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간 평화라는 거대담론은 대체로 긍정하면서도 기독교의 핵심교리 중 하나인 창조론을 사실상 인정하고 종무회의에서조차 '오쇼카 선언'이라는 명칭을 포함한 내용의 수정 검토를 지시했음에도 초안을 언론에 그대로 발표해버렸다는 지적이다.
조계종 총무원 등에 따르면 최근 종무회의에서 '종교선언'에 대한 보고를 받고 내용 검토의 필요성을 지적하고 10월께 종단 명의로 공식발표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그런데 화쟁위원장 도법 스님은 지난 23일 기자회견에서 초안을 그대로 발표해버렸다.
공개된 초안은 우리 사회에서 다양한 종교가 상호존중과 호혜의 정신으로 보다 조화롭게 공존하기 위한 불교인들의 반성과 실천, 다짐 등을 주 내용으로 하고 있다. 선언문은 △총론 △종교평화를 위한 불교인의 입장과 실천 △불교인의 서원 등으로 구성됐다.
총론은 종교간 갈등상황에서 불교인들이 이웃종교를 진정한 이웃으로 생각하는데 충분하지 못한 점을 반성하고 있다.
불교인의 입장과 실천 부분에서는 △열린 진리관 △종교다양성의 존중 △전법과 전교의 원칙 △공적 영역에서의 종교활동 △평화를 통한 실천 등의 구체적인 기준과 실천지침을 세분화했다.
불교인의 서원 부분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소중히 여기는 만큼 이웃종교의 가르침도 소중하게 여기겠으며 이웃종교인과 더불어 고통받고 소외된 모든 생명들의 행복을 위해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겠다는 다짐과 서원을 기술했다.
문제는 선언문 내용에서 기독교의 창조론을 인정하는듯한 대목이 여럿보인다는 점이다.
<불교와 정책> 법응 스님은 "아무리 초안이라 해도 상대 종교의 교리 자체인 창조론을 인정하고 연기법을 부정하는 인상을 주는 내용은 자칫 아무종교나 믿어도 되며, 불교의 포교를 무력화하고 불교인으로서 신심의 자부심을 뭉개는 내용이 다분하다"고 분석했다.
법응 스님은 "특히 '나의 종교가 우주 전체를 담고 있듯이 상대의 종교 또한 우주 전체를 담고 있습니다'라는 선언문의 대목은 연기관과 창조론을 혼돈케하는 대표적 사례다"며 "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 창조론도 하나의 무명에 불과한 번뇌라는 규정이 가능하다는 것을 선언문에서 놓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총무원 관계자는 최근 종무회의에 '아쇼카선언'이라는 제목을 문제삼았고, 화쟁위 관계자는 이를 수정하겠다고 했으나 기자회견에서는 원안대포 발표했다고 주장했다.
이 관계자는 "아쇼카왕은 수도 파탈리푸트라를 공격해 다른 왕자들을 모두 죽였고, 즉위 후 10여년 간 정복왕으로 이름을 날렸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며 "따라서 당시 종무회의에서 아쇼카선언이라는 명칭의 부적절성을 지적하고 시정을 요구하자 화쟁위 관계자는 수정하겠다고 답변했으나 지켜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법응 스님은 "불교가 무엇인지 주장하려면 역사나 현실을 부정할 필요는 없으나 완벽해야 한다"며 "아쇼카왕의 관점에서 볼 때 참회하고 선을 베풀어 모든 것이 다 해결된다면, 지금 상황에서 살육의 독재자도 인정해야 한다는 결론이 가능하다. 설령 그것이 진리에 맞다 해도 공개선언할 일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종무회의에서 초안을 보고받을 때도 여론수렴과정을 거쳐 오는 10월께 종단명의로 발표키로 했으나 회견에서 초안을 공개한 것은 종단 정서나 절차에 벗어났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총무원의 또 다른 관계자는 "화쟁위 내부 검토회의를 거친 것은 사실이나 공개적으로 발표할 때는 원로회의 중앙종회 등의 합의과정이나 설명을 거쳐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항변했다.
이 관계자는 "또 검증이 덜된 초안을 공개해 언론에서 대서특필해버렸는데 실제 종단 차원에서 10월 발표시 맹숭해질 수밖에 없다"며 "종무회의의 검토지시도 왜 화쟁위가 무시했는지 이해되지 않는다"고 힐난했다. 그는 "지엽적인 문제제기라는 반발도 있을 수 있지만 대국민 선언은 우선 내용면에서 완벽해야하고 내부고객인 불자들을 먼저 설득해야 한다는 점에서 창조론 문제 등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부분적인 내용과 절차상의 흠결등에도 불구하고 종교간 평화를 공개적으로 불교계가 먼저 선언했다는 데는 긍정하는 입장이 우세한 편인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