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무문관: 영운경불의(靈雲更不疑)
신무문관: 영운경불의(靈雲更不疑)
  • 박영재 명예교수(서강대)
  • 승인 2022.05.02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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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선도회 박영재 교수와 마음공부 54.

성찰배경: 부처님오신 날에 즈음해 우리 모두 석가세존(釋迦世尊)의 일생에 관해 세밀히 살피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세존의 바른 깨달음[正覺]과 그 이후의 전법여정이 종교를 넘어 지구촌 길벗들에게 두루 통할 수 있는 영성지도를 제공해주기 때문입니다. 
특히 2500여 년 전 보리수 아래서의 정각은 불교의 출발점이라 사료됩니다. 또한 불교의 여러 갈래 가운데 선종(禪宗)의 수행자들 역시 깨침의 증거의 하나인 ‘오도송(悟道頌) 짓기’를 포함해 정각 체득 가풍을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한편 칼럼의 순서상 마침 위산영우(潙山靈祐, 771-853) 선사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앙산혜적(仰山慧寂, 803-887) 선사나 향엄지한(香嚴智閑, ?-898) 선사에 필적할 만한 역량을 갖춘 영운지근(靈雲志勤) 선사에 관해 다룰 차례이기도 해서, 이번 글에서는 세존의 정각과도 맞닿아 있는 역대 조사들 가운데 가장 널리 애송되고 있는 그의 오도송과 선풍을 중심으로 함께 살피고자 합니다. 
 





 


◇ 깨침에 대한 고찰 

깨침에 관한 기연은 ‘소리를 듣고 깨치다[聞聲悟道]’를 포함해 다양한데, 여기에서는 이 가운데 ‘사물을 보고 깨치다[見色明心]’에 관한 대표적인 동양과 서양 사례를 다루고자 합니다.

동양 사례: 영운경불의(靈雲更不疑)

먼저 <조당집(祖堂集)> 제19권에 기록되어 있는, 위산 선사께서 영운 스님을 인가(印可)하는 대목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영운 화상은 위산 선사의 법을 이었고, 복주(福州)에서 살았다. 영운 선사의 휘(諱)는 지근(志勤)이며, 복주 출신이다. 대위산(大溈山)의 위산 선사 문하에 입문해 스승의 법문을 들으며 밤낮으로 피로함도 잊고 마치 돌아가신 부모님을 간절히 그리워하듯이 치열하게 수행을 하니, 그와 견줄 수 있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우연히 어느 봄날 복사꽃이 무성하게 핀 것을 보다가 갑자기 깨달음을 얻어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다음과 같이 즉시 게송을 한 수 지었다.

“30년 동안 지혜의 보검(寶劍)을 찾아 헤매던 나그네여./ 그 몇 차례나 꽃이 피고 또한 가지에 새잎이 돋았던가?/ 복사꽃을 한 차례 본 다음부터/ 지금까지에 이르기까지 다시 의심 없네.[三十年來尋劍客. 幾逢花發幾抽枝. 自從一見桃花後 直至如今更不疑.]”

그러다 어느 날 영운 스님이 위산 선사께 자신의 깨달은 선지(禪旨)가 담긴 이 게송을 말씀드렸다. 그러자 위산 선사께서 ‘인연 따라 철저히 깨달아 통달한 경계는 영원토록 후퇴해 사라질 수 없느니라.[從緣悟達 永無退失.] 그대가 이제 이미 그와 같으니 스스로 잘 지켜 지니며 향상(向上)의 길을 걷도록 하여라.’라고 격려하셨다.” 

군더더기: 참고로 영가현각(永嘉賢覺, 665-713) 선사는 스승 없이 홀로 깨달았습니다. 그는 이 깨달은 체험을 바탕으로 지은 가장 긴 오도송이 담긴 <증도가(證道歌)>를 저술하였는데, 필자의 견해로는 그 가운데 핵심은 깨침과 상보적(相補的)인 다음 구절이라 사료됩니다. 

“다만 근본(根本)을 깨닫고 나면 지말(枝末)은 근심하지 않네./ 마치 맑은 수정구슬[琉璃]이 보배의 달을 머금은 듯하니/ 지금 이 순간 각자 있는 그 자리에서 이 여의주를 바르게 통찰하고 나면/ 자신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는 통보불이(洞布不二)의 삶! 결코 쉼 없으리. [但得本莫愁末. 如淨琉璃含寶月 我今解此如意珠 自利利他終不歇.]”

한편 종달 선사께서도 80세가 되던 해에 출간한 회고록 <인생의 계단>을 통해 ‘재득조주무자(纔得趙州無字) 일생수용부진(一生受用不盡)’이란 게송을 제시하셨는데, 이를 풀어서 새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가까스로 조주 선사의 ‘무(無)’자(字) 화두를 투과한 이후, 이 통찰체험을 바탕으로 한 사람이라도 더 일깨워주기 위한 이타자리(利他自利)의 삶을 일생 동안 쉼 없이 살았노라!”

서양 사례: 지식과 지혜의 극명한 차이[知智懸隔]

한편 필자가 삼십여 년 간 몸담았던 서강대학교는 예수회라는 가톨릭 수도회에 의해 설립된 학교로 서강대학교 교육 이념의 밑바탕에는 ‘온몸을 던져 이웃돕기’를 포함해 참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셨던 설립자이신 이냐시오 로욜라 성인의 영성체험이 깔려 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성지순례 도중 만레사라는 작은 마을에서 묵상기도를 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다 하느님과의 일치체험, 즉 진정한 참나를 체득하게 됩니다. 그후 이 체험을 바탕으로 오늘날의 예수회가 있게 되었는데, 그는 만년에 쓴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습니다.

“내가 20대에 만레사라는 시골 마을의 어귀에 있는 동굴에서 1년 정도 지내던 어느 날 마을을 끼고 흐르고 있는 카르도넬 강변을 거닐다, 강물에 햇살이 반짝이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환하게 밝아졌는데, 이때의 일순간의 체험은 내가 지금 62세까지 배운 모든 지식을 다 합한다고 하더라도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즉 지식을 아무리 많이 쌓는다고 해도 결코 체득할 수 없는 지혜로운 삶의 중요성을 역설했던 것입니다. 덧붙여 지금까지 필자가 접했던 깨침 체득에 관한 사례들 가운데 동양과 서양을 통틀어, 비록 그 경지를 체득하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명료한 표현이라 사료됩니다. 

군더더기: 필자가 2016년 2학기에 담당했던 ‘우주와 인생’ 강의를 통해 내주었던 성찰글쓰기 과제 가운데 ‘일상 속 성찰’이 있었습니다. 이때 수강했던 한 학생이 마침 로욜라 성인이 크게 깨쳤던 성지(聖地) ‘만레사’에서 유래한, 서강대학교 도서관 3관에 위치한 서강인들의 사유와 명상을 위한 공간인 ‘만레사 존’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워진 글을 제출했었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만레사 존을 처음 이용한 것은 2013년에 복학하고 이런 공간이 생겼다는 말을 듣고 가본 것으로 1학년 때는 놀기에 바빠 도서관 대여증조차 만든 적 없던 내가 처음 만레사 존에 들어왔을 때, 내가 생각하던 대학교의 모습을 여기서 찾을 수 있음에 놀랐다. 반원형으로 길게 놓인 소파와 개인이 넓은 공간을 차지할 수 있는 소파, 그리고 아름답고 따뜻한 장식들로 꾸민 이 공간을 왜 ‘만레사 존’이라고 이름 붙였는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우리 학교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공간이 있다는 느낌을 주는 데는 충분했다. 하지만 여전히 공부보다는 놀기가 좋아서였을까, 그때 이후로 2년간 만레사 존을 찾지 않았다. (생략)

일상생활 속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한 과제여서 깨달음을 얻는 장소로 향했지만, 공부를 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만으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었다. 마치 성지순례를 위해 스페인 순례자의 길이나, 가자 지구를 다녀온다고 일반 신도가 성인이 되지 않듯, 영적인 깨달음을 얻는 장소인 만레사 존을 간다고 내가 영적인 깨달음을 얻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생략)

어쩌면 나는 만레사 존에 갈 필요가 없었을지 모른다. 굳이 영적인 깨달음을 주는 사유와 명상의 장소가 아니더라도, 어떤 사소한 것에 이름을 붙이듯 사소한 것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거기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깨달음이라는 길을 얻는데 있어서 정해진 길은 없을 것이다. 그 길이 순교자의 길이든 예루살렘이든 내가 오늘 지나가는 흙길이든 간에, 나 자신이 마음의 중심을 잡으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환경이 아니라, 내가 지니고 있는 마음가짐이라는 것을 이번 과제를 통해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다.” 

 

◇ 깨침에 대한 고찰 

깨침에 관한 기연은 ‘소리를 듣고 깨치다[聞聲悟道]’를 포함해 다양한데, 여기에서는 이 가운데 ‘사물을 보고 깨치다[見色明心]’에 관한 대표적인 동양과 서양 사례를 다루고자 합니다.

동양 사례: 영운경불의(靈雲更不疑)

먼저 <조당집(祖堂集)> 제19권에 기록되어 있는, 위산 선사께서 영운 스님을 인가(印可)하는 대목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영운 화상은 위산 선사의 법을 이었고, 복주(福州)에서 살았다. 영운 선사의 휘(諱)는 지근(志勤)이며, 복주 출신이다. 대위산(大溈山)의 위산 선사 문하에 입문해 스승의 법문을 들으며 밤낮으로 피로함도 잊고 마치 돌아가신 부모님을 간절히 그리워하듯이 치열하게 수행을 하니, 그와 견줄 수 있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우연히 어느 봄날 복사꽃이 무성하게 핀 것을 보다가 갑자기 깨달음을 얻어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다음과 같이 즉시 게송을 한 수 지었다.

“30년 동안 지혜의 보검(寶劍)을 찾아 헤매던 나그네여./ 그 몇 차례나 꽃이 피고 또한 가지에 새잎이 돋았던가?/ 복사꽃을 한 차례 본 다음부터/ 지금까지에 이르기까지 다시 의심 없네.[三十年來尋劍客. 幾逢花發幾抽枝. 自從一見桃花後 直至如今更不疑.]”

그러다 어느 날 영운 스님이 위산 선사께 자신의 깨달은 선지(禪旨)가 담긴 이 게송을 말씀드렸다. 그러자 위산 선사께서 ‘인연 따라 철저히 깨달아 통달한 경계는 영원토록 후퇴해 사라질 수 없느니라.[從緣悟達 永無退失.] 그대가 이제 이미 그와 같으니 스스로 잘 지켜 지니며 향상(向上)의 길을 걷도록 하여라.’라고 격려하셨다.” 

군더더기: 참고로 영가현각(永嘉賢覺, 665-713) 선사는 스승 없이 홀로 깨달았습니다. 그는 이 깨달은 체험을 바탕으로 지은 가장 긴 오도송이 담긴 <증도가(證道歌)>를 저술하였는데, 필자의 견해로는 그 가운데 핵심은 깨침과 상보적(相補的)인 다음 구절이라 사료됩니다. 

“다만 근본(根本)을 깨닫고 나면 지말(枝末)은 근심하지 않네./ 마치 맑은 수정구슬[琉璃]이 보배의 달을 머금은 듯하니/ 지금 이 순간 각자 있는 그 자리에서 이 여의주를 바르게 통찰하고 나면/ 자신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는 통보불이(洞布不二)의 삶! 결코 쉼 없으리. [但得本莫愁末. 如淨琉璃含寶月 我今解此如意珠 自利利他終不歇.]”

한편 종달 선사께서도 80세가 되던 해에 출간한 회고록 <인생의 계단>을 통해 ‘재득조주무자(纔得趙州無字) 일생수용부진(一生受用不盡)’이란 게송을 제시하셨는데, 이를 풀어서 새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가까스로 조주 선사의 ‘무(無)’자(字) 화두를 투과한 이후, 이 통찰체험을 바탕으로 한 사람이라도 더 일깨워주기 위한 이타자리(利他自利)의 삶을 일생 동안 쉼 없이 살았노라!”

서양 사례: 지식과 지혜의 극명한 차이[知智懸隔]

한편 필자가 삼십여 년 간 몸담았던 서강대학교는 예수회라는 가톨릭 수도회에 의해 설립된 학교로 서강대학교 교육 이념의 밑바탕에는 ‘온몸을 던져 이웃돕기’를 포함해 참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셨던 설립자이신 이냐시오 로욜라 성인의 영성체험이 깔려 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성지순례 도중 만레사라는 작은 마을에서 묵상기도를 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다 하느님과의 일치체험, 즉 진정한 참나를 체득하게 됩니다. 그후 이 체험을 바탕으로 오늘날의 예수회가 있게 되었는데, 그는 만년에 쓴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습니다.

“내가 20대에 만레사라는 시골 마을의 어귀에 있는 동굴에서 1년 정도 지내던 어느 날 마을을 끼고 흐르고 있는 카르도넬 강변을 거닐다, 강물에 햇살이 반짝이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환하게 밝아졌는데, 이때의 일순간의 체험은 내가 지금 62세까지 배운 모든 지식을 다 합한다고 하더라도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즉 지식을 아무리 많이 쌓는다고 해도 결코 체득할 수 없는 지혜로운 삶의 중요성을 역설했던 것입니다. 덧붙여 지금까지 필자가 접했던 깨침 체득에 관한 사례들 가운데 동양과 서양을 통틀어, 비록 그 경지를 체득하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명료한 표현이라 사료됩니다. 

군더더기: 필자가 2016년 2학기에 담당했던 ‘우주와 인생’ 강의를 통해 내주었던 성찰글쓰기 과제 가운데 ‘일상 속 성찰’이 있었습니다. 이때 수강했던 한 학생이 마침 로욜라 성인이 크게 깨쳤던 성지(聖地) ‘만레사’에서 유래한, 서강대학교 도서관 3관에 위치한 서강인들의 사유와 명상을 위한 공간인 ‘만레사 존’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워진 글을 제출했었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만레사 존을 처음 이용한 것은 2013년에 복학하고 이런 공간이 생겼다는 말을 듣고 가본 것으로 1학년 때는 놀기에 바빠 도서관 대여증조차 만든 적 없던 내가 처음 만레사 존에 들어왔을 때, 내가 생각하던 대학교의 모습을 여기서 찾을 수 있음에 놀랐다. 반원형으로 길게 놓인 소파와 개인이 넓은 공간을 차지할 수 있는 소파, 그리고 아름답고 따뜻한 장식들로 꾸민 이 공간을 왜 ‘만레사 존’이라고 이름 붙였는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우리 학교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공간이 있다는 느낌을 주는 데는 충분했다. 하지만 여전히 공부보다는 놀기가 좋아서였을까, 그때 이후로 2년간 만레사 존을 찾지 않았다. (생략)

일상생활 속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한 과제여서 깨달음을 얻는 장소로 향했지만, 공부를 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만으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었다. 마치 성지순례를 위해 스페인 순례자의 길이나, 가자 지구를 다녀온다고 일반 신도가 성인이 되지 않듯, 영적인 깨달음을 얻는 장소인 만레사 존을 간다고 내가 영적인 깨달음을 얻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생략)

어쩌면 나는 만레사 존에 갈 필요가 없었을지 모른다. 굳이 영적인 깨달음을 주는 사유와 명상의 장소가 아니더라도, 어떤 사소한 것에 이름을 붙이듯 사소한 것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거기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깨달음이라는 길을 얻는데 있어서 정해진 길은 없을 것이다. 그 길이 순교자의 길이든 예루살렘이든 내가 오늘 지나가는 흙길이든 간에, 나 자신이 마음의 중심을 잡으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환경이 아니라, 내가 지니고 있는 마음가짐이라는 것을 이번 과제를 통해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다.” 





 


◇ 깨침에 대한 고찰 

깨침에 관한 기연은 ‘소리를 듣고 깨치다[聞聲悟道]’를 포함해 다양한데, 여기에서는 이 가운데 ‘사물을 보고 깨치다[見色明心]’에 관한 대표적인 동양과 서양 사례를 다루고자 합니다.

동양 사례: 영운경불의(靈雲更不疑)

먼저 <조당집(祖堂集)> 제19권에 기록되어 있는, 위산 선사께서 영운 스님을 인가(印可)하는 대목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영운 화상은 위산 선사의 법을 이었고, 복주(福州)에서 살았다. 영운 선사의 휘(諱)는 지근(志勤)이며, 복주 출신이다. 대위산(大溈山)의 위산 선사 문하에 입문해 스승의 법문을 들으며 밤낮으로 피로함도 잊고 마치 돌아가신 부모님을 간절히 그리워하듯이 치열하게 수행을 하니, 그와 견줄 수 있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우연히 어느 봄날 복사꽃이 무성하게 핀 것을 보다가 갑자기 깨달음을 얻어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다음과 같이 즉시 게송을 한 수 지었다.

“30년 동안 지혜의 보검(寶劍)을 찾아 헤매던 나그네여./ 그 몇 차례나 꽃이 피고 또한 가지에 새잎이 돋았던가?/ 복사꽃을 한 차례 본 다음부터/ 지금까지에 이르기까지 다시 의심 없네.[三十年來尋劍客. 幾逢花發幾抽枝. 自從一見桃花後 直至如今更不疑.]”

그러다 어느 날 영운 스님이 위산 선사께 자신의 깨달은 선지(禪旨)가 담긴 이 게송을 말씀드렸다. 그러자 위산 선사께서 ‘인연 따라 철저히 깨달아 통달한 경계는 영원토록 후퇴해 사라질 수 없느니라.[從緣悟達 永無退失.] 그대가 이제 이미 그와 같으니 스스로 잘 지켜 지니며 향상(向上)의 길을 걷도록 하여라.’라고 격려하셨다.” 

군더더기: 참고로 영가현각(永嘉賢覺, 665-713) 선사는 스승 없이 홀로 깨달았습니다. 그는 이 깨달은 체험을 바탕으로 지은 가장 긴 오도송이 담긴 <증도가(證道歌)>를 저술하였는데, 필자의 견해로는 그 가운데 핵심은 깨침과 상보적(相補的)인 다음 구절이라 사료됩니다. 

“다만 근본(根本)을 깨닫고 나면 지말(枝末)은 근심하지 않네./ 마치 맑은 수정구슬[琉璃]이 보배의 달을 머금은 듯하니/ 지금 이 순간 각자 있는 그 자리에서 이 여의주를 바르게 통찰하고 나면/ 자신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는 통보불이(洞布不二)의 삶! 결코 쉼 없으리. [但得本莫愁末. 如淨琉璃含寶月 我今解此如意珠 自利利他終不歇.]”

한편 종달 선사께서도 80세가 되던 해에 출간한 회고록 <인생의 계단>을 통해 ‘재득조주무자(纔得趙州無字) 일생수용부진(一生受用不盡)’이란 게송을 제시하셨는데, 이를 풀어서 새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가까스로 조주 선사의 ‘무(無)’자(字) 화두를 투과한 이후, 이 통찰체험을 바탕으로 한 사람이라도 더 일깨워주기 위한 이타자리(利他自利)의 삶을 일생 동안 쉼 없이 살았노라!”

서양 사례: 지식과 지혜의 극명한 차이[知智懸隔]

한편 필자가 삼십여 년 간 몸담았던 서강대학교는 예수회라는 가톨릭 수도회에 의해 설립된 학교로 서강대학교 교육 이념의 밑바탕에는 ‘온몸을 던져 이웃돕기’를 포함해 참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셨던 설립자이신 이냐시오 로욜라 성인의 영성체험이 깔려 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성지순례 도중 만레사라는 작은 마을에서 묵상기도를 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다 하느님과의 일치체험, 즉 진정한 참나를 체득하게 됩니다. 그후 이 체험을 바탕으로 오늘날의 예수회가 있게 되었는데, 그는 만년에 쓴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습니다.

“내가 20대에 만레사라는 시골 마을의 어귀에 있는 동굴에서 1년 정도 지내던 어느 날 마을을 끼고 흐르고 있는 카르도넬 강변을 거닐다, 강물에 햇살이 반짝이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환하게 밝아졌는데, 이때의 일순간의 체험은 내가 지금 62세까지 배운 모든 지식을 다 합한다고 하더라도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즉 지식을 아무리 많이 쌓는다고 해도 결코 체득할 수 없는 지혜로운 삶의 중요성을 역설했던 것입니다. 덧붙여 지금까지 필자가 접했던 깨침 체득에 관한 사례들 가운데 동양과 서양을 통틀어, 비록 그 경지를 체득하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명료한 표현이라 사료됩니다. 

군더더기: 필자가 2016년 2학기에 담당했던 ‘우주와 인생’ 강의를 통해 내주었던 성찰글쓰기 과제 가운데 ‘일상 속 성찰’이 있었습니다. 이때 수강했던 한 학생이 마침 로욜라 성인이 크게 깨쳤던 성지(聖地) ‘만레사’에서 유래한, 서강대학교 도서관 3관에 위치한 서강인들의 사유와 명상을 위한 공간인 ‘만레사 존’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워진 글을 제출했었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만레사 존을 처음 이용한 것은 2013년에 복학하고 이런 공간이 생겼다는 말을 듣고 가본 것으로 1학년 때는 놀기에 바빠 도서관 대여증조차 만든 적 없던 내가 처음 만레사 존에 들어왔을 때, 내가 생각하던 대학교의 모습을 여기서 찾을 수 있음에 놀랐다. 반원형으로 길게 놓인 소파와 개인이 넓은 공간을 차지할 수 있는 소파, 그리고 아름답고 따뜻한 장식들로 꾸민 이 공간을 왜 ‘만레사 존’이라고 이름 붙였는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우리 학교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공간이 있다는 느낌을 주는 데는 충분했다. 하지만 여전히 공부보다는 놀기가 좋아서였을까, 그때 이후로 2년간 만레사 존을 찾지 않았다. (생략)

일상생활 속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한 과제여서 깨달음을 얻는 장소로 향했지만, 공부를 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만으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었다. 마치 성지순례를 위해 스페인 순례자의 길이나, 가자 지구를 다녀온다고 일반 신도가 성인이 되지 않듯, 영적인 깨달음을 얻는 장소인 만레사 존을 간다고 내가 영적인 깨달음을 얻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생략)

어쩌면 나는 만레사 존에 갈 필요가 없었을지 모른다. 굳이 영적인 깨달음을 주는 사유와 명상의 장소가 아니더라도, 어떤 사소한 것에 이름을 붙이듯 사소한 것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거기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깨달음이라는 길을 얻는데 있어서 정해진 길은 없을 것이다. 그 길이 순교자의 길이든 예루살렘이든 내가 오늘 지나가는 흙길이든 간에, 나 자신이 마음의 중심을 잡으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환경이 아니라, 내가 지니고 있는 마음가짐이라는 것을 이번 과제를 통해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다.” 

 

◇ 영운 선사의 선풍 엿보기

<조당집祖堂集> 19권 ‘영운화상’ 편에서 그의 선풍(禪風)을 다음과 같이 잘 엿볼 수 있습니다.

불자(拂子) 세우기 계승
앞 칼럼들에서 언급했던 마조(馬祖) 계열 선사들의 ‘불자(拂子)세우기’ 가풍도 영운 선사께서 역시 잘 이어가고 있음을 다음과 같은 문답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설봉의존(雪峰義存, 822-908) 선사 문하의 한 승려가 와서 ‘어떤 것이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실 때의 일입니까?[如何是佛出世時事.]’ 하고 여쭈었다. 이에 선사께서 불자를 들어 세웠다. 그러자 이 승려가 다시 ‘그러면 어떤 것이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시기 이전의 일입니까?[如何是佛未出世時事.]’ 하고 여쭈었다. 이에 선사께서 또다시 불자를 들어 세웠다. 
 
군더더기: 영운 선사께서 묻는 승려가 일으킨, 출세 전이니 출세 후이니 하는 이원적 분별을 철저히 끊게 하기 위해 친절하게 불자를 들어 세우셨는데, 만일 여러분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이에 대해 어떻게 응대하시겠습니까?

영운려마(靈雲驢馬)
영운 선사께서 제창한 ‘영운려마(靈雲驢馬)’ 공안은 이조 말기 경허성우(鏡虛惺牛, 1846-1912) 선사로 하여금 크게 깨닫게 한, ‘려사미거 마사도래(驢事未去 馬事到來)’ 화두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영운 선사께서 처음에 영응사(靈應寺)를 창건하고 나중에 영운(靈雲)에 머무르니, 뛰어난 제자들이 몰려들었다. 장경혜릉(長慶慧稜, 854-932)이 처음 뵈러 와서 ‘어떤 것이 불법의 대의입니까?[如何是佛法大意.]’ 하고 여쭈었다. 그러자 선사께서 ‘당나귀의 일이 끝나기도 전에 말의 일이 닥쳐오는구나.’[驢使未了 馬使到來]”라고 제창하셨다. 

군더더기: 자! 여러분이 당시 그 자리에 있었다면 영운 선사의 이 제창에 대해 어떻게 응대해야 당나귀니 말이니 하는 분별에서 자유로운 ‘려마불이(驢馬不二)’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참고로 서산대사(1520-1604)께서도 <선가귀감(禪家龜鑑)>에서 ‘려마(驢馬)’에 대해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하셨습니다. 

“보통 사람이 임종할 때, 털끝만큼이라도 범부(凡夫)라느니 성인(聖人)이라느니 하는 헤아림이 사라지지 않거나 사려분별(思慮分別)이 끊어지지 않는다면, 나귀의 태 안이나 말의 뱃속으로 끌려 들어가 짐승으로 태어나거나 지옥의 끓는 가마솥에서 삶아지는 고통을 겪거나 또는 종전[前生]처럼 다시 땅강아지·개미·모기·등에가 될 것이고, 만일 범부라도 사려분별이 끊어진다면 생사 해탈할 수 있을 것이니라.”

결국 모름지기 우리 모두 진정한 불제자라면 일상 속에서 날마다 치열하게 향상일로(向上一路)를 걸으며, 임종하기 전 반드시 어느 때인가 문득 모든 사려분별이 철저히 끊어진, 석가세존의 정각과도 맞닿아 있는 ‘다시 의심 없는 경지’로 나아가야겠지요! 

박영재 교수는 서강대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3년 3월부터 1989년 8월까지 강원대 물리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1989년 9월부터 2021년 2월까지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현재 서강대 물리학과 명예교수이다.
1975년 10월 선도회 종달 이희익 선사 문하로 입문한 박 교수는 1987년 9월 선사의 간화선 입실점검 과정을 모두 마쳤다. 1991년 8월과 1997년 1월 화계사에서 숭산 선사로부터 두 차례 점검을 받았다. 1990년 6월 종달 선사 입적 후 지금까지 선도회 지도법사를 맡고 있다. 편저에 <온몸으로 돕는 지구촌 길벗들>(마음살림, 2021)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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