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나도 일하고 올바르게 잘사는 '노나메기 세상'을 꿈꾸던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영결식이 19일 엄수됐다.
'노나메기 세상 백기완 선생 사회장 장례위원회'는 이날 오전 8시 서울대병원 발인식을 시작으로 대학로 통일연구소 앞 노제, 서울광장까지 운구 후 영결식을 진행했다. 영결식 후에는 마석 모란공원 장지에 선생을 안장했다.
백기완 선생 가는 길에는 각계각층 시민 1000여 명이 함께 햇다. 이들은 '노동해방'이 쓰인 머리띠와 '노나메기 세상'이 쓰인 흰색 마스크를 쓰고 선생의 가는 길을 함깨 했다.
백 선생의 장례는 고인이 생전에 우리말을 비롯한 민족문화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였던 것에 따라서 꽃상여와 거리굿 진혼무 등 전통 장례절차를 재현해 엄수됐다.
서울대입구에서 서울광장까지 운구에는 선생의 가르침 등을 쓴 만장과 노동자를 보듬은 백 선생을 현상화한 대형 한지 인형 등이 시민과 함께 했다.
영결식은 코로나 방역수칙에 따라 99명 좌석만 마련됐다. 출입자 방명록 작성과 체온 측정을 하고, 참석자간 거리두기를 했다.
명진 스님(평화의길 이사장)은 조사에서 "백기완 선생에게 가시는 길 '반야심경'이라도 올리겠다하면 '내 길은 내가 알아서 갈테니 염불대신 민중의 고통과 한을 풀어주는 스님이 되라'고 할 것 같다"고 했다.
이어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말씀처럼 눈 뜨고 살아 그 길 가겠다"고 했다.
앞서 문정현 신부는 "백 선생 옆자리가 곧 내 자리인 줄 알고 살았다. 이제 내 자리가 없어진 것 같아 외롭다"고 했다.
이어서 "문재인 정부에 남긴 말씀, 이 땅 민중들이 주도한 한반도 평화운동 맥락 위에 서 있으니 소신 있게 해 나가라는 마지막 뜨거운 숨 놀랍다. 선생님 고맙습니다"라고 했다.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하다 목숨을 잃은 고 김용균 씨 어머니 김미숙 이사장(김용균 재단)은 "이제는 우리에게 백기완 선생같은 큰 어른 역할을 누가 해줄 수 있겠느냐. 선생님이 많이 그리울 것 같다"고 했다.
백기완 선생은 1933년 황해도 은율 구월산 밑에서 태어나 평생을 민족통일과 민주 노동운동에 앞장서왔다. 1960년 4.19혁명, 1964년 한일협정 반대투쟁, 1969년 3선개헌반대투쟁, 장준하 선생 등과 '민족학교' 운동을 전개했다. 백범사상연구소 개소, 재야인사들과 민주회복국민회의 결성, 박종철 기념사업회 초대회장, 민주노총 전신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 고문 등을 지냈다.
백 선생은 1974년 유신 반대 1백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하다 긴급조치 위반으로 투옥됐다. 1979년 'YMCA 위장결혼 사건' 1986년 '부천 권인숙양 성고문 폭로 대회' 주도 혐의 등으로 수차례 투옥과 고문을 당했다. 2000년대 비정규직, 해고노동자 투쟁운동을 비롯해 이라크 파병 반대운동, 한미자유무역협정(FTA) 반대 운동, 용산참사 투쟁, 밀양 송전탑 반대운동, 이명박 퇴진 운동,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요구 촛불집회 등에 늘 참여했다. 그는 일생을 모진 고문의 후유증 속에서도 우리 시대를 바로 세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백 선생은 '장산곶매 이야기' 등 소설과 수필집을 낸 문필가이자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 원작자이다.
백 선생은 "잘못된 세상을 놔두고 왜 절만 고치냐"며 민주화 이전 암울했던 시대, 민중 삶을 외면하던 스님들에게도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2017년 '깡패스님'으로 부르며 아끼던 명진 스님이 조계종단으로부터 승적을 박탈당한 뒤 조계종 적폐청산 운동에도 힘을 보탰다.
범계적폐 몰아내고 청정재가가 불교의 당당한 주인이 되는
노나메기 세상 만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