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한 번 들이 마시고, 마신 숨 다시 내뱉고
가졌다, 버렸다, 버렸다, 가졌다,
겨우 그것이 살아있다는 증거라네
그러다 어느 한 순간,
들여 마신 숨 내뱉지 못하면
그게 바로 죽는 것이지.
어느 누가 그 값을 내라고도 하지 않는 공기 한 모금도
가졌던 것 버릴 줄 모르면 그게 곧 저승 가는 것인 줄 뻔히 알면서도
어찌 그렇게 이것도 내 것, 저것도 내 것,
모두가 내 것인 냥 움켜쥐려고만 하시는가?
아무리 많이 가졌어도
저승길 갈 때는 티끌 하나도 못 가져가는 법이라네.
쓸 만큼 쓰고 남은 것은 버릴 줄도 아시게.
자네가 움켜쥔 게 웬만큼 되거들랑
자네보다 더 아쉬운 사람에게 자네 것 좀 나눠주고
그들의 마음 밭에 자네에 대한 추억의 씨앗 뿌려,
사람들 마음속에 향기로운 꽃 피우면
천국이 따로 없다네, 극락이 따로 없다네.
삶이란 한 조각 뜬구름이 불어감이요,
죽음이란 한 조각 뜬구름이 사라짐이라.
그러나 뜬구름이란 본래 실체가 없는 것이니
나고 죽고 오고 감이 역시 그와 같다네.
스님께서는 시문(詩文)에 뛰어나 대부분의 법문을 시의 형태로 꾸며 설법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스님의 시는 그 형태가 아름답고 진솔하면서도 사물을 보고 느끼는 성찰력이 뛰어나 후대의 문장가들 가운데 스님의 시에서 영감을 얻는 사람이 부지기일 정도다.
천상병 시인의 대표작인 ‘귀천’도 스님의 열반송 가운데 ‘삶을 내 것이라고 하지 마소. 잠시 머물다 가는 것일 뿐인데 묶어둔다고 그냥 있겠소?’ 라는 구절을 풀어쓴 것이라고 고백한 바 있다.
스님께서는 지방 관리를 지낸 양반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과거공부에 전념하여 신동소리를 들을 만큼 성취도가 뛰어났다. 겨우 12살의 어린 나이에 성균관에 들어가 문무를 익히고 15세 되던 해에 과거를 보았으나 낙방하고 만다. 당시의 조정은 부패할 대로 부패하여 아무리 재주가 출중해도 뇌물을 주지 않고서는 과거에 급제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스님은 뒤늦게 이를 알게 되었지만, 혼탁한 세상의 벼슬아치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삼계의 스승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불교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스로 머리를 깍고 전국을 떠돌며 공부에만 전념하여 승과(僧科)에 합격하고 대선(大選)을 거쳐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스님은 승직을 맡는 일조차 승려의 본분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그 자리마저 버리고 수행과 후학양성에만 전념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국에 격문을 보내 의승군(義僧軍)을 모집하여 왜군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우셨다.
이에 선조임금은 스님의 전공을 치하하며 승려로서의 최고 직인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에 임명했으나 제자인 사명당에게 물려주었다.
선조가 다시 스님을 불러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라는 존칭과 함께 정2품 당상관의 작위를 내렸지만 ‘승려에게 벼슬은 온당치 않다.’며 묘향산의 작은 암자에 은거하다 입적에 드셨다.
나라에 큰 공을 세우고도 티끌만한 욕심도 취하지 않은 채 오로지 수행에만 정진하며 제자양성에 전념하셨던 서산대사의 삶, 이것이야말로 불제자의 본분이자 무욕의 불교정신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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