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正圓)은 타원(橢圓)의 하나일 뿐”(2)
“정원(正圓)은 타원(橢圓)의 하나일 뿐”(2)
  • 유응오 소설가
  • 승인 2013.01.18 11:33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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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유응오의 'Culture Club' 1-1. 종교다원주의 다룬 두 편의 영화

그리스도교에 침탈당한 그리스문화 ‘아고라’
히파타이의 생애 통해 일신교의 폭력 그려

반전의 미학을 보여준 《디 아더스(The Others)》의 감독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가 메가폰을 잡은 《아고라(Agora》는 이집트 여성 알렉산드리아 철학자 히파타이(355~415)의 삶을 그린 영화이다. (르네상스 화가 라파엘로의 <아테나 학당>에도 히파타이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보면 당시 그녀의 위치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속 배경은 다신교 사회에서 유일신교 사회로 넘어가는 로마이다. 따라서 당시 사회는 유대교, 기독교, 다신교의 치열한 각축장으로 그려진다.

박해에 시달리던 그리스도교 교회가 로마 사회에 하나의 종교로 받아들여진 것은 313년 2월 로마의 공동 황제인 콘스탄티누스1세와 리키니우스가 <밀라노칙령>을 선포하면서부터이다. 그리고 고작 80여 년만인 392년 그리스도교는 로마의 국교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로마의 국교가 된 뒤 그리스도교는 다른 종교들을 박해하기 시작한다. ‘박해받는 종교’에서 ‘박해하는 종교’로 바뀐 것이다.

▲ 영화 <아고라>
영화 속에서는 신전 사제들과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충돌하는 장면이 잘 그려져 있다. 신전 사제들은 먼저 전쟁을 선포했지만, 로마군인의 보호를 받는 처지에 놓일 만큼 참패하고 만다. 이는 로마의 종교가 다신교에서 유일신교로 바뀌는 것을 알리는 서막이다. 다신교와 함께 꽃피었던 로마의 학문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영화에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그리스도교 신자들에 의해 불타는 장면이 나온다. 당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는 파피루스가 약 70만권 정도 소장돼 있었다고 한다. 맹신주의자들이 인류문화의 보고를 일시에 불태워버린 것이다. 히파타이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운명을 함께 했다.

히파타이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장이자 위대한 철학자인 테온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사서로 일하면서 제자들에게 신플라톤주의를 가르쳤다. 영화 속에서 히파타이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치릴로 주교인 것은 묘사됐다. 《성경》에 무릎을 꿇지 않는 히파타이가 치릴로 주교에게는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치릴로 주교가 히파타이를 공격하면서 인용하는 게 <고린도 전서> 14장 34절~35절이다.

“율법에서도 말하듯이 여자들은 순종해야 합니다. 배우고 싶은 것이 있으면 집에서 남편에게 물어보십시오.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의 저자는 사도 바울이다. 흥미로운 것은 세계적인 석학 알랭 바디우는 《사도 바울》이라는 책에서 사도 바울이 죽음만 판각한 율법시대를 종언하고 사랑 실천의 새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했다는 사실이다. 위에 인용한 구절은 당시 남녀가 얼마나 불평등했는지 알려주고 있다.

결국 히파타이는 무참히 살해됐다. 영화 속에서는 히파타이를 흠모한 노예출신 그리스도교 신자가 고통을 없애기 위해 질식사한 것처럼 묘사되지만, 강의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폭도들에 의해 칼로 난자(亂刺)당했다는 게 정설이다. 최초의 마녀사냥인 것이다.

▲ 영화 <아고라>
이 영화에서 필자가 가장 눈 여겨 봤던 것은 히파타이가 천체(天體)의 운항에 대해 연구하는 장면이다. 처음 그녀는 천체가 정원을 그리면서 도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일순간 깨닫게 된다. 천체는 타원을 그리면서 돌고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혼잣말을 한다.
“정원도 타원의 일부일 뿐이다.”

여기서, 정원은 일신교인 그리스도교이다. 그리고 타원은 다신교가 꽃피운 찬란한 문화이다. 기실 그리스도교의 유럽 전파는 사도 바울이 신전에 야훼를 모셔줄 것을 간청하면서 비롯됐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뒤 신전의 다른 신들은 모두 파괴되고 야훼만 남게 됐다. 유일신교가 내재하고 있는 폭력성을 대변해주는 실례이다. 절대적 가치는 상대적 가치를 부정한다. 거기에서 모든 재앙이 비롯된다.

영화 속에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빵을 나눠줌으로써 교세를 확장해간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교도들에 대한 테러를 서슴지 않는다. 사랑과 폭력이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믿음이라는 이름 아래 동시에 펼쳐지는 것이다. 이는 한국 근·현대사에서의 기독교 모습과 상당히 유사하다.

영화 제목인 ‘아고라’는 신전 앞에 선 시장을 일컫는 말이다. 인파들이 몰리는 까닭에 당시 연설가들은 아고라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고 한다. 아고라가 토론의 장으로 해석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토론은 혼자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대화의 상대가 필요하다. 민주주의의 시작은 상대를 인정하는 것이다.

디스토피아에 세워진 ‘다원주의’ 도서관
희망과 폭력, 《성경》에 대한 두 개의 시선

알버트 휴즈와 알렌 휴즈가 공동 감독한 《일라이(The book of Eli)》는 미국 작가 코맥 매카시의 《로드(The Road)》를 떠올리게 하는 영화이다. 작품 속 시공간이 불명확하다는 점, 전 지구가 재난을 당해서 생존자들은 야만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점, 주인공이 희망을 찾아서 바다로 간다는 점, 《성경》의 묵시록(黙示錄)적인 어조를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상당히 유사했다. 미학적인 측면에서는 《일라이》가 《로드》에 뒤쳐지지만,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참고로 《로드》는 2007년 퓰리처상 수상작으로 평론가들로부터 극찬을 받은 뒤 동명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잠언(箴言)적인 《로드》와 달리 《일라이》는 말하는 바가 분명했다. 액션영화여서 지루하지 않은 것도 장점 중 하나였다.

영화의 원제인 ‘일라이의 책’은 다름 아닌 《성경》이다. 영화 속 배경은 아마도 가까운 미래인 듯싶다. 오존층에 구멍이 뚫리면서 지구는 급속하게 사막화됐다. 선글라스 없이는 외부 출입을 할 수 없을 지경이다. 환경문제가 심각하다보니 물을 지닌 자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 영화 <일라이>
주인공인 일라이는 계시를 받고 《성경》이 담긴 가방을 짊어진 채 서쪽으로 향한다. 그러던 중 카네기 마을에 도착한다. 카네기는 지하수가 나는 곳을 알고 있는 덕에 권력을 쥘 수 있었다. 카네기는 오래 전부터 찾는 책이 있었다. 바로 《성경》이었다. 카네기는 일라이가 《성경》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마을을 빠져나가는 일라이를 처녀 솔라라가 뒤쫓아간다. 한 노부부의 오두막에서 일라이와 카네기는 다시 만나게 된다. 솔라라가 인질로 붙잡히자 일라이는 《성경》을 일라이에게 넘겨준다. 마을로 돌아온 뒤 카네기는 《성경》의 잠금 장치를 해제하고 책을 펼친다. 그런데 맹인용 점자책이다. 이는 일라이가 맹인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설정은 맹인검객이라는 점에서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자토이치》나 이준익 감독의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과 유사하다.) 카네기는 맹인인 클라우디아(솔라라의 엄마)에게 《성경》을 해독하라고 하지만, 클라우디아는 이를 거절한다.

그러는 동안 우여곡절 끝에 일라이와 카네기는 바다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알카트라즈 섬. 섬에는 인류의 책을 복원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일라이는 섬에 도착하자마자 머릿속에 있는 《성경》을 외우기 시작한다. 그렇게 《성경》은 복원돼 도서관에 꽂히게 된다.

영화 속에서 《성경》은 두 가지 속성을 지니고 있다. 이는 일라이와 카네기라는 상반된 인물을 통해서 드러난다. 일라이가 《성경》을 중시하는 것은 사명 때문이다. 반면, 카네기는 세상을 지배하기 위한 도구로써 《성경》이 필요하다. 쓰이기에 따라서 《성경》은 희망의 불씨가 되기도 하고, 폭력의 도구로 전락하기도 한다. 양날의 칼처럼.

▲ 영화 <일라이>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알카트라즈 섬에 세워진 도서관의 모습이다. 완성된 《성경》은 인류의 수많은 인문학 서적들 사이에 꽂힌다. 《성경》은 유일한 가치가 아니라 다양한 가치 속에 하나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반면 카네기는 《성경》이 아닌 책들은 모두 불태워버린다. 다른 책들은 지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일라이》에 나온 알카트라즈 도서관은 《아고라》에서 파괴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복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양성이라는 희망의 도서관. 다양성이 담보되지 않는 사회는 파시즘 사회밖에 없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대목이다.

나오는 글

법정스님·김수환 추기경 종교화합 귀감 삼아야
악기들이 어우러져 화음 이루듯 사회통합하길

주지하다시피 한국 사회는 빠른 시간 안에 산업화를 이뤘다. 산업화 과정에서 민주화 세력은 희생을 강요받을 수밖에 없었다. 70~80년대에 기독교계에서는 해방신학이, 불교계에서는 민중불교가 주창된 것도 같은 이유다. 하지만 이러한 흐름은 종교계 내부에서는 주류를 차지하지 못했다. 90년대에 들어서 한국 진보의 흐름은 다원주의로 눈을 돌리게 됐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다원주의도 종교계 내부에서는 주류를 형성하지 못했다. 한국 근·현대사 내내 종교계의 주류는 기복신앙이었다.

종교다원주의는 서구 철학사조에 기인한 것이다. 서구철학은 크게 구성철학과 해체철학으로 나눌 수 있다. 세상을 어떻게 편리하게 구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룬 자본주의와 세상을 어떻게 도덕적으로 구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룬 마르크스-엥겔스주의 둘 다 구성주의에 속한다. 이 둘은 근대이성주의의 산물이어서 여러 문제를 만들었다. 정치학적으로 근대화의 3요소로 △민족주의 △과학기술 발달 △자유인의 출현을 꼽는다. 여기서 민족주의는 파시즘이라는, 과학기술의 발달은 환경문제라는 문제를 양산했다.

이런 문제점들을 극복하자는 게 바로 해체주의다. 소유론적 철학의 대안으로 존재론적 철학이 주목을 받은 것이다. 다원주의는 해체주의의 산물이므로 절대적 가치를 부정한다. 그래서 일부에서 해체주의를 공허한 철학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구조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해체주의의 가치는 충분하다. 게다가 일부 포스트모더니즘 학자들은 해체 이후 체제로 윤리를 지목하고 있지 않은가? 에마뉘엘 레비나스가 고통 받는 ‘타인의 얼굴’을 보자고 역설하자고 하는 것도, 안토니오 네그리가 대중(大衆)이 아니라 ‘다중(多衆)’의 시대를 열자고 주장하는 것도, 질 들뢰즈가 ‘천개의 고원’에 천 개의 사랑을 꽃피우자고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는 《법화경》 <약초유품>에서 부처님이 가섭에게 약초의 비유를 들면서, ‘한 구름에서 내리는 비지만 그 초목의 종류와 성질에 맞춰서 싹이 트고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느니라. 비록 한 한 땅에 나고 한 비로 적시어서 주는 것이지마는 여러 초목이 각각 차별이 있는 것이니라.’라고 설한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최근 몇 년 사이 한국 종교계의 큰 별들이 졌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분들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무소유》의 저자 법정스님, 전 조계종총무원장 지관스님, 김수환 추기경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지남(指南)이 되는 가르침을 남겼다.

김수환 추기경은 1997년 12월 14일 길상사 개원식에 참석했고, 이에 대한 답례로 법정스님은 1998년 1월 24일 가톨릭 서울대교구 명동성당에서 강연회를 가졌다. 지난 2006년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지관스님은 가톨릭복지시설 성가정입양원을 방문했고, 이에 대한 답례로 성탄절을 앞두고 정진석 추기경이 불교 복지시설인 승가원을 찾았다. 그분들이 솔선수범한 종교화합은 앞으로도 이어져 나가야 할 것이다.

종교다원주의를 다룬 글인 만큼 《성경》의 한 구절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피리나 거문고같이 생명이 없는 악기도, 음색이 각각 다른 소리를 내지 않으면, 피리를 부는 것인지, 수금을 타는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고린도전서> 14장 7절-

각기 악기가 어우러져 하나의 화음을 이루듯 앞으로 한국사회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가운데 하나의 자비실천의 장을 열어야 할 것이다.

 

 

 

   

자유기고가이자 작가. 충남 부여 출생. 대전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주간불교>와 <불교투데이> 취재부장을 지냈다. 2001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에 당선했고, 200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에서 당선해 등단했다. 주요 저서로는 『10.27법난의 진실(화남출판사)』, 『이번 생은 망했다(샘터)』, 『벽안출가(샘터)』, 『불교, 영화와 만나다(조계종출판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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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라이 2013-01-19 21:42:43
따라서 종교다원주의를 관철시켜 종교간 평화를 원한다면 필자의 글은 불교도가 읽을게 아니라 그리스도교인들(혹은 유대교,이슬람교)이 읽어야. 불교도들은 그리스도교를 비롯한 유일신교가 진리가 아니라는 입장이지만 그렇다고 "없애야할 종교"로 규정하지는 않음. 그리고 '종교다원주의'는 기독교인들 스스로가 배타적 전도를 하지 않겠다는 반성적 의미에서 타종교를 관용적 태도로, 이교도에 대한 소프트한 전도전략차원일뿐

일라이 2013-01-19 21:32:56
또 인류의 대부분의 전쟁이 기독교에 의해 벌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후 인류를 구원하는 것은 성경이라는 것이다. 지극히 서구기독교 문명적인 시각일뿐. 종교다원주의와는 전혀 관계없는 영화다.시종일관 성경에, 성경에 의한, 성경을 위한 영화. 코란,도교,불교 등 다른 종교에 대해서 그 어떤 코멘트도 없다.

일라이 2013-01-19 21:18:20
주인공 일라이는 하나뿐인 성경책을 서쪽으로 전하는 신의 계시를 따르는 순례자, 30년동안 매일 성경을 읽으며 믿음하나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자.끝에 성경책은 일라이의 구술에 의해 복원되 종교섹션책꽂이에 꽂힌다.일라이는 죽고 솔라라는 다시 자신의 고향으로 간다, 카네기 일당이 있는 고향에 성경을 전해주러 가는 것. 성경책이 여러 복원된 책들 틈에 꽂혀져서 종교다원주의? 성경책만이 화룡점정(책중의 책)이란 것

^^ 2013-01-18 15:47:02
지나친 단순화의 오류다.
법정,지관스님처럼 상대종교와 교류하면 된다, 굳이 '아쇼카선언'을 해야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불자들이 교회나 성당에 가서 배타적인 행위를 한 일이 있는지 부터 알아봐라.무엇보다도 개신교쪽에서 아쇼카선언의 취지에 전혀 공감하지 않는다. 한기총으로 대변되는 그들은 불교와 승려는 '사탄'일뿐이다. 이런 실상을 통찰할 줄 안다면 기자처럼 한가한 소리는 못할 것이다.누가 누구를 배타로 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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