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불교교류 비망록:이제, 다시 본다] 22. 2005년 개성 영통사 복원 낙성식
[남북불교교류 비망록:이제, 다시 본다] 22. 2005년 개성 영통사 복원 낙성식
  • 이지범 북한불교연구소 소장
  • 승인 2022.03.08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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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서해루트의 통일 성전으로”

해방 이후, 북측의 동서쪽에는 금강산 신계사와 개성 영통사가 유명하다. 두 곳의 절은 2005년 10월과 2007년 10월에 남북 공동으로 복원됐다. 신계사는 북측 조불련과 남측의 조계종, 영통사는 천태종에서 복원한 사찰이다.

6세기 초, 창건되어 1951년 6월에 소실된 외금강산 신계사와 다르게 개성 영통사는 1027년 창건된 이후, 16세기 말에 발발한 7년 전쟁(임진왜란) 때 소실하면서 그 명성도 함께 사라졌다.

개성 오관산의 웅장한 산악미・조화된 계곡미・울창한 수림미의 아름다움을 가졌던 영통사는 1799년 편찬된 《범우고》에서 “영통사는 동서로는 약 150칸, 남북으로는 약 80칸이나 되는 대규모 사찰이었다.”고 했다. 이 광경은 1592년 4월 13일에 발발한 임진년 전쟁 이전의 가람 모습이다. 그 후 1901년에 폐사한 것으로 기록된 영통사 터는 개인 집과 농지로 전용되는 등, 백 년 동안 ‘숲 풀에서 잠자는 유적’이라 불렀다.

천 년 전, 중국 송나라 서긍이 본 개경의 모습은 《고려도경》에 상상 그 이상으로 그려졌고, 왕궁에 필적할만한 규모의 사찰도 10곳이 넘었다고 했다. 고려 황궁인 개성 만월대 등과 마찬가지로 오관산 영통사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영남 사림의 종조인 점필재 김종직은 1478년 《유송도록》에서 “쌓은 것은 5백 년을 쌓아도 부족하였고, 허무는 것은 하루 만에 헐고 남음이 있었다.”라고 고려 도읍지의 흥망성쇠를 회고했다.

고요히 잠들었던 유적은 1997년 가을에 다시 깨어났다. 북측의 ‘령통사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 유적을 일깨웠고, 2000년 6월 평양에서의 남북정상회담은 그 유적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남북 관계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통일을 지향해가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된 특수관계라는 의미로, 국가와 국가를 드나드는 ‘출입국’이라는 용어 대신에 ‘출입경(出入境)’이라 쓴다. 이곳, 판문점 남북출입사무소에 근무하는 북측 군인들까지 경제협력이라 평가하는 개성 영통사의 복원과정과 완공에 이르기까지 뒷이야기를 다시 살펴본다.

복원된 개성 영통사 전경(2005.5.30.). 사진=조선관광(2005년).



개성 영통사, 비원의 이력

‘기록의 나라’로 불리는 고려와 조선에서조차 영통사에 관한 기록이 전무하다. “부엉이가 울었다.” 등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기록했는데, 고려왕과 명나라 사신까지 다녀갔던 영통사에 대해 한 줄의 기록조차 남기지 않은 것이 수수께끼라 할 수 있다.

고려 현종의 왕명으로 1027년 창건된 오관산 영통사는 태조 왕건의 선대 이래, 고려 왕실의 원찰이다.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에도 창건과 폐사에 관해 분명하지 않다. 1215년 각훈대사가 왕명으로 편찬한 《해동고승전》 권제1에는 “1027년(현종 18년)에 창건되었다.”

그러나 “946년 원공국사 지종이 17세 때, 영통사 관단에서 수계를 받았다.” 또 법상종의 고승 혜소국사 정현이 “980년대 영통사 관단에서 구족계를 받았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각국사의 은사이자 외삼촌인 경덕국사 김난원은 “영통사에서 수도하였으며, 왕명으로 문종의 넷째 왕자 후를 승려가 되게 하여 화엄교관을 가르쳤다.”라는 기록을 볼 때, 영통사는 11세기 초에 이미 대찰로 자리했다.

고려 왕씨 가문의 원찰인 영통사는 오관산 아래 마하갑(摩訶甲) 일대의 사찰을 통괄하는 사찰로 1027년에 창건 또는 중창됐다. 이 시기에 본격화된 《초조대장경》의 판각과 인쇄작업에 따른 고급인력과 종이 제조에 필요한 노동력의 수급, 닥나무 등 원자재 공급이 원활한 곳으로 선정되었을 가능성이 짙다. 그러므로 영통사는 제8대 고려 현종의 비원이 서린 사찰이라 할 수 있다.

그 후 1065년 5월 14일 대각국사 의천이 영통사에 출가하면서 고려 왕실에서는 다른 어떤 사찰보다 많은 참배를 하고, 왕실 주관의 재나 기신도량 등이 개설됐다. 고려 천태종을 개창한 대각국사가 1101년 10월 5일 입적하자. 2년 뒤에는 영통사 서북쪽에 제사 지낼 사당으로 쓴 경선원이 완공됐다. 이곳에 국사의 부도를 만들어 동쪽 석실에 모셔져 있던 유골을 이장하면서 대가람으로 변모했다.

조선 세종 때는 교종 18개 사찰의 한 곳으로 지정되고, 거주 승려 100명만이 허용되었다. 또 성종 때에는 수륙사로 지정됐다. 1502년 박은의 《읍취헌유고》에는 영통사에 스님들이 살고, 흙다리를 고쳤다고 했으며, 1510년대 김안로의 《희락당고》에서는 파괴된 절을 다시 세웠다고 했다. 16세기 이행은 《천마록》의 시에서 “옛 절은 퇴락하여 풀들만이 밝힌다.”라고 했다. 1554년 주세붕은 《무릉잡고》에서 "밤새도록 서쪽 누방에 베개를 누이다.”라고 한 것을 보더라도 영통사 전각들이 온전히 남아 있었다.

이러한 기록을 볼 때, 영통사와 숭복원의 후신인 흥성사는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 이전까지 고려 때의 위용은 아니더라도 중수와 보수가 여러 차례 이뤄진 것을 알 수 있다. 1671년 김창협이 쓴 《농암집》 <송경유람기>에는 “이 절은 옛 송경의 대가람으로, 중간에 화재를 당하여 건물이 열 중에 두셋 정도만 남아 있다. 뜰에는 세 개의 석탑이 서 있고 문밖에는 고려시대 승려 의천의 비가 서 있는데, 중간 이하는 글자가 떨어져 나가 읽을 수 없었다. 채수가 《유송도록》에서 매우 칭찬한 명승지 서루는 지금은 남아 있지 않았다.” 표암 강세황이 1757년에 그린 《송도기행첩》 <영통동구> 그림은 표암이 이곳을 방문할 즈음에 영통사가 폐사되었으므로, 절로 들어가는 입구의 경관만을 그림으로 남겼다. 당나귀를 탄 선비와 하인 두 사람과 중량감 있는 커다란 바위를 상징처럼 그려 놓아 이채롭다.

1998년과 1999년 두 해에 걸쳐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와 일본 다이쇼(大正)대학이 공동으로 추진한 영통사 유적발굴조사에서 명나라 세종 때 연호로 쓰인 ‘가정 43년’이 찍힌 수기와 막새가 출토됨으로써 영통사는 적어도 1564년 명종 때까지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영통사가 사라진 원인은 화재 등 자연 재해설과 전쟁에 의한 외적 요인을 들 수 있다. 1671년 김창협은 《송경유람기》에서 “두셋 채의 건물이 있을 뿐. 송도제일의 서루(西樓)가 남아 있지 않고, 석재 유물이 남아 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화재에 의한 원인도 있지만, 임진・정유재란 때 가람 대부분이 소실된 것이라 할 수 있다. 2005년 북측 자료에 의하면 “1901년 5월 화재로 사찰이 전소되었다.”고 한 것은 고려 중기 때의 규모라기보다 전각 1~2동의 영통사 전각이 존재했거나, 이 건물이 화재로 소실된 것을 말한다. 일제강점기이던 1939년 촬영된 흑백사진에서도 사찰 건물로 추정되는 한옥의 기와집 몇 채를 판독할 수 있다.

12세기 대각국사 의천의 지하궁전으로, 개경의 으뜸 사찰이던 영통사는 10세기에 개창되어 11세기 창건되어 오백 년 넘게 고려와 조선의 불교를 이끈 개성 땅의 화엄종찰로 자리했다. 조・왜의 7년 전쟁으로 파괴된 이후, 영통사의 명맥은 산재한 유적지 유물처럼 흩어지고 잊혔다.



개성 영통사 터의 3기 석탑(1989년 촬영). 사진=Historical Relics in Kaesong(DPRK)





개성 영통사 낙성 공동법회(2005.10.31.) 사진=천태종 (사)나누며하나되기 홈페이지



남북 서해루트의 통일 성전

개성 영통사는 고구려와 고려의 전설이 깃든 개성직할시 용흥동에 있다. 고구려 때 ‘크고 깊은 골짜기’라는 마하갑의 동네 이름으로, 승려의 수계를 받던 마하갑사가 있던 절골이다. 고려 때 영통골은 고려 왕씨의 집성촌으로, 고려 건국신화가 탄생한 성소이다. 북측의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가 2002년 9월 발간한 《영통사유적발굴보고》에 보면, “영통사는 우리 민족사에서 첫 통일국가로 등장한 고려의 이름 있는 절간의 하나다. 고려의 숭불정책의 역사적 배경에서 세워진 절 건물 중의 하나다. 또 고려 천태종의 시조 대각국사 의천의 사적이 깃들여 있는 절이다.”

5개 산봉우리가 관 또는 갓처럼 생겼다고 붙인 오관산은 보관을 쓴 산이란 의미로 관모산이라 부른다. 이 산의 동남쪽에 자리한 영통사는 1901년 5월부터 ‘수풀에 묻힌 절터’가 됐다. 농토와 나대지로 있던 영통사 유적은 1997년 가을에 조・일 공동조사팀(북측의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일본 다이쇼대학 불교연구소, 재일총련 고고학협회)이 현지답사를 진행하며 문화・학술적 온기를 불어넣었다. 북측의 고고학연구소에서는 작고한 소장 한인호, 실장 김종혁, 연구사 리창언을 비롯한 학술연구 성원들과 발굴대원이 참가했으며, 일본 다이쇼대학 종합불교연구소에서는 사이토 다다시 명예교수, 다다 고분 불교연구소 소장대리, 전호천 총련력사고고학협회 회장을 비롯한 연구 성원들이 참가했다. 이러한 발굴조사는 1997년 9월 중순, 평양에서 북측 사회과학원과 일본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약칭 조선총련・조총련)가 ‘개성 영통사지 발굴조사 협력사업에 관한 각서’ 체결로 이뤄졌다.

개성 영통사지 발굴조사는 해방 이후 일본 측과의 학술협력에 관한 첫 사업으로, 일본 다이쇼대학 등 학술・문화재 전문가들이 발굴조사에 참여한 사례이다. 그 후 영통사 유적발굴조사는 북측의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와 평양건설건재대학 건축사연구실을 중심으로, 1998년 4월 중순부터 1999년 10월 중순까지 4차에 걸쳐 추진했다. 그리고 2000년 봄과 가을 두 차례의 보충 발굴이 이루어지고, 2005년 10월 31일 영통사는 남북공동 사업을 통해 완성됐다.

남북 협력사업의 모델인 영통사는 고려 천태종을 창종한 대각국사 의천의 출가 사찰로서, 또 사후에 머무는 열반지(涅槃地)다. 이곳에 대한 복원계획은 1998년 5월경, 영통사 터 발굴조사에 참여했던 일본 다이쇼대학의 제안을 받은 조총련 부의장 겸 동경도위원회 위원장 김수식과 재일교포 최준이 국내로 들어와 남측 천태종(당시 전운덕 총무원장)에 처음 의향을 전하면서 발걸음을 디뎠다.

이때 천태종단에서 제의한 영통사 방문은 2000년 11월 21일~25일까지 조불련 박태화 위원장의 초청장으로 확정 추진됐다. 그 당시에 덕수 천태종 총무부장을 단장으로 경천 교무국장 등 종단과 신도대표, 학계 교수 등 13명이 중국 베이징을 경유해 평양, 개성으로 이동하여 2000년 11월 23일 영통사 터를 처음 방문했다고 김무원 천태종 사회부장의 《개성 영통사 복원 지원과정에 관한 연구》 논문에 수록됐다.

2000년 11월 북측의 문화보존지도국과 조선경제협력위원회 산하에 ‘개성 령통사복원추진위회’가 처음 구성됐다. 여기에는 리의화 문화보존지도국 국장, 조선경제협력위원회 김성철 국장, 최경철 과장 등이 실무사업을 맡았으며, 심상진 조불련 부위원장 등이 복원사업의 가교를 담당했다. 령통사복원추진위회 위원장인 김세민 사회과학원 부원장, 오학성 책임부원과 영통사 발굴현장 책임자로 리창언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중세고고학실 연구사, 해외동포원호위원회 최명근 추처장, 일본 조총련 부위원장인 김수식 도쿄위원장, 국제관계 조일남 부국장 등이 사업회의에 참가하고 당국과의 협의를 진행했다.

그다음, 2003년 2월 27일 중국 베이징에서 심상진 조불련 서기장 등과 남북불교 회의에 실무 합의 후, 그해 4월 3일 베이징에서 조선경제협력위원회 국장 김성철 령통사복원추진위회 사무국장, 최경철 참사 등과 남측의 천태종 김무원 사회부장 등은 ‘개성 영통사 복원에 관한 약정’에 최종 합의했다. 같은 해 10월 17일을 기해 “2003년부터 2004년까지 개성시에 위치한 영통사의 복원을 위한 공동사업 실행에 그간에 합의사항을 이행하기 위하여 인력 및 물자 수송을 육로를 통하여 운행 전에 있어 운송협약을 합의한다.”라는 ‘운행합의서’를 체결했다.

2003년 10월부터 시작된 복원사업 기간에는 육로 방북 16회에 걸쳐 천태종 스님 69명과 종단 실무자 83명, 대한통운 운송기사 155명 등 연인원 307명의 인적 왕래가 이루어졌다. 기와 약 46만여 장, 단청재료 3천 세트, 중장비 차량 7대, 조경용 묘목 1만 그루, 비닐 자재 100톤, 각종 건축 마감재 등을 남측 천태종에서 지원했다. 북측에서는 건축 인력과 기술자, 장비와 시멘트, 모래, 철근 등 건축자재를 투입하여 약 3년에 걸쳐 영통사를 공동사업으로 29채의 전각을 완공했으며, 그중 3기의 고려 석탑과 6채의 건물은 1천 200여 평인 경내 중앙 회랑에 들어섰다.

북측 《조선중앙방송》 등에서도 여러 차례 보도한 바 있는 영통사 발굴조사와 복원사업은 대각국사의 열반 후, 1113년에 중창된 건축양식을 기본모델로 하여 총 4만 평의 부지에 기본사찰, 동북쪽 무덤, 서북쪽 건축지구 등 세 구역으로 나누어 복원했다. 고려 시대의 사원 건축기법에 따라 총 건축면적 2천 800여 평에 이르는 기존의 절터에다 29동의 전각 등과 3기 석탑, 대각국사비, 돌다리를 복원했다.

2005년 10월 31일 오전 11시 개성 영통사에서 대한불교천태종과 조선불교도연맹 중앙위원회가 공동 주최한 준공 낙성식이 열렸다. 건축 완공을 축하하는 의식인 낙성식(落成式)에는 북측 불교도 200명과 남측 300명이 참가했다. 분단 이후, 최대 규모의 인파가 한자리에 모인 이날 낙성법회 후에는 남북 학자들이 영통사 복원의 역사적 의의에 관한 남북학술토론회를 개최했다. 2008년 이후 남북 관계의 경색에도 불구하고 2015년 11월 3일까지 대각국사 의천의 다례재 등 남북공동 행사는 거의 매년 봉행되었다.

그러나 경색된 남북 관계에 이은 코로나19 팬데믹 여파로 북녘으로 가는 길은 닫혀있다. 다시 남녘에서 불어온 봄기운은 스며들지만, 인기척이 들리지 않는다. 평화의 제도화를 함께 만드는 곳인 DMZ과 판문점이 분주해지면, 한반도 서쪽 루트의 통일 관문이 다시 열릴 것이다. 남북이 하나 되어 경제와 번영을 일궈가는 개성공단이 재가동되는 날. 사람들은 개성으로, 대각국사 의천의 꿈이 서린 영통사의 통일 성전에서 법향 가득한 만남을 이룰 것 같다.

# 다음 편은 ‘2005년 평양 6.15민족대축전’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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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개성 영통사 전경(2005.5.30.). 사진=조선관광(2005년).

개성 영통사, 비원의 이력

‘기록의 나라’로 불리는 고려와 조선에서조차 영통사에 관한 기록이 전무하다. “부엉이가 울었다.” 등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기록했는데, 고려왕과 명나라 사신까지 다녀갔던 영통사에 대해 한 줄의 기록조차 남기지 않은 것이 수수께끼라 할 수 있다.

고려 현종의 왕명으로 1027년 창건된 오관산 영통사는 태조 왕건의 선대 이래, 고려 왕실의 원찰이다.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에도 창건과 폐사에 관해 분명하지 않다. 1215년 각훈대사가 왕명으로 편찬한 《해동고승전》 권제1에는 “1027년(현종 18년)에 창건되었다.”

그러나 “946년 원공국사 지종이 17세 때, 영통사 관단에서 수계를 받았다.” 또 법상종의 고승 혜소국사 정현이 “980년대 영통사 관단에서 구족계를 받았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각국사의 은사이자 외삼촌인 경덕국사 김난원은 “영통사에서 수도하였으며, 왕명으로 문종의 넷째 왕자 후를 승려가 되게 하여 화엄교관을 가르쳤다.”라는 기록을 볼 때, 영통사는 11세기 초에 이미 대찰로 자리했다.

고려 왕씨 가문의 원찰인 영통사는 오관산 아래 마하갑(摩訶甲) 일대의 사찰을 통괄하는 사찰로 1027년에 창건 또는 중창됐다. 이 시기에 본격화된 《초조대장경》의 판각과 인쇄작업에 따른 고급인력과 종이 제조에 필요한 노동력의 수급, 닥나무 등 원자재 공급이 원활한 곳으로 선정되었을 가능성이 짙다. 그러므로 영통사는 제8대 고려 현종의 비원이 서린 사찰이라 할 수 있다.

그 후 1065년 5월 14일 대각국사 의천이 영통사에 출가하면서 고려 왕실에서는 다른 어떤 사찰보다 많은 참배를 하고, 왕실 주관의 재나 기신도량 등이 개설됐다. 고려 천태종을 개창한 대각국사가 1101년 10월 5일 입적하자. 2년 뒤에는 영통사 서북쪽에 제사 지낼 사당으로 쓴 경선원이 완공됐다. 이곳에 국사의 부도를 만들어 동쪽 석실에 모셔져 있던 유골을 이장하면서 대가람으로 변모했다.

조선 세종 때는 교종 18개 사찰의 한 곳으로 지정되고, 거주 승려 100명만이 허용되었다. 또 성종 때에는 수륙사로 지정됐다. 1502년 박은의 《읍취헌유고》에는 영통사에 스님들이 살고, 흙다리를 고쳤다고 했으며, 1510년대 김안로의 《희락당고》에서는 파괴된 절을 다시 세웠다고 했다. 16세기 이행은 《천마록》의 시에서 “옛 절은 퇴락하여 풀들만이 밝힌다.”라고 했다. 1554년 주세붕은 《무릉잡고》에서 "밤새도록 서쪽 누방에 베개를 누이다.”라고 한 것을 보더라도 영통사 전각들이 온전히 남아 있었다.

이러한 기록을 볼 때, 영통사와 숭복원의 후신인 흥성사는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 이전까지 고려 때의 위용은 아니더라도 중수와 보수가 여러 차례 이뤄진 것을 알 수 있다. 1671년 김창협이 쓴 《농암집》 <송경유람기>에는 “이 절은 옛 송경의 대가람으로, 중간에 화재를 당하여 건물이 열 중에 두셋 정도만 남아 있다. 뜰에는 세 개의 석탑이 서 있고 문밖에는 고려시대 승려 의천의 비가 서 있는데, 중간 이하는 글자가 떨어져 나가 읽을 수 없었다. 채수가 《유송도록》에서 매우 칭찬한 명승지 서루는 지금은 남아 있지 않았다.” 표암 강세황이 1757년에 그린 《송도기행첩》 <영통동구> 그림은 표암이 이곳을 방문할 즈음에 영통사가 폐사되었으므로, 절로 들어가는 입구의 경관만을 그림으로 남겼다. 당나귀를 탄 선비와 하인 두 사람과 중량감 있는 커다란 바위를 상징처럼 그려 놓아 이채롭다.

1998년과 1999년 두 해에 걸쳐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와 일본 다이쇼(大正)대학이 공동으로 추진한 영통사 유적발굴조사에서 명나라 세종 때 연호로 쓰인 ‘가정 43년’이 찍힌 수기와 막새가 출토됨으로써 영통사는 적어도 1564년 명종 때까지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영통사가 사라진 원인은 화재 등 자연 재해설과 전쟁에 의한 외적 요인을 들 수 있다. 1671년 김창협은 《송경유람기》에서 “두셋 채의 건물이 있을 뿐. 송도제일의 서루(西樓)가 남아 있지 않고, 석재 유물이 남아 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화재에 의한 원인도 있지만, 임진・정유재란 때 가람 대부분이 소실된 것이라 할 수 있다. 2005년 북측 자료에 의하면 “1901년 5월 화재로 사찰이 전소되었다.”고 한 것은 고려 중기 때의 규모라기보다 전각 1~2동의 영통사 전각이 존재했거나, 이 건물이 화재로 소실된 것을 말한다. 일제강점기이던 1939년 촬영된 흑백사진에서도 사찰 건물로 추정되는 한옥의 기와집 몇 채를 판독할 수 있다.

12세기 대각국사 의천의 지하궁전으로, 개경의 으뜸 사찰이던 영통사는 10세기에 개창되어 11세기 창건되어 오백 년 넘게 고려와 조선의 불교를 이끈 개성 땅의 화엄종찰로 자리했다. 조・왜의 7년 전쟁으로 파괴된 이후, 영통사의 명맥은 산재한 유적지 유물처럼 흩어지고 잊혔다.

개성 영통사 터의 3기 석탑(1989년 촬영). 사진=Historical Relics in Kaesong(DPRK)
개성 영통사 터의 3기 석탑(1989년 촬영). 사진=Historical Relics in Kaesong(DPRK)
개성 영통사 낙성 공동법회(2005.10.31.) 사진=천태종 (사)나누며하나되기 홈페이지
개성 영통사 낙성 공동법회(2005.10.31.) 사진=천태종 (사)나누며하나되기 홈페이지

남북 서해루트의 통일 성전

개성 영통사는 고구려와 고려의 전설이 깃든 개성직할시 용흥동에 있다. 고구려 때 ‘크고 깊은 골짜기’라는 마하갑의 동네 이름으로, 승려의 수계를 받던 마하갑사가 있던 절골이다. 고려 때 영통골은 고려 왕씨의 집성촌으로, 고려 건국신화가 탄생한 성소이다. 북측의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가 2002년 9월 발간한 《영통사유적발굴보고》에 보면, “영통사는 우리 민족사에서 첫 통일국가로 등장한 고려의 이름 있는 절간의 하나다. 고려의 숭불정책의 역사적 배경에서 세워진 절 건물 중의 하나다. 또 고려 천태종의 시조 대각국사 의천의 사적이 깃들여 있는 절이다.”

5개 산봉우리가 관 또는 갓처럼 생겼다고 붙인 오관산은 보관을 쓴 산이란 의미로 관모산이라 부른다. 이 산의 동남쪽에 자리한 영통사는 1901년 5월부터 ‘수풀에 묻힌 절터’가 됐다. 농토와 나대지로 있던 영통사 유적은 1997년 가을에 조・일 공동조사팀(북측의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일본 다이쇼대학 불교연구소, 재일총련 고고학협회)이 현지답사를 진행하며 문화・학술적 온기를 불어넣었다. 북측의 고고학연구소에서는 작고한 소장 한인호, 실장 김종혁, 연구사 리창언을 비롯한 학술연구 성원들과 발굴대원이 참가했으며, 일본 다이쇼대학 종합불교연구소에서는 사이토 다다시 명예교수, 다다 고분 불교연구소 소장대리, 전호천 총련력사고고학협회 회장을 비롯한 연구 성원들이 참가했다. 이러한 발굴조사는 1997년 9월 중순, 평양에서 북측 사회과학원과 일본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약칭 조선총련・조총련)가 ‘개성 영통사지 발굴조사 협력사업에 관한 각서’ 체결로 이뤄졌다.

개성 영통사지 발굴조사는 해방 이후 일본 측과의 학술협력에 관한 첫 사업으로, 일본 다이쇼대학 등 학술・문화재 전문가들이 발굴조사에 참여한 사례이다. 그 후 영통사 유적발굴조사는 북측의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와 평양건설건재대학 건축사연구실을 중심으로, 1998년 4월 중순부터 1999년 10월 중순까지 4차에 걸쳐 추진했다. 그리고 2000년 봄과 가을 두 차례의 보충 발굴이 이루어지고, 2005년 10월 31일 영통사는 남북공동 사업을 통해 완성됐다.

남북 협력사업의 모델인 영통사는 고려 천태종을 창종한 대각국사 의천의 출가 사찰로서, 또 사후에 머무는 열반지(涅槃地)다. 이곳에 대한 복원계획은 1998년 5월경, 영통사 터 발굴조사에 참여했던 일본 다이쇼대학의 제안을 받은 조총련 부의장 겸 동경도위원회 위원장 김수식과 재일교포 최준이 국내로 들어와 남측 천태종(당시 전운덕 총무원장)에 처음 의향을 전하면서 발걸음을 디뎠다.

이때 천태종단에서 제의한 영통사 방문은 2000년 11월 21일~25일까지 조불련 박태화 위원장의 초청장으로 확정 추진됐다. 그 당시에 덕수 천태종 총무부장을 단장으로 경천 교무국장 등 종단과 신도대표, 학계 교수 등 13명이 중국 베이징을 경유해 평양, 개성으로 이동하여 2000년 11월 23일 영통사 터를 처음 방문했다고 김무원 천태종 사회부장의 《개성 영통사 복원 지원과정에 관한 연구》 논문에 수록됐다.

2000년 11월 북측의 문화보존지도국과 조선경제협력위원회 산하에 ‘개성 령통사복원추진위회’가 처음 구성됐다. 여기에는 리의화 문화보존지도국 국장, 조선경제협력위원회 김성철 국장, 최경철 과장 등이 실무사업을 맡았으며, 심상진 조불련 부위원장 등이 복원사업의 가교를 담당했다. 령통사복원추진위회 위원장인 김세민 사회과학원 부원장, 오학성 책임부원과 영통사 발굴현장 책임자로 리창언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중세고고학실 연구사, 해외동포원호위원회 최명근 추처장, 일본 조총련 부위원장인 김수식 도쿄위원장, 국제관계 조일남 부국장 등이 사업회의에 참가하고 당국과의 협의를 진행했다.

그다음, 2003년 2월 27일 중국 베이징에서 심상진 조불련 서기장 등과 남북불교 회의에 실무 합의 후, 그해 4월 3일 베이징에서 조선경제협력위원회 국장 김성철 령통사복원추진위회 사무국장, 최경철 참사 등과 남측의 천태종 김무원 사회부장 등은 ‘개성 영통사 복원에 관한 약정’에 최종 합의했다. 같은 해 10월 17일을 기해 “2003년부터 2004년까지 개성시에 위치한 영통사의 복원을 위한 공동사업 실행에 그간에 합의사항을 이행하기 위하여 인력 및 물자 수송을 육로를 통하여 운행 전에 있어 운송협약을 합의한다.”라는 ‘운행합의서’를 체결했다.

2003년 10월부터 시작된 복원사업 기간에는 육로 방북 16회에 걸쳐 천태종 스님 69명과 종단 실무자 83명, 대한통운 운송기사 155명 등 연인원 307명의 인적 왕래가 이루어졌다. 기와 약 46만여 장, 단청재료 3천 세트, 중장비 차량 7대, 조경용 묘목 1만 그루, 비닐 자재 100톤, 각종 건축 마감재 등을 남측 천태종에서 지원했다. 북측에서는 건축 인력과 기술자, 장비와 시멘트, 모래, 철근 등 건축자재를 투입하여 약 3년에 걸쳐 영통사를 공동사업으로 29채의 전각을 완공했으며, 그중 3기의 고려 석탑과 6채의 건물은 1천 200여 평인 경내 중앙 회랑에 들어섰다.

북측 《조선중앙방송》 등에서도 여러 차례 보도한 바 있는 영통사 발굴조사와 복원사업은 대각국사의 열반 후, 1113년에 중창된 건축양식을 기본모델로 하여 총 4만 평의 부지에 기본사찰, 동북쪽 무덤, 서북쪽 건축지구 등 세 구역으로 나누어 복원했다. 고려 시대의 사원 건축기법에 따라 총 건축면적 2천 800여 평에 이르는 기존의 절터에다 29동의 전각 등과 3기 석탑, 대각국사비, 돌다리를 복원했다.

2005년 10월 31일 오전 11시 개성 영통사에서 대한불교천태종과 조선불교도연맹 중앙위원회가 공동 주최한 준공 낙성식이 열렸다. 건축 완공을 축하하는 의식인 낙성식(落成式)에는 북측 불교도 200명과 남측 300명이 참가했다. 분단 이후, 최대 규모의 인파가 한자리에 모인 이날 낙성법회 후에는 남북 학자들이 영통사 복원의 역사적 의의에 관한 남북학술토론회를 개최했다. 2008년 이후 남북 관계의 경색에도 불구하고 2015년 11월 3일까지 대각국사 의천의 다례재 등 남북공동 행사는 거의 매년 봉행되었다.

그러나 경색된 남북 관계에 이은 코로나19 팬데믹 여파로 북녘으로 가는 길은 닫혀있다. 다시 남녘에서 불어온 봄기운은 스며들지만, 인기척이 들리지 않는다. 평화의 제도화를 함께 만드는 곳인 DMZ과 판문점이 분주해지면, 한반도 서쪽 루트의 통일 관문이 다시 열릴 것이다. 남북이 하나 되어 경제와 번영을 일궈가는 개성공단이 재가동되는 날. 사람들은 개성으로, 대각국사 의천의 꿈이 서린 영통사의 통일 성전에서 법향 가득한 만남을 이룰 것 같다.

# 다음 편은 ‘2005년 평양 6.15민족대축전’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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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범
경북 경주 출생으로 1984년부터 불교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참여하다가 1990년 초, 법보종찰 해인사에 입산 환속했다. 1994년부터 남북불교 교류의 현장 실무자로 2000년부터 평양과 개성・금강산 등지를 다녀왔으며, 현재는 평화통일불교연대 운영위원장과 북한불교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남북불교 교류 60년사’ 등과 논문으로 ‘북한 주민들의 종교적 심성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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