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종 진성 스님 "부처님오신날? '먹고살자'는 날"
태고종 진성 스님 "부처님오신날? '먹고살자'는 날"
  • 조현성 기자
  • 승인 2022.05.07 14: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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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축특집] 갑룡장학회 등 마이산탑사 남다른 봉사활동 비결은 '자기성찰'

증조부 이갑용 거사 원력, 활발한 사회봉사 나눔활동으로 ing
진성 스님은 좋은 일을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나눔활동은 마약과 같다. 한번 해서 즐거움을 맛보고 나면 끊을 수 없다고 했다



 

"부처님은 억지로 오셨습니다. 부처님오신날은 중들이 먹고 살자고 하는 날입니다."

진안 마이산탑사 주지 진성 스님(태고종 전북교구종무원장)은 이같이 말했다. 8일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부처님 오신 뜻이 무엇인지'를 물음에 열린 스님의 첫 말문이다.

스님은 "부처님이 오신다고 해서 세상을 구원해줬겠나. 부처님, 하나님이 오신다고 해서 세상의 죽은 사람들이 살아났느냐"고 했다. 

스님은 세월호 당시 이야기를 꺼냈다. 

법당에 있는데 한 방문객이 말을 건넸다. 
(부처님을 가리키며) "저분은 누구십니까?"
스님은 답했다. 
"부처님이십니다."
"부처님이 계시는데 왜 세월호 아이들을 다 죽였어요?"
(순간 멍했다가) "죄송합니다. 우리 성직자가 부족했습니다. 우리 기도가 부족했습니다."

스님은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한 부처님과 하나님이 원망스럽다'며 울분 토하는 이에게 달리 뭐라 말할 수 있었겠느냐. 로마 제국이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멸망했느냐"고 했다.

이어서 "부처님은 6년 고행에도 깨닫지 못했다. 과거7불이 있었어도 중생을 구제할 이는 없었다는 것을 알고 수자타가 준 우유죽을 받아 마시고는 '성불은 다른게 아니라 내 배가 불러야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진안 마이산탑사 전경



 



마이산탑사를 세운 진성 스님의 증조부 이갑용 거사. 억조창생을 위해 108석탑을 세우고 산신제를 지내 모은 돈으로는 독립운동을 도왔다



"어떻게 살아야?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면 돼"

스님은 "부처님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기본 원리를 가르쳐주셨다. 그게 불교가 됐다. 우리는 그 쉬운 가르침도 실천하지 못하며 산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구원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살 길을 택해야 한다. 천국은 내가 행복할 때이고, 지옥은 내가 불행할 때"라고 했다. "네가 아프면 나도 아프고, 불보살이 아프다. 온 세계 질병이 창궐하고 갈등과 전쟁통인데 불보살들이 얼마나 가슴아프겠느냐. 성직자들이 보다 많은 사회활동을 통해서 이웃들이 험난한 상황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야한다"고 했다.

진성 스님의 오랜 기간, 셀 수 없이 많은 사회봉사활동은 이같은 생각에서 비롯됐다. "부처님오신날은 중들이 먹고 살자고 만든 것"이라는 말처럼 스님의 여러 행동은 자기성찰에서 시작됐다.

말 귀 같은 바위봉우리가 우뚝 솟은 영산 마이산에 108석탑을 세워 마이산탑사를 창건하며 억조창생(億兆蒼生) 구제를 발원한 스님의 증조부 이갑룡 거사(1860~1957, 효령대군 16대손), 1907년 의병단 '호남창의동맹단'을 결성해 7년 동안 항거했던 이석용 선생(1877~1914)의 DNA가 출가한 진성 스님에게 이어지고 있다. 
 
 



진성 스님이 아이들이 보내온 저금통을 들어 보이고 있다. 스님은 저 반쯤 채워진 저 저금통을 모두 채워 아이들 이름으로 기부한다




"어떻게 살아야 스님일까" 의문이 만든 변화들

출가 전 진성 스님은 클라리넷 연주가가 꿈이었다. 손가락을 다쳐 클라리넷을 연주할 수 없게 되자 출가를 했다. 1985년 출가 후 1993년까지 서울에서 공부하면서 부전을 살았다. 당시 스님으로서 권위만을 교육받았다고 했다.

"폼생폼사라고? 스님이 왜 그렇게 폼만 잡고 살아야하나?" 어린 진성 스님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스님의 집안 일을 도우라는 권유에 스님은 마이산탑사로 왔다. 대체의학을 배웠던 스님은 아프다는 신도들에게 지압을 해줬더니 다들 너무 좋아하는 것을 보고 알았다. "신도들은 스님의 권위보다 낮은 자리에서 어울리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것을.
  
진성 스님이 탑사로 돌아오기 전, 부친 혜명 스님(마이산탑사 회주)은 사회활동에 치중하느라 절살림을 부전스님에게 맡기고 있었다.

스님은 당시 절에 돈이 얼마나 흔했냐면 동전들은 비닐에 담아 한쪽에 쌓아두고 있었다고 했다. "이갑용 할아버지는 탑사를 세우고 산신제를 지내서 모은 돈을 만주로 보내 독립운동을 도왔는데"라고 스님은 생각했다.

지금도 아이들은 자기 이름이 쓰인 저금통에 동전을 모아 스님에게 보낸다. 스님은 그 저금통을 가득 채워 진안사랑장학재단으로 보낸다. 

작은 돈이라며 소홀히 여기던 동전이라도 할아버지처럼 필요한 곳에 소중하게 사용하자는 마음이었다. 1993년 '갑룡장학회'는 이렇게 시작됐다. '갑룡장학회'의 장학생 선발은 여느 장학회와 다르다. 성적우수자만 챙기지 않는다. 1~3등 말고 10~30등을 챙기자는게 스님 생각이다. 봉사마일리지제도를 만들었다. 학생들이 진안군자원봉사센터를 통해서 봉사활동을 하면 마일리지를 적립해 장학금을 차등 지급하는 방식이다. (조)부모도 봉사마일리지 적립이 가능케 했다. 할머니가 손자 장학금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는 선순환이 만들어졌다.
 



2019년 베트남 부오혼 초등학교를 찾아 정수시설 설치와 필터 교체 등 정기적인 지원을 약속한 진성 스님





코로나19 팬데믹에도 진성 스님의 나눔은 멈추지 않았다. 2020년 11월 마이산탑사는 베트남 닥랑성 등에 자전거 등을 비대면으로 전달했다



 

"부처님오신날 끝나고 바로 해외 나가지 맙시다"

태고종이 2010년 설립한 해외구호단체 나누우리도 진성 스님 주도로 이뤄졌다. 스님이 총무원 소임을 살았을 때다.
스님들이 해마다 부처님오신날이 끝나면 해외여행을 나갔다. 그즈음 김포·김해공항에 가면 스님들이 넘쳐났다.

"스님, 해외 놀러다니는 것 창피하지도 않아요?"
진성 스님은 묵원 스님(나누우리 상임이사)에게 말했다. 
"우리 적어도 부처님오신날 끝나고 바로 해외 나가지 맙시다. 너무 부끄럽습니다."

진성 스님의 스님들이 (신도들 시주 받아서) 해외로 놀러나가지 말자는 성찰, 해외로 나가더라도 구호활동 봉사활동 등 좋은 일을 하러 나가자는 생각은 나누우리 설립으로 이어졌다. 나누우리는 베트남 당락성 등 동남아 여러 나라에 학교 설립, 정수기 설치 등 지원사업을 했다.

스님은 "좋은 일(나눔활동)을 한다는 소문이 나면서 안할래야 안할 수가 없다. 왜 우리는 안오냐는 성화가 빗발친다"고 했다. "법문은 짧게 하고 놀아주는 등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갖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좋은 일은 마약과 같다. 하고 나면 기쁘고 즐겁다. 이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고 나면 끊기가 힘들다. 계속 할 수 밖에 없다"고 했다.



진성 스님이 진안군자원봉사센터와 함께 하고 있는 사랑의집 짓기, 자재 구입을 위한 후원금과 인건비 등을 모두 재능기부 등 나눔을 통해 하고 있다





진성 스님 제안으로 복성산업개발은 2020년 정관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영산재 후 나눔활동을 했다





코로나19 팬데믹에 진안 지역 주택을 찾아 방역활동을 했던 진성 스님




나눔은 해피바이러스, 알릴수록 참여 늘어나 

스님이 출가 전 좋아했던 음악도 나눔이 됐다. 2013년 창단한 탑밴드 봉사단이다. 신도들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난타와 색소폰을 가르친 것이 양로원 군부대 등 위문공연으로 이어졌다.

진성 스님은 2001년 지인 소개로 사형수를 만난 뒤로는 교정활동도 하고 있다. 2007년 전주교도소교정협의회를 시작으로 정식 활동 후 꾸준히 활동을 하고 있다. 일대일 멘토링과 자매결연 등으로 연인원 1만7000여 명이 새 삶을 지원 받았다.

스님의 나눔은 건설 현장으로도 이어졌다. 신도기업인 복성산업개발(회장 박금태)은 전국 여러 공사현장에서 영산재를 봉행하고 외국인노동자 등을 위한 백미나눔을 하고 있다. 
 
마이산탑사는 많은 보도자료를 배포하고 있다. 태고종 사찰 가운데 가장 많다. 총무원보다도 많이 자주 행사를 알린다. 스님은 "많이 알려야 나눔활동도 늘어난다. 스님들이 질투와 시기심이 많다"고 귀띔했다.

그러면서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나눔활동을 했던 한 스님 이야기를 전했다. "진성 스님 조언에 나눔활동을 알렸더니 A스님 B스님도 하더라"는게 그 스님 말이었다.

진성 스님은 "중이 돼서 목탁을 치고 참선을 하는 등 상구보리를 한다고 한들, 코로나19를 이겨내는 건 결국 대중의 몫이다. 대중이 스스로 잘할 수 있게 성직자는 인례 역할을 할 뿐"이라고 했다.

 



진성 스님은 "태고종에 부조리가 많았고 그 결과 한국불교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많이 추락했다"면서도 "태고종 미래는 밝다"고 했다.
진성 스님은 좋은 일을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나눔활동은 마약과 같다. 한번 해서 즐거움을 맛보고 나면 끊을 수 없다고 했다

 

"부처님은 억지로 오셨습니다. 부처님오신날은 중들이 먹고 살자고 하는 날입니다."

진안 마이산탑사 주지 진성 스님(태고종 전북교구종무원장)은 이같이 말했다. 8일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부처님 오신 뜻이 무엇인지'를 물음에 열린 스님의 첫 말문이다.

스님은 "부처님이 오신다고 해서 세상을 구원해줬겠나. 부처님, 하나님이 오신다고 해서 세상의 죽은 사람들이 살아났느냐"고 했다. 

스님은 세월호 당시 이야기를 꺼냈다. 

법당에 있는데 한 방문객이 말을 건넸다. 
(부처님을 가리키며) "저분은 누구십니까?"
스님은 답했다. 
"부처님이십니다."
"부처님이 계시는데 왜 세월호 아이들을 다 죽였어요?"
(순간 멍했다가) "죄송합니다. 우리 성직자가 부족했습니다. 우리 기도가 부족했습니다."

스님은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한 부처님과 하나님이 원망스럽다'며 울분 토하는 이에게 달리 뭐라 말할 수 있었겠느냐. 로마 제국이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멸망했느냐"고 했다.

이어서 "부처님은 6년 고행에도 깨닫지 못했다. 과거7불이 있었어도 중생을 구제할 이는 없었다는 것을 알고 수자타가 준 우유죽을 받아 마시고는 '성불은 다른게 아니라 내 배가 불러야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진안 마이산탑사 전경
진안 마이산탑사 전경

 

마이산탑사를 세운 진성 스님의 증조부 이갑용 거사. 억조창생을 위해 108석탑을 세우고 산신제를 지내 모은 돈으로는 독립운동을 도왔다
마이산탑사를 세운 진성 스님의 증조부 이갑용 거사. 억조창생을 위해 108석탑을 세우고 산신제를 지내 모은 돈으로는 독립운동을 도왔다

"어떻게 살아야?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면 돼"

스님은 "부처님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기본 원리를 가르쳐주셨다. 그게 불교가 됐다. 우리는 그 쉬운 가르침도 실천하지 못하며 산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구원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살 길을 택해야 한다. 천국은 내가 행복할 때이고, 지옥은 내가 불행할 때"라고 했다. "네가 아프면 나도 아프고, 불보살이 아프다. 온 세계 질병이 창궐하고 갈등과 전쟁통인데 불보살들이 얼마나 가슴아프겠느냐. 성직자들이 보다 많은 사회활동을 통해서 이웃들이 험난한 상황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야한다"고 했다.

진성 스님의 오랜 기간, 셀 수 없이 많은 사회봉사활동은 이같은 생각에서 비롯됐다. "부처님오신날은 중들이 먹고 살자고 만든 것"이라는 말처럼 스님의 여러 행동은 자기성찰에서 시작됐다.

말 귀 같은 바위봉우리가 우뚝 솟은 영산 마이산에 108석탑을 세워 마이산탑사를 창건하며 억조창생(億兆蒼生) 구제를 발원한 스님의 증조부 이갑룡 거사(1860~1957, 효령대군 16대손), 1907년 의병단 '호남창의동맹단'을 결성해 7년 동안 항거했던 이석용 선생(1877~1914)의 DNA가 출가한 진성 스님에게 이어지고 있다. 
 
 

진성 스님이 아이들이 보내온 저금통을 들어 보이고 있다. 스님은 저 반쯤 채워진 저 저금통을 모두 채워 아이들 이름으로 기부한다
진성 스님이 아이들이 보내온 저금통을 들어 보이고 있다. 스님은 저 반쯤 채워진 저 저금통을 모두 채워 아이들 이름으로 기부한다


"어떻게 살아야 스님일까" 의문이 만든 변화들

출가 전 진성 스님은 클라리넷 연주가가 꿈이었다. 손가락을 다쳐 클라리넷을 연주할 수 없게 되자 출가를 했다. 1985년 출가 후 1993년까지 서울에서 공부하면서 부전을 살았다. 당시 스님으로서 권위만을 교육받았다고 했다.

"폼생폼사라고? 스님이 왜 그렇게 폼만 잡고 살아야하나?" 어린 진성 스님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스님의 집안 일을 도우라는 권유에 스님은 마이산탑사로 왔다. 대체의학을 배웠던 스님은 아프다는 신도들에게 지압을 해줬더니 다들 너무 좋아하는 것을 보고 알았다. "신도들은 스님의 권위보다 낮은 자리에서 어울리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것을.
  
진성 스님이 탑사로 돌아오기 전, 부친 혜명 스님(마이산탑사 회주)은 사회활동에 치중하느라 절살림을 부전스님에게 맡기고 있었다.

스님은 당시 절에 돈이 얼마나 흔했냐면 동전들은 비닐에 담아 한쪽에 쌓아두고 있었다고 했다. "이갑용 할아버지는 탑사를 세우고 산신제를 지내서 모은 돈을 만주로 보내 독립운동을 도왔는데"라고 스님은 생각했다.

지금도 아이들은 자기 이름이 쓰인 저금통에 동전을 모아 스님에게 보낸다. 스님은 그 저금통을 가득 채워 진안사랑장학재단으로 보낸다. 

작은 돈이라며 소홀히 여기던 동전이라도 할아버지처럼 필요한 곳에 소중하게 사용하자는 마음이었다. 1993년 '갑룡장학회'는 이렇게 시작됐다. '갑룡장학회'의 장학생 선발은 여느 장학회와 다르다. 성적우수자만 챙기지 않는다. 1~3등 말고 10~30등을 챙기자는게 스님 생각이다. 봉사마일리지제도를 만들었다. 학생들이 진안군자원봉사센터를 통해서 봉사활동을 하면 마일리지를 적립해 장학금을 차등 지급하는 방식이다. (조)부모도 봉사마일리지 적립이 가능케 했다. 할머니가 손자 장학금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는 선순환이 만들어졌다.
 

태고종 전북종무원 진성 스님은 베트남 부오혼 초등학교에 정수시설 설치와 필터 교체 등 정기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2019년 베트남 부오혼 초등학교를 찾아 정수시설 설치와 필터 교체 등 정기적인 지원을 약속한 진성 스님
코로나19 팬데믹에도 진성 스님의 나눔은 멈추지 않았다. 2020년 11월 마이산탑사는 베트남 닥랑성 등에 자전거 등을 비대면으로 전달했다
코로나19 팬데믹에도 진성 스님의 나눔은 멈추지 않았다. 2020년 11월 마이산탑사는 베트남 닥랑성 등에 자전거 등을 비대면으로 전달했다

 

"부처님오신날 끝나고 바로 해외 나가지 맙시다"

태고종이 2010년 설립한 해외구호단체 나누우리도 진성 스님 주도로 이뤄졌다. 스님이 총무원 소임을 살았을 때다.
스님들이 해마다 부처님오신날이 끝나면 해외여행을 나갔다. 그즈음 김포·김해공항에 가면 스님들이 넘쳐났다.

"스님, 해외 놀러다니는 것 창피하지도 않아요?"
진성 스님은 묵원 스님(나누우리 상임이사)에게 말했다. 
"우리 적어도 부처님오신날 끝나고 바로 해외 나가지 맙시다. 너무 부끄럽습니다."

진성 스님의 스님들이 (신도들 시주 받아서) 해외로 놀러나가지 말자는 성찰, 해외로 나가더라도 구호활동 봉사활동 등 좋은 일을 하러 나가자는 생각은 나누우리 설립으로 이어졌다. 나누우리는 베트남 당락성 등 동남아 여러 나라에 학교 설립, 정수기 설치 등 지원사업을 했다.

스님은 "좋은 일(나눔활동)을 한다는 소문이 나면서 안할래야 안할 수가 없다. 왜 우리는 안오냐는 성화가 빗발친다"고 했다. "법문은 짧게 하고 놀아주는 등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갖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좋은 일은 마약과 같다. 하고 나면 기쁘고 즐겁다. 이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고 나면 끊기가 힘들다. 계속 할 수 밖에 없다"고 했다.

진성 스님이 진안군자원봉사센터와 함께 하고 있는 사랑의집 짓기, 자재 구입을 위한 후원금과 인건비 등을 모두 재능기부 등 나눔을 통해 하고 있다
진성 스님이 진안군자원봉사센터와 함께 하고 있는 사랑의집 짓기, 자재 구입을 위한 후원금과 인건비 등을 모두 재능기부 등 나눔을 통해 하고 있다
진성 스님 제안으로 복성산업개발은 2020년 정관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영산재 후 나눔활동을 했다
진성 스님 제안으로 복성산업개발은 2020년 정관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영산재 후 나눔활동을 했다
코로나19 팬데믹에 진안 지역 주택을 찾아 방역활동을 했던 진성 스님
코로나19 팬데믹에 진안 지역 주택을 찾아 방역활동을 했던 진성 스님


나눔은 해피바이러스, 알릴수록 참여 늘어나 

스님이 출가 전 좋아했던 음악도 나눔이 됐다. 2013년 창단한 탑밴드 봉사단이다. 신도들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난타와 색소폰을 가르친 것이 양로원 군부대 등 위문공연으로 이어졌다.

진성 스님은 2001년 지인 소개로 사형수를 만난 뒤로는 교정활동도 하고 있다. 2007년 전주교도소교정협의회를 시작으로 정식 활동 후 꾸준히 활동을 하고 있다. 일대일 멘토링과 자매결연 등으로 연인원 1만7000여 명이 새 삶을 지원 받았다.

스님의 나눔은 건설 현장으로도 이어졌다. 신도기업인 복성산업개발(회장 박금태)은 전국 여러 공사현장에서 영산재를 봉행하고 외국인노동자 등을 위한 백미나눔을 하고 있다. 
 
마이산탑사는 많은 보도자료를 배포하고 있다. 태고종 사찰 가운데 가장 많다. 총무원보다도 많이 자주 행사를 알린다. 스님은 "많이 알려야 나눔활동도 늘어난다. 스님들이 질투와 시기심이 많다"고 귀띔했다.

그러면서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나눔활동을 했던 한 스님 이야기를 전했다. "진성 스님 조언에 나눔활동을 알렸더니 A스님 B스님도 하더라"는게 그 스님 말이었다.

진성 스님은 "중이 돼서 목탁을 치고 참선을 하는 등 상구보리를 한다고 한들, 코로나19를 이겨내는 건 결국 대중의 몫이다. 대중이 스스로 잘할 수 있게 성직자는 인례 역할을 할 뿐"이라고 했다.

 

진성 스님은 "태고종에 부조리가 많았고 그 결과 한국불교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많이 추락했다"면서도 "태고종 미래는 밝다"고 했다.
진성 스님은 "태고종에 부조리가 많았고 그 결과 한국불교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많이 추락했다"면서도 "태고종 미래는 밝다"고 했다.

 

태고종 중흥? 전체 사찰 자산 일제조사부터

스님은 '한국불교태고종' 종단 문제를 이야기할 때는 착잡함을 감추지 않았다. "태고종도로서 나는 무엇을 하고 있나 싶지만, 종도로서 종단에 누가 되고 싶지 않을 뿐"이라고 종단 정치 참여에 나서지 않을 뜻을 밝혔다.

스님은 "선배스님들이 종단을 이끌면서 쌓고 쌓인 부조리가 너무 많다. 한 예로 종도가 종단에 맡긴 절들을 셀수 없이 팔아먹었다"고 했다. 이어서 "태고종 내홍은 (편백운 전 총무원장이 탄핵됐다고 해서) 끝나지 않았다. 호명 집행부 출범 후 안정이 되고 있지만 아쉬움이 많다"고 했다.

스님은 투명한 재정운영을 위한 종단 자산 일제조사, 체계적인 조직 구성 등을 종단 개혁을 위한 우선 과제로 제시했다. 

이어서 내년 총무원장 선거 출마에는 "나는 생각 없다"고 선을 그엇다. "몇몇 스님 권유에 '나는 종단이 발전할 길이라면 뭐든지 하겠지만 총무원장은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고 말했다. "총무원장은 자기 자신을 버리고 종단을 이끌 스님이어야한다"고 했다.
 
진성 스님은 "태고종 종도 가운데 지식인 배출이 늘고 있고 종도의 사회활동 또한 활발해지고 있다. 태고종의 미래는 밝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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