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界無法 (삼계무법) 法求何處 (법구하처) 四大本空 (사대본공) 佛依何住 (불의하주)
삼계에는 진리의 법이 없거늘 어느 곳에서 법을 구할 것이며 사대가 본래 공하거늘 부처는 어디를 의지하여 머물 것인고.
여기에서 분명히 전신자재(轉身自在)할 것 같으면, 모든 부처님과 역대 도인으로 더불어 미래제(未來際)가 다하도록 부처님 국토에서 안온락(安穩樂)을 누리게 될 것이다.
금일(今日)은 임인년(壬寅年) 하안거(夏安居) 결제일(結制日)이라. 이렇게 산문(山門)을 폐쇄(閉鎖)하고 모든 반연(攀緣)을 끊고 구순안거(九旬安居)에 들어가는 것은 생사윤회의 고통에서 영원히 벗어나기 위함이라.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이 일을 해결하려고 왕궁 부귀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출가(出家)하여 수도(修道)하셨고, 역대(歷代)의 모든 도인 스님들께서도 이 일을 밝히기 위해 출가 수도하셨다.
모든 사람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 사바세계에 온 것이지 달리 다른 일이 없다.
만약 다른 일이 있다고 하는 이가 있을 것 같으면, 그 사람은 미래제(未來際)가 다하도록 만반(萬般) 고통에서 헤어날 기약이 없는 자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나고 죽는 이 고통의 굴레에서 영구히 벗어나 세세생생(世世生生) 열반(涅槃)의 낙을 누릴 수가 있느냐? 부처님 경서(經書)에는 팔만 사천 길이 펼쳐져 있지만 다 바른 길이 아니다.
오직 부처님의 최상승법(最上乘法)인 이 선법(禪法)을 통해서, 인인개개인(人人箇箇人)이 각자 자신의 성품을 바로 볼 때라야만 가능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참선수행을 하는데도 어째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는가?
이 참선법은 화두일념이 지속된다면 깨달음이 저절로 오게 되어 있다. 그런데 사람이 과거 생에 지어온 무수 반연(攀緣)과 습기(習氣)로 인하여 온갖 기멸심(起滅心)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고로 깨달음이 오지 않는 것이다.
나고 죽는 괴로움에서 영구히 벗어나고자 한다면, 이번 생(生)은 태어나지 않은 셈치고, 오로지 화두참구에만 마음을 두어야 한다.
화두가 있는 이는 각자의 화두를 챙기되, 화두가 없는 이는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인가?' 하고 이 화두를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가나오나, 일체처 일체시에 챙기고 의심하기를 하루에도 천번 만번 반복해서 흐르는 물과 같이 끊어짐이 없도록 혼신(渾身)의 노력을 다해 참구(參究)해야 함이라.
이렇게 일념(一念)이 되도록 노력하다보면, 문득 참의심이 돈발(頓發)하여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밤인지 낮인지도 모르고 며칠이고 몇 달이고 흐르고 흐르다가 홀연히 사물을 보는 찰라에, 소리를 듣는 찰나에, 화두가 해결되어 불조(佛祖)의 백천공안(百千公安)을 한 꼬챙이에 꿰어 버리게 됨이니, 그러면 누가 어떤 물음을 던지더라도 석화전광(石火電光)으로 척척 바른 답을 내놓게 되고 제불제조(諸佛諸祖)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살림살이를 수용하게 됨이로다. 이것이 호왈견성(號曰見性)이요, 확철대오(廓徹大悟)라. 반드시 선지식을 친견하여 점검받아서 인가를 받아야 함이로다.
중국의 당나라 시대에 위대한 선지식이신 임제(臨濟) 선사께서 열반(涅槃)에 다다라 제자 삼성(三聖) 스님을 불러 이르셨다. "내가 이 세상을 뜬 후에 나의 정법안장(正法眼藏)을 멸(滅)하지 말라." 그러자 삼성 스님이 말씀드리기를, "어찌 감히 스님의 정법안장을 멸하겠습니까?"하니, 임제 선사께서 물으셨다. "이후에 사람들이 정법안장을 물을 것 같으면, 너는 어떻게 말하려느냐?" "억!" 삼성 스님이 즉시 벽력 같은 "할(喝)"을 하니, 임제 선사께서 "나의 정법안장이 이 눈 먼 나귀한테서 멸하여 버릴 줄 누가 알았으리오?"라고 말씀하셨다. 아는 자는 이렇게 척척 응(應)하는 법이다.
삼성 스님을 알겠는가? 掃土已盡(소토이진) 흙을 쓸어 이미 다하였음이라. 여기에서 인가(印可)받으신 삼성(三聖) 선사께서는 한 곳에 주(住)하며 회상을 여시지 않고, 천하 총림(叢林)을 두루 행각(行脚)하셨다.
어느 때, 천오백 대중을 거느리고 계시던 설봉 선사의 회상에서 지내시면서 설봉 선사께 여쭈셨다. "그물을 뚫고 나온 금잉어는 무엇을 먹습니까?" "그대가 그물을 뚫고 옴을 기다렸다가 일러 주리라." 그러자 삼성 선사께서 벽력같은 소리로, "천오백 대중을 거느린 대선지식(大善知識)이 화두도 알지 못하는구나."하시니, 설봉 선사께서는 "노승(老僧)이 주지 일에 번거로워서 그렇네."라고 말씀하셨다. 또 하루는 설봉 선사와 삼성 선사께서 함께 길을 가시던 중에 원숭이 몇 마리가 길가에서 놀고 있으니, 설봉 선사께서 보시고 말씀하셨다. "저 원숭이들이 각기 한 개의 옛 거울[古鏡]을 짊어지고 있구나." 그러자 삼성 선사께서 그 말을 받아서, "몇 겁을 지내도 이름이 없거늘, 어찌하여 옛 거울이라고 합니까?"하시니, 설봉 선사께서 "흠이 생겼구나"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삼성 선사께서 또, "천오백 대중을 거느리는 대선지식이 화두도 알지 못하는구나."하시자, 설봉 선사께서도 역시 종전과 같이 말씀하셨다. "노승이 주지 일에 번거로워서 그렇네."
이 두 문답은, 우리가 공부를 잘 해서 향상(向上)의 일구(一句)를 투과(透過)해야만 그 심오한 낙처(落處)를 척척 밝힐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이 문답의 낙처를 밝히지 못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은 본분종사(本分宗師)의 자격이 없는 이라 하겠다.
그 후, 삼성 선사께서는 역시 천오백 대중을 거느리고 계시는 위산(潙山)선사의 회상을 찾아가서, 그 곳에서 여러 해 동안 지내셨다.
그 큰 회상에서 살림살이를 드러내놓지 않고 대중들과 같이 묵묵히 수행생활을 하셨는데도, 위산 선사께서는 당신 회상(會上)에 위대한 안목자(眼目者)가 와 있다는 것을 간파(看破)하시고 계셨다. 하루는 위산 선사께서 시자(侍者)에게, 삼성 선사께 작달막한 나무 막대기를 하나 가지고 가서 이렇게 묻게 하셨다. "스님, 이것을 들겠습니까?" 시자가 위산 선사께서 시키신 대로 가서 여쭙자, 삼성 선사께서는 즉시, "큰스님께서 일이 있으시구나"라고 말씀하셨다. 시자가 위산 선사께 가서 그대로 아뢰자, 위산 선사께서 다시 이르셨다. "너가 다시 가서 종전과 같이 행해 보이며 여쭈어라." 그 답으로는 만족되지 않아, 다시 답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시자가 다시 가서 여쭙자, 삼성 선사께서는 "다시 범한다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再犯不容 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위산 선사께서 이 말을 전해 들으시고는 매우 흡족해 하셨다.
그런 뒤 며칠이 지나, 삼성 선사께서 하직인사를 하시자, 위산 선사께서 법(法)을 전하시려고 시자에게 주장자(주杖子)를 가져오라고 하셨다. 그러자 삼성 선사께서 "저의 스승은 따로 계십니다."라고 하시니, 위산 선사께서 놀라며 물으셨다. "누구신가?" "임제(臨濟)선사이십니다." "임제 선사는 과연 훌륭한 제자를 두셨구나."하시며 위산 선사께서 크게 찬탄하셨다. 시회대중은 위산 선사와 설봉 선사의 살림살이의 진가(眞價)를 알겠느냐? 과연, 천오백 인의 선지식이로다. 그러면, 위산.설봉 선사와 멋진 법거량(法擧揚)을 하신 삼성 선사를 알겠는가?
석화(石火)와 전광(電光)의 날카로운 종안(宗眼)을 갖추어서 높은 하늘에 홀로 걸음하니, 일천 성인(一千聖人)도 붙잡아 가둘 수 없음이로다.
필경(畢竟)에 진리의 일구(一句) 어떠한가? 雲在嶺上閑不撤 (운재령상한불철) 流水澗下太忙生 (류수간하태망생) 산마루에 구름은 한가히 떠 있는데 개울 아래 흐르는 물은 유달리도 바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