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이 뭐냐면요!
깨달음이 뭐냐면요!
  • 김형태 변호사(공동선 발행인)
  • 승인 2016.05.09 18:41
  •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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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한국불교의 깨달음과 역사 인식-법인스님, 우희종 교수

격월간지 <공동선>(발행인 김형태 변호사)이 5,6월호 특집으로 '한국불교의 깨달음 논쟁'을 다뤘다. 현응 스님과 수불 스님의 글을 발췌해 싣고 김형태 발행인의 '공동선을 열며'를 게재했다. 전 조계종 교육부장 법인 스님과 우희종 서울대 교수의 대담도 마련했다. <공동선> 쪽의 허락을 얻어 <불교닷컴>에 싣는다. (편집자)

사회: 김형태, 본지 발행인

패널: 법인스님 전 조계종 교육부장, 현 참여연대 공동대표와 대흥사 수련원장, 일지암 암주

우희종 교수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수의학 교수, 바른불교재가모임 상임대표

김형태: 오늘의 주제는 깨달음과 역사입니다. 지난 2015년 9월 4일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세미나에서 조계종 교육원장인 현응 스님의 기조 발제로 촉발된 논쟁을 정리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논쟁의 대표격인 현응과 수불, 두 스님의 생각에 대해 평해 주시죠.

법인: 약 20년 전에 지리산 실상사에서 올바른 승가상을 정립하고자 하는 선우도량이라는 승가단체에 현응스님이 참여하셨지요. 그때 제가 현응스님에게 보고 느낀 것은 ‘아! 어떻게 불교 용어를 쓰지 않고 불교를 저렇게 잘 설명할까? 그리고 늘 삶 속에서 불교정신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현응스님은 “깨달음도 혁명적 깨달음”이라는 그런 말도 쓰셨지요. 현응스님은 다른 글에서는 불교는 사실의 판단과 가치의 판단의 두 축으로 이루어진다고 보고 계시죠. 세계의 실상은 어떤 것인가, 모습은 어떤 것인가, 어떤 원리로 되어가고 있는가 하는 사실의 판단의 영역과 세상이 이러이러하니까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가치의 판단, 그 사실 판단과 가치 판단을 일체화하는 보디사트바, 즉 깨달음을 얻어 실천하는 방식으로 가야 한다고 쓰셨어요.

현응스님의 이런 문제제기는 한국불교가 지나치게 깨달음을 관념화, 신비화시키며 수십 년을 참선 수행하더라도 깨달음을 얻는 자가 거의 없는 수행풍토에 대한 것이죠. 그래서 깨달음을 다시 재해석하며 경종을 울리는 것이라고 보입니다.

현응스님의 이러한 문제제기는 하안거, 동안거를 비롯하여 소위 간화선을 수행하는 한국의 이 천 명 정도 되는 스님들에게는 낯설기도 하면서 굉장히 충격적인 것이죠. 이 분들은 깨달음을 대각大覺, 돈오돈수頓悟頓修, 활연개오豁然開悟 등 심층적이고 고차원적인 경지로 생각하는데 현응스님께서 갑자기 깨달음이란 것은 잘 이해하는 것이고 잘 이해해서 삶속에서 실천해야 한다고 하니까요. 현응스님의 주장에 대해 수불스님을 비롯한 선종에서는 깨달음은 단순한 지적이해의 수준이 아니다, 책을 읽어 ‘아, 잘 이해가 된다. 이런 이해의 수준이 어떻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사람을 해탈하게 만드느냐는 반론을 제기합니다.

우희종: 현응스님의 실천의 문제, 역사의 문제에 관점을 두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만, 깨달음을 Understand라고 쓰는데 대해서는 부족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단순하게 이해함으로 우리의 삶이 변하지는 않거든요. 삶의 변화가 일어나기는 참 힘듭니다. 그래서 영어권에서는 그것을Awareness, Enlightenment, Deep contemplation이라고 깊이 있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1세기 한국불교에 대해서는 “스님들은 불교 자본가다, 사찰관리인이라는 표현까지 하시고 대외적인 사회적인 실천적인 문제는 재가자들이 해야 되는 것이라는 글마저 주셨다는 얘기는 과연 현응스님의 잘 이해했다는 것이 그렇게 표현된다면 과연 그것이 역사를 인지하고 실천하는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관념적인 것과 실제 삶의 현장의 접목부분이 조금 유리됐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수불스님은 전형적인 간화선을 수행하는 스님들의 입장입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 늘 강조한 것처럼 삶의 현장의 문제를 중시한 독화살의 비유가 있습니다. 깨달음은 현실의 괴로움을 극복하고 해탈하는 것인데, 특히 한국 선종에서는 그런 삶의 현장과 유리되어 개인이 사회와 독립된 존재로 해탈하여 열반에 드는 것을 강조하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수불스님이나 간화선을 하는 분들이 말씀하신 것처럼 깨달음이 과연 삶의 변화로 이어졌느냐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합니다. 오히려 이렇게 깨달음을 굉장히 강조하는 한국 선종의 입장에서는 평생 깨닫기 위해서 절에 있거나 재가자도 산속에 들어있는 것을 굉장히 멋있게 보고 있어요. 하지만 깨달음이 목적은 아니거든요. 깨달음이 실제로 삶의 현장에서 접목되어야 되는데 간화선을 하시는 그들 스스로도 실천의 문제에서는 굉장히 관념적이라고 봅니다.

김형태: 현응스님은 연기적 진리를 잘 아는 것이 깨달음을 얻는 것이라 하고 수불스님은 마음을 깨닫는 것이라고 하는데 마음을 깨닫는다는 것이 뭘 깨닫는다는 겁니까?

법인: 한국불교는 마음이라고 하는 개념을 정확히 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마음은 개인, 주관적, 심리적, 내면적, 고차원 이렇게 봅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마음 자체가 연기적 상황이거든요. 외부의 자극에 대해 우리의 몸이 반응하는 기관을 육근이라고 하는데 보고 듣고 냄새를 맡고 맛보고 느끼고 의식하죠. 세월호 유가족들이나 억울하게 죽은 사회적 약자들을 보고 듣는 속에서 인식하고 판단하고 연민이 생기고 사고의 책임자들을 혐오하고, 이런 다양한 인식, 판단, 감정 이런 것들이 전부 다 서는 게 마음이거든요. 초기불교나 대승불교에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나와 세계의 연결된 연기적 관점 속에서 마음이라고 합니다. 마음을 깨닫는다는 것은 현응스님이 말하는 일체 존재가 연기임을 아는 것이라고 했죠.

우희종: 불교에서 마음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개인의 마음 그리고 세상의 근본 원리, 근원으로서의 마음, 한마음 본래는 여러 표현이 있습니다. 수불스님이 말하는 것은 근원으로서의 마음이죠. 그런데 개인의 마음과 근원으로서의 마음이 다르냐, 그렇진 않아요. 불교에서는 바다와 파도의 비유를 합니다. 파도는 바람에 일어나지만 바다를 떠나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래서 바다와 같은 마음을 얘기하는 거고, 그럼 바다와 같은 마음이 뭐냐고 하면 말씀하신 것처럼 연기, 실상입니다. 두 말이 다르지 않아요. 다만 주의할 점은 연기법이라고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과학자들도 연기를 이해하고 공부합니다, 원인과 결과에 의해서 빚어지고 조건에 의해서 빚어진다는 것을. 그러나 부처님은 연기법을 한 게 아니라 연기 실상을 깨달으신 분이예요. 다시 말해서 파도도 연기에 의해서 일어나지만 이 바다 역시 모든 존재와 상황이 다 관계로 이루어진다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은 본 것이기 때문에 현응스님이 연기실상을 깨닫는 거라고 말한다고 생각하고요 또 수불스님도 마음이라고 한 것은 큰마음. 그러나 결코 개인의 마음을 떠나서 존재하는 그 마음을 이해하는 것으로 표현된 거죠.

김형태: 그렇다면 수불스님이 말씀하는 마음도 연기적 실상을 말씀한다고 하면 현응스님과의 말씀하고 큰 차이가 없어지는 것 아닌가요?

법인: 어디에 주안점을 두느냐에 따라 차이는 있습니다. 개인의 번뇌, 속박을 벗고 해탈해서 열반에 드는 것에 방점을 찍는 것과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삶속에서 총합되는 개인, 개개인과 전체 세상이 연기임을 보는 것에 방점을 찍는 것에 차이가 있죠.

김형태: 조계종전국선원수좌회(이하 수좌회)에서 현응스님의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 발제를 보고 성명을 냈어요, 충격을 받았다고. 왜냐하면 그분들 존재 자체를 흔들 수 있는 발언이었기 때문이죠. 산에서 동안거, 하안거 등 수행정진하는 스님들이 연기적 실상을 보기보다는 자아가 사라지는 몰아의 상태를 추구하고 계신 것이 아닌가요?

우희종: 한국불교의 출발점이 잘못된 거죠. 한국불교가 표방하는 선종은 대승불교의 한 형태입니다. 대승불교는 나 하나의 해탈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내가 너와 다르지 않고 우리가 함께 있기 때문에 나의 삶의 변화가 우리의 삶의 변화로 함께 가는 거거든요. 다시 말하면 참선은 대승불교의 한 종파로서의 선종을 전제하고 있어요. 그런데 한국불교는 선종을 말하면서도 실재로는 초기불교 식으로 참선을 통해서 나 하나 몰아가 되고, 나 하나 깨닫고 해탈하겠다는 식으로 가니까 완전히 위아래가 바뀐 거죠. 그것이 대승불교로 와서 나를 뛰어넘어서 더불어 가는 형태가 돼야 되는데도 불구하고 한국에 와서 개인의 깨달음으로 변질된 것이 잘못된 거죠.

김형태: 논쟁을 보면서 깨달음의 대상이 뭐냐, 방법은 어떻게 하느냐가 연결이 되어 있다고 보이는데 깨달음이 몰아의 경지, 나를 잊는 경지에서 멈춰 버린 거죠. 그런데 지금 수좌회 성명이나 수불스님이 말씀하는 것은 그런 경지들을 말씀하시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우희종: 왜 깨닫느냐? 무엇을 위한 깨달음인가? 라고 했을 적에 결국 그것은 동체대비同體大悲, 너와 내가 다르지 않고 너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라는 것을 알기 위한 것이죠. 우리는 부처님을 깨어있을 각자를 써서 각자覺者라고 합니다. 깨닫는 이유는 삶의 현장에서 아파하는 사람들과 함께 가야하는 과정으로 깨달아 깨어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하는데, 깨달은 상태가 목적이 되어버렸어요. 고통 받는 자와 함께 해야 되는데 간화선을 관념적으로 만들어 버린 쪽에서는 그냥 깨달으면 된다고만 합니다.

법인: 2015년 9월 4일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세미나에서 현응스님이 깨달음은 잘 이해하는 것이고 그 속에서 중생의 삶에 헌신해야 된다고 발제를 했어요. 그 이후에 이제 잘 이해Understand하는 것이라는 이해 understanding에 다양한 오해가 있으니까 2개월 후 잡지 <불광>에 다시 글을 쓰셨어요. 잘 이해하는 ‘잘’에 방점을 찍어달라고 말이죠. 이것은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오온이 다 공하다는 사실을 확연하게, 조금도 의심 없이 이해하는 것이 깨달음의 차원으로 이해해 달라고, 이렇게 되면 문제는 풀린다고 쓰셨죠. 그리고 왜 깨닫는가는 모든 속박을 벗어나 해탈하고 열반에 드는 것이죠. 무엇을 깨닫는가는 나를 괴롭게 하는 마음, 행위, 정신과 육체, 습관, 감정, 이성, 판단, 더 확대해 나간다면 우리사회의 모든 제도, 이념, 관념, 시스템 등이 있죠. 이런 게 전부 인간이 잘못 인식하고 판단해서 인간의 욕망과 결합해서 허구적으로 조작된 세계라고 한 통찰을 철저하게 하고 삶을 괴롭게 하는 괴로움도, 괴로움의 원인마저도 사실은 본래부터 있지 아니하고 인간의 잘못된 의도로 만든 허구임을 알고 속박에서 벗어나라는 것이 부처님의 뜻이죠. 그런 연기와 공성의 판단 속에서 세상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드러난 세상을 잘 파악하고 이것을 어떻게 가꾸어 갈 것인가 하는 방편바라밀의 원력과 자비의 힘을 내서 다양한 방법론으로 만들어 가는 게 대승불교라는 거죠. 현응스님은 일관되게 선원수좌들과 이야기 할 때도 선종이 자비에 방편을 달아야 한다고 하시죠.

김형태: 실제로 스님들 수행하는 과정이나 방법과 깨달음의 목표가 연기적 실상을 확철하게 아는 것에 두고 있는 건지 아니면 몰아의 경지에 이르는 것인지요?

우희종: 중요합니다. 내가 나름대로 그것을 깨닫고 세상을 어떻게 한다는 건 이미 너와 내가 분리된 개념입니다. 그리고 내 공성을 깨달아서 내가 해탈을 얻는다는 것이 곧 세상과 분리된 논리가 이미 깔려있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계속 논점을 보면 스님들이나 한국불교에서. 지혜와 자비가 분리되어 있습니다. 깨닫고 나서 자비행을 한다는 것이죠. 그 이유는 관념적이라서 그렇습니다.

김형태: 제가 보기에는 깨달음의 대상을 주객합일이라는 마음의 상태로 목적을 뒀기 때문에 그 깨달음과 자비는 아무 관계가 없거든요. 자기 개인이 어떤 경지에 올라가는 거하고 자비하고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에 지금 현응스님이 제시하신 기본 문제의식도 지금처럼 계속 문 닫고 백날천날 산에서 그래봤자 그것은 깨달음과는 관계없다 이런 말씀인거죠?

우희종: 그렇죠, 그래서 중요한건 너와 내가 몰아가 되면 사실은 그게 이 세상에 대한 자비로 나올 수 있는 거예요. 근데 그거를 글로만 이해해가지고 그게 다라고 강조하니까 그렇게 배우고 그러다 보니까 그게 다라고 해서 평생 그 짓만 하다가 끝나는 겁니다. 제대로 깨닫지를 못하고. 그러니까 제대로 자기가 정말 그걸 알게 되면 자비와 지혜는 분리되는 게 아니지요. 몰아가 틀렸다는 게 아니라 그걸 그냥 말로만 해놓으니까 ‘아, 몰아가 다구나 몰아로 해야지’ 하는 겁니다.

김형태: 스즈끼 박사의 글에 의하면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자기 내면으로 의식을 돌려서 계속 들어가 보면 생각하는 자기, 거기까지 간다는 거죠, 그렇게 쭉 가가지고 궁극적으로는 그것까지 잊어버린다.”고 얘기해요.

우희종: 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맞아요. 들어가서 생각하는 나, 즉 개체화된 마음, 개인화된 마음마저 놓아졌을 때 내가 곧 너고 너가 나라는 그 세상, 연기세상을 느끼면서 너의 고통이 나의 고통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자비가 저절로 함께 나가는 거예요. 그게 지혜예요. 근데 그런 것을 관념적으로 분리시켜놓고 나 안으로 들어가는 거야, 나를 잊어버리는 거야 이런 말만 하니까 평생 제대로 봐야할 것을 모르고 목적지는 잊어버리고 그 수단에 매달리게 되는 거죠. 전 그래서 이게 한국불교의 깨달음은 미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형태: 현응스님이 돈오頓悟라든가 이런 것을 적극적으로 지지를 하셨는데 돈오라는 용어 자체도 어떤 경지도 흩어져가지고 경지에 도달하는 그런 용법으로 참선하고 연결해가지고 그런 용법으로 쓰이기 때문에 지금 우교수께서 말씀하시는 깨달음은 사실은 체화된다고 보면 듣기도 하고 생각도 하고 경험도 쌓고 그래서 그게 어느 순간에 터지는 것입니까?

우희종: 어느 순간에 이래서는 안 되겠구나 라는 이 삶의 변화가 기독교에서는 사도바울이 기독교를 탄압하다가 갑자기 삶이 확 변하는 것을 굳이 표현한다면 돈오입니다. 삶의 변화가 수반되지 않는 깨달음이라는 것은 사실은 그냥 이해인 것이고 그래서 그런 지점을 이렇게 삶이 변하는 것을 잘 이해했다 understanding이라는 말을 잘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고 돈오라는 표현일 수 있고 그러면 사실 만날 수 있는 거죠.

법인: 심오하고 깊고 미세한 것보다는 삶을 바라보는 시각, 존재에 대한 완전한 전변, 그냥 통째로 바꿔지는 이런 것을 돈오라고 보는 것이죠.

김형태: 돈오를 개인이 도달하는 주객합일의 관념적 경지로 해석하면 일반인들은 도대체 죽었다 깨도, 스님들도 몇 안 되는데 죽었다 깨도 평생 하여도 안 되는 경지를 깨달음의 경지를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 그러면 불교는 그냥 좋은 DNA를 우연히 그것도 아주 연기적으로 태어난 그런 선민들만을 위한 종교냐, 이건 사실 아주 큰 물음입니다. 산속에 계신 분들이 계속 그렇게 얘기하시면 수많은 중생들은 시주만 바치면 되는 것인가요?, 그것은 아니잖아요.

법인: 문제는 개인의 삶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러한 모든 것들의 길이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저는 어느 방향으로 가야 된다고 하는 방향은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 방향으로 가는데 한 줄로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여러 줄이 가는 것이 맞잖아요.

우희종: 산 정상으로 비유하자면 오르는 길은 여러 가지이죠.

법인: 그렇죠. 저 같은 경우는 경전을 계속 읽고 사유하는 방식으로 중론을 끼고 사는데 그 중론에 논서들을 읽어 가면서 더 확연해지고 그러면서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해탈, 열반, 평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길을 한 줄로 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간화선이 정말로 자기가 필요하고 맞으면 그 길로 가시고 삶의 환경이 각각 다르고 기질과 성향이 다른데 이것만이 유일하다고 하는 것은 무지이고 폭력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우희종: 저는 사실 경전보다는 간화선을 하는 입장입니다. 저는 간화선 화두를 통해서 자유로워졌고 평화로워졌습니다. 그런 면에서 수불스님의 기본적인 입장에 좀 공감하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제가 간화선을 실제 해보니까 단순히 그렇게 막 몰아沒我가 되고 이것만이고 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렇지만 너무 좋은 방법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지금 한국불교에서 제시된 형태로의 간화선이 말한 깨달음은 절대 아닌데 그렇게 자꾸 얘기하니까 오히려 부작용이 생기고 배타적이 되어 진정한 뜻을 잃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불스님이 말씀하신 것에 거의 대부분 공감하는데 그 어떤 어느 지점에서 제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간화선만이라든지, 혹은 거창한 세계인 것처럼 설정해 놓고 그것을 향해 간다고 했을 때 정말 그것이 실제로는 그게 목적이 아니라 우리 연기세상에 대한 체험을 통해서 더불어 살아가는 어떤 지향점을 전혀 강조가 안 되는 상황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스님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정말 다양한 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간화선을 해서 너무 좋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해보니까 간화선을 주장하는 사람이 뭐가 거짓말이라는 게 뻔히 보이게 되는 거고요. 그런 의미에서 거꾸로 제가 아쉬운 것은 그런 다양한 수행법을 얘기하면서 초기불교를 가져오신 분들 다 있는데 스님들 간에도 너무 대립적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기독교를 보면 초기경전 뭐 쉽게 말하면 구약이라고 하죠. 구약과 신약이 다 함께 어우러지고 기독교는 다 그것을 인정하지만 초기경전인 구약만 인정하는 유대교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네가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니라 그 경전에서 무엇을 향해서 우리가 가는 가가 좀 얘기 되어야 하는데 그거보다는 내 방법만이 옳아 이렇게 되면서 우리가 이런 것을 통해서 가야 될 어떤 이유, 목적, 존재 의미를 잊고 있는 듯합니다.

김형태: 신약에 보면 예수님이 수석사제나 유대교를 많이 공격하시는데 유대교의 620개짜리 율법, 토라라고 하는데 620개의 원 정신은 행위 하나하나가 다 불교에서 말하면 계같은 것인데, 행위를 통해서 내가 하느님께 - 인격적인 하느님은 아니고 물론 인격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지만- 어떻게 거기에 접근할 수 있는가를 행위 하나를 다 세분하는 것은 처음에는 좋은 목적인데 이게 행위자체로 빠져 버리니까 나중에 경화되고 화석화가 되어 거꾸로 사람을 억압하고 누르는 게 되니까 예수님이 자꾸 공격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토라 자체의 출발은 그리 나쁜 것은 아니란 말이죠. 불교에도 그런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이게 오래되면 굳어져서 처음에는 자유롭게 해주려고 시작했는데 그게 억압하는 수단이 되고 그러니까 저는 자꾸 이리 돌아가면 현응스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면 막 벌떼처럼 일어나는데 이런 게 필요한 시점이 아니냐는 생각이 드는 거죠.

우희종: 저는 그런 의미에서 현응스님에 대해서 비판적인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런 것들이 실제 어떤 삶의 변화로 이어지는 왜냐하면 그 첫 글의 경우 오해가 있었습니다. 인터넷만 봐도 불교학계에서 제일 잘 아는 사람처럼 되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그런 부분이 만약에 현응스님이 원래대로 취지가 그랬다면 좀 더 조심스럽게 썼어야 된다는 점이고 또 아까 말한 것처럼 다른 데 기고한 글을 봤을 때 전혀 그 정신이 살아있지 않다는 것, 그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찌 보면 간화선에서 말하는 대로 하면 그냥 세상일에 관심 안 두고 산 속에서 자기 몰아를 위해서 도만 닦던 지요. 또 현응스님대로 말한다면 인터넷 열심히 하고 책 많이 읽고 공부하면 다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스님은 사찰관리하면서 불교 자본가의 역할을 하고 신도들은 나아가서 그냥 좋은 일하면 되는 것인데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불교는 관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옳다, 그르다는 것은 사실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관계상황이 고통을 야기하는가 그리고 세상에 대해서 무관심한 게 아니라 어떤 집단이나 개인이 나에게 세상의 고통을 더 불필요하게 증폭시킨 게 있다면 그것에 대해서 아니라고 얘기해야 되는 것이죠. 부처님이 모든 것이 허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49년 동안 거리에 나선 이유가 뭐겠어요. “그게 허상이면서 왜 이야기를 했습니까”라고 질문을 할 수도 있지만 부처님은 자기의 삶을 그런 허상 때문에 생겨난 불필요한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 열심히 얘기한 거거든요. 육사외도六師外道라고 해서 잘못된 놈들에게 가서 끝까지 따져 가지고 “너, 잘못 되었어.” 라는 것을 밝혀주는 것이지요.

김형태: 허상이라는 게 그냥 없다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현실적으로 있지 않습니까?

우희종: 그렇죠. 이 많은 불교인 중에 “이게 무상하고 허상 아닐까?, 뭐 시시비비를 따져 그냥 내 공부나 하지.” 이런 식의 왜곡된 자세가 생겨난 거예요. 그런데 삶 자체만 봐도 결코 그런 삶이 아니거든요. 부처님의 모양새에서 끊임없이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찾고 그 옳은 것의 기준이 고통이었지요. 고통의 문제를 어떻게 하면 해결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삶을 통해서 구현했는데 이 간화선 얘기하는 사람들은 그런 것이 없습니다. “시끄러운 세속 일을 다 끄고 나 수행해야 돼.” 이렇게 이야기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또 혹은 이해를 한다고 말하면서도 “승려들은 그냥 불교 자본이나 잘하고 사찰관리나 잘하면 되고 세상일에 대해선 일반신도들이나 해.” 이런 식의 논리가 계속 양쪽에서 나옵니다. 이것은 잘못 되었다고 봅니다.

▲ 격월간지 <공동선>이 마련한 좌담회. 왼쪽부터 법인 스님, 이형태 발행인, 우희종 서울대교수. ⓒ공동선 제공

김형태: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순수 우리말인데 단박에 깨달음에 이를 수도 있고 아니면 제 경우의 예를 들면 ‘미적분의 개념 그러니까 선생님이 숫자라는 이런 개념을 갖고 칠판에 설명하는 것을 듣고 그래그래 끄덕끄덕 하다가 그게 이제 현실에서 와 가지고 이제 나이도 많이 들고 그래서 아 시간이나 공간에서, 순간이나 점은 현실적으로는 잡을 수 없는 가상의 개념이지만, 없는 이 순간과 점들이 모여서 있는 크기 측정이 가능한 시간이나 선, 면이 되는 것을 보면서 어! 미적분이 이거구나, 이렇게 딱 떨어지면서 미적분에 대해서 좀 더 분명하게 깨우치게되는 것이죠.’ understanding이 조금 넘어간 그렇게 보면 사실 연기적 세계관에 대한 이해understanding의 수준도 굉장히 다양할 것 같고 방법도 다양할 것 같고 길도 다양하고. 평소에 이런 생각들을 머리에 굴리고 다니다가 생활 체험 속에서 어느 순간에 부딪혀서 탁 떠오르는 확신같은 것. 체험과 생각이 서로를 키워주다가 갑자기 닥쳐오는 아, 그래!

법인: 다시 종교로 돌아온다면 불교는 기독교에서 많이 배워야 되고 또 기독교도 불교에서 배워야 되는데 기독교는 이런 게 강점인 것 같습니다. 불교인의 입장 속에서 신이 있느냐, 절대적인 아트만이 있느냐, 우선 이렇게 실재론이냐, 연기론이냐 이렇게 논쟁은 있을 수 있다고 봐요. 그런데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신의 뜻은 어린 양을 사랑하고 약자와 함께하는데 있다고 깨치고 늘 자기 자신을 회개하고 사랑하고 헌신하는 실천을 통해서 각성되고 진일보한다고 보여집니다.

김형태: 현응스님의 글 중에서 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깨달음과 역사가 분리되어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저는 개달음의 출발 자체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바로 이 역사에서부터 시작한 거라는 생각이거든요.

법인: 세상의 모든 사람이 역사현실에 뛰어든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중국춘추전국시대에 노자, 장자 등 다양한 사상가들이 출현했고 극도의 아나키즘까지 출현했습니다. 이 부분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선한 의미로 자연에 박혀서 은둔하고 그렇게 하는 이 가치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세상이 환희고 연기여서 마음에 번뇌를 다 놓아버리고 은둔하는 이런 가치도 존중해야 된다고 봅니다. 그런 면에서 깨달음과 역사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겁니다.

김형태: 제가 한 질문은 깨달음은 이 현실에서, 이 역사에서부터 출발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우희종: 제가 보기엔 이것은 입장에 따른 한국불교의 고질적인 병으로 사실 이것은 삶의 현장에서 출발해서 삶의 현장으로 돌아와야 되는 것입니다.

김형태: 깨닫는 것도 현실을 대상으로 출발해서 깨닫는 것 아닌가요?

우희종: 깨달은 것을 알 수 있느냐는 자신의 삶의 자세에서 알 수 있다고 봅니다. 깨달음은 지혜와 자비 행위라는 자기의 삶의 자세와 분리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하나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형태: 연기緣起 개념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부처님이 시작하신 연기와 나중에 화엄경에서 말하는 법계연기까지 연기가 달라집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연기가 화엄에서 말하는 연기와 같은 것인가요?

법인: 저는 성경이고 불경이고 진화해야 된다고 봅니다. 우열의 논리가 아니고 역사가, 사회가 바꿔질 때마다 거기에 대응하는 방법들로 보는 눈과 방식, 이것을 불교에서 방편바라밀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이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하는 이 기본 모본을 바탕으로 해서 화엄경에서 초기불교에서는 연기를 12연기 해가지고 개인의 해탈 중심으로 연기법이 짜여진 구조라면 대승불교 화엄에서 보니까 만물을 다, 자연생태 환경까지 다 거머쥐어야 하니까 이 모본을 연기법에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는 이 모본을, 큰 얼개를 다시 짠 거죠.

우희종: 부처님의 말씀은 2,500년 전의 것이고 예수님은 2,000년 전인데 그 당시의 사회를 한 번 생각해보죠. 그 시절은 인권은 생각도 못하고 노예는 죽여도 되는 시절이지요. 지금 대부분의 나라에서 여성이 참정권을 행사하는데 이것은 얼마 안 된 일이죠. 그 2,000년, 2,500년 전에 그 문화와 역사 바탕 속에서 이야기된 말씀을 그 취지를 살려 지금의 사회에 맞게 확장되고 변화되는 게 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게 또 연기적인 모습이 아닐까요.

김형태: 양쪽에서 계속 논쟁하며 원전으로 돌아가면서 근거를 대는데 기독교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예수님이 우주천체 지식이 없으셨기 때문에 “우주에 곧 종말이 온다.”, “내 눈앞에 있는 여러분 생전에 심판의 날이 올 거다.” 이런 얘기를 하셨는데 사실 종말이 안 왔잖아요. 지금도 안 오잖아요. 석가모니 부처님 원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없다고 해서 말 그자체로 그렇게 말씀 안하셨다고 해서 없는가 그렇게 얘기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법인: 부처님께서 “나는 세상이 옳다고 하는 것은 나도 옳다고 생각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요즈음 말로 말하면 인지과학이든 모든 과학이든 인과관계로 이거 이렇게 해 보니까 이 원리가 맞아, 논증이 되었다면 그대로 수용하는 겁니다. 경전에 갇히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경전은 기본적으로 기본 공식이라고 보기 때문에 다양한 현상에 대입시켜야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희종: 경전이 가지는 이 특성을 지금 이 시대에 어떻게 구현하느냐의 문제죠.

김형태: 그러니까 화엄연기가 초기에는 부처님의 연기보다 진화한 것인가요?

우희종: 진화라는 표현보다는 펼쳐지게 된 거죠.

법인: 화업경은 바탕일 뿐입니다. 이 바탕 아래 10바라밀을 행하라는 거죠. 법계연기라는 인드라망의 그 존재의 관계 속에서 관계가 이러하니까 관계가 선순환 상생하려면 10바라밀을 행하라 했죠. 이게 대승불교라는 거죠.

우희종: “실제 삶의 중생수준과 모든 중생의 힘듦을 내가 대신 짊어지겠다.”라는 삶의 자세로 화엄경이 마무리 됩니다. 그런데 그 부분이 쑥 빠져요. 그게 문제죠.

김형태: 일부 기독교인들은 자기 개인이 천당 가는 것을 구원이라고 계속 이야기 하는데 바티칸공의회에서는 구원은 공동체로 온다고 그럽니다. 공동체 속의 개인은 분리될 수 없다고 생각들을 합니다. 그리고 현응스님이 말씀하신 진화의 개념에 반발을 많이 하시는 데요 시대가 바뀌면 다른 말로 다르게 이야기 할 수 있어야 되지 않나요?

법인: 저는 오래전부터 법회 때 마음과 깨달음이라는 말을 거의 안 쓰고 있어요. 왜 그러냐면 언어라고 하는 것은 다 자기 삶의 환경과 습관 이것을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모든 마음과 감정, 몸 이런 것을 이렇게 쓰고 그 다음에 확연하게 진정성을 가지고 통찰하자 합니다. 멀어진 언어를 좀 보편화시키면 안 되나 하는 생각입니다.

우희종: “수많은 경전을 외우려고, 보려고 하지 말고 한 구절만이라도 체화해서 자신의 삶속에서 실천할 수 있어야 된다.”는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법인: 간명하고 선명하게 불교를 하자는 그런 말을 요즈음 많이 합니다. 불교신자들에게 공부를 너무 시키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핵심이 되는 어떤 것들을 신도들께 외우도록해요. “자꾸 외워라! 그 다음에 기억하라, 현실 속에서 기억한 것을 다시 반조해 보고 살아라.”라는 의미로요.

농민운동 하시면서 농사를 짓는 분이 쓴 칼럼을 읽은 적이 있어요. “농촌에서 살려면 품앗이를 해야 된다, 농기구도 서로 빌려 써야 된다, 날씨가 받쳐주어야 된다.” 등 이런 온갖 것에서 그분은 “나만 살고자 하면 나도 살 수 없고 인간만 살고자 하면 인간도 살 수 없다.”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이 한 줄의 글을 읽고 연기의 진리를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라고 단순하게 그런 공식으로 생각했는데 ‘삶 속에서 연기의 가치론적 측면이 이런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들며 가슴에 확 와 닿았습니다. 그런데 불교는 과거에 이런 말을 했다라고 하는 확인만 하고 있습니다. 이걸 현실 속에서 확장하고 다양한 구체적 방법으로 대입을 시켜주어야 하는데 이런 부분을 도외시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김형태: 옛날보다 우리가 연기적 실상을 알기가 쉬워진 것이 지식과 과학적 사유가 부처님 당시와 비교가 불가할 정도로 달라져서 웬만한 사람들 모두가 이 세계의 상당한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처님 시절 그 사람들과 비교해보면 지금 평범한 사람들이 깨달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지금 와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것들 예를 들면 마음의 문제라든지 아니면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라고 하는데 분류방법이 저로서는 마땅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류 기준이 지금의 과학지식에서 보면 전혀 쳬계적이지 않거든요. 지금의 입장에서 보면 색수상행식으로 분류하는 것이 잘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법인: 그 부분부터 복원해서 다시 재구성할 수 있다고 보는 거지요.

김형태: 오온五蘊이나 마음 문제도 그렇고. 연기의 실상을 ‘마음’이라 표현하는 것도 그래요. 마음은 우리의 주관적 인식작용이나 그 결과물을 말하는데 연기적 실상을 마음이라 표현하면 결정적인 오해를 일으킵니다. 물론 마음도 연기의 소산인 건 맞지만, 마음을 무슨 큰 이치나 ‘실재’로 오인케 하는 용법은 큰 문제라고 봅니다. 그런 문제들을 지금에 맞는 용어들로 풀어서 다시 얘기를 해주어야 합니다. 옛날 것으로 하면 옛날 사람들이 지금 지식을 이해 못하듯이 지금 사람들도 옛날에 그런 상황에서 나온 이런 얘기들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전혀 엉뚱한 말로 알아들 수 있어요. 그런 점들이 아쉽습니다.

우희종: 이 시대의 언어로 우리가 가진 지식을 바탕으로 좀 더 맞게 바꾸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불교만 그런 게 아니라 아까 말한 그런 농민운동한 아나키스트들도 대표적으로 상호부조론 같은 것 읽어보면 완전히 관계의 마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심층 생태학 강좌도 다 관계를 얘기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불교를 많이 이해를 할 수 있지만 여전히 남겨진 부분은 불교가 앞으로 우리 시대에 여전히 던질 수 있는 것은 언어와 논리를 통한 과학적 발전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여전히 지금의 과학이라는 게 지식이 한계가 있고 계속 확장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여전히 우리 개념과 말의 안에서 벌어지는 거고 그 다음에 부처님이 우리에게 말한 것은 그러한 언어의 세계를 뛰어넘는 부분도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고 그것 역시 하나의 연기적 실상의 모습이거든요.

저도 과학을 하고 있지만 불자로서 느끼는 게 과학적인 언어와 현대의 어떤 지식이 늘어남으로써 불교도 훨씬 이해하기 쉽게 되었기 때문에 이 불교가 진짜 용어를 많이 바꿔서 접근해야 될 필요가 있다는 것에 대한 공감과 더불어 그렇게 해서 진짜 불교가 할 수 있는 부분을 해야 된다는 것이죠. 다시 말하면 언어의 감옥을 뛰어넘는 초월의 영역까지도 제시했던 이 부분까지도 이끌어 갈 수 있는 동력을 끌어내야 되는데 그런 것을 심지어 어떤 큰 스님은 뭐 불교는 과학과 상반된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문제지요.

김형태: 과학에서 도킨스 같은 사람을 보면 철저한 환원주의적 입장 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창발創發 현상을 전혀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수소분자 2개에 산소 1개가 만나서 전혀 다른 물이 나오는데, 초월인데 그것도 모르고 물을 앞에 두고 산소와 수소이야기만 하고 앉아 있는 게 도킨스죠.

우희종: 이기적 유전자론도 특정유전자가 환경과 상호관계 속에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것인데 여전히 환원주의還元主義적 관점이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법인: 연기가 우발성과 창발성이 있고 현실적인 모습이다, 이렇게 볼 수도 있지 않은가요?

김형태: 기독교와 불교의 접점이 창발에 있다고 봅니다. 연기적 실상에서는 인연, 조건들이 연기되어 전혀 다른 것을 만들어 냅니다. 그것을 창조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언어의 함정에 빠질 수도 있지만 그것이 창조라면 창조거든요. 존재에 불과한 하느님이 흙으로 사람이라는 실체를 빚는 게 창조가 아니고, 하나 더하기 하나가 셋이 되는 창발, 이러한 창조, 이 창조가 일어나는 이 거대한 실상 이것을 하느님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다고 봅니다. 불교는 기독교를 그냥 인격적 신을 믿는, 색계에 사는 하느님이 주물럭주물럭해서 실체를 창조하는 한심한 수준의 종교로 쉽게 비하하고 있습니다. 거꾸로 기독교는 불교에 대해서 산 속에서 그냥 구름이나 잡고 앉아 있고 현실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깎아서 얘기를 합니다. 양쪽 다 상대방의 허상을 만들어놓고 서로 비하하는 건데 서로 접점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희종: 서로 상호이해를 안 하는 것이지요.

법인: 제가 아는 신학자들은 대승적인 기독교는 가능하다고 합니다. 한신대학교 김경재 목사님 같은 경우는 ‘대승적 신학 기독교는 가능한가?’ 이런 발상도 하는데 저는 우리 종교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가 ‘지혜와 자비라고’ 하는 양 날개를 달아야 된다고 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를 보면 한 쪽을 선택하고 있어요. 폭 넓게 봐야합니다. 지혜와 자비, 나의 행복과 너의 행복을 함께 추구해야 합니다.

개인이 수행할 때는 무심, 중생과 함께 할 때는 관심을 가져야합니다.

김형태: 기독교는 어려운 얘기를 너무 쉽게 해 가지고 사람들이 문자 그대로 따라서 그냥 미친 듯이 가고 있고 불교는 쉬운 얘기를 너무 어렵게 해가지고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게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이 세상의 신비로운 모습 중에서 주로 있다는 생각에 치우쳐 있는 것 같고 불교는 없다는 쪽에 쏠려 있는 거 같습니다.

법인: 서로 아쉬운 부분이죠. 기독교 신학자들 하고 이야기를 하다보면 불성, 연기론 이런 부분이 때로는 확연해지기도 해요. 예전에는 기독교를 우습게 알았어요. 교리적으로 낮은 종교이고 신이나 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고요.

우희종: 저는 세례 받은 교인이기도 합니다. 저는 성경도 진리고 불경도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전에 한신대 교수와 같이 책을 내고 토론을 하는데 김경재 교수가 와서 얘기를 듣더니 “불교는 인과법에 대해서 그럼 운명론이냐?”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때 불교의 특징은 운명론이 아니라 거기에 삶의 주체로서 내가 그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답했습니다.

법인: 기독교가 연기론을 차용하면 풍부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김형태: 실체론적 사고를 깰 수 있거든요.

법인: 신이 사랑을 베푼다가 아니라 사랑이 곧 하느님이다, 진리가 하느님이다 라고 말들 합니다.

김형태: 프란치스코 교황은 하느님은 관계라고 얘기를 하시기도 합니다.

법인: 정보가 공유되고 인문학적 담론들이 활발할 때 이런 부분들이 점점 만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희종: 그 점이 어려운 것 같습니다. 결국 삶의 현장에서 당연히 만나잖아요. 사실 기독교에서도 말한 부분을 잘 보면 개인윤리로서는 진리 안에서 범사에 감사하고 또 사회적인 일에서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이야기 합니다. 또 불교도 같은 얘기를 합니다. 자타불이自他不二, 동체대비同體大悲. 그런데 그런 가치가 현실에서는 많은 종교 장사치들에게서 왜곡된다는 거예요. 그냥 신도들로부터 이득이나 기득권을 확보하기 위해서 그것을 적당히 포장해서 쓰고 그것을 자기 집단에 유리하게 함으로써 오히려 종교 간의 갈등을 더 분열시킵니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김형태: 종교를 창시하신 분들의 본 뜻과는 정반대 쪽에 가 있는 것이죠.

우희종: 우리의 종교적 가르침이 현장의 삶 속에서 그 가르침을 실천하는 거라면 정반대에 서있는 집단들이 굉장히 위선적인 거죠.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된다고 봅니다.

법인: 삶과 역사 현장 속에서 사고하면서 깨달음도 생각했으면 합니다. 인간생명 중심으로 종교를 한다면 자기종교의 도그마dogma에 갇힐 수가 없다는 것이죠. 이것은 달라이라마가 종교를 넘어서 한결같이 주장하는 것이죠. 모든 인간과 생명에 진정한 가치 행복을 위하는 공동선에는 모든 종교가 달라질 수 없는 것이죠.

우희종: 공동선이라는 말은 그 어떠한 말보다 좋은 말이잖아요. 원론적으로는 우리가 다 알아요. 다 이해하죠. 그런데 과연 어떻게 실천하느냐의 문제죠. 왜 이해라는 말이 왜 그렇게 오해를 결국은 불러 일으켰냐면 잘 이해라는 말을 했을 적에는 이런 것처럼 우리가 공동선을 아무리 얘기하고 정말 생명 위주로 생각하자, 생태적으로 살자 말은 다 이해해요. 이산화탄소 줄이자, 각 정부가 이해하고 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현장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고민이 수반되지 않는 한 원론은 관념적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우리에게 주어진 정말 그런 것을 인식하고 있다면 그것을 실천하고 행동하는 모습으로 그런 것을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 행동해야 됩니다. 이 세상에 원론은 넘쳐요. 너무나 좋은 말이 넘치지만 과연 살면서 무엇을 할 것인가는 여전히 숙제입니다.

법인: 저는 다양한 사람들을 많이 겪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은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연기론적 공동체 이런 삶에서 너무 벗어난 사고를 하는 사람도, 동조하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다는 것이죠. 말로도 흔들고 또 삶 속에서 구체적인 대안 행동으로서 저는 협업이 중요하겠다 생각합니다.

우희종: 방금 말씀하신 실천이라는 것은 하나의 형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 다양한 형태가 있는 것입니다. 각자 위치에서 각자의 모습대로 구현하는 것이죠.

김형태: <바가바드기타>에는 불교적 요소와 기독교적 요소가 다 들어가 있는데 거기의 핵심은 에고센트릭 ego- centric같은, 무슨 센트릭을 벗어나는 것인데, 자기중심, 자기종교중심, 인간중심 그것을 다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실천론적으로 보면 굉장히 훌륭한 경전이라는 것입니다.

결론을 이미 앞에서 두 분이 다 말씀을 하셨습니다. 수불스님, 현응스님의 글과 관련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짚어보았습니다. 여기서 다시 좀 좁혀서 현재 한국 불교, 특히 간화선 중심의 불교 토양 속에서 지금 21세기에 연기적 사고를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한 말씀씩 듣고 마칠까 합니다.

법인: 이제는 모든 영역에서 탈중심주의 관계론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벗어나라, 벗어나라 합니다. 탈중심주의 관계론, 탈중심주의 공동체가 굉장히 중요하다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고 그러나 여전히 종교가 할 수 있는 기능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됩니다. 아무래도 컴퓨터를 먹고 살 수는 없습니다. 핸드폰, 스마트폰을 먹고 살 수는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생명, 공동체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나라고 하는 개인의 성찰과 변화와 내적혁명 이 부분은 여전히 유효하고 이 부분을 종교가 담당해야 된다는 것이지요. 경제와 정치와 윤리가 담당할 수 없는, 종교만이 할 수 있는 부분은 나 개인 내면에 그냥 변화와 성찰 이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런 바탕 속에서 깨달음이든지 수행이든지 간화선이든지 그렇게 전제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희종: 중요한 것은 우리 삶의 현장의 문제라고 봅니다. 내가 내 삶을 어떻게 내 주변과 함께 하는가 이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어떤 특정 종교를 떠나서 제가 보기에는 몇 천 년 동안 내려온 종교는 다 공통적으로 가르쳐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서 모두 강조하는 게 분명히 인간은 동물과 다른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 능력이 무엇일까 생각해볼 때 그것은 무한한 욕망이라고 생각합니다. 불행히도 무한한 욕망이 신자유주의 시대에서는 정말 동물보다 못한 남 등쳐먹고 사기 쳐 가지고 욕망을 만족시키는 건 만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무한한 욕망을 인간이 가진 반면에 성찰과 또 자기 일상의 삶에 대한 감사할 수 있는 능력을 동시에 갖고 있는 것이지요.

동물과 달리 내 존재 이유는 뭔가 성찰할 수 있고 주어진 자기 일상의 삶에 대해서 감사할 수 있습니다. 성찰과 감사가 수반되었을 때 이 세상에 잘못된 것, 다시 말해서 고통을 야기시키는 것에서 끝까지 자기가 바로 잡으려는 노력, 또 마더 데레사와 같이 그 힘든 상황 속에서도 끝없이 갈 수 있는 동력이 무한한 욕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깨달음 논쟁 이전에 과연 인간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져야 된다고 보고, 최소한 깨달음에 국한하고 말한다면 지금 우리에게 제시된 깨달음이 과연 진정한 우리, 나의 삶을 변화시키고 우리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나에게 일상의 감사를 주고 성찰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그러한 깨달음인가, 아니면 단순한 종교 장사하는 사람들의 깨달음질을 생각한다면 내 삶 자체가 굴종의 삶이 되는 것이고. 자기가 성찰과 감사를 통해서 지치지 않고 이 사회를 바꾸고 함께 할 수 있는 힘을 낼 수 있다면 주체적인 삶으로서 주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깨달음의 논쟁이 뭐 어떻게 보면 최소한 오늘 제시된 두 스님의 모습은 같은 이야기를 할 수도 있고 언어라는 관점에서 많은 오해가 빚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두 스님께서 제시하는 어떤 그 지향점은 분명 인간의 삶이 있고 삶의 실천의 문제로써 귀결될 수 있을 뿐이라고 제 이야기를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김형태 : 수고하셨습니다.

/ 이 기사는 <공동선> 5,6월호에도 게재했습니다. 출처 http://www.comngoo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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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호법 2016-05-15 22:25:48
대체 셋이 앉아 뭘 말 하자는 건지....일관된 주제도 없고 이 풀 저풀 뜯어먹다 ....허기진 소들 같으시구려...우교수~ 기독교도 진리다? 참 내 그럼 기독교에 가만히 처박혀서 주기도문이나 외우지 왜 불교에 얼쩡대는가? 창조론 예정론 섭리론등이 불교와는 거의 반대인데 기독이가 사랑을 강조하고 실천 한다고 진리다? 참으로 정법이 설 자리는 어드메뇨? 불쌍한 한국불교...맥아리 하나 없는 법인당의 불교관은 고추가루 안들어간 부대찌게 맛이로다..

아주 엣날,, 옛적에,,도 , 2016-05-13 14:21:17
종교에 사랑과, 평화, 자비가, 없는 종교를, 보았나요?

물론 기독교 이슬람교등에도 반즈시 사랑과 평화 자비는 필수 사상이죠.

가까이는
우리나라 궁예 스스로 만든 미륵불 종교에도 /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도를 아십니까 종교에도/ 통일교등,, 기타등등,,

그로 인한 패단은 엄청났죠 불교적으로는 엉터리 미륵 궁예는 백성들을 속여서는 결국에는 왕이 되었죠,

하여~ 모든 종교는 모두가 다~ 사랑과, 평화 ,자비를,다 담고 있죠-아닌가요?답해 주시길~

더욱이 민주국가라는 현시대서도 영생교라는 종교가 /만들어져서 온나라를 뒤흔든 사건이 발생한 나라가 대한민국 이네요

이종교등은 모두 다 하나같이 사랑과 평화 자비를 실천하라는게 중요법 사상이며
그바람에 엄청난 사람들이 속아서는 봉사단 자비성금등 많이하면 너무 좋아요 하면서는

어느 종교는/하늘나라 가고, 하느님 백성 되고

어느 종교는 /이나라 자체가 복음이며 화장세계이며 이세상에서 영원히 산다는둥~하였죠




또 이미 한물간 흔적만 남은 그리스 종교에도 사랑,평화,자비는 필수입니다
부처님이 나오시기 전에도 인도에서는 브라만 흰두교사상은 있었죠
그종교에서도 사랑과 평화와 자비는 필수 사상 입니다

굳이 흰두교에도 있는법인 사랑과 평화 자비 사상을 한번더 확인 해 주실려고 나오셨나요?
아님 부처님이 나오신 이유는 무엇 일까요?

한참 읽어 내려갔네~ 2016-05-13 13:25:29
이게??ㅉㅉ기독교등 타종교 자랑할려고 올렸나?
깨달음 모르니 그저ㅣ 이런글로 면피용? 변명? 회피?할려고 올렸나?

뭐야~???ㅉㅉ
당최 자기들끼리 무식한것 표내는것 보라고 이글 올렸나?

참나원~ 한참 읽어 보아도 짜증만 나고 얻어 지는것도 없이-정말 열불나네!

그려 깨달음은 얻어진다고? 깨달음은 뭐냐하면서? 이글 올리셨나요?-한번 물어 봅시다!

작금의 선이니또 조계종 승들이야 잘못된 흰두교 법승들이니 말할것 없다 하더라도,

우희종씨는 오죽하면 작금의 조계종 불교가 워낙히 잘못 되다 보니
바른불교연대 결성한것은 이해는 하나 그러나 지금 하는것보면 그나물에 그밥꼴 절대 아니며,

할려면 우선 자신부터 엉터리 흰두교 종교 ,조계종 승들 따라 하시지 말고
기독교니 무슨 종교니 하시지말고 초기경전 아함경 석가모니 부처님법 하나만 제대로 공부하고 아시어도,

이세상 더없는 위대한 법임을 깨달아 알게 되실 것이니 석가모니 부처님 참법을 먼저 알고 하시길-

완전 자신부터 엉터리 참깨달음 해보지도, 알지도 모르니
깨달음법인 부처님법을 왜곡하고 있는죄 어찌 다~감당하실려고 저러는지ㅉㅉ
아직은 완전 여기,저기,종교에서 이것,저것,가져다가,주워서는, 좋은 말로만 짜집기하는 짬뽕 종교인 수준!

그러니 이보시게들~
불교는 우리불자 모두의 공부 법으로서 당신들 무식한 무명의 수준이하의 사람들이 논할 불법 아니네요

그냥 당신들 잘하는 학교등 당신들 전공이나 가르치시고,

괜히 당신들 때문에 우리 불자들 창피스럽게 욕보이게 하시지 말기를-권청 합니다!

깨달음이 뭐냐면요! 2016-05-11 16:14:56
김형태 발행인의 '공동선을 열며'를 게재했다.
전 조계종 교육부장 법인 스님과 우희종 서울대 교수의 대담도 마련했다.
<공동선> 쪽의 허락을 얻어 <불교닷컴>에 싣는다. (편집자)

참,,대단한 내용을,, 진리인양~
참,,깨달음을 주는 대담인양 올린

참..좋은말은 다~
공동선,조계종 교육부장,서울대교수
이름나고 뛰어난분들 이들에게 허락받아서 올림등 하면서 멋진표현과 포장하면서는,,

그기다가 불자들이라면 눈이 확해지는 ,,,깨달음은 뭐냐면요 하면서는,,


본질적인 깨달음을 한자락도 모르는 무식론자 무명론자들이
불교와는 전혀다른 세속적인 허울 좋은 자리만 ,,타이틀만 있어면 다되는양~

무지스러운 사람들과 끼리끼리 모여서 대화한 내용을 눈만배리고 사고력만 배리게 만드는
불교인이라고 말하기도 창피스러운 타종교 예찬론자들에,,
깨달음과는 전혀다른 흑세무민 시키는 죄악의 생산자들!!!

아래 교육원 2016-05-11 09:40:44
보는 눈이 왜그리 천하게 생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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