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67. 이민일기
[전재민의 부르지 못한 노래] 67. 이민일기
  • 전재민 시인
  • 승인 2022.06.27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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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겨 심은 미나리

이국땅 억세 잎처럼 흔들리다
심한 몸살을 앓고
그러고도 아플 것이 남아 바람에 떨듯

철새도 계절이 바뀌면 돌아가는데
비둘기처럼 낯선 지붕 아래
처마 밑에서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울고 있다

어디든 정붙이고 살면 고향이지 라며
천당 아래 구백 구십 구당 사는 거야 라고
최면까지 걸어 보지만 툭하면 길 가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듯
자고 나면 흥건히 젖은 베갯잇에 날마다 악몽 지도를 그린다

빛바랜 역사책 고구려 유민같이, 만주 독립군처럼
포승줄 묶이고 기차에 실려 수천 수만 리 길
낯선 곳 떨어진 것도 아니고

비행기 타고 온 이민 생활

다신 울지 않으리라 했던 맹세는 간데없고

빗물처럼 흐르는 눈물은 빗물이라 우기며
퍼드덕 발버둥 치는 날개 꺾인 새처럼
 







#작가의 변
나무들도 옮겨 심는 시기가 다 있다. 아무 때나 옮겨 심으면 나무가 제대로 살지 못한다. 식목일쯤에 나무를 옮겨 심고 정성으로 가꾸어야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살아간다. 캐나다에서도 한국의 야채와 꽃, 그리고 나무들까지 심어서 고향의 향기와 멋을 느끼고 맛을 느끼려는 사람들이 많다. 이민이란 대부분 못사는 나라에서 잘사는 동경하는 나라로 이민하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지금의 한국은 선진국이고 캐나다는 모든 면에서 첨단 한국에 쳐지는 감이 없지 않다.

자발적으로 이민 신청을 하고 희망을 안고 온 이민 생활은 생각처럼 녹녹치 않았다. 1995년 그러니 벌써 27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분유도 떼지 못한 쌍둥이를 데리고 이민을 왔을 땐 가장으로서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다. 그렇다고 어떻게 하겠다는 뚜렷한 계획을 갖고 이민을 온 것도 아니다. 이민 가면 취직은 될 테고 산 입에 거미줄 치랴는 심정으로 이민을 왔다. 이민을 오자마자 ‘밴쿠버 선’과 ‘프로빈스 신문’에 구인란을 보고 열심히 이력서를 우표를 첨부해서 부쳤지만, 면접 보자는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이력서가 잘못됐나 하고 영어 학교 선생님에게 자문받아 이력서를 고쳐서 냈지만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큰 호텔에서 면접 보자고 연락이 와서 면접을 보는데 면접관이 여기서 공부를 더 해야 취직할 수 있다고 조언해 주었다.

한 달 늦게 이민 온 친구가 우리 집에서 묵다가 먼저 취직해서 나가면서 나도 소개해줘서 한국 식당에 취직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취직의 기쁨도 잠시 이곳은 다르다면서 무시하고 막일을 막 시켜 먹는 한식당에서 먹고 살기 위해 꾹 참고 일했다. 그리고 다른 한식당에서도 일하다 기내식 회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싱가폴 에어라인에 한국인 손님이 많아 싱가폴 에어라인과 에어 캐나다, 나고야, 상하이, 홍콩, 서울 방면을 맡아서 음식을 만들었다. 젊고 패기 왕성한 데다 에너지도 넘쳐나던 젊은 시절이었다. 평생 직장 삼겠다던 나의 바람과는 다르게 9.11 사태가 터지고 일괄적으로 해고됐다. 한국 식품점 케이터링 부서 과장과 내 비지니스의 꿈을 좇는 등 변화의 시기가 나의 불혹의 언저리에서 있었고 쓰디쓴 맛도 보고 변화도 많았다. 안정적인 직장을 잡기 위해 캐나다 공군의 조리병으로 지원을 하기도 했지만 이라크 전쟁에 파병될 수도 있다고 극구 말리는 가족으로 포기하고 안정적인 직장이 되지 못하고, 오래 다녀야지 하면 다닐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곤 했다. 지난해와 올해는 직장의 변동이 아주 심했다. 모두 나의 의도와 다른 결과였다. 나이 들면 취직하기도 힘드니 한 직장에서 오래 있으면서 혜택을 보고 마음도 안정되는 것이 좋다. 하지만 결과적으론 떠돌이처럼 되어 버렸다. 지난주에도 하루 4번씩 면접을 봤지만, 한 군데의 오퍼도 받지 못하고 외곽이고 기간이 정해 진 직장에서 오퍼가 와서 울며 겨자 먹기로 가기로 했다.

풀잎은 바람에 쓰러져도, 홍수에 쓸려나가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일을 죽기 전까지 최선을 다한다. 젊어서는 꿈이 많아 나도 커다란 동량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풀잎이어도 괜찮다. 바람에 흔들리고 홍수에 쓸려나가도 악착같이 뿌리를 내려 살아가리라. 왜냐하면 나에게는 나를 믿어 주는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고, 지인들이 있으니까?

갑작스러운 해고는 정신적인 충격을 많이 받는다. 그리고 그것이 자꾸 겹쳐지거나 반복이 되면 정말 내가 뭘 잘못한 것은 아닌가 하고 자신을 의심하고 자신감이 떨어지게 된다. 나의 잘못이 아니었고 억울한 일들이었음에도 사람들에게 그렇게 비추어질 수 있다. 아니 그렇게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2년 전에 뇌경색으로 인해 정상적인 생활을 한다고 해도 무리하면 바로 몸에서 알고 표가 난다. 병원이 멀거나 외곽 지역은 그래서 가길 꺼렸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누구는 나에게 눈높이를 낮추라고 조언을 하지만 눈높이를 낮추어도 마찬가지 결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신문에 실업률이 역대 최저라는 기사를 보았다. 아무리 실업률이 낮으면 뭐하나 내가 직장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아니 오히려 다들 직장을 잘 잡고 다니는데 나만 직장에서 떨구어진 것 같아 더 우울한 감이 없지 않다. 지난해 위슬러 호텔에 일하러 갔는데 전에 면접 본 대학 식당에서 연락이 와서 내려왔었다. 위슬러 올라갔다고 케주얼 잡이던 구세군에서 해고 편지를 받았다. 대학 식당에선 매니지먼트라고 오버타임 페이도 안 하고 12시간씩 일을 시켜 따지더니 또 해고됐다. 또 다른 직장에서는 크라이언트가 불평 불만하는 것과 다른 직원 보고서만 듣고 또 해고시켰다. 해명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안다. 또 다른 곳에선 수퍼바이저를 뽑아 놓고 라인 쿡을 잘못한다고 그만두라고 했다. 거듭되는 해고에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마음은 더욱 주눅이 들었지만, 면접을 보면서 희망을 가졌었다. 하지만 될 듯하던 직장들이 모두 오퍼 하나 없는 결과를 만들자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하나 들어 온 오퍼를 잡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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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겨 심은 미나리

이국땅 억세 잎처럼 흔들리다
심한 몸살을 앓고
그러고도 아플 것이 남아 바람에 떨듯

철새도 계절이 바뀌면 돌아가는데
비둘기처럼 낯선 지붕 아래
처마 밑에서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울고 있다

어디든 정붙이고 살면 고향이지 라며
천당 아래 구백 구십 구당 사는 거야 라고
최면까지 걸어 보지만 툭하면 길 가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듯
자고 나면 흥건히 젖은 베갯잇에 날마다 악몽 지도를 그린다

빛바랜 역사책 고구려 유민같이, 만주 독립군처럼
포승줄 묶이고 기차에 실려 수천 수만 리 길
낯선 곳 떨어진 것도 아니고

비행기 타고 온 이민 생활

다신 울지 않으리라 했던 맹세는 간데없고

빗물처럼 흐르는 눈물은 빗물이라 우기며
퍼드덕 발버둥 치는 날개 꺾인 새처럼
 





 

옮겨 심은 미나리

이국땅 억세 잎처럼 흔들리다
심한 몸살을 앓고
그러고도 아플 것이 남아 바람에 떨듯

철새도 계절이 바뀌면 돌아가는데
비둘기처럼 낯선 지붕 아래
처마 밑에서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울고 있다

어디든 정붙이고 살면 고향이지 라며
천당 아래 구백 구십 구당 사는 거야 라고
최면까지 걸어 보지만 툭하면 길 가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듯
자고 나면 흥건히 젖은 베갯잇에 날마다 악몽 지도를 그린다

빛바랜 역사책 고구려 유민같이, 만주 독립군처럼
포승줄 묶이고 기차에 실려 수천 수만 리 길
낯선 곳 떨어진 것도 아니고

비행기 타고 온 이민 생활

다신 울지 않으리라 했던 맹세는 간데없고

빗물처럼 흐르는 눈물은 빗물이라 우기며
퍼드덕 발버둥 치는 날개 꺾인 새처럼
 







#작가의 변
나무들도 옮겨 심는 시기가 다 있다. 아무 때나 옮겨 심으면 나무가 제대로 살지 못한다. 식목일쯤에 나무를 옮겨 심고 정성으로 가꾸어야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살아간다. 캐나다에서도 한국의 야채와 꽃, 그리고 나무들까지 심어서 고향의 향기와 멋을 느끼고 맛을 느끼려는 사람들이 많다. 이민이란 대부분 못사는 나라에서 잘사는 동경하는 나라로 이민하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지금의 한국은 선진국이고 캐나다는 모든 면에서 첨단 한국에 쳐지는 감이 없지 않다.

자발적으로 이민 신청을 하고 희망을 안고 온 이민 생활은 생각처럼 녹녹치 않았다. 1995년 그러니 벌써 27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분유도 떼지 못한 쌍둥이를 데리고 이민을 왔을 땐 가장으로서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다. 그렇다고 어떻게 하겠다는 뚜렷한 계획을 갖고 이민을 온 것도 아니다. 이민 가면 취직은 될 테고 산 입에 거미줄 치랴는 심정으로 이민을 왔다. 이민을 오자마자 ‘밴쿠버 선’과 ‘프로빈스 신문’에 구인란을 보고 열심히 이력서를 우표를 첨부해서 부쳤지만, 면접 보자는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이력서가 잘못됐나 하고 영어 학교 선생님에게 자문받아 이력서를 고쳐서 냈지만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큰 호텔에서 면접 보자고 연락이 와서 면접을 보는데 면접관이 여기서 공부를 더 해야 취직할 수 있다고 조언해 주었다.

한 달 늦게 이민 온 친구가 우리 집에서 묵다가 먼저 취직해서 나가면서 나도 소개해줘서 한국 식당에 취직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취직의 기쁨도 잠시 이곳은 다르다면서 무시하고 막일을 막 시켜 먹는 한식당에서 먹고 살기 위해 꾹 참고 일했다. 그리고 다른 한식당에서도 일하다 기내식 회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싱가폴 에어라인에 한국인 손님이 많아 싱가폴 에어라인과 에어 캐나다, 나고야, 상하이, 홍콩, 서울 방면을 맡아서 음식을 만들었다. 젊고 패기 왕성한 데다 에너지도 넘쳐나던 젊은 시절이었다. 평생 직장 삼겠다던 나의 바람과는 다르게 9.11 사태가 터지고 일괄적으로 해고됐다. 한국 식품점 케이터링 부서 과장과 내 비지니스의 꿈을 좇는 등 변화의 시기가 나의 불혹의 언저리에서 있었고 쓰디쓴 맛도 보고 변화도 많았다. 안정적인 직장을 잡기 위해 캐나다 공군의 조리병으로 지원을 하기도 했지만 이라크 전쟁에 파병될 수도 있다고 극구 말리는 가족으로 포기하고 안정적인 직장이 되지 못하고, 오래 다녀야지 하면 다닐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곤 했다. 지난해와 올해는 직장의 변동이 아주 심했다. 모두 나의 의도와 다른 결과였다. 나이 들면 취직하기도 힘드니 한 직장에서 오래 있으면서 혜택을 보고 마음도 안정되는 것이 좋다. 하지만 결과적으론 떠돌이처럼 되어 버렸다. 지난주에도 하루 4번씩 면접을 봤지만, 한 군데의 오퍼도 받지 못하고 외곽이고 기간이 정해 진 직장에서 오퍼가 와서 울며 겨자 먹기로 가기로 했다.

풀잎은 바람에 쓰러져도, 홍수에 쓸려나가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일을 죽기 전까지 최선을 다한다. 젊어서는 꿈이 많아 나도 커다란 동량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풀잎이어도 괜찮다. 바람에 흔들리고 홍수에 쓸려나가도 악착같이 뿌리를 내려 살아가리라. 왜냐하면 나에게는 나를 믿어 주는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고, 지인들이 있으니까?

갑작스러운 해고는 정신적인 충격을 많이 받는다. 그리고 그것이 자꾸 겹쳐지거나 반복이 되면 정말 내가 뭘 잘못한 것은 아닌가 하고 자신을 의심하고 자신감이 떨어지게 된다. 나의 잘못이 아니었고 억울한 일들이었음에도 사람들에게 그렇게 비추어질 수 있다. 아니 그렇게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2년 전에 뇌경색으로 인해 정상적인 생활을 한다고 해도 무리하면 바로 몸에서 알고 표가 난다. 병원이 멀거나 외곽 지역은 그래서 가길 꺼렸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누구는 나에게 눈높이를 낮추라고 조언을 하지만 눈높이를 낮추어도 마찬가지 결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신문에 실업률이 역대 최저라는 기사를 보았다. 아무리 실업률이 낮으면 뭐하나 내가 직장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아니 오히려 다들 직장을 잘 잡고 다니는데 나만 직장에서 떨구어진 것 같아 더 우울한 감이 없지 않다. 지난해 위슬러 호텔에 일하러 갔는데 전에 면접 본 대학 식당에서 연락이 와서 내려왔었다. 위슬러 올라갔다고 케주얼 잡이던 구세군에서 해고 편지를 받았다. 대학 식당에선 매니지먼트라고 오버타임 페이도 안 하고 12시간씩 일을 시켜 따지더니 또 해고됐다. 또 다른 직장에서는 크라이언트가 불평 불만하는 것과 다른 직원 보고서만 듣고 또 해고시켰다. 해명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안다. 또 다른 곳에선 수퍼바이저를 뽑아 놓고 라인 쿡을 잘못한다고 그만두라고 했다. 거듭되는 해고에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마음은 더욱 주눅이 들었지만, 면접을 보면서 희망을 가졌었다. 하지만 될 듯하던 직장들이 모두 오퍼 하나 없는 결과를 만들자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하나 들어 온 오퍼를 잡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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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변
나무들도 옮겨 심는 시기가 다 있다. 아무 때나 옮겨 심으면 나무가 제대로 살지 못한다. 식목일쯤에 나무를 옮겨 심고 정성으로 가꾸어야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살아간다. 캐나다에서도 한국의 야채와 꽃, 그리고 나무들까지 심어서 고향의 향기와 멋을 느끼고 맛을 느끼려는 사람들이 많다. 이민이란 대부분 못사는 나라에서 잘사는 동경하는 나라로 이민하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지금의 한국은 선진국이고 캐나다는 모든 면에서 첨단 한국에 쳐지는 감이 없지 않다.

자발적으로 이민 신청을 하고 희망을 안고 온 이민 생활은 생각처럼 녹녹치 않았다. 1995년 그러니 벌써 27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분유도 떼지 못한 쌍둥이를 데리고 이민을 왔을 땐 가장으로서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다. 그렇다고 어떻게 하겠다는 뚜렷한 계획을 갖고 이민을 온 것도 아니다. 이민 가면 취직은 될 테고 산 입에 거미줄 치랴는 심정으로 이민을 왔다. 이민을 오자마자 ‘밴쿠버 선’과 ‘프로빈스 신문’에 구인란을 보고 열심히 이력서를 우표를 첨부해서 부쳤지만, 면접 보자는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이력서가 잘못됐나 하고 영어 학교 선생님에게 자문받아 이력서를 고쳐서 냈지만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큰 호텔에서 면접 보자고 연락이 와서 면접을 보는데 면접관이 여기서 공부를 더 해야 취직할 수 있다고 조언해 주었다.

한 달 늦게 이민 온 친구가 우리 집에서 묵다가 먼저 취직해서 나가면서 나도 소개해줘서 한국 식당에 취직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취직의 기쁨도 잠시 이곳은 다르다면서 무시하고 막일을 막 시켜 먹는 한식당에서 먹고 살기 위해 꾹 참고 일했다. 그리고 다른 한식당에서도 일하다 기내식 회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싱가폴 에어라인에 한국인 손님이 많아 싱가폴 에어라인과 에어 캐나다, 나고야, 상하이, 홍콩, 서울 방면을 맡아서 음식을 만들었다. 젊고 패기 왕성한 데다 에너지도 넘쳐나던 젊은 시절이었다. 평생 직장 삼겠다던 나의 바람과는 다르게 9.11 사태가 터지고 일괄적으로 해고됐다. 한국 식품점 케이터링 부서 과장과 내 비지니스의 꿈을 좇는 등 변화의 시기가 나의 불혹의 언저리에서 있었고 쓰디쓴 맛도 보고 변화도 많았다. 안정적인 직장을 잡기 위해 캐나다 공군의 조리병으로 지원을 하기도 했지만 이라크 전쟁에 파병될 수도 있다고 극구 말리는 가족으로 포기하고 안정적인 직장이 되지 못하고, 오래 다녀야지 하면 다닐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곤 했다. 지난해와 올해는 직장의 변동이 아주 심했다. 모두 나의 의도와 다른 결과였다. 나이 들면 취직하기도 힘드니 한 직장에서 오래 있으면서 혜택을 보고 마음도 안정되는 것이 좋다. 하지만 결과적으론 떠돌이처럼 되어 버렸다. 지난주에도 하루 4번씩 면접을 봤지만, 한 군데의 오퍼도 받지 못하고 외곽이고 기간이 정해 진 직장에서 오퍼가 와서 울며 겨자 먹기로 가기로 했다.

풀잎은 바람에 쓰러져도, 홍수에 쓸려나가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일을 죽기 전까지 최선을 다한다. 젊어서는 꿈이 많아 나도 커다란 동량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풀잎이어도 괜찮다. 바람에 흔들리고 홍수에 쓸려나가도 악착같이 뿌리를 내려 살아가리라. 왜냐하면 나에게는 나를 믿어 주는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고, 지인들이 있으니까?

갑작스러운 해고는 정신적인 충격을 많이 받는다. 그리고 그것이 자꾸 겹쳐지거나 반복이 되면 정말 내가 뭘 잘못한 것은 아닌가 하고 자신을 의심하고 자신감이 떨어지게 된다. 나의 잘못이 아니었고 억울한 일들이었음에도 사람들에게 그렇게 비추어질 수 있다. 아니 그렇게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2년 전에 뇌경색으로 인해 정상적인 생활을 한다고 해도 무리하면 바로 몸에서 알고 표가 난다. 병원이 멀거나 외곽 지역은 그래서 가길 꺼렸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누구는 나에게 눈높이를 낮추라고 조언을 하지만 눈높이를 낮추어도 마찬가지 결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신문에 실업률이 역대 최저라는 기사를 보았다. 아무리 실업률이 낮으면 뭐하나 내가 직장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아니 오히려 다들 직장을 잘 잡고 다니는데 나만 직장에서 떨구어진 것 같아 더 우울한 감이 없지 않다. 지난해 위슬러 호텔에 일하러 갔는데 전에 면접 본 대학 식당에서 연락이 와서 내려왔었다. 위슬러 올라갔다고 케주얼 잡이던 구세군에서 해고 편지를 받았다. 대학 식당에선 매니지먼트라고 오버타임 페이도 안 하고 12시간씩 일을 시켜 따지더니 또 해고됐다. 또 다른 직장에서는 크라이언트가 불평 불만하는 것과 다른 직원 보고서만 듣고 또 해고시켰다. 해명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안다. 또 다른 곳에선 수퍼바이저를 뽑아 놓고 라인 쿡을 잘못한다고 그만두라고 했다. 거듭되는 해고에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마음은 더욱 주눅이 들었지만, 면접을 보면서 희망을 가졌었다. 하지만 될 듯하던 직장들이 모두 오퍼 하나 없는 결과를 만들자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하나 들어 온 오퍼를 잡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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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겨 심은 미나리

이국땅 억세 잎처럼 흔들리다
심한 몸살을 앓고
그러고도 아플 것이 남아 바람에 떨듯

철새도 계절이 바뀌면 돌아가는데
비둘기처럼 낯선 지붕 아래
처마 밑에서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울고 있다

어디든 정붙이고 살면 고향이지 라며
천당 아래 구백 구십 구당 사는 거야 라고
최면까지 걸어 보지만 툭하면 길 가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듯
자고 나면 흥건히 젖은 베갯잇에 날마다 악몽 지도를 그린다

빛바랜 역사책 고구려 유민같이, 만주 독립군처럼
포승줄 묶이고 기차에 실려 수천 수만 리 길
낯선 곳 떨어진 것도 아니고

비행기 타고 온 이민 생활

다신 울지 않으리라 했던 맹세는 간데없고

빗물처럼 흐르는 눈물은 빗물이라 우기며
퍼드덕 발버둥 치는 날개 꺾인 새처럼
 







#작가의 변
나무들도 옮겨 심는 시기가 다 있다. 아무 때나 옮겨 심으면 나무가 제대로 살지 못한다. 식목일쯤에 나무를 옮겨 심고 정성으로 가꾸어야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살아간다. 캐나다에서도 한국의 야채와 꽃, 그리고 나무들까지 심어서 고향의 향기와 멋을 느끼고 맛을 느끼려는 사람들이 많다. 이민이란 대부분 못사는 나라에서 잘사는 동경하는 나라로 이민하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지금의 한국은 선진국이고 캐나다는 모든 면에서 첨단 한국에 쳐지는 감이 없지 않다.

자발적으로 이민 신청을 하고 희망을 안고 온 이민 생활은 생각처럼 녹녹치 않았다. 1995년 그러니 벌써 27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분유도 떼지 못한 쌍둥이를 데리고 이민을 왔을 땐 가장으로서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다. 그렇다고 어떻게 하겠다는 뚜렷한 계획을 갖고 이민을 온 것도 아니다. 이민 가면 취직은 될 테고 산 입에 거미줄 치랴는 심정으로 이민을 왔다. 이민을 오자마자 ‘밴쿠버 선’과 ‘프로빈스 신문’에 구인란을 보고 열심히 이력서를 우표를 첨부해서 부쳤지만, 면접 보자는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이력서가 잘못됐나 하고 영어 학교 선생님에게 자문받아 이력서를 고쳐서 냈지만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큰 호텔에서 면접 보자고 연락이 와서 면접을 보는데 면접관이 여기서 공부를 더 해야 취직할 수 있다고 조언해 주었다.

한 달 늦게 이민 온 친구가 우리 집에서 묵다가 먼저 취직해서 나가면서 나도 소개해줘서 한국 식당에 취직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취직의 기쁨도 잠시 이곳은 다르다면서 무시하고 막일을 막 시켜 먹는 한식당에서 먹고 살기 위해 꾹 참고 일했다. 그리고 다른 한식당에서도 일하다 기내식 회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싱가폴 에어라인에 한국인 손님이 많아 싱가폴 에어라인과 에어 캐나다, 나고야, 상하이, 홍콩, 서울 방면을 맡아서 음식을 만들었다. 젊고 패기 왕성한 데다 에너지도 넘쳐나던 젊은 시절이었다. 평생 직장 삼겠다던 나의 바람과는 다르게 9.11 사태가 터지고 일괄적으로 해고됐다. 한국 식품점 케이터링 부서 과장과 내 비지니스의 꿈을 좇는 등 변화의 시기가 나의 불혹의 언저리에서 있었고 쓰디쓴 맛도 보고 변화도 많았다. 안정적인 직장을 잡기 위해 캐나다 공군의 조리병으로 지원을 하기도 했지만 이라크 전쟁에 파병될 수도 있다고 극구 말리는 가족으로 포기하고 안정적인 직장이 되지 못하고, 오래 다녀야지 하면 다닐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곤 했다. 지난해와 올해는 직장의 변동이 아주 심했다. 모두 나의 의도와 다른 결과였다. 나이 들면 취직하기도 힘드니 한 직장에서 오래 있으면서 혜택을 보고 마음도 안정되는 것이 좋다. 하지만 결과적으론 떠돌이처럼 되어 버렸다. 지난주에도 하루 4번씩 면접을 봤지만, 한 군데의 오퍼도 받지 못하고 외곽이고 기간이 정해 진 직장에서 오퍼가 와서 울며 겨자 먹기로 가기로 했다.

풀잎은 바람에 쓰러져도, 홍수에 쓸려나가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일을 죽기 전까지 최선을 다한다. 젊어서는 꿈이 많아 나도 커다란 동량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풀잎이어도 괜찮다. 바람에 흔들리고 홍수에 쓸려나가도 악착같이 뿌리를 내려 살아가리라. 왜냐하면 나에게는 나를 믿어 주는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고, 지인들이 있으니까?

갑작스러운 해고는 정신적인 충격을 많이 받는다. 그리고 그것이 자꾸 겹쳐지거나 반복이 되면 정말 내가 뭘 잘못한 것은 아닌가 하고 자신을 의심하고 자신감이 떨어지게 된다. 나의 잘못이 아니었고 억울한 일들이었음에도 사람들에게 그렇게 비추어질 수 있다. 아니 그렇게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2년 전에 뇌경색으로 인해 정상적인 생활을 한다고 해도 무리하면 바로 몸에서 알고 표가 난다. 병원이 멀거나 외곽 지역은 그래서 가길 꺼렸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누구는 나에게 눈높이를 낮추라고 조언을 하지만 눈높이를 낮추어도 마찬가지 결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신문에 실업률이 역대 최저라는 기사를 보았다. 아무리 실업률이 낮으면 뭐하나 내가 직장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아니 오히려 다들 직장을 잘 잡고 다니는데 나만 직장에서 떨구어진 것 같아 더 우울한 감이 없지 않다. 지난해 위슬러 호텔에 일하러 갔는데 전에 면접 본 대학 식당에서 연락이 와서 내려왔었다. 위슬러 올라갔다고 케주얼 잡이던 구세군에서 해고 편지를 받았다. 대학 식당에선 매니지먼트라고 오버타임 페이도 안 하고 12시간씩 일을 시켜 따지더니 또 해고됐다. 또 다른 직장에서는 크라이언트가 불평 불만하는 것과 다른 직원 보고서만 듣고 또 해고시켰다. 해명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안다. 또 다른 곳에선 수퍼바이저를 뽑아 놓고 라인 쿡을 잘못한다고 그만두라고 했다. 거듭되는 해고에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마음은 더욱 주눅이 들었지만, 면접을 보면서 희망을 가졌었다. 하지만 될 듯하던 직장들이 모두 오퍼 하나 없는 결과를 만들자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하나 들어 온 오퍼를 잡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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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민(Terry)
캐나다 BC주 밴쿠버에 사는 ‘셰프’이자, 시인(詩人)이다. 경희대학교에서 전통 조리를 공부했다. 1987년 군 전역 후 조리 학원에 다니며 한식과 중식도 경험했다. 캐나다에서는 주로 양식을 조리한다. 법명은 현봉(玄鋒).
전재민은 ‘숨 쉬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고 말한다. ‘나 살자고 한 시 쓰기’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어 ‘타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밥만으로 살 수 없고, 숨만 쉬고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고 전재민은 말한다. 그는 시를 어렵게 쓰지 않는다.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종교인이 직업이지만, 직업인이 되면 안 되듯, 문학을 직업으로 여길 수 없는 시대라는 전 시인은 먹고살기 위해 시를 쓰지 않는다. 때로는 거미가 거미줄 치듯 시가 쉽게 나오기도 하고, 숨이 막히도록 쓰지 못할 때도 있다. 시가 나오지 않으면 그저 기다린다.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오늘도 시를 쓴다.
2017년 1월 (사)문학사랑으로 등단했다. 2017년 문학사랑 신인 작품상(아스팔트 위에서 외 4편)과 충청예술 초대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사랑 회원이자 캐나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밴쿠버 중앙일보 명예기자이다. 시집 <밴쿠버 연가>(오늘문학사 2018년 3월)를 냈고, 계간 문학사랑 봄호(2017년)에 시 ‘아는 만큼’ 외 4편을 게재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밴쿠버 중앙일보에 <전재민의 밴쿠버 사는 이야기>를 연재했고, 밴쿠버 교육신문에 ‘시인이 보는 세상’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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