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불교교류 비망록 이제, 다시 본다] 30. 2007년 남북정상회담
[남북불교교류 비망록 이제, 다시 본다] 30. 2007년 남북정상회담
  • 이지범 북한불교연구소 소장
  • 승인 2022.07.13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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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만난 사람들”

참여정부는 2007년 10월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을 가졌다. 국민과 함께 하는 민주주의, 더불어 사는 균형 발전 사회,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아 시대 등을 국정 목표로 제시한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는 임기 막바지에 교류의 물꼬를 열었다.

1950년 전쟁 이후, 남측 대통령이 경기도 파주 도라산 관측초소에서 최초로 군사분계선(분리선)을 넘어 육로 방북을 했다. “저는 이번에 대통령으로서 이 금단의 선을 넘어갑니다. 제가 다녀오면 더 많은 사람이 다녀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마침내, 이 금단의 선도 점차 지워질 것입니다. 장벽은 무너질 것입니다. 저의 이번 걸음이 금단의 벽을 허물고, 민족의 고통을 해소하고, 그동안 당해왔던 우리 민족의 그 많은 고통을 이제 넘어서서 평화와 번영의 길로 가는 그런 계기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라는 고 노무현 대통령의 2007년 10월 2일 방북길에 앞선 인사말은 세계 뉴스의 시선을 남측의 DMZ로 모았다. 그 첫날 9시 5분에는 하나의 땅을 두 개의 나라로 가른 하나의 노랑선, 분단 증거인 금단의 선을 대한민국 대통령이 처음으로 걸어서 넘은 명장면이 탄생했다.

그해 8월 북측의 수해로 연기된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는 노무현 대통령 내외를 비롯한 공식·실무·특별수행원 300명이 평양-개성 고속도로를 통해 방문했다, 같은 해 2~4일 평양에서 열린 정상회담은 애초 200명이던 남측대표단 규모가 300명으로 늘어났다. 이유는 정상회담 행사 진행에 필수적인 만찬 관계자·차량 운전원·중계기술 인원 98명이 별도 인원으로 방북하는 데에 따른 합의가 있었다. 당시 문화체육관광부의 《정책브리핑》을 보면, 공식 수행원은 13명으로 회담에 참여한 장관급이었다. 공식행사 등에 참가하는 정치·경제·사회문화·여성 4대 부문 7개 분야의 49명 특별수행원에는 지관 조계종 총무원장을 비롯한 4명의 종교계 인사도 함께했다.

방북대표단의 간사장과 분야별 간사도 지정된 특별수행원들은 분야별로 회담 기간 중 북측 관련분야 대표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이외에도 청와대·통일부·국정원 등 실무진으로 구성된 88명의 일반수행원과 정상회담을 취재한 50명의 방북기자단이 동행했다. ‘2007 남북정상회담’ 수행원에 대한 남측 정부의 선발기준은 정상회담의 특수성을 감안해 역할과 기능별로 효율적 보좌가 가능한 인원으로 선발 원칙을 정했다. 하지만 기타 수행원은 아예 없었으며, 논의한 적도 없었다.

‘한반도 평화경제 시대를 연다.’라는 상위 목표를 위한 남북정상회담에서 꿈의 대화를 나누었던 두 분은 이제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꿈꾸고 말했던 그 날의 현장을 찾아본다. 이때 동행으로 맺어진 남북불교의 인연과 2007년 한 해 동안 평양을 오가면서 열린 남북교류의 주요 내용을 다시 살펴본다.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첫 만남(2007.10.2. 평양 4.25문화회관 광장). 사진=뉴욕타임스(2018.4.26.)





평양 백화원초대소 영빈관 환송오찬(2007.10.4. 김정일 국방위원장, 지관 조계종 총무원장, 안경호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장, 문정인 연세대 교수). 출처=노무현재단 홈페이지



평양 남북정상회담의 여정

고 노무현 대통령은 평양에서 정상회담이 확정된 가운데, 2007년 9월 25일 오전에 쓴 방명 문안으로 ‘평화를 다지는 길, 번영으로 가는 길’이라 표명했다. 그리고 10월 2일 방명록에 똑같이 적었다. 그 이유에 대해 “김대중 대통령께서 이미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셨고 많은 평화통일정책을 실행하셨는데, 내가 평화를 연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당신의 역할은 ‘평화를 다지는 것’이라 말했다고,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의 <노무현 사료관>에 전한다.

그해 10.4 남북정상회담은 10월 2일~4일까지 평양 4·25문화회관과 백화원초대소, 목란관, 대동강 릉라도의 5.1경기장 등과 남포 서해갑문 그리고 개성공단에서 펼쳐진 여정이다.

당시의 예상을 깨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7년 10월 2일 정오, 평양 4·25문화회관 앞에서 찾아온 노무현 대통령 일행을 맞이하는 공식 환영식을 열었다.

일정 둘째 날인 10월 3일 9시 30분 양측 정상은 소수의 배석자를 대동하고 백화원초대소에서 회담을 뒀고, 일정 마지막 날인 10월 4일 양측은 6.15 남북공동선언에 기초해 남북의 평화와 번영을 목표로 한 ‘2007 남북정상선언문’을 채택했다.

둘째 날의 회담에 앞서 노무현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나전칠기 병풍과 드라마와 영화 DVD, 팔도특산 차 세트를 선물했고, 김정일 위원장은 500상자의 북측 송이를 선물했다. 이후 청와대에서는 이 송이를 정치인·소록도 주민·실향민 단체 등 사회 각계각층과 나누었다.

10.4 남북공동선언이라 불리는 ‘2007 남북공동선언문’은 “쌍방은 우리민족끼리 뜻과 힘을 합치면 민족번영의 시대, 자주통일의 새 시대를 열어나 갈 수 있다는 확신을 표명하면서 6·15공동선언에 기초하여 남북관계를 확대 발전시켜 나가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라는 전문과 8개 조항에 이어 첫째로 남과 북은 이 선언의 이행을 위하여 남북 총리회담을 개최하기로 하고, 제1차 회의를 금년 11월 중 서울에서 갖기로 하였다. 둘째로 남과 북은 남북관계 발전을 위해 정상들이 수시로 만나 현안 문제들을 협의하기로 하였다는 두 개의 별항을 두었다.

이러한 도약은 10월 2일 오후 7시 평양 목란관에서 열린 공식 환영 만찬으로 시작했다. 북측의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환영사에서 “전 세계 기대가 평양으로 향하고 있다.” 또 “민족을 중시하고 힘을 합치는 여기에 일과 번영의 미래가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7년간의 교류 협력에서 우리는 신뢰를 쌓는 법을 배웠다. 그것은 바로 개성공단, 철도와 도로 연결, 금강산 관광처럼 서로 만나서 합의하고 합의한 것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으며, “우리 하기에 따라서는 동북아시아에 새로운 통합의 질서를 만드는 데도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인사말을 했다.

2시간 넘게 진행된 이날 환영 만찬은 노무현 대통령 내외분과 김 상임위원장을 비롯해 북측에서는 김영대 최고인민회의 부위원장,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최태복 조선로동당 비서, 로두철 부총리, 최창식 교육상(남한의 교육부장관), 박관호 평양시 인민위원장, 박순희 여맹위원장, 라동희 육해운상, 김용남 철도상, 권호웅 내각 참사가 자리했다. 남측에선 지관 조계종 총무원장, 한완상 대한적십자사 총재, 성경륭 청와대 정책실장, 이재정 통일부 장관, 김우식 과기부총리, 변재진 보건복지부 장관,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등이 헤드 테이블에 앉았다.

이튿날 오전부터 진행한 회담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일정을 하루 더 연기하자고 제의하는 등, 협상의 만족도를 내비친 작은 해프닝의 말들이 오갔으나 회담 일정은 당초 계획대로 진행됐다. 오후 7시 30분경엔 평양 릉라도경기장에서 아리랑 공연을 남측 대통령으로 처음 관람하고, 이어 평양 인민문화궁전의 답례 만찬에서도 노 대통령의 방북 경로와 방문에 대한 사의를 표하는 등 환영 속에 정상회담의 의미를 높였다.

방북 마지막 날인 10월 4일 오후 1시 백화원 영빈관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에 서명하고 공동 발표했다. 이어서 열린 환송 만찬에서는 김정일 위원장이 남측 공식·특별수행원과 개별 인사와 기념촬영을 가졌다. 이지관 조계종 총무원장은 분단 이후, 처음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첫 악수와 인사를 나눈 불교계의 처음이자 마지막 인사로 기록됐다. 김법장 조계종 총무원장은 2005년 6·15 평양 공동행사에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처음 만나 환담을 가진 바 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은 마지막 일정으로 남포 서해갑문을 경유, 개성공단 통해 귀경했다. 정상회담의 중요한 의제이던 경제협력에서 개성공단 방문은 남다른 의미였다. 45개 업체가 입주한 개성공단에는 2004년 주방기기를 생산하는 리빙아트가 처음 입주한 이래, 시계를 생산하는 로만손, 의류 전문업체인 신원 등 다양한 업종의 중소기업이 자리했다. 그 당시 로만손의 개성공단 법인장으로 근무한 분은 전남 장성 백양사 서옹 방장의 제자이던 승려 출신이었다고 필자가 인터뷰한 바 있다.

한때 많은 기대처럼 남과 북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내용이 담긴 2007 남북공동선언의 실천은 그해 말, 대선 정국과 맞물리면서 또 MB정부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나아가지 못했다. 더욱이 국가 정상 간 회의 내용이 공개된 것은 큰 문제인데, 2007년 10월 3일 평양 백화원초대소에서 진행된 제2차 남북정상회담 중에 오간 대화록 일부가 뜻밖에도 세상에 알려지고 말았다. 2013년 7월 25일 국회 정보위원회 회의록이 국내 언론에 공개됐다. 이 대화록에는 “정상회담에서 최종 합의 이르지 못해 공동선언이 아닌 공동보도문을 발표하려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노 대통령의 요청을 김정일 위원장이 민족에게 통일 희망과 신심을 안겨주기 위해 즉석에서 받아들였고, 그로써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라는 재미교포 정치학자인 한호석 통일학연구소장의 주장(《자주시보》 2018.3.26.)을 빼놓을 수 없다.

그간 평양엘 오갔던 사람들은 대부분 “모든 것이 잠시 멈춘 듯한 시간이었다.”고 회고한다. 외부와의 단절 그리고 휴대폰 미사용, 개별적 장소 이동이 통제되기 때문에 느끼는 착각일 수 있다. 첫 만남의 어색함은 누구나 마찬가지다. 이때 표상들은 평양에 도착한 사람들의 자세와 얼굴을 통해 감지할 수도 있다. 그때 사진과 영상자료를 통해 판독할 수 있을 만큼 평양은 낯섦과 설렘의 공간이다. 그래서 통일은 조건에 따라 이루는 것이 아니라, 희망이란 두 글자를 가지고 서로 노력하는 것이 먼저다.



2007년 6.15 민족통일대축전 개막식(평양 대성산성 남문광장, 지관 조계종 총무원장 연설). 사진=6.15공동행사 취재단





불기2551년 부처님오신날기념 조국통일기원 북남불교도 동시법회 장엄등(2007.5.24. 평양 광법사). 사진=민추본 홈페이지



평양, 명승고적을 장엄하다

국보유적 제8호 평양 대성산성 남문은 1978년에 다시 복원한 고구려 대성산성의 정문이다. 고구려 장수왕이 국내성에서 평양 안학궁으로 도읍지를 옮기면서 427년에 축성한 것으로, 안학궁성 방어를 위해 대동강 북쪽에 쌓은 산성이다. 둘레 7,076m, 성벽 총길이 9,284m, 면적은 2.723km이다.

고구려 산성중에 가장 넓은 면적을 가진 대성산성의 남문 광장은 그간 각종 민속행사가 열린 명소이다. 2007년 6.15 남북공동 행사가 열리면서 명승지로 이름을 알렸다. 그해 6월 14일 오후 5시, 이곳에서 열린 ‘6·15 공동선언 발표 7주년 기념 민족통일대축전’ 개막식에는 서해 직항로를 통해 평양에 도착한 남측 284명과 해외측 132명, 북측 300명의 대표단과 평양시민 2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2005년 6·15 공동행사 이후, 함께 해온 남측 정부대표단은 쌀 지원에 대한 유보조치 등의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다.

남북·해외 대표단이 통일기를 게양하고, 북측 취주악단의 환영 공연으로 시작한 개막식은 북측 김영대 부위원장이 “6.15 공동선언 발표 7돌 기념 민족통일대축전이 온 겨레의 기대에 맞게 성과적으로 진행하여 훌륭한 결실을 이룩함으로써 뜻깊은 올해를 민족공동의 자랑찬 승리의 해로 빛나게 장식하자.”고 축하했다. 남측 명예 대표인 지관 조계종 총무원장은 개막 축사에서 “평화와 통일은 한 몸의 두 얼굴일 뿐입니다. 동방의 산하를 한민족의 이름으로 지켜온 우리 민족을 슬기롭고 지혜롭다함도, 뭇 생명을 사랑하여 고통을 감내하는 자비의 마음 즉, 인류 본연의 숭고함을 역사의 주된 동력으로 자각하고 실천해온 결과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자주적이고 평화로운 통일에 대한 굳은 의지를 천명한 6·15공동선언은 민족의 통일을 성취함에만 그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천지간 모든 산하와 인류 간에 드리운 만유의 고통을 스스로 극복하고, 공생의 행복을 성취해가는 인간 본연의 숭고한 행위로서, 그 궁극의 의미가 있다.”라는 종교적 의미를 부여했다.

그날 남북·해외 대표단은 오후 6시 30분부터 동평양대극장에서 만수대예술단 공연을 참관했으며, 오후 8시 20분부터 인민문화궁전에서 환영연회를 가지면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대축전 이틀째인 15일 오전 10시부터 당초 본대회인 민족단합대회가 열리기로 했던 인민문화궁전에는 전날 타계한, 1993년 송환된 비전향장기수 리인모 씨의 주검이 안치돼 대회 장소가 태권도 전당로 변경되어 민족단합대회를 열고, ‘민족대단합선언’을 채택했다. 오후에는 대동강 유람선 승선과 만경대 학생소년궁전을 탐방했다. 6월 16일 오전에는 처음 평양을 방문한 이지관 조계종 총무원장을 비롯한 남측 불교대표단 20여 명과 조불련 1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평양 대성산 광법사에서 조국통일기원 합동법회를 가졌다.

이후, 그해 10월 3일 오전 10시경 평양 대성산 광법사를 다시 찾은 지관 조계종 총무원장은 참배하고, 조불련 심상진 부위원장, 정서정 서기장을 비롯한 광법사 주지 광선, 부전 수덕 대사 등과 환담을 가졌다. 또 광법사에서는 2007년 5월 24일을 기해 분단 이후, 불기(佛紀)와 부처님오신날 기념이란 명칭을 처음 붙인 ‘불기 2551년 부처님오신날 기념 조국통일기원 북남불교도 동시법회’가 열렸다. 그날 합동법회는 그해 5월 27일 평양-남포 통일자전거 경기대회 참가단 중에 진관 불교인권위원회 공동대표, 성묵 조계종 민추본 사무총장, 선진규 조계종 중앙신도회 고문을 비롯한 20여 명이 참석해 조불련과 함께 동시법회를 열었다. 또한 광법사 경내에는 봉축 연등과 등표 달기, 오색천을 처음으로 내걸어 장엄했다.

“희망이라는 것은 원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지상 위에 놓인 길과도 같은 것이다. 원래 길은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라는 근대중국의 문호 루쉰이 쓴 소설 《고향》의 마지막 문장에서 또 다른 해답을 찾아보자.

# 다음 편은 ‘2007년 금강산 신계사 낙성식’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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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첫 만남(2007.10.2. 평양 4.25문화회관 광장). 사진=뉴욕타임스(2018.4.26.)
평양 백화원초대소 영빈관 환송오찬(2007.10.4. 김정일 국방위원장, 지관 조계종 총무원장, 안경호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장, 문정인 연세대 교수). 출처=노무현재단 홈페이지
평양 백화원초대소 영빈관 환송오찬(2007.10.4. 김정일 국방위원장, 지관 조계종 총무원장, 안경호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장, 문정인 연세대 교수). 출처=노무현재단 홈페이지

평양 남북정상회담의 여정

고 노무현 대통령은 평양에서 정상회담이 확정된 가운데, 2007년 9월 25일 오전에 쓴 방명 문안으로 ‘평화를 다지는 길, 번영으로 가는 길’이라 표명했다. 그리고 10월 2일 방명록에 똑같이 적었다. 그 이유에 대해 “김대중 대통령께서 이미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셨고 많은 평화통일정책을 실행하셨는데, 내가 평화를 연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당신의 역할은 ‘평화를 다지는 것’이라 말했다고,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의 <노무현 사료관>에 전한다.

그해 10.4 남북정상회담은 10월 2일~4일까지 평양 4·25문화회관과 백화원초대소, 목란관, 대동강 릉라도의 5.1경기장 등과 남포 서해갑문 그리고 개성공단에서 펼쳐진 여정이다.

당시의 예상을 깨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7년 10월 2일 정오, 평양 4·25문화회관 앞에서 찾아온 노무현 대통령 일행을 맞이하는 공식 환영식을 열었다.

일정 둘째 날인 10월 3일 9시 30분 양측 정상은 소수의 배석자를 대동하고 백화원초대소에서 회담을 뒀고, 일정 마지막 날인 10월 4일 양측은 6.15 남북공동선언에 기초해 남북의 평화와 번영을 목표로 한 ‘2007 남북정상선언문’을 채택했다.

둘째 날의 회담에 앞서 노무현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나전칠기 병풍과 드라마와 영화 DVD, 팔도특산 차 세트를 선물했고, 김정일 위원장은 500상자의 북측 송이를 선물했다. 이후 청와대에서는 이 송이를 정치인·소록도 주민·실향민 단체 등 사회 각계각층과 나누었다.

10.4 남북공동선언이라 불리는 ‘2007 남북공동선언문’은 “쌍방은 우리민족끼리 뜻과 힘을 합치면 민족번영의 시대, 자주통일의 새 시대를 열어나 갈 수 있다는 확신을 표명하면서 6·15공동선언에 기초하여 남북관계를 확대 발전시켜 나가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라는 전문과 8개 조항에 이어 첫째로 남과 북은 이 선언의 이행을 위하여 남북 총리회담을 개최하기로 하고, 제1차 회의를 금년 11월 중 서울에서 갖기로 하였다. 둘째로 남과 북은 남북관계 발전을 위해 정상들이 수시로 만나 현안 문제들을 협의하기로 하였다는 두 개의 별항을 두었다.

이러한 도약은 10월 2일 오후 7시 평양 목란관에서 열린 공식 환영 만찬으로 시작했다. 북측의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환영사에서 “전 세계 기대가 평양으로 향하고 있다.” 또 “민족을 중시하고 힘을 합치는 여기에 일과 번영의 미래가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7년간의 교류 협력에서 우리는 신뢰를 쌓는 법을 배웠다. 그것은 바로 개성공단, 철도와 도로 연결, 금강산 관광처럼 서로 만나서 합의하고 합의한 것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으며, “우리 하기에 따라서는 동북아시아에 새로운 통합의 질서를 만드는 데도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인사말을 했다.

2시간 넘게 진행된 이날 환영 만찬은 노무현 대통령 내외분과 김 상임위원장을 비롯해 북측에서는 김영대 최고인민회의 부위원장,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최태복 조선로동당 비서, 로두철 부총리, 최창식 교육상(남한의 교육부장관), 박관호 평양시 인민위원장, 박순희 여맹위원장, 라동희 육해운상, 김용남 철도상, 권호웅 내각 참사가 자리했다. 남측에선 지관 조계종 총무원장, 한완상 대한적십자사 총재, 성경륭 청와대 정책실장, 이재정 통일부 장관, 김우식 과기부총리, 변재진 보건복지부 장관,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등이 헤드 테이블에 앉았다.

이튿날 오전부터 진행한 회담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일정을 하루 더 연기하자고 제의하는 등, 협상의 만족도를 내비친 작은 해프닝의 말들이 오갔으나 회담 일정은 당초 계획대로 진행됐다. 오후 7시 30분경엔 평양 릉라도경기장에서 아리랑 공연을 남측 대통령으로 처음 관람하고, 이어 평양 인민문화궁전의 답례 만찬에서도 노 대통령의 방북 경로와 방문에 대한 사의를 표하는 등 환영 속에 정상회담의 의미를 높였다.

방북 마지막 날인 10월 4일 오후 1시 백화원 영빈관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에 서명하고 공동 발표했다. 이어서 열린 환송 만찬에서는 김정일 위원장이 남측 공식·특별수행원과 개별 인사와 기념촬영을 가졌다. 이지관 조계종 총무원장은 분단 이후, 처음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첫 악수와 인사를 나눈 불교계의 처음이자 마지막 인사로 기록됐다. 김법장 조계종 총무원장은 2005년 6·15 평양 공동행사에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처음 만나 환담을 가진 바 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은 마지막 일정으로 남포 서해갑문을 경유, 개성공단 통해 귀경했다. 정상회담의 중요한 의제이던 경제협력에서 개성공단 방문은 남다른 의미였다. 45개 업체가 입주한 개성공단에는 2004년 주방기기를 생산하는 리빙아트가 처음 입주한 이래, 시계를 생산하는 로만손, 의류 전문업체인 신원 등 다양한 업종의 중소기업이 자리했다. 그 당시 로만손의 개성공단 법인장으로 근무한 분은 전남 장성 백양사 서옹 방장의 제자이던 승려 출신이었다고 필자가 인터뷰한 바 있다.

한때 많은 기대처럼 남과 북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내용이 담긴 2007 남북공동선언의 실천은 그해 말, 대선 정국과 맞물리면서 또 MB정부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나아가지 못했다. 더욱이 국가 정상 간 회의 내용이 공개된 것은 큰 문제인데, 2007년 10월 3일 평양 백화원초대소에서 진행된 제2차 남북정상회담 중에 오간 대화록 일부가 뜻밖에도 세상에 알려지고 말았다. 2013년 7월 25일 국회 정보위원회 회의록이 국내 언론에 공개됐다. 이 대화록에는 “정상회담에서 최종 합의 이르지 못해 공동선언이 아닌 공동보도문을 발표하려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노 대통령의 요청을 김정일 위원장이 민족에게 통일 희망과 신심을 안겨주기 위해 즉석에서 받아들였고, 그로써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라는 재미교포 정치학자인 한호석 통일학연구소장의 주장(《자주시보》 2018.3.26.)을 빼놓을 수 없다.

그간 평양엘 오갔던 사람들은 대부분 “모든 것이 잠시 멈춘 듯한 시간이었다.”고 회고한다. 외부와의 단절 그리고 휴대폰 미사용, 개별적 장소 이동이 통제되기 때문에 느끼는 착각일 수 있다. 첫 만남의 어색함은 누구나 마찬가지다. 이때 표상들은 평양에 도착한 사람들의 자세와 얼굴을 통해 감지할 수도 있다. 그때 사진과 영상자료를 통해 판독할 수 있을 만큼 평양은 낯섦과 설렘의 공간이다. 그래서 통일은 조건에 따라 이루는 것이 아니라, 희망이란 두 글자를 가지고 서로 노력하는 것이 먼저다.

2007년 6.15 민족통일대축전 개막식(평양 대성산성 남문광장, 지관 조계종 총무원장 연설). 사진=6.15공동행사 취재단
2007년 6.15 민족통일대축전 개막식(평양 대성산성 남문광장, 지관 조계종 총무원장 연설). 사진=6.15공동행사 취재단
불기2551년 부처님오신날기념 조국통일기원 북남불교도 동시법회 장엄등(2007.5.24. 평양 광법사). 사진=민추본 홈페이지
불기2551년 부처님오신날기념 조국통일기원 북남불교도 동시법회 장엄등(2007.5.24. 평양 광법사). 사진=민추본 홈페이지

평양, 명승고적을 장엄하다

국보유적 제8호 평양 대성산성 남문은 1978년에 다시 복원한 고구려 대성산성의 정문이다. 고구려 장수왕이 국내성에서 평양 안학궁으로 도읍지를 옮기면서 427년에 축성한 것으로, 안학궁성 방어를 위해 대동강 북쪽에 쌓은 산성이다. 둘레 7,076m, 성벽 총길이 9,284m, 면적은 2.723km이다.

고구려 산성중에 가장 넓은 면적을 가진 대성산성의 남문 광장은 그간 각종 민속행사가 열린 명소이다. 2007년 6.15 남북공동 행사가 열리면서 명승지로 이름을 알렸다. 그해 6월 14일 오후 5시, 이곳에서 열린 ‘6·15 공동선언 발표 7주년 기념 민족통일대축전’ 개막식에는 서해 직항로를 통해 평양에 도착한 남측 284명과 해외측 132명, 북측 300명의 대표단과 평양시민 2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2005년 6·15 공동행사 이후, 함께 해온 남측 정부대표단은 쌀 지원에 대한 유보조치 등의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다.

남북·해외 대표단이 통일기를 게양하고, 북측 취주악단의 환영 공연으로 시작한 개막식은 북측 김영대 부위원장이 “6.15 공동선언 발표 7돌 기념 민족통일대축전이 온 겨레의 기대에 맞게 성과적으로 진행하여 훌륭한 결실을 이룩함으로써 뜻깊은 올해를 민족공동의 자랑찬 승리의 해로 빛나게 장식하자.”고 축하했다. 남측 명예 대표인 지관 조계종 총무원장은 개막 축사에서 “평화와 통일은 한 몸의 두 얼굴일 뿐입니다. 동방의 산하를 한민족의 이름으로 지켜온 우리 민족을 슬기롭고 지혜롭다함도, 뭇 생명을 사랑하여 고통을 감내하는 자비의 마음 즉, 인류 본연의 숭고함을 역사의 주된 동력으로 자각하고 실천해온 결과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자주적이고 평화로운 통일에 대한 굳은 의지를 천명한 6·15공동선언은 민족의 통일을 성취함에만 그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천지간 모든 산하와 인류 간에 드리운 만유의 고통을 스스로 극복하고, 공생의 행복을 성취해가는 인간 본연의 숭고한 행위로서, 그 궁극의 의미가 있다.”라는 종교적 의미를 부여했다.

그날 남북·해외 대표단은 오후 6시 30분부터 동평양대극장에서 만수대예술단 공연을 참관했으며, 오후 8시 20분부터 인민문화궁전에서 환영연회를 가지면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대축전 이틀째인 15일 오전 10시부터 당초 본대회인 민족단합대회가 열리기로 했던 인민문화궁전에는 전날 타계한, 1993년 송환된 비전향장기수 리인모 씨의 주검이 안치돼 대회 장소가 태권도 전당로 변경되어 민족단합대회를 열고, ‘민족대단합선언’을 채택했다. 오후에는 대동강 유람선 승선과 만경대 학생소년궁전을 탐방했다. 6월 16일 오전에는 처음 평양을 방문한 이지관 조계종 총무원장을 비롯한 남측 불교대표단 20여 명과 조불련 1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평양 대성산 광법사에서 조국통일기원 합동법회를 가졌다.

이후, 그해 10월 3일 오전 10시경 평양 대성산 광법사를 다시 찾은 지관 조계종 총무원장은 참배하고, 조불련 심상진 부위원장, 정서정 서기장을 비롯한 광법사 주지 광선, 부전 수덕 대사 등과 환담을 가졌다. 또 광법사에서는 2007년 5월 24일을 기해 분단 이후, 불기(佛紀)와 부처님오신날 기념이란 명칭을 처음 붙인 ‘불기 2551년 부처님오신날 기념 조국통일기원 북남불교도 동시법회’가 열렸다. 그날 합동법회는 그해 5월 27일 평양-남포 통일자전거 경기대회 참가단 중에 진관 불교인권위원회 공동대표, 성묵 조계종 민추본 사무총장, 선진규 조계종 중앙신도회 고문을 비롯한 20여 명이 참석해 조불련과 함께 동시법회를 열었다. 또한 광법사 경내에는 봉축 연등과 등표 달기, 오색천을 처음으로 내걸어 장엄했다.

“희망이라는 것은 원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지상 위에 놓인 길과도 같은 것이다. 원래 길은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라는 근대중국의 문호 루쉰이 쓴 소설 《고향》의 마지막 문장에서 또 다른 해답을 찾아보자.

# 다음 편은 ‘2007년 금강산 신계사 낙성식’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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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범
경북 경주 출생으로 1984년부터 불교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참여하다가 1990년 초, 법보종찰 해인사에 입산, 환속했다. 1994년부터 남북불교 교류의 현장 실무자로 2000년부터 평양과 개성・금강산 등지를 다녀왔으며, 현재는 평화통일불교연대 운영위원장과 북한불교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남북불교 교류 60년사’ 등과 논문으로 ‘북한 주민들의 종교적 심성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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