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무문관: 적도정병(趯倒淨甁)
신무문관: 적도정병(趯倒淨甁)
  • 박영재
  • 승인 2021.12.23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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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선도회 박영재 교수와 마음공부 50.

성찰배경: 두 번에 걸쳐 <무문관>에 담긴 남전보원(南泉普願, 748-834) 선사와 제자 조주종심(趙州從諗, 778-897) 선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9개의 공안들을 다루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백장회해(百丈懷海, 720-814) 선사의 법을 이은 위산영우(潙山靈祐, 771-853) 선사와 황벽희운(黃檗希運, ?-850) 선사 및 남전 선사의 또 다른 걸출한 제자인 장사경잠(長沙景岑, ?-868) 선사에 대해 다루고자 합니다. 

적도정병(趯倒淨甁)

본칙(本則): 위산 화상이 백장 선사의 회상에서 전좌(典座, 대중들의 잠자리나 식사 등을 책임지는 자리) 직을 맡고 있었다. 백장 선사께서 장차 대위산의 주인을 뽑으려고 수좌를 비롯해 모든 대중들을 함께 모아놓은 자리에서 역량이 뛰어난 자를 선발해 보내겠다고 하셨다. 드디어 백장 선사께서 물병[淨甁]을 땅바닥에 내려놓고 “이를 물병이라 부르면 안 된다. 그대들은 무엇이라 부르겠는가?”라며 각자 견해들을 제시하게 하셨다. 이에 수좌가 곧 “나무말뚝[木]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라고 응답하였다. 이어 백장 선사께서 위산에게 견해를 물으니, 위산이 즉시 물병을 걷어차고 나갔다. 그러자 백장 선사께서 웃으며 “제일좌! 자네가 시골 촌놈에게 졌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위산 스님에게 대위산(大潙山)으로 가서 개산(開山)하라고 명하셨다.

평창(評唱): 무문 선사께서 “위산이 그때 일생일대의 용기를 내었는데 어째서 백장 선사의 관문을 벗어나지 못했는가? 자세히 점검해보니 막중한 소임을 택하고 사소한 소임은 내던져 버렸구나. 왜 그럴까? 흠[聻]! ‘그것은 마치 머리띠를 벗어 던지고 쇠칼을 목에 찬 것과 같구나.”라고 제창하셨다.

게송으로 가로되[頌曰], 조리와 주걱을 던져버리고/ 정면에서 물병을 차버려 일체의 분별을 끊어버렸네./ 백장의 겹겹의 관문도 그런 그를 더 이상 막지 못했으며,/ 물병을 차버린 그의 발끝에서 대마씨(와 좁쌀알)처럼 수많은 부처가 나왔네. [颺下籬幷木杓 當陽一突絶周遮 百丈重關攔不住 脚尖出佛如麻]

제창(提唱): 위 게송과 관련해 <벽암록> 제66칙‘암두수황소검(巖頭收黃巢劒)’에 보면 ‘여마사속(如麻似粟)’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그 뜻은 대마씨나 좁쌀알처럼 셀 수 없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선종어록에 들어 있는 선어(禪語)들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무문 선사께서 자구(字句)를 맞추기 위해 ‘사속’을 생략했다고 사료됩니다. 한편 위앙종(潙仰宗)의 창시자인 위산 선사는 사실 대위산에 주석하면서 스승인 백장 선사보다도 훨씬 더 많은 1500명쯤 되는 대중(大衆)을 거느렸다고 기록되어 있기때문에, 무문 선사께서 이 게송을 통해 위산 선사의 역량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 같네요. 
그런데 무문 선사께서는 평창을 통해 물병을 발로 차버린 위산 스님의 기개는 비록 높이 살만 하지만 아직 미진한 경계라고 제창하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떻게 바르게 응대하셨겠습니까?

참고로 이 화두가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큽니다. 백장 선사께서 시골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대선장(大禪匠)으로서의 안목을 갖춘 위산 스님에게 개산(開山)케 했으니 말입니다. 즉, 제일좌(第一座)였던 화림선각(華林善覺) 스님이 아무리 스승을 오래 시봉했다고 하더라도 법의 문제에 있어서는 밥그릇 수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선원(禪院)이 쇠락해가고 있다면, 이는 밥그릇 수에 의해 추대된 조실(祖室)의 역량 부족이 가장 큰 이유라 사료됩니다.

술지게미에 취한 놈[噇酒糟漢]

오늘날 선종(禪宗) 가운데 가장 번창한 임제종(臨濟宗)을 창종한 임제의현(臨濟義玄, -867) 선사의 스승인 황벽희운(黃檗希運, ?-850) 선사께서 제자들을 진짜 술도 아닌 술지게미나 먹고 술에 취한 척하는 놈들이라고 일갈하며, 허송세월하면서 떠돌아다니지 말고 제대로 수행할 것을 다그치면서, 오늘날까지도 우리 모두를 일깨우고 있는 멋진 일화가 <벽암록(碧巖錄)> 제11칙에 담겨있어 소개를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본칙: 황벽 선사께서 대중에게 “그대들은 모두 ‘술지게미나 먹고 술에 취한 척하는 놈들[당주조한(噇酒糟漢)]’이다. 이와같이 행각하며 천하를 다닌다면 어느 곳에서 오늘[今日]의 나처럼 불법을 온몸으로 체득할 날이 오겠는가? 그대들은 당(唐) 나라에 올곧은 ‘선의 스승[禪師]’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라고 일갈하셨다. 그때 한 승려가 앞으로 나와 “그러면 오늘날 당나라 곳곳에서 선원을 개설하고 대중을 이끌고 있는 이들은 도대체 누구란 말입니까?”라고 여쭈었다. 그러자 황벽 선사께서 “선법(禪法)이 없다고 한 것이 아니고, 다만 바른 스승[正師]이 없다고 말했을 뿐이다.”라고 갈파하셨다.

제창: 필자의 견해로는 황벽 선사께서 ‘술지게미에 취한 놈’이라고 다그치며 제자 한 사람이라도 더 취생몽사(醉生夢死)에서 벗어나 ‘참나’를 온몸으로 체득한 후 함께 더불어 멋진 향상의 길을 걸어가게 하려고 애쓰셨다고 사료됩니다. 
그런데 만일 당시 여러분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올곧은 선사가 없다.’는 일갈(一喝)에 어떻게 응대하셨겠습니까?

한편 얼마 전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한 의대생이 한강 변에서 야심한 밤까지 친구와 몸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술을 마시고 생을 마감한 사건에 적지 않은 분들이 안타까워했었습니다. 앞으로 대한민국의 미래를 책임질 젊은이들이 바람직한 음주 습관을 지닐 수 있도록 우리 기성세대들 모두 날마다 일상 속에서 ‘참나’ 체득을 위해 치열하게 자기성찰의 삶을 이어가면서, 절주나 단주를 이해 차원이 아닌 온몸으로 솔선수범하며 젊은이들의 본보기가 되기를 간절히 염원 드려 봅니다. 
덧붙여 우리의 건강 향상에도 크게 기여하는 절주나 단주를 통해 절약된 돈은 먼 훗날이 아닌, 지금 당장 실천 가능한, 통찰과 나눔이 둘이 아닌 ‘통보불이(洞布不二)’의 삶을 이어가는데 든든한 밑천이 될 수 있겠지요. 보기를 들면 아프리카, 캄보디아 및 네팔 등에는 열악한 교육환경을 포함해 적지 않은 어린이들이 아직도 날마다 끼니를 걱정하며 겨우 목숨을 이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금연과 절주는 건강에도 좋고 낭비하는 돈을 절약해 어려운 지구촌 이웃들을 돕는데 요긴하게 쓸 수도 있겠지요. 보다 구체적으로 요즈음 담배 한 갑의 가격을 4500원 기준으로 했을 때, 4500원/1일 × 30일/1달 × 12달/1년 = 162만원/1년입니다. 참고로 이 액수는 미국의 보통 사람들이 평균적으로 1년에 기부하는 돈이라고 합니다. 

장사춘의(長沙春意) 

남전 선사가 배출한 또 다른 걸출한 제자 장사경잠(長沙景岑) 선사에 관한 멋진 일화가 <벽암록(碧巖錄)> 제36칙에 담겨있어 소개를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본칙: 장사 선사께서 하루는 산을 유람하고 돌아와 산문 앞에 이르렀다. 이를 본 수좌가 ‘화상께서는 어디를 다녀오십니까?’하고 여쭈었다. 그러자 장사 선사께서 ‘산을 유람하고 오는 길이네.’라고 답하셨다. 이에 수좌가 말했다. ‘어디까지 다녀오셨는지요?’ 장사 선사께서 ‘처음에는 향긋한 풀내음을 따라갔다가 지는 꽃을 쫓아 돌아왔네.[始隨芳草去 又逐落花回.]’라고 대답하셨다. 그러자 수좌가 ‘완연한 봄날 같군요.[大似春意.]’라고 맞장구를 쳤다. 이에 장사 선사께서 ‘역시 가을날 연잎에 이슬이 맺힌 것보다야 낫겠지.[也勝秋露滴芙渠.]’라고 응대했다.

제창: 호남성에 속한 장사 지역은 동정호 근처에 위치해 있으며 풍광이 뛰어난 명승지라고 합니다. 필자의 스승인 종달(宗達) 선사께서는 ‘이 공안은 우주[山]를 수행도량으로 지혜롭게 활용한 장사 선사와 산문[伽藍] 안에 갇혀있는 수좌와의 문답으로 구성되어 있다.’라고 갈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미숙한 이 수좌는 세 차례의 피상적인 문답을 주고받고는 더 이상 질문을 이어가지 못했습니다. 후에 이를 답답하게 여긴 설두중현(雪竇重顯, 980-1052) 선사께서 이 문답에 대해 ‘친절한 답변에 감사드립니다.[謝答話.]’라고 착어(著語)하며 멋지게 마무리를 지었다고 사료됩니다. 
그런데 우리 말에 ‘시작을 잘못하다.’는 뜻으로 ‘첫 단추를 잘못 끼우다.’라는 관용구가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수좌 대신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떻게 응대했어야 첫 단추를 제대로 끼울 수 있었을까요? 

참고로 이 공안과 무관하지 않은, <조당집(祖堂集)> 제17권에 남전 선사의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가풍을 계승한 제자답게, 장사 선사의 ‘평상심(平常心)’에 관한 견처를 잘 엿볼 수 있는 대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 승려가 어떤 것이 평상심입니까? 하고 여쭈자, 장사 선사께서는 ‘자고 싶으면 자고, 앉고 싶으면 앉는 것이니라.[要眠則眠 要坐則坐.]’라고 답하셨다. 그러자 ‘학인은 잘 모르겠습니다.[學人不會]’라고 응답했다. 이에 선사께서는 거듭 친절하게 ‘더우면 서늘하게 하고, 추우면 불을 쪼인다.[熱則取涼 寒則向火.]’라고 거듭 응대하셨다.”

끝으로 <교수신문>에서는 매년 연말 다수의 교수들께 한 해를 돌아보며 그해의 사회상이 투영된 사자성어(四字成語) 선정 요청을 해오고 있습니다. 지난해의 사자성어는 획일적(劃一的)인 확증편향(確證偏向)에 바탕을 둔 신조어인 ‘나는 늘 옳고 나와 다른 견해를 갖는 남은 무조건 그르다’는 뜻의 ‘아시타비(我是他非)’를 선정하며 우리 사회의 반성을 촉구하였습니다. 
한편 올해는 더욱 심각해 단순한 편가르기 수준을 넘어 힘을 가진 자들이 거침없이 갑질을 하며 부정을 저질렀기 때문에, ‘고양이와 쥐가 함께 동거하고 있다.’를 뜻하는 ‘묘서동처(猫鼠同處)’가 선정되었다고 사료됩니다. 교수들의 선정 이유로는 여야 가릴 것 없이 “권력자들이 한패가 되어 부정을 저지르고 있다.”와 같은 응답이 가장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세밀히 살펴보면 이는 비단 정치권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삼독(三毒), 즉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에 중독된 채 평상심을 잃고 헤매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니 우리 모두 이번 연말 각자 자신과 코드가 맞는 자기성찰의 길을 따라 하루빨리 평상심을 회복하고, 다가오는 2022년을 멋진 향상(向上)의 해로 맞이할 수 있기를 간절히 염원(念願)드려 봅니다. 

 

박영재 교수는 서강대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3년 3월부터 1989년 8월까지 강원대 물리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1989년 9월부터 2021년 2월까지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현재 서강대 물리학교 명예교수이다.
1975년 10월 선도회 종달 이희익 선사 문하로 입문한 박 교수는 1987년 9월 선사의 간화선 입실점검 과정을 모두 마쳤다. 1991년 8월과 1997년 1월 화계사에서 숭산 선사로부터 두 차례 점검을 받았다. 1990년 6월 종달 선사 입적 후 지금까지 선도회 지도법사를 맡고 있다. 편저에 <온몸으로 돕는 지구촌 길벗들>(마음살림, 2021)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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