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다원주의에 대한 오해
기독교의 실패 불교가 되풀이해선 안 된다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오해
기독교의 실패 불교가 되풀이해선 안 된다
  • 이은 기자
  • 승인 2011.09.18 07:4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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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용도 폐기된 문법으로 다원주의에 접근하다 ③

한겨레 홈페이지 조현기자의 <휴심정> ‘벗님글방’을 열면 추석 연휴 직전에 올려진 길희성 교수(서강대)의 글, “예수 붓다 공자, 한자리에 앉을 수 없나”란 제목 아래 삼소회 회원들의 사진을 볼 수 있다. 2006년 예루살렘 순례 중 겟세마네동산에서 함께 노래하는 모습이란다. 세상 모든 종교들의 모습이 그와 같다면 오늘날 한국사회의 중요 화두로 ‘종교평화’가 등장하는 일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삼소회는 지금까지 종교 간 교류와 화합의 가장 아름답고 이상적인 형태를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되어 왔다. 그러나 비구니, 수녀, 정녀 등 특수한 신분의 소수 그룹이라는 점에서, 대화운동의 사회적 모델로는 부적당하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종교대화운동사는 선험적 종교다원주의가 훌륭한 신학과 형이상학의 이론들을 제시하여 그러한 사상가들로 구성된 매우 선택받은 그룹을 창조하는 데는 공헌할 수 있었지만, 종교적 현실과 한국의 다종교상황을 정리하고 해결하는 데는 별로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는 점을 밝혀 주고 있다. 말하자면 종교대화운동의 실천강령으로서의 다원주의의 의미를 선험적 차원에서 찾으려는 태도는 종교대화운동 자체를 무력화시키거나 오도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 -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경험적 접근」. 윤이흠. 『종교다원주의와 종교윤리』 p.25

종교대화운동은 크게 3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 선교관계형 대화
1. 직접선교를 위한 소극적 대화
2. 간접선교를 위한 적극적 대화
• 종교외적 공동목표추구형 대화
1. 자발적 참여에 의한 대화
2. 정책유도에 의한 대화
• 공동질서추구형 대화 1. 순수한 친목추구
2. 공동질서의 이념이나 사회규범 모색

직접 선교를 위한 소극적 대화는 타종교와 토착문화로부터의 거센 반발을 피하기 위해 관용의 태도를 취하는 것으로써 우월의식을 은폐한 회유책이라 볼 수 있고, 두 번째 간접선교를 위한 적극적 대화가 유의미하게 거론된다. 종교연합단체를 결성해 운영하는 경우를 말하는데, 한국종교협의회, 한국민족종교협의회, 원불교의 UR운동, WCRP(세계종교인평화회의)와 ACRP(아시아종교인평화회의) 등이 이에 속한다.

공동목표추구형 대화는 환경 · 노동 · 통일 ‧ 인권문제 등과 같은 시대적 공동목표를 위하여 자발적 참여에 의해 대화를 하는 경우를 말하는데, 종교환경회의, 종교예술제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 유형의 대화는 함께 추구했던 공동목표가 사라지는 순간 대화도 사라진다는 약점이 있다. 하나의 부수적인 결과로 종교대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정책 유도에 의한 대화의 사례로는 평통 종교분과위원회가 있다. 이 경우는 더 취약해서 정책적 지원이 없으면 아예 출발부터 불가능하다.

공동질서의 이념을 추구하는 대화유형으로 한국종교학회, 한국종교문제연구소, 한국종교사회연구소, 대화신학운동, 크리스찬아카데미하우스 등이 꼽히며, 순수한 친목을 위한 사례로는 앞서 언급한 삼소회가 있다. 크리스찬아카데미하우스는 선교단체의 성격을 갖고 있어서 첫 번째 유형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간접선교를 위한 적극적 대화가 유의미하게 거론되는 이유는, 종교평화를 위한 실천운동의 실질적 주체가 되어야 하는 세력이 바로 이 유형에 속하는 그룹들이기 때문이다. 반면, 이 실천 세력에게 종교대화운동의 사상적 이념을 제공해 주는 것은 공동질서추구형에 속하는 지성 그룹이라 하겠다.

다원주의는 윤리적 견지에서
도덕 행위의 적합성을 찾기 위한 노력의 산물
이제까지의 종교대화운동 진지하게 재검토돼야

해방 이후, 결코 짧다고 볼 수 없는 역사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종교대화운동은 기대한 만큼 성과를 이루어내지 못했다. 오히려 갈수록 종교 간 갈등이 더욱 첨예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 중요한 원인이 종교 간 대화가 지금까지 주로 선험적 형이상학에 근거하여 진행되어온 데 있음을 앞서 살펴보았다.

종교들 사이의 공통점에 초점을 맞추어 평화 공존을 추구하는 것은 우리의 종교다원상황에서는 별 의미가 없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다원주의가 본래 윤리적 견지에서 도덕 행위의 적합성을 찾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란 사실이다. - 류성민. 앞 책 pp.112~113

종교는 기본적으로 절대신념체계이며, 궁극적 종합가치체계이다. 절대신념체계는 자신 이 외의 다른 것의 절대성을 인정할 수 없는 속성을 갖는다. 따라서 한 사회에 여러 절대신념체계가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그 절대 신념과 신념 사이에 갈등과 마찰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현대사회의 양심은 종교 간의 갈등과 마찰로 불안이 야기되고 사회가 분열되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다. 종교다원주의는 이러한 사회적 요청을 종교가 받아들이고 타종교와의 관계를 재해석함으로써 공존의 윤리를 모색하도록 하는 데 그 의미가 있다. 현대사회라는 경기장에서 사회가 자신들에게 요구하는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지킴으로써 종교 간 관계질서를 회복하도록 할 책임을 부여받는 것이다. 이처럼 종교대화의 필요성은 처음부터 종교외적인 조건, 곧 현대사회와 역사가 종교사회에 요구한 것이지 종교가 스스로 창출한 게 아니다. - 윤이흠. 앞 책 p.22~23. p.50

따라서 종교 간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논의는 바로 이러한 현실 인식 위에서 출발하여야 하며, 종교 간 대화의 방향과 방법 또한 이제까지의 선험적 태도에서 벗어나 진지하게 재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다원주의는
갑, 을, 병이 각각 독특하여 그 사이에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서로 다른 것들의 독특성을 전제로 하는 다원주의

이제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다원주의의 개념을 확인해 보자. 아쇼카 선언이 던진 충격과 아픔을 극복하고 종교평화운동의 방향을 재설정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형이상학적 이론으로서의 다원주의(pluralism)는 모든 존재를 궁극적으로 환원시킬 때 여러 개의 독립적인 존재 혹은 요소로 나눌 수 있다는 데 그 요지가 있다. 말하자면 궁극적 실재가 다수라는 것이다. 그런데 고전적인 다원주의는 우주적인 통일을 전제한, 그 구성인자의 다원성을 강조하고 있다. 반면,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우주 자체의 통일성마저도 인정하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다원주의가 등장하였다. 이 다원주의에서는 세계가 완전하게 만들어진 하나의 통일된 체계가 아니라 만들어지는 과정(시간) 속에 있다는 것이다, 어떤 불변의 원리나 법칙이 있고 세계는 그것에 따라 움직인다는 절대주의적 논리를 거부하고, 많은 존재와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 세계가 시시각각으로 또 다른 많은 요인들에 의해 변화되는 과정에 있다는 것이 이 다원주의의 근간이다. - 류성민. 앞 책 p.101

하나의 통일된 체계를 상정하고 그 아래 구성인자들의 다원성을 강조하던 고전적인 다원주의는 ‘고전적’이라는 말이 의미하듯 이미 지나간 구시대의 것이 되었다. 이것이 구시대의 것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사상적 기반이 유일신론적 세계관을 벗어나지 못하는 서구신학자들의 관점으로 확립된 이론이기 때문이다. 폐기되어야 할, 혹은 극복되어야 할 이 구시대적 관념이 오늘날 조계종단에서 주장하는 종교다원주의 이론의 이념적 틀로 차용되었다는 데 아쇼카 선언의 비극이 있다.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가 요구하는 다원주의는 어떤 공통점을 전제로 하는 그런 다원주의가 아니다. 서로 다른 것들의 독특성을 전제로 하는 다원주의이다. ‘갑’, ‘을’, ‘병’이 각각 독특하여 그 사이에 아무 공통점이 없을 때, 진정한 다원주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 김영태. 앞 책 p.141

자신의 종교에 확신을 가져라!

종교가 자비나 지혜처럼 포괄적인 가치를 많이 생산하기 위해선 역설적이게도 신앙이 강해야 한다. 그런데 종교적 확신이 강하면 강할수록 타종교인이나 비종교인에 대해 배타적이 되기 쉽다. 그리고 이 배타적 태도는 전도, 혹은 개종이란 과제 앞에서 더욱 표면화 된다. 기독교가 사회운동에 맹렬히 참여하는 것과 타종교에 대해 어느 종교보다 배타성이 두드러지는 것은 이처럼 미묘한 관련을 갖는다.

반면, ‘차고도 넘치는’ 관용을 특징으로 하는 한국불교의 사회참여 노력과 전도에 쏟는 정성은 머지않은 미래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빈약하기 짝이 없다. 자신들의 종교가 절대성을 부정당해도 별 반응이 없는 이 세태와 교계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던 “수도권 포교 비상”이니 “수도권 종교용지 불교 전무”라느니 하는 따위의 기사가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종단의 지도자들은 불자들에게 타종교에 대해 이미 차고도 넘치는 관용을 가지라고 요구하기보다, 자신의 종교에 확신을 가지라고, 부처님 법이 옳다고, 격려해야 하고 불자들이 주저 없이 그러한 확신과 자긍심을 갖도록 종단을 유신하고 개혁하는 일에 박차를 가해야 하는 것이다.

이념 그룹은 실천 규범을 만들어 내는 일에
더 많은 에너지를 투자해야 하고
종교대화라는 벼룩시장에서
쓸모 있는 거간꾼이 돼야 한다.

종교평화운동에 이념을 제공해 왔던 지식인들은 형이상학에 골몰하기보다 현실에서 종교평화를 구현하는 실천 규범을 만들어 내는 일에 더 많은 에너지를 투자해야 한다. 그리고 종교대화라는 벼룩시장에서 기독교도들을 상대로 해서는 불교의 관용과 아량을, 불교도들을 상대로 해서는 기독교의 뜨거운 열정과 굳은 신앙심을 중개하는 퍽 쓸모 있는 거간꾼이 되어야 할 것이다.

사람의 생각은 어디로나 갈 수 있다.
그러나 어디로 가든
자기보다 더 소중한 것은 찾아볼 수 없다.
그와 같이 다른 사람에게도
자기는 더 없이 소중하다.
그러기에 자기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해해서는 안 된다. (『상응부경전』3 : 8 末利)

종교다원주의는 ‘A종교를 믿는 내가 있고, B종교를 믿는 당신이 있다,’ 바꾸어서 ‘B종교를 믿는 당신이 있고, A종교를 믿는 내가 있다.’라는 현실 경험과 사실에 대한 인정이 그 출발이어야 한다.

‘진리’라고 표현되는 것이든 ‘신(神)’ 혹은 ‘하나님’이라고 표현되는 것이든 이른바 하나의 궁극적 실재를 상정하는 것은 자신이 속한 모(母)종교를 치명적으로 상대화시킨다. 그러한 관점의 종교다원주의는 종교다원주의가 애초에 의도한 것처럼 종교 간의 관용과 평화로운 공존을 가져오지도 못할뿐더러, 도리어 모종교의 생존을 위협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자신의 종교에 대한 확신을 전제로 하는 것이
종교평화운동에 장애가 된다는 주장에는 문제가 있다

타종교에 대한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우월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 종교평화 운동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대화가 불가능하다. 그 신뢰성이 처음부터 의심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관적인 견지에서 자신의 종교에 대한 절대적 신앙을 전제로 하는 것이 종교 간 교류와 화합에 장애가 된다는 주장에는 문제가 있다. 과연 교리와 신앙이 분리될 수 있는가?

개인적으로 필자는 이제껏, 각자의 종교에 대한 절대적 신앙으로 인해 타종교인인 지인들과 불화한 적은 없었다. 지금도 여전히 부활절엔 성당에서 계란을 나눠 먹고 부처님오신날엔 사찰에서 함께 연등을 만든다. 적어도 만남과 대화의 목적이 상호 이해를 위한 것이라면 규범성에 대한 신앙은 장애가 되지 않는다고 본다. 오히려 자신의 신앙에 비추어 볼 때 충분히 공감적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종교 간 화해와 평화를 말하면서 비현실적인 입장에 있는 것만큼 대화와 평화운동에 장애가 되는 것도 없을 것이다.

종교평화운동은 실천과 이론이라는 두 바퀴가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건강하게 전개될 수 있다. 종교 간 갈등이 갈수록 더욱 첨예해진다는 것은 종교 간 대화운동의 사상적 이론을 제공하는 지성 그룹이 실천의 주체가 되어야 할 교단과 신자들로부터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유리되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1992년 감리교단의 변선환 교수 출교(黜敎) 사건은 선험주의에 빠진 대화신학이 보수화된 한국의 기독교회를 대화의 장으로 끌어내는데 철저히 실패했음을 나타내는 하나의 상징이다.

이론 그룹이 방향을 잘못 잡으면
신자들은 상처를 입고 혼란과 격정에 휩싸일 수밖에
기독교의 실패경험 타산지석으로 삼으라!

그런데 유사한 상황이 20여년이 지난 지금 한국불교계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론 그룹이 방향을 잘못 잡으면 실천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 해당 교인들은 상처를 입고 혼란과 격정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아쇼카 선언문의 작성자들과 화쟁위원회는 이 점을 명확히 인지해야 한다. 기독교의 실패 경험을 불교가 되풀이해선 안 된다.

오늘날 종교 간의 대화와 화합은 피할 수 없는 시대적 과제다. 일그러진 모습 그대로, 더 이상 하려고 한다고 되고 꺼린다고 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이다. 하여, 이른바 ‘21세기 아쇼카 선언문’의 초를 하기까지 고뇌의 일단을 짐작 못하는바 아니다. 그러나 1700년 불교사에 한 획을 긋는 작업이 아닌가? 불과 몇 사람이 손발을 맞추고 승가와 불자 대중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무엇이 그리도 급하여 초안에 불과한 미숙아를 서둘러 세상에 내보내었던가.

하나의 봉우리에 오르는 여러 갈래의 길이 아니다!
불교를 그렇게 남이 만들어 놓은 좁은 틀 속에 가둬 두려고 해선 안 된다.
각기 제 나름의 개성과 독특한 아름다움으로 빛나며 어울리는
일만이천봉우리의 화엄세계에서 노닐 일이다.
그것이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다원주의에 부합하는 것일 터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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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자 2011-09-19 10:40:30
아쇼카선언 초안을 만든 사람중 하나가 조성택 교수다.
그의 글은 부실한 초안에 대한 합리화일 뿐이었다.
"앞으로 계속 대중공사로 논의하기 위한 초안이었단다, 부실한 대로 초안 만들고
대중공사로 가감첨삭을 통해 완전무결한 안을 만들 작정으로 발표했단다"

내가 보기엔 화쟁위에 참여한 사람들 스스로는 자기들인 만들어 놓은 안에 도취되어 있었다.
서둘러 발표하면서 굉장히 뿌듯해 했다. 초안이 몰고올 파장은 아예 생각지도 않았다.
불교가 가장먼저 '훌륭한' 선언을 했다는 자부심을 획득하려는 그 조바심,
화쟁위가 종단내에서 하는 일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이냐, 하는 그 자위로 인해
수작(사실은 졸작)을 급히 발표한 것이다.

불자들까지 조목조목 반박해 버렸다.
무아를 가르치는 부처님 법과 유아(유일신)적 가르침인 기독교가 동등한 진리를 가졌다는 화쟁위 논리가 무참히 박살이 났다.
자기들도 뻘쭘했으리라, 그러니까 종교다원주의 내놓고 종교간 평화를 위한 좋은 취지였단다.
자기들 힘으론 도저히 안되니까, 한형조교수 조성택교수가 납시어 옹호론을 펼쳤다.
왜 스님들이 직접 반박을 못했을까,
논쟁은 고매한 스님들이 하기엔 쪽팔리는 일이었을까. 실력이 없어서 였겠지.

한형조, 조성택 교수는 반박논리를 애써 외면한다.
그들은 반박하는 자들(법응스님등)이 불교를 교조주의, 도그마화 한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하지만 반박하는 자들의 포인트는 그게 아니다.
반박하는 자들 가운데 화쟁위의 평화선언에 실린 종교간 평화를 싫어하는 자는 없다.
옹호론자들은 반박론 자들을 불교우월주의에 빠졌다는 식으로 논리를 펼치고 싶어 전전긍긍한다.
그렇지만 대놓고 말하지 못하고 그저 변죽만 울릴 뿐이다.

반박론자들(법응스님등)은 불교를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라는 것이다. 왜 종교간 평화 운운하면서 불교를 깍아 내리고 상대종교를 치켜 올리냐는 것이다. 진리란 그런식으로 수정할 대상은 아닌 것이다. 석가모니 붓다는 창조자인 신, 영혼, 아트만..모두를 부정했다. 그런 것은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석가모니 입장을 누구보다 대변해야 하는게 스님이다. 그런데 창조주를 가르치고 그 인격신(있는지 없는지 확인도 안되는)에게 모든 것을 바쳐야 하는 미신적 종교가 진리다 라고 말해 버리면 석가모니는 어쩌란 말인지.

화쟁위는 교리 빼고도 "종교간 평화" 얼마든지 얘기할 수 있단걸 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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