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학자 ‘연기적 다원주의’를 말하다
불교학자 ‘연기적 다원주의’를 말하다
  • 이은 기자
  • 승인 2011.10.28 09:19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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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 기자의 종교다원주의 샐러드 3-3

모든 종교는 안락과 행복을 추구한다는 말은 대부분의 여자는 남자와 결혼한다는 사실 만큼이나 보편적인 상식이다. 궁핍한 생활에서의 탈피, 사회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자유, 인권, 평화, 건강, 환경과의 조화 등 인류의 복지와 행복을 위해 종교들은 누구보다 자비와 사랑, 사회적 정의를 실천하는 일에 앞장서야 하며 서로 협력해야 한다. 그러한 것들은 종교의 유무와 상관없이 인류가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이며 천부적 권리이다. 사회적 공동선을 위한 노력과 연대를 거부하는 신앙이라면 종교의 가치는 무의미하다고 보아야 한다. 만약 종교의 사회적 우열을 판단하는 기준이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실천’에 있지 않을까.

가톨릭 신학자 폴 니터 교수(미국 유니온신학대)가 펼치는 구원중심주의는 그런 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니터는 종교인들이 인류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대화하고 노력해야 하며,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보다 더 우선시 돼야 한다.”고 역설한다. 사회인의 관점에서 니터의 주장은 강한 설득력을 갖는다. 그러나 니터의 구원중심주의는 그의 지지자들로부터는 환영을 받지만 정작 가톨릭 교단으로부터는 수용 받지 못하고 있다. 왜일까?

연대하기 위해 규범적 신앙은 포기하라?
교회는 그런 다원주의는 수용할 수 없다!

애초에 실재중심주의(=神중심적 종교다원주의)가 - 유신론적 실재관(實在觀)을 우위에 두는 - 서구 제국주의의 잔영이라는 비판을 의식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 구원중심주의이다.

신(神)중심적 종교다원주의 이론의 기초를 세운 존 힉에 따르면, “모든 종교는 구원을 향해 가는 길들이며, 자아 중심적 사고로부터 실재 중심적 사고로 전환하는, 충만한 인간성을 실현하는 길들이다.” 폴 니터도 “종교 간의 대화가 진전되기 위해서는 각자 신봉하는 궁극자 신(神)은 인간을 구원하고 해방한다는 목표가 동일하므로, 올바른 실천과 인간의 복지를 증진시키는 일을 주제로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예수가 인간의 유일한 구원자라는 믿음은 약화되거나 포기된다. - 김웅태. 『종교의 현대적 적응』.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02년, p.114

교회 입장에서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타종교와 화합하고 협력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규범적 신앙(예수 그리스도를 인류의 유일한 구세주로 여기는 믿음)을 보류하거나 포기해야 한다는 전제가 구원중심주의의 바탕에 깔려있는 것이다. 가톨릭에선 “교회는 어디까지나 인류 구원에 있어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고 보기 때문에” 실재중심주의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비규범론을 전제로 하는 “구원중심적 다원주의 모델을 수용하기는 힘들다.”고 못박고 있다. - 김웅태. 앞 책 p.115

궁극적 ‘구원’ 체험의 동일성 문제

두 번째 문제는 이른바 ‘구원’ 체험의 동일성에 대한 의문이 교회와 신학계에서 심각하게 대두되었다는 점이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한 지적은 거의 모든 종교계에서 제기된다고 봐야 한다. 예를 들어, 미디어붓다의 이학종 대표가 “기독교를 열심히 믿고 공부해도 불교의 목표인 깨달음과 열반과 해탈이 성취될 수 있는가?”라고 물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구원’이라는 말은 종교와 상관없이 보편적 개념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특정 종교(주로 기독교)에서 쓰이는 특수 언어이기도 하다. 종교에서 이 말을 사용할 때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궁극적’이란 단서가 달릴 때이다.

종교가 일반적으로 구원을 지향하는 것은 맞지만 종교에서 궁극적 ‘구원’이라고 할 때 그 내용은 종교마다 동일하다고 볼 수 없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불교의 구원 내용은 불교적인 패러다임으로 체험된 것으로서 통상 깨달음, 해탈, 열반이라는 언어로 표현되며, 기독교의 구원 내용은 기독교적 패러다임으로 체험된 기독교적인 것으로서 하느님의 자녀됨, 신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각성, 하늘나라의 도래 등으로 표현된다. 이처럼 다양한 구원 내용을 일반화시키는 것은 다원주의 원칙에도 모순될뿐더러 다양성을 획일성으로 바꾸는 것으로 경계해야 할 무차별 종교혼합주의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는 것이 가톨릭의 입장이다. - 김웅태. 앞 책 p.123

연기론에 대한 장문의 해설에도 불구하고
‘불교인 선언문’의 논리가 부자연스러운 이유

「종교평화를 위한 불교인 선언문(이하, 불교인 선언문)」은 불교적 언어로 ‘모든 이들의 안락과 행복’이라고 조심스럽게 표현했지만, 그것이 ‘구원’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처럼 「불교인 선언문」은 명백하게 실재중심주의와 구원중심주의를 기본 이념의 틀로 차용하고 있다.¹ 「불교인 선언문」이 다원주의의 관점에서 꽤 많은 분량을 연기론 해설에 할애하고 있음에도 그 적용에 있어 어딘가 모르게 자연스럽지 못하고 억지가 느껴지는 것은, 종교 간의 공통본질을 전제로 하는 실재중심주의와 구원중심주의를 이념의 틀로 하고 그 위에서 연기론을 전개시켜 가는 데서 온다.

그렇다면 「불교인 선언문」에 ‘열린 진리관’이란 용어를 제공한 불교학자 김용표 교수(동국대)는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불교의 입장을 어떻게 정리하고 있었을까?

‘불교의 종교 다원주의 이해는 구원에는 여러 가지 길이 있다는 점에 있지 하나의 공통된 실재가 있다는 주장이 아니라는 것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 2000년 3월 『불교평론』「종교 다원주의에 대한 불교의 입장」에서.

불교학자 「연기적 다원주의」를 말하다!

「불교인 선언문」이 실재중심주의를 차용하고 있는 데 반해 김 교수는 하나의 공통된 실재가 있다는 주장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 다만, ‘구원에는 여러 가지 길이 있다’는 구절은 확인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구원’의 방법은 다양하지만 궁극적 체험의 결과는 같다는 뜻인지, 아니면 각 종교가 추구하는 궁극적 ‘구원’의 형태가 근원적으로 다르다는 것인지 해석의 여지가 있다.

중관(中觀)학을 연구해온 전문가로써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그의 입장은 그 후 어떻게 심화되었을까? 아무런 변화도 없었을까? 2002년 『불교와 종교철학:공사상으로 본 세계종교』란 김용표 교수의 저작물에 눈에 확 띄는 내용이 있어 소개한다.


“이러한 공관의 이해에 기초하여 볼 때 테두리 없는 공(空)은 무한한 열림의 세계로 불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의 다원주의 논리는 「연기적 다원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연기적 종교다원주의」는 ‘생성해 가는 시간의 과정 속에 전개되어 가고 있는 사물의 개체적 다원성에서 궁극적 실재를 발견하는 태도’이며, ‘있는 그대로의 다원성을 하나의 실상으로 받아들이며 모든 절대 진리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 종교 이해의 태도’이다.

원래 다원주의란 ‘모든 존재를 궁극적으로 환원시킬 때 그 실재가 다수’라는 의미에서 사용된 것이다. 불교적 입장의 다원주의란 하나의 궁극적 실재에서 모든 진리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동의 본질이 없는 개별적 독특성에서 진리의 통합성을 보는 것이다. 다양하게 변화되고 있고 상호 관계적인 무상의 과정과 시간 속에 궁극적 실재는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 김용표. 앞 책. 동국대학교출판부. p.45

그는 반야 · 중관사상 외에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적 흐름을 참고 했음이 틀림없다. 「연기적 다원주의」와 탈근대 담론의 사상적 흐름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해를 위해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서구 지성이 불교의 공(空) 사상에 매혹되는 까닭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신적 사상적 토대를 놓은 아버지라고 불리는 니체(Nietzsche)로부터 비트겐슈타인, 하이데거, 야스퍼스, 화이트헤드를 거쳐 보르헤스, 푸코, 들뢰즈, 데리다, 로티... 그 이름들을 열거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탈근대 담론들을 근대주의 담론들과 절연시키는 인식소(認識素) 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확연한 인식소는 탈중심화된 세계, 급진적인 해체의식을 내포한 관계론적 사유라고 할 수 있다. 대강이라도 풀어보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격한 어조로 서양철학사상 가장 중시해온 전통적 관념에 대해 끊임없는 공격을 가한다. 자라투스트라가 신은 죽었다고 말할 때, 니체가 그의 입을 빌어 공격하는 것은 철학자들이 논하는 ‘신’ 개념만이 아니다. 윤리, 삶의 의미, 목적 등 인류가 상속받은 모든 가치들의 재평가를 요구하며 익숙한 방식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세계를 감각을 통해 인식할 수 있는 ‘현상계’와 이성을 통해 인식할 수 있는 ‘실재계’로 구분한 것은 플라톤이었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감각을 통해 인식하는 현상계는 가변적이고 와해되기 쉽기 때문에 ‘실재(實在)’가 될 수 없었다. ‘실재계’야말로 이성의 힘으로 도달할 수 있는 완전히 선(善)하고 영구불변하는 이상적 원형(ideal forms)의 세계였다.

니체는 이러한 이분법적 세계관을 추적하다 기독교의 세계관에도 동일한 개념이 나타나고 있음을 발견한다. 다른 것이 있다면 플라톤이 말했던 ‘실재계’가 선한 자들에게 약속된 ‘천국’이라는 사후세계로 바뀌었다는 것뿐이었다. 현재 세계는 다음 세계를 위한 발판일 따름. 세상의 가치 있는 모든 것은 현재계 영역 밖에 존재한다는 가정은 현재의 삶을 부정하는 사고방식을 낳았다. 플라톤과 기독교의 이러한 세계관은 아주 오랫동안 인류의 인식과 세계관에 막대한 영향을 미쳐 왔다.

그런데 니체는 왜 신은 죽었다고 한 것일까? 그가 탈근대 담론에 끼친 영향과 불교의 연기론과의 관계성을 알아보는 것은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불교인 선언문」이 빠진 함정을 알아보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니체의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이마누엘 칸트의 사상이다. 칸트에게 있어서 실재계(본질계)는 플라톤의 주장처럼 이성을 통해 도달할 수도 없고, 기독교의 세계관처럼 사후에 도달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는 그런 것이었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세계는 우리가 영원히 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었다.

플라톤주의, 불변자성을 갖는
칸트적 ‘물(物)-자체’를 부정하다

칸트의 이러한 견해에 대해 니체는 만약 실재계가 가장 지적이거나 선한 자마저도 이번 생이나 다음 생에서조차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곳이라면, 결론적으로 그것은 “아무 쓸모없고 잉여적인 개념”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우리 인간으로서는 어떻게도 할 수 없는 개념인 것이다.

일단 ‘실재계’라는 개념을 부정하고 나자 실재계와 현상계를 구분하던 사상의 장구한 전통이 와해되기 시작했다. 철학의 가장 오래된 오해의 종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니체는 말한다. “우리는 실재계를 폐기시켰다.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인가? 혹시 현상계일까? ...하지만, 아니다! 실재계와 동시에 현상계도 무너진 것이다.” - 『철학의 책』. 윌 버킹엄 외. 지식갤러리. 2011년. p.220

그렇다면,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계의 진실은 무엇인가? 바로 이 지점에서 불교의 핵심사상인 연기론이 니체식 번안으로 나타난다.

독립된 존재란 없다
인연으로 생성된 모든 것은 공(空)하다
니체 - 포스트모더니즘 - 불교의 중관 철학

니체는 형이상학적 불변자성을 갖는 칸트적 ‘물(物)-자체’, 일체의 고립된 현상들의 가능성을 부정한다. 모든 존재와 현상은 불변자성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무한히 변화하는 상호관계에 의해 구축된다. 제반 현상은 분명한 시작도 명백한 끝도 갖지 않는 길고 복잡한 사건들로 구성되며, 이 같은 사건들의 부분들은 또 다른 것들과 연결되어 있다. 당연히 상호관계(인연)에 의한 구축물은 실체를 갖지 않는다. 인연으로 생성되어 실체를 갖지 않으므로 모든 것은 공(空)하다.

이러한 관계론적 사유는 니체의 계보를 잇는 현대 해체주의 사상가들에 의해 “만일 하나의 사건(event)처럼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언어적 체계와 유사한 어떤 체계의 산물(혹은 구축물)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 구축물은 (자성을 갖지 않는) 그 본성에 의해 이미 그 자신을 해체(deconstruct)시켰다.”는 해체론으로 나아가게 된다. 현대의 지성,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와 예술가들이 제법무아, 일체개공을 설하는 불교의 관계론적 패러다임에 왜 천착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고 보면 자아를 오온(五蘊)으로 해체한 부처님이야말로 최초의 해체론자가 아닐까.

“해체”와 “상의성”이란 관계론적 사유방식
탈중심화된 세계를 직시하다
‘오래된’ 다원주의의 시작

화이트헤드(Whitehead)에 따르면, “지난 수세기 동안 철학 저서들을 사로잡아온 잘못된 관념은 ‘독립된 존재’가 있다는 믿음이었다. 그러나 이런 존재 양태는 없다. 모든 실재는 우주의 나머지 것들과 함께 짜여진다는 관점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세상의 사물과 현상이란 우주에 존재하는 다른 모든 것들이 씨줄날줄처럼 얽히고설켜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하기에 깨진 콘크리트 틈새 사이로 고개를 내민 작은 민들레 하나도 기실은 이 우주 전체와 호흡하며 꽃을 피우고 있는 셈이다.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 솔로몬의 영광도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다.”고 한 성서의 구절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처럼 “해체”와 “상의성”이란 관계론적 사유방식을 특징으로 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거대 담론, 형이상학적 불변자성을 갖는 칸트적 ‘물-자체’, 사변적인 철학들, 플라톤주의, 고정되고 불변적인 것, 하나의 형이상학적, 우주적(보편적) 이론체계, 일체의 총체화 된 진리 개념을 배제한다. 탈중심화된 세계를 직시하며 상대방의 입장, 비체계의 입장, 여성의, 억압받는 소수의 입장을 옹호한다. 포스트모던의 밑바탕에 흐르는 것은 사상과 의견의 급진적 다원주의인 것이다. 불교에서는 너무나 오래된, 그 탄생의 처음에 관한 이야기지만.

필자는 이미 실재중심적 다원주의가 형이상학적 불변자성의 ‘물-자체’ 개념을 이야기 하는 칸트의 인식론을 배경으로 하여 성립했다는 사실을 밝혔다.²

세계의 모든 종교란 결국 하나의 중심에 이르는 여러 갈래의 길일뿐이며, 그것은 또한 백색광이 프리즘을 통과할 때 보이는 여러 가지 색채와 같아서 모든 종교들은 그 상이성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동일한 ‘구원’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것이 실재중심주의자들의 논리이다. 종교들의 초월적 일치를 주장하는 신비주의자들의 논리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실재중심주의를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이 어째서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이제 대강은 이해하실 수 있으리라.

위대한 종교예술은 굳은 신앙심에서 나왔다

거의 모든 위대한 종교예술이나 문헌은 사실상 굳은 신앙심과 헌신에서 나왔다. 역사적으로 불교학의 발전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고 본다. 가르침의 사회적 실천 또한 마찬가지다. 실재중심주의나 구원중심주의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역설이다.

뭐가 문제인지 한 번쯤은 겸손한 자세로 귀 기울일 만도 하건만, 그 동안의 행보로 보건데 오류를 수정할 의사가 전혀 없어 보이니 걱정이다. “21세기 한국불교에 새로운 형태의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우려는 어디 한 사람만의 느낌이었을까.

진옥 스님의 말씀을 끝으로 긴 글을 마감한다.

절대성이 같으냐, 다르냐 하는 것은 또 다른 논쟁거리가 될 수 있다.
흔히들, “모든 종교는 궁극에는 하나다”라고 하는 말에 나는 동의하기 힘들다.
그들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만
같다라고 했을 때에 같지 않은 수많은 문제들을 안고서
같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같다는 유일적인 말보다는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다른 부분이 왜 나와 같지 않은가,
그러면 그것은 틀린 것이 아닌가라는 인식보다는
다른 또 하나의 다양성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본다.
현상은 같을 수가 없다. 단지 공통점을 찾아가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이제 종교인들끼리 인류를 위해
종교인들이 무엇을 그리고 어떤 역할을
공통으로 해야 할 것인가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화합을 위한 화합은 문제가 있지만
모든 생명들을 위하여 공동의 선(善)을 찾아나간다면
종교가 인류를 위한 더 나은 일들을 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 진옥 스님(여수 석천사). 『다원주의, 축복인가 재앙인가』. p.258

각주]
1. 필자는 국내의 대표적 실재중심주의자 가운데 한 사람인 이찬수 교수(강남대, 분당우리교회 목사)가 조계종 화쟁위원회 기획위원으로 있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았다.
2. 종교다원주의 첫 번째 기사 ‘하나님은 많은 이름을 가졌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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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사 단현 2011-11-08 10:22:44
이찬수 목사가 이명박의 불교폄훼 이후 범불교대회 와중에 기독교에 설움받는 불교를 가련히 여기고 평소 신념대로 불상에 절한 것을 이유로 강남대학교에서 퇴출된 것을 눈물나게 고맙게 여겨
이후 불교평론이나 각종 불교신문에 이찬수 목사의 글을 수없이 실으면서 친목을 다지더니
결국 지난 1월 27일 도법스님은 이찬수 목사를 화쟁위기회위원으로 영입한 즉시
기독교종교다원주의자인 그의 평소 주장과 도법스님의 생명평화경을 섞어 만든 것이 21세기 아쇼카 선언이죠.
그러나 길희성 이강남 김재경 이찬수 등 기독교 신학자인 이들 목사들이 주장하는 것은 '결국 마지막 그 하나는 여호와'라는 유일신 중심의 종교다원주의로서 대승불교의 불성 참나 진여 진아 그것이라고 일컷는 것이나 절대신 신비한 그 무엇 하나의 령이 있는데 그것은 곧 여호와라는 기독교종교다원주의자의 주장을 도법스님의 아쇼카선언에서 그대로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제법무아...
불교의 근본은 그 무엇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여래장 주인공 자아 영혼 불성 그놈... 이런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불교의 본령인데 지금 화쟁위는 힌두불교를 가지고 마치 전체 불교를 대변하는 양 엉뚱 소릴 한다는 것입니다.
정히 하고 싶으면 조계종선언이라고 하든지 아니면 폐기하라는 것입니다.

과객 2011-10-29 22:04:54
고맙소!
아쇼카 선언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정확히 짚어내고
총정리해 주셨구려.
화쟁위가 아니라, 자승 총무원원장 체제의
앞으로의 행보를 주시하는 일만 남은 것 같소이다.
누가 정법을 훼손하고 불교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지
모두 지켜봅시다
고생 많으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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