보시고 삼단의 위치를 정했고, 3월 무오일에 또한 거동해 보고, 가을 9월에 공사가 끝났다. 삼단이 모두 3칸 집인데, 중단과 하단 두 단은 좌우에 욕실이 각각 3칸이 있어 하단은 좌우에 별도로 조종의 영실을 각각 8칸씩 설치했다. 대문 행랑 부엌 곳간 갖추어지지 않은 곳이 없어 모두 59칸이라. 사치스럽지 않고 누추하지도 않아 제도에 맞았다.”고 적고 있다.

권근은 또 “이달 24일 계유에 주상께서 또한 친히 거동하여 보시고 28일 정축에 신 권근을 불러 그 시말을 기록하여 후세에 보이도록 하셨다.”고 전한다.

태조는 4번이나 진관사를 찾을 만큼 국행수륙재에 공을 들였다. 조선 시대에는 비록 억불정책으로 불교 의식이 유교 의식으로 많이 바뀌어 갔지만, 태조는 진관사(津寬寺)를 국행수륙재(國行水陸齋)를 여는 사사(寺社)로 지정해 전란 속에 죽은 민초들과 기근에 죽은 민초들, 왕실 조상을 천도하기 위해 국행수륙재를 베풀었다. 왕조와 백성들의 안락과 평안, 신생 왕조인 조선의 국운융창을 진관사서 빌었다. 

1395년(태조 4)에는 견암사(見巖寺)와 석왕사(釋王寺) 관음굴(觀音窟) 등에서 고려 왕 씨의 영혼을 달래는 수륙재를 베풀었다. 그 이후 배불정책에 따른 불교 의식의 유교화 정책은 수륙재를 국행으로 거행하는 문제를 놓고 많은 논란을 벌이게 되나 오랜 전통으로 계속되어 오던 수륙재를 쉽게 폐지 시키지는 못했다. 억불(抑佛)로 이름 높은 태종도 국행수륙재 폐지의 상소문을 받았으나 대대로 거행하여 온 유풍을 쉽게 폐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국행을 고집했다.







처음에는 매년 2월 15일에 거행되었으나 1415년(태종 15)부터는 1월 15일로 변경하여 실시했다. 이 수륙재는 대체로 1515년(중종 10)경까지 크게 변동 없이 계속됐다. 왕실이 직접 그 시주가 되어 때때로 수륙재를 열게 돼 유생들의 시비와 비난을 받았으나, 1606년(선조 39) 6월에 창의문 밖에서 있었던 수륙재나 1433년(세종 15)에 효령대군이 시주가 된 한강에서의 수륙재 때에는 양반·평민 등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길을 메울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중종 때에 이르러서 유생들의 강력한 반대로 수륙재가 국행으로 거행되는 것이 금지됐고, 민간을 통해서만 전승돼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조선 태조 이후 1900년대까지 면면히 이어졌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쳐 6·25전쟁 참화로 잠시 중단됐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1977년 자운 스님과 전 회주인 진관 스님이 복원해 윤년마다 설행했다가 지난 2011년부터 현 회주 계호 스님이 연례 행사로 탈바꿈시켜 옛 명성을 되찾았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세미나 등을 통해 고증하고 원형을 복원해 국가무형문화재 제126호로 지정됐고, 매년 문화재청이 나서 국행수륙재를 기록하고 연구해 가고 있다. 진관사는 조선 태조 이후 600여 년 동안 수륙재 설행의 중심 사찰로 불교 의례의 전통을 계승해 왔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연극·음악·무용·문학·미술이 결합한 종합예술로 공연적 요소가 무궁무진해 그 가치가 더욱 높다. 불자들에게는 나와 타인, 뭇 생명과 함께하는 ‘공양’과 보시의 진정한 의미를 실천하고, 시민들에게는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과 함께 화합과 소통 그리고 나눔을 즐기는 축제의 장으로 수륙재는 의미를 확장하고 있다.

처음에는 매년 2월 15일에 거행되었으나 1415년(태종 15)부터는 1월 15일로 변경하여 실시했다. 이 수륙재는 대체로 1515년(중종 10)경까지 크게 변동 없이 계속됐다. 왕실이 직접 그 시주가 되어 때때로 수륙재를 열게 돼 유생들의 시비와 비난을 받았으나, 1606년(선조 39) 6월에 창의문 밖에서 있었던 수륙재나 1433년(세종 15)에 효령대군이 시주가 된 한강에서의 수륙재 때에는 양반·평민 등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길을 메울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중종 때에 이르러서 유생들의 강력한 반대로 수륙재가 국행으로 거행되는 것이 금지됐고, 민간을 통해서만 전승돼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국가무형문화재 126호 ‘진관사 국행수륙재’가 설행된다.

서울 북한산 진관사(주지 법해 스님)와 사단법인 진관사국행수륙재보존회는 22일 오전 국행수륙재를 입재했다. 이날부터 진관사는 7주간 7번의 재를 올리며 49일간 국행수륙재를 봉행한다.

진관사는 이날 대웅전과 함월당, 명부전에 공양물을 올리고, 명종으로 수륙재 입재를 알렸다. 국행수륙재 입재날, 영가를 맞는 시련소와 일주문 앞에서 영가에게 차와 국수를 대접하는 대령소, 영가의 고단함과 번뇌를 깨끗이 씻기는 관욕소가 경내 함월당에 차려졌다. 대령관욕을 시작으로 회주 계호 스님과 주지 법해 스님 등이 배례하고 심대근 신도회장 등 신도들이 10여 명씩 짝을 이뤄 배례하고 잔을 올렸다. 시식과 관욕이 이어졌고, 종범 스님모든 영가를 위해 법을 설했다. 진관사는 국행수륙재를 위해 직위에 따라 각자의 소임을 정하여 적은 용상방을 걸었고, 불전에 올릴 공양구를 마련하는 등의 임무를 맡는 여섯 종류의 책임자와 소임을 적은 육색방을 걸었다.







올해 국행수륙재는 이날 전 중앙승가대학교 총장 종범 스님이 ‘수월의 도량을 세우고 공화의 불사를 성취하다’라는 주제 법문 속에 설행됐다. 초재는 8월 28일 전 중앙승가대 총장 태원 스님이 ‘왕생정토, 어떻게 준비하는가’를 주제로 설하며, 2재는 9월 4일 봉녕사 강주 대우 스님이 ‘보시하는 사회와 공덕의 세계’를, 3재는 9월 11일 진관사 회주 계호 스님이 ‘수륙재의 봉원적 의미와 실천적 가치’, 4재는 9월 18일 송광사 율주 지현 스님이 ‘수륙재 영가들을 위한 계’, 5재는 9월 25일 전국비구니회장 본각 스님이 ‘대시회(大施會)를 열다-화엄경탐현기’, 6재는 10월 2일 조계종 어산어장 인묵 스님이 ‘범음범패의 기원과 그 수승한 공덕’를 각각 법문하며 설행할 예정이다. 마지막 7재는 조계종 전 전계대화상이자 원로의원인 성우 스님이 ‘수륙재의 소통과 회통, 그리고 고통의 구제’를 주제로 법문하며, 49일간의 국행수륙재를 회향한다. 회향인 7재는 10월 9일 오전 9시부터 오전 11시 30분까지 대웅전 앞 마당에서 낮재가 열리며, 같은 날 오후 12시 30분부터 오후3시까지 같은 장소에서 밤재가 열린다.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수륙재인 칠칠재(사십구재) 형식으로 진행되는 진관사 수륙재는 낮에는 돌아가신 영령을 정성껏 모셔 석가모니 부처님의 영산회상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게 하고, 밤에는 외로이 생을 마감한 무주고혼에게 공양을 올려 고통에서 벗어나게 한다.
현대의 국행수륙재는 49일간 일곱 차례 재를 설행하며,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낮재와 밤재로 나누어 이부 구성의 전통을 잇고 있다. 올해 수륙재 회향날 오전은 수륙재 낮재에 해당하는 시련, 대령, 관욕, 신중작법, 괘불이운, 영산작법, 법문이 진행되며, 오후는 밤재로 수륙연기, 사자단, 오로단, 상단, 중단, 하단, 회향봉송 순으로 진행된다. 시련 의식은 행사에 참여한 일반인 누구나 명다리를 잡고 진관사 마당에서부터 일주문까지 함께 걸으며 참여한다. 수륙재는 산자와 죽은 자를 모두 아울러 공양한다는 의미도 있다. 회향날은 수륙과를 나눈다.  







수륙재 각 단에는 조선 태조와 진관 국사, 백초월 스님,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등의 위패를 봉안한다. 국태민안과 국운융창을 염원하고 민중의 아픔을 달래는 무주고혼의 위패도 모셔진다. 그러면서도 수륙재 참석 대중이 하나가 되어 이웃과 사회를 돌아보는 기회도 삼는다. 49일 수륙재 기간 지역어르신들을 위해 잔치를 벌여 위무하고, 이웃에게는 쌀 등을 나눈다.

전통적인 수륙재가 망자 천도 중심이라면 진관사의 현대 수륙재는 이웃과 더불어함께 살기 위한 나눔행이 더해졌다.







 







전 중앙승가대 총장 종범 스님은 “마음이 모든 여래를 만들고 세계와 중생도 만든다. 일체 근심 걱정이 망상이니, 망상이 만든 것이 헛된 생각이라는 것을 깨우쳐 크게 편안한 청정국토를 만들자는 것이 수륙재”라며 “향단을 건설하고 향과 꽃, 등촉, 다과와 진수 등 육법공양을 올려 독경하고 설법하며 관법을 짓고 축원하는 모든 것은 마음이며 수륙재는 마음법으로 의식이 구조화된 것으로 해탈을 이루는 공양물로 대안정토에서 자재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기연한다”고 설했다.







올해 국행수륙재는 조계종 원로의원 성우 스님을 증명으로 진관사 회주 계호 스님이 재주를 맡는다. 법희 불필 스님 등이 선덕으로, 주지 법해 스님이 승법(乘法), 재 의식은 어산어장 동희 스님이 이끄는 진관사 국행수륙재보존회가 맡는다. 수륙재보존회 스님들이 범패 등 어산으로 참여한다. 수륙재 보존회 스님들은 진관사 수륙재학교 범패학과·법인학과·작법학과에서 수학했거나 수학 중이다. 올해 국행수륙재는 국행수륙재를 이끄는 어장 동희 스님이 한국 불교 역사상 최초의 비구니 어산어장으로 지정돼 더 의미를 더했다.

수륙재는 물과 육지에 떠도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 등 혼령들에게 법을 설하고 음식을 평등하게 베풀어 그들을 구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불교전통의례이다.

수륙재 의식은 중국 양나라 무제(武帝)에 의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교에 신심이 두터운 무제는 유주무주(有住無住)의 고혼들을 널리 구제함이 제일가는 공덕이라 생각하고, 승려들과 상의한 후 스스로 의식문(儀式文)을 만들었다. 그 의식문에 따라 505년에 금산사(金山寺)에서 재를 베푼 것이 그 시초이다. 그 뒤 당나라에서는 그 의식이 유명계(幽冥界)를 이익되게 한다고 하여 크게 융성하였다. 송나라 때에는 희령 연간(熙寧年間)에 동천(東川)이 <수륙문(水陸文)> 3권을 다시 지어 이를 널리 보급함으로써 수륙재가 크게 성행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수륙재가 행하여진 것은 고려 때부터이다. 광종 때에 때때로 성대히 열린 바 있었는데 970년(광종 21)에 갈양사(葛陽寺)에서 개설된 수륙도량이 그 최초의 예이다. 선종 때에는 태사국사(太史局事)로 있었던 최사겸(崔士謙)이 수륙재의 의식절차를 적어놓은 <수륙의문(水陸儀文)>을 송나라에서 구해 온 것을 계기로 보제사(普濟寺)에 수륙당(水陸堂)을 새로 세움으로써 수륙재를 더욱 성대히 격식에 맞게 하였다. 또한, 일연(一然)의 제자 혼구(混丘)가 <신편수륙의문(新編水陸儀文)>을 찬술함으로써 이 의식은 더욱 널리 성하게 되었다. 이 의식은 충목왕 때까지 계속 열렸음을 <고려사>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조선 태조로부터 시작된다.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억울하게 학살당한 고려 왕족과 친인척 그리고 전쟁으로 죽어간 귀족 및 장군들의 넋을 달래기 위한 명분과 자기 후손의 안녕을 도모하고 불안정한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아 새 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하려는 목적으로 수륙재를 거행했다. 이를 위해 도성 근처 국가 수륙사의 건립을 모색해 태조 6년 진관사에 모두 59칸의 대규모 수륙사(水陸寺)를 건립했고, 이를 기념해 권근에게 지시해 후대에 보여주도록 조성기를 남겼다.

권근의 <양촌집>에 따르면 태조는 “짐이 국가를 맡게 됨은 오직 선대 임금들께서 적경하신 덕이니, 조상의 덕에 보답하는 일을 힘쓰지 않아서는 안 되겠노라. 신하와 백성들 가운데 목숨을 바쳤거나 혹은 스스로 죽은 자 가운데 제사를 지내지 못해 저승길에서 굶주리고 구제받을 수 없는 이들을 생각하니 매우 가련하도다. 이제 옛 절에 수륙도량을 마련해 해마다 재를 베풀어서 선대 임금의 명복을 빌고 또한 중생들도 복되고 하고 싶으니 너희들이 가서 합당한 곳을 살펴보라.”고 하명한다.

이에 권근은 “(삼각산과 도봉산의) 사찰 가운데 진관사가 가장 뛰어납니다.”라고 고했다.







또 권근의 <양촌집>에 따르면 태조 이성계는 “2월 신묘일에 주상께서 친히 거동하며 보시고 삼단의 위치를 정했고, 3월 무오일에 또한 거동해 보고, 가을 9월에 공사가 끝났다. 삼단이 모두 3칸 집인데, 중단과 하단 두 단은 좌우에 욕실이 각각 3칸이 있어 하단은 좌우에 별도로 조종의 영실을 각각 8칸씩 설치했다. 대문 행랑 부엌 곳간 갖추어지지 않은 곳이 없어 모두 59칸이라. 사치스럽지 않고 누추하지도 않아 제도에 맞았다.”고 적고 있다.

권근은 또 “이달 24일 계유에 주상께서 또한 친히 거동하여 보시고 28일 정축에 신 권근을 불러 그 시말을 기록하여 후세에 보이도록 하셨다.”고 전한다.

태조는 4번이나 진관사를 찾을 만큼 국행수륙재에 공을 들였다. 조선 시대에는 비록 억불정책으로 불교 의식이 유교 의식으로 많이 바뀌어 갔지만, 태조는 진관사(津寬寺)를 국행수륙재(國行水陸齋)를 여는 사사(寺社)로 지정해 전란 속에 죽은 민초들과 기근에 죽은 민초들, 왕실 조상을 천도하기 위해 국행수륙재를 베풀었다. 왕조와 백성들의 안락과 평안, 신생 왕조인 조선의 국운융창을 진관사서 빌었다. 

1395년(태조 4)에는 견암사(見巖寺)와 석왕사(釋王寺) 관음굴(觀音窟) 등에서 고려 왕 씨의 영혼을 달래는 수륙재를 베풀었다. 그 이후 배불정책에 따른 불교 의식의 유교화 정책은 수륙재를 국행으로 거행하는 문제를 놓고 많은 논란을 벌이게 되나 오랜 전통으로 계속되어 오던 수륙재를 쉽게 폐지 시키지는 못했다. 억불(抑佛)로 이름 높은 태종도 국행수륙재 폐지의 상소문을 받았으나 대대로 거행하여 온 유풍을 쉽게 폐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국행을 고집했다.







처음에는 매년 2월 15일에 거행되었으나 1415년(태종 15)부터는 1월 15일로 변경하여 실시했다. 이 수륙재는 대체로 1515년(중종 10)경까지 크게 변동 없이 계속됐다. 왕실이 직접 그 시주가 되어 때때로 수륙재를 열게 돼 유생들의 시비와 비난을 받았으나, 1606년(선조 39) 6월에 창의문 밖에서 있었던 수륙재나 1433년(세종 15)에 효령대군이 시주가 된 한강에서의 수륙재 때에는 양반·평민 등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길을 메울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중종 때에 이르러서 유생들의 강력한 반대로 수륙재가 국행으로 거행되는 것이 금지됐고, 민간을 통해서만 전승돼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조선 태조 이후 1900년대까지 면면히 이어졌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쳐 6·25전쟁 참화로 잠시 중단됐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1977년 자운 스님과 전 회주인 진관 스님이 복원해 윤년마다 설행했다가 지난 2011년부터 현 회주 계호 스님이 연례 행사로 탈바꿈시켜 옛 명성을 되찾았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세미나 등을 통해 고증하고 원형을 복원해 국가무형문화재 제126호로 지정됐고, 매년 문화재청이 나서 국행수륙재를 기록하고 연구해 가고 있다. 진관사는 조선 태조 이후 600여 년 동안 수륙재 설행의 중심 사찰로 불교 의례의 전통을 계승해 왔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연극·음악·무용·문학·미술이 결합한 종합예술로 공연적 요소가 무궁무진해 그 가치가 더욱 높다. 불자들에게는 나와 타인, 뭇 생명과 함께하는 ‘공양’과 보시의 진정한 의미를 실천하고, 시민들에게는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과 함께 화합과 소통 그리고 나눔을 즐기는 축제의 장으로 수륙재는 의미를 확장하고 있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조선 태조 이후 1900년대까지 면면히 이어졌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쳐 6·25전쟁 참화로 잠시 중단됐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1977년 자운 스님과 전 회주인 진관 스님이 복원해 윤년마다 설행했다가 지난 2011년부터 현 회주 계호 스님이 연례 행사로 탈바꿈시켜 옛 명성을 되찾았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세미나 등을 통해 고증하고 원형을 복원해 국가무형문화재 제126호로 지정됐고, 매년 문화재청이 나서 국행수륙재를 기록하고 연구해 가고 있다. 진관사는 조선 태조 이후 600여 년 동안 수륙재 설행의 중심 사찰로 불교 의례의 전통을 계승해 왔다.





국가무형문화재 126호 ‘진관사 국행수륙재’가 설행된다.

서울 북한산 진관사(주지 법해 스님)와 사단법인 진관사국행수륙재보존회는 22일 오전 국행수륙재를 입재했다. 이날부터 진관사는 7주간 7번의 재를 올리며 49일간 국행수륙재를 봉행한다.

진관사는 이날 대웅전과 함월당, 명부전에 공양물을 올리고, 명종으로 수륙재 입재를 알렸다. 국행수륙재 입재날, 영가를 맞는 시련소와 일주문 앞에서 영가에게 차와 국수를 대접하는 대령소, 영가의 고단함과 번뇌를 깨끗이 씻기는 관욕소가 경내 함월당에 차려졌다. 대령관욕을 시작으로 회주 계호 스님과 주지 법해 스님 등이 배례하고 심대근 신도회장 등 신도들이 10여 명씩 짝을 이뤄 배례하고 잔을 올렸다. 시식과 관욕이 이어졌고, 종범 스님모든 영가를 위해 법을 설했다. 진관사는 국행수륙재를 위해 직위에 따라 각자의 소임을 정하여 적은 용상방을 걸었고, 불전에 올릴 공양구를 마련하는 등의 임무를 맡는 여섯 종류의 책임자와 소임을 적은 육색방을 걸었다.







올해 국행수륙재는 이날 전 중앙승가대학교 총장 종범 스님이 ‘수월의 도량을 세우고 공화의 불사를 성취하다’라는 주제 법문 속에 설행됐다. 초재는 8월 28일 전 중앙승가대 총장 태원 스님이 ‘왕생정토, 어떻게 준비하는가’를 주제로 설하며, 2재는 9월 4일 봉녕사 강주 대우 스님이 ‘보시하는 사회와 공덕의 세계’를, 3재는 9월 11일 진관사 회주 계호 스님이 ‘수륙재의 봉원적 의미와 실천적 가치’, 4재는 9월 18일 송광사 율주 지현 스님이 ‘수륙재 영가들을 위한 계’, 5재는 9월 25일 전국비구니회장 본각 스님이 ‘대시회(大施會)를 열다-화엄경탐현기’, 6재는 10월 2일 조계종 어산어장 인묵 스님이 ‘범음범패의 기원과 그 수승한 공덕’를 각각 법문하며 설행할 예정이다. 마지막 7재는 조계종 전 전계대화상이자 원로의원인 성우 스님이 ‘수륙재의 소통과 회통, 그리고 고통의 구제’를 주제로 법문하며, 49일간의 국행수륙재를 회향한다. 회향인 7재는 10월 9일 오전 9시부터 오전 11시 30분까지 대웅전 앞 마당에서 낮재가 열리며, 같은 날 오후 12시 30분부터 오후3시까지 같은 장소에서 밤재가 열린다.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수륙재인 칠칠재(사십구재) 형식으로 진행되는 진관사 수륙재는 낮에는 돌아가신 영령을 정성껏 모셔 석가모니 부처님의 영산회상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게 하고, 밤에는 외로이 생을 마감한 무주고혼에게 공양을 올려 고통에서 벗어나게 한다.
현대의 국행수륙재는 49일간 일곱 차례 재를 설행하며,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낮재와 밤재로 나누어 이부 구성의 전통을 잇고 있다. 올해 수륙재 회향날 오전은 수륙재 낮재에 해당하는 시련, 대령, 관욕, 신중작법, 괘불이운, 영산작법, 법문이 진행되며, 오후는 밤재로 수륙연기, 사자단, 오로단, 상단, 중단, 하단, 회향봉송 순으로 진행된다. 시련 의식은 행사에 참여한 일반인 누구나 명다리를 잡고 진관사 마당에서부터 일주문까지 함께 걸으며 참여한다. 수륙재는 산자와 죽은 자를 모두 아울러 공양한다는 의미도 있다. 회향날은 수륙과를 나눈다.  







수륙재 각 단에는 조선 태조와 진관 국사, 백초월 스님,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등의 위패를 봉안한다. 국태민안과 국운융창을 염원하고 민중의 아픔을 달래는 무주고혼의 위패도 모셔진다. 그러면서도 수륙재 참석 대중이 하나가 되어 이웃과 사회를 돌아보는 기회도 삼는다. 49일 수륙재 기간 지역어르신들을 위해 잔치를 벌여 위무하고, 이웃에게는 쌀 등을 나눈다.

전통적인 수륙재가 망자 천도 중심이라면 진관사의 현대 수륙재는 이웃과 더불어함께 살기 위한 나눔행이 더해졌다.







 







전 중앙승가대 총장 종범 스님은 “마음이 모든 여래를 만들고 세계와 중생도 만든다. 일체 근심 걱정이 망상이니, 망상이 만든 것이 헛된 생각이라는 것을 깨우쳐 크게 편안한 청정국토를 만들자는 것이 수륙재”라며 “향단을 건설하고 향과 꽃, 등촉, 다과와 진수 등 육법공양을 올려 독경하고 설법하며 관법을 짓고 축원하는 모든 것은 마음이며 수륙재는 마음법으로 의식이 구조화된 것으로 해탈을 이루는 공양물로 대안정토에서 자재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기연한다”고 설했다.







올해 국행수륙재는 조계종 원로의원 성우 스님을 증명으로 진관사 회주 계호 스님이 재주를 맡는다. 법희 불필 스님 등이 선덕으로, 주지 법해 스님이 승법(乘法), 재 의식은 어산어장 동희 스님이 이끄는 진관사 국행수륙재보존회가 맡는다. 수륙재보존회 스님들이 범패 등 어산으로 참여한다. 수륙재 보존회 스님들은 진관사 수륙재학교 범패학과·법인학과·작법학과에서 수학했거나 수학 중이다. 올해 국행수륙재는 국행수륙재를 이끄는 어장 동희 스님이 한국 불교 역사상 최초의 비구니 어산어장으로 지정돼 더 의미를 더했다.

수륙재는 물과 육지에 떠도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 등 혼령들에게 법을 설하고 음식을 평등하게 베풀어 그들을 구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불교전통의례이다.

수륙재 의식은 중국 양나라 무제(武帝)에 의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교에 신심이 두터운 무제는 유주무주(有住無住)의 고혼들을 널리 구제함이 제일가는 공덕이라 생각하고, 승려들과 상의한 후 스스로 의식문(儀式文)을 만들었다. 그 의식문에 따라 505년에 금산사(金山寺)에서 재를 베푼 것이 그 시초이다. 그 뒤 당나라에서는 그 의식이 유명계(幽冥界)를 이익되게 한다고 하여 크게 융성하였다. 송나라 때에는 희령 연간(熙寧年間)에 동천(東川)이 <수륙문(水陸文)> 3권을 다시 지어 이를 널리 보급함으로써 수륙재가 크게 성행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수륙재가 행하여진 것은 고려 때부터이다. 광종 때에 때때로 성대히 열린 바 있었는데 970년(광종 21)에 갈양사(葛陽寺)에서 개설된 수륙도량이 그 최초의 예이다. 선종 때에는 태사국사(太史局事)로 있었던 최사겸(崔士謙)이 수륙재의 의식절차를 적어놓은 <수륙의문(水陸儀文)>을 송나라에서 구해 온 것을 계기로 보제사(普濟寺)에 수륙당(水陸堂)을 새로 세움으로써 수륙재를 더욱 성대히 격식에 맞게 하였다. 또한, 일연(一然)의 제자 혼구(混丘)가 <신편수륙의문(新編水陸儀文)>을 찬술함으로써 이 의식은 더욱 널리 성하게 되었다. 이 의식은 충목왕 때까지 계속 열렸음을 <고려사>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조선 태조로부터 시작된다.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억울하게 학살당한 고려 왕족과 친인척 그리고 전쟁으로 죽어간 귀족 및 장군들의 넋을 달래기 위한 명분과 자기 후손의 안녕을 도모하고 불안정한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아 새 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하려는 목적으로 수륙재를 거행했다. 이를 위해 도성 근처 국가 수륙사의 건립을 모색해 태조 6년 진관사에 모두 59칸의 대규모 수륙사(水陸寺)를 건립했고, 이를 기념해 권근에게 지시해 후대에 보여주도록 조성기를 남겼다.

권근의 <양촌집>에 따르면 태조는 “짐이 국가를 맡게 됨은 오직 선대 임금들께서 적경하신 덕이니, 조상의 덕에 보답하는 일을 힘쓰지 않아서는 안 되겠노라. 신하와 백성들 가운데 목숨을 바쳤거나 혹은 스스로 죽은 자 가운데 제사를 지내지 못해 저승길에서 굶주리고 구제받을 수 없는 이들을 생각하니 매우 가련하도다. 이제 옛 절에 수륙도량을 마련해 해마다 재를 베풀어서 선대 임금의 명복을 빌고 또한 중생들도 복되고 하고 싶으니 너희들이 가서 합당한 곳을 살펴보라.”고 하명한다.

이에 권근은 “(삼각산과 도봉산의) 사찰 가운데 진관사가 가장 뛰어납니다.”라고 고했다.







또 권근의 <양촌집>에 따르면 태조 이성계는 “2월 신묘일에 주상께서 친히 거동하며 보시고 삼단의 위치를 정했고, 3월 무오일에 또한 거동해 보고, 가을 9월에 공사가 끝났다. 삼단이 모두 3칸 집인데, 중단과 하단 두 단은 좌우에 욕실이 각각 3칸이 있어 하단은 좌우에 별도로 조종의 영실을 각각 8칸씩 설치했다. 대문 행랑 부엌 곳간 갖추어지지 않은 곳이 없어 모두 59칸이라. 사치스럽지 않고 누추하지도 않아 제도에 맞았다.”고 적고 있다.

권근은 또 “이달 24일 계유에 주상께서 또한 친히 거동하여 보시고 28일 정축에 신 권근을 불러 그 시말을 기록하여 후세에 보이도록 하셨다.”고 전한다.

태조는 4번이나 진관사를 찾을 만큼 국행수륙재에 공을 들였다. 조선 시대에는 비록 억불정책으로 불교 의식이 유교 의식으로 많이 바뀌어 갔지만, 태조는 진관사(津寬寺)를 국행수륙재(國行水陸齋)를 여는 사사(寺社)로 지정해 전란 속에 죽은 민초들과 기근에 죽은 민초들, 왕실 조상을 천도하기 위해 국행수륙재를 베풀었다. 왕조와 백성들의 안락과 평안, 신생 왕조인 조선의 국운융창을 진관사서 빌었다. 

1395년(태조 4)에는 견암사(見巖寺)와 석왕사(釋王寺) 관음굴(觀音窟) 등에서 고려 왕 씨의 영혼을 달래는 수륙재를 베풀었다. 그 이후 배불정책에 따른 불교 의식의 유교화 정책은 수륙재를 국행으로 거행하는 문제를 놓고 많은 논란을 벌이게 되나 오랜 전통으로 계속되어 오던 수륙재를 쉽게 폐지 시키지는 못했다. 억불(抑佛)로 이름 높은 태종도 국행수륙재 폐지의 상소문을 받았으나 대대로 거행하여 온 유풍을 쉽게 폐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국행을 고집했다.







처음에는 매년 2월 15일에 거행되었으나 1415년(태종 15)부터는 1월 15일로 변경하여 실시했다. 이 수륙재는 대체로 1515년(중종 10)경까지 크게 변동 없이 계속됐다. 왕실이 직접 그 시주가 되어 때때로 수륙재를 열게 돼 유생들의 시비와 비난을 받았으나, 1606년(선조 39) 6월에 창의문 밖에서 있었던 수륙재나 1433년(세종 15)에 효령대군이 시주가 된 한강에서의 수륙재 때에는 양반·평민 등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길을 메울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중종 때에 이르러서 유생들의 강력한 반대로 수륙재가 국행으로 거행되는 것이 금지됐고, 민간을 통해서만 전승돼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조선 태조 이후 1900년대까지 면면히 이어졌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쳐 6·25전쟁 참화로 잠시 중단됐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1977년 자운 스님과 전 회주인 진관 스님이 복원해 윤년마다 설행했다가 지난 2011년부터 현 회주 계호 스님이 연례 행사로 탈바꿈시켜 옛 명성을 되찾았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세미나 등을 통해 고증하고 원형을 복원해 국가무형문화재 제126호로 지정됐고, 매년 문화재청이 나서 국행수륙재를 기록하고 연구해 가고 있다. 진관사는 조선 태조 이후 600여 년 동안 수륙재 설행의 중심 사찰로 불교 의례의 전통을 계승해 왔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연극·음악·무용·문학·미술이 결합한 종합예술로 공연적 요소가 무궁무진해 그 가치가 더욱 높다. 불자들에게는 나와 타인, 뭇 생명과 함께하는 ‘공양’과 보시의 진정한 의미를 실천하고, 시민들에게는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과 함께 화합과 소통 그리고 나눔을 즐기는 축제의 장으로 수륙재는 의미를 확장하고 있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연극·음악·무용·문학·미술이 결합한 종합예술로 공연적 요소가 무궁무진해 그 가치가 더욱 높다. 불자들에게는 나와 타인, 뭇 생명과 함께하는 ‘공양’과 보시의 진정한 의미를 실천하고, 시민들에게는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과 함께 화합과 소통 그리고 나눔을 즐기는 축제의 장으로 수륙재는 의미를 확장하고 있다.





국가무형문화재 126호 ‘진관사 국행수륙재’가 설행된다.

서울 북한산 진관사(주지 법해 스님)와 사단법인 진관사국행수륙재보존회는 22일 오전 국행수륙재를 입재했다. 이날부터 진관사는 7주간 7번의 재를 올리며 49일간 국행수륙재를 봉행한다.

진관사는 이날 대웅전과 함월당, 명부전에 공양물을 올리고, 명종으로 수륙재 입재를 알렸다. 국행수륙재 입재날, 영가를 맞는 시련소와 일주문 앞에서 영가에게 차와 국수를 대접하는 대령소, 영가의 고단함과 번뇌를 깨끗이 씻기는 관욕소가 경내 함월당에 차려졌다. 대령관욕을 시작으로 회주 계호 스님과 주지 법해 스님 등이 배례하고 심대근 신도회장 등 신도들이 10여 명씩 짝을 이뤄 배례하고 잔을 올렸다. 시식과 관욕이 이어졌고, 종범 스님모든 영가를 위해 법을 설했다. 진관사는 국행수륙재를 위해 직위에 따라 각자의 소임을 정하여 적은 용상방을 걸었고, 불전에 올릴 공양구를 마련하는 등의 임무를 맡는 여섯 종류의 책임자와 소임을 적은 육색방을 걸었다.







올해 국행수륙재는 이날 전 중앙승가대학교 총장 종범 스님이 ‘수월의 도량을 세우고 공화의 불사를 성취하다’라는 주제 법문 속에 설행됐다. 초재는 8월 28일 전 중앙승가대 총장 태원 스님이 ‘왕생정토, 어떻게 준비하는가’를 주제로 설하며, 2재는 9월 4일 봉녕사 강주 대우 스님이 ‘보시하는 사회와 공덕의 세계’를, 3재는 9월 11일 진관사 회주 계호 스님이 ‘수륙재의 봉원적 의미와 실천적 가치’, 4재는 9월 18일 송광사 율주 지현 스님이 ‘수륙재 영가들을 위한 계’, 5재는 9월 25일 전국비구니회장 본각 스님이 ‘대시회(大施會)를 열다-화엄경탐현기’, 6재는 10월 2일 조계종 어산어장 인묵 스님이 ‘범음범패의 기원과 그 수승한 공덕’를 각각 법문하며 설행할 예정이다. 마지막 7재는 조계종 전 전계대화상이자 원로의원인 성우 스님이 ‘수륙재의 소통과 회통, 그리고 고통의 구제’를 주제로 법문하며, 49일간의 국행수륙재를 회향한다. 회향인 7재는 10월 9일 오전 9시부터 오전 11시 30분까지 대웅전 앞 마당에서 낮재가 열리며, 같은 날 오후 12시 30분부터 오후3시까지 같은 장소에서 밤재가 열린다.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수륙재인 칠칠재(사십구재) 형식으로 진행되는 진관사 수륙재는 낮에는 돌아가신 영령을 정성껏 모셔 석가모니 부처님의 영산회상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게 하고, 밤에는 외로이 생을 마감한 무주고혼에게 공양을 올려 고통에서 벗어나게 한다.
현대의 국행수륙재는 49일간 일곱 차례 재를 설행하며,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낮재와 밤재로 나누어 이부 구성의 전통을 잇고 있다. 올해 수륙재 회향날 오전은 수륙재 낮재에 해당하는 시련, 대령, 관욕, 신중작법, 괘불이운, 영산작법, 법문이 진행되며, 오후는 밤재로 수륙연기, 사자단, 오로단, 상단, 중단, 하단, 회향봉송 순으로 진행된다. 시련 의식은 행사에 참여한 일반인 누구나 명다리를 잡고 진관사 마당에서부터 일주문까지 함께 걸으며 참여한다. 수륙재는 산자와 죽은 자를 모두 아울러 공양한다는 의미도 있다. 회향날은 수륙과를 나눈다.  







수륙재 각 단에는 조선 태조와 진관 국사, 백초월 스님,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등의 위패를 봉안한다. 국태민안과 국운융창을 염원하고 민중의 아픔을 달래는 무주고혼의 위패도 모셔진다. 그러면서도 수륙재 참석 대중이 하나가 되어 이웃과 사회를 돌아보는 기회도 삼는다. 49일 수륙재 기간 지역어르신들을 위해 잔치를 벌여 위무하고, 이웃에게는 쌀 등을 나눈다.

전통적인 수륙재가 망자 천도 중심이라면 진관사의 현대 수륙재는 이웃과 더불어함께 살기 위한 나눔행이 더해졌다.







 







전 중앙승가대 총장 종범 스님은 “마음이 모든 여래를 만들고 세계와 중생도 만든다. 일체 근심 걱정이 망상이니, 망상이 만든 것이 헛된 생각이라는 것을 깨우쳐 크게 편안한 청정국토를 만들자는 것이 수륙재”라며 “향단을 건설하고 향과 꽃, 등촉, 다과와 진수 등 육법공양을 올려 독경하고 설법하며 관법을 짓고 축원하는 모든 것은 마음이며 수륙재는 마음법으로 의식이 구조화된 것으로 해탈을 이루는 공양물로 대안정토에서 자재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기연한다”고 설했다.







올해 국행수륙재는 조계종 원로의원 성우 스님을 증명으로 진관사 회주 계호 스님이 재주를 맡는다. 법희 불필 스님 등이 선덕으로, 주지 법해 스님이 승법(乘法), 재 의식은 어산어장 동희 스님이 이끄는 진관사 국행수륙재보존회가 맡는다. 수륙재보존회 스님들이 범패 등 어산으로 참여한다. 수륙재 보존회 스님들은 진관사 수륙재학교 범패학과·법인학과·작법학과에서 수학했거나 수학 중이다. 올해 국행수륙재는 국행수륙재를 이끄는 어장 동희 스님이 한국 불교 역사상 최초의 비구니 어산어장으로 지정돼 더 의미를 더했다.

수륙재는 물과 육지에 떠도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 등 혼령들에게 법을 설하고 음식을 평등하게 베풀어 그들을 구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불교전통의례이다.

수륙재 의식은 중국 양나라 무제(武帝)에 의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교에 신심이 두터운 무제는 유주무주(有住無住)의 고혼들을 널리 구제함이 제일가는 공덕이라 생각하고, 승려들과 상의한 후 스스로 의식문(儀式文)을 만들었다. 그 의식문에 따라 505년에 금산사(金山寺)에서 재를 베푼 것이 그 시초이다. 그 뒤 당나라에서는 그 의식이 유명계(幽冥界)를 이익되게 한다고 하여 크게 융성하였다. 송나라 때에는 희령 연간(熙寧年間)에 동천(東川)이 <수륙문(水陸文)> 3권을 다시 지어 이를 널리 보급함으로써 수륙재가 크게 성행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수륙재가 행하여진 것은 고려 때부터이다. 광종 때에 때때로 성대히 열린 바 있었는데 970년(광종 21)에 갈양사(葛陽寺)에서 개설된 수륙도량이 그 최초의 예이다. 선종 때에는 태사국사(太史局事)로 있었던 최사겸(崔士謙)이 수륙재의 의식절차를 적어놓은 <수륙의문(水陸儀文)>을 송나라에서 구해 온 것을 계기로 보제사(普濟寺)에 수륙당(水陸堂)을 새로 세움으로써 수륙재를 더욱 성대히 격식에 맞게 하였다. 또한, 일연(一然)의 제자 혼구(混丘)가 <신편수륙의문(新編水陸儀文)>을 찬술함으로써 이 의식은 더욱 널리 성하게 되었다. 이 의식은 충목왕 때까지 계속 열렸음을 <고려사>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조선 태조로부터 시작된다.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억울하게 학살당한 고려 왕족과 친인척 그리고 전쟁으로 죽어간 귀족 및 장군들의 넋을 달래기 위한 명분과 자기 후손의 안녕을 도모하고 불안정한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아 새 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하려는 목적으로 수륙재를 거행했다. 이를 위해 도성 근처 국가 수륙사의 건립을 모색해 태조 6년 진관사에 모두 59칸의 대규모 수륙사(水陸寺)를 건립했고, 이를 기념해 권근에게 지시해 후대에 보여주도록 조성기를 남겼다.

권근의 <양촌집>에 따르면 태조는 “짐이 국가를 맡게 됨은 오직 선대 임금들께서 적경하신 덕이니, 조상의 덕에 보답하는 일을 힘쓰지 않아서는 안 되겠노라. 신하와 백성들 가운데 목숨을 바쳤거나 혹은 스스로 죽은 자 가운데 제사를 지내지 못해 저승길에서 굶주리고 구제받을 수 없는 이들을 생각하니 매우 가련하도다. 이제 옛 절에 수륙도량을 마련해 해마다 재를 베풀어서 선대 임금의 명복을 빌고 또한 중생들도 복되고 하고 싶으니 너희들이 가서 합당한 곳을 살펴보라.”고 하명한다.

이에 권근은 “(삼각산과 도봉산의) 사찰 가운데 진관사가 가장 뛰어납니다.”라고 고했다.







또 권근의 <양촌집>에 따르면 태조 이성계는 “2월 신묘일에 주상께서 친히 거동하며 보시고 삼단의 위치를 정했고, 3월 무오일에 또한 거동해 보고, 가을 9월에 공사가 끝났다. 삼단이 모두 3칸 집인데, 중단과 하단 두 단은 좌우에 욕실이 각각 3칸이 있어 하단은 좌우에 별도로 조종의 영실을 각각 8칸씩 설치했다. 대문 행랑 부엌 곳간 갖추어지지 않은 곳이 없어 모두 59칸이라. 사치스럽지 않고 누추하지도 않아 제도에 맞았다.”고 적고 있다.

권근은 또 “이달 24일 계유에 주상께서 또한 친히 거동하여 보시고 28일 정축에 신 권근을 불러 그 시말을 기록하여 후세에 보이도록 하셨다.”고 전한다.

태조는 4번이나 진관사를 찾을 만큼 국행수륙재에 공을 들였다. 조선 시대에는 비록 억불정책으로 불교 의식이 유교 의식으로 많이 바뀌어 갔지만, 태조는 진관사(津寬寺)를 국행수륙재(國行水陸齋)를 여는 사사(寺社)로 지정해 전란 속에 죽은 민초들과 기근에 죽은 민초들, 왕실 조상을 천도하기 위해 국행수륙재를 베풀었다. 왕조와 백성들의 안락과 평안, 신생 왕조인 조선의 국운융창을 진관사서 빌었다. 

1395년(태조 4)에는 견암사(見巖寺)와 석왕사(釋王寺) 관음굴(觀音窟) 등에서 고려 왕 씨의 영혼을 달래는 수륙재를 베풀었다. 그 이후 배불정책에 따른 불교 의식의 유교화 정책은 수륙재를 국행으로 거행하는 문제를 놓고 많은 논란을 벌이게 되나 오랜 전통으로 계속되어 오던 수륙재를 쉽게 폐지 시키지는 못했다. 억불(抑佛)로 이름 높은 태종도 국행수륙재 폐지의 상소문을 받았으나 대대로 거행하여 온 유풍을 쉽게 폐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국행을 고집했다.







처음에는 매년 2월 15일에 거행되었으나 1415년(태종 15)부터는 1월 15일로 변경하여 실시했다. 이 수륙재는 대체로 1515년(중종 10)경까지 크게 변동 없이 계속됐다. 왕실이 직접 그 시주가 되어 때때로 수륙재를 열게 돼 유생들의 시비와 비난을 받았으나, 1606년(선조 39) 6월에 창의문 밖에서 있었던 수륙재나 1433년(세종 15)에 효령대군이 시주가 된 한강에서의 수륙재 때에는 양반·평민 등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길을 메울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중종 때에 이르러서 유생들의 강력한 반대로 수륙재가 국행으로 거행되는 것이 금지됐고, 민간을 통해서만 전승돼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조선 태조 이후 1900년대까지 면면히 이어졌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쳐 6·25전쟁 참화로 잠시 중단됐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1977년 자운 스님과 전 회주인 진관 스님이 복원해 윤년마다 설행했다가 지난 2011년부터 현 회주 계호 스님이 연례 행사로 탈바꿈시켜 옛 명성을 되찾았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세미나 등을 통해 고증하고 원형을 복원해 국가무형문화재 제126호로 지정됐고, 매년 문화재청이 나서 국행수륙재를 기록하고 연구해 가고 있다. 진관사는 조선 태조 이후 600여 년 동안 수륙재 설행의 중심 사찰로 불교 의례의 전통을 계승해 왔다.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연극·음악·무용·문학·미술이 결합한 종합예술로 공연적 요소가 무궁무진해 그 가치가 더욱 높다. 불자들에게는 나와 타인, 뭇 생명과 함께하는 ‘공양’과 보시의 진정한 의미를 실천하고, 시민들에게는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과 함께 화합과 소통 그리고 나눔을 즐기는 축제의 장으로 수륙재는 의미를 확장하고 있다.

진관사 회주 계호 스님은 “수륙재는 죽은 이들을 위한 극락왕생은 물론이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업장의 굴레에서 탈피해 큰 공덕과 무한한 이익을 지니고 있는 환희로운 큰 법연의 자리”라며 “수륙재는 수륙무차평등대재라 한다. 망자는 왕생극락하고 산 자는 생전 안락을 느끼길 바란다”고 했다.

이어 스님은 “올해 여러 큰 법사 스님들을 모시고 법석을 연다. 수륙재로 모두가 행복하고 평안하고 공덕을 함께 쌓고 느끼길 바라며, 코로나와 경제 등 어려울 때 함께 더불어 안정하고 소통 화합하는 자리가 되길 바란다”며 “생활이 수행이고 염불이 수행이다. 좋은 생각으로 육바라밀 왕생가를 염하면서 우리 모두 소통하고 화합하길 바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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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자씨 2022-08-31 00:58:04
고려 조선시대 남여차별 시대예 여자중들이. 뭔 수륙대재 ?
게호야 부패중과. 무슨거래. ? ::진관사 승복입은여자외 신도들 에게. 검은 집굉괴. 그림자굉을 보내고 거래한 게호에게는 상반신붕대광을 보내고. 애국자인 스님도 역시 책임질것을. 말씀드립니다 종범이도 역시 부패증. 게호아 옌날 고산이데려다 가마태우고 별짓다했지. 계호야. 수행시 난제인:성문제 극복수기좀 부탁합니다. 거기부패한ㅇ자들 모두 읽어쥐고맙습니다

아자씽 2022-08-29 02:17:40
게호야. 자네 부패중괴ㆍ. 옌날. 거래했지. 환속하세요. 얼글 개기름 쫙악. 고산이랑도. 환속하길 바람. 그리고 성적인것 어떻게 처리했는징?

아자씨 2022-08-29 02:04:49
얼굴에. 개기름. :개호야 즈즈즈. 자네 신도들도.

아자씨 2022-08-29 02:01:14
개호야. 니 얘기는. 불보살이. 또라이란 얘기자. 그럼 불보살이 또라이니. 니 그렇게 대할게. ㄱ호야. :고러 조선에 니같은 증님. 없습니다. 자네. 몸종. 땡중. 개호야 : 니같읏. 부패여여중땜 불교 이렇게. 계호야. 수행시: 성장애 어떻 게 해결.

아자씨 2022-08-29 01:52:15
개호야. 불만. 이의있으면. 제기해
자네와 신도들 모두 법호불께 고발당함
쓸ㄷㅔ없는이야기. 노. 그리고. 개호야 자네 어떻게 수행했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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