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불교교류 비망록 이제, 다시 본다] 31. 2007년 신계사 공동낙성식
[남북불교교류 비망록 이제, 다시 본다] 31. 2007년 신계사 공동낙성식
  • 이지범 북한불교연구소 소장
  • 승인 2022.07.25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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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불교, 법맥을 되찾다”

사라졌던 금강산 신계사가 최종 복원됐다. 1951년 6월 미국 극동공군의 폭격으로 말미암아 소실된 외금강 신계사는 56년 만에 그 위용을 드러냈다. 금강산관광의 새로운 명소로도 자리했다. 이젠, 찾아갈 수 없는 금단의 땅에 신계사 당우만이 덩그렇게 남았다. 2008년 말부터 북측의 진각 대사가 신계사 관리인(주지)을 맡아 홀로 머물면서 간혹 찾아오는 외국인 내방객을 맞고 있다.

한때 신기루처럼 열렸던 금강산관광은 심지어 정치공학적인 남북관계에서도 일종의 소도(蘇塗)와 같은 해방된 지역이었다. 북측이 예외 규정을 적용할 만큼 특례지역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다양한 관광상품이 개발돼 금강산 관광객은 2005년 6월에 누적 관광객 100만 명을 돌파했다. 남측 관세청이 남북왕래 시 통관절차를 간소화하겠다는 조치로, 금강산관광은 2008년 상반기까지 황금기를 맞았다.

그런데 금강산관광은 그리 순탄하지 못했다. 2006년 11월 18일 금강산문화회관에서 열린 금강산관광 8돌 기념식에서 남측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정세현 상임의장은 1998년 당시 자신이 “금강산관광을 ‘햇볕정책의 옥동자’라고 비유한 데 대해 일부 남측언론이 옥동자는 사산(死産)될 수도 있고, 돌을 못 넘길 수도 있다고 집중포화를 퍼부었던 일”을 회고할 정도였다.

그때 윤만준 현대아산 사장은 기념사에서 “또다시 금강산관광에 대한 폄하와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관광객의 발길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라며, 그는 “금강산관광은 남북화해와 협력의 상징이고 불씨이다. 금강산이 있는 한 현대아산의 맥박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라고 다짐하기도 했다. 북측 명승지종합개발회사 장우영 사장도 축사에서 “1998년 11월 18일 남녘 동해항에서 출항의 고동을 올린 첫 관광 배가 분열과 대결의 장벽을 넘어 드디어 11월 19일 여기 금강산 고성항에 닻을 내린 지 어느덧 8년이 되었다. 금강산은 비단의 자연의 명승지로서뿐만 아니라 민족통일의 명소로서도 그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 명승지에 새로 복원된 신계사는 금강산관광의 완충지대를 이루었다. 금강산 신계사를 통한 교류는 2003년 4월 사스(SARS) 전염병으로 관광이 2개월 동안 중단된 때에도, 2008년 7월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건이 발생한 때에도 실낱같은 통로였다.

하지만 금강산관광에 의한 신계사는 대중적 평가만 있었을 뿐. 조선불교의 상징이던 금강산 불교의 법맥을 되찾은 의의에 관한 평가는 아직 정리되지 않고 있다. 그 첫걸음을 다시 내딛는 심정으로, 외금강 신계사 남북공동 낙성식에 대해 살펴본다.

오늘날 외금강산 신계사와 관음련봉 운해. 사진=KOREA(2020년 2월호)





외금강산 신계사 옛 사진(1930년대 만세루와 최승전, 귀리밭 풍경). 사진=국가기록원 자료 사진.



남북불교, 신계사를 낙성하다

금강산 신계사는 내금강 장안사·표훈사, 외금강 유점사와 함께 금강산의 4대 고찰이다. 또 8세기경에 조성된 신계사 3층 석탑은 장련사 터 삼층석탑과 정양사 삼층석탑과 함께 금강산의 3대 옛 탑으로 불린다. 그 유래는 조선총독부가 설립했던 만철경성철도국이 1924년에 발행한 《만이천봉조선금강산》에서 “금강산 중에 4대 사찰은 유점사·장안사·표훈사·신계사”라고 기록해 처음 불렸다. 이 책에는 신계사의 점심 대중공양 장면을 일본의 정진요리와 비슷하다고 소개했다.

신라 보운조사가 519년에 개창한 신계사는 원래 신라의 신(新) 자를 따서 붙였다. 1530년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신계사(新溪寺)’라 적었다. 643년 김유신 장군의 원찰로 중창과 679년 신라 왕실 지원으로 대찰이 됐다. 그때부터 민간에는 사찰 앞 “신계천에는 물고기가 많았는데, 살생으로 성역을 더럽힌다고 하여 보운대사가 용왕에게 부탁하여 이곳의 물고기를 다른 곳에 가서 살도록 하였다는 전설이 생기면서 신(神)이라는 글자를 쓰게 되었다.”고 전한다.

고려 때에는 918년 법인국사가 중수하고, 1130년에 묘청이 중건하였으며, 1332년에는 우심이 중수했다. 조선시대에는 1452년에 해파가 중건하고, 1485년에는 지료가 중수하였으며, 1531년에는 유환이 중건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서산과 사명대사는 승병을 주둔시켰으며, 전쟁 때 불타버린 절은 1614년 강원 감사를 지낸 황근중의 시주로 1597년에 다시 중건했다. 그 시기 나운·대은·대응 선사 등이 머물면서 후학을 양성했다. 1835년에는 조정으로부터 모연금을 받아 절 전체를 중수하는 등 왕실 원찰이었다. 1887년에는 대웅전을 중창하고 영산전을 옮겨지었으며, 1893년 칠성각을 중수했다. 1919년에 김우화가 최승전을 건립하는 등 11동의 가람을 이루었다. 1922년 12월 용화전이 불타버렸고, 1929년에 만세루를 중건하였으나 그 뒤 화재로 소실됐다. 1945년경에는 반야보전·나한전·칠성각과 앞마당에 석탑 1기가 남아 있었다.​

조선총독부가 1909년 10월 발행한 《사찰고》에 신계사(神溪寺)는 신라 법흥왕 때 창건되어 경순왕 때에 중건하고, 1725년 11월에 중수, 1788년 3월에 장헌세자 위패를 봉안했다. 그 위패는 1901년 장조(사도세자) 황제로 추존했다. 주지 해송우봉과 비구 42명, 비구니 8명이 머무는 것으로 기록했다. 1929년 2월까지 중수와 중창을 거듭한 신계사는 5전 4각 1루의 10여 채 건물이 있다고, 1942년에 김탄월 대사가 쓴 《유점사본말사지》에 전한다. 해방 후에는 1947년 9월 김정숙 동지와 1948년 10월 김일성 주석이 신계사를 방문한 다음, 1949년 ‘외금강역사박물관’으로 지정되고, 혹은 신계사특수박물관으로 불리다가 1951년 6월 미 공군의 폭격으로 전소됐다.

그로부터 신계사는 외금강 신계천변에 자리한 창터 솔밭에 고요히 잠든 절터였다. 북측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가 1974년 봄에 학술조사를 벌이면서 다시 깨어났다. 1973년 8월 금강산을 찾은 김일성 주석의 교시로 신계사 터 입구에 세워졌던 안내판목에는 ② 신계사 터에 있는 주춧돌과 계단들을 파내거나 다른데 이용하지 말 것, ③ 탑 주변을 파거나 손상시키는 일이 없도록 할 것, ④ 신계사 터 주변에서 소·양·염소들을 매거나 방목시키는 일이 없도록 할 것, ⑤ 신계사 터 주변에서 나무를 훼손하지 말 것 등 7가지 항목으로 터의 관리와 보존에 대해 적었다. 2001년 11월 말까지도 신계사 터에 세워져 있던 ‘신계사 터 주의사항’이란 나무안내판을 기억하는 이가 드물다.

외금강 신계사 터에는 1999년 1월 1일 평불협 중앙회의 새해맞이 법회를 시작으로 같은 해 6월 3일 신계사 터에서 남측 8개 불교종단 1,076명이 합동법회를 가지면서 법음이 울려 퍼졌다. 2001년 11월 2일~10일까지 대한불교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민추본)와 문화유산발굴조사단이 처음 실행한 ‘금강산 신계사지 지표조사’를 통해 북녘 밖으로 알려졌다.

신계사 남북공동 복원사업은 2002년 12월 22일 중국 베이징 평양관에서 남측 조계종단과 북측 조불련이 ‘금강산 신계사 복원불사에 관한 의향서’에 합의하고, 이듬해 2월 10일 베이징 평양관에서 신계사 복원불사 서명본을 교환하면서 시작됐다. 남북공조에 의한 사찰 복원사업은 2004년 4월 6일 낮 12시 금강산 신계사 터에서 대웅전 착공식을 거행한 후 2년 6개월에 걸쳐 추진, 완료됐다.

이로써 한반도의 동녘에 외금강 신계사, 서녘에 개성 영통사(2005.10.31. 준공)가 해방과 분단 이후, 남북공조에 의한 복원을 이루면서 불교의 전통 법맥이 남북으로 이어지게 됐다. 근세기에 경허·수월·영호·백용성·한용운·효봉·한암·성철 선사의 행적을 비롯한 학림 박태화·금산 황병준 등 조불련 승려들과 김도안 평불협 미주본부 회장·평불협 태경 선사, 서정대·김법장·이지관·오고산·송월주 조계종 총무원장과 김능관 조계종 사회부장, 민추본 도각·성묵선사, 조계종중앙신회 백창기 초대회장과 선진규·구자선 고문 등 이름 없는 남북한 출재가들이 신계사에 길상초를 깔아놓고 열반에 들고, 타계했다.



외금강산 신계사 남북공동 복원 제막식(2007.10.13.). 사진=금강산신계사복원불사 백서(2009년)





외금강산 신계사 남북공동 복원 낙성식(2007.10.13.). 사진=통일시대(2019년 8월호)



미륵도량 신계사, 옛 모습으로

국보유적 제95호 외금강산 신계사는 강원도 고성군 외금강면 창대리가 현주소다. 외금강 온정리에서 옥류동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신계사는 외금강의 신계천 중하류에 형성된 천연기념물 제416호 창터솔밭 안쪽에 자리하고 있다. 세존봉을 진산으로 좌측에 문필봉, 앞쪽에 관음연봉과 집선봉·채하봉 등 외금강의 봉우리가 둘러싼 곳으로, 상팔담과 구룡연 폭포·옥류동 계곡을 따라 동쪽으로 흐르는 신계천을 앞에 둔 미륵도량이다.

그것은 1919년에 해강 김규진이 쓴 것으로, 일본인 석공 스즈키 긴지로가 그라인더 공법으로 구룡연 폭포 바위에 새긴 ‘미륵불’ 각화불사를 신계사 주지가 주도했다는 사실이다. 구룡연 좌측면에 음각한 총길이 19.4m, 폭 3.6m의 미륵불 큰 글자(大字)이다. 그리고 1929년에 신도 유경화가 180석의 토지를 신계사 미륵선원에 시주했다는 점으로 보아 신계사의 신앙 형태를 유추할 수 있다.

오지 않는 미륵불을 기다리던 외금강 신계사는 지난 6.25 전쟁의 화마를 피하지 못한 채 창터 솔밭의 잠자는 유적으로 불렸다. 총탄 자욱이 남은 만세루의 사각 돌기둥과 공덕비, 3층 석탑과 돌계단만이 신계사의 옛 영화를 나타냈다. 흔적은 1974년 북측 학술조사와 2001년 남측의 지표조사를 통해 확인됐다. 그 절터에 사람들이 자꾸 찾게 되면서 2004년 4월 6일에는 금강산 신계사 복원 착공식이 열렸다. 2년 6개월 동안, 전각·단청을 포함한 총공사비 53억원+⍺가 들어간 신계사 복원사업은 콘크리트 건축기법으로 북측이 주도한 개성 영통사와 달리 남측에서 목재 가공을 한 다음, 육로 운반을 통해 현지에서 목재조립의 옛 방식으로 건립됐다. 2004년 대웅보전을 시작으로 만세루·최승전·산신각·3층탑을 2005년에 복원했다. 극락전과 칠성각·종각·축성전(명부전)·나한전·어실각·어실각 대문을 2006년에, 수승전·수각·창고·해우소 등 2007년까지 총 16동 건물이 새로 들어섰고, 석축까지도 새로 마쳤다.

이를 기념하는 남북공동 복원 기념행사는 2007년 10월 12일 오후 4시 30분부터 1시간가량 대웅전·극락전·명부전(축성전)·나한전에 관한 점안식을 세민 법주에 의해 시작했다. 이튿날인 10월 13일 오전 9시~10시 30분에는 이지관 조계종 총무원장을 비롯한 남측 312명, 현대아산 사장 외 10여 명, 북측 유영선 조불련위원장·심상진 부위원장 외 3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공동낙성식이 열렸다. 남측 성묵 민추본 사무처장과 조불련 류인명 책임부원의 공동사회로 헌향·헌화·경과보고·봉행사·축사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이지관 조계종 총무원장의 봉행사에 이어 남측의 문화재청장 등과 북측의 조불련 유영선 위원장·김석환 문화보존지도국 관리국장이 축사를 했다. 이어 만세루 앞마당에서 ‘금강산 신계사’ 편액 남북공동 제막식을 남측 53명과 북측 13명이 가졌다. 종각에서는 남북공동 조국통일기원 범종 5타를 남측 12명과 북측 11명이 함께 타종해 첫 범종 소리가 신계 가람에 가득했다.

이어 신계사 대웅전 앞 돌계단에서 기념촬영을 가진 후, 오전 11시부터 만세루에서 ‘금강산 신계사 복원기념 남북 낙성식에 건축역사학자 학술발표회’를 열었다. 지관 총무원장과 유영선 위원장의 인사말과 남북측의 격려사에 이어 남북 학자들이 주제발표를 했다. 북측 조선문화보존사 리기웅 실장은 ‘고건축 복원에서 력사주의 원칙을 지키는 데서 나서는 몇 가지 문제’를, 동 보존사의 변룡문 연구사는 ‘우리나라 단청장식에 대하여’를 발표했다. 그날 저녁 6시 30분 외금강호텔에서는 2007 금강산 신계사 복원기념 남북(북남)공동 만찬이 개최됐다. 남측 고병숙·윤선옥 신계사 자원봉사자를 비롯한 외금강호텔 리형균·박순복 등에 대한 공포패 전달과 북측의 서철민 조불련 평양시위원회 위원·차금철 조불련 책임부원·고철균 문화보존지도국 책임부원에게도 감사패가 수여됐다.

2004년 11월 11일 조계종 승려 제정은 신계사 복원 현지에 상주하는 남측 도감으로 파견됐다가 2007년 11월 14일 신계사에서 공식 철수했다. 이 무렵 조계종단은 2007년 10월부터 신계사 남북공동 운영 및 승려 상주 문제를 조불련과 협의했으나, 양측 견해차로 합의점에 이르지 못했다. 2008년 2월 18일부터 3일간 금강산호텔에서 조불련과 신계사 운영 및 2차 지원에 대해 협의했지만 결렬됐다. 이에 남측 신계사복원추진위원회는 그해 2월 25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회의실에서 회의를 개최하고, “처음 신계사 복원 문제를 논의할 때, 복원 후 운영 부분을 살피지 못한 것은 분명 잘못이라면서 북측에서 태도 변화가 없는 이상 우리가 반복적으로 신계사 문제를 거론할 경우 구차해질 뿐”이라며 대북 강경 입장으로 선회하면서 교류 단절을 예고하는 한편, 동 위원회의 해산도 이날 결정됐다. 하지만 “진정한 통일의 초석은 북측 사람들의 생활에 도움을 주는 것”이라는 지관 조계종 총무원장의 마지막 말씀을 기억해두자.

#다음 편은 ‘2008년 금강산관광 중단사태’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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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외금강산 신계사와 관음련봉 운해. 사진=KOREA(2020년 2월호)
외금강산 신계사 옛 사진(1930년대 만세루와 최승전, 귀리밭 풍경). 사진=국가기록원 자료 사진.
외금강산 신계사 옛 사진(1930년대 만세루와 최승전, 귀리밭 풍경). 사진=국가기록원 자료 사진.

남북불교, 신계사를 낙성하다

금강산 신계사는 내금강 장안사·표훈사, 외금강 유점사와 함께 금강산의 4대 고찰이다. 또 8세기경에 조성된 신계사 3층 석탑은 장련사 터 삼층석탑과 정양사 삼층석탑과 함께 금강산의 3대 옛 탑으로 불린다. 그 유래는 조선총독부가 설립했던 만철경성철도국이 1924년에 발행한 《만이천봉조선금강산》에서 “금강산 중에 4대 사찰은 유점사·장안사·표훈사·신계사”라고 기록해 처음 불렸다. 이 책에는 신계사의 점심 대중공양 장면을 일본의 정진요리와 비슷하다고 소개했다.

신라 보운조사가 519년에 개창한 신계사는 원래 신라의 신(新) 자를 따서 붙였다. 1530년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신계사(新溪寺)’라 적었다. 643년 김유신 장군의 원찰로 중창과 679년 신라 왕실 지원으로 대찰이 됐다. 그때부터 민간에는 사찰 앞 “신계천에는 물고기가 많았는데, 살생으로 성역을 더럽힌다고 하여 보운대사가 용왕에게 부탁하여 이곳의 물고기를 다른 곳에 가서 살도록 하였다는 전설이 생기면서 신(神)이라는 글자를 쓰게 되었다.”고 전한다.

고려 때에는 918년 법인국사가 중수하고, 1130년에 묘청이 중건하였으며, 1332년에는 우심이 중수했다. 조선시대에는 1452년에 해파가 중건하고, 1485년에는 지료가 중수하였으며, 1531년에는 유환이 중건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서산과 사명대사는 승병을 주둔시켰으며, 전쟁 때 불타버린 절은 1614년 강원 감사를 지낸 황근중의 시주로 1597년에 다시 중건했다. 그 시기 나운·대은·대응 선사 등이 머물면서 후학을 양성했다. 1835년에는 조정으로부터 모연금을 받아 절 전체를 중수하는 등 왕실 원찰이었다. 1887년에는 대웅전을 중창하고 영산전을 옮겨지었으며, 1893년 칠성각을 중수했다. 1919년에 김우화가 최승전을 건립하는 등 11동의 가람을 이루었다. 1922년 12월 용화전이 불타버렸고, 1929년에 만세루를 중건하였으나 그 뒤 화재로 소실됐다. 1945년경에는 반야보전·나한전·칠성각과 앞마당에 석탑 1기가 남아 있었다.​

조선총독부가 1909년 10월 발행한 《사찰고》에 신계사(神溪寺)는 신라 법흥왕 때 창건되어 경순왕 때에 중건하고, 1725년 11월에 중수, 1788년 3월에 장헌세자 위패를 봉안했다. 그 위패는 1901년 장조(사도세자) 황제로 추존했다. 주지 해송우봉과 비구 42명, 비구니 8명이 머무는 것으로 기록했다. 1929년 2월까지 중수와 중창을 거듭한 신계사는 5전 4각 1루의 10여 채 건물이 있다고, 1942년에 김탄월 대사가 쓴 《유점사본말사지》에 전한다. 해방 후에는 1947년 9월 김정숙 동지와 1948년 10월 김일성 주석이 신계사를 방문한 다음, 1949년 ‘외금강역사박물관’으로 지정되고, 혹은 신계사특수박물관으로 불리다가 1951년 6월 미 공군의 폭격으로 전소됐다.

그로부터 신계사는 외금강 신계천변에 자리한 창터 솔밭에 고요히 잠든 절터였다. 북측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가 1974년 봄에 학술조사를 벌이면서 다시 깨어났다. 1973년 8월 금강산을 찾은 김일성 주석의 교시로 신계사 터 입구에 세워졌던 안내판목에는 ② 신계사 터에 있는 주춧돌과 계단들을 파내거나 다른데 이용하지 말 것, ③ 탑 주변을 파거나 손상시키는 일이 없도록 할 것, ④ 신계사 터 주변에서 소·양·염소들을 매거나 방목시키는 일이 없도록 할 것, ⑤ 신계사 터 주변에서 나무를 훼손하지 말 것 등 7가지 항목으로 터의 관리와 보존에 대해 적었다. 2001년 11월 말까지도 신계사 터에 세워져 있던 ‘신계사 터 주의사항’이란 나무안내판을 기억하는 이가 드물다.

외금강 신계사 터에는 1999년 1월 1일 평불협 중앙회의 새해맞이 법회를 시작으로 같은 해 6월 3일 신계사 터에서 남측 8개 불교종단 1,076명이 합동법회를 가지면서 법음이 울려 퍼졌다. 2001년 11월 2일~10일까지 대한불교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민추본)와 문화유산발굴조사단이 처음 실행한 ‘금강산 신계사지 지표조사’를 통해 북녘 밖으로 알려졌다.

신계사 남북공동 복원사업은 2002년 12월 22일 중국 베이징 평양관에서 남측 조계종단과 북측 조불련이 ‘금강산 신계사 복원불사에 관한 의향서’에 합의하고, 이듬해 2월 10일 베이징 평양관에서 신계사 복원불사 서명본을 교환하면서 시작됐다. 남북공조에 의한 사찰 복원사업은 2004년 4월 6일 낮 12시 금강산 신계사 터에서 대웅전 착공식을 거행한 후 2년 6개월에 걸쳐 추진, 완료됐다.

이로써 한반도의 동녘에 외금강 신계사, 서녘에 개성 영통사(2005.10.31. 준공)가 해방과 분단 이후, 남북공조에 의한 복원을 이루면서 불교의 전통 법맥이 남북으로 이어지게 됐다. 근세기에 경허·수월·영호·백용성·한용운·효봉·한암·성철 선사의 행적을 비롯한 학림 박태화·금산 황병준 등 조불련 승려들과 김도안 평불협 미주본부 회장·평불협 태경 선사, 서정대·김법장·이지관·오고산·송월주 조계종 총무원장과 김능관 조계종 사회부장, 민추본 도각·성묵선사, 조계종중앙신회 백창기 초대회장과 선진규·구자선 고문 등 이름 없는 남북한 출재가들이 신계사에 길상초를 깔아놓고 열반에 들고, 타계했다.

외금강산 신계사 남북공동 복원 제막식(2007.10.13.). 사진=금강산신계사복원불사 백서(2009년)
외금강산 신계사 남북공동 복원 제막식(2007.10.13.). 사진=금강산신계사복원불사 백서(2009년)
외금강산 신계사 남북공동 복원 낙성식(2007.10.13.). 사진=통일시대(2019년 8월호)
외금강산 신계사 남북공동 복원 낙성식(2007.10.13.). 사진=통일시대(2019년 8월호)

미륵도량 신계사, 옛 모습으로

국보유적 제95호 외금강산 신계사는 강원도 고성군 외금강면 창대리가 현주소다. 외금강 온정리에서 옥류동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신계사는 외금강의 신계천 중하류에 형성된 천연기념물 제416호 창터솔밭 안쪽에 자리하고 있다. 세존봉을 진산으로 좌측에 문필봉, 앞쪽에 관음연봉과 집선봉·채하봉 등 외금강의 봉우리가 둘러싼 곳으로, 상팔담과 구룡연 폭포·옥류동 계곡을 따라 동쪽으로 흐르는 신계천을 앞에 둔 미륵도량이다.

그것은 1919년에 해강 김규진이 쓴 것으로, 일본인 석공 스즈키 긴지로가 그라인더 공법으로 구룡연 폭포 바위에 새긴 ‘미륵불’ 각화불사를 신계사 주지가 주도했다는 사실이다. 구룡연 좌측면에 음각한 총길이 19.4m, 폭 3.6m의 미륵불 큰 글자(大字)이다. 그리고 1929년에 신도 유경화가 180석의 토지를 신계사 미륵선원에 시주했다는 점으로 보아 신계사의 신앙 형태를 유추할 수 있다.

오지 않는 미륵불을 기다리던 외금강 신계사는 지난 6.25 전쟁의 화마를 피하지 못한 채 창터 솔밭의 잠자는 유적으로 불렸다. 총탄 자욱이 남은 만세루의 사각 돌기둥과 공덕비, 3층 석탑과 돌계단만이 신계사의 옛 영화를 나타냈다. 흔적은 1974년 북측 학술조사와 2001년 남측의 지표조사를 통해 확인됐다. 그 절터에 사람들이 자꾸 찾게 되면서 2004년 4월 6일에는 금강산 신계사 복원 착공식이 열렸다. 2년 6개월 동안, 전각·단청을 포함한 총공사비 53억원+⍺가 들어간 신계사 복원사업은 콘크리트 건축기법으로 북측이 주도한 개성 영통사와 달리 남측에서 목재 가공을 한 다음, 육로 운반을 통해 현지에서 목재조립의 옛 방식으로 건립됐다. 2004년 대웅보전을 시작으로 만세루·최승전·산신각·3층탑을 2005년에 복원했다. 극락전과 칠성각·종각·축성전(명부전)·나한전·어실각·어실각 대문을 2006년에, 수승전·수각·창고·해우소 등 2007년까지 총 16동 건물이 새로 들어섰고, 석축까지도 새로 마쳤다.

이를 기념하는 남북공동 복원 기념행사는 2007년 10월 12일 오후 4시 30분부터 1시간가량 대웅전·극락전·명부전(축성전)·나한전에 관한 점안식을 세민 법주에 의해 시작했다. 이튿날인 10월 13일 오전 9시~10시 30분에는 이지관 조계종 총무원장을 비롯한 남측 312명, 현대아산 사장 외 10여 명, 북측 유영선 조불련위원장·심상진 부위원장 외 3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공동낙성식이 열렸다. 남측 성묵 민추본 사무처장과 조불련 류인명 책임부원의 공동사회로 헌향·헌화·경과보고·봉행사·축사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이지관 조계종 총무원장의 봉행사에 이어 남측의 문화재청장 등과 북측의 조불련 유영선 위원장·김석환 문화보존지도국 관리국장이 축사를 했다. 이어 만세루 앞마당에서 ‘금강산 신계사’ 편액 남북공동 제막식을 남측 53명과 북측 13명이 가졌다. 종각에서는 남북공동 조국통일기원 범종 5타를 남측 12명과 북측 11명이 함께 타종해 첫 범종 소리가 신계 가람에 가득했다.

이어 신계사 대웅전 앞 돌계단에서 기념촬영을 가진 후, 오전 11시부터 만세루에서 ‘금강산 신계사 복원기념 남북 낙성식에 건축역사학자 학술발표회’를 열었다. 지관 총무원장과 유영선 위원장의 인사말과 남북측의 격려사에 이어 남북 학자들이 주제발표를 했다. 북측 조선문화보존사 리기웅 실장은 ‘고건축 복원에서 력사주의 원칙을 지키는 데서 나서는 몇 가지 문제’를, 동 보존사의 변룡문 연구사는 ‘우리나라 단청장식에 대하여’를 발표했다. 그날 저녁 6시 30분 외금강호텔에서는 2007 금강산 신계사 복원기념 남북(북남)공동 만찬이 개최됐다. 남측 고병숙·윤선옥 신계사 자원봉사자를 비롯한 외금강호텔 리형균·박순복 등에 대한 공포패 전달과 북측의 서철민 조불련 평양시위원회 위원·차금철 조불련 책임부원·고철균 문화보존지도국 책임부원에게도 감사패가 수여됐다.

2004년 11월 11일 조계종 승려 제정은 신계사 복원 현지에 상주하는 남측 도감으로 파견됐다가 2007년 11월 14일 신계사에서 공식 철수했다. 이 무렵 조계종단은 2007년 10월부터 신계사 남북공동 운영 및 승려 상주 문제를 조불련과 협의했으나, 양측 견해차로 합의점에 이르지 못했다. 2008년 2월 18일부터 3일간 금강산호텔에서 조불련과 신계사 운영 및 2차 지원에 대해 협의했지만 결렬됐다. 이에 남측 신계사복원추진위원회는 그해 2월 25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회의실에서 회의를 개최하고, “처음 신계사 복원 문제를 논의할 때, 복원 후 운영 부분을 살피지 못한 것은 분명 잘못이라면서 북측에서 태도 변화가 없는 이상 우리가 반복적으로 신계사 문제를 거론할 경우 구차해질 뿐”이라며 대북 강경 입장으로 선회하면서 교류 단절을 예고하는 한편, 동 위원회의 해산도 이날 결정됐다. 하지만 “진정한 통일의 초석은 북측 사람들의 생활에 도움을 주는 것”이라는 지관 조계종 총무원장의 마지막 말씀을 기억해두자.

#다음 편은 ‘2008년 금강산관광 중단사태’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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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범
경북 경주 출생으로 1984년부터 불교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참여하다가 1990년 초, 법보종찰 해인사에 입산 환속했다. 1994년부터 남북불교 교류의 현장 실무자로 2000년부터 평양과 개성·금강산 등지를 다녀왔으며, 현재는 평화통일불교연대 운영위원장과 북한불교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남북불교 교류 60년사’ 등과 논문으로 ‘북한 주민들의 종교적 심성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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