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이 정치를 이끌어야 한다”
“도덕이 정치를 이끌어야 한다”
  • 박병기 정의평화불교연대 공동대표, 교원대 교수
  • 승인 2017.03.01 12:31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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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기] 한국불교의 위기를 말한다(7 )시민사회 분열의 극복과 계율정신

시민사회 분열의 극복과 계율정신

박병기(한국교원대학교 교수, 정의평화불교연대 공동대표)

▲ 박병기 정의평화불교연대 공동대표, 한국교원대 교수

사람들의 얼굴이 각각 다른 만큼이나 동일한 사안을 놓고도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그 중에는 서로 도저히 만날 수 없어 격한 충돌을 일으키는 의견들도 있다. 지난 주말 오후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정원스님 49재에 참석하러 가는 전철 안에서도 그런 의견들의 격렬한 충돌을 직접 경험해야 했고, 과연 어떤 대화가 가능할지 하는 회의감과 공포를 동시에 경험해야만 했다.

대통령 탄핵이 지지부진한 상황 속에서 소신공양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극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정원스님의 마음을 온전히 헤아릴 길은 없다. 다만 그가 남긴 말과 글 같은 흔적을 통해 겨우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정원 비구, <일체 민중이 행복한 그날까지>, 도서출판 말, 2017)

어떻게 살 것인가/ 정치적으로 살 것인가, 불교로 살 것인가/ 정치적으로 죽을 것인가, 불교적으로 죽을 것인가/ 서쪽에서 부엉이가 우니 달이 기우네.(위의 책, 167쪽)

소신공양을 절박하게 고심할 정도로 시국상황을 곱씹으며 전의를 가다듬고 있다고 2016년 12월 1일의 일기를 통해 밝히고 있는 스님의 고심은 결국 결행으로 나타났고, 그 이후 탄핵은 스님이 바라는 만큼은 결코 아니겠지만 멈출 수 없는 역사의 흐름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는 그것이 빨갱이들의 선동 결과일 뿐이고,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는 헌법재판관들이나 특검의 검사들을 처형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저항이 조금씩 확산되고 있기도 하다. 이런 의견 차이는 과연 용납될 수 있는 것일까? 용납될 수 없다면 그들을 어디까지 포용하고 가야 하는 것일까?

부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내게 자신이 불자인지 아닌지를 판별할 수 있는 핵심적인 기준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부처님은 어떻게 하셨을 지를 떠올릴 수 있는가의 여부다. 그날 저녁 모임을 마무리하고 집에 들어와 <마하박가-율장대품>을 펼쳐 들은 것은, 그런 마음 속 고통과 혼란을 부처님과의 만남으로 해소시켜볼 수 있을까 하는 바람 때문이었을 것이다.

(부처) 한꺼번에 시끌벅적 떠들어대며
아무도 스스로 어리석은 자라 생각하지 않는다.
승가가 파괴되어 가지만
자신의 잘못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전재성 역주, <마하박가-율장대품>, 2014, 872쪽)

시끌벅적한 수준을 넘어서 격앙된 말과 저주를 서슴지 않는, 이른바 이 땅 정치인들의 일그러진 모습과 그들에게 부화뇌동하면서 낄낄거리고 박수를 치는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이 스스로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듯했다. 우리 공동체가 파괴되어 가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잘못은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뒤의 모습은 촛불집회에 참여한 우리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그런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는 과정에 동참했고 그들이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에 무관심했던 책임과 잘못이 있는 것이다.

카스트라는 계급과 남녀, 빈부 격차를 훌쩍 뛰어넘어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이라고 부를 만한 평등한 수행공동체를 만드신 후, 부처가 겪어야 했던 고민이 얼마나 깊고 컸을 지를 상상하게 만드는 이야기들이 율장 곳곳에서 발견된다. 이른바 ‘꼬삼비의 수행승들’이라는 상징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사례는 그 중 하나일 뿐이다.

(사리붓다) 세존이시여, 다투고 싸우고 언쟁하고 분쟁하면서 승가에 쟁사(諍事)를 일으키는 꼬삼비의 수행승들이 싸밧티로 오고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어떻게 그들을 맞아 처신해야 합니까?
(부처) 사리붓다여, 원칙에 맞게 처신하면 된다.
(사리붓다) 원칙과 원칙이 아닌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부처) 열여덟 가지 근거를 통해서 원칙이 아닌 것을 설하는 자를 구별해야 한다.
 (<마하박가>, , 882쪽)

그 열여덟 가지 근거에는 가르침이 아닌 것을 가르침이라 설하고, 계율이 아닌 것을 계율이라 설하며 죄가 아닌 것을 죄라 하고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죄라고 말하는 것이 포함된다. 여래가 말하지 않고 설하지 않은 것을 말하고 설했다고 하는 잘못도 당연히 원칙이 아닌 것에 속한다. 그러면서도 그들, 즉 언쟁을 일삼고 시비를 걸어오는 수행승들이 자신의 처소로 찾아들면 다음과 같이 환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부처) 수행승들이여, 만약에 다투고 싸우고 언쟁하고 분쟁하며 승가에 쟁사를 일으키는 수행승들이 예기치 않게 그 처소에 오면, 그 처소의 수행승들은 자리를 마련하고 발 씻을 물과 발받침과 발 걸레를 준비하여 맞이하고, 발우와 옷을 받은 후에 목욕물에 대해 물어야 한다. 그들에게 감사하고 결계(結戒)의 밖으로 가서 자자를 행해야 한다. 그런 뒤에 ‘우리들은 이미 자자를 행했으니, 존자들은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이 좋다. (<마하박가>, 469쪽)

계율정신의 확산을 통한 시민공동체 회복

초기불교의 율장은 물론 대승계와 관련된 여러 경전을 통해 일관되게 확인할 수 있는 계율정신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승가를 중심으로 하는 사부대중공동체의 화합이고, 다른 하나는 그 화합을 깨지 않으면서도 지속적으로 다르마(dharma)를 향할 수 있는 중도(中道)의 지향이다. 이 둘 중에서 중심축을 이루는 것은 당연히 후자이고, 중도에 어긋날 정도의 범계행위에 대해서는 승가 추방죄(바라이죄)로 다스림으로써 보다 온전한 수행공동체를 유지하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계율정신의 핵심인 것이다.

가짜뉴스를 만들어가면서 계엄령 선포를 선동하거나 아스팔트가 피로 물들이게 될 것이라고 공공연히 외치는 사람들은 그럼 어떻게 대해야 할까? 확실한 사실은 그들이 율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극단적인 ‘쟁사를 일으키는 자들’에 속하다는 것이고, 계율정신에 따르면 일단은 그들에게도 자리를 마련해주고 발 씻을 물과 발판, 걸레를 준비해주면서 목욕물까지 필요하냐고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일단 그들도 우리와 같이 살아가야 하는 한국 시민사회의 구성원이라는 점에서 그런 자리를 만들어주는 데까지는 수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자자갈마(自恣羯磨)를 별도로 가져야 하고, 그런 후에 그들에게도 우리는 이미 자자를 행했으니 그대들은 원하는 대로 하라고 말해야 한다. 이것을 현재 우리 상황에 맞춰 해석한다면, 어떤 구체적인 실천 지침을 얻을 수 있을까? 일단 의견이 다른 수준을 넘어서 억지 주장과 거짓으로 싸움을 걸어오는 그들을 환대해야 한다는 지침을 생각할 수 있다. 그 다음에는 우리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허물이 없는지를 지속적으로 점검하는 시간과 공간을 가지면서 그들과도 진정성이 담긴 대화를 시도해야 할 것이다.

우리 삶의 영역에서 도덕과 정치는 늘 일정한 긴장관계를 형성하면서 다가온다. 현재의 ‘촛불’과 ‘태극기’ 사이의 충돌은 기본적으로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원칙과 도덕의 영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지만, 그 이면에는 궁지에 내몰린 현 기득권 세력과 새로운 집권을 노리를 세력 사이의 충돌이라는 정치 영역의 다툼이 숨겨져 있다. 도덕정치를 꿈꾸던 조선 선비들의 당쟁에도 이런 두 영역의 교차와 충돌이 늘 함께 출현하곤 했음을 감안하면 인간의 본능과 관련된 자연스런 현상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지향점은 항상 도덕이 정치를 이끌어가는 방향이어야 한다. 우리 시민공동체의 화합과 보다 나은 사회로의 진전이라는 두 목표를 함께 추구하면서도, 후자가 전자를 이끌 수 있는 방향으로 우리의 실천 지침을 정해야만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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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2017-03-04 09:54:01
어느 경전에 그런소리가 있나요?
좀 배워볼까요?

설봉 2017-03-03 19:26:00
불교의 도덕은 무엇인가? 도는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성품으로써의 인식인 선정의 부처며, 덕은 이 선정의 부처로 지혜작동하는 보리살타의 삶이다. 인간 뿐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와 현상으로써의 세계인 이 성품의 삶은 이 보살로써의 삶인 지혜작동이며 동시에 선정의 부처다. 이를 깨닫는 진리인식을 오늘의 언어로 말하시라. 한문과 승가살림의 형식에 가로막혀 대체 구태여 불교가, 선이 선 까닭은 아득하다. 불교학자들조차 불자의 형식만 말한단다면 구태여 불교가 있는 까닭을 누가 말할 것인가? 사람살림의 도덕이란다면 넘치고 넘친다. 오직, 이 도덕의, 비도덕의 진짜까닭을 알아 말하시라.

불교는? 2017-03-03 12:38:37
불교는 도덕이자 정치이면서 동시에
두 영역을 넘어서는 것이기도 하지요!

불교가 2017-03-02 12:03:36
정치도 아니고 도덕도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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