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보살 30년…원력의 역사를 한 권에
통일보살 30년…원력의 역사를 한 권에
  • 서현욱 기자
  • 승인 2022.07.06 13: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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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타 스님, ‘평불협 30년사’ 발간 “남북불교교류 기록이자 유언”
통일보살의 길을 걸어온 법타 스님은 '평불협 30년사' 발간과 통일운동의 소회를 담담히 이야기했다.



‘백두’에서 ‘한라’까지 분단 조국을 하나로 품은 ‘통일보살’의 30년 길, 사단법인 평화통일불교협회(이하 평불협)가 걸어온 원력의 역사를 책 한 권에 담았다. 평불협의 역사는 법타 스님(은해사 조실, 조계종 원로의원)의 통일운동과 불교계 남북불교 교류사와 일치한다. 남북분단으로 이어져 온 민족고(苦)를 해결하겠다는 역사적 소명이 법타 스님을 통일운동으로 이끌었고, 법타 스님의 발걸음 딛는 곳마다 남북불교교류의 새 역사가 쓰이고 장막에 가린 북한불교의 실상이 드러났다.

법타 스님은 미국 유학에서 세계의 흐름을 보았고, 미국 기독교인들이 북한과 교류하는 모습을 보았다. 한국불교가 평화통일 운동에 둔감할 때 평화통일운동과 남북불교교류 사업을 시작했다. 절실한 민족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평화통일을 앞당기는 일’임을 절감했고, 통일운동이 이 시대가 요구하는 진정한 ‘보살의 길’이라고 여겼다.

법타 스님은 통일운동의 불모지 같던 불교계에 민족 문제 해결에 불교적 역할을 드러냈고, 실천화하는 평불협을 창립해 ‘통일보살’의 길을 걸었다.

법타 스님은 당시 일을 이렇게 회고한다.

“1985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에서 통일운동을 하는 기독교인들이 만든 ‘ONE KOREA MOVEMENT’라는 단체에 가입해 통일운동을 접했고, 그때 평화통일의 길을 기독교에 다 뺏기면 불교가 설 자리가 없을 것을 직감했다. 그래서 평화통일 운동에 원력을 냈고, 1989년 6월 25일 중국 베이징 주재 북한대사관에서 비자를 받아 북한에 들어가 20일 동안 체류하면서 북한불교의 실상을 접했다. 임수경 학생이 나보다 일주일 늦게 북한에 들어와 영웅이 되는 현장을 보았다.”

법타 스님은 북한 당국이 발급한 비자로 북한 땅을 밟은 최초의 민간인이었다. 스님은 체류 기간을 “당시 북한에는 유발승들이 있었다. 조계종과 같은 전통불교는 아니지만, 스님과 사찰이 있어 다행이었고, 조선불교도연맹도 확인할 수 있었던 시간”이라고 말한다.

그때 북한 사람들은 법타 스님을 ‘중선생’으로 불렀다. 하지만 지금은 스님으로 부른다. 용어 하나 바꾸는 데 20여 년이 걸렸다. 그만큼 남북교류가 어렵고, 평화통일의 간극은 멀었다.

1992년 미국에서 돌아온 스님은 그해 10월 20일 평불현의 전신인 조국평화통일협의회를 창립한다. 그때부터 30년, ‘통일보살’의 원력을 놓지 않았다.

스님은 평불협 창립 이후 통일운동을 주도면서 1994년 7월 10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박종철 군을 고문 치사케 한 악명 높은 ‘남영동’에 붙들려가 심한 고초를 겪었다. 북한을 고무 찬양했다는 죄명이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긍정 여론이 28%로 급락하는 상황에서 북풍 정치공작의 희생물이 됐지만, 그 이후 수십 차례 방북해 북한의 식량난을 체감했다. 이후 ‘밥이 통일’, ‘밥이 평화’라는 기치를 내세워 북한 주민의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뛰었다. 북 주민 수백만 명이 굶어 죽던 ‘고난의 행군’ 시절이었다.

1997년 황해북도 봉산군 성불사 인근 사리원시에 ‘금강국수공장’을 세웠고, 1998년 초부터 매달 60톤의 밀가루를 인천항에서 북한 남포항으로 보내 하루 7,700여 명분의 국수를 생산해 무상으로 나눠주었다. 조불련이 밀가루와 국수 배급의 책임을 맡았다. 국수공장 설립 후 평양에도 빵공장도 세워 운영했다. 금강국수공장은 북측 지역에서 비종교 분야로 처음 추지노딘 교류 사례이며, 평양 밖 지역에서 추진된 종교간 현력사업의 첫 사례로 기록된다.

김일성 주석의 유언이기도 한 금강산 신계사의 복원은 1998년 3월 24일 평불협 회장인 법타스님과 북한의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위원장 김용순, 약칭 아태)가 30년간 금강산 문화유적 복원을 협약하고, 1999년부터 복원을 추진했다. 그런데 통일부가 현대아산의 금강산 관광 독점계약을 이유로 현대아산을 일방적으로 지원함으로써 평불협-아태 공동 추진이 지지부진했고, 2003년부터 대한불교조계종이 복원 주체로 참가하면서 2007년 10월 13일 불사 회향법회를 개최하게 되었고 이후 조불련에 인계했다.

2002년 어린이 분유 지원 사업, 2004년 평양지역 양파재배사업 지원, 평북 용천 열차폭발 사고 물품 지원, 양파 종자 및 대두유 지원 사업을 벌였고 2009년 농촌 시범공동사업에도 참여했다. 평불협의 활동은 남측의 여러 인도적 지원 사업 중에서도 남북 지원 및 협력의 적극성을 보여주는 지표가 됐다. 인도적 지원 사업은 남북불교교류 사업의 새로운 전기가 됐다. 2003년 조불련 대표단이 서울을 방문했고, 봉은사에서 ‘3.1절 기념 조국평화통일기원 남북불교도 합동법회’라는 역사를 만들었다. 같은 해 평양시 만경대구역 용악산 법운암에서 ‘남북 공동시범 단청 및 개금불사 입재법회’는 가장 종교적인 교류의 첫 사례가 된다. 평불협은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민추본)와 공동으로 2003년부터 2006년까지 조불련이 지원 요청한 59개 북한사찰 단청불사와 관련해 단청면적 123,715㎡에 필요한 안료 47,260㎏을 지원했다. 북한 스님들의 홍가사 200바탕과 장삼 옷감을 후원했다.

2005년 10월 31일 복원 낙성된 개성 오관산 영통사는 고려 천태종의 본찰로서, 고려 제11대 문종의 4왕자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이 출가하고 입적한 사찰이다. 2000년부터 북한당국이 25개 건물을 복원 추진했으며, 2003년 3월 법타 스님이 복원 불사 자문을 맡아 남측 천태종이 참여해 기와와 단청, 진입로 공사를 지원해 영통사를 복원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

평불협 사무국장을 지낸 이지범 고려대장경연구소장에 따르면, 평불협은 간접교류(1992~1994)→직간접교류(1995~1999)→직접교류(2000~2008)→직간접교류(2008~2015)→교류 중단(2016년~ 현재)으로 교류의 변천을 보인다.

이지범 소장은 “30년의 평불협 기록은 통일운동과 남북교류를 담고 있는 ‘축적의 시간’”이며 “평불협은 불교종단이 아닌 순수 민간통일단체로서 만들어 온 ’역사의 축적‘”이라고 말한다.

통일부에 신고된 평불협의 대북지원금액은 50여억 원에 달한다. 하지만 이 모든 대북지원교류활동은 2008년 7월 11일 금강산관광객 박왕자 피살, 2010년 3월 26일 북한 잠수함의 무차별 어뢰공격으로 인한 천안함 폭침, 2010년 11월 23일 북한이 연평도에 포격을 가한 일 등 일련의 사건들로 당시 이명박 정부의 이른바 ‘5.24대북제재조치’로 중단됐다. 남북교역과 대북 지원사업은 물론이거니와 인도적 지원마저 단절됐다. 급기야 박근혜 정부 때인 2016년에는 개성공단마저 철수했다. 이러한 조치는 2022년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3차에 걸친 남북정상회담(2018.4.27, 5.26, 9.19)도 아무런 진전 없이 더욱 악화된 현실에 직면해 있다. 윤석열 정부가 출범했지만 인도적 교류 사업 등 통일운동의 길은 꽉 막혀 있고, 정부는 민족고 해결의 방안이 전무한 실정이다.

1992년 2월 12일 공식 출범한 평불협이 2022년 올해 창립 30주년을 맞았다. 평불협은 불교계 최초의 통일부 산하 사단법인체이며, 비제도권의 유일한 통일운동단체이다.

분단 이후 남북교류사에서 민간교류단체가 30년의 세월을 지탱해온 경우는 극히 드물다. 평불협은 그렇듯 수 많은 단체들이 명멸했던 오랜 세월 남북교류사의 새 역사를 써내려 온 주체이자 주인공이다.
통일보살의 길을 걸어온 법타 스님은 '평불협 30년사' 발간과 통일운동의 소회를 담담히 이야기했다.

‘백두’에서 ‘한라’까지 분단 조국을 하나로 품은 ‘통일보살’의 30년 길, 사단법인 평화통일불교협회(이하 평불협)가 걸어온 원력의 역사를 책 한 권에 담았다. 평불협의 역사는 법타 스님(은해사 조실, 조계종 원로의원)의 통일운동과 불교계 남북불교 교류사와 일치한다. 남북분단으로 이어져 온 민족고(苦)를 해결하겠다는 역사적 소명이 법타 스님을 통일운동으로 이끌었고, 법타 스님의 발걸음 딛는 곳마다 남북불교교류의 새 역사가 쓰이고 장막에 가린 북한불교의 실상이 드러났다.

법타 스님은 미국 유학에서 세계의 흐름을 보았고, 미국 기독교인들이 북한과 교류하는 모습을 보았다. 한국불교가 평화통일 운동에 둔감할 때 평화통일운동과 남북불교교류 사업을 시작했다. 절실한 민족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평화통일을 앞당기는 일’임을 절감했고, 통일운동이 이 시대가 요구하는 진정한 ‘보살의 길’이라고 여겼다.

법타 스님은 통일운동의 불모지 같던 불교계에 민족 문제 해결에 불교적 역할을 드러냈고, 실천화하는 평불협을 창립해 ‘통일보살’의 길을 걸었다.

법타 스님은 당시 일을 이렇게 회고한다.

“1985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에서 통일운동을 하는 기독교인들이 만든 ‘ONE KOREA MOVEMENT’라는 단체에 가입해 통일운동을 접했고, 그때 평화통일의 길을 기독교에 다 뺏기면 불교가 설 자리가 없을 것을 직감했다. 그래서 평화통일 운동에 원력을 냈고, 1989년 6월 25일 중국 베이징 주재 북한대사관에서 비자를 받아 북한에 들어가 20일 동안 체류하면서 북한불교의 실상을 접했다. 임수경 학생이 나보다 일주일 늦게 북한에 들어와 영웅이 되는 현장을 보았다.”

법타 스님은 북한 당국이 발급한 비자로 북한 땅을 밟은 최초의 민간인이었다. 스님은 체류 기간을 “당시 북한에는 유발승들이 있었다. 조계종과 같은 전통불교는 아니지만, 스님과 사찰이 있어 다행이었고, 조선불교도연맹도 확인할 수 있었던 시간”이라고 말한다.

그때 북한 사람들은 법타 스님을 ‘중선생’으로 불렀다. 하지만 지금은 스님으로 부른다. 용어 하나 바꾸는 데 20여 년이 걸렸다. 그만큼 남북교류가 어렵고, 평화통일의 간극은 멀었다.

1992년 미국에서 돌아온 스님은 그해 10월 20일 평불현의 전신인 조국평화통일협의회를 창립한다. 그때부터 30년, ‘통일보살’의 원력을 놓지 않았다.

스님은 평불협 창립 이후 통일운동을 주도면서 1994년 7월 10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박종철 군을 고문 치사케 한 악명 높은 ‘남영동’에 붙들려가 심한 고초를 겪었다. 북한을 고무 찬양했다는 죄명이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긍정 여론이 28%로 급락하는 상황에서 북풍 정치공작의 희생물이 됐지만, 그 이후 수십 차례 방북해 북한의 식량난을 체감했다. 이후 ‘밥이 통일’, ‘밥이 평화’라는 기치를 내세워 북한 주민의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뛰었다. 북 주민 수백만 명이 굶어 죽던 ‘고난의 행군’ 시절이었다.

1997년 황해북도 봉산군 성불사 인근 사리원시에 ‘금강국수공장’을 세웠고, 1998년 초부터 매달 60톤의 밀가루를 인천항에서 북한 남포항으로 보내 하루 7,700여 명분의 국수를 생산해 무상으로 나눠주었다. 조불련이 밀가루와 국수 배급의 책임을 맡았다. 국수공장 설립 후 평양에도 빵공장도 세워 운영했다. 금강국수공장은 북측 지역에서 비종교 분야로 처음 추지노딘 교류 사례이며, 평양 밖 지역에서 추진된 종교간 현력사업의 첫 사례로 기록된다.

김일성 주석의 유언이기도 한 금강산 신계사의 복원은 1998년 3월 24일 평불협 회장인 법타스님과 북한의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위원장 김용순, 약칭 아태)가 30년간 금강산 문화유적 복원을 협약하고, 1999년부터 복원을 추진했다. 그런데 통일부가 현대아산의 금강산 관광 독점계약을 이유로 현대아산을 일방적으로 지원함으로써 평불협-아태 공동 추진이 지지부진했고, 2003년부터 대한불교조계종이 복원 주체로 참가하면서 2007년 10월 13일 불사 회향법회를 개최하게 되었고 이후 조불련에 인계했다.

2002년 어린이 분유 지원 사업, 2004년 평양지역 양파재배사업 지원, 평북 용천 열차폭발 사고 물품 지원, 양파 종자 및 대두유 지원 사업을 벌였고 2009년 농촌 시범공동사업에도 참여했다. 평불협의 활동은 남측의 여러 인도적 지원 사업 중에서도 남북 지원 및 협력의 적극성을 보여주는 지표가 됐다. 인도적 지원 사업은 남북불교교류 사업의 새로운 전기가 됐다. 2003년 조불련 대표단이 서울을 방문했고, 봉은사에서 ‘3.1절 기념 조국평화통일기원 남북불교도 합동법회’라는 역사를 만들었다. 같은 해 평양시 만경대구역 용악산 법운암에서 ‘남북 공동시범 단청 및 개금불사 입재법회’는 가장 종교적인 교류의 첫 사례가 된다. 평불협은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민추본)와 공동으로 2003년부터 2006년까지 조불련이 지원 요청한 59개 북한사찰 단청불사와 관련해 단청면적 123,715㎡에 필요한 안료 47,260㎏을 지원했다. 북한 스님들의 홍가사 200바탕과 장삼 옷감을 후원했다.

2005년 10월 31일 복원 낙성된 개성 오관산 영통사는 고려 천태종의 본찰로서, 고려 제11대 문종의 4왕자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이 출가하고 입적한 사찰이다. 2000년부터 북한당국이 25개 건물을 복원 추진했으며, 2003년 3월 법타 스님이 복원 불사 자문을 맡아 남측 천태종이 참여해 기와와 단청, 진입로 공사를 지원해 영통사를 복원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

평불협 사무국장을 지낸 이지범 고려대장경연구소장에 따르면, 평불협은 간접교류(1992~1994)→직간접교류(1995~1999)→직접교류(2000~2008)→직간접교류(2008~2015)→교류 중단(2016년~ 현재)으로 교류의 변천을 보인다.

이지범 소장은 “30년의 평불협 기록은 통일운동과 남북교류를 담고 있는 ‘축적의 시간’”이며 “평불협은 불교종단이 아닌 순수 민간통일단체로서 만들어 온 ’역사의 축적‘”이라고 말한다.

통일부에 신고된 평불협의 대북지원금액은 50여억 원에 달한다. 하지만 이 모든 대북지원교류활동은 2008년 7월 11일 금강산관광객 박왕자 피살, 2010년 3월 26일 북한 잠수함의 무차별 어뢰공격으로 인한 천안함 폭침, 2010년 11월 23일 북한이 연평도에 포격을 가한 일 등 일련의 사건들로 당시 이명박 정부의 이른바 ‘5.24대북제재조치’로 중단됐다. 남북교역과 대북 지원사업은 물론이거니와 인도적 지원마저 단절됐다. 급기야 박근혜 정부 때인 2016년에는 개성공단마저 철수했다. 이러한 조치는 2022년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3차에 걸친 남북정상회담(2018.4.27, 5.26, 9.19)도 아무런 진전 없이 더욱 악화된 현실에 직면해 있다. 윤석열 정부가 출범했지만 인도적 교류 사업 등 통일운동의 길은 꽉 막혀 있고, 정부는 민족고 해결의 방안이 전무한 실정이다.

1992년 2월 12일 공식 출범한 평불협이 2022년 올해 창립 30주년을 맞았다. 평불협은 불교계 최초의 통일부 산하 사단법인체이며, 비제도권의 유일한 통일운동단체이다.

분단 이후 남북교류사에서 민간교류단체가 30년의 세월을 지탱해온 경우는 극히 드물다. 평불협은 그렇듯 수 많은 단체들이 명멸했던 오랜 세월 남북교류사의 새 역사를 써내려 온 주체이자 주인공이다.

<평불협 30년사>는 창립 30년을 맞아 남북불교교류의 물꼬를 트며 ‘통일보살’의 길을 걸어온 지난 30년을 회고하고 그 역사적 의의와 전망을 담보하는 기록물이다.

하춘생 편찬위원장은 “<평불협 30년사>는 남북불교교류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를 불교계는 물론 일반사회 대중과 공유함으로써 자주적인 역량과 향후의 역할을 제고하고 남북교류의 새로운 장을 다시금 열어가기 위한 지표를 설정하는데 출간의 목적과 의미를 두었다. ”고 설명한다.

법타 스님은 남북이 불신과 대립을 지속하는 여건에도 북녘 동포들의 고통을 어루만져주는 부처님의 참된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조국의 평화통일을 이룩하고자 하는 통일보살의 원력을 놓지 않고 있다. ‘밥이 곧 통일’이라는 신념 역시 여전히 유효하다. 북한의 핵 문제를 둘러싼 국제정세, 이산가족의 만남이나 민간인 교류가 멈춰선 지금, 평불협의 역할과 더욱 성숙된 통일운동의 필요성은 여전하다. 때문에 <평불협 30년사>의 출간은 평불협의 새로운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법타 스님은 “‘30년사는 남북민간교류와 불교교류 등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증명하는 평불협 활동의 기록이자 나의 유언이며 유서이다. 종단의 민추본과 달리 평불협은 민간단체로서 제도권 밖에서 활동해 왔다.”며 “한국불교가 남북민간교류에서 제 역할을 할 때가 됐는데 여전히 작음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지금은 멈췄지만 평불협이 다시 남북민간교류의 대열에서 가장 먼저 활동하길 바라지만, 그날이 언제일지 안타깝기만 하다.”고 했다.

남북교류가 중단되면서 북녘의 사정을 파악하는 것도 버겁다. 올해 초 조선불교도연맹의 강수린 위원장과 차금철 서기장이 모두 퇴진했다. 조불련 지도부가 공석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강수린과 차금철의 뒤를 누가 새롭게 맡아 조불련을 이끌지 확인되지 않는다.

법타 스님은 “강수린은 아태의 사무원이었다. 확인되는 게 없다. 하지만 준비해야 한다. 여전히 남쪽의 주민들은 북한을 잘 모른다. 잘못된 정보로 북한을 인식한다. 그러다보니 북한과 남북교류에 부정적 인식이 많다.”며 “북한 주민을 돕는 것은 북의 체제나 독재자를 돕는 일이 아니다. 지금도 굶어 죽는 현장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평화통일이 2,500만의 북 주민을 구제하는 길”이라고 했다.

법타 스님의 ’밥이 통일‘이라는 메시지는 남북불교통합의 과정보다 우선해야 할 과제이며, 평불협 활동의 명제이다.

스님은 “남북관계가 경색되어 있지만, 지금 우리가 나서야 한다.”면서 “처음 본 북한 스님은 유발에 삭발도 하지 않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이 삭발과 옷에 있느냐‘ 되묻던 당찬 모습이었지만, 이제 북에도 그런 스님들이 남아있지 않다. 그래서 더 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법타 스님, 그리고 평불협의 통일보살의 원력은 결국 ’불교가 남북교류의 마중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평불협은 출범 이래 30년 동안 ‘평화통일을 앞당기는 일’에 기여하고자 진력해왔지만, 지금의 상황은 마치 ‘잃어버린 30년’같다. 하지만 ‘통일보살’의 길은 인욕의 길이었고, 자비의 길이었으며, 화해의 길이었다.

법타 스님은 “숨만 쉬는 것 같은 현실이 안타깝지만, 교류 관계는 어렵더라도 내적으로 통일 의식을 고취하고 교육과 법회를 지속해야 한다. 올해 초 고양시 초청으로 북한불교미술전을 열었다. 이 역시 간접적인 통일 운동”이라며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는 일은 언제라도 늦지 않다. 평화통일의 길을 묵묵히 걷겠다.”고 했다.

이해학 주민교회 원로목사는 <평불협 30년사> 발간에 “평불협은 역설적으로 언제까지 존속되기를 기대할 수 없는 단체이다. 본질의 태생적 목적이 민족의 화해와 협력으로 조국의 평화통일을 이룩하는 역할에 평불협의 존립가치를 두었기 때문”이라며 “ 평화통일이 이루어지고 민족의 화해가 성취되는 그날 평불협의 존립 목적은 실현되기 때문에 아마도 그날이 오면 평불협은 기쁨에 넘친 해단식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 목사는 “30년을 맞이한 평불협은 이제 30년을 기약하기에 앞서 본질의 설립목적이 머지않은 시기에, 가능하다면 법타 스님의 생전에 성취되기를 빌고 또 빌어야 하겠다. 이는 남북교류를 통한 민족화해와 평화통일을 목적으로 내세운 모든 단체들의 소망이요 기원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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