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아픔, 불교중흥의 꿈 보듬은 선지식들의 도량
민족의 아픔, 불교중흥의 꿈 보듬은 선지식들의 도량
  • 이창윤 기자
  • 승인 2020.10.29 15: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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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따라 떠나는 사찰순례 - 문경 김룡사, 대승사, 묘적암, 윤필암
▲ 문경 대승사 사면석불.

600m 남짓한 숲길은 싱그러웠습니다. 햇살은 나뭇가지를 헤집고 들어와 순례자의 어깨를 어루만졌고, 공기는 맑고 싱그러웠습니다. 어서 와 안기라는 듯 손짓하는 나뭇잎을 쫓아 울울창창한 운달산 계곡을 한두 걸음씩 내딛다 보니 보장문(寶藏門)이 두 팔을 벌리고 순례자를 맞이합니다. ‘온갖 보물을 감추어둔 곳’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문 너머에는 어떤 보물이 숨겨져 있을까요?

운달 조사가 창건한 김룡사

김룡사(金龍寺)는 문경시 산북면 운달산에 있는 사찰입니다. 신라 진평왕 10년(588) 운달(雲達) 스님이 창건한 절입니다. 산내 암자인 금선대(金仙臺)가 첫 터였다고 하지요. 당시 이름은 운봉사(雲峰寺)였다고 합니다. 부처님을 금색선인(金色仙人), 즉 금선(金仙)이라고도 하니, 절을 옮긴 뒤 불법이 세세생생 머물 불연(佛緣)의 땅이란 의미로 새 이름을 지은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김룡사가 언제 현재 자리로 옮겨 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고찰이 그러하듯 창건 이후 조선 전기까지 김룡사의 세세한 역사를 알려줄 기록이 전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김룡사는 인조 대에 중창됩니다. 조선 인조 2년(1624) 혜총(惠聰) 스님이 제자 광제(廣濟), 묘순(妙淳), 수헌(守軒) 등과 도량을 새롭게 일구었지만 19년 뒤 화마에 휩싸였고, 이태 뒤 다시 의윤(義允), 무진(無盡), 태휴(太休) 세 스님이 불사를 일으켜 대웅전을 복원했습니다. 이후 김룡사는 효종 대와 숙종 대를 거치며 사세가 커져 영·정조 대에 이르러 대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절 이름을 ‘금룡’이라 부르지 않고, ‘김룡’이라 하니 참 생경합니다. ‘운봉’이란 절 이름이 바뀐 이유는 여러 가지 있으나, ‘김룡’이라는 인물과 관련 있다는 설이 가장 그럴 듯합니다. 죄를 짓고 운달산에 숨어든 한 장자(長子)가 용녀와 인연을 맺어 낳은 아들이 ‘김룡’이었다 합니다. 김룡은 가세를 크게 일으켰는데, 그의 이름을 따 동리와 사찰 이름을 김룡리, 김룡사라 부르게 됐다는 것이지요.

언제부터 김룡사로 불렸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숙종 29년(1703) 조성된 ‘영산회괘불도’(보물 제1640호) 화기에 ‘운봉사’가 적힌 것으로 보아 괘불이 조성된 이후의 일임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 문경 김룡사.

일제 강점기 31본산 중 한 곳

지금은 산 깊은 외진 곳에 자리한 직지사 말사에 불과하지만 김룡사는 일제 강점기 때 31본산의 하나로 경북 서북부 지방 50여 개 사찰을 거느렸던 대찰이었습니다.

31본산제도는 일제가 민족불교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1911년 제정한 ‘사찰령(寺刹令)’에 따라 만들어진 제도입니다. 불법적인 을사늑약으로 조선을 침탈한 일제는 우리 민족의 정신과 문화, 사회제도를 모조리 말살하려고 들었습니다. 불교라고 예외는 아니었지요. 그 제도적 장치가 ‘사찰령’이었습니다.

사찰령에는 조선불교의 자주권과 자율성, 재산권을 박탈해 조선총독부 감독 아래 두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전국에 흩어진 사찰과 재산을 30개 교구(1924년 화엄사가 추가돼 31본산이 됩니다.)에 소속시켜 각 교구마다 본산이 관리하도록 한 것입니다. 사찰령 하에서 본산의 주지는 막강한 권한을 가졌지만, 조선총독의 인가를 받아야만 취임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불교는 조선총독부의 통제 아래 놓일 수밖에 없었지요.

사찰령의 폐단은 컸습니다. 주지에게 사찰 경영에 대한 권한이 쏠림으로써 모든 승려가 모여 의견을 나누고 결정하는 한국불교의 전통인 산상중공의제도(山中公議制度)는 퇴색되었고, 각 교구마다 본·말사의 관계, 승규(僧規), 법식(法式) 등을 규정한 사법(寺法)을 제정해 총독부 허가를 받도록 함으로써 조선불교는 점점 왜색화 되어 갔습니다.

의병 주둔지 제공, 독립운동 지원

그런 와중에도 김룡사는 불교의 사회적 역할을 외면하지 않고, 민족불교를 수호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은 사찰이었습니다.

김룡사는 구한말 문경지역 의병장이었던 운강 이강년(雲崗 李康秊. 1858~1908)에게 사찰 부지를 주둔지로 제공하는 등 의병활동을 도왔고, 을사늑약 이후에는 군자금을 독립군에게 제공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했습니다.

김룡사는 근대 불교교육의 산실이기도 했습니다. 김룡사, 대승사, 남장사, 용문사, 명봉사 등 사찰이 청년 승려를 교육시키기 위해 광무 11년(1907) 설립한 경북지역의 첫 중등교육기관인 경흥학교(慶興學校)가 이곳에 있었습니다. 김룡사는 경흥학교 외에도 불교전문(전문강원)과 보통학림(김룡학교)도 운영했는데, 전국 본산 중 불교전문과 지방학림, 보통학교를 함께 운영한 곳은 전국에 김룡사를 비롯해 8개 사찰뿐이었다고 합니다.

경북 근대교육의 산실 경흥학교

경흥학교는 독립운동과 민족의식 함양에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경흥학교 학생 18명은 3·1만세운동 소식을 전해 듣고 1919년 4월 13일 만세시위를 시도했고, 이듬해에는 순회강연단을 조직해 강연에 나서는 등 독립운동과 민족의식 함양에 적극 나섰습니다.

김룡사는 근대 불교교육의 산실이었습니다. 퇴경 권상로(退耕 權相老, 1879~1965) 스님과 안진호(安震浩, 1880~1965) 스님 등 대강백이 이곳에서 강석을 열었습니다.

문경에서 태어난 퇴경은 18살 되던 고종 33년(1896) 김룡사에서 서진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습니다. 김룡사 전문강원에서 10년간 교학을 연찬한 퇴경은 1904년 김룡사 화장암(華藏庵) 강사를 시작으로 경흥학교 한문교사와 중앙불교전문학교, 혜화전문학교, 동국대학교 교수를 역임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습니다. 일제 말 친일행위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에 소환돼 반민족행위자로 조사받는 오점을 남기기도 했지만, 당대 승려 중 퇴경에게 배우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로 교육에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김룡사 일주문 옆 숲에는 후학들이 퇴경의 업적을 기려 1987년에 세운 ‘퇴경당 권상로 대종사 사적비’가 서 있습니다.

성철 스님 첫 대중 설법지

김룡사는 1965년 퇴옹 성철(退翁 性徹, 1912~1993) 스님이 대중을 상대로 처음 법문한 곳이기도 합니다. 성철 스님은 이곳에서 하안거 기간에 20일 간 비구, 비구니와 신도, 대학생불교연합회 회원 등 100여 명에게 《반야심경》, 《육조단경》, 《금강경》, 《신심명》, 《증도가》를 설했습니다. 성철 스님의 사상이 처음 꽃을 피운 곳인 셈이다.

대승사(大乘寺룡)는 김룡사에 이웃한 절입니다. 직선거리로는 5km 남짓한 가까운 거리이지만, 김룡사에서 대승사로 가기 위해선 김룡삼거리까지 4km 남짓 되돌아 나와야 합니다. 골짜기 사이로 난 대하리천을 따라 전두리에 다다르면 대승사 입구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순례자를 반깁니다.

탐실한 붉은 사과가 주렁주렁 매달린 과수원을 지나 전나무와 소나무가 도열한 호젓한 산길을 3km쯤 오르면 사불산 깊숙이 포근히 내려앉은 대승사가 눈앞에 펼쳐집니다.

▲ 문경 대승사.

사면석불 수호사찰로 창건한 대승사

대승사 선원에는 ‘천강사불(天降四佛)’과 ‘지용쌍련(地聳雙蓮)’이라는 두 개의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하늘에서 네 부처님이 내려오시고, 땅에서는 연꽃 두 송이가 피어났다.’는 뜻인데, 대승사 창건 설화를 함축해 보여주는 글귀입니다.

《삼국유사》 <사불산 굴불산 만불산(四佛⼭ 掘佛⼭ 萬佛⼭)> 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신라 진평왕 9년(587)의 일입니다. 어느 날 네 면이 붉은 비단으로 쌓인 커다란 바위 하나가 산꼭대기에 떨어졌습니다. 바위의 네 면에는 각각 부처님이 새겨져 있었지요. 이 소식을 전해들은 진평왕은 먼 길을 달려와 네 부처님을 친견하고, 바위를 지킬 절을 짓도록 명했습니다. 그 절이 대승사입니다. 진평왕은 《연경(蓮經》, 즉 《법화경》을 외는 스님을 주지로 삼아 네 부처님을 돌보도록 했습니다. 네 부처님 주변을 늘 깨끗이 하고 향과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정성껏 돌본 스님이 입적한 뒤 무덤 위에서 연꽃이 피어났다 합니다.

대승사가 앉은 공덕산(功德⼭)을 사불산(四佛山)이라고도 부르는데, 하늘에서 네 부처님을 새긴 바위가 떨어졌다는 설화에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사방불은 동서남북 네 방위마다 불국토가 있고, 그 불국토마다 부처님이 계심을 뜻합니다. 사방은 곧 온 세상을 의미하는 것이니 사방불을 조성해 모신 것은 발길 머무는 모든 곳이 불국토가 되길 기원하는 의미겠지요. 지나친 해석일 수도 있겠지만 이 설화는 지명(智明), 원광(圓光), 담육(曇育) 같은 고승을 중국에 유학시켜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려 했던 진평왕이 신라를 불국토로 가꾸려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임진왜란으로 불탄 이후 숙종 대까지 근 100여 년 간 이어진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통해 대승사는 조선시대 산중가람의 면모를 갖추었습니다. 이 기간에 법당을 비롯해 승당(僧堂), 동상실(東上室), 관음전, 조전, 미륵전, 중실(中室), 시왕전(十王殿), 향로전(香爐殿), 천왕문(天王門), 만세루(萬歲樓), 침계당(枕溪堂), 금당(金堂), 영자전(影子殿), 향적전(香積殿), 응향전(凝香殿), 나한전(羅漢殿), 청심전(淸心殿) 등이 이루어졌다 하지요. 하지만 창건 이후 임진왜란 이전까지 대승사의 역사는 시간의 장벽 뒤에 꽁꽁 숨어있습니다. 《동국여지승람》이나 《세종실록 지리지》 등 조선 전기의 기록에서도 대승사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 국보 제321호 문경 대승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진정국사 천책(眞靜國師 天頙, 생몰년 미상)이 지은 <유사불산기(遊四佛山記)>가 스님의 시문집 《호산록(湖山錄)》에 수록된 것이나, 임제종 양기파의 법을 이어 고려 말 선풍을 새롭게 일군 나옹 혜근(懶翁 惠勤, 1320~1376) 스님이 산내 암자인 묘적암에서 출가한 사실, 고려 말 조선 초 정치 주도세력으로 새롭게 등장한 신진사대부의 배불론(排佛論)을 반박한 당대의 선지식 함허 기화(涵虛 己和, 1376~1433) 스님이 주석하며 반야경을 연찬했던 사실 등으로 미루어 이름난 수행도량으로 면면히 법등을 이어왔음을 짐작할 뿐입니다.

염불·교육·수선도량으로 명맥 이어져

1500년 동안 이어온 역사에 비하면 도량은 젊디젊습니다. 철종 13년(1862) 큰불이나 다시 중창했지만 반세기 만인 1922년에 다시 불탔고, 1956년에도 큰불이나 1966년에야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고종 대 중창 당시 폐사나 다름없이 방치되던 영주 부석사에서 이운해온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은 최근 국보 제31호로 지정됐습니다.

대승사는 고종 39년(1899) 월파(月波) 스님이 염불당에 미타계(彌陀契)를, 환경(幻鏡), 화응(華應), 학송(鶴松) 스님 등이 동별당에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를 설치하는 등 한동안 염불수행도량으로 자리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강원을 개설해 퇴경 권상로 스님과 안진호 스님이 주석하는 등 교육도량으로서 면모를 드러내기 하였지요.

현재 대승사는 선원으로 유명합니다. 1929년 비구선원을 개설하고 이태 뒤 용성 진종(龍城 震鍾, 1864~1940) 스님을 조설로 추대한 이래 청담, 성철, 서암, 자운, 금오, 고암, 향곡, 월산 스님 등 기라성 같은 수좌들이 이곳에 방부를 들이고 수행했습니다. 특히 성철 스님은 이곳 선원에서 3년 동안 장좌불와 수행을 했다 합니다.

경내를 나와 산내 암자 참배에 나섭니다. 원래 대승사에는 미륵암(彌勒庵), 사불암(四佛庵), 상적암(上寂庵), 대비암(⼤妃庵), 묘적암(妙寂庵), 묘봉암(妙峰庵), 윤필암(潤筆庵), 문수암(⽂殊庵), 보현암(普賢庵) 등 아홉 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묘적암, 윤필암, 총지암 등만 남아있습니다.

▲ 사면석불에서 바라본 묘적암.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나옹 화상 출가사찰 묘적암

묘적암은 신라 말 부설(浮雪) 거사가 창건했한 암자라 합니다. 이 암자는 나옹 스님이 출가한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나옹 스님은 스물한 살 되던 해(1340) 절친한 친구의 죽음을 목격하고 삶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요연(了然) 스님이 있던 묘적암으로 출가했습니다. 그러나 요연 스님은 나옹 스님이 법기임을 깨닫고 다른 스승을 찾아갈 것을 권유했습니다. 선지식을 찾아 전국을 편력하던 스님은 양주 회암사에서 크게 깨달았습니다. 그 뒤 중국에 유학해 인도에서 온 지공(指空) 스님과 임제종 양기파(臨濟宗 楊岐派)의 법손 평산 처림(平山 處林, 1279~1361) 스님에게 인가를 받았습니다. 귀국한 나옹 스님은 다시 묘적암을 찾아 회목 마흔 그루를 심었다고 합니다. 스님이 왕명을 받아 밀양 영원사로 가던 중 입적하자 사리탑을 전국 일곱 개 사찰에 나누어 모셨는데, 묘적암도 그중 한 곳입니다. 암자 입구에는 사리탑이 3기 있는데, 가장 위쪽에 있는 사리탑이 나옹 스님의 것이라고 합니다. 스님의 법맥은 무학 자초(無學 自超, 1327~1405)로 이어져 조선불교의 기틀이 되었습니다. 묘적암은 현종 9년(1668) 성일(性日) 스님이, 광무 4년(1900) 취원(就圓) 스님이 중수했습니다.

묘적암은 인법당과 산신각만 있는 작고 아담한 암자입니다. 묘적암에 모셔진 나옹 스님 영탱을 참배하고 싶었으나 보수공사 중이어서 암자만 지켜보다 돌아나왔습니다.

제법 급한 내리막을 되짚어 나오다 왼쪽 기슭 바위에 조성된 마애불을 참배하고 작은 오솔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이내 윤필암입니다.

▲ 문경 대승사 윤필암.

비구니 참선도량 윤필암

윤필암은 고려 우왕 6년(1380) 각관(覺寬)과 김득배(⾦得培)의 부인 김씨(⾦⽒)가 나옹 스님의 사리를 봉안하려고 창건한 암자입니다. 당시 각관 스님과 김 씨 부인은 당대의 문장가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1328~1396)에게 기문(記文)을 지어 달라 부탁했는데, 목은은 집필료를 받지 않고 대신 암자 창건 비용으로 충당케 했다 합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지평현(砥平縣) 불우’ 조에 따르면 암자 이름을 집필료를 뜻하는 ‘윤필’로 지은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하지요. 다른 한편으로는 의상 스님의 이복동생인 윤필이 이곳에 머무른 데서 유래한 이름이라고도 합니다.

윤필암은 인조 23(1645) 서조(瑞祖), 탁잠(卓岑) 두 스님이 중건한 것으로 시작으로 영조와 순조, 고종 대에 한차례씩 중건되었습니다. 윤필암은 비구니 참선도량으로 유명합니다. 청담(靑潭, 1902~1971) 스님의 속가 딸이자, 성철 스님의 제자였던 묘엄(妙嚴, 1931~2011) 스님이 이곳에서 출가했지요.

▲ 윤필암 사불전에서 본 사면석불.

윤필암의 금당인 사불전에는 불상을 따로 모시지 않았습니다. 법당 앞면에 유리창을 내 사면석불을 주불로 모신 때문입니다.

윤필암에서 네 부처님을 친견하러 발길을 옮깁니다. 대승사를 향해 난 오솔길을 따라 400m쯤 가면 대승사로 넘어가는 갈래길이 나오고, 이곳에서 산 정상을 향해 다시 400m쯤 가쁜 숨을 몰아쉬면 산을 오르면 사면석불에 다다릅니다.

지난한 세월 중생의 아픔을 품었기 때문일까요? 기나긴 세월 비바람을 맞으며 중생계를 굽어본 네 부처님은 풍화작용과 마멸로 그 모습을 짐작하기 쉽지 않습니다. 네 부처님을 참배하고 주변을 둘러보면 윤필암과 묘적암이 손에 잡힐 듯 앉아있고, 공덕산과 산북면 일대가 한 눈에 시원하게 들어옵니다. 지나온 길을 되짚어 보니 운달산과 사불산 자락의 도량은 민족과 함께 시대의 아픔을 함께 견디며, 조선왕조 500년 동안 쇠락한 불교를 중흥시키려 수행과 교육에 힘쓴 선지식들의 꿈이 영글어 가던 곳이겠다 싶습니다. 어쩌면 김룡사 보장문 편액이 가리키는 보물은 선지식들의 원력과 구도열이 아니었을까요? 티 없이 맑은 하늘을 담아 순례자에게 전해 주는 바람을 맞으며 짙푸른 산자락을 바라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환희심이 차오르고 있었습니다.

※ 이 기사는 제휴매체인 <불교저널>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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