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무문관: 남전참묘(南泉斬猫)
신무문관: 남전참묘(南泉斬猫)
  • 박영재
  • 승인 2021.05.31 10:30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재] 선도회 박영재 교수와 마음공부 46.

성찰배경: 바로 앞글에서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 선사의 뛰어난 제자들 가운데 먼저 백장회해(百丈懷海, 720-814) 선사에 대해 다루었었는데, 이번 글에서는 두 번째로 남전보원(南泉普願, 748-834) 선사에 대해 다루고자 합니다. 공안집 <무문관>에는 남전 선사가 주인공인 네 일화가 담겨 있습니다. 그 가운데 먼저 스승인 마조 선사께서 선종(禪宗)의 핵심 선어(禪語)인 ‘즉심시불(卽心是佛)’이나 ‘비심비불(非心非佛)’이나 ‘지혜시도(智慧是道)’로 천하에 명성을 떨치자 이들을 더욱 심화시켜 철저히 제창한 제27칙의 ‘불시심불(不是心佛)’과 제34칙의 ‘심불시불(心不是佛) 지불시도(智不是道)’를 살피고자 합니다. 그런 다음 남전 선사의 트레이드마크라고도 할 수 있는, 수제자인 조주종심(趙州從諗, 778-897) 선사와 문답한 제14칙의 ‘남전참묘(南泉斬猫)’를 제창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조주 선사를 깨침에 이르게 한, 마지막 남은 제19칙 ‘평상시도(平常是道)’는 조주 선사 편에서 차후에 다루고자 합니다.

불시심불(不是心佛)

본칙(本則): 남전 선사께 어느 때 한 승려가 “사람에게 설하지 못하는 법이 있습니까?”하고 여쭈었다. 그러자 남전 선사께서, “있다[有]!”라고 답하셨다. 이 승려가 다시 “어떤 것이 사람에게 설하지 못하는 법입니까?”하고 여쭈었다. 그러자 남전 선사께서,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며, 사물(事物)도 아니다.[不是心 不是佛 不是物.]”라고 답하셨다.

평창(評唱): 무문혜개 선사께서 “남전 선사께서 이 질문을 받고서 자기 살림살이를 몽땅 털어놓았지만 낭패가 이만저만이 아니로구나.”라고 첨언하셨다.

게송으로 가로되[頌曰], 친절이 지나쳐 도리어 군자의 덕을 손상하니/ 차라리 입을 닫고 있었던들 참으로 공덕이었을 것을!/ 설사 바다가 변해 육지가 된다고 해도/ 끝까지 그대를 위하여 설하지 않겠네! [叮嚀損君德 無言真有功. 任從滄海變 終不為君通.]

군더더기: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고 하면 ‘마음이 곧 부처다.’라는 분별을 일으키고, ‘비심비불(非心非佛)’이라고 하면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라는 분별을 일으키며 앵무새처럼 흉내 내는 의학도(義學徒)들이 늘어나자, 남전 선사께서 이를 바로 잡기 위해 ‘마음’과 ‘부처’뿐만이 아니라 ‘사물’까지도 철저히 부정하며 ‘일체’에 대해 분별이 끊어진 경지를 온몸으로 체득하라고 일갈(一喝)하신 것이라 사료됩니다. 

사실 이와 같은 견해는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 선사의 어록 가운데 정성충(鄭成忠)이 청한 보설(普說)에서도 다음과 같이 잘 엿볼 수 있습니다. “나는 조실(祖室) 방에서 늘 도반[兄弟]들에게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사물도 아니라면, 이것은 과연 무엇인가[시심마是甚麽]?’라고 물었네.” 그리고는 마지막에, “만약 진정으로 이를 체득하고자 한다면, 이 일은 결코 언어로 따져서 될 일이 아니네![此事決定不在言語上.]”라고 수행자들을 다그치셨습니다.

한편 무문혜개 선사께서 ‘남전 선사께서 낭패를 당했다.’라고 하신 의도는 말이나 글로는 ‘진리’[佛法] 자체를 드러낼 수 없는데 남전 선사께서 괜히 헛수고를 했다는 뜻으로 남전 선사의 ‘불시심불물(不是心佛物)’이란 분별조차 철저히 내려놓으라고 다그치셨다고 사료됩니다.

지불시도(智不是道)

본칙(本則): 남전 선사께서 “마음은 부처가 아니며, 지혜는 도가 아니니라.[心不是佛 智不是道.]”라고 설하셨습니다.

평창(評唱): 무문 선사 가로되, 남전 선사에 대해 말하자면, 연로하신 점잖은 분이 수치(羞恥)를 무릅쓰고 악취 나는 입을 조금 열었을 뿐인데, 집안의 추태를 몽땅 드러내는구나. 그러나 이와 같다고 할지라도 그 은혜를 아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게송으로 가로되[頌曰], 하늘이 맑으니 해가 솟아오르고/ 비가 내리니 땅이 촉촉이 젖는구나./ 지극 정성을 다해 설파(說破)했으나/ 다만 그대들의 믿음이 부족함을 염려하노라. [天晴日頭出 雨下地上濕. 盡情都說了 只恐信不及.]

군더더기: 앞의 ‘불시심불(不是心佛)’과 같은 맥락에서 설사 ‘심불시불(心不是佛)’에 즉해 견처(見處)를 얻어 보다 지혜로워졌다고 하더라도, ‘(마음이니 부처니 하는 분별이 남아 있는 한 이런 수준의) 지혜는 결코 도[진리]가 아니다.’라고 일갈하셨다고 사료됩니다. 

한편 믿을 ‘신(信)’이란 글자를 풀어보면, ‘信 = (無位眞)人 + 言’으로 되어있습니다. 즉 ‘(참나를 온몸으로 바르게 통찰한 높낮이가 없는 참)사람의 말은 믿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실 수행의 지름길은 100% 신뢰할 수 있는 바른 스승을 찾은 다음, 의심 없이 그 문하에서 치열하게 수행하다 보면, 어느 때인가 자연스럽게 깊은 통찰체험을 하게 되고 아울러 이 체험을 바탕으로 저절로 나눔 실천적 삶을 살게 됩니다.

덧붙여 부끄러워할 ‘치(恥)’라는 글자를 풀어보면, ‘耳 + 心’으로 되어있습니다. 즉, 얼굴에 철판을 깐 ‘내로남불’이 아닌 이상, ‘세간에서 평하는 자신의 행실을 귀를 통해 듣고 마음속으로 냉정히 성찰해 보면,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부끄러운 짓임을 알아차린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남전참묘(南泉斬猫)

<무문관(無門關)> 가운데 시비(是非)의 원천을 단칼에 끊어버리게 한, ‘남전참묘(南泉斬猫)’란 화두가 다음과 같이 들어있습니다. 

본칙(本則): [1관(一關)] 어느 날 동당(東堂)과 서당(西堂) 간에 고양이 새끼 한 마리를 놓고 시비가 벌어지자 남전 선사께서 이 고양이를 치켜들고 “대중들이여, 한마디 이르면 살리고 이르지 못하면 목을 베리라![大衆道得卽救 道不得卽斬却也.]”고 일갈하셨다. 그런데 무소유의 출가 정신을 망각하고 소유욕에 눈먼 대중들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대중 가운데 한 사람도 대꾸가 없자 남전 선사께서 드디어 고양이 목을 베어버리셨다.
[2관(二關)] 밤늦게 조주 스님이 외출했다가 돌아오자 남전 선사께서 낮에 있었던 일을 말씀하셨다. 조주 스님은 이를 듣자 즉시 아무 말 없이 신발을 벗어 머리 위에 이고 나갔다.[州乃脫履安頭上而出.] 그러자 남전 선사께서 “만일 그때 자네가 있었더라면 고양이 새끼를 구했을 터인데....”라고 애석해하셨다.

평창(評唱): 자! 일러보아라. 조주 선사께서 신발을 머리 위에 얹은 뜻이 무엇인가? 만약 이에 대해서 바르게 ‘한 마디[一轉語]’ 이를 수 있다면, 곧 남전 선사께서 행하신 바가 헛짓이 아님을 알리라. 혹 그렇지 못하다면 “목숨이 위태로울 것이니라![險.]”

게송으로 가로되[頌曰], 만약 그 당시 조주 스님이 그 자리에 있어/ 거꾸로 한 마디 일러보시라고 다그치면서/ 남전 선사의 칼을 빼앗아 치켜들었다면/ 남전 선사께서 오히려 목숨을 구걸했으리라. [趙州若在 倒行此令 奪却刀子 南泉乞命.]

제창(提唱): 사실 이 선문답은 비록 원전(原典)에는 없지만 필자가 본칙에 임의로 1관과 2관을 표기했듯이 둘로 나누어 참구해야 합니다. 즉 하나는 ‘만일 여러분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떻게 진리[道]에 부합하게 응대해야 고양이를 살릴 수 있겠는가?’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미 죄 없는 고양이는 죽고 저녁 때 돌아온 조주 스님에게 남전 선사께서 낮의 일을 들려주자, 조주 스님이 즉시 짚신을 머리에 얹고 나간 까닭은 무엇인가?’ 입니다. 참고로 <벽암록(碧巖錄)>에서도 1관을 제63칙에서, 2관을 제64칙으로 나누어 제창하고 있으나, 후대에 무문혜개(無門慧開, 1183-1260) 선사께서 공안 참구 상 더 효율적이라 판단하여 이를 제14칙에서 통합해 새롭게 제창했다고 사료됩니다. 

한편 선의 스승들은 한 사람이라도 깨우치게 할 수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얼핏 이 문답을 보면 남전 선사께서 ‘불살생(不殺生)’의 계율을 어겨가면서까지 애를 썼으나, 이미 인가(印可)를 받은 조주 스님의 경지를 재확인하는 정도일 뿐 거의 아무 소득이 없는 것 같지만, 사실 오늘에 이르기까지 후학들로 하여금 목숨을 걸고 온몸을 던져 참구하게 하는 난투(難透)의 공안으로 널리 활용되고 있습니다. 

군더더기: 사십 번째 칼럼인 ‘신무문관: 비풍비번’ 가운데 ‘박사후과정과 오후 수행’이란 대목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필자가 종달(宗達, 1905-1990) 선사 입적 직후 뒤를 이어 선도회의 지도법사로서 참선 모임을 이끌어가던 중, 한 스승 밑에서만 수행해 온 필자의 경계를 확인받아 볼 필요를 느껴 미국에 계신 숭산(崇山, 1927-2004) 선사께 입실점검(入室點檢)을 청했습니다. 아침 8시에 시작해 거의 2시간 동안 독대(獨對)를 하며 20여 개의 화두에 대해 경계를 제시하며 점검을 받았는데, 특히 이 ‘남전참묘’에 관한 문답을 통해 필자는 향상일로(向上一路)의 여정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한 획을 긋는 깊은 통찰 체험을 하였습니다. 

참고로 최근 필자는 국토순례의 일환으로 경기도 양주시 천보산(天寶山)에 위치한 회암사(檜巖寺) 터를 방문했었습니다. 회암사는 평산처림(平山處林, 1279- 1361) 선사의 법을 이은 나옹혜근(懶翁慧勤, 1320-1376) 선사와 그 제자인 무학대사(無學大師, 1327-1405)가 활약했던 유서 깊은 곳으로 드넓은 회암사터를 찬찬히 둘러보다가 방장실 바로 아래칸에 위치한 ‘입실료지(入室寮址, 제자가 법사의 방에 들어가서 불법을 계승하였던 집터)’라는 안내 표지석(標識石)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정말 고려 시대에 임제종(臨濟宗)의 입실점검 전통이 살아있었음을 생생하게 목격한 뜻깊은 순례 여행이었습니다.

끝으로 매년 연말이 되면 교수들이 한 해를 돌아보며 그해의 사회상이 투영된 사자성어(四字成語)를 선정해 오고 있는데, 지난해의 사자성어는 ‘나는 늘 옳고 나와 다른 견해를 갖는 남은 무조건 그르다.’는 뜻의 ‘아시타비(我是他非)’를 선정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지난해 특히 법조계와 정치계에서 시비가 들끓자 2021년 새해에는 이를 겸허하게 반성하며 대화와 소통의 길로 나아가자는 염원을 담았다고 사료됩니다. 

한편 올해도 벌써 5개월이 지나갔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 모두 각계각층을 선도해야할 종교계를 포함해 우리 사회가 과연 얼마나 변했을까 자문해 봅니다만, 사실 획일적인 확증편향(確證偏向)에 바탕을 둔 ‘시비관(是非觀)’을 비록 머리로는 고쳐야겠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몸이 따라주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따라서 ‘자타불이(自他不二)’와 ‘시비불이(是非不二)’를 온몸으로 체득하며 함께 더불어 상생(相生)하기 위해, 우리 모두 각자 코드가 맞는 수행법을 따라 일상 속에서 날마다 치열하게 내적 자기성찰의 삶을 이어가기를 간절히 염원드려 봅니다. 
 

"이 기사를 응원합니다." 불교닷컴 자발적 유료화 신청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덕윤화 2021-06-05 21:48:16
'얼굴이 밝은 성직자는 가짜다'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종교에 대한 상식을 180도 뒤집는 내용이며 불교에 대한 예리한 분석도 들어있습니다. 불자들은 읽어보시고 불교의 핵심 교리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물론 올바른 성직자를 구별하는 혜안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11길 16 대형빌딩 4층
  • 대표전화 : (02) 734-7336
  • 팩스 : (02) 6280-2551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석만
  • 대표 : 이석만
  • 사업자번호 : 101-11-47022
  • 법인명 : 불교닷컴
  • 제호 : 불교닷컴
  • 등록번호 : 서울, 아05082
  • 등록일 : 2007-09-17
  • 발행일 : 2006-01-21
  • 발행인 : 이석만
  • 편집인 : 이석만
  • 불교닷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불교닷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asan2580@gmail.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