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종교 참사

[칼럼] 김경호 운판 대표

2022-12-29     김경호 운판 대표

윤석열 대통령이 12월 25일 서울 성북구 영암교회의 성탄 예배에 참석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법학을 공부해보니 헌법 체계나 모든 질서, 제도가 다 성경 말씀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됐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문명과 질서가 예수님의 말씀에서 나온 것이다.“

당황스럽고 기가 찬다. 절에 가면 불교와 인연 있다 주장하고 교회에 가면 대형교회 목사들의 안수를 받으며, 이른바 천공이라는 사이비를 따르는 것이야 저마다 취향이니까 그러려니 한다. 그러나 대통령이라는 공적 자리에 있으면서 공식 행보 도중에 특정종교를 옹호하는 이런 말을 한 것은 심각하게 위험하다. 

법중의 법 헌법 어느 구석에 성경과 예수님의 말씀이 나오는지 궁금하다. 차라리 민족문화 전통에 입각하여 유교나 불교정신을 이야기했다면 그나마 봐줄만하다. 

대한민국 대통령은 취임할 때 다음의 선서를 한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그리고 대통령이 준수해야 할 헌법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ㆍ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ㆍ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한다고 말하고 있다. 

또 헌법 제1조 1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국가정체를 밝히고 있다. 민주주의와 공화정은 그리스 로마로부터 이어온 전통이며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과는 관련이 없다. 이어지는 2항에서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하여 성경에서 주장하는, 신으로부터 부여받는 권력을 처음부터 부정한다. 그렇다면 윤석렬 대통령의 주장은 자신이 준수해야 하는 헌법을 1조부터 부정하는 국기문란행위가 아닐 수 없다.

기독교 명절에 기독교인의 지지를 얻겠다는 얄팍한 계산이 깔렸더라도 공인에게는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이 따로 있다. 국가 최고권력자가 자신들을 지지한다고, 가뜩이나 배타적이고 폭력적으로 타종교를 공격하는 기독교가 착각할 수 있다. 불교도들의 인내로 간신히 유지되고 있는 다종교사회의 평화가 종교분쟁으로 비화될까 두렵다.

윤석렬 대통령은 "이웃을 사랑하고 실천하는 것이 예수님이 세상에 온 뜻을 구현하는 길일 것"이라며 "목사님 말씀대로 대통령으로서 저도 제가 할 일을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겠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엄동설한에 거리에서 진상을 밝혀달라 호소하는 이태원참사 희생자 가족을 외면한 채 크리스마스 점등식에 참석해 환하게 웃으며 술잔을 사는 것이 이웃사랑인가? 북의 무인기가 서울 상공을 휘저어도 한 대도 격추시키지 못하는 국방참사가 벌어지는 것이 자기 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자세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사랑이나 자비는 고등종교가 가지는 보편적 가치다. 기독교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원리주의와 테러로 비난받는 이슬람조차 인류적 형제애를 강조하고 있다. 오히려 각종 분쟁에는 성경을 내세운 종교전쟁이 많았음을 역사는 말하고 있다. 

이번 겨울의 혹독한 한파는 기후위기의 징후라고 한다. 게다가 러-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국제원자재와 에너지 값이 폭등하고 있다. 추위와 고물가의 피해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부터 받는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증오나 복수가 아니라 위로와 사랑이 절실하게 필요한 한겨울이다.