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종단본 '불교성전'을 비평하다 1
2021년 종단본 '불교성전'을 비평하다 1
  • 허정 스님/전 조계종 불학연구소장
  • 승인 2021.03.02 11:03
  • 댓글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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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 스님

조계종에서 펴낸 <불교성전>이 2021년 2월 24일에 나왔다. 종단본 <불교성전>은 1972년 동국역경원에서 발간한 이후 50년 만이라 한다. 종정 스님으로 증명으로 원로회의, 총무원장, 지도위원, 상임위원, 기획위원, 전문의원 등 대규모로 구성된 편찬위원회에서 펴낸 책이다. 편찬위가 구성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 줄곧 과연 어떤 책이 나오게 될지 기대를 하였다. 그러나 막상 책을 사서 읽어보니 실망이 크다. 그 실망한 이유를 말하자면 아래와 같다.

첫째, <불교성전>은 용어통일이 되어 있지 않다.

책 한 권에서 하나의 단어가 다르게 번역되어 나타나고 있다면 독자는 혼란스러울 것이다. 번역자는 단어번역을 어떻게 했는지를 서두에 설명하고 나서 책을 쓰기 마련이다. ‘니까야’의 번역을 보더라도 전재성과 각묵의 번역용어가 매우 다르다. 하물며 시대가 다르고 사람이 다른 여러 경전들의 번역용어는 얼마나 다양할 것인가? 용어통일 없이 인용된 경전은 빨리어 발음도 임의로 고쳐서 영어 발음이나 한문음사로 바꾸어 놓았다. 예를 들면 ‘뿐나를 교계한 경’을 ‘부루나를 교계한 경’으로 바꾸고, ‘수나빠란따’를 ‘수로나’로. ‘빠세나디’를 ‘파사익’으로, ‘아누룻다’를 ‘아나율’로, ‘난디야’를 ‘난제’로, ‘낌빌라’를 ‘금비’로 바꾸는 식이다. 알라라 칼라마, 웃다카 라마풋타, 파타차리와 같은 영어발음도 많이 나타난다. 가장 기본적인 용어통일과 발음통일을 시도하지 않고 단지 경전을 모아 놓은 <불교성전>에 실망이 크다.

둘째, 우리나라는 2600년 불교사에서 나타난 경전들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어떤 것들이 같은 부처님 가르침이라고 보기 어려울 만치 이질적인 내용들도 있다.

<불교성전> 편찬자들은 모든 경전을 부처님 말씀이고 같은 사상이라고 순진하게 믿고 있는듯하다. 부처님의 직설이라는 ‘니까야’와 ‘아함경’을 비교하더라도 ‘아함경’에는 싯다르타가 마야부인 옆구리에서 출생했다고 나오는데, ‘니까야’에는 자궁에서 출생한 것으로 나오고, ‘아함경’에는 불멸후 200년 뒤에 등장하는 <아육왕경>이 실려 있는데, ‘니까야’에는 아소카에 대한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하물며 ‘아함경’, ‘대승경전’, 각 종파의 ‘논서’, ‘밀교경전’, ‘선어록’ 등 2600년 동안 나타난 다양한 경전과 어록 사이에 이질감은 얼마나 다양할 것인가? 2600년 불교사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경전과 어록을 모두 배우는 것은 재앙인가 축복인가? 부처님의 직설을 배우기도 모자란 시간에 불자들에게 위경(僞經) 논란이 있는 경과 논서와 어록과 발원문등 모아놓은 책을 읽게 만드는 것이 과연 필요한가?

<불교성전> 편찬위는 현재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사이에 팽팽하게 흐르는 긴장감 혹은 적대감 같은 것을 느끼지도 듣지도 못했는가? 지금 한국불교의 선방에서는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스님들의 방부를 받지 않고 종정 스님은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는 궁극을 깨닫지 못하며, 부처님보다도 더 높은 ‘무심도인’이라는 존재를 말하고 있다. 선에서 말하는 참나(진아)와 ‘니까야’의 무아가 어떻게 같게 설명할 것인가를 두고 학자들 간에 치열한 논쟁을 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의 긴장감은 개인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각 시대마다 나타났던 경전의 차이, 표현의 차이, 강조점의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들이다. 원효처럼 화쟁을 위한 노력도 없이 2600년 불교사에 나타난 경전, 논서, 어록을 모아 놓은 것만으로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는 <불교성전>이 될 수 있을까?

셋째, 경을 인용하면서 경을 너무 잘게 쪼게 놓았다.

어느 장소에서 설한 경전인지, 누구에게 설한 경전인지, 이야기의 발단 전개 결말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알 수 없도록 머리와 꼬리를 자르고 몸통만 남겨 놓은 경전들이 수북하다. 몸통만 남겨 놓은 경전에 주석도 달지 않아서 너무 불친절한 책이 되고 말았다. <한권으로 읽는 빨리경전>을 불자들과 같이 읽을 때도 경을 부분적으로 인용하고 있어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이렇게 몸통만 남은 경전 읽기의 폐단을 몸소 체험한 바 있기에 <불교성전>이 이런 식으로 편집 되었다는 것을 매우 아쉽게 생각한다. <불교성전>의 제2장 위대한 가르침이나 제3장 보살의 길에 등장하는 경들이 왜 구분해 놓았는지 모를 정도로 비슷하다. 두리뭉실하게 제목을 잡지 말고 구체적인 제목을 정했으면 아쉬움이 있고 미륵보살에 대한 장황한 설명은 불필요해 보인다.

넷째, 어차피 책을 내놓으면 평가와 비판을 받기 마련이다.

<불교성전>은 왜 책을 내 놓기 전에 스님들께 미리 평가를 받고 고견을 듣는 시간을 갖지 못했을까? 겸손하게 집단지성을 발휘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하였다면 지금 내가 이러한 글을 쓰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미리 물어서 이야기를 듣고자하면 제안이 되지만 책을 출판하고 나쁜 비판을 받으면 비난으로 들릴 수도 있다. 폐쇄적인 작업은 승가의 화합을 위해서도 좋지 않다. 현대는 포교도 인문학과 예술로 접근하고 유튜브와 같은 도구를 사용하는 등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그런데 불자들이 평생 동안 보아야 할 책을 만들면서, 불교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권해야 할 책을 만들면서 승가대중의 의견을 묻지 않았다는 것은 이해 불가한 일이다. <불교성전>을 만드는 일에 승가대중의 의견을 묻고, 대중이 공감할 때까지 세미나와 토론회를 진행하였다면, 그 자리는 승가대중의 소통, 화합의 자리가 되고 스님들 각자가 자신의 불교관을 점검하는 자리가 되었을 것이다. 평소에 대중공의를 존중하지 않는 습관, 집단지성을 활용하지 못하는 종단 집행부의 한계라고 본다. 열린 종단 운영이 아니면 정보화 시대에 살아남지 못하고 화합을 이루기도 어렵다.

예를 들면 종단은 공식 카톡 계정을 만들어 스님들의 민원을 즉각 듣고 대답을 해주어야 한다. 나는 호법민원을 3년 전에 올렸는데 3년 동안 조사 중이라는 대답만 듣고 있다. 그러는 사이에 담당자가 여러 번 바뀌어 내가 전화를 해서 확인하지 않으면 진정사실을 모르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조계종 포교원이 펴낸 종단본 '불교성전'
조계종 포교원이 펴낸 종단본 '불교성전'

 

아래는 <불교성전>의 p(페이지)를 언급하며 이상한 문장, 오자, 동의하기 어려운 내용들에 대해서 의견 및 비평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61p
“며칠이 지나 나라의 현자들을 불러 태자를 보이자 그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예언했다. "대왕이시여, 이 아기는 위대한 사람이 지니는 서른두 가지 신체적 특징, 즉 삼십이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이 있는 분에게는 두 가지 길이 앞에 놓여 있으니, 속세에 계시면 왕 중의 왕이라 불리는 전륜성왕이 되어 온 세상 사람을 바른 법으로 다스릴 것입니다. 만약 집을 떠나 출가한다면 반드시 위없는 아라한(應供), 완전히 깨달은 분(正等覺), 명지와 실천을 구족한 분 [明行足], 피안으로 잘 가신 분(善逝), 세간을 잘 알고 계신 분(世間解], 가장 높은 분(無上士), 사람을 잘 길들이는 분(調御丈夫), 하늘과 인간의 스승(天人師), 부처님(佛), 세존(世尊)이 되실 것입니다.”

[비평] 부처님의 10호를 그 당시의 브라민들의 입에서 나온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설명은 부처님을 10호를 브라민들이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베다와 우파니샤드 그리고 자이나교 경전들에 여래십호가 나타나있는가? 여래십호는 부처님의 사성제와 12연기 등의 가르침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사성제와 12연기를 설명하지 못했기에 부처님은 브라만교를 부정한 것이고 그들의 사상이 진리가 아닌 것이다. 유일하게 진리를 깨달은 분에게 붙여진 여래10호를 아시타 선인 등이 미리 알고 있는 것처럼 설명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런 설명은 힌두교인들이 부처님을 비슈뉴(Vishnu)의 9번째 화신이라고 말하게 하는 핑계거리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여래십호는 역대 부처님들을 부르는 이름으로 위빳시 부처님에게 불려 진 것으로 나타난다. 474p에는 법온족론에서 설명하는 여래십호를 보여주고 있다.

75p
“사문 고타마는 먼저 당시 명상 지도자였던 알라라 칼라마와 웃다카 라마풋타를 찾아갔다.…니련선하 근처로 갔다.”

[비평] 고타마, 알라라 칼라마, 웃다카 라마풋타, 파타차리는 영어발음이다. 니련선하, 파사익은 한문으로 번역할 때 정착된 발음이다. 발음을 통일하지 않고 때로는 영어발음, 때로는 한문음사, 때로는 빨리어를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다. 2012년 교육원에서 나온 <부처님 생애>에는 고따마, 알라라 깔라마, 웃따까 라마뿟따, 네란자라, 빠따짜리 등 빨리어 발음을 따르고 있다. 포교원에서는 <불교입문> 등 빨리어 발음을 따르지 않는 책을 출간했다. 포교원과 교육원에서 출판하는 책들이 각각 발음기준이 다르다는 것은 부서 간에 협조가 안 되고 있다는 증거인데 혼란은 오로지 불자들의 몫이다.

95p
“그때 부처님께서는 ‘참으로 교진여는 완전하게 알았구나! 참으로 교진여는 완하게 알았구나!’라고 찬탄하셨다. 이렇게 해서 그는 '깨달은 교진여'라는 뜻의 '아야교진여'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비평] ‘꼰단냐’를 ‘교진여’, ‘안냐꼰단냐’를 '아야교진여'라고 나타난다. 국제화시대, 정보화시대에 왜 우리 종단은 과거 정보부족으로 정착된 이름들을 고집할까? 세계 불자인들이 공통적으로 사용하고 국제 학술세미나에서 사용하는 이름으로 불러야 소통이 쉬울 텐데. 옛 발음을 고집하는 것은 누구를 위한 배려일까? 노인불교를 위하기 때문이라면 세계와 소통하는 불교, 청년들의 불교는 포기하는 것인가? '아야교진여'를 생동감 있게 듣자 면 ‘아야!’ 아프다고 외치는 ‘교진여’라고 오해될 수도 있다.

112p
“기타왕자와 급고독장자가 힘을 합해 건립한 사원이 바로 기원정사로 석가모니 부처님은 훗날 24안거를 이곳에서 보내시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법문을 베푸셨다.”

[비평] 정확히 말하면 부처님은 기원정사에서는 18안거를 보내셨고, 나머지는 위사카가 세운 동원정사에서 머무르셨다. 사위성에서 24안거는 맞지만, 기원정사에서 24안거는 틀리다.

113p
“세존에게 보시하는 것보다 ‘세존 앞에서 승가에 공양한다면’ 그것은 더 커다란 과보를 가져올 것입니다.”

[비평] <웰라마 경>(A9:20)의 부분을 인용한 문장인데 전재성의 번역이다.

그런데 yo ca buddhappamukhaṃ bhikkhusaṅghaṃ bhojeyya를
전재성은 ‘세존 앞에서 승가에 공양한다면’으로 번역하였고, 각묵은 ‘부처님을 상수로 하는 비구 승가를 공양한다면’으로 번역하였다. pamukha는 수장(首長), 상수(上首)의 뜻이므로 각묵스님의 번역이 올바르다. 원래 전재성의 번역은 ‘깨달은 님 앞에서 수행승의 참모임에 공양한다면’인데 <불교성전>은 이것을 ‘세존 앞에서 승가에 공양한다면’이라고 수정한 것이다.

나는 ‘세존’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기에 각묵 스님의 번역인 줄 알았다. 이처럼 <불교성전>은 각 번역자의 번역을 편찬자의 의도대로 수정하여 실었는데, 하필이면 잘못 번역된 것을 가져온 것이다. 이런 점을 보면 불교성전을 편찬위는 인용할 ‘니까야’ 경전이 제대로 번역된 것인지를 먼저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잘못된 번역이 있다면 <불교성전>에 그대로 실리기 때문이다.

또한 gandhohanamattampi mettacittaṃ bhāveyya를
전재성은 ‘단지 스치는 향기처럼이라도 자애의 마음을 닦는다면’으로, 각묵은 ‘소젖을 한번 짜는 동안만큼이라도 자애의 마음을 닦는다면’이라고 번역했는데, 간다(gandha)는 꽃향기, 우하나(ūhana)는 잠깐이라는 뜻이기에 전재성의 번역이 올바르다. <불교성전>은 전재성 번역을 따랐으나, ‘꽃향기가 잠시 스치는 것처럼 짧은 순간에 세상을 향해 자비심을 품는다면’이라고 수정하여 실었다.

118p
5절 법의 바퀴를 굴리다

[비평] ‘5절 법의 바퀴를 굴리다’(90p~133p)는 부처님의 생애를 성도 후부터 열반까지 시간 순서대로 기술하고 있다. 부록에 ‘불교사 연표’처럼 그 순서를 어기지 말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이 56세 때 일어난 앙굴리말라 사건이 먼저 등장하고 부처님이 39세 때 벌어진 바이샬리 전염병 퇴치사건은 앙굴리말라 이야기 뒤에 등장한다. 이렇게 사건의 발생 순서를 어기게 되면 부처님 생애를 쫓아가던 독자들이 혼란스럽게 된다. 아누룻다가 눈이 멀게 된 이야기(128p)도 성도 후 초기의 사건이므로 <보배경> 앞에 배치해야 한다.

121p
“바이샬리에 재앙은 없으리”

[비평] 정확한 번역은 ‘이러한 진리로 행복하기를’이다. ‘바이샬리에 재앙은 없으리’와 ‘이러한 진리로 행복하기를’이라는 표현은 많이 다르다. ‘이러한 진리로 인해서 모두 편안히 지내길(Etena saccena suvatthi hotu!)’이라는 문장이 ‘바이샬리에 재앙은 없으리’라고 변경되면 본래의 ‘진리의 힘’을 강조하는 것이 사라진다. 뒤에 376p에는 <보배경> 전문이 소개되고 있기에 중복되고 있기에 하나를 삭제해도 될 듯하다.

122p
|“부처님은 멀리서 그가 오는 것을 보고 돌아서 나가려 하셨다...그저 나쁜 사람과는 만나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124p
“공부가 완성될 때 까지는 선한 사람 반듯하게 마음을 잘 쓰는 사람을 만나기를 권하셨다.”

[비평] 부처님이 제바달다를 피하신 사건을 예로 들면서 ‘공부가 완성될 때 까지는 선한 사람을 만나기를 권하셨다.’라고 결론짓는 비유와 설명이 맞지 않는다. 여기에서 말하고자하는 것은 공부를 완성한 사람도 나쁜 사람을 피한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부처님이 정말 제바달다를 피하셨는지 경전 출처를 알고 싶다.

131p
“이런 기적은 누구라도 조금만 노력하면 얻을 수 있고 사람들의 논란만 부추깁니다.”

[비평] 부처님은 신족통, 타심통을 이런 식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신족통, 타심통이 조금만 노력하면 얻는 신통도 아니고 부처님이 모든 신통력을 금하신 것도 아니다. 삔돌라바라드와자가 허공으로 날아가서 전단향 나무발우를 가져온 것을 부처님이 나무란 것은 사실이다.(변변치 않는 일에 신통을 뽐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신통력은 신통지(智)이다. 부처님과 제자들은 신통지를 일상적으로 사용했고 부처님 제자 중에는 그 신통지를 보고 출가하고 신심을 낸 사람이 많았다. ‘누구라도 조금만 노력하면 얻을 수 있고 사람들의 논란만 부추깁니다’라고 신통력을 평가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고 본다. 출처를 알고 싶다.

143p
“바이샬리에 사는 릿차위족, 카필라에 사는 석가족, 알라깝빠에 사는 불리족, 마가다에 사는 콜리야족, 웨타디빠에 사는 바라문, 바와에 사는 말라족도 부처님께서 쿠시나가라에서 완전한 열반에 드셨다는 소식을 듣고,”

[비평] 위에서 영어식 발음은 바이샬리, 카필라, 콜리야, 쿠시나가라이고,
빨리어 단어는 웨살리, 릿차위, 꾸시나라, 까삘라, 알라깝빠, 불리, 말라, 라마가마, 꼴리야, 웨타디빠, 빠와, 삡팔리이다. pava는 영어식으로는 파와, 빨리어로는 빠와인데 ‘바와’라는 것은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발음이다. 오자이다.

144p
“인간의 왕에게 예경을 받은 부처님은 이처럼 인간의 왕들로부터 예배를 받았다.”

[비평] '인간의 왕에게'가 반복되고 있다.

144p
“부처님을 언제 다시 친견 할 수 있을까? 부처님과 가르침이 간절한 사람이라면 탑을 향해 서서 두 손을 높이 합장하여 절을 올려야 한다. 백겁이 지나도록 친견하기 어려운 분이시기 때문이다.”

[비평] 이러한 감상적인 발언은 삭제하는 게 좋다. 부처님 말씀을 정확하게 들려주는 것에서 만족하고 ‘~해야 한다’라는 의무감이나 강요는 하지 않는 게 좋다. 반응은 독자들의 자율에 맡기는 것이 불교적이다.

145p
“종교적 방황을 두루 겪은 뒤”

[비평] ‘종교적 방황’이라는 표현보다는 ‘종교적 탐색’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147p
“거바라 촌 고향으로 돌아가 가부좌하고”

[비평] 131p에는 “길가의 앙상한 나무아래 ‘두발을 맺고’ 앉으셨다.”라는 표현처럼 ‘가부좌’ 대신에 ‘다리를 맺고’ 라는 표현을 사용해 오다가 여기에서 갑자기 ‘가부좌’라는 단어가 나온다. ‘가부좌’라는 말이 현대인에게 생소해서 ‘다리를 맺고’라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사용한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두발을 맺고’든 ‘가부좌’든 하나로 통일해야 하지 않을까?

148p
“미륵보살은 염부제의 햇수로 56억만년 동안을 도솔천에 설법하여 밤낮으로 수없는 천신을 교화한 뒤 다시 염부제에 태어날 것입니다.”

[비평] <앙굿따라니까야>에서 도솔천에서의 수명이 설명되는데 인간의 수명으로 계산해보니 5억7천600만년이다. 아비달마 길라잡이에도 도솔천의 수명이 5억7천600만년으로 나온다. 그런데 도솔천에서의 수명이 56억7천만년이라는 것은 계산이 잘못 된 것 같다. <팔관재계경>(A3:70)

아래는 각 천상에서 수명을 계산한 것이다.

"위사카여, 인간들의 50년은 사대왕천의 단 하루 밤낮과 같고, 그 밤으로 [계산하여] 30일이 한 달이고, 그 달로 [계산하여] 12달이 1년이다. 그 해로 [계산하여] 사대왕천의 신들의 수명의 한계는 500년이다. (500x12x30x 50=900만년)

"위사카여, 인간들의 100년은 삼십삼천의 신들의 하루 밤낮과 같고,…그 해로 [계산하여] 삼십삼천의 신들의 수명의 한계는 1000년이다.…(3600만년)

"위사카여, 인간들의 200년은 야마천의 신들의 하루 밤낮과 같고, …그 해로 [계산하여] 야마천의 신들의 수명의 한계는 2000년이다. …(7200만년)

"위사카여, 인간들의 400년은 도솔천의 신들의 하루 밤낮과 같고,…그 해로 [계산하여] 도솔천의 신들의 수명의 한계는 4000년이다.…(5억7천600만년)

"위사카여, 인간들의 800년은 화락천의 신들의 하루 밤낮과 같고,…그 해로 [계산하여] 화락천의 신들의 수명의 한계는 8000년이다.…(23억0400만년) <팔관재계경>(A3:70)

149p
“부처님의 극락정토는 미타정토라고 부르고 미륵보살의 도솔천은 미륵정토라고 부른다. 도솔천이야 말로 그토록 그리는 불국토이다.”(150p)

[비평] 부처님 당시 말리까왕비, 수마나, 마야왕비, 욕심 많은 띳사 비구, 상인 마하다나 등이 도솔천에 태어났다. 도솔천에 태어나는 것은 초기경전에는 시계천이라는 예비법문일 뿐인데 도솔천에 나는 것을 이렇게 찬탄하다니 놀랍다. 더군다나 180p에는 ‘보살은 천상에 태어나길 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태어나면 반드시 늙고 병들고…’라고 말하고 있다.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하나?

152p
“첫 번 째 설법에서 96억 명이 아라한이 될 것이다. 두 번 째 법회에서는 94억 대중이 아라한을 얻을 것이며 세 번째 법회에서는 92억 대중이 아라한을 얻을 것이다.”

[비평] 부처님 생애는 일반적으로 열반으로 끝나는데 <불교성전>에서는 이례적으로 열반에 이어서 미륵보살 이야기가 등장한다. 미륵보살이 56억7천만년(5억6천7백만년) 후에 그리고 인간의 나이가 8만세가 될 때에 세상에 오셔서 282억 명(96+94+92=282)을 제도 한다는 설명이다. 미륵보살을 일념으로 부르면 1천2백겁동안 지은 죄가 사라진다. 이런 식으로 불교를 가르칠 필요가 있을까? 지금여기에서 고따마 부처님의 가르침을 충실히 배우고 수행하는 것을 가르치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지금 지구의 나이(46억년)보다 더 오랜 시간인 56억년을 기다려야 만나게 되는 미륵보살을 이렇게 자세히 이야기 한다는 것은 이 책의 취지와는 어긋나는 것 같다. 미륵보살이 오시는 세상에 282억 명이 산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젊은이들은 인구과잉으로 환경문제 등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를 염려할지도 모른다. 먼 미래의 이야기를 젊은이들에게 말해주는 것이 과연 불교 포교를 잘 하는 것일까? 들리는 말로는 총무원장 스님이 계셨던 사찰이 미륵도량 금산사이기에 특별히 미륵 보살부분이 첨가되었다고 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공과 사를 구분하지 않은 것이라는 비난을 들을 것이다.

160p
“어떤 두 왕이 전쟁을 일으켜 많은 백성을 해치고 밤낮으로 음모를 계속 꾸몄다.”

[비평] 파사익 왕과 빔비사라 왕은 사이가 좋아 싸우지 않았으므로 파사익 왕과 녹야원에서 싸운 왕은 아잣타삿투일 것이다. 아잣타삿투가 예류과를 얻었다는 것은 사문과경과 내용이 다르다. 만약 서로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면 그 후로는 어느 경전이 더 신뢰성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177p
“다섯 무더기로 성하는 괴로움입니다.”

[비평] 90p에서는 ‘오취온고’를 ‘요컨대 존재 그 자체가 괴로움입니다’라고 표현했는데 같은 내용을 ‘다섯 무더기로 성하는 괴로움입니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너무 성의가 없다. 더구나 경전 내용도 ‘오음성고’의 내용이 앞의 7가지 고가 오음성고라고 설명하는 것도 ‘니까야’와 차이가 있다. 이렇게 같은 내용을 다르게 설명하는 경전들을 실어 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내용이 다른 줄도 몰랐기 때문이 아닐까?

274p
“모든 성스러운 스님에게 무너지지 않는 믿음과”

[비평] 성승가를 ‘성스러운 스님’으로 번역하니 아직도 ‘승가=스님들’이라고 보는 듯하다.

286p
“믿음의 복은 헤아릴 수 없다.”

[비평] 소 제목은 ‘보시의 복은 헤아릴 수 없다.’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경의 내용이 그렇기 때문이다.

293p
“또는 아이들이 장난으로 모래를 쌓아 불탑을 만든다면 이런 사람들은 모두 이미 성불하였느니라.”

[비평] 이런 설명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계정혜 수행을 통해서 해탈한다는 교리와 모순된다. 불자들에게 어떻게 모순 없이 이해시킬 것인가?

308p
“이 아이는 이 공덕으로 내가 열반한 후 백년 뒤에 국왕이 되어 이름을 아소카라 할 것이다.”

[비평] 아소카는 이 백년 후에(불멸 BC544~bc304 아소카출생)에 태어나서 이 예언이 맞지 않는다. 연대가 맞지 않는 이런 경을 소개할 필요가 있나?

316p
‘삼귀의 하는 법’

[비평] 저는 ‘승가에 귀의합니다’를 세 번하고 있다. 부처님은 이렇게 가르쳤는데 조계종은 왜 스님들께 귀의 한다고 번역하고 있나?

325p
‘<범망경> 10중 대계와 48계’를 소개하고 있다.

[비평] <범망경> 내용이 초기불전과 다른 내용이 많아서 <범망경> ‘포살계본’으로 포살을 하는 것을 거부하는 스님들도 있다. <범망경>의 경구죄 제37조 스님들이 평소에 가지고 다녀야 하는 물건을 열거하는데, 그 가운데는 경전, 율문, 불상, 보살상 등이 있다. 이러한 점을 보면 <범망경> ‘보살계본’은 불상과 보살상이 만들어 지고 난 이후의 작품이다. 경구죄 8조는 ‘이승성문의 교법과 이교도의 사견(邪見)으로 만든 학설을 배우는 것은 죄가 된다.’(背大向小戒 若佛子 心背大乘 常住經律言非佛說 而受持二乘聲聞 外道惡見 一切禁戒邪見經律者 犯輕垢罪)’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경구죄 중에는 소승과 성문을 외도와 동급으로 취급하는 설명이 4번(8조, 15조. 24조. 34조)이나 나오는데 왜 이런 것을 지금까지 배워야 하나? 경구죄 3조는 고기를 먹지 말라는 사분율과 다른 가르침이다. 두 개의 서로 상이한 율을 언제까지 승려와 불자들에게 따르라고 말할 것인가? 다른 중요한 경전도 많은데 <범망경> ‘10중 대계’와 ‘48경구계’를 <불교성전>에 수록하는 것은 혼란을 자초하는 일이다. 상이한 두 가지 율을 수계하게 하는 것은 지키지 못할 것을 지키라고 하는 것이기에 처음부터 계율에 대한 불신을 가지게 되어있다. <범망경> 제16조에서는 "만약 몸이나 팔이나 손가락을 태워서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지 아니하면 보살이 아니다"라는 조항이 있기에 예전에 선배스님들이 손가락 연비를 많이 하였다. 부처님 법이라고 볼 수가 없다.

367p
‘발심수행장’을 소개하고 있다.

[비평] ‘절하는 무릎이 얼음과 같더라도 불을 그리는 마음이 없고(拜膝如氷無戀火心) 주린 창자가 끊어질 것 같아도 밥을 구하는 생각이 없어야 한다.’(餓腸如切無求食念) 그만큼 간절하게 다른 생각하지 않고 수행하라는 말씀이지만 이것을 잘못 이해하여 마치 고행을 하는 것이 수행인 냥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지난번 천막선원에서 목욕 안하기, 머리 안 깎기, 말 안하기, 외출 안하기, 추위 참기 등을 청규로 정하여 안거를 한 것도 고행을 수행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는지 의심이 든다. 부처님이 가르쳐주신 오후불식과 소욕지족(少欲知足)을 강조하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에 부합할 것이다. ‘발심수행장’과 내용이 비슷한 경전을 인용하는 것이 더 낳을 것이다.

420p

“비구들이여, 나쁜 법과 나쁜
법에 동참하는 것과 나쁜 법 편에 있는 것은 그 무엇이든 모두 마음이 그들을 앞서 갑니다.”

[비평] 위에 인용한 경의 초기불전연구원 번역은 이렇다.

“비구들이여, 불선법(不善法)과 불선법에 동참하는 것과 불선법의 편에 있는 것은 그 무엇이든 모두 마음이 그들을 선행한다. 마음이 그 법들 가운데서 첫 번째로 일어나고 그 다음에 불선법들이 일어난다.”

꾸살라(kusalā)와 아꾸살라(akusalā)를 전재성은 ‘건전한 법’과 ‘건전하지 않은 법’이라 번역했고, 각묵은 ‘선법’과 ‘불선법’ 혹은 ‘유익한 법’, ‘해로운 법’으로 번역했다. 여기서는 ‘착한 법’과 ‘나쁜 법’으로 바꾸어 사용하고 있다. 용어통일 없이 자유롭게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33p
‘부루나를 교계한 경’

[비평] ‘뿐나를 교계한 경’이라고 경의 제목도 바꾸고 본문에 등장하는 ‘뿐나’도 모두 ‘부루나’로 바꾸어 놓았다. ‘니까야’의 번역까지 임의로 수정하면서 예전의 번역어를 사용하고 있다. 501p에서도 같은 경이 나오는데 이번에는 장소를 ‘수나빠란따’에서 ‘수로나’라고 고쳐놓았다. 하나의 경을 이렇게 잘라서 부분을 인용하는 것은 좋지 않게 보인다.

459p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거짓 이름을 말하는 것이다…‘있다’ ‘없다’의 양극단을 여의었기에 중도라 한다.”

[비평] 부처님이 사용하신 ‘있다(atthī)’ ‘없다(natthī)’는 세상 사람들의 어법에 따른 표현이다. 이러한 ‘있다’ ‘없다’는 상견과 단견에 떨어지는 것과 다르다. 상견과 단견은 동사 ‘있다(atthī)’와 ‘없다(natthī)’가 명사 ‘있음(atthitā)’와 ‘없음(natthitā)’이 될 때 나타난다. 동사가 명사가 되어 사용될 때 상견 단견의 표현이 된다는 것은 깊이 음미해야 할 대목이다. ‘꽃경’(S22:94)과 ‘깟짜야나곳따의 경’(S12:15)을 보면 그 차이가 잘 드러난다. 이렇게 부처님의 언어사용법을 설명하지 않고 단순히 ‘있다’ ‘없다’를 상견 단견이라고 비판한다면 불자들의 언어생활이 혼란스러워 진다. 중론을 인용할 때 이러한 설명을 해주어야 하는데 그러한 설명이 없다면 처음부터 중론은 인용하지 않는 게 좋다.

465p
‘정신경’에서

[비평] 정신경에서 쭌다를 춘다로 바꾸어 놓았다.
발음이 달라지면 쭌다(cunda)와 춘다(chunda)처럼 다른 사람으로 오해 될 가능성이 있다.

467p
‘소나단다경’ 소개

[비평] 소나단다경을 소개하는데 뽁카라사띠, 짬빠, 각가라, 소나단다는 그냥 두고, 빠세나디는 파사익으로, 고따마는 고타마로 이름을 바꾸어 놓았다,

494p
“저 바라문은 제화갈 부처님이었고 토끼는 나였으며 원숭이는 사리불이었고”

[비평] 제화갈(提和竭) 부처님을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마는 설명도 없이 지나간다.

498p
* 표시

[비평] 보기 드물게 * 표시를 하고 현겁(賢劫)에 대한 주석을 달아 놓았는데, 현겁에 1천 부처가 출현한다는 것이 초기불교 입장에서는 믿기 어렵다. 불자들은 어느 쪽을 따라야 할까?

525p

“자비하신 관세음께 귀의 하오니 일체법을 어서 속히 알아지이다.”

[비평] 갑자기 <천수경>이 등장한다. <천수경> 다음에는 ‘행선축원’ 그 다음은 ‘이산혜연선사 발원문’…. <불교성전>이 갑자기 <불교예경집>이 된 느낌이다. 정말로 여기에는 없는 게 없다. 395p에도 천수경이 등장한다.

621p

[비평] 왓지국을 ‘월지국’으로, 아잣타삿투를 ‘아사세’로 이름을 바꾸어 놓았다. 언 듯 보면 ‘니까야’가 아니고 한문경전인 줄 알겠다.

637p

[비평] 아누룻다, 난디야, 낌빌라를 아나율, 난제, 금비로 고쳐 부르고 있다.

665p
보드가야 지도상 위치

[비평] 부처님 당시 인도 지도에서 보드가야의 위치가 잘못되었다. 지금 보드가야라고 표시된 곳은 가야이다. 보드가야는 부처님 당시에 우루웰라로서 강물이 하나로 합쳐지는 곳 아래에 위치한다.

666p
“우루벨라의 장군촌 근처의 숲속에서 6년 고행하다.”

[비평] 6년 고행장소를 세나니 마을 근처로 특정하여 반갑다. 기존에 책들은 전정각산이 있는 곳이 고행림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네란자라강 근처 숲이 고행림인 것은 대당서역기 등 여러자료에 나온다.

667p
“바이샬리 강물을 두고 석가족 꼴리야족의 분쟁을 해결하다.”

[비평] 바이샬리 강물이 아니라 ‘로히니 강물’을 두고 분쟁이 벌어진 일이다. 로히니강은 룸비니 동쪽에 있다.

668p

[비평] 찬드라 굽타 즉위 년도를 BC317년 이라고 적고 있지만, BC322년이라고 여러 곳에서 검색되고 있다.

669p

[비평] 산치탑과 바르후탑은 애초에 아소카왕이 건립한 것이므로 설명하는 내용이 아소까 재위기간(BC 268~ 232)안에 들어왔으면 좋겠다.

698p~703P

[비평] 6페이지에 걸쳐서 스님들 법명과 신도회 명단이 등장한다. 불자, 비불자들에게 널리 알려야 하는 <불교성전>에 이렇게 사람 이름을 많이 올릴 필요가 있나? 이들 중에 이 책을 만드는데 실질적인 도움을 준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 6페이지에 ‘부처님의 45년 안거장소’를 지도에 표시하여 올리고, 부처님의 ‘가계도’, 불교의 우주관인 ‘삼계도’같은 기본적인 자료를 올려 주었으면 더 의미 있었을 것이다.

이상 50년 만에 출판된 종단본 <불교성전>을 살펴보았는데 혼자서 하다 보니 많이 미흡하다. 여기에 인용된 경전, 어록 등의 출처를 찾지 못하고 원전을 보지 못하여 정확한 교정이 어려웠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어떤 사람은 옮겨진 경전의 전체를 읽고 싶어 하고 경전이 설해진 상황이나 분위기를 파악하고 싶어 할 것이다. 출처를 그저 <화엄경>, <임재록>, <선가귀감>이라고 밝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정확한 출처를 표시하지 않은 것은 이 책의 내용들이 모호한 영역으로 떨어지게 하는 근본 이유이다.

책을 읽다가 출처가 알고 싶고 원문이 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서 인터넷에 <불교성전 설명서>를 올려 놓아주길 바란다. 누구나 해당 경전의 출처와 원문을 볼 수 있게 말이다. 어차피 경전을 옮겨올 때 그 경전을 인용한 사람은 출처와 원문을 보았을 것이니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불교성전>에 인용된 모든 경전과 어록의 원본을 인터넷에 올려 놓아주면 조금은 더 친절한 종단본 <불교성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허정 스님/전 천장사 주지.

#이 기고는 허정 스님의 블로그(https://blog.daum.net/whoami555/13742563)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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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2021-09-14 07:16:09
佛敎聖殿,
眞正한 붓다의 가르침이 있는
神聖한 殿堂書라 解釋하고 싶다.

그렇다면
불교의 주제는 무엇인가,
중생계에서 벗어나는 해탈임을
수행자라면 잘 알것이다.

허나, 현존하는 불교계에는
깨달은者(?) 있되 해탈한 者는 없다.
그 깨달음은 무엇을 깨달았다는 것일까?

깨달음이란
완성된 지혜의 성립에서 비롯된 견해이며
지혜의 성립은
해탈nirvana경지 체득을 완성으로
성립되는 경계이다.

만약
해탈경지체득을 완성하지 못하였다면
지혜의 성립은 불가능하기에
깨달음의 견해 또한 불성립되는 것이다.

현존하는 불교에는
깨달음의 방편(?)은 난무하되
해탈경지에 드는 수행법은 없다.

이제라도
그 수행요체를 찾아 定立하고, 실현 후,
진정한 佛敎聖殿을 펴냄이 옳을 것이다.

합장

건의합니다 2021-07-01 10:12:19
불교도 유일신의 공격적 포교 전략 을 본받아서
나아가야 살길 열 린다고 봅니다
우리나라 중 요 사찰 앞 에 기계 설치 해서
버튼 하나 누르면 붓다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사람들에게 영향 을 줬는지? 어떤 업적을 이렀는지?
간단한 설명을 하는 장치를 설치 하는게 좋지 않나? 싶어요
허정스님
늘 부처님의 가피가 함께 하시길 ㆍㆍ

허운 2021-05-18 08:06:38
비평하지 말고 허정스님이 성전을 써라
더 잘쓰면 역사가 니를 더 평가 해 주지 않겠니?

허운 2021-05-09 08:33:28
남의 허물 볼 시간이 어디 있나??제 갈길도 바쁜데...말은 말이 뿐이다

석가모니의 연설 2021-04-01 22:30:55
뜻을 내어 대승으로 나아가매~

부처님은 이 세상에 나와
모든 부처님법의 위없는 법바퀴를 굴리시나니 ~
모든 부처님들이 부처님도 모르는 새로운 불교성전이 나와 깜놀 호통할일!
석가모니 부처님은 새로운 법이란 위가 더없고 지옥승 말법승이 나오고 말법이 나온다 말씀!
~

대본경
부처님은 게송으로 말씀

부처님은 이 세상에 나와
위없는 법바퀴를 굴리시나니

모든 법의 <나> 없음을 깨달으리니
그것은 법 중에서 가장 위되어
지혜로 법바퀴를 굴리느니라.

이 세상에서 도를 이루어
네 가지 거룩한 진리로써 ,,

괴로움을 멸한 상태의 진리로다
거룩한 저 여덟 가지 바른 길로
안락한 곳에 중생을 인도하네~

비바시
시기 부처

구루손
구나함
가섭

,
,

이 모든 부처의
처음과 끝의 인연의 전부로서
이 석가모니의
연설한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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