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단의 현황과 미래를 살펴본다
김영국 연경불교정책연구소장
대한불교조계종은 직지인심견성성불전법도생을 종지로 하는 종단이다. 또 도의국사의 가지산문을 기원으로 하여 조계종이라 칭하니 선불교를 근본으로 하는 종단이다. 조계종의 종립선원이 문경에 있는 봉암사이다. 봉암사에 가면 금색전이라는 전각이 있다. 이 전각의 뒤편에는 또 대웅전이라는 현판이 있다. 왜 대웅전을 금색전이라고 했을까? 사찰의 불상은 대부분 금색인데 대웅전, 대적광전이라는 이름을 놔두고 금색전이라고 한 이유가 무엇일까.. 금색을 칠한 불상에 현혹되지 말라는 의미인가...? 형상에 얽매이지 말라는 화두인가...? 금색 불상에 목을 매는 오늘의 불교교단에 대한 경책인가...? 조계종을 상징하는 종립선원 봉암사에 있는 금색전을 보면 금색과 권력을 쫓는 세속화된 대한불교조계종의 현실을 보는 것 같다.
오늘날의 조계종단의 현실을 상징하는 사건이 있다. 2013년 광주지법은 50여년을 참선 수행한 70대 노스님을 성추행협의로 징역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였다. 그리고 성폭력치료 강의 수강 40시간 대신 참선을 하라고 판결을 하였다. 40대후반 판사가 50년을 수행한 선승에게 참선수행을 하라고 판결한 것이다. 1972년 통합종단 출범이후 조계종 창종 50년이 지났는데 직지인심견성성불전법도생을 종지로 이어 온 조계종단에 대하여 지금 국민들이 판결을 내린다면 70대 노스님에게 판사가 내린 판결처럼 더욱 열심히 참선수행을 하라는 판결을 내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1950년대 정화운동에 앞장섰던 월탄스님은 얼마 전 세미나에서 '정화정신 되살려 승가위상 회복하자'고 주장을 하셨다. 당시 비구측이 불법에는 대처가 없다면서 내세운 비구승 8대 원칙은 이랬다. 첫째, 독신일 것. 둘째, 삭발염의할 것. 셋째, 비불구자. 넷째, 백치가 아닌 자. 다섯째, 살도음망을 하지 않는 자.(4바라이를 범하지 않은 자) 여섯째, 불주육초.(술과 담배와 고기를 먹지 않는 자) 일곱째, 승려 3인 이상과 단체생활을 하는 자. 여덟째, 25세 이상인 자.(비구계를 받고 3년을 넘긴 자)이다. 그 원칙에 의해 대처승을 내쫓고 비구승단인 조계종단을 세웠는데 과연 지금 이 8대원칙이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 우리 조계종단의 현황이다.
작년에 총무원장 선거를 앞두고 2013년 5월 9일 사부대중연대회의가 발표한 총무원장 자격요건은 △한국불교를 쇄신할 개혁을 추구하는 자 △비구 선언을 한 자 △도박, 여성편력, 폭력, 공금횡령 등 범계행위가 없는 자 △권승 이력이 없는 자 △일정기간 동안 선수행한 자 △승적이 확실한 자 △특정문중에 편파적이지 않는 자 △일정 기간 동안 자비희사를 한 자 △비구니 스님도 총무원장에 출마할 수 있다는 등 모두 9개항이다. 대한불교조계종을 상징하고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총무원장 스님을 선출하는 선거에서 불교단체가 비구선언을 한 자, 도박, 여성편력, 폭력, 공금횡령등 범계행위가 없는 자 등등을 총무원장의 자격요건으로 발표하였다는 것은 대한불교조계종이 창종 50년 동안 불교수행자 집단으로서의 기본도 지키지 않고 살아왔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계행을 목숨보다 소중히 여겨야 하는 불교단체에서 이런 자격요건이 거론된다는 사실이 어처구니가 없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 조계종단의 황당한 현실이다.
살다보면 황당한 경우를 만나는 일이 종종 있다. 평생을 청빈하게 살아 온 사람이 알고 보니 거액의 비자금을 숨겨놓았다 던지, 오로지 수행만을 해 온 사람이 알고 보니 성희롱자였다 던지, 바르게 살라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해 준 사람이 알고 보니 도박중독자였다 던지, 탐욕을 멀리하라고 가르쳐 준 사람이 알고 보니 거액의 탈세를 하였다 던지, 사회지도층일수록 도덕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 알고 보니 병역기피자였다 던지, 또 정의의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부르짖었던 사람이 알고 보니 폭력배였다 던지.. 그런데 황당함을 넘어서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 이런 일이 우리 승가, 조계종단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고도 버젓이 나타나서 마음공부를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 할 말이 없어지는 것이 조계종단의 현황이다. 오죽하면 조계종 원로이신 고우스님께서 "우리끼리 있다면 현 승가를 정말 적나라하게 비판하고 싶다. 이대로 가다가는 한국불교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고 말씀하셨을까.
인도 다람살라에서 수행을 하고 계시는 청전스님은 도박·폭행 등 조계종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에 대해서 이렇게 말을 한다. 스님은 “적광 스님 폭행사건을 저지른 것은 인간이라 말할 수 없다. 비폭력·자비문중에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마음 같아서는 (조계종 총무원에) 쳐들어가 날려버리고 열사라도 되고 싶다”고 말했다. 스님은 “조계종 승려 도박사건은 유럽에 가서 알게 됐다”며 “쓰레기는 재활용되지만 인간 쓰레기는 재활용할 수 없다. 없애 버려야 한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그런 사람들 행복하냐? 그렇지도 않다. 그들은 불안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했다. "가진 것 넘치면 수행자는 타락” 스님은 승복 안의 옷깃이 헤진 부분을 내어 보이며 “6년쯤 입으니 이렇게 됐다. 주변에서 새 옷 좀 입으라는데 헌 것이 편하고 자유롭다. 편할 때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필요와 필수를 잘 알아야 한다. 필요한 만큼만 가져야 한다”며 “넘치면 수행자는 타락하기 마련이다”라고 했다. 청전스님이 진단한 조계종은 수행자라고 자처하는 이들이 넘치는 욕망으로 타락해 가고 있다는 것이다.
하긴 타락한 수행자의 모습이 오늘날의 조계종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명나라 말기 주굉스님이 편찬한 치문숭행록에는 노비구의 두타행이라는 이름 없는 노스님의 행적이 기록 되어 있다. 찬탄하노라, 두타행의 존멸에 법의 존망이 달렸다 하시니, 금구(金口, 부처님 입)로 베푸신 이 말씀이 아직도 귀에 남아 있는데 요즈음 승려들은 기름지게 먹고 멋진 옷 입으며 화려한 집에 살고, 사지를 편케하며 좋아하는 장식을 왕공처럼 하면서도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 말법시대에 법이 침몰하려 하니 실로 팔을 걷어부쳐야 하리라. 동서 두 나라의 비조이신 가섭이 이처럼 두타행을 했던 것은 어찌 후환을 미리 알아 자손에게 도모함을 남기신 것이 아니리오. 그대 조상의 수행을 따르라. 원컨대 참선하는 납자여, 말법이라 하여 자신을 포기하지 말기를 바라노라.
우리나라에서는 선종이 정통이다. 그런데 선종은 애초에 중국불교의 이단 종파였다. 기성불교에 대한 소수의 비판적 종파였던 것이다. 당나라 태종은 불교중흥의 절대적 후원자였으나 당시 불교계는 권력과 결탁한 과보로 혼탁하였다. 속고승전에 나오는 혜만선사는 좋은 토굴과 공양을 대접하겠다는 신도에게 "천하의 승려들이 없어질 때가 오면 그대의 공양을 받겠다'고 했다고 한다. '교단의 지나친 팽창과 출가자의 질적 저하는 점점 중대한 사회 문제가 되고 있었다'는 당시의 지적을 뒷받침하는 일화이다. 이런 교단의 혼탁때문에 당시 중국불교계에는 말법, 말세사상이 휩쓸었다. 그러나 선종은 이러한 말법시대를 오히려 새로운 시대의 시작으로 여겼다. 이처럼 혼란한 기존의 가치체계에 정면으로 도전한 선종은 결국 중국을 거쳐 대한민국에서 불교의 정통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타락한 불교를 비판하고 새롭게 정통으로 자리잡은 선종이 기존의 가치체계, 즉 낡은 것으로 전락한 것이 한국불교의 현실이다. 다시 말법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따라서 기존의 가치에 집착하여서는 이 말법시대를 극복하고 정통이 될 수가 없다. 일본 선종계의 석학인 야나기다 세이잔교수는 초기선종사에서 낡은 것에 집착하는 수구가 아니라 낡은 것을 타파하고 새로운 것을 세우는 파구입신(破舊立新)의 실천이 아니면 어찌 휘황찬란한 진리의 등불이 오겠는가라고 하였다. 우리 종단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난 행위를 지적하면 오히려 종단이 안정되었다고 하면서 뭐가 문제냐고 하고 기존의 낡은 욕망에 집착하는 행태는 결국 휘황찬란한 진리의 등불이 아닌 암흑의 시대, 즉 불교가 망하는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타락한 불교의 모습이 중국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허흥식교수의 고려불교사연구를 읽다 보면 오늘 우리 한국불교가 처한 상황과 시대만 다를 뿐 유사한 대목이 많아 한숨만 나온다. 이렇게 역사는 되풀이 되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일부학자들은 고려사가 조선시대에 쓰여졌기 때문에 유학자들에 의해 불교의 부정적인 측면만을 부풀렸을 수도 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부끄러운 역사가 존재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불교가 고려말의 부정부패로 인해 조선시대 오백년동안 치욕을 당한 역사를 ‘승자에 의해 기록된 왜곡된 사실’이라고 치부할 것이 아니라 다시는 그런 굴욕을 겪지 않도록 겸허하게 역사에서 배우는 자세도 필요한 것이 아닌가.
그래서 몇 대목을 소개한다. 고려 말 불교의 폐해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사례가 있다. 고려 제26대 충선왕은 몽고의 간섭을 받는 관제를 폐지하고 권신들의 토지를 몰수하는 등의 개혁정치를 시도하면서 ‘모든 불교계가 이익을 취하려는 소굴’이라고 잘라 말했다. 원나라 배척운동을 전개하고 불교에 호의를 가졌던 제31대 공민왕과 이색도 개혁정치를 구상하면서 불교계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켜 세속성을 줄이면서 본연의 불교로 회복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불교의 폐해에 대한 지적은 불교와 승려의 세속화에 원인이 있다. 고려후기에 승려는 세속화되고 사원을 통한 부의 축적에 눈을 돌리게 됨에 따라 사원을 장악하려는 주지쟁탈이 심하였다. 또 종파간에 사원을 둘러싼 분쟁이 심하여 하루 아침에도 사찰의 종파가 바뀌는 일도 많았다. 승려의 세속화는 몽고풍의 풍습이 유입되면서 가속화되었다. 부원세력(附元勢力)과 결탁한 승려의 호화스런 생활은 사서에서도 자주 지적되고 있다. 몽고 승려의 육식풍습과 문란한 성생활은 고려말기 승려들의 육식과 성추문을 가속화시키는데 일조를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승려들의 세속화는 예나 지금이나 일반 대중승려들과는 상관없이 높은 승직을 가진 이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고려중기까지는 우수한 인재가 과거를 급제한 후에 출가를 한 예가 있었으나 점차 자질이 없는 사람들이 증가하였다. 심지어는 승려의 직을 얻기 위해 승과시험을 보지 않고 국왕의 측근에게 뇌물을 써서 자리를 얻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몽고압제시기에는 전반적으로 승려의 자질은 하락하였으나 고위직 승려에게는 권한이 대폭 확대되었다. 국사에게 독립된 관청과 권한을 주어 승정을 총괄하게 하였다. 그러다 보니 높은 관직과 주지직을 얻기 위해 모든 승려가 국사의 문도가 되려고 경쟁을 하였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문도가 되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기반이 필요했고 따라서 사원을 이용한 경제적 생활기반의 확보에 골몰하는 일이 늘어났다. 경제적 생활기반을 확보한 고위직 승려들의 분쟁으로 고려말의 불교행정은 종파의 자주성보다 고급 승려간부직을 차지하기 위한 로비에 집중이 되었고, 이들은 정치세력과 결탁됨으로써 종파간의 싸움이 격화되었다. 고려말의 정치세력이 불안정함에 따라 불교계의 분쟁은 더욱 가속화되고, 축적된 수양과 사회에 대한 봉사와 민심의 깊은 곳에 기반을 두었던 종교로서의 도덕적 기능은 붕괴되었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 공민왕의 말을 돌아보고자 한다. 공민왕은 불교계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켜 세속성을 줄이면서 본연의 불교로 회복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 말이 그대로 21세기 한국불교에 던지는 화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조계종은 어떠한가. 여러 가지 볼썽사나운 일들이 있지만 자세한 것은 12월 24일 토론회에서 다루기로 하고 오늘은 한 두 가지 사례만 들어보고자 한다.
자승원장을 재임시킨 불교광장의 회장인 지홍스님은 지난 2013년 11월 27일 봉은사주지 인사가 총무원장 선거과정에서 매표행위에 따른 것이라고 폭로를 하였다. 지홍스님은 "선거에서 거래를 한 것 자체가 잘못한 것이고, 선거 이후 논공행상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이행하지 않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며 "총무원장이 책임을 져야할 사안"이라고 강조했다. 지홍스님은 "선거에서 봉은사를 약속한 것이라면 선거법 위반에 해당하기 때문에 고발조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봉은사 주지 인사와 관련해 지홍스님등 불교광장 소속 5명의 중앙종회의원이 낸 입장문의 내용은 충격적이다. 선거과정에서 주지직 거래라는 대형 추문이 있었음을 폭로했다. “불국사와 석굴암을 가지고 있는 종상스님에게 강남 봉은사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석굴암과 불국사를 가지고도 모자라 총무원장 선거과정에서 표를 줄 테니 봉은사를 달라 했다는 것입니다. 이때 봉은사는 표로 사고파는 뒷거래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작년 10월 치러진 총무원장선거에서 자승스님의 상대편에 섰던 스님들의 정치공세가 아니다. 당시 자승스님을 총무원장후보로 추대하고 당선시킨 스님들이 낸 입장문이다.
장주스님이 작년 7월 종단 고위급 승려들의 도박 의혹을 제기한 데 이어 ‘약속드립니다’라는 문건을 공개했는데, “1.종단 운영에 있어 인사문제는 장주스님과 합의해 처리한다. 2.부원장 제도를 신설한다. 3.선본사, 조계사, 보문사, 봉은사, 도선사를 합의해 처리한다”는 내용이었다. 충격적인 내용이었음에도 당시 장주스님의 주장을 정치공세라고 무시했는데 이번 것은 자기편에서 폭로한 사실이다. "봉은사 주지 추천권한을 종상스님에게 약속했고, 종상스님은 원학스님을 주지로 추천했다는 총무원장스님의 말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불교광장에 소속한 스님들이 증언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다. 선거법위반으로 고발조치하겠다더니 조사했다는 소식도 없고 문제를 제기한 스님은 모든 공직과 종회의원직을 사퇴하겠다고 해 놓고 여전히 종회의원이고 여전히 종단의 요직을 맡고 있다.
재임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4바라이죄의 하나인 거짓말로 만들어 버리고 자기를 당선시켜준 계파의 스님들이 부정매표선거라고 밝힌 것도 묵살한 자승원장 집행부는 2014년 10월 종회의원선거에서 3분의 2가 넘는 자파세력이 확보가 되자 안하무인의 권력으로 동국대 총장선거까지 개입하는 행패를 부리고 있다.
지난 12월 11일, 김희옥 동국대 총장과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스님들과의 만남이 있었다. 총무원장 자승 스님, 교육원장 현응 스님, 포교원장 지원 스님과 종회의장 성문 스님, 그리고 동국대 이사장 정련 스님과 이사 일면 스님이 자리를 함께 했다. 그리고 모임 직후 김희옥 총장은 차기 총장후보 사퇴서를 발표했다. 만남 후 후보 사퇴성명서 발표하기까지는 불과 몇 시간 되지 않는다. 당일 모임에서 얼마나 강도 높은 사퇴 압박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당일 모인 6명의 스님들 가운데 총장 선출권을 가진 동국대 이사는 정련 스님과 일면스님 두 분 뿐이며 나머지 스님은 선출권한이 없다. 그런데 이런 이들이 모여 김희옥총장후보를 사퇴시킨 것이다. 그들중 일부가 ‘이사회 내 스님총장에 대한 공감대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그런 공감대가 이루어졌다면 그냥 이사회에서 스님 총장을 선출하면 될일이지 뭐하러 가장 유력한 후보를 사퇴시켜야 하는가?
6명의 승려가 몰려가서 위력시위 하듯이 한명의 재가자 후보를 사퇴시켜 놓고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고 하니 권력에 눈이 멀으면 협박도 공감대로 보이는 모양이다. 이러한 무소불위의 권력을 남용하는 것에 대해 학생들과 교수협의회까지 비판을 하는 성명을 내고 또 다른 총장후보인 조의연교수까지 이에 항의하여 후보직을 사퇴하였는데 그래도 스님총장선출을 강행한다면 그 이면에 무슨 거래가 있었는지 의심이 안들 수가 없다. 부도덕한 종단권력이 종단운영을 파행으로 몰고 가는 것도 모자라 대학의 적법한 인선과정에마저 개입하여 종립 고등교육기관까지 흔들어대는 것이 오늘의 종단 현실인 것이다.
이런 문제를 제기하면 공업이라고 하는 스님이 있다. 도법스님이다. 공업(共業)을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자신도 책임을 면치 못한다는 아주 겸손한 견해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일수록 스스로가 공업의 원인일 수도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오로지 다른 이들이 문제를 만들었을 뿐, 나는 그 문제를 만들지는 않았지만 책임을 지겠다는 겸손을 가장한 뻔뻔함만이 보인다.
가장 깨끗하고 도덕적이며 공정해야 할 불교의 선거절차를 부정부패의 매표행위로 만들어 놓고 자신은 그와 상관이 없다는 식으로 문제제기를 한 후에 아무것도 해결이 되지도 않았는데도 뻔뻔스럽게 매표행위자와 권력을 나누어 가지는 것은 도대체 무슨 심성을 가지고 있기에 그러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게 한다.
종단의 문제에 관해 이야기를 하면 그래도 이전 집행부에 비교하면 그나마 낫지 않은가 하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용수보살은 중론 관사제품에서 ‘세상의 상식에 의하지 않고서 진리를 알 수 없다. 진리를 알지 못하면 깨달음에 도달할 수 없다.’고 했다. 지금 조계종단에서 벌어지고 있는 황당한 일들이 세상의 상식이라고 볼 수가 있는가? 세상의 상식에 기초하지 않는 행태들을 하면서 어떻게 진리에 도달하고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얼마 전에 선방의 스님들이 동안거에 들어갔다. 동안거 결제에 들어가면서 큰스님들이 법어를 발표했는데 그 내용은 결국 석 달 동안 열심히 수행을 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매년 여름과 겨울 석 달 동안 수행을 하는 스님들이 과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글자 그대로만 보면 안거(安居)는 겨울에는 추위를 피해 여름에는 더위를 피해 편안히 거처에 있으면서 수행을 하는 것이다. 더위와 추위를 피해 한 곳에 모여 석 달 동안 있는 것이 과연 진정한 수행인가? 진정한 수행은 추위를 추위로 생각하지 않고 더위를 더위로 생각하지 않으며 그 생사의 현장에 맞서는 것이 아닌가?!
러시아 추운 나라에서 온 푸쉬카료바 하원의원이 있다. 그 나라는 지금 영하 27도이고 한겨울에는 영하 62도까지 떨어진다고 한다. 그녀에게 그렇게 극한적인 추위에서 어떻게 사느냐고 묻자 "“극한적 조건이란 건 서방의 관점에서다. 우리에겐 지극히 정상적 조건이고 거기에 따라 평범하게 살아간다."고 답했다고 한다. 다시 "추운 곳에서 태어난 걸 원망한 적은 없느냐"고 묻자 "우리는 추위에 대해 불평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그런 사람은 한 번도 못 만나봤다. 도리어 축복이라고 받아들이고 기뻐한다고 했단다. 추위를 추위로 여기지 않고 그것을 오히려 정상적인 삶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오히려 "평상심이 깨달음"이라는 부처님의 진리를 실천하는 것이 아닌가. 석 달 동안 생사를 떠난 진리를 구하는 제방의 수좌스님들이 이번 동안거가 끝난 후 그동안의 자기 수행을 점검하면서 이런 의심을 가져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80년대 중반인가 승가고시가 실시된다고 하며 송광사스님의 부탁으로 승가고시 문제집을 만들기 위해 치문과 사집을 정독한 적이 있다. 사실 나는 그전에는 불교학부에서 경전만 공부를 했지 스님들이 배우는 강원교재에는 문외한이었다. 그런데 아르바이트 삼아 읽은 치문과 사집은 나에게 새로운 불교를 알게 해주었다. 과거 스님들의 고민과 생각,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현실적 괴리와 어떠한 어려움과 고통이 있더라도 수행을 멈추지 않겠다는 의지를 읽고 나는 깊은 감동에 빠졌었다. 그 덕분에 나는 아르바이트가 아닌 수행하는 마음으로 치문과 사집을 읽었고 승가고시 문제집을 잘 만들어서 송광사 스님에게 깊은 감사의 말씀까지 들었다.
오늘 조계종단에서 벌어지는 이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보면서 나는 소위 종단 고위층들이 출가 승려의 기본교재인 치문과 사집을 제대로 본 적이나 있는지 의심이 들었다. 치문의 경훈 첫머리에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부모와 육친을 버리고 세상을 떠나 머리 깎고 스승에게 계를 받았으면 세속의 욕망을 버리는 공부를 해야 하는데 어떻게 겨우 형식적인 수계만 받고 '나는 비구다' 하며 시주가 지극정성으로 가져다 주는 것을 먹고 쓰고 퍼질러 있으면서 '나는 마땅히 공양을 받을 만 하다'고 하고 먹고 나서는 머리를 모아 숙덕숙덕 인간의 잡된 말만 하는가" "아깝다. 일생을 헛되이 지내면 후회하여도 소용이 없다. 부처님 가르침에 일찌기 생각을 두지 못하여 깨달음의 세계에 다가갈 인연이 없구나 급기야 나이 먹고 법랍이 많아지면 든 것은 없고 마음만 높아져서 어진 벗 친하기를 즐겨하지 않고 오직 거만할 줄만 아나니 진리도 모르고 스스로 돌아볼 줄도 모른다." 백장선사의 제자이신 위산대원선사가 1천2백년 전에 하신 말씀이 어찌 이리 지금의 현실과 다르지 않을까.
누구든지 최선을 다했다고 이야기한다. 비록 깨달음을 얻지는 못했지만 이정도 했으면 최선을 다한 것으로 인정을 해야 하지 않느냐고 이야기한다. 그런 분들에게 조주록에 나오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어떤 수행자가 조주스님에게 물었다. "아침이나 밤이나 하루종일 쉬지 않고 수행을 하는데 어떻습니까?" 조주스님이 대답했다. "수행자 가운데 밤낮으로 쉬지 않고 수행을 한다고 해도 일 년에 두 번 세금을 바치는 백성처럼 바쁜 사람은 없는 거야."
아무리 수행이 힘들어도 신도들이 가져다 주는 보시금으로 밥을 먹고, 가사장삼을 걸치고, 사찰에서 살고 있으니 하루하루 먹고살기 바쁜 일반백성보다 나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수행자 아니냐는 조주스님의 질책이다. 그렇다면 앞에서 이야기했던 1950년대 정화운동 당시 비구측이 불법에는 대처가 없다면서 내세운 비구승 8대 원칙을 지키고 사는 것이 우리 종단의 바람직한 미래고 수행자로서의 최소한의 양심이고 도덕적인 의무가 아닌가!
8대원칙을 다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독신일 것. 둘째, 삭발염의할 것. 셋째, 비불구자. 넷째, 백치가 아닌 자. 다섯째, 살도음망을 하지 않는 자.(4바라이를 범하지 않은 자) 여섯째, 불주육초.(술과 담배와 고기를 먹지 않는 자) 일곱째, 승려 3인 이상과 단체생활을 하는 자. 여덟째, 25세 이상인 자.(비구계를 받고 3년을 넘긴 자)이다. 그 원칙에 의해 대처승을 내쫓고 비구승단인 조계종단을 세웠는데 이마저도 지키지 않는다면 종단의 미래는 없다.
그리고 종단의 문제를 지적을 하면 스님들의 허물을 이야기하면 안된다고 하는 나쁜 스님들에게 들려줄 부처님의 말씀이 있다.
나쁜 비구는 일반인들이 나쁜 비구의 죄를 드러내면 높은 자리로 가서 윗자리 스님들과 옳고 그름을 따진다/잡아함 유과경
나쁜 비구는 일반인이 보고들은 자신의(비구) 죄를 드러내어 그것을 기억하게 하여도,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버티고 항복하지 않는다/잡아함 유과경
나쁜 비구는 일반인이 보고 들었던 자신의(나쁜비구) 죄를 드러내면 오히려 남의 죄를 들추어낸다/잡아함 유과경
나쁜 비구는 일반인들이 자기 허물을 드러내면 성을 내어 말한다. "너는 어리석고 분별이 없다. 다른 사람은 자기 죄를 드러내는데 너는 왜 내 죄를 들추느냐"/잡아함 유과경
하긴 권력자도 시민이 자기 허물을 이야기하면 유언비어, 찌라시라고 하면서 엄단을 하겠다고 엄포부터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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