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1. 한국불교 중흥을 위한 현응스님의 원력
2. 조계종의 명칭을 변경하자는 주장에 대해
3. 깨달음이란 마음을 깨닫는 것이다
4. 깨달음은 사유의 영역을 초월한다
5. 사교입선의 이유
6. 범주오류
7. 간화선에 대한 오해
8. 유상(有相)의 입장은 전도몽상이다
9. 조사스님들의 경책
10. 알음알이
11. 깨달음도 진화한다는 주장에 대해
12. 조계종지의 현대적 구현
1. 한국불교 중흥을 위한 현응스님의 원력
한국불교는 삼국시대부터 고려·조선시대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맥이 면면이 이어져왔다. 근대에는 선조스님들의 위법망구의 헌신적인 ‘정화불사’를 거쳐, 마침내 1962년 대한불교조계종이 출범하여 올해로 53년이 되었다.
조계종단은 종헌 전문(前文)에 밝혀져 있는 바와 같이, “이사무애를 제고(提高), 대승불교의 성불도생(成佛度生)을 실천, 민족통일과 문명사의 새로운 흐름을 대비, 불일(佛日)을 만고에 빛나게 하고, 삼보(三寶)를 법계에 유전케 함”을 목표로 선불교를 중심으로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를 회통하고 있다.
그러므로 종헌 전문에 서술하고 있는 “교단이 수행과 전법의 영겁기단(永劫基壇)이 되도록 한다.”는 취지에 입각하여, 한국불교의 중흥에 나아가고 조계종지를 현대적으로 구현하는데 사부대중이 합심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대의(大義)에 동참하지 않을 조계종도는 없을 것이다.
이번에 현응스님께서 소납에게 보내준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 (이하 ‘그 이후’)〉와 〈‘깨달음과 역사, 그 이후’ 반론에 대한 답변 (이하 ‘답변’)〉을 읽고 한국불교 중흥을 위한 현 교육원장으로서의 고뇌와 원력을 느낄 수 있었다.
현응스님은 한국불교의 자성과 쇄신을 통해 시대와 역사에 부응하는 한국불교를 이룩하겠다는 소중한 원력을 세우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방향 제시로 위의 두 글을 발표했던 것이다. 현응스님은 〈답변〉의 ‘대한불교조계종의 종지에 대해’라는 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조계종단의 종지는 ‘석가세존의 자각각타 각행원만한 근본교리를 봉체하며 직지인심 견성성불 전법도생함을 종지로 한다.’(종헌 제2조)라고 되어 있다. 이 종지에 의하면, 1. 부처님의 근본교리를 잘 알아 받들어야 된다는 것과, 2.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는 선(禪)의 정신을 중심에 놓고, 3. 전법도생이라는 중생교화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것이 조계종단의 나아갈 방향인 것이다.”
조계종단의 근본종지에 대한 현응스님의 명쾌한 해석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또한 조계종지의 골격을 이루고 있는 ‘선(禪)정신’을 이렇게 정의했다.
“2,600년의 다양한 불교를 포섭하여 통합해 내는 조계종단의 선(禪) 정신은 무엇인가? 선에는 여러 가지의 정신과 선풍이 있다. 그 중 어떤 선 정신을 말하는가? 종헌 제1조에는 종명을 ‘조계종’으로 한다는 것과, 고려시대의 태고 스님이 제종포섭(諸宗包攝)으로써 조계종이라 공칭한 뜻을 이어받아 우리 종단의 명칭을 ‘조계종’이라 한다고 규정했다.”
이어서 조계선풍과 돈교법문의 요지를 지적한 후에 조계종단의 교육내용과 교화방편에 제종의 가르침을 두루 포섭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조계종이라는 뜻은 ‘조계선풍(曹溪禪風)을 중시하고 존중하는 가르침과 정신’이라는 뜻이며, 이를 교단의 종지로 삼고, 교단의 명칭으로까지 사용하는 것이다. 조계선풍은 중국 당나라 선불교의 육조(六祖) 혜능 스님이 정립했다. 이후 역대조사스님에게 그 선풍이 이어져 오늘날 한국불교의 중심이 되는 정신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 정신의 요지는 ‘돈오(頓悟)’이다.”
“한국불교의 전통교단인 조계종단은 이러한 조계선풍의 돈오사상을 중심에 두어 다양한 불교를 회통하기 때문에, 이러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초기불교, 대승불교, 선불교 등 제종의 가르침을 모두 종단의 교육과정에 포섭하여 교화방편으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현응스님은 결론적으로 선의 개방성과 포용성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한국불교의 통불교적 이념을 이끌어가는 종지로서 조계선풍에 대한 개인의 소신과 판단을 천명하고 있다. 누구라도 전적으로 동의하게 되는 타당한 논지라고 생각한다.
“한국불교의 통불교적 이념을 끌어가는 종지는 조계선풍이 가장 적합하다는 게 나의 개인적 소신과 판단이라는 점을 밝힌다. 왜냐하면 선(禪)이야말로 가장 개방적이고 포용적이면서 모든 불교를 통합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국불교가 선불교를 중심으로 통불교를 지향한다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하여 조계종도라면 누구라도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현응스님은 2011년 종단에서 매월 개최한 토론회의 마지막 12월 발제문 〈한국불교 중흥의 길을 향하여 (이하 ‘향하여’)〉에서 종단 출범 당시의 시대정신을 반영하여 대한불교조계종의 정체성을 이렇게 정의하였다.
“승려는 청정독신 비구승이라야 한다는 점과 무소유공동체, 그리고 선불교의 정신으로 모든 불교의 가르침(諸宗)을 포괄한다는 점, 그리고 전국의 사찰과 승려를 하나의 종헌종법으로 통합하는 종단승가를 구축한다는 등이었다.”
이러한 논지를 바탕으로 현응스님은 〈향하여〉에서 “오늘날 한국불교의 중흥을 말하려 할 때는 우선 한국불교의 사상과 교리에 대한 정체성의 문제를 제대로 정립하는 것이 긴요합니다.” 하고 전제하고, 조계종단의 입장에서 자성하고 쇄신해야 할 기본적인 과제로 “첫째로는 한국불교가 1,000년 전에 형성된 종파불교를 벗어나 현대불교적 회통불교로 정립해야 한다는 점이며, 둘째로는 (…) 종단운영 시스템의 일대혁신을 추진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하고 제시하였다.
여기서 ‘종파불교에서 벗어나 현대불교적 회통불교로 정립해야 한다’는 주장은 작금 여러 경로를 통해 제기되고 있는 ‘간화선 무용론’과 ‘남방불교의 위빠사나 및 서구에서 유입된 다양한 명상의 유행’을 염두에 둔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현응스님의 〈그 이후〉 발제문에 대한 〈전국선원수좌회 성명〉에는 수좌스님들의 심각한 현실인식과 통절한 참회의 모습이 절절하게 드러나 있다.
“돌이켜 반성해보면, 깨어있고 열려있는 안목으로 시대대중을 계도하고 승단의 청정성을 보지(保持)해 사자후를 외쳐야 할 수좌들이 이미 종이호랑이로 전락되어 산문은 무주공산이 되어 버렸다. 안으로 간절한 참구로 존재의 실상을 밝히고, 밖으로 한량없는 자애로 생명을 보듬어, 지금 여기에서 바로 생사해탈의 무위법을 연설하지 못하고, 도피와 방관과 보신으로 스스로 사자충이 되어 제 밥그릇 챙기기에 열중이니 어찌 자타동업(自他同業)의 누(累)를 통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없이 부끄러운 마음에 돈수천배로 오체를 투지하고 참회를 올린다.”
국제사회는 21세기 정보과학기술 시대의 흐름을 타고 급변하고 있다. 이러한 때, 현응스님이 교육수장으로서 다가오는 통일과 세계적인 명상문화의 유행 등 국내외의 다양한 도전에 당면하여 한국불교가 어떻게 이 국면을 타개하고 중흥의 길로 나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그 활로를 모색하는 것은 지극히 타당하며, 이런 의미에서 일선에서 진두지휘하는 현응스님의 노고에 응원의 박수를 보내는 바이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이런 총론적인 대의(大義)에 있어서는 현응스님의 주장에 동의하지만, 각론에 있어서는 다른 의견이 있어 제기해본다. 다양한 주의주장이 모여 활발히 토의되고 소통되면, 한국불교 중흥의 비전을 보다 가시적으로 드러내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2. 조계종의 명칭을 변경하자는 주장에 대해
현응스님 발제문의 각론에 들어가면,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이 나온다. 먼저 현응스님은 〈답변〉에서 조계종의 명칭을 변경하자는 의견을 개진하였다.
“근년에 나는 ‘조계종’이라는 교단의 명칭을 재고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 바 있다. 이 주장의 취지는 한국불교가 1,700년 이상의 역사와 전통을 모두 승계한 유일한 교단이기 때문에, 이 전체의 역사와 전통을 모두 담아내는 보다 큰 그릇으로서의 명칭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근년에 논자가 주장한 내용’이란 4년 전에 작성한 〈향하여〉에 담겨있는 것이다. 이 글에서 현응스님은 이렇게 주장하였다.
“‘대한불교조계종’이라는 명칭의 적합성에 대해 진지하게 검토해야 될 때가 되었습니다.”
“‘○○종’이라는 이름에 사로잡힐 때 그 한계의 핵심은 한국불교를 특정한 종파불교의 굴레 속에 갇히게 한다는 것입니다. ‘조계’라는 말이 가지는 선종사에서의 독보적 위상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불교가 중흥하고 세계에 그 가르침을 펴기 위해서는 선불교의 뜻만 표방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단 명칭의 문제는 조계종 출범 50주년을 맞은 현단계에서 한국불교중흥을 추진하는 자성과 쇄신결사의 일환으로 종단적(교단적) 차원에서 신중한 검토를 거쳐 공론화하여 해결할 우선적인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현응스님은 같은 글(2011년 작성)에서 조계종명을 바꾸자는데 그치지 않고 나아가 조계종지까지 거론하고 있다.
“조계종의 종지의 그릇을 보다 크게 만들어 그 내용을 풍부하면서도 이 시대 한국불교가 구현하고자 하는 뜻을 담아내야 합니다.”
현응스님은 그 글에서 조계선풍의 협소성과 간화선의 특정성을 비판하였지만, 앞에서 본 바와 같이 2015년에 쓴 〈답변〉에서는 ‘한국불교의 통불교적 이념을 끌어가는 종지는 조계선풍이 가장 적합하다는 소신’을 표명했으므로 현응스님의 조계종지관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조계종 종헌 제2조에는 조계종단의 종지를 분명히 규정하고 있다. “본종은 석가세존의 자각각타 각행원만한 근본교리를 봉체하며 직지인심 견성성불 전법도생함을 그 종지로 한다.”
즉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고 ‘직지인심 견성성불’의 선불교 강종(綱宗)을 통해 ‘전법도생’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다른 나라의 불교와는 차별되는 한국불교의 정통성이자 고준함이며, 시대를 뛰어넘어 지향해야 할 바른 목표가 아닐 수 없다.
선조스님들이 세워놓은 바르고 깊은 뜻을 헤아려 후배들이 그것을 실현하려고 노력해야지, 시대의 흐름을 따라야 한다는 구실 아래 쉽사리 이름을 바꾸려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다. 이것은 마치 현대화, 세계화된 세상에 적응해야 한다고 해서 자기 성(姓)을 현대적, 세계적인 것으로 갈자는 주장과 같다.
아마도 돌아가신 성철스님께서 조계종의 이름을 바꾸자는 현응스님의 주장을 들으셨다면, “이 자슥이 마구니 아니가!” 하면서 주장자를 내리쳤을 것이다.
소납도 조계종의 명칭을 변경하자는 현응스님의 주장에는 분명히 반대함을 밝힌다.
3. 깨달음이란 마음을 깨닫는 것이다
현응스님이 올해 발표한 〈그 이후〉가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응스님은 〈향하여〉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불교는 물론이고 세계 여러 나라의 불교들이 21세기 현대사회에 와서도 여전히 천년, 이천년 전 과거의 불교에 안주하고 있습니다. (…) 이제 한국불교가 특유의 포용성과 역동성을 바탕으로 2600년 불교의 모든 가르침을 회통하여 현대적 불교로 만들어내어 한국사회는 물론 세계로 펼쳐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현응스님의 주장은 이렇게 총론까지는 좋은데, 막상 각론에 들어가면 왜곡됨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은둔하는 불교, 이기적이고 소극적인 불교, 기도(기복)만 하는 불교, 명상(참선)만 하는 불교에서 연기적(불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사회적 자비를 실천하는 한국불교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겉보기에는 그럴 듯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특히 참선수행을 비판하고 있는 의도가 분명해 보인다. ‘은둔’, ‘이기적이고 소극적인’, ‘참선만 하는’ 등의 표현들이 한결같이 그동안 한국불교가 자랑해왔던 안거의 수행전통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불교에서 참선수행이 차지하고 있는 권위를 해체하기 위해 이렇게 주장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불교, 또는 한국불교의 모든 것에 대해 자유롭게 비판하고 따져볼 수 있는 풍토가 가능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 그리고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모든 불교인들이 기존의 낡은 권위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전적으로 지지하며 힘을 모아 성원하는 것입니다. 이제 각성된 불교대중들이 소수의 종교적 권위를 타파하고 전면적인 불교혁신과 불교현대화에 나설 때입니다.”
이렇게 볼 때, 현응스님이 왜 〈그 이후〉에서 “깨달음이란 잘 이해하는 것이다.”는 점을 줄기차게 주장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한국불교가 선불교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을 해체하기 위해 ‘조계종’의 종명을 바꾸자고 주장하는 것과 일맥상통의 취지에서, 선불교가 바탕으로 삼고 있는 ‘돈오’를 해체하기 위해 ‘깨달음이란 연기관을 이해하는 것이고, 그 이해는 왠만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며,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는다.’고 그토록 집요하게 주장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현응스님은 불교의 근간인 ‘깨달음’을 오해하고 있다. 현응스님은 〈그 이후〉에서 이렇게 말했다.
“현재 한국불교에서는 대개 묵시적으로 깨달음이란 ‘마음을 확실하게 깨닫는 것’이라고 본다. (…) 그러나 이렇게 정의하는 깨달음은 내용이 추상적이며 구체적인 것은 아니다. 마음을 깨닫는다는 말은 부정확하다. 마음을 깨닫는다 할 때의 그 마음이 무엇인지 명확히 밝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말은 현응스님 스스로가 마음이 무엇인지 확실히 모른다는 고백과 같다. 그런데 깨닫지 못한 사람이 마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마음이란 직접 깨닫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모르니까 깨달으려고 하는 것이다. 현응스님 본인이 마음을 깨닫지 못했으니까, 깨달음의 내용이 추상적이며 구체적이지 않게 보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그런 깨달음이란 없다.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깨달음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면, 그 말 자체가 모순이다. 깨닫지 못했는데 깨달음의 내용인 마음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안단 말인가? 꿈속에 있는 사람은 꿈 깬 생시를 알 수는 없는 법이다.
본인이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겠다고 해서 마음을 부정한다면, 하늘에다 침 뱉는 꼴이다. ‘마음을 부정하는 그것’이 바로 마음이기 때문이다. 일거수일투족을 마음이 한다고 하는데, 그 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의심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의심에서 수행이 시작된다. 의심은 우리를 진리로 나아가게 한다.
사리가 이렇게 분명하거늘, 본인이 깨닫지 못해 마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고 해서, 마음을 깨달아 증명하고 전등해주신 기라성 같은 선조스님들을 부정하고 ‘깨달음이란 잘 이해하는 것이다’고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4. 깨달음은 사유의 영역을 초월한다
현응스님은 〈그 이후〉에서 “깨달음이란 것을 이렇게 모호하게 설정해서는 (…) 평생을 노력해도 깨달았다는 확신을 얻지 못하는 것이 무리가 아니다.”고 하면서, 깨달음이 무엇인지 밝히기 위해 《마하박가(律藏大品)》를 인용한다. 그리고 이런 결론을 내린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고도로 수련된 높은 정신세계를 이루는 것이라 하지 않았다. 깨달음은 ‘잘 이해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하지만 정작 《마하박가》에는 부처님께서 깨달음은 잘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대목을 찾기 어렵다. 오히려 깨달음은 사유의 영역을 초월한다고 하셨다. 부처님께서 성도 직후 보리수 아래 앉아서 해탈의 지복을 누리셨는데, 초야에는 연기법의 순관과 역관에 대하여 정신활동을 기울였다고 나온다. 그 후 세존께서 삼매에서 일어나 자리를 옮기셨을 때, 이런 사념이 일어났다고 전한다.
“내가 깨달은 이 진리는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고요하고, 탁월하고, 사유의 영역을 초월하고, 극히 미묘하기 때문에 슬기로운 자들에게만 알려지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당신이 깨달으신 진리가 참으로 미묘하기 때문에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알아듣기 어렵다고 생각하시고 이런 게송을 읊으셨다.
“참으로 힘들게 성취한 진리를
차라리 설하지 말아야지
탐욕과 미움에 사로잡힌 자들은
이 진리를 잘 이해하기 힘들다.
흐름을 거슬러가는,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미묘한 진리를
어둠에 뒤덮이고
탐욕에 불붙은 자들은 보지 못한다.”
《마하박가》에는, 진리란 쉽게 이해되는 것이 아니므로 가르쳐도 일반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고 피곤과 곤경만 쌓일 것으로 부처님께서 내다보시고, 차라리 진리를 설하지 않고 그냥 있기로 마음을 정하셨다고 나온다. 그런데 현응스님은 〈그 이후〉에서 진리란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서 얻기 쉽고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만일 깨달음을 ‘올바른 이해’라고 한다면 그러한 깨달음을 얻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이 녹야원의 첫 설법에서 다섯 수행자에게 당신의 깨달음의 세계를 설명하고 납득시키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며칠이 걸렸을 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마하박가》의 내용을 곡해한 것이다. 다섯 수행자가 진리를 깨닫는데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은 이유는 첫째 부처님의 위신력 덕분이고, 둘째 그들이 이미 ‘눈에 티끌이 거의 없는 중생’ 즉 특별한 상근기였기 때문이다.
잘 알다시피, 부처님께서 진리를 설하지 않기로 마음먹자, 범천이 나타나서 세상에는 마음이 깨끗해서 가르침을 듣고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자도 존재한다는 점을 들어 설법에 나서시도록 여러 번 권청했고, 마침내 부처님께서도 중생에 대한 자비심 때문에 “어떤 무리의 청련화, 홍련화, 백련화는 물속에서 생겨나 물속에서 자라서 수면을 벗어나 물에 젖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보시고 “그들에게 불사(不死)의 문은 열렸다!”고 선언하고 법륜을 굴리기 시작하신 것이다.
세존께서는 “누가 이 가르침을 신속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시고 제일 먼저 출가 후 만난 첫 스승이었던 알라라 깔라마를 떠올리셨다. 그러나 그는 벌써 칠일 전에 돌아가고 난 후였다. 이어 두 번째 스승이었던 웃다까 라마뿟따를 떠올렸지만 그 역시 지난밤에 돌아가신 후였다. 그래서 같이 고행하던 다섯 명의 수행자를 떠올리고 그들이 있던 바라나시로 가셨던 것이다.
다섯 수행자는 오히려 부처님을 정진을 포기한 자라고 무시하여 인사도 하지 않을 만큼 열심히 정진하던 비구들이었다. 부처님은 그들에게 “불사(不死)가 성취되었다.”고 선언하시며, “내가 가르친 대로 그대로 실천하면, 머지않아 훌륭한 가문의 자제로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그 목적인 위없는 청정한 삶의 완성을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알고 깨닫고 성취하게 될 것이다.” 하면서 다섯 수행자의 마음을 일으키셨다.
그리고 《마하박가》에는 부처님께서 ‘중도’와 ‘사성제’를 설하시는 것을 듣고 교진여를 시작으로 다섯 수행자에게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은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고 전한다. 현응스님이 주장한 대로 다섯 수행자가 부처님의 설명을 듣고 ‘납득한 것’이 아니라,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깨달음이란 ‘이해하고 납득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눈을 뜨는 것’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부처님 말씀대로 깨달음이란 곧 ‘불사(不死)를 성취하는 것’인데, ‘잘 이해하는 것’으로 어떻게 불사를 성취할 수 있겠나. 알음알이로는 당장 지금 이 자리에서 자기 마음 하나도 조복받기 힘들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현응스님이 주장하는 대로 ‘깨달음은 잘 이해하는 것’이라서 다섯 수행자가 빠르게 이해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보시기에 그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조금밖에 오염되지 않은 중생’이었기 때문에 선택되었고, 부처님의 고구정녕한 설법을 듣고 빨리 깨달은 것이다.
이때 교진여는 ‘궁극적인 앎을 얻은 교진여’라는 뜻인 ‘앙냐 교진여’라는 이름을 얻고 “진리를 보고, 진리를 얻고, 진리를 알고, 진리에 깨우쳐 들어가, 의심을 뛰어넘고 의혹을 제거하고, 두려움 없음을 얻고,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스승의 가르침을 신뢰”하여 부처님께 청하여 구족계를 받았다고 전한다.
진리란 그저 ‘잘 이해하는’ 대상이 아니라, ‘보고 얻고 알고 깨우쳐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의심을 뛰어넘고, 의혹을 제거하고, 두려움 없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의심을 뛰어넘을 수 없고, 의혹을 제거할 수 없으며, 두려움을 없앨 수도 없다는 사실은 수행을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너무나 잘 알 것이다.
이해하는 것만으로 인생의 문제가 해결된다면, 전 세계의 그 많은 불교학자들마다 다 깨달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불조께서 대자대비심으로 전등해주신 깨달음이 그렇게 싸구려란 말인가.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교학적 이해를 넘어서 나름의 수행법에 의지하여 실참에 몰두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인데, 깨달음이 이해라는 주장은 그 사람들을 다 바보로 만드는 희론(戱論)이 아닌가.
현응스님은 다섯 수행자 이후에도 55명의 수행자를 단기간에 깨닫게 만들었다고 하면서, “이처럼 깨달음은 이해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설법, 토론, 대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고 계속 주장하고 있다. 단기간에 수십 명이 깨달음을 얻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설법과 이해에 의한 것이라고 보는 것은 너무나 안이한 해석이다.
《마하박가》를 깊이 들여다본다면, 단기간에 수십 명이 깨달은 것이야말로 ‘돈교법문’을 증명해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천인사(天人師)로서 명안종사(明眼宗師)이신 부처님의 위신력에 ‘이미 수면 위로 솟아나서 물에 젖지 않는 연꽃 같은’ 상근기 수행자들의 수승한 마음이 계합하여 줄탁동시(?啄同時)의 기연(機緣)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보다 도리에 맞는 해석이 아닐까?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돌아가실 때까지 쉼 없이 인연 있는 이들을 깨닫게 해주신 바, 그 수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을 것이다. 《육조단경》의 ‘유통부촉품’에도 육조혜능 스님의 문하에서 “종지를 얻어 법을 이은 제자는 43인이었고, 도를 깨쳐 범부의 자리를 넘어선 자는 그 수를 알 수 없다.”고 증명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깨달음이란 이해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책상물림의 말일 뿐이고, 정작 진실된 수행자라면 ‘깨달음이란 사유의 영역을 초월한다’는 부처님의 말씀에 동의할 것이다.
5. 사교입선의 이유
인생에 대하여 회의를 품고 생사문제를 해결하고자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한 사람이라면, 경전의 첫 대목에서 벌써 은산철벽과 마주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매일 외우는 〈반야심경〉의 구절구절도 발심한 사람에게는 씹히지 않는 쇳덩이처럼 느껴질 것이다. 예를 들어, ‘색즉시공’이라는 구절을 속 시원하게 소화시킬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마하박가》의 첫머리에 나오는, 부처님께서 관하신 연기법의 구절에서도 이해는커녕 도무지 머리로는 풀 수 없는 난제와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현응스님은 〈그 이후〉에서 “한마디로 부처님이 각자(覺者)라 할 때 그 깨달음은 ‘연기관(緣起觀)의 이해를 확립함이며, 삶의 괴로움의 문제를 이러한 통찰과 이해로서 해결하는 것’이라 하겠다.” 하고 말했지만, 연기관을 제대로 통찰하고 고해에서 벗어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부처님의 설법에 따라 ‘십이연기’를 순관(順觀)으로 관하여, 노사(老死)의 괴로움이 결국 무명으로 인하여 발생한다는 이치야 누구나 어렵지 않게 알아들을 수 있다. 그러나 진실된 수행자라면 역관(逆觀)에 접어들자마자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의 대목에서 꽉 막혀 한 발짝도 더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무명이 사라지면 순차적으로 결국 노사도 사라져서 괴로움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지만, ‘실제로 무명이 소멸되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언어로 전달될 수 없는 것이다. 말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체득해야 만이 실제로 무명이 소멸되기 때문이다.
무명만 소멸되면 순차적으로 노사까지도 소멸될 것은 분명하지만, 과연 ‘어떻게 해야 무명이 소멸될 것인가?’ 하는 것은 너무도 현실적인 문제라서, 현응스님이 주장하는 ‘잘 이해하는 것’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십이연기를 아무리 잘 이해하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첫 단어인 ‘무명’에서 꽉 막히는데. 무명의 실체를 이해로서 알고 해결할 수 있는가? 알음알이는 무명을 더 크게 만들 뿐이다. 여기서 발보리심이 시작되고, 사교입선(捨敎入禪)이 일어나는 것이다.
교학을 잘 이해하면 할수록 실제 수행의 발심이 일어나는 것이 정상적인 과정이다. ‘잘 이해하는 것’으로는 순간순간 일어나는 자기마음조차 조복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이해하는 것 자체가 분별망상의 일이기 때문이다. 갈애(渴愛) 때문에 고(苦)가 일어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실제로 갈애를 해소할 수 없으면, 양심상 그 앎 때문에 오히려 더 괴로워진다. 조금이라도 자기 내면의 고통에 정직한 사람이라면, 무명업장의 실제적인 소멸이라는 문제는 피할 수 없는 근본적인 벽으로 다가올 것이다.
현응스님은 연기법을 잘 이해하기만 하면 만사형통인 것처럼 말하지만, 깨닫기 전에는 연기법의 진면목을 바로 알기 어렵다. 십이연기는 모든 존재현상이 연기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실체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이것은 외도의 상주론(常住論)과 단멸론(斷滅論)이라는 양극단을 떠난 것이기에 ‘중도(中道)’라고 부른다.
만법은 연기된 것이므로, 상주한다고 할 수도 없고 단멸한다고 할 수도 없어서, 굳이 말하자면 ‘중도’라고나 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것이다. 이 ‘중도’는 사무치고 사무쳐서 끝내 통해야 하는 것이지, 이해로서는 도저히 그 실상을 파악할 도리가 없다.
부처님께서는 《쌍윳따 니까야》와 《잡아함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자아가 괴로움을 만들고 그 자신이 그 결과를 경험한다면,
이것은 괴로움이 저절로 생긴다는 것인데,
이것은 결국 상주론이 되고 만다.
자기가 행동하고 다른 사람이 그 결과를 경험한다면
이것은 괴로움이 남에 의해 생긴다는 것인데,
이것은 결국 단멸론이 되고 마는 것이다.
나는 이 두 극단을 떠나 중도로써 법을 가르친다.
내가 말하는 중도란 무명에 의해 행(行)이 생기고,
행에 의해 식(識)이 발생한다.
(…)
태어남에 의해 노(老), 사(死), 슬픔, 괴로움 등이 발생한다.
(…)
그렇지만 무명의 완전한 소멸을 통해 행과 그 외의 것들이 사라지고,
행의 소멸에 의해 식과 그 외의 것들이 사라진다.
이렇게 해서 이 모든 괴로움이 사라진다.”
이렇게 연기법은 유무(有無) 단상(斷常)의 양변을 여읜 비유비무(非有非無) 비단비상(非斷非常)의 중도로 이어지는데, 이 중도의 도리는 ‘잘 이해하는’ 대상이 아니라 실제로 ‘체득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해는 되지만 체득되지는 않는’ 딜레마에 부닥칠 때에 비로소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의 삼법인에 사무치게 되고, 진정한 발보리심이 일어나는 것이다.
《금강경》에는 이 발보리심이 일어난 수행자가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가 잘 드러나 있다. 이렇게 ‘연기중도’를 고리로 해서 초기불교는 자연스럽게 대승불교와 이어진다. 《금강경》 ‘선현기청분 제이(善現起請分 第二)’에서 장로 수보리는 부처님께 이렇게 여쭌다.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여인들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다음, 마땅히 어떻게 그 마음을 유지하여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나이까?”
장로 수보리는 부처님의 자상하신 가르침을 듣고 마침내 ‘이상적멸분 제십사(離相寂滅分 第十四)’에서 체루비읍하며 부처님께 고한다.
“그때 수보리가 이 경을 설하심을 듣고 깊이 그 뜻을 깨달아 눈물을 흘리고 슬피 울며 부처님께 아뢰었다. 희유하십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심히 이와 같이 깊은 경전을 설하심은 제가 예로부터 얻은 바 지혜의 눈으로는 일찍이 한 번도 듣지 못하였나이다.”
이미 육안(肉眼), 천안(天眼), 혜안(慧眼)은 뜨고서 발보리심을 냈던 수보리는 《금강경》에 나오는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법안(法眼)을 열었고, 그 증표로 경에서도 ‘장로 수보리’라는 호칭에서 이후에는 ‘혜명 수보리’로 바뀌는 것이다. 이처럼 법안을 열고 ‘상을 여의어 적멸에 드는[離相寂滅]’ 것을 ‘깨달음’이라고 보면 정확한 기준이 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어지는 장에서 불안(佛眼)까지 언급하여 오안(五眼)을 모두 밝히셨다. ‘불안과 법안’이 곧 ‘불법(佛法)’이며, 깨달음의 기준은 여기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조계종지를 근간으로 하는 대한불교조계종이 “본 종의 소의경전은 《금강경》과 ‘전등법어’로 한다.”고 정한 이유도 《금강경》에 법안을 열고 깨달음을 성취하는 가르침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 핵심구절은 육조혜능 조사께서 듣고 깨달음을 얻었던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應無所住而生其心]’인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6. 범주오류
현응스님이 〈그 이후〉에서 초지일관 ‘깨달음이란 잘 이해하는 것이다.’고 주장한 것은 ‘범주오류(範疇誤謬, category mistake)’를 범한 것이다. 논리학에서는 어떤 범주에 속해 있는 내용을 다른 범주에 속한 내용으로 설명하는 경우, 무의미한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현재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단은 육조혜능 조사의 선불교를 중심으로 하는 통불교다. 기본적으로 성문승과 연각승은 물론 보살승과 최상승까지 포괄하는 것이다. 이렇게 통불교적인 기초 위에서 최상승까지 소화한 입장에서 상(相)을 여읜 ‘불이법(不二法) 차원의 깨달음’을 지향하는 것은 현응스님이 말하는 상을 가진 ‘이법(二法) 차원의 이해’와 그 범주가 다를 수밖에 없다.
즉 ‘깨달음’은 불이법에 속하고, ‘이해’는 이법에 속하는 것이다. 따라서 ‘깨달음이란 이해하는 것이다’는 말은 곧 ‘상을 여읜 것(깨달음)은 상을 가진 것(이해)이다.’라는 무의미하고 모순된 주장이 되는 것이다. 그 모순은 서로 범주가 다른 것을 한데 갖다 붙여놓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주객이 나누어진 이법의 차원에서는 주관이 있어서 객관으로서의 깨달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만, 주객이 탈락한 불이법의 차원에서는 안팎으로 밝게 뚫린 한 덩어리[一團] 깨달음의 당체만이 분명할 뿐이다.
이것을 육조스님은 《육조단경》에서 분명히 밝혔다. “이법은 불법이 아니다. 불법은 불이법이다. (爲是二法 不是佛法 佛法是不二之法)” 선문에서는 그 차이를 ‘천지현격(天地懸隔)’이라고 했다.
부처님께서 《금강경》에서 말씀하신 오안(五眼)을 가지고 말하자면, 현응스님이 말하는 ‘잘 이해하는 깨달음’이란 혜안에도 미치지 못하는 차원의 것이지만, 선불교의 ‘돈오’는 육안, 천안, 혜안은 물론 법안과 불안까지 포괄하는 차원이다. 혜안 이하의 내용과 법안 이상의 내용은 서로 그 범주가 다르다.
불조께서 혜안 이하의 근기에 대고 설하신 내용을 그대로 최상승인 선불교에 적용하는 것도 무리지만,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초기불교에서조차 ‘깨달음이란 잘 이해하는 것이다’는 주장은 그 논리적 근거를 찾기 어렵고 오히려 그 주장을 하는 사람의 안목이 얕고 피상적임을 보여줄 뿐이다.
현응스님은 ‘혜안 이하인 이법의 논리’를 ‘법안 이상까지 포함하는 불이법 선불교의 내용’에 그대로 적용하는 범주오류를 범했으므로, 그 결과인 ‘깨달음은 이해다’는 결론은 무의미할 수밖에 없다. 현응스님은 이렇게 처음부터 범주오류에서 논의를 출발했기 때문에, 발제문의 이후 모든 내용은 오류의 동어반복과 확대재생산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상대적인 ‘이법’의 논리로 중도의 ‘불이법’을 재단하려는 모든 시도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群盲撫象]’와 같다. 그렇게 되면, ‘범주오류’에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까지 더하게 되는 것이다. 분별망상으로 불이법을 더듬다가 ‘마음’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 수 없다고 현애상(懸崖相)을 내어서, 하급의 차원으로 퇴타하여 ‘깨달음은 이해의 영역’ 운운하는 것을 고봉화상은 《선요》에서 ‘원숭이가 장대로 달을 따려한다’고 경책하였다.
‘양변의 상대적인’ 이법의 차원에서 ‘양변을 포괄하되 물들지 않는’ 불이법의 깨달음을 논하는 것은 전도몽상 속에서 잠깬 뒤의 생시에 대해 논하는 잠꼬대에 불과하다. 잠을 깨서 생시의 입장이 되어보면 ‘깨달음’에 대해 바른 지견이 나올 것이다. 그러므로 ‘꿈속’과 ‘꿈에서 깬 생시’ 사이의 차원(범주)의 차이에 대한 몰이해로부터 먼저 벗어나는 것이 논의의 올바른 순서일 것이다.
결국 한국불교 조계종단에서 말하는 ‘마음을 깨닫는 것’의 내용을 언급함에 있어서 범주오류를 피하려면, 공식적인 소의경전인 《금강경》과 《육조단경》을 비롯한 조사어록에 의지해서 논지를 펴는 것이 바람직하다.
대승경전과 조사어록에는 ‘마음을 깨닫는 것’에 대한 분명한 언급이 수도 없이 많이 나온다. 현응스님이 그 많은 가르침을 무시하고 ‘깨닫는다는 그 마음이 모호하다’고 말하는 것은 결국 본인의 안목이 모호하다는 자백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알음알이로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마음으로 종을 삼는다.[佛語心爲宗]’는 《능가경》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가 없고, 더군다나 이 말을 근거로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종의 종지를 세운 보리달마 대사의 깊은 뜻을 엿볼 수 없을 것이다.
마음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보고 듣고 생각하고 아는 등 온갖 작용을 하고 있지만, 모양이 없어서 그것을 대상으로 파악할 수는 없다. 모양 없는 마음은 모든 것의 근원이어서 무한한 시간과 공간, 삼라만상의 온갖 차별상과 기기묘묘한 생각도 모두 한마음 속의 생멸일 뿐이다.
의식이 도달할 수가 없고, 생각으로도 찾을 수가 없으며, 더군다나 언어로 그려낼 수도 없는 이 마음은 처음부터 나거나 사라진 적이 없어서 무생법인(無生法忍)이라 한다.
이 근본실상이 분명하다면 인연 따라 생멸하는 온갖 분별상에 연연하지 않고, 하되 한 바가 없는 무애자재함을 얻게 될 것이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해가 뜨나 어둠이 오나, 허공은 물들지 않고 늘 여여부동(如如不動)한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므로 혜안 이하의 안목으로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우주의 본원(本源)인 ‘마음’이 모호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근본에 의심을 품고 실참을 통해 법안 이상의 안목을 열려고 노력해야지, 혜안 이하의 안목으로 그저 ‘연기관과 공성’을 이해하는데 만족한다면 불조의 혜명을 이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각각타(自覺覺他)의 보살행도 제대로 실천할 수 없는 것은 정한 이치다.
7. 간화선에 대한 오해
현응스님은 간화선의 장치인 ‘화두’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바, 〈그 이후〉에서 이렇게 말했다.
“간화선의 ‘간(看)’은 잘 살펴보다의 뜻이며, ‘화(話)’는 이야기, 또는 대화라는 뜻이다. 즉 간화선은 ‘이야기, 또는 대화를 잘 살펴보는 선’이다. 어떤 이야기고 대화인가? 뛰어난 조사스님들이 설법한 이야기거나 주고받은 대화이다. 결국 간화선은 조사스님들의 설법이야기나 주고받은 대화들을 잘 기억하였다가 수시로 사유하는 수행이다.”
“깨달음으로 이끈 설법이야기나 대화들은 곧바로 소문이 났고, 이 이야기들은 기억하기 적당한 형태의 길이로 정리되어 전파되었다. 그냥 시중의 잡다한 이야기나 대화가 아니라 깨달음으로 이끄는 조사들의 이야기이다. 이런 이야기를 기억해두었다가 수시로 떠올려서 음미하고 성찰하는 것이다.”
현응스님은 화두를 ‘이야기 혹은 대화’라고 이해하고 간화선을 ‘그 대화를 잘 기억했다가 수시로 떠올려서 사유하고, 음미하며, 성찰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현응스님은 여기서 ‘화두’의 원리에 대한 몰이해를 드러내며 ‘간화선’을 오해하고 있다.
화두를 ‘사유하고 음미하며 성찰하면’ 그 화두는 즉시 사구(死句)가 된다. 명안종사의 지남(指南) 아래에서 활구(活句) 화두를 들고 실참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흔히 수행 상에서 병통으로 간주하는 ‘사구 수행’을 ‘바른 간화선’인양 오해하기 쉽다.
원오극근 선사는 “활구 아래서 깨치면 영겁토록 잊지 않고, 사구 아래서 알음알이에 그치면 자기마저도 구제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만약 화두를 실제로 자기 문제로 ‘의심화’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활구가 되지 못하고 단순하게 지나가 버리는 공허한 일화에 지나지 않는다.
더군다나 화두를 ‘조사스님들의 설법이야기’로 보는 것은 간화선에 대한 무지(無知)를 여실히 보여주는 실언이다. 조사스님들은 한결같이 ‘설법은 독이다.[說法砒霜]’고 경책하였다. 화두는 설법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불법에 대한 모든 종류의 설명을 차단하는 것이다. 화두가 설법이 되면 곧바로 독으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화두는 설법의 모든 논리를 금강권(金剛圈) 속에 가두어 알음알이의 명근(命根)을 끊는 장치이다.
근본실상은 본래 환히 드러나 있지만, 보통 사람들은 무명업식에 가로막혀 이를 보지 못하고 있다. 선지식은 근본에 대한 간절한 의심만이 무명업식의 벽을 타파할 수 있다는 원리를 잘 알기 때문에, 믿고 들어온 학인에게 간화장치를 시설하여 돈오견성의 기회를 제공한다.
당대(唐代)의 조사선은 명안종사가 제자를 지도하는데 있어 주로 지사문의(指事問義)와 기봉방할(機鋒棒喝)의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과제와 내용은 스승과 제자가 이심전심으로 정법의 안목을 체득케 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답들이 어록으로 기록되고 전승되어, 송대(宋代)에 이르러 본칙공안(本則公案)으로 완성되었다.
간화선은 이런 본칙공안 중 하나를 결택하여 철두철미하게 의심되어진 화두를 들게 함으로써 돈오하게 하는 수행법이다. 즉, 종사스님들이 법을 거량하거나 선문답을 통해 깨닫게 한 판례를 본칙공안이라 하고, 이를 통해 의심이 돈발(頓發)한 것을 화두라고 한다.
그러므로 선지식께서 믿음을 낸 이에게 화두를 들게 하는 것, 즉 참의심을 불러일으켜 깨닫도록 한 것이 간화선인 것이다.
간화선은 조사선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지만, 두 수행법 모두 그 근본 원리는 동일하다. 즉 수행자는 의심에 걸려야 하고, 그것이 점점 커져서 온몸에 꽉 차면, 시절인연 따라 타파되면서 돈오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선지식이 공안을 통해 초심자에게 화두를 걸어주고 결국 타성일편 된 의단이 타파되도록 이끈다는 점에서, 간화선 수행이 현실 속에서 공부하려는 이들에게 잘 맞는다고 할 수 있다.
객관적으로 전해오던 본칙공안이 학인의 내면에서 의심을 일으켜 활구 화두가 되면, 혼침과 산란 및 온갖 역순경계(逆順境界)를 물리치고 오로지 본래면목을 밝히는 데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런 점에서 간화선은 두 가지의 요건을 필요로 한다. 첫째, 당대의 조사선에서 형성된 법거량이나 선문답이 공안으로 전제되어야 한다. 둘째, 화두가 수행 당사자에게 ‘들려고 하지 않아도 들려지고, 내려놓으려 해도 내려놓을 수 없는’ 활구 의심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간화선은 학인으로 하여금 화두에 집중케 함으로써, 온갖 역순경계에 끄달리지 않고 시절인연 따라 본래면목을 밝힐 수 있도록 장치된 최상승 수행법이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과정을 학인이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명안종사의 지남과 호법 속에서 집중적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8. 유상(有相)의 입장은 전도몽상이다
현응스님은 이후에도 계속 “깨달음이란 ‘마음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연기와 공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다”는 확신 하에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그러므로 이 기본전제가 바로잡히지 않는 한, 뒤에 이어지는 내용은 오류를 벗어나기 힘들다.
‘상(相)을 여의지 못한 입장’에 있는 사람은 ‘돈오를 체험해야 비로소 체득되는 상(相)을 여읜 보살승 이상의 입장, 즉 법안(法眼)과 불안(佛眼)의 안목’을 하나의 신비주의나 판타지로 치부해버릴 것이다.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은 대학생 이상의 수준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가령 ‘무생법인(無生法忍)’의 진리는 불법의 근간으로 생사일대사를 해결했을 때 체득되는 것인데, 현응스님은 ‘이해하는 깨달음’의 입장에서 생사조차 실재성이 없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그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는 “스스로의 괴로움을 없애버리고 모든 중생들의 괴로움도 없애버린 경우를 보지도 못했고, 그런 깨달음을 이룬 사람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고 하며 끝내 유상(有相)의 입장과 무상(無相)의 입장을 혼동하며 범주오류를 되풀이하는 것이다.
유상의 입장에 머물고 있으면, ‘괴로움을 없애고 깨달음을 이루어야 한다’고 믿게 된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금강경》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얻을 수 있는 법이 조금도 없음[無有少法可得]을 일러 무상정등각이라 한다.”는 가르침을 알아들을 수가 없다. 또한 이런 사람을 임제스님은 이렇게 경책하였다.
“도 닦는 이들이여! 참 부처와 참된 법은 형상이 없는데, 그대들은 다만 허깨비 위에서 모양을 짓고 있구나. 설사 구하여 얻는다 하더라도 모두가 들여우(野狐)요, 도깨비일 뿐 참 부처는 아니니, 곧 외도(外道)의 견해이다.”
돈오를 확실히 체험하면 단박에 본래 괴로움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제거해야 할 미혹은 물론 이루어야 할 깨달음마저도 없다는 실상이 밝혀진다. 부처님께서도 《금강경》에서 “나는 온갖 중생들 모두를 무여열반에 들어 해탈하게 하느니라. 이와 같이 한량없고 수가 없고 끝이 없는 중생을 해탈시키지만, 실은 한 중생도 해탈을 얻게 하였다는 생각이 없느니라.”고 하셨다. 이것을 대주혜해 선사는 “돈오란 돈제망념(頓除妄念)이요 오무소득(悟無所得)이다.”고 하였다.
또한 무상의 입장을 모르고 유상의 입장만 고집하고 있는 현응스님은 현대인들을 위한 수행법에 대해 이렇게 주장한다. “깨달음을 잘 얻기 위해(잘 이해하기 위해) 설법과 질의응답, 토론, 경전과 어록 열람, 불교를 풍부하게 할 다양한 독서 등이 현대적인 수행방법이기도 하다.”
본인이야 자신의 신념에 따라 그렇게 해도 상관없지만, 우려스러운 일은 한국불교의 공식수행법인 간화선을 경시하는 풍조를 조장하지나 않을까 하는 점이다. 상대적인 ‘이법’의 차원에서 아무리 설법과 질의응답, 토론, 경전과 어록 열람, 다양한 독서를 하더라도 모두 꿈속의 일일 뿐이다. 꿈속에서 삼아승지겁을 갈고 닦더라도 단박에 꿈을 깨는 것만 못하다. 그래서 부처님과 조사들이 ‘눈 밝음’ 즉 ‘안목’을 그토록 중시했던 것이다.
간화장치만 정확하게 시설한다면, 유상의 전도몽상을 깨게 하는 가르침으로 간화선만큼 효과적인 수행법은 없다. 간화선은 가장 정확하고, 빠르며, 쉽고, 현대적인 수행법이다.
9. 조사스님들의 경책
현응스님의 주장이 얼마나 조계종지에서 벗어나 있는지를 불조의 육성을 통해 확인해보자. 본인의 안목이 어두우면, 조사스님들이 분명히 밝혀놓은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불조의 말씀을 부인한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소행이며 정법을 거역하는 잘못인지는 명백한 일이다.
현응스님 :
“만일 깨달음을 ‘올바른 이해’라고 한다면 그러한 깨달음을 얻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깨달음은 이해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설법, 토론, 대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불조의 가르침 :
“마치 사람이 남의 보물을 헤아리면서 자기에게는 반푼의 돈도 없는 것처럼, 법을 수행하지 않고 많이 듣고 이해하기만 하는 것 역시 이와 같다. - 《화엄경》”
“사량분별이 도를 가로막는 것이 분명함을 참으로 알아야 한다. - 《대혜보각선사서》”
“어떤 부류의 눈먼 중들은 교승(敎乘) 속에서 뜻으로 헤아리고 따져서 말뜻을 따라 견해를 이루어서는, 마치 똥덩어리를 입속에 넣었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토해내듯이 한다. - 《임제록》”
“요즈음의 불법은 애처롭게도 남의 스승 노릇하는 자가 먼저 기특하고 현묘한 것을 가슴에 쌓아놓고서 차례차례 서로 따라서 이어받아 입에서 귀로 전해주는 것으로 종지를 삼는다. 이러한 무리는 삿된 독이 마음에 들어와 있으나, 치료할 수도 없다. - 《대혜보각선사법어》”
“향엄은 백장의 회상에서 총명하고 영리하였으나, 선(禪)에 참(參)하지는 못했다. 백장이 죽자 위산을 찾아갔는데, 위산이 물었다.
‘그대는 백장 선사(先師)의 문하에서 하나를 물으면 열을 답하고 열을 물으면 백을 답한다고 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대가 총명하고 영리하여 뜻으로 이해하고 생각으로 알아차린 것이니, 곧 생사를 반복하는 뿌리가 될 뿐이다. 부모가 그대를 아직 낳지 않았을 때를 한마디 말해 보라.’
항엄은 위산의 질문을 받자 꽉 막혔다. 자기 방으로 돌아와 늘 보던 책들을 처음부터 훑어보았지만, 대답할 구절을 찾을 수 없었다. ‘그림의 떡으로는 굶주림을 채울 수 없구나.’ 하고 책들을 모두 태워버렸다. - 《오등회원》”
“듣지 못하였는가. 강주인 양수스님이 마곡스님을 뵙고 깨달은 뒤 이렇게 말한 것을. ‘스님을 찾아와 뵙지 않았더라면 일생을 12부 경론에 속아서 지낼뻔 하였습니다.’ 양수스님은 돌아와 대중에게 말하기를, ‘여러분이 아는 것을 나는 모조리 알지만, 내가 아는 것은 여러분이 모르리라.’ 하였다. - 《원오심요》”
“만약 피차가 깨닫지 못하고 마음 밖에서 깨달음을 취한다면, 전해줄 수 있는 현묘하고 기특한 종지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곧 나는 알지만 너는 알지 못한다는 경박한 생각을 내어서 아견(我見)을 키우게 될 것이니, 이들이 여래께서 말씀하신 불쌍한 자들이다. - 《대혜보각선사법어》”
“세간의 법을 배우는 것은 분명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지만, 출세간의 법을 배우는 것은 도리어 전혀 이해할 수 없어야 비로소 다가갈 자격이 있다. - 《대혜보각선사법어》”
“그대들이 진실하게 공부하려고 한다면, 다만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해야 한다. 알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곳에서 문득 이 한 생각이 부서지게 되면, 부처님도 그대들을 어찌하지 못할 것이다. - 《대혜보각선사보설》”
“이 일에는 사람의 정식(情識)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전해줄 수가 없으니, 모름지기 스스로 깨달아야만 비로소 나아갈 곳이 있다. 만약 다른 사람의 말을 따라서 판단한다면 영원히 쉴 날이 없을 것이다. - 《대혜보각선사서》”
현응스님 :
“이해하는 정도의 깨달음을 가지고 과연 생사문제를 해결할 수 있나? 괴로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나?”
“연기론을 잘 이해하면 생과 사를 보는 관점이 달라진다. 어떤 것을 생이라고 보고, 어떤 것을 사라고 보느냐를 연기의 관점으로 비추어 보면 우리가 통념적으로 생각하는 생과 사는 그 실재성이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대혜스님 말씀 :
“꼭 생사와 맞서 싸우려고 한다면 반드시 이 무명칠통(無明漆桶)을 부수어야 한다. - 《대혜보각선사서》”
“일대장교(一大藏敎)를 남김없이 알고 모조리 이해했다 하여도, 섣달 그믐날 죽음이 찾아올 때에는 하나도 쓸모가 없다. - 《대혜보각선사법어》”
“종횡으로 막힘없이 말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으며, 마음을 목석같이 하더라도 소용이 없고, 모름지기 자기의 생사심이 부서져야 한다. - 《대혜보각선사서》”
“마치 사람이 물을 마셔서 그 차고 따듯함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다. 다만 직접 증험하고 직접 깨달아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다. - 《대혜보각선사보설》”
“이 일은 총명하고 영리함에 좌우되지도 않고 또한 둔하고 배운 것 없음에 좌우되지도 않는다. 진실을 말하자면, 다만 단번에 확 깨닫는 것을 표준으로 삼을 뿐이다. - 《대혜보각선사법어》”
“모름지기 스스로 믿고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말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믿고 의지할 것이 못된다. 스스로 믿어서 깨달음에 이르러 말할 수도 없고 형용할 수도 없는 것은 도리어 괜찮지만, 오직 두려운 것은 말할 수 있는 듯하고 형용할 수도 있는 듯하면서도 도리어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이런 사람을 가리켜 말하시기를 ‘증상만인’이라 하고, 또 ‘반야를 비방하는 사람’이라고도 하고, 또 ‘크게 망령되게 말하는 사람’이라고도 하고, 또 ‘부처의 지혜를 끊는 사람’이라고도 하였으니, 이런 사람은 일천 부처님이 세상에 나와도 참회할 수 없다. - 《대혜보각선사서》”
현응스님 :
“스스로의 괴로움을 없애버리고 모든 중생들의 괴로움도 없애버린 경우를 보지도 못했고, 그런 깨달음을 이룬 사람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대혜스님 말씀 :
“아직 증험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스스로도 믿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남에게 이와 같은 경계가 있음도 믿지 못한다. - 《대혜보각선사서》”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얻은 곳은 집어내어서 남에게 보여줄 수 없다. 오로지 직접 깨닫고 직접 얻어야 조금이라도 눈앞에 드러내어 서로 곧장 말없이 통할 것이다. - 《대혜보각선사서》”
현응스님 :
“현재 한국불교에서는 대개 묵시적으로 깨달음이란 ‘마음을 확실히 깨닫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렇게 정의하는 깨달음은 내용이 추상적이며 구체적인 것은 아니다. 마음을 깨닫는다는 말은 부정확하다. 마음을 깨닫는다 할 때의 그 마음이 무엇인지 명확히 밝히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 깨달음이란 것을 이렇게 모호하게 설정해서는 이를 얻기 위한 노력의 방법도 불분명하고, 깨달음의 성취 또한 어느 수준의 어떤 것을 말하는지 제대로 알 수 없다.”
조사스님들의 말씀 :
“나는 홍인화상의 회상에서 한 번 듣자 말끝에 크게 깨닫고 진여본성을 단박에 보았다. (我於忍和尙處 一聞言下大悟 頓見眞如本性 ? 《육조단경》)”
“자성의 마음자리를 지혜로서 관조하여 안팎이 밝게 뚫리면 자기 본심을 안다. (自性心地 以智慧觀照 內外明徹 識自本心 ? 《육조단경》)”
“깨달음은 단지 마음에서 찾을 뿐 어찌 애써 밖으로 현묘함을 구하겠느냐? (菩提只向心覓 何勞向外求玄 ? 《육조단경》)”
“너희들 스스로의 마음이 부처이니, 다시 여우처럼 의심하지 말라. (汝等自心是佛 更莫狐疑 ? 《육조단경》)”
“너희들 모두는 각자 자기 마음에 통달하고 내 말을 기억하지 말라. (汝等諸人 各達自心 莫記吾語 ? 《마조록》)”
“모든 부처님과 일체 중생은 한마음일 뿐, 다시 다른 법은 없다. - 諸佛與一切衆生 唯是一心 更無別法 ? 《전심법요》)”
“단지 한마음을 깨달으면 다시 조금이라도 얻을 수 있는 법이 없으니, 이야말로 참된 부처다. (但悟一心 更無少法可得 此卽眞佛 - 《전심법요》)”
“어떤 것이 법인가? 법이란 마음이라는 법이다. 마음은 모양이 없어서 시방세계를 관통하여 눈앞에 드러나 작용한다. 사람들은 믿음이 부족하여 이름과 글귀로써 인식하려 하고 문자를 향해 구하며 뜻으로 불법을 헤아리니 하늘과 땅만큼 어긋나는 것이다. (云何是法 法者是心法 心法無形 通貫十方 目前現用 人信不及 便乃認名認句 向文字中求 意度佛法 天地懸隔 ? 《임제록》)”
“도는 마음을 깨닫는 것이지,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道由心悟 不在言傳 ? 《대혜보각선사법어》)”
이외에도 마음을 밝혀놓은 말씀은 한량없이 많으나, 여기서 줄인다. 이렇게 불법이란 곧 ‘마음을 깨닫는 것’이라고 역대조사들께서 고구정녕하게 밝혀놓았음에도, 현응스님이 ‘추상적이니, 모호하니, 불분명하니’ 하고 말하는 것은 과연 수행을 해보고 하는 말인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마음이란 실참실수를 통해 깨닫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본인의 수행이 모자라 깨닫지 못했다고 해서 불조께서 말씀하신 ‘마음을 깨닫는 일’까지 부정해서야 되겠는가! 봉사가 자기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한다고 해서, 태양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노릇이다.
10. 알음알이
현응스님은 첫 번째 발제문 〈그 이후〉에 대한 여러 반론에 대해 〈답변〉을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 역시 중요한 오류를 반복하고 있음을 또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현응스님은 글의 취지가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 오랜 선정수행에만 몰두하고 있는 한국불교의 일부 풍조를 비판하는 것이었다’고 해명하면서, ‘선정수행’과 ‘닦아 증득하는 것[修證]’을 배격하고 있다.
그 비판은 한국불교의 현실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한편으로 일리 있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정수행과 수증을 싸잡아 배격한 것은 무리한 주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기 때문이다. 현응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돈오’와 ‘견성’을 강조하면서 반야지로 ‘곧바로 아는 것’을 강조한 가르침이 조계선풍이며, 남종선이요, 조사선인 것이다. 이런 가풍에서는 ‘선정수행’과 ‘닦아 증득함’은 자리 잡을 곳이 없다.”
“혜능 스님은 『육조단경』 곳곳에서 ‘닦아 증득함(修證)’과 선정수행을 배격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알음알이에 해당 한다. 조사스님들이 본분의 입장에서 흔히 말씀하시는, ‘실상은 환히 드러나 있어서 찾고 닦으려 할수록 어긋난다’ 혹은 ‘입 열면 벌써 틀리고, 생각이 움직이면 바로 어긋난다[開口卽錯 動念卽乖]’는 등의 법문을 머리로 이해해서 ‘수증’을 배격해버리면, 실참수행을 통해 깨달을 기회마저 놓치게 되는 것이다.
만일 이런 주장을 펼치면 본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깨달을 기회마저도 방해하는 것이니 참으로 조심해야 한다.
《대승기신론》의 용어를 빌려와서 설명하자면, 불각(不覺)의 상태에 있는 사람이 본각(本覺)을 주장한다면, 이것은 알음알이의 선병(禪病)으로서 본각과 시각(始覺)을 혼동한 잘못을 범한 것이다. 이러한 ‘본시(本始) 혼동의 오류’는 흔히 선(禪)을 학문적으로 접근하거나 실참 없이 머리로 해결하려는 이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선병이다. 그런 알음알이로는 업장을 녹일 수가 없어서, 시각을 요달(了達)할 수가 없다.
불각은 수행을 통해 시각으로 나아가야지, 본각을 주장하면서 수행을 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윤회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그때의 진정한 수행이란 ‘무수지수(無修之修)’를 일컫는 것이 된다.
명안종사들이 깨달은 분상에서 하시는 고준한 법문에서 수증과 선정수행에 대한 집착을 경책한 것을 머리로만 이해해서, 불각의 상태에 있는 사람이 닦지도 않고 증득하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말로써 배격해버린다면, 그는 무명업식의 고해로부터 해탈할 기약이 없는 것이다.
알음알이로는 업장을 녹일 수가 없으며,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질 수도 없다. 오히려 알음알이는 종종 망상이 되어 공부를 방해할 때가 많다. 부처님께서 방편으로 설해놓으신 것을 알음알이로 이해하면 공부가 거기서 멈추고 더 나아가지 않기 때문에, 알음알이는 오히려 깨달음을 방해하기만 하는 장애[法相]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사들께서도 비록 모든 사람이 본래부처이지만 진리를 등지고 전도몽상에 빠져 고통 받고 있으므로, 실질적인 참선수행을 통하여 돈오의 기회를 가지도록 방편을 시설했던 것이다. 그 방편의 핵심은 분별망상의 알음알이 앞에 은산철벽을 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근본에 대한 의심의 힘으로 그 조사관을 뚫도록 지도했던 것이다. 그 전통이 조사선, 묵조선, 간화선으로 오늘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데, 특히 대중화가 가능한 간화선 수행법의 원형이 조계종단을 통해 면면히 전해오는 것은 한국의 자랑이요 인류를 위해서도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라고 하겠다.
11. 깨달음도 진화한다는 주장에 대해
현응스님은 자신이 범주오류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같은 실수를 되풀이해서 저지르고 있다. 현응스님은 〈답변〉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나는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부처님 그 분의 깨달음으로 완성되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본다. 깨달음이란 부처님 이후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즉 깨달음은 단일한 것도 아니며, 고정된 것도 아니며, 완성된 것이 아닌 것이다.”
“깨달음은 스케일, 부피와 무게, 깊이, 색깔과 디자인 면에서 점점 더 커지고 넓어지고, 깊어지고, 다양해지고, 멋있어져야 한다는 게 나의 견해이다. 그 이유는 시대와 중생계와 자연계가 점점 변화되고 있기 때문에 그에 대응하는 가르침의 폭과 내용 또한 덧붙여지고 다양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현응스님은 ‘새로운 시대의 불교를 개척하는 진화적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깨달음은 변화해가는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것 또한 무리한 주장이다. 불교가 시대에 따라 변화해가야 하는 것은 지당한 말씀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깨달음도 시대에 따라 진화해가야 한다는 것은 다시 한 번 치명적인 범주오류를 범한 것이다.
‘깨달음’과 ‘시대적인 진화’는 서로 범주가 다르다. 전자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이며 전후제단(前後際斷)이자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중도불이법인데 비해, 후자는 시종(始終)이 인과에 따라 엄연히 분명하고 전후가 면면히 상속되며 생멸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상대이법의 세계인 것이다.
세간은 연기법에 의해 엄밀하게 돌아가지만, 출세간은 거기에 물들지 않고 여여부동(如如不動)하다. 그래서 양변을 다 소화하고 무애자재 하여, ‘하되 한 바가 없는’ 중도로 회통하는 것이다.
현응스님은 그냥 ‘불교가 시대에 따라 발전해야 한다’고 말하면 될 것을 괜히 ‘깨달음도 시대에 따라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해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다.
논자가 계속해서 범주오류를 범하는 이유를 이렇게 추측해본다. 현응스님은 처음의 발제문인 〈그 이후〉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깨달음과 역사>에서 ‘깨달음’과 ‘역사’가 서로 연계되어야 하지만 다른 차원의 영역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깨달음’은 연기를 잘 이해한다는 영역이고, ‘역사’는 방향과 내용을 선택하여 구체적으로 행위 하는 것을 말한다.
좀 전에 언급한 ‘윤리’ ‘정의’ ‘평화’ ‘공정’ ‘평화’등은 <깨달음과 역사>의 관점에서 말한다면 ‘역사’의 영역이다. 즉 불교에서 ‘지혜’와 대비되어 말하는 ‘자비’의 영역이다. 하지만 ‘역사’ ‘자비’의 영역이 깨달음과 다른 차원의 영역이라 하여, 깨달음과 역사라는 이 둘을 분리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다른 차원의 두 영역을 하나의 삶에 결합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예컨대 ‘보디(깨달음)’만 있고 ‘사트바(역사)’의 영역이 없으면 소승적 아라한일 뿐이다. 또한 보디가 없는 역사행은 범부중생의 삶일 뿐이다.”
현응스님은 ‘깨달음’과 ‘역사’가 다른 차원의 영역에 속한다는 점은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불법은 이 둘이 ‘중도불이’로 원융무애하게 통합되는 것도 들어서 알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실제로 깨달아야 터득되는 ‘중도불이’를 머리로 이해해서 서로 다른 차원인 깨달음과 역사를 통합하려고 무리하게 시도하다보니까 ‘깨달음은 진화한다’는 전혀 엉뚱한 주장을 하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말을 배워서, 색이 진화하니까 공도 진화한다고 주장하는 격이다. 색과 공은 ‘부즉불이(不卽不離)’의 중도인데, 이것을 ‘불이’만 고려하고 ‘부즉’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색즉시공의 참뜻에 무지한 것이다. 불생불멸의 공은 생멸하는 색을 포용하지만 물들지 않는다.
실참을 통해 생사일대사를 해결하고 불법에 대한 안목을 열지 않고서는, ‘중도불이’는 영원히 불가사의로 다가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마음을 조복 받을 수 없기 때문에, 평생 번뇌 망상에 끄달리다가 섣달 그믐날 밤에 반드시 큰 대가를 치를 것이다. 또한 장님이 다른 사람들을 끌고 절벽으로 다가가는 것처럼, 본인은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큰 해를 미치는 것이어서 조심해서 삼가야 한다.
12. 조계종지의 현대적 구현
현응스님이 한국불교의 중흥이라는 큰 원력 하에 고뇌하고 사색해온 결과를 세미나를 통해 발표한 것은 대단히 의미가 있는 일이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시대에 맞추어 한국불교를 현대화하자는 총론적인 입장에 대해서는 소납도 흔쾌히 동의하는 바이다.
그러나 한국불교 중흥의 방법론이라는 각론에 있어서 소납의 생각은 다르다. 현응스님은 한국불교가 오랜 역사와 전통을 모두 담아내기 위해서 협소한 ‘조계종’의 명칭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소납은 오히려 본연의 조계종지에 보다 더 충실하여 ‘돈교법문’을 대중화, 세계화하는 것이야말로 한국불교의 중흥과 세계인류를 위한 ‘전법도생의 보살도’를 실현하는 지름길이라고 믿는 바이다.
불조의 정법에 따라 깨달음을 얻는 가장 효율적이고, 쉬우며, 빠르고, 올바른 수행법은 한국불교 최고의 자산이자 조계종 공식수행법인 ‘간화선’이다.
간화선야말로 인류가 발견한 전법도생의 최고의 방법론이라는 것이 선조스님들의 고구정녕한 당부요 소중한 유훈이다. 따라서 ‘한국불교의 중흥과 현대화’의 지름길은 간화선을 현대에 맞게 훌륭히 되살려내는 데 있다 하겠다.
후손이 못나서 선조의 훌륭한 가르침인 간화선 수행법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가 분발하여 간화선 본연의 가치를 회복해야 하는 것이 바른 길이다. 이를 위해 간화선 수행 실패자들은 말을 삼가고 더 이상 구업을 지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한국불교 중흥을 위한 올바른 길은 간화선의 대중화와 세계화다. 이를 위해 수좌스님들을 중심으로 학자들과 사부대중들이 합심하여 실질적인 간화선 부흥을 이룩하도록 전력투구해야 할 것이다.
올바른 간화장치에 의해 조계종단 구성원 모두가 선체험을 통해 지혜를 눈뜬다면, 이 나라가 얼마나 발전하겠는가! 그렇게 되면 국내는 물론이고, 우리가 나가서 포교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전 세계에서 한국불교를 배우기 위해 몰려들 것이다.
이미 가지고 있는 보물을 바르게 되살려내야지, 자가보장(自家寶藏)을 버리고 어설프게 이것저것 묶어내려고 하는 것은 아무런 실속이 없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정체성을 상실하는 어리석은 짓이다. 현응스님은 조계종의 명칭을 버리고 큰 그릇을 만들자는데,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한국불교의 정체성으로 삼자는 것인가? 현응스님은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해외포교에 나서자는 것인가?
인간정신이 도달한 최첨단의 열매인 ‘선불교’를 버리고 잡동사니 교단을 만들어서 과연 정보 홍수의 시대에 한국불교가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법안을 여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론인 간화선법 없이 한국불교가 세계정신계를 리드할 수 있겠는가?
구미에서 이미 상당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 남방불교, 티베트불교, 일본선불교를 능가하는 불법의 정수는 간화선밖에 없지 않은가? 인류 최고의 정신문화유산인 간화선법을 가지고도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 자신과 현실상황을 반성해야지, 괜히 간화선법 자체를 문제 삼아 바꾸자고 하는 것은 삿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언제나 그렇듯 법은 아무런 문제가 없고, 인간이 문제인 것이다. 이제는 정법당간을 바로 세워야 할 때다.
뿌리를 흔들 것이 아니라, 뿌리를 튼튼하게 살려내야지 아름다운 꽃과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은 정한 이치다. 불조의 적손으로 정법을 보존해온 우리 조계종단이 근본으로 돌아가 공식 수행법인 간화선을 바르게 부흥시키는 것이 한국불교 중흥을 위한 올바른 지향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조계종지의 현대적 구현은 종지 종명을 바꾸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근본을 바로 세우는 데 있다. 조계종의 근본은 인류 최고의 정신적 보물인 ‘법안과 불안의 안목’이다. 불법에 대한 안목을 여는 가장 효과적인 수행법은 한국불교가 보존해온 간화선이다. 간화선의 부흥에 한국불교의 미래가 달려있다.
한국불교의 사활은 간화선 수행에 실패한 낙오자들의 퇴타하자는 주장에 따를 것인가, 아니면 간화선 수행의 정법당간을 올곧게 세우는 길에 매진할 것인가에 달려있다. 과거로 후퇴할 것인가, 미래로 나아갈 것인가? 오늘 우리의 지혜로운 선택과 용기 있는 실천에 달렸다. 우리 모두가 분발할 때다.
[불교중심 불교닷컴, 기사제보 cetana@gmail.com]
돈으로 안되는것없다 돈이없으면 죽지만 돈은 생명도 연장시킨다
돈앞에선 언론도 무릎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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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님이 코끼리 만지듯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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