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 대모' 두 손은 가냘펐지만 따뜻했다

집행부, 박병선 박사 문병 "원장 스님도 곧 위문키로"

2009-11-14     이혜조 기자

노(老) 박사의 손은 따뜻했다. 직지(直指)를 찾아 수 많은 자료를 찾아 뒤지고 연구논문을 작성했던 그 손은, 그러나 가냘프고 무척 야위었다. 파르르 떨리기까지 했다.

박병선 박사가 직지를 처음 찾아낸 것은 1972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였다. 1955년 프랑스로 유학가 소르본대학과 프랑스 고등교육원에서 역사학·종교학 박사를 받고 68년부터 13년동안 이 곳에서 근무한 재원이었다.

그가 밝혀낸 '직지심경'은 1455년 구텐베르크 '성서'보다 78년 앞선, 세계에서 가장 오랜된 금속활자본이자 '불경'이었다. 그는 이후에도 연구에 심혈을 기울이며 직지를 가슴으로 안고 세상에 알렸다.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한 것도 결국 그의 간절한 원력 덕이었다.

그런 그가 지금은 여느 노인들과 다름 없이 시름시름 앓고 있다. 이 위대한 학자도 생주괴멸은 피할 수 없었나 보다. 부처님은 생노병사가 진리라고 설하지 않았나.

영상에서 영하로 수은주가 급강하한 14일 수원 가톨릭의대 성빈센트병원에서 그를 만난 시간은 오후4시 30분. 직장암4기 진단을 받고 방사능치료 중인 그를 4명의 스님과 <불교닷컴> 취재진이 위문했다.

그의 음성은 또렸했다. 사진을 찍지 말라고 취재진에 정중하게 요청도 했다. "앓아 누운 내 모습을 아는 이들이 보는 게 마음 아프다"는게 이유였다. 보살이었다. 학자로서의 자존심이기도 했을 터다.

가톨릭신자이면서도 그는 스님들의 방문을 무척 달가워했다. "고맙습니다"고 세 차례 말했다.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을 집에 꼭 모시라고 많은 불자들에게 권유했습니다. 저도 한동안 지장보살상을 참 많이 모아 많은 분들에게 나눠줬습니다. 제가 가톨릭신자인데 말이죠"라며 그는 웃었다. 미소는 엷었다.
 

가장 먼저 그이의 손을 잡은 조계종 문화부장 효탄 스님은 "박사님!. 2000년 초 청주에서 직지 세미나 때 뵜는데 기억하시는지요? 그 노력으로 직지는 청주의 얼굴이 됐습니다. (소문으로)듣기보다 건강해 보이고 그 때 그 모습, 그대롭니다"라고 했다.

박 박사는 "알고 말고요. 고귀한 분들이 찾아주셔서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고 화답하며 스님들에게 합장했다.

호법부장 덕문 스님은 "총무원장 자승 스님이 일정을 잡아 따로 찾아뵙겠답니다"고 전했다.

박 박사는 "(원장 스님의 문병은)매우 감동적으로 생각합니다. 현재 (치유)성과가 좋다고 합니다. 2주일 뒤에 CT촬영 결과에 따라 수술 여부를 결정합니다. 그 전에는 방사선 치료를 할 겁니다"고 현황과 일정을 인문학자답게 차분하면서 섬세하게 설명했다. 삶에 대한 강한 의지도 엿보였다.

효탄 스님은 "의지를 갖고 기도를 많이 하십시오"라고 주문했다. 사회부장 혜경 스님은 "박사님은 불교계의 큰 은인입니다. (박사님의 쾌유를 위해)열심히 기도하겠습니다"라고 위로했다.

호법부장 덕문 스님은 눈시울이 축축해진 채로 박 박사의 손을 다시한번 꼬옥 잡았다. 덕문 스님은 "조만간 총무원장 스님 모시고 찾아뵙겠습니다"고 말했다.

박 박사의 건강을 염려해 10여분만에 끝난 면회 끝에 효탄 스님은 부실장 스님들이 십시일반한 금일봉을 가족들에게 전달했다.

총무원은 곧 박병선 박사의 쾌유를 기원하기 위해 종단 차원의 모금운동을 전개할 것으로 알려졌다. 박 박사가 원할 경우 동국대측과 논의해 무료로 동국대일산병원에서 치료하는 방안도 강구 중이다.

프랑스에서 생활하던 박 박사는 해마다 해오던 청주 직지축제에 참가하던 중 지난 9월 암 판정을 받았다.

짧은 문병을 마치고 병원 문을 나서자 한겨울을 연상케하는 추위가 엄습했다. 겨울은 봄의 전령. 박 박사가 완치되고 직지가 한국 불교계로 되돌오는 '봄날'이 머지않은 것 같다는 느낌이 오롯했다.

호법과장 법상 스님을 포함한 4명의 스님 등 총무원장 신임 집행부는 이날 새벽3시 서울을 출발, 해인사에서 종정 예하를 예방하고, 오후에는 청주 보살사에서 원로회의 의장 종산 스님에게 문안 인사를 했다. 이어 수원 성빈센트병원에서 박 박사를 위문한 뒤 서울에서 열린 포교결집대회에 참가하는 강행군을 마다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